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556화 (556/657)

< 556화 > 자색 마탑 (4)

-띠리리릭, 틱!

[적색 마탑주, 엘라스티카 +33…….]

벌써 네 번째 통화. 이지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엘라스티카님…?”

[아. 이지아님.]

그 싸가지 없던 여자가 내뱉는 존대. 등골에 소름이 확 끼친다.

“말투가 왜….”

[지난 무례를 사과드리려 연락… 했습니다.]

엘라스티카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다?

웃기는 소리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지아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 누구야.”

[부탁할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 주십쇼. 저희 적색 마탑은 앞으로도 이지아님을 적극 지원할 것임을…]

오싹-

“꺄아아악!!”

참다 못한 지아가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탁, 데구르르.

구석에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핸드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워, 워워워워!”

지아는 마치 크툴루를 육안으로 본 탐험가처럼, 바닥에 무릎을 모으고 주저앉은 뒤.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덜덜 떨었다.

“무슨, 무슨 짓을 당한 건데…?”

콩닥대는 심장을 쥐어짜며, 예전에 만난 엘라스티카의 말투를 떠올려본다.

-뭐? 뭘 봐?

-너는 평생 다다르지 못하는 곳에 내가 있어. 마법 실력에서도, 외모도.

싸가지 없지만 맞는 말만 하던, 개같은 년.

지아는 늘 그녀의 그림자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다.

행여나 두 마탑이 연합해 던전을 클리어하면 아티펙트 하나 챙겨줄 것도 못 챙겨줘, 어떻게든 우리 지분을 깎아내릴 생각만 하던 엘라스티카.

-왜? 꼬와?

적색 마탑이 더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기사가 퍼지면 큰일 날 말을 함부로 지껄이던 그녀였다.

‘그런, 그런 년이…. 뭐? 이지아님? 무례를 사과해?’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본 느낌.

차라리 목령왕이 선한 사람이라는 걸 믿는 게 편하겠다.

-웅! 웅!

이지아는 다시 울려대는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추위에 떠는 아기 여우처럼 호달달 몸을 비틀었다.

“호, 호오… 오호….”

너무 놀라서 입에서도 이상한 말이 튀어나온다.

이지아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가, 심장이 놀라 멎을 뻔했다.

“…지훈씨?”

푸른 마탑의 마탑주. 신지훈.

날 만날 때면 귀신같이 인색해지던 그 남자마저, 왕에게 당해버린 걸까?

-크크. 지아씨. 저 이 지팡이 갖고 싶어요.

이지아는 예전에 보여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휴우. 여, 여보세요?”

[지아씨….]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고문이라도 당한 양 몹시 쉬어 있었다.

“지훈씨, 지금 어디에요? 뭘 당하고 있는 거예요?”

[…미, 미안해요.]

기력이 쪽 빨린 어투로 연신 내뱉는 사과.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 게요. 흑, 흐윽.]

자기 잘 난 줄만 알던 그 남자, 나에게 사주는 커피 한 잔이 아까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던 그가 서럽게 울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왜, 왜 사과하는데요?”

[이젠 안 건들게요… 그거면 되잖아요?]

“뭐가 됐는데…?”

[자, 자수할게요.]

“무슨?! 아니 지훈씨!! 히이익!”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여러번 이어지더니 이지아는 결국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뚝.

“…….”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세상이 멸망하는 걸까?

꺼진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던 지아는 마침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다.’

-홱!

핸드폰을 다시 집어 던진 지아. 그녀는 즉시 침대에 누워, 베개에 코를 박았다.

아무리 목령왕이라도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 저 싸가지 없는 둘을 교화할 생각을 하는가.

공포에 질려 떨었고, 눈물까지 훔쳤다.

이지아는 이불 안에 쭈그려 숨죽인 채. 자꾸만 전화가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전화는 점심 시간이 지났음에도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거기서 뭐하냐.”

조금 늦은 오후 4시.

자색 마탑에 복귀하니 이지아가 이불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이글루에 웅크려 누운 물개를 보는 느낌일까.

“대, 대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물개는 방 안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그 둔중한 몸을 뒤채더니, 빼액 소리를 쳐왔다.

“무슨 짓을 저지르다니?”

“전화가 얼마나 많이 온 지 알아요…?”

“각오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둘이 죽는 것 정돈 각오했죠! 아무리 좀 말을 섞어 봤어도…. 찜찜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수준이 아니었잖아요.”

정상적인 부문을 넘어서긴 했다. 이게 일반인의 반응이긴 하다.

아오리의 체감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을 말이지만, 이번만큼은 이지아의 말에 동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이지아는 잔뜩 쫀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따먹었어요?”

“….”

“신지훈도!?”

“닥쳐라.”

“…웁.”

내가 아무리 힘에 미쳐도 남색은 안 한다.

정신머리가 없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이지아의 입을 가볍게 틀어막는다.

버둥거리던 지아가 내 손에서 입을 떼어내곤, 푸하-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아는 애를 시켰어. 아마 다시는 네 앞을 막지는 않을 거야. 되려 도움을 주려 하겠지.”

“두려워요.”

“그건 됐고, 전에 계약한 대로 정보를 받지. 시작은 지금이야.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열람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요령껏 해.”

이지아는 충분히 내가 요구하는 것을 이룰 재량이 있는 인물이다.

마탑이 제 2, 3의 세력에 협력하는 거야 요즘 세상에는 일도 아니고.

언젠가 토벌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마탑 전체를 합병하면 될 노릇이다.

“네. 하지만 저 혼자 행동하는 거라, 다소 일이 늦어질 순 있어요.”

“저번에 말한 던전 건을 최우선으로 진행해.”

자색 마탑의 침식은 아주 오랜 기간을 걸쳐 이루게 할 것이다.

최종 목적은 마탑 내의 모든 마법사를 우리 편으로 들일 수 있도록.

정확하게는 우리 편으로 채워놓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싹이 있는 애들을 몇 보내지. 마탑의 마법사로 키울 수 있겠지?”

“…네?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나중을 기약하는 거지.”

지금 내가 사는 곳에는 반반한 교육 기관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초등 교육이니 중등 교육이니 할 것 없이, 수녀의 말씀이나 성장의 세계수의 훈도(薰陶)로 조금씩 윤리를 주입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다.

‘기술자나 마법사, 학자를 기르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 마탑의 협력을 구하는 게 옳아.’

마침 상황도 알맞다.

“자색 마탑은 간부부터 직원까지 수가 매우 적다고 하였지.”

“아, 네…. 하지만 이번에 3성 마탑의 이름을 지키게 되었으니. 금방 다들 돌아올 거예요.”

“또 배신 당하려고 작정했어?”

“윽…. 배신이 아니에요.”

“그럼?”

돈에 현혹되어 자색 마탑의 연구물을 넘기고 도망간 건 사실이다.

그게 배신이 아니면 뭔가.

이지아는 손가락을 꼬물대며, 그녀를 배신한 사람들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제가 급여를 줄 능력이 안되어서니까. 등 돌리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그럼 돈만 받고 나가야지. 연구물을 파는 게 아니라.”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마음이 너무 약하네.”

윽.

신음을 낸 이지아가 고개를 숙였다. 면목없는 말인 건 아는 모양이었다.

“잔정이 많은 성격은 별로인데.”

“…열시미 할게요.”

“한 번 배신한 놈은 들여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

“…윽, 넹.”

왕의 땅에는 나름대로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난 녀석들이 있으니, 키우기만 한다면 즉시 전력으로 사용해도 될 거다.

어떤 의미로 보면 내 사람을 쓰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리 말하니 이지아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어왔다.

“왜요?”

“중국은 기회의 땅이지.”

아무리 짱깨 짱깨 하지만, 인적 자원의 양만은 차원이 다르다.

국가가 멸망하며 힘없고 멍청한 사람은 죽어버린 지 오래.

남은 사람은 13억의 인구 중 몇 차례에 걸쳐 살아남은 타고난 이들이다.

내가 거들어 세력원으로 삼은 이들 역시, 범인보다 훨씬 생명력이 높은 놈들 뿐이었고. 애당초 마물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아남은 민간인을 평범하다고만은 부를 수 없을 테니까.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상관 없는데… 혹시, 신분같은 건 저희가 직접 마련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날로 먹는 거지.”

“…앟. 말한대로 할게요. 하지만 말씀을 들어보면, 시간이 지나면 제 부하들은 전부 내보내야 한다는 말씀 같은데….”

“싫나?”

“음. 아뇨, 그래도 제 가족같은 사람들이거든요. 목령왕님.”

“그럼 직접 설득해야지.”

이지아는 풀이 죽은 듯, 힝…. 고개를 숙인 채 주억거렸다.

그래도 이것만 지켜준다면, 자색 마탑은 훨씬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 사회의 마탑 시스템은 폐단만 몇 개 좀 겹치면 나도 썩 좋게 보고 있다.

세계수와 플라워를 뒤집어 엎은 뒤라도, 시스템만은 쭉 유지해나갈 예정.

그 주축이 자색 마탑이 되었으면 한다.

“…그 말은. 결국 전 목령왕님의 손에서 못 벗어난단 이야기네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나?”

“대충은.”

어쩔 수 없죠. 하하 웃어 넘긴 이지아의 미간에 고뇌가 서린다.

“그럼, 정보를 찾는 즉시 연락해라.”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던 순간.

뒤늦게 손을 뻗은 이지아가 내 옷자락을 잡아챘다.

“아 그리고. 목령왕님에게 관심을 가지던 사람이 있어요.”

“누구?”

“마탑 연합의 회장님…. 아니. 대마법사라고 말하는 편이 알아듣기 좋겠네요.”

“대마법사라면?”

“아비. 아마 던전에서 썩어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현 지구상 활동하는 마법사 중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목인일 거예요.”

가장 오래 산 목인이라.

왜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내가 턱을 짚고 생각하니, 이지아가 그 생각을 읽고 정정해주었다.

“아니, 말을 잘못했네요. 정확히는, 제 뒤에 있는 목령왕님을 눈치채고 있었어요. 경계하고 있었고요.”

“…그런 의미였나.”

“네.”

날 경계하는 사람이 한 둘이어야지.

다만, 대마법사라면 나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무궁보다 먼저 일선에서 물러나 내가 활동할 시기엔 이름을 접할 일이 없었지만.

네임드만 따지자면 무궁과 비슷한 정도.

철저한 국익 우선론자인 무궁에 비하면, 조금 더 평화에 이바지하는 인물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빨이 빠진 무궁과 같은 선상에 놓아두면 될까. 나를 경계하고 있다고 하니, 수틀리면 처리할 생각도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찾던 정령술사랑 이름이 똑같은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나는 머릿속 한구석에 그 이름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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