< 553화 > 자색 마탑 (1)
이 세계에는 ‘법사의 눈치는 10년을 넘본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법사는 그만큼 사악하고 꾀가 많은 인물이기에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여러 마법사가 대면할 때에도 똑같았다.
푸른 마탑, 이지아와 같은 한국 출신인 신지훈이 그녀의 말에 가장 먼저 대답했다.
“이제 와서요? 그때 이미 끝난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머리 좋은 이들이 한곳에 모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끝없는 두뇌 싸움이 일어난다.
공익을 위해 마련된 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입지를 올려보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린다.
뜯어먹을 게 많은 요즈음엔 더더욱 보이지 않은 싸움이 일어나는 법.
마탑은 세계를 풍족하게 하는 연구 기관과 동시에, 전시에는 민간 군사 기업(PMC)의 역할을 동반하며, 사사로운 던전 공략에도 임해 그 권력의 범위가 매우 방대했다.
“이제 와서요? 부르기에 오긴 했다지만… 고작 그런 이유라니.”
“자색 마탑은 진전된 연구도 없고, 간부를 포함해 사람도 많이 빠져나갔지요?”
이번에도 그녀를 물어뜯으려는 사냥개들이 눈에 불을 켜대기 시작했다.
자색 마탑이 강등 시, 다른 마탑이 승급될 기회를 얻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어요.”
이지아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무시한 채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주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그 담대함은, 왜 그녀가 사회 초년생의 어린 나이에 마탑주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를 반증했다.
“작년에 비하면 간부의 수는 45%가량 줄었고, 연구 결과도 저조하죠. 다만, 간부의 수가 줄은 건 우리 마탑만의 문제가 아니고요.”
전시이기 때문에 마탑주의 사망이나 장애. 인원 부족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연구 결과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 때문에 많은 전투원을 차출할 필요가 있었죠.”
“다 아는 소리를 왜 합니까? 그건 다른 마탑도 똑같죠.”
신지훈의 신경을 긁는 목소리에 이지아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지훈씨.”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신지훈.
그는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집념, 주입식 교육으로 지아처럼 탑주 자리에 오르게 된 비슷한 신세의 한국인이었다.
같은 나라의 출신이기도 하고, 연구 협정을 맺은 적도 있어… 좋은 사이가 될 뻔도 했지만.
이지아가 단전을 잃은 후부터, 그녀가 내놓는 안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마탑간의 관계는 최악에 치달았다.
‘참.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사실을 전해듣길, 자색 마탑을 인수 합병할 기회라던가?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이지아는 남자에 대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사랑했다 시발놈아.’
금사빠가 이래서 문제다. 그리 생각한 지아가 내심 고개를 주억였다.
-툭툭.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적색 머리의 여성이 테이블을 두드린 뒤. 손을 들었다.
“실례.”
프랑스 출신의 마탑주, 적색 마탑의 주인, 엘라스티카가 차분한 표정으로 이지아를 바라보았다.
프랑스 고무나무(ficus Elastica).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옷차림의 그녀는, 땋아 올린 붉은 머리를 흔들며 지아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흠….”
엘라스티카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지어진다.
“저번 회의 때부터 쭉 들었지만. 너무, 구차하지 않아?”
순식간에 회의장을 싸늘하게 만들어버리는 발언.
아무리 공표되지 않은 모임이라고는 하나, 엄연한 마탑주들끼리의 자리다.
어긋난 매너는 차후의 자리에서 선입견을 남길 수도 있고, 직업 특성상 연구 결과를 나눠야 할 필요성이 있어, 아무리 적대 관계라도 일정 이상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구차하다… 잘못 듣진 않았죠?”
이지아의 날 선 반응에 다른 마탑주가 입을 다문다.
엘라스티카는 사이한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기울였다.
“응. 3성 마탑이면, 그만한 실적을 갖춰야지. 지금껏 강등당한 마탑은 뭐가 되는데?”
“…그걸 말씀드리려고 이 자리에 부른 것 아닙니까.”
“강등 공표 며칠 전에? 자색 마탑은 기세가 죽은지 오래야. 연구원도 보잘 것 없는 어린 애들 뿐이고. 간부는 죽거나,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지.”
실제로 얼마 전, 간부 다수가 훨씬 높은 연봉에 팔려 적색 마탑으로 이직했다.
엘라스티카의 견제가 효용을 본 것이었다.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겠어?”
“덕분에 고배를 좀 마셨어요. 엘라스티카님.”
엘라스티카는 이지아의 사나운 목소리에 태연하게 잔머리를 정리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신지훈도 헛웃음을 뱉었다.
끝났구나.
어떻게 뭘 해보기도 전에 분위기가 기울어졌다.
마탑주들이 그리 생각해 넘기려던 순간, 한 노인이 말을 이었다.
“정숙하고, 이야기를 들어보게나.”
대마법사. 아비(Ivy).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가 턱을 괴고 가장 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떤 마탑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지만, 한때나마 최고라 불리었던 여자.
최근 자리에 복귀한 그녀는 아카데미에 많은 자금을 보탠 후원자로 유명하기도 했다.
예전 대의 현자에 비하면 실력이나 지식도 한 발자국 밀리지만,
그 인품과 인자함에서 따라오는 권위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이번 대의 현자는 아직 미숙하니, 그녀의 생각은 별개로 아비가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며 칭송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탑의 강등은 쉬이 결단할 사항도 아니었으니. 저번에 좀 밀어붙인 게 컸어.”
아비의 말에 그 사나운 엘라스티카도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비가 턱짓을 하자, 그제야 이지아는 한숨을 거두고 본론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강등 사유가, 부실한 실적과… 적은 인력이라고 하셨죠. 인력은 차후 보충하면 되는 부분이고.”
“실적은?”
엘라스티카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이지아는 즉시 숨겨두었던 서류를 꺼냈다.
“이겁니다.”
-쿵.
묵직하게 떨어지는 백과사전 한 권 분량의 논문.
“예전 대의 현자가 남긴 공간 마법을 저희 식대로 해석하여, 실사용이 가능하도록 조정했습니다.”
“…뭐?”
이지아의 차가운 말에 엘라스티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자리에 앉아있던 마탑주들도 기겁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공간 마법?”
“잘못 들었지?”
신지훈의 뜨악한 표정이 얼빵해 보여서 보기 좋다. 이지아는 지훈을 보며 씰룩 입꼬리를 올리곤, 마탑연합의 회장. 아비에게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희 연구원들은 적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럴 리 없어.”
“왜죠?”
신지훈이 귀를 의심하며 이지아에게 말했다.
“확인해봐야 알 것 아닙니까? 막 던진 건지, 허위 신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요.”
마법사의 논문은 총 4단계를 걸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심사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이지아가 내놓은 논문은 실적이라며 인정될 일이 없었다.
하다못해 공간마법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며, 미시적인 수준의 마력 간 연결을 복잡한 식으로 엮어내어 가설을 제시한다면 모를까.
실사용이 가능한 이론?
이는 마법계에서도 그 기술의 시기를 몇 세기를 앞당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헛소리.”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는 엘라스티카와 신지후, 여러 마탑주들이 자색 마탑을 견제해왔기 때문이다.
많은 간부가 자색 마탑을 배신했고, 그들의 연구물 역시 훔치는데 성공했다.
‘그 많은 연구 중에 공간 마법에 관한 건 아무 것도 없었어.’
그 어떤 간부나 연구자도, 공간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서 그만한 연구가 사과처럼 톡 떨어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엘라스티카와 신지훈이 걸고 넘어지니, 이지아는 되려 신이 나 소리쳤다.
“보면 알 것 아닙니까?”
“…….”
“아비 회장님?”
이지아의 요청에 아비가 손을 쭉 뻗었다.
긴 곡선을 그리는 얇디 얇은 순백의 팔에, 지아가 내민 서류가 옮겨졌다.
“호오, 어디 보자…. 공간 마법은 현자 이래 처음 제시된 이론이란 말이지.”
현자가 내놓은 공간 마법은 이래저래 실사용이 불가능 했었다.
아티펙트에 세공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마법사 개인이 사용하는 건 여전히 복잡한 계산이 동반되어야 했고. 사람의 두뇌로는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현자의 제자로 유명했던 황도.
그녀 역시 이단으로 몰려 살해당했다.
그 두명을 제외하면 일부 서번트 증후군을 앓거나, 비정상적으로 두뇌 회전이 빠른 마법사만이 겨우 순간이동을 컨트롤 할 수 있었지만….
“흐음?”
논문을 차근차근 읽어내리던 아비가 눈썹을 기울였다.
이윽고 논문에서 고개를 들어올린 아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건 받아들여도 될 것 같네만?”
“회장님! 무슨, 전부 읽지도 않아놓고.”
“제법 흥미로운 관점으로 접근했구나. 훌륭한 시도고, 이만한 연구를 했다는 건 후원할 가치가 있지. 이 노인네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누가 이 지식을 제공했는 지가 궁금하지만….”
아비의 눈에 이지아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대마법사의 눈은 빗나가지 않는다. 아비는 이지아의 배후에 있던 인물을 확실하게 캐치해냈다.
“누구인진 몰라도, 좋은 연구원을 두었네. 나중에 함께 이야기합세.”
“…감사합니다.”
“자색 마탑의 연구진은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야. 어떻게 생각하지?”
아비의 말에 주변 마탑주들이 하나 둘씩 의견을 꺼내놓았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리가 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증명 단계 없이 실적으로 인정하는 건.”
“그 말도 맞습니다만, 끄응.”
그럼 증명을 해내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자네들도 한 번씩 보지.”
아비가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가 살짝 흐트러졌지만, 아무도 아비에게 복장에 대해 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끄응.”
“네, 한 번 봐야겠네요.”
마탑주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정리된 논문들을 하나둘씩 가지고 갔다.
얼마가지 않아 터지는 감탄사.
현자가 정립하고, 그 제자가 수정한 이론은 어떤 마법사가 눈에 담아도 황홀하고 아름다운 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비록 그 과정에 투박함이 엿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야 봐줄 수 있다.
초보적인 실수가 보여도 조금만 손을댄다면….
“잠깐. 왜 중간에 끊겨있죠?”
그때 한 마탑주가 손을 들어 말했다.
이지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에 대답했다.
“저희 마탑을 살릴 지식을 이렇게 쉽게 내놓을 순 없는 거, 아시잖아요?”
“…마탑의 비전으로 남겨두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전대 현자님의 말씀에 어긋납니다.”
“뭐죠? 전대 현자님이 말씀하셨긴 했죠. 자기 이론의 연구는 투명하게 공개해달라고, 다만 이 논문엔 개인적인 사견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식 역시도 다르게 정리했고, 관점도 달라요. 많은 걸 뒤바꿀 수 있죠.”
이걸 기업과 거래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릴 수도 있고,
그걸로 연구원을 채울 수 있다.
앞으로 있을 무수한 마탑과의 싸움에서 선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얻는 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걸 내놓는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만. 생색은 내줘야지.’
목령왕이 건넨 많은 이론들 중, 이지아는 몇 개를 분리시켜 가져왔다.
당연히 이걸 내놓는다고 해도 공간마법에 관한 아티펙트 시장을 선점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돈을 볼 수 있고,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데 익숙하다.
“자색 마탑의 비전은 이미 팔려나간지 오래죠. 새로운 비전을 남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궤변입니다. 결국 증명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궤변이든 아니든, 저희 마탑은 이제 강등당할 이유가 없어요. 밝히지 않은 비전 마법의 공개도 성과로 인정된 사례가 있었으니까….”
“그럼. 지금 여기서 사용해 보십쇼.”
“…….”
이지아는 거기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단전은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으니까.
“제 상태를 알고 하는 말씀이신지.”
“그쪽에서 말씀하신 선례는 비전 마법의 현상을 공개한 뒤였습니다. 고로 성과로 인정되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성과에만 눈을 둘 필요도 없습니다.”
한 마탑주와 이지아의 진흙탕 싸움에 보다못한 아비가 박수를 쳤다.
-짝.
“그럼 투표로 진행하지. 이번을 임시로, 그 다음은 증명을 마친 후에. 비전이 유출되는 게 걱정이라면 증명은 내가 하겠다.”
“회장님!”
“불만이 없어야 할 거야. 요즘 늙어서 눈이 침침하거든,”
아비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이지아의 논문 하나를 거두어갔다.
곧 이어 이어진 투표 결과.
자색 마탑의 운명이 정해졌다.
*****
“…죄송해요.”
이지아는 그때 있던 일을 모두 말한 뒤, 진심 섞인 사과를 뱉으며 내게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네가 사과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딱 한 표.
초등학교 학급 반장 선거도 아니고, 딱 한 표로 마탑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말인가.
이지아는 침울한 듯 어깨를 떨었고. 나는 참고 있던 말을 그녀에게 말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색 마탑의 엘라스티카?”
“…예? 아, 네.”
완전한 적대 세력이라 좋은 점. 저번에도 말했지 않았나.
무엇을 저질러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손목을 풀며 그녀에게 고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