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화 > 소메이요시노 (3)
“뀨우, 뀨우?”
몇 가지, 정령과 교류하며 알아낸 게 있다.
“뀨~!”
내가 가진 마력은 이 정령들에게 있어 매우 감칠맛 있는 뛰어난 마력이라는 것,
그게 마기로 발전할 경우 저항이 무색하게 굴복하는 특징이 있다.
“뀨! 뀨우우! 뀨뀨뀨뀨!”
굴복당한 토끼는 내 가랑이를 파고들어, 나에게 온갖 애정 공세를 해대고 있었다.
보드라운 털을 비벼대며 분홍 코를 씰룩이는데. 오른손을 내밀기 무섭게 내 손에 올라타왔다.
-탁 타닥!
손등을 타고 어깨까지. 순식간에 어깨 위를 점한 토끼가 내 뺨과 물아일체가 되어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하급.’
말을 하지 못하고, 그다지 힘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등급을 말하자면 하급 정령.
여기서도 정령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마력 사용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디 보자….’
어깨에 달라붙은 토끼를 이끌고, 나는 주변을 크게 한 번 둘러보았다.
던전 내부는 동굴이라기엔 너무 넓고 무성했다.
동물이 살아가기 좋은 숲. 판타지로 따진다면 엘프들이 살아갈 것만 같은 환경이라 해야할까.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조경을 뚫고 풀숲을 파헤치다 보면, 이윽고 확 트인 들판이 나를 반겼다.
“뀨!”
토끼가 코를 벌렁대며 뛰쳐나왔다.
내 어깨에서 콩콩, 점프하더니 들판에 내려와 풀을 뜯기 시작하는 녀석.
-스르륵.
사슴. 새.
들판에는 하나둘씩 동물의 형태를 한 정령들이 보였는데. 이들은 나를 보더니 털을 바짝 세워, 경계하며 내가 서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경계심이 많다. 그리 여기며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 나무 사이에 한 여성이 사슴과 함께 도망가는 게 보였다.
‘여자? 아니… 인간형 정령인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 여성형의 정령.
-스스슥!
여자는 꽤 빠른 속도로 내게서 벗어났고, 나는 다시금 숲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끝부분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숲 한가운데 거대한 동굴과 이어져 녹색의 한기를 뿌리는 제단은, 척 보기에도 영험한 기운이 느껴져 그 기운만으로 걸음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뚫린 동굴. 그리고 그 입구에 놓인 여러 장식물.
들어가려 하니 투명한 벽이 입구를 가로막았다. 문 근처를 살피니, 희미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나는 그 룬 문자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셋.’
채 문장의 모습도 하지 못한 단어.
3이라는 숫자가 무얼 의미하는 지는 바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일련의 퍼즐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던전에 도전할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겠지.
‘부수는 건, 일단 그만 둘까.’
입구를 가로막은 투명한 방벽.
내 힘으로 깨뜨릴 수 있지만, 가끔 물리적인 방법으로 방벽을 무너뜨리면 던전 자체의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던전을 클리어할 땐 던전이 세워진 목적과 용도를 잘 이해하면 좋다.
정령에 관한 던전. 정령술을 키우는데 있어 최적의 장소라면….
“뀨?”
때마침 나를 따라온 토끼가 다시 어깨 위로 올라탔다.
-우우웅.
변화를 보이는 던전. 실금처럼 나타난 룬 문자가 다시 쓰여졌다.
셋에서, 둘.
정령인 토끼가 오자마자 숫자가 변화했다. 얼추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세마리의 정령을 데리고 오라는 건가.’
어려운 내용이 아닌 만큼, 튜토리얼의 느낌이 강할 거다.
나는 가장 먼저 나와 계약된 엘레오노르를 소환시켰다.
[짹!]
손아귀에 작은 울림과 함께 나타난 나무발바리.
“쭈인님! 무슨 일이에요?!”
입구의 룬 문자를 보니,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 던전에 있는 정령만이 조건에 충족되는 건가.’
파악했다. 날먹으로 첫 관문을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건이 제법 까다로웠다.
나는 엘레오노르의 머리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잠깐 보고 싶어서 불러 봤어.”
“짹. 주인님, 그런데 여긴…? 엄청 마력이 풍부하고. 좋아요.”
엘레오노르에게 이 공간은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이 공간이 정령이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가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들어가.”
“짹! 다음에도 불러주는 거죠?”
아무 것도 시키지 않자, 의문을 느끼면서도 내게 달라붙어 아양을 부리는 엘레오노르.
나는 녀석을 천천히 달래며 어떤 방식으로 정령을 취할지, 장고를 거듭했다.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
“여우님, 여우님~”
여우 가면을 쓴 사쿠가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그녀의 코앞에 여우 한 마리가 그녀를 경계하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랑 함께 가지 않겠나요?”
“끼익. 끽!”
요상한 울음소리를 뱉으며, 달아나려는 여우.
가면 속.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사쿠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밝고 귀엽다.
사쿠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기운을 느꼈을까.
도망치기 직전까지 갔던 여우는 조심스레 사쿠의 손에 주둥이를 내려놓았다.
-할짝.
“푸흐흐, 여우님 간지러워요.”
까슬까슬한 여우의 혀가 사쿠의 보드라운 손을 훑었다.
사쿠는 헤벌레 미소를 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쿠의 손에서 분홍빛 마력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
“친구가 되어요. 여우님.”
정령산의 첫 번째 문턱.
클리어하지 않았을 뿐. 첫 번째 관문까지는 요시노 가문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헤쳐온 경험이 있었다.
세 마리의 정령을 확보해 문턱을 넘어라.
사쿠에겐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아마 두 번째, 세 번째 문턱도 어렵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아직 공략법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네 번째 관문부터.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미리 여러 정보를 철저하게 준비해온 요시노 가문은, 그 어떤 누구보다 빠르게 던전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함께 가요 여우님!”
물론 첫 번째 관문이라고 그 난이도가 낮은 것은 아니다.
이 시험에서 중요한 건 정령을 분간하는 힘.
이 숲에서 살아가는 정령의 일부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 정령이 있다.
괜한 정령을 꼬셔 보려다가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
심지어는 정령술사를 공격하는 정령까지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정령들의 힘은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S급 던전이라는 칭호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읏차.”
사쿠는 귀여운 여우를 품에 끌어안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슴, 까마귀, 까치, 참새, 말, 늑대. 도합 스물.
무수히 많은 정령과 친구가 된 사쿠가 마치 유치원 교사라도 되는 듯 해맑게 소리쳤다.
“정령님들! 이제 출발해요!”
-푸르릉!
사쿠의 발랄함에 흠뻑 빠진 정령들이 저마다의 울음소리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거진 브레맨 음악대.
목인 여성을 사이에 두고 애정을 받기 위해 다투는 정령들이 그녀를 따라 관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정령을 굴복시키는 방법은 정령술사마다 그 방식에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가만 보고 있어.”
정령산의 관문에 대해서는 하쿠도 잘 알고 있는 바.
그녀 역시 정령을 확보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정예 병력을 동반했기에 더 많은 숫자의 정령이 필요했고. 하나둘씩 권유하며 다니기에는 시간이 몹시나 부족했다.
‘그 년보다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그런 하쿠가 선택한 방법.
[크르륵]
그녀는 마침 나타난 곰을 향해 자신의 손을 쭉 뻗었다.
손등 위로부터 불같은 마력이 피어났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요정형의 정령들이 그녀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 정령 박투 】
요시노 가문의 비기.
하쿠의 얼굴 위로 반투명한 가면이 만들어진다. 그녀의 신체 구성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인간이나 세계수보단 정령에 가까운 신체 구성.
정령화된 하쿠의 몸은 스스로의 마력으로 불타고 있었다.
-파밧!
곰이 하쿠의 움직임을 눈치채기도 전에, 하쿠는 스텝을 몇 번 밟더니 순식간에 곰의 몸체를 향해 다가갔다.
“크릉!?”
깜짝 놀란 곰이 앞발을 들어 대항해 보지만, 플라워의 부간부인 그녀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퍼억!
하쿠의 주먹에서 빠져나온 붉은 빛의 마력이 곰의 신체를 두드렸다.
연갈색의 털이 자란 배를 향해, 퍽-
나가떨어진 곰이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진다.
하쿠는 그 곰의 배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목덜미를 붙잡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정령을 지배하는 몇 가지 방법.
그중 하나는 실력을 행사한 뒤, 상하 관계를 철저하게 알리는 법이다.
“마력을 건네 주고 받는 일종의 계약.”
정령의 신체 일부를 자신의 마력으로 채운다.
보통이라면 정령의 의사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숙련된 정령사의 경우, 그 의사를 무시하고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크륵, 크르륵.”
붉게 빛나는 곰의 눈동자가 서서히 저문다. 하쿠의 마력으로 가득 차, 조금씩 순종적으로 변해가는 곰.
플라워의 전투원들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
“저도 할 수 있습니까?”
정령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로, 초급 정령이라도 다루기만 하면 사회에서 극진히 대접받는다.
관심을 보인 전투원의 모습에 하쿠는 피식 그를 비웃었다.
“할 수 있겠냐?”
정령에게 마력을 불어넣는 것부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정령사의 실력에 따라 효율이 천차만별이지. 너희들은 100을 쏟아도 1이 들어갈까 말까지만. 우린 달라.”
일반적인 정령술사가 100마력으로 10을 채운다면, 요시노 가문의 일원은 5할의 효율을 볼 때까지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반복한다.
“정령감응이 부족하면…. 세계수급의 마력으로도 초급 정령 하나 사육하지 못해. 뭐 못하는 건 아닌데. 어디 한 번 해봐. 네가 완전히 정령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면.”
-우웅!
곰의 몸 안에서 자그마한 돌이 기어나온다.
정령석. 정령이 인간에게 귀속되었다는 일종의 상징.
계약과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하쿠는 돌을 꺼내 보이며 당당히 말했다.
“이런 게 나올 테니까.”
일반인도 정령을 굴복시킬 수는 있다.
단, 마력이 그만큼 많아야 하겠지만.
“그럼, 일본의 국목은 어느정도인지?”
그때 한 전투원이 의문을 꺼내놓았다. 하쿠는 짐짓 얼굴을 굳히더니, 한숨을 뱉으며 답했다.
“백 퍼센트.”
정령과의 교류에 손실이 없다.
사쿠는 정령술에 있어 선택받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외에도 정령의 마음에 들려면 여려가지 요소가 동반되어야 한다.
마력의 형질이나, 주인의 성격이라거나.
어떤 정령은 마력과는 무관히 다른 것을 요구할 때도 있다고.
‘
“그러니까 더 빨리 움직여야지.”
목표는 사쿠다.
하쿠의 동생이라면 벌써 세 번째 관문까지는 가볍게 통과했을 수 있다.
하쿠는 눈을 날카롭게 부라리며, 숲의 안쪽을 향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
쩍 벌어진 골반.
아찔한 허리.
털 하나 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뀨?”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여성형 정령.
풍만한 가슴은 폭이 넓은 나뭇잎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야릿한 매력을 감추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아랫가슴과 옆가슴, 겨드랑이.
흙이 묻어 살살 털어낸다면 극상의 과실이 되는 정령의 여체.
“끼잉….”
정령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계속해서 두리번 거렸고. 얼마 가지 않아 정령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뀨?]
검은 토끼.
그 귀여운 모습에 반한 정령이 토끼에게 깡충깡충 다가갔다!
“끠잉!”
[뀨?]
귀여운 것을 애호하는 숲의 정령. 님프.
님프는 토끼를 끌어안고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비비며 행복하게 웃었다.
“꺄앙~!”
행복해보이는 님프.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다.
인간은 고대 시대부터 낚시나 수렵을 위해 사용하던 수단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떡밥.
자그마한 크릴새우에 낚인 대어를 보아라.
토끼를 품은 님프의 등 뒤에, 웬 남성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끵…?”
-파앗!
님프는 남자에게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