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2화 > 베니스 (3)
[싫어…!]
유령의 몸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지더니. 계약 정령들이 소녀를 감싸듯이 튀어나왔다.
-번쩍!
“푸르릉!”
“잉잉!”
어깨 옆에는 멋들어진 판금 갑옷을 입은 켄타우로스.
후두부의 옆은 얼음 결정을 공중에 띄운 꼬마 요정.
다리에는 녹색의 기다란 뱀과, 발치의 화염 도마뱀.
두터운 마력 방벽까지 몸에 덧씌우니,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쳤다. 이를 본 베니스가 쯔쯔 혀를 차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발악을 하는군.”
[당, 당연히 발악하지요! 당신과 당신의 계약자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기나 해요?]
“순순히 허벅지를 벌리는 게 좋을 거야. 반항하면, 내 주인님이 팔뚝만한 것으로다가 자비없이 네 비좁은 보지를 헐렁하게 만들어버릴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발악을 한다는 건, 생식기 간의 접촉이 가능하다는 거지?”
아비는 유령의 몸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건들지 못할 것같지만, 분명히 접촉 가능한 실체다.
아비는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쉬이익!
도마뱀이 우리를 위협하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아비는 손으로 도마뱀을 제지하며 우리에게 경고했다.
[당신들은… 진정한 정령술사가 아니에요.]
“왜?”
[정령과의 유대와 우정은…. 그런, 그런 추잡한 짓으로 형성되어선 안돼요. 설령 그게 가능할지라도, 가짜라고요! 최악의 범죄이고!]
굳은 다짐을 하듯 소리친다.
아비는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만큼 거대한 마력을 쥐고 흔들며,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싸우는 것밖에 답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볼까.
의사를 묻기 위해 베니스를 돌아보니, 비웃음을 곁들인 베니스의 조소가 터무니없게 퍼져나왔다.
아, 또 무슨 장난을 칠 때의 표정이다.
이미 베니스에게 맞추어 익숙해진 나는, 이미 미간에 손을 짚은 지 오래였고. 베니스는 낄낄대며 아비에게 우월감이 잔뜩 담긴 삿대질을 했다.
“너, 섹스 안 해봤지.”
갑작스레 떠보는 처녀여부.
아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 그게 중요해요?!]
“남녀의 신뢰에 가장 믿음직한게 육체의 정분인데, 모르는 걸 보니 처녀겠구나 했어.”
[…무슨, 무슨 그런 망발을.]
일생을 살아왔지만 고작 한 세기에 불과했던 시체-소녀의 모습을 함-와, 수천 년을 살아온 늙은 엘프-여인의 모습을 함-의 기 싸움.
부들거리던 아비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그렇게 육체의 정이 대단하다면. 한 번 저를 이겨 보세요!]
“이기면? 너도 한 번 해보는 거지?”
[괜찮아요. 당신들이 이길 일은 없을 테니까!]
“큭큭큭. 알았어. 딱 댈 준비 해.”
일기당천의 영웅, 한때 전쟁을 단신으로 끝내었던 전설적인 정령술사 아비.
그녀의 수완은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드리라 생각된다.
과연 과거의 거물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마력을 뿜어 베니스에게 전달했다.
[마지막 관문은… 저와 싸워 이기는 게 본래 시련의 역할이지만, 이번엔 달라요. 당신들은 이 던전에서 얻은 힘으로, 바깥에서도 똑같이… 악마같은 짓을 벌이겠죠.]
“악마 같다니? 우월한 수컷이 씨를 퍼뜨리는 게?”
아비의 몸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베니스는 스스로의 칼날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경고를 입에 담았다.
“취소할 거면 취소해. 지면 정말로 가만 안 두니까.”
[당신들의 음란하고 방탕한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마기를 담은 베니스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아비를 향해 뻗어나갔다.
*****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일단은 정령만을 사용해 싸워나갈 생각이었다.
-우우우웅!
온 주변에 펼쳐지는 마법진. 진 위로 여러 정령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러 정령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마력의 소모가 매우 심한 행위지만, 나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뀨?】
【…행쟈님? 부탁할 일이 또 있는 것임미까?】
【낑낑!】
【밍?】
【행자님!! 또 불러주었군요!】
총합 육십에 달하는 정령의 군단들.
첫 번째 관문에서부터 연을 맺은 정령들이 나타나, 주변 공기를 반전시켰다.
‘…온몸의 기가 빨리지만. 할만 해.’
숨을 가다듬으며 눈앞을 응시하니. 그곳에는 베니스와 아비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닥에서 길게 이어진 그림자가 아비의 목을 노리려 했다.
아비는 정령을 이용해 하여금 베니스를 막아냈지만, 능수능란한 움직임에 고전을 하는 모양새.
-쾅!
아비의 그림자를 타고 바닥에서 솟아오르더니. 뒤에서 비열하게 독을 바른 단검을 휘두르는 베니스.
한낱 던전의 산물이었던 그녀가 아비를 상대로 선전할 수 있는 까닭은 별 게 아니다.
수천 년간 마을에서 마법을 연구한 것과 마기의 효율적인 성능 덕분.
‘만약 저 녀석이 단전을 가지고 있었다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그리고 아비의 지식과 기술을 받쳐줄 마력이 턱없이 부족한 덕도 있었다.
시체인 아비는 주변의 마력을 어떻게든 정제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다지 효율이 나오지 않는 방식이었다.
‘슬슬 돌아와.’
‘응.’
단신으로 아비와 맞서던 베니스를 불러들인다.
든든한 정령 군단을 앞에 내세우고. 당당하게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아비는 우리를 지키는 정령 군세를 보더니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무슨… 당신들. 쾌락에 지배되지 말고, 거기서 빠져나오세요!]
“지배되다니? 감정에 솔직한 거지.”
[언제까지 그런 소리를 하실 건가요…!]
“너도 곧 이렇게 될 거야.”
아비는 그리 뇌까린 베니스의 면전에 불꽃을 쏘아냈다.
베니스는 얄밉게도 내 그림자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베니스를 조준했던 불꽃은 애꿎은 님프에게 날아들었다.
【부, 불이 옵니다! 물의 님프! 도와주심시오!】
【푸우우우!! 이걸로 됐습니까?】
【턱없이 적슴미다!】
폴짝, 한 님프가 점프해 불꽃을 피하니 불이 바닥에 번졌다.
【부, 불!! 불은 뜨거워요!】
타닥타닥!
이에 님프가 호들갑을 떨며 꺄악 소리를 질러댔다.
도움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행자님!! 행자님께 닿는 불은 저, 물놀이의 님프가 꺼트릴게요!】
【행자님은 제가 지킴미다!】
【불, 불!! 저 나쁜뇬이 우리 행자님을 노리고 있슴미다! 도마뱀에게 시켜서 불을 뿜게 한 것! 전부 기억합니다!】
【무어요!?】【정말임미까?!】
님프들이 내 주변을 꽁꽁 싸매더니 다함께 아비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익…. 고추도 안 달린 계집이 감히 행자님을!】
【당장 거기서 내려오는 겁니다!】
때론 칼질보다도 한 마디의 말이 더 뾰족하다던가.
아비는 동작을 멈추고, 감정이 상한 듯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스스로 만든 정령에게 욕을 먹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으리라.
나는 아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비는 황당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왜 님프들의 말투가?]
‘거기부터 의문점이었구나.’
던전 창시자인 아비가 당황한 걸 보니, 님프들의 태도나 말투도 처음에는 정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던전의 오류는 베니스만이 아니었나보다. 생김새도 지금보다 훨씬 어른스럽지 않았을까.
지금은 떽떽거리며 귀여운 비난을 퍼붓는 게 전부….
【행쟈님이 죽으면, 행쟈님의 몸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착한 단물을 받을 수 없는 검미다!】
【착한 단물을 위하여! 알겠슴미까? 님프 친구들! 하나, 둘! 위하여!!】
【끼이잉!】
…는 아닌 것 같고.
그냥 사이비 단체나 다름없다.
-크흐흐흐!
내 품에 숨은 베니스가 아주 박장대소를 하신다.
베니스는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며, 나를 확 끌어안고 볼에 키스를 했다.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스킨십.
뜨겁지 않은 입술의 잔열이 내 볼에 붙어 울렸다.
“흐흐흐. 이시헌.”
“…왜.”
“최고의 시간이야.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건 좋은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으그그극…. 용서 못해요.]
-쿠구구구.
아비는 볼이 빵빵해져선 더욱 많은 정령을 소환해, 우리를 한꺼번에 정리할 준비를 했다.
아직 청문할 게 많고. 내가 여기 온 목적인 에리니에스, 여왕에 대해 물을 것도 있는데. 일단 싸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금 당장은 여왕을 소환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고집…?’
그렇게 강조하는 유대의 힘을 살리려면, 여왕의 힘이 불가피할 텐데.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없다.
저 녀석이 에리니에스를 소환할만한 이유를 만들어 주거나.
아니면 의식을 흐트려 빼앗거나.
-스르르륵.
베니스와의 감정이 동화되며 주먹을 맞닿게 한다. 베니스의 신체와 내 몸이 겹쳐지더니. 내 머리카락이 마력의 방향을 따라 공중 위로 솟아올랐다.
청색으로 발산하는 정령의 힘.
정령화. 내 마력을 표출하자 묵색과 청색이 섞여, 구불구불한 선들이 내 등 뒤에 그어져 거대한 강산을 이루었다.
[…그건. 정령화. 말도 안 돼. 육체로 맺어진 관계가, 그 경지까지 도달한다는 건….]
나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베니스가 다루는 그림자의 보법은 정령화를 통해 나 역시 다룰 수 있게 된다.
어둠에 스며들어 아비의 그림자를 타고 배후에 나타난다.
그 순간적인 속도는 아비조차 따라올 수 없었고. 뒤늦게 이를 눈치 챈 아비가 정령으로 하여금 내 몸을 덮치도록 하였다.
질 일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가진 힘이 단지 정령화였다면 승부는 모르겠지만, 이 상태에선 충분히 신공의 동시 사용을 고려할 법하다.
“끼이익!”
덮쳐오는 도마뱀의 아귀에 손을 집어넣고 마력을 터뜨린다.
-펑!
육체가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마력이 주변에 비산했다. 그것으로 한 마리의 정령이 역소환된다.
【 천마신공 · 정령의 태세(態勢) · 완성형 】
덮쳐오는 수십의 정령들. 내 움직임이 너무 빨라 내가 소환해둔 정령은 나를 따르는것조차 불가하다.
아비의 정령만이 가까스로 나를 따라오고 있다.
‘버틸만 해?’
마력을 마기로 치환하자 어깨에 가해지는 부담.
베니스가 버거워하는 게 내게도 느껴진다.
상급인 베니스의 힘조차 신공의 구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이니까.
힘을 쓰는 것 정돈 웃어 넘긴다. 나는 파랗게 빛나는 동공으로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정령안은 온 마력의 흐름을 살필 수 있다. 누가 무슨 마법을 발동하는지, 마력으로 무슨 작용을 노리고 있는지, 내 눈에 다 들어온다는 소리다.
나는 마법사로서의 역량도 갖추고 있다.
정령의 마법을 파훼하는 건, 현대의 학문에 기반해 마법을 사용하는 목인과 달라 할 수 없었지만.
“끼익?!”
“으으윽!!”
정령의 힘을 아는 베니스라면 못할 것도 없다.
지금 베니스는 내 힘을 고스란히 건네받은 상태니까. 서로의 장점만이 더해져 커다란 폭발을 이루어냈다.
-콰아앙!
몰려오는 마법과 정령을 한 손에 틀어막고, 앞으로 전진한다.
-콰직!
말의 하체를 가진 여성 기사를 한 손에 뿌리치고, 다시 한 발자국.
압도.
[도대체! 무슨…. 이런 건 유대의 힘이-]
베니스가 낄낄대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냐?
처음부터 상대가 잘못됐다.
항거하지 못하는, 한때 절대악에 군림했던 자의 힘.
하늘에 뜬 달을 떨어뜨린 천마의 힘이 정령의 섬세함에 어울려 굽이치는 강을 그렸다.
순식간에 다가간 내가 아비의 몸을 덮쳤다.
공중에 떠 있던 아비가 하늘에 낙하하는 건 한 순간.
‘아직까지도 여왕을 불러내지 않는데.’
-쿵!
내 힘에 밀려 방어막도 깨진 채 넘어진 아비.
[크윽, 으으으으!!]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불러내지 않는다면 불러낼 때까지 압박할 뿐이다.
베니스와 다시 분리된 나는 님프들에게 명령했다.
“이 여자 묶어. 전부 달려들어서 꽉.”
【요 괘씸한 년에게도 착한 단물을 주는 검미까?】
“……그건 일단 생각해보고.”
【알겠슴미다! 행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