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584화 (584/657)

< 584화 > 베니스 (5)

세대를 거쳐 성장한 인간에게 붙일 칭호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칡의 뿌리.

종 특유의 간사함으로 악착같이 대를 이어왔다.

정령의 여왕이자 닫힌 세계의 주인인 에리니에스에게 인간을 묻는다면 그녀는 아무런 고민이 없이 답할 것이다.

우둔하다. 쾌락에 약하다. 의지는 얕고. 나태하다.

심지어는 뜻이 있던 자라도 순식간에 타락해버리고 만다.

우리가 좋아하는 용사. 성녀.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나 좋아했던 아비라는 소녀조차도.

에리니에스는 오래전 스스로 끊은 인연을 떠올렸다.

[아비.]

그녀를 칭찬하기에는 하루 온 종일을 쏟아도 시간이 부족했다.

몇 가지만 간추려 말하면 예쁘기보단 귀엽다라는 말이 옳고.

화려하게 치장한 드레스보단 머리 위의 잡화(雜華)가 어울리며.

생면부지와의 만남에도 의심 없이 누구를 도울 선량한 성품이 있었다.

인간에 대해 실망만 하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희망을 안겨준 존재.

열등종이라 인식되던 인간들 사이에서도 꽃은 피기 마련이었다.

에리니에스는 그녀와 함께한 3년의 모험을 도저히 잊지 못했다.

-이거… 맛이 없어요.

-그래? 글쎄… 난 평생 이런 것만 먹어봐서.

-읍.

묽은 스프를 떠먹으며 서로에게 양보한다거나.

-다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 이익을 취하려는 추잡한 행동을 하지 마세요!

누군가의 그릇된 가치관을 정면으로 쳐부수어, 인간과 정령의 뜻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정령술사님…. 이 은혜를 어찌 값아야 할지.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주씩이나 골머리를 앓다가, 끝내 문제를 해결해 장로인 노파에게 감사 인사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된 자신에게 남아있는 동심.

우리는 자그마한 화분에 씨를 뿌렸고, 기어코 싹을 틔웠다.

그 식물이 자라나는 걸 그녀는 볼 수 없었지만. 하염없이 스스로 묻곤 한다.

아비…. 너는 지금 어떨까.

나쁜 사람들을 바로잡겠다고 소리치던 너.

내 유일한 친구.

‘만약 나에게, 왕관이 없었더라면.’

평생을 너와 함께 지냈을지도 모르겠지.

그래, 왕관.

에리니에스는 왕관의 주인이었다.

세계수가 무척이나 경계하는 힘인 왕관. 왕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에리니에스는 주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령계에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 절대 왕관을 인간에게 넘겨서는 안된다. 】

그녀의 아버지가 당부했던 말 하나.

왕관은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의지가 약한 열등종인 인간에게 넘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선망하던 모든 축복, 우정, 동화같은 이야기들이 왕관의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테니까.

왕관을 경계하고, 지키며, 가급적 사용하지 마라.

모든 게 어그러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사용하는 것은 괜찮다.

에리니에스는 왕관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목령왕이라는 작자가 세계를 한 번 부술 뻔했으니까.

그는 인간치고 현명하고 선량했지만. 기어코 왕관의 의지에 집어 삼켜졌다.

‘…왕관의 안에, 새로운 의지를 깃들게 하여 사용한 건… 천재적인 발상이었어.’

왕관에 인자를 심는다.

자유 의지인 왕관을 조절할 개체를 마련해, 자신이 왕관을 사용할 때 리스크를 최소화 시킨다.

왕관 사용자의 부담을 인자가 대신 받도록 하여 자신에게 오는 정신적인 부담을 줄이는 것이 목적의 핵심이었다.

왕관을 한 번 지배할 뻔한 인간.

그게 세계수와 정령들이 목령왕에 대해 내리는 평가였다.

본인들은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걸, 열등종이 해낼 뻔한 거니까.

므두셀라의 말에 더불어 목령왕이라는 이례적인 케이스까지 더해진 결과.

세계수는 인간과 왕관의 궁합이 심하게 잘 맞는다고 잠정 결론을 지어버렸다.

정말 그게 인간이 왕관의 힘을 잘 끌어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왕관이 날개를 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

하여간, 인간은 절대 왕관을 사용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흣, 읏…아앙….”

에리니에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누워있는 아비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힘은 우리가 선망하는 모든 이야기를 하찮게 여기고.

“가슴 빨지 말아 주세요…으훗♡”

세상을 아우르던 영웅을 고작 구둣발에 짓밟힌 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며.

가치를 가져야 할 삶은 가볍게.

비참한 쾌락을 추구해.

생명의 본질과 의지를 흩트리며, 우리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해. 쥐어 꺾기 때문이다.

왕관의 아래 모든 것은 단지 꺾지 않은 들풀 사이의 꽃일 뿐이다.

경계해야 하는 힘을 주저 없이 사용하는 인간은 정령과 수목마저도 지배할 따름이었고.

목령왕의 세대에서 이어진 힘은 이토록 처참하게 변질하고 말았다.

“이런 거 몰랐어… 몰랐어요….”

“인정 해?”

엘프의 목소리에 고개를 열렬히 흔드는 여자아이.

한때나마 우정을 나누었던 더없는 친우가, 남자에게 매달려 복종의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파앙! 파앙!

“좋아, 좋아…! 당신의 자지가 좋아요… 읏!”

생식은 그저 종의 존속을 위한 도구이지, 쾌락의 목적이 아니다.

성관계로 사람이 망가지는 건 아마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비참한 일이겠지.

왕관의 사용자는 자신이 지배한 존재에게 비참함을 선물한다.

응당 가질 존엄함을 깎아내리고, 추락시켜.

단지 성욕에 지배 된 괴물로 만들어내는 존재.

-팟팟팟팟팟!

“인정해. 너도 결국 암컷이라고.”

“…앗, 아아아아아!!”

“말.”

그 힘 앞에 모든 의미는 사장된다.

성실함이니, 우정이니…. 정의니. 올바름이니 그릇됨이니.

“인정… 인정 할게요… 그러니까…읏!”

“들었지? 이시헌. 보내버려.”

-파앗!

“…흣, 흐아아아앙!”

남자에게 안긴 아비가 더없이 황홀한 표정으로 그에게 안겼다.

에리니에스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왕관의 힘이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는데.’

목령왕이 주변 나무에게서 힘을 빼앗고, 세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상이했다.

강간의 관계로 맺어진다면 여자 쪽에서 느끼는 쾌락은 거의 전무.

섹스가 단지 세뇌와 힘을 뺏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다면….

저 둘의 관계는 정말 진득하고, 쾌락이 가득한 정분같았다.

‘저 남자의 체질인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왕관의 힘이 미약하다.

원형에 비하면 새끼 손톱만큼이나 작았다.

왕관을 사용한 흔적은 분명 있는데, 지금은 그 일부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왕관 특유의 쾌락 증진은 없어야 했다.

왕관은 온존한 상태여야만 제 의지를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게 참으로 많지만…. 에리니에스는 생각을 멈추고 아비를 내려다보았다.

음부에 정액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며, 몽롱한 얼굴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비.

에리니에스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멈추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냉박한 목소리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되돌아보았다.

금색에 갈색을 약간 섞은 찰랑하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자기 몸집보다 더 큰 드레스를 입고, 보석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혐오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읏…하아….]

님프들은 소환을 취소했고, 나와 베니스. 그리고 아비만이 여기에 머무는 상황.

나는 아비의 몸을 들어 천천히 넣고 있던 성기를 빼내었다.

-찌꺼억.

말랑말랑한 보짓살 사이로 커다란 육봉이 마찰하며 튀어나온다.

[에리…니혜흐…? 말도 안대….]

새는 발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비가 말했다.

[분명…. 계약은 끊어졌을 텐데.]

“그만, 말하지마요 아비. 지금은 저 남자를 쓰러뜨릴 때니까.”

에리니에스. 내가 이곳에 온 결정적인 이유이자, 설득의 대상.

베니스의 복수에 잠시 어울리느라 비호감으로 낙인이 찍힌 듯하다.

나는 에리니에스를 바라보며 옷가지를 정리했다. 아비는 그런 에리니에스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질 않았고, 베니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정령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복수의 대상이 아닌 자에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대는 아비를 이렇게 만든 나에게 꽤나 복수심을 태우는 모양인데….

“거기서 비키세요.”

[…….]

그 아비.

이미 좆맛에 빠진지 오래다.

-물컹!

베니스가 보란 듯이 가슴을 꽉 쥐자, 허벅지를 달달 떨며 내 옆에 달라붙는 아비.

착유를 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니, 이따금 흐르는 신음이 신전 전체를 울린다.

[앗…. 하으응….]

“아비….”

에리니에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냉담해진다.

“왕관의 힘을 사용했군요. 그 용서받지 못할 힘을.”

성애가 돋을 정도로 차디찬 목소리. 마력의 울림이 퍼져 바닥을 얼음 지대로 만든다.

왕관.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나도 눈썹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왕관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당신에게 해줄 말 따윈 없어요.”

“어쨌든 내게 좋은 이야기지.”

“무슨 말을-”

“애초에 내가 여기 온 게 너 때문이거든.”

에리니에스의 안색이 굳었다. 그녀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더니,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온 몸에 마력을 피웠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마력이 지축을 흔들었고. 신전을 무너뜨리기 직전까지 다가섰다.

이미 호감을 잃은 이상, 더 자극해 볼까.

여기까지 온 순간 이미 악당이다.

나는 삼류 악당이 된 기분으로 아비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웁…하읍….]

이미 몇 번이고 내 자지를 빨아댄 입술.

그 안쪽을 긁어대자 아비의 음부에서 따뜻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읏, 흐읏…하아앙…!]

“에리니에스. 정령의 여왕. 지금 내가 네 힘이 절실하거든.”

수치에 물들어 잔뜩 분노한 눈으로, 내게 손까지 뻗는다.

나는 아비에게 더욱 힘을 주었다. 절정에 달한 아비가 몸을 떨었다.

“그런 짓을 하면서 무슨!”

“협박 맞아. 딱 한 번, 힘을 빌리지.”

“제가 당신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죽을 운명…!”

마기를 전력으로 내뿜자, 오싹함을 느꼈는지 말이 끊긴 에리니에스.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묵색의 마기가 아비와 베니스를 집어삼킨다.

두 여자의 미간이 약간의 취한듯한 괴로움이 새겨졌다.

“이유야 있지.”

에리니에스를 눈앞에 담는 것만이 목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잘 이루어졌다.

자신의 친우에게 치부를 보인 것이 수치스러워 미치겠는지, 자꾸만 시선을 피하는 아비.

나는 아비의 몸을 풀어주었다.

쓰러지는 아비를 지탱한 베니스는 킥킥대며 아비를 쓰다듬었고, 아비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잡아주는 거죠?]

“복수는 끝났거든. 이제 내 알 바 아니야.”

[……그게 무슨.]

“솔직히 기분 좋았지.”

강제로 말이 통하게 된 아비다.

베니스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 듯. 아비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내려놓았다.

[사과… 받아주는 건가요?]

“엉.”

[이런 식으로도 유대를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강제로 하는 방식은 여전히…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무시할만한 건 아니었군요.]

저 나라로 떠나버린 아비의 모습에 에리니에스가 잔뜩 화나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비! 그건 이 자의 기만적인 힘 탓이…!”

“됐고.”

내 말이 에리니에스의 말을 끊는다.

이미 내 마기는 마법진까지 완벽하게 그린지 오래. 나는 지금껏 감추고 있던 정령을 소환해, 에리니에스의 앞에 내보였다.

-번쩍!

“이거나 봐.”

내 손아귀 안에 놓인 자그마한 새 한 마리.

나무발바리.

[짹, 주인님? 무슨 일인가요?]

에리니에스의 자녀의 등장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엘레오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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