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558화 (558/657)

< 558화 > 소메이요시노 (1)

[정말 괜찮은 거야? 혼자서 가도 되겠어?]

한국의 국목, 김수연의 걱정에 사쿠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수연상. 걱정 마라니까요? 요즘 다들 하는 거라니깐.”

[아니 그건 아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정령산이잖아.]

“하아. 수연상. 수연상이 제 마마니에요?”

[사쿠, 마마니가 아니고 어머니.]

“엣. 헤헤…. 머쓱타드에요.”

[…제발 인터넷에서 이상한 농담 배워오지 마.]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 사쿠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평소에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기 때문에 자신조차 보기 힘든 얼굴.

아이 시절엔 거울이 없는 방에서 자라왔고, 3살부터 가면을 써왔기 때문에 혈족이 아닌 이들 중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요시노 사쿠.

요시노의 벚꽃에서 유래된 가문이니만큼, 사쿠는 동 세대 중 가장 무성한 벚나무이다.

그 꽃말이 【 아름다운 정신 】.

마음을 절대 외면으로 드러내지 않고, 순전무결한 신체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에.

사쿠는 자신의 얼굴 위에 여우 가면을 덧씌웠다.

흰 피부 위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신묘한 눈동자가 가면에 의해 가려졌다.

자애로운 인품과 상냥한 성격으로 유명한 사쿠.

그 인품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은 오늘도 가려진 채. 던전에 나선다.

[아무튼… 가문의 선택이라니까. 어쩔 수 없긴 하겠네.]

“수연상 걱정해준 건 고맙지만, 이런 건 아침밥을 먹기 전(あさめしまえ)이나 다름없어요. 한쿡어로 말하자면, 식은 떡 먹기!”

[식은 죽 먹기. 식은 떡을 왜 먹어?]

“에.”

피식-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수연의 웃음 소리에 사쿠는 엷은 미소를 띄웠다.

“수연상.”

[응.]

한국과 일본의 국목.

반도와 섬나라, 이 둘의 정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은, 이 두 사람이 친한 것도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다.

역사적으로야 서로 부딪힌 이력도 많고. 어쩔땐 집어삼킨 적도 있다지만. 과거가 무슨 상관인가.

오늘날엔 같은 친 세계수 국가로서 국민 간의 관계도 썩 나쁘지 않았다.

텁텁한 이 세상에 사람들끼리 웃고 지내는 순간이 오길.

사쿠의 바람이었고, 수연과 사쿠는 양국의 분쟁을 해소하는데 분전했다.

서로 양보하는 정치 양상. 오늘같은 대외 정치에는 볼 수 없는 현상 덕분일까.

세계적으로도 수연과 사쿠는 긍정적인 국목 시스템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고 있었다.

“고마워요, 헤헤.”

[뭐래 갑자기…. 간지럽게.]

딱딱한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고마움을 간직한 사쿠.

사쿠는 오늘부터 일주일간 던전 공략에 집중하게 된다. 요시노 가문이 관리하는 벚꽃산. 정령술의 극의를 깨달을 수 있다는 역대 최고 난이도의 던전을 말이다.

당연히 공략 중에는 연락할 수 없다. 일이 잘못 풀린다면 건강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열시미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응. 몸 조심해.]

사쿠는 핸드폰을 닫고, 어두운 제단 안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여우 가면 속 빛나는 사쿠의 무지개색 눈동자.

후리소데(기모노의 일종)을 입은 사쿠가 일본주를 담은 잔을 들어, 이를 제단에 바쳤다.

그녀의 머리색 만큼 붉은 치맛단이 들어올려지며. 한쪽이 푹 파인 흰 양말이 드러났다.

-드르륵.

제단에서 던전까지 향하는 문이 열린다.

지금부터 사쿠는 3시간에 걸쳐, 가문의 건물을 순행하며 법식에 따라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딸랑, 딸랑.

방울이 달린 홍등이 흔들린다.

많은 가문인들이 봉을 들고 그녀의 길을 지켰고. 사쿠는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천천히 그곳을 걷기 시작했다.

“다들, 안녕하신지.”

“옙!”

어리숙한 한국어가 아닌 또렷한 일본어.

시야의 한쪽 구석엔 그녀의 가족이 자랑스럽단 얼굴로 사쿠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국목의 책임감.

원래대로였다면 그녀의 언니가 맡았을 이 자리는, 이제 완전히 사쿠의 것으로 뒤덮인지 오래였다.

‘언니.’

숲지기 선발전에서 그녀를 배신하고, 플라워에 합류해버린 요시노 하쿠.

언니의 모습을 한 번 떠올린 사쿠는 옅은 숨 한 번으로 머릿속에서 그 얼굴을 지워냈다.

-저벅, 저벅.

인사 이후 사쿠는 말 없이 걸었다.

첫 번째로 도달한 제단.

사쿠는 단 앞에 무릎을 꿇은 후, 조심스레 준비된 잔 위에 술을 따랐다.

-스르륵.

기모노가 살짝 풀려 희고 곱다란 목덜미가 드러난다.

약간의 가슴골도 드러났지만, 아무도 그녀를 보며 음심을 품지는 않았다.

신성하고 중엄한 의식 중 하나.

여러 제단을 걸쳐 가며 사쿠는 옷을 벗고, 정령술사의 의복을 갖추게 된다.

지금껏 일본을 지켜준 여러 세계수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그 세계수의 이름을 잇겠노라 다짐하는 것이다.

완전한 장비를 갖춘 사쿠는 이제와는 전혀 다른 정령술사가 된다.

진정한 국가의 수호자로서 접어드는 갈림길.

당연히 그 길은 깨끗하지만은 않으리라.

-저벅.

두 번째 제단에는 바다를 지배했던 나무에게 무릎을 꿇는다.

-저벅.

세 번째 제단에선, 산과 강의 여신에게 음식을 올린다.

-저벅.

네 번째 제단에선 용맹했던 세계수에게 순결한 처녀의 육신을 내놓는다.

아직 차가운 날씨에, 어떤 마력도 두르지 않아 솜털이 곧게 서는 지금.

사쿠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옷을 벗고 풍만한 가슴을 드러냈다. 허리 조금 아래. 엉덩이 골에 이어진 끈을 잡아당기니 속옷도 홀라당 벗겨졌다.

음부에 솟은 분홍색 엷은 솜털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듯. 허벅지를 조여 가리고.

그렇게 직접 쌀을 씹어 만든 술을 신에게 바치고 나면, 주변 무녀들이 다가와 사쿠의 몸에 하나둘씩 의복을 입혀주었다.

의식이 다 끝나기까지 3시간 20분. 조금 늦었다.

사쿠는 얼어붙은 몸을 문지르지 않고 버틴 뒤. 마지막 하나의 관문을 넘어섰다.

“사쿠.”

“네, 아버지.”

“너만은 가문의 이름에 먹을 칠하지 말아라.”

마지막에 그녀를 기다리던 가주의 한 마디에 사쿠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몸 조심하고.”

“네.”

-웅웅!

벚꽃산의 최심부에 위치한 동굴.

그 안으로부터 퍼져나온 신묘한 소리가 절 한복판을 모두 울린다.

사쿠는 가족을 돌아보지 않고 그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는 오직 이곳뿐.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시노 가문은 사쿠가 던전을 이겨내어 나올 때까지 이곳과 혈육을 지켜야만 했다.

“경계를 끌어 올려라.”

가주의 말을 시작으로 의식을 마친 가문원들이 검과 정령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요시노의 이름을 건 일이다. ‘소메이요시노’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어.”

요시노 가문.

헤이안 시대(794~1185)를 기점으로 일본을 장악한 벚나무.

외적의 침입을 막아 이름을 널리 알리고, 일본에 직접 뿌리를 내려 오랜 기간 그 장소를 수호했다더라.

그 줄기인 요시노는 늘 일본의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전근대의 시기엔 신을 대리하는 천황. 우두머리.

세계수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오늘날조차도 최고통치자는 아니지만 최고권력자의 자리는 유지하고 있었다.

수십년 전, 멸망 직전이었던 대한민국을 꽉 잡아 끌고 온 무궁처럼.

요시노 역시 일본의 무궁화와도 같은 존재였다.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한 채. 삼엄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태세를 갖춘 가문.

가주, 요시노 오오시마는 눈을 부릅떴다. 오오시마자쿠라. 요시노벚꽃의 부모뻘인 수종.

‘소메이요시노만 찾아낸다면, 확실하게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어.’

왕이니, 플라워니.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이 국가와 가문의 안녕.

사쿠는 더 큰 힘을 가져야만 했다.

“가…. 크흡, 가주님!!”

그때,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뛰어와 소리쳤다.

헉헉대던 소년은 피칠갑을 한 채 죽어가고 있었고, 주변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오오시마는 침착하게 되물었고 소년은 무릎을 꿇고 피를 뱉어냈다.

“습, 습격입니다…. 플라워입니다.”

플라워.

“…그래.”

오오시마는 주먹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쿠. 내 딸.”

요시노 가문의 장녀, 본래였다면 사쿠를 재치고 국목이 되었어야할 아이.

하쿠는 가문의 전통과 의식에 질려 복수심을 품고 플라워에 합류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꽃을 품어라.”

엄중한 가주의 목소리에, 주변 정령들이 동요해 떨었다.

산등성이에서 울려 퍼지는 적의는 살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온 꽃들은 벚꽃이 아니었다.

플라워.

이 던전의 기연을 차지하려고 작정한 걸까.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부숴주지.”

두 세력이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

-화르르륵!

이 세계에서 산불은 지진이나 해일보다도 더 큰 재앙으로 여겨진다.

[꺄아아아악!!]

바로, 비교할 수 없는 목명피해가 발생하기 때문.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이성이 있는 나무들이 순식간에 불타 사라진다.

심지어 그 장소가 국가를 지탱하는 대귀족 가문이라면 어떠할까.

요시노산에는 목인뿐만이 아니라 많은 나무들이 숨쉬고 있었고, 오늘 그들은 모두 덧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

두 눈을 의심했다.

‘왜 불타고 있는 거지?’

준비는 다했고. 요시노산에 대한 조사도 마쳤다.

오늘 바로 던전 공략하기 위해 출발했는데. 이게 웬걸.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가문이 작살이 나 있었다.

‘차질이 빚어진다면 힘을 쓸 작정도 했는데.’

아무래도 이 산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작지는 않은 모양.

나는 불길을 뚫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살이 잘려 죽은 이들이 눈에 보였다.

불에 타고 있는 목이 잘린 시체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이 일어나리라. 그 전에 던전에 침입하는 것이 옳았다.

‘도원도 이렇게 무너졌었지.’

어찌 산에 자리를 잡은 가문은 항상 이렇게 망하는 것 같다.

-챙, 챙!

조금 더 산을 올라서니 일어나고 있는 교전이 몇 보였다.

가볍게 무시했다.

마력의 형질로 보건데, 플라워.

플라워에 속한 이들만이 보여주는 특이한 형질의 마력을 띠고 있다.

흑단이 뽑아내는 마력과도 약간 흡사했다.

‘여기서 한번 보고하고 싶긴 한데.’

플라워의 움직임이 있었다. 내 땅으로 돌아가 조사를 부탁하고 싶지만, 지금 이곳은 전파도 통하지 않고 공간 마법도 사용하기 힘들다.

못 쓸 건 없지만. 주변 좌표가 엉망이다. 여기서 사용하면 마력의 낭비가 심해질 거고, 나는 되도록 최적의 상태로 공략에 임하고 싶었다.

‘…그대로 진행한다.’

확 트인 산의 꼭대기로 진입하자, 불에 완전히 타버린 제단과 여러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간에 마력이 팽배한 걸로 보아 정령이 소환되었다가 죽길 반복한 모양.

나는 쭉 기척을 숨긴 채 앞으로 전진했고. 이윽고 내가 목표로 할 던전의 코앞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턱.

동굴 앞에 가슴이 난도질 당한 노인의 시체가 하나.

‘가주인가.’

플라워의 침입이 있긴 했지만, 기세로 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당할 질과 수다.

‘가주만 죽이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어.’

중요한 건 던전 내부.

가주를 순식간에 처리한 정예가, 사쿠를 따라 던전에 들어갔다고 보는 게 옳았다.

판단한 나는 즉시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