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8화 > 위스키 한 잔
치약인가 음료인가.
호불호 음료의 끝판왕인 민트초코가 실은 정령의 애호픽?
-꼴딱.
쉬지도 않고 마셔대더니 벌써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마력 생명체인 정령은 허브를 청결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니, 불호의 요소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가.
허브 특유의 화함과 초콜릿의 달콤함에 푹 빠진 에리니에스가 말없이 다시 빨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쪽쪽.
빤히 보고 있으니 제 발이 저린 건지 도끼 눈을 떠 왔다.
“…뭘 그렇게 보죠?”
잘 먹으니 보기 좋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세요.”
“얼마든지.”
가장 먼저 목적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은 나는 에리니에스에게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했다.
목령왕의 탑과 나의 관계. 그리고 시련으로 탄생한 다른 차원의 나.
수목의 왕이 나타난 원인부터 그것을 무찔러야 하는 이유까지.
내게 손해가 될 정보를 전달하는데도 꺼리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일어난 재해를 해결하겠다는 의미인가요?”
“맞아.”
“하. 놀랍지도 않아요. 차원이 망한다니 뭐니…. 장황한 소리만 늘여놓고, 본질을 따져 보면 그저 제 업보를 치우는 일이라니.”
부정하지 않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며칠간 무수한 세계수가 그의 손에 화장되고, 크고 작은 세력이 터져나갔을 게 분명했다.
지금 왕을 막지 않으면 이 차원은 끝장이라 봐야 한다.
“그래서 널 찾으러 굳이 일본까지 간 거지. 전력이 되어줄 테니까.”
“당신에게 힘을 빌려주는 건-”
“세 번. 그거면 족해.”
“…후우, 알았어요. 뭘 하면 되죠?”
나를 증오해도 제 일은 하는 여자다.
싱긋, 미소지어주니 징그럽다는 듯 미간을 확 찌푸린 에리니에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줄 이 녀석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했다.
“…추잡하고 역겨운 인간.”
“아무튼 장소 말인데,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가 될 거야.”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중심을 가리켰다.
이곳은 도심 한 복판, 그것도 속된 말로 노른자 땅이라 불리우는 장소였다.
재앙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지만, 달래와 시바가 사는 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짐작된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대한민국은 끝장이 날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다.
“인간계의 군인부터, 헌터…. 어쩌면 세계수가 직접 움직일 수도 있어. 왕의 힘에 대해서 가늠이 힘들면, 최소한 내 두 배는 된다고 생각해.”
“두 배? 애초에 당신의 역량도 파악되지 않았는데….”
파악은 지금부터 시켜줄 거다.
-따악!
나는 손가락을 튕겨 카페 내부에 좁은 공간을 격리한 뒤. 마력을 뿜었다.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장을 내보이듯. 거리낌 없이 단전을 드러내자, 에리니에스의 눈이 좁아졌다.
“……역시.”
“왕관의 그릇은 처음 보나?”
의미심장한 반응과 동시에 대답하자, 움찔하는 그녀.
나는 던전에서 본 여왕의 왕관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왕관의 주인이었던 거군요.”
“그랬었지. 지금은 뭐, 이렇게 남의 힘을 빼앗아 쓰는 처지지만.”
나는 수목의 왕에게서 강탈한 왕관 조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붉게 물든 가시관의 조각은 의도치 않아도 마력을 정제해 내뿜고 있었다.
“깨진 가시관? 설마….”
에리니에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것만으로 이해가 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왕관에 대해 아는 게 있고, 그건 이 여왕도 똑같았다.
이 세계에서 왕관이 어떤 의미인지, 그게 깨졌다는 건 뭘 뜻하는지.
쉽게 말하면 왕관 이상의 위험분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인간계의 왕관인가요?”
“다른 차원의 왕관이지. 내가 봤을 때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어. 왕관의 힘은 모조리 인체에 흡수되었고, 인간이었던 몸은 세계수에 가깝게 변했지.”
“대체 어떻게… 말도 안 돼요.”
왕이 살던 곳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20년은 더 지난 세계였다.
내 잠재력이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면, 왕관이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해했어요. 얼마나 위험한 존재와 싸우려는 건지. 속이 뒤틀리지만, 이건 정령계에 사는 저조차 쉬이 볼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에리니에스는 말을 끊고 나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이게 고작 시련이라는 건….”
적개심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보는 에리니에스.
이 여자의 눈엔 수목의 왕이든 나든 똑같이 위험 분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빨리 내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긴 한데….’
지금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 같고.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정령계는 조만간 크게 일이 터질 거야.”
“…아무리 당신이 예상을 넘는 인물이라지만, 기만 행위는 통하지 않아요.”
“내가 정말 모를까?”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나는 되려 감출 게 없어졌다.
수목의 왕과의 대화를 통해 미래의 지식을 일부 얻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플라워와 세계수의 막장 행각은 아직 채 절반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해가는지도 나는 안다.
그 확신으로부터 싹이 튼 자신감은 상대의 심리를 크게 위축하게 만들었고. 에리니에스는 반박하지 못해 그저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관에 대해 더 알아내고 싶은 게 있지만.’
내가 가진 왕관과, 이 녀석이 가진 왕관.
플라워의 ATU. 그 배후의 멜리아라는 여왕이 가진 왕관.
종류가 약간 다르지만. 성장의 세계수가 가진 왕관까지.
미래의 나에게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 정보가 들어맞는지는 나도 모른다.
한 번쯤 교차 확인을 지어줄 필요가 있었다.
“계획을 설명하지.”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주제를 넘겼다.
“아마도 세계수와 목인들이 힘을 좀 빼줄 거야. 계획을 말하기 전인데, 생각같은 거 있어?”
“민간인의 대피가 우선 아닌가요?”
“기본이겠지.”
“그렇다면, 제가 영역을 한정시켜 가둘 수 있어요.”
도시 전체에 결계를 펼쳐 영역을 한정한다.
마물이 되었든 재앙이 되었든, 토벌 과정에 빠질 수 없는 절차지만 허가할 수 없다.
“이유를 들을 수 있나요?”
“네 힘을 그렇게 쓰게 둘 수는 없어.”
“설마 시민들을 죽게 내버려 둘 셈인지….”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전력을 고스란히 왕에게 쏟아야 한다.
외부로 돌릴 마력이 있다면 쥐어짜서 상대의 전력을 갉아먹어야만 승산을 볼 수 있었다.
시민들을 살릴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다.
그 어떤 명군도 승기를 버리고 도의를 챙길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인명구조는 따로 인원을 배분해놨어.”
“읏…. 그렇다면, 그걸 먼저 말하는 게!”
내 말에 와락 미간을 찌푸려온다.
어찌 되었든 에리니에스의 힘은 다른 방향으로 쓰는 게 맞았다.
“그리고, 싸우다 마력이 부족해질 일이 생길 텐데…. 내 마력을 받아서 사용하는 연습도 해두면 좋을 거야.”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럼 좋겠지만 여긴 정령계가 아니야. 그리고 넌 내 계약자지. 정령화를 할 필요도 있어.”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요. 힘을 빌려준다고 했지, 거기까지 허락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라는 작자도, 저 혼자면 충분해요.”
정말 그랬다면 좋겠는데.
“상황이 잘못 굴러가면 그때는 검토해줬으면 해.”
“…….”
숙이는 태도로 들어가자, 차마 안된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지. 입을 앙 다문 에리니에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으리라.
수목의 왕은 아무리 왕관을 동원할지라도, 혼자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해 볼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직후 나는 에리니에스에게 서울의 환경과, 마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뒤 돌려보냈다.
수목의 왕 토벌을 위한 첫 결실이 맺어진 것이다.
*****
일부 준비는 빠르게 해치웠다.
나머지는 왕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천천히 세부적인 사항을 고쳐나갈 뿐이었고, 나는 내 땅으로 돌아와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토벌을 기다리는 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우선 흑단과 나머지 훈련을 함께 했고.
무공이 무뎌지지 않도록, 던전에 들어가 한계까지 힘을 사용해 단련했다.
날을 기다리면서 의미 없는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만큼 불안한 건 없다.
내가 여기서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 잠깐의 여유를 즐기지 못하게 되고. 그럴때면 나는 늘 억지로 그걸 메우기 위해 육체의 교류를 택했다.
적어도 정분을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안정할 수 있었다.
그야 나에게는 몸의 교류가 훈련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도원아?”
검은 끈 나시에, 허리에 묶은 기다란 도복.
고개를 기울인 홍연이 귀엽게 물어왔다.
“…어.”
“무슨 표정이 그러느냐. 머리가 아픈가?”
딱히 취하지는 않았는데 술자리의 분위기란 게 참 그렇다.
그윽하게 풍겨오는 단풍 향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니, 안 아파.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던전! 던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응, 그러니까. 무사히 끝났어, S급 던전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니까.”
내가 정령산을 정복하는 건 세력 내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디 가서 무용담을 막 떠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구슬이나 홍연이 너무 불안해 하길래 잘난 척 좀 해줬다.
왕이 하는 일은 스스로의 업무만이 아니다.
신하가 불안해 하지 않도록 늘 굽어살피고,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대단하다!”
정령의 여왕과 계약했다는 걸 알리니, 무척이나 귀엽게 팔을 쫙 펼치고 놀라워하는 홍연.
약간 취해서인지 애교가 참 많았다.
“도원은 늘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걸 해내는구나.”
“생각하지 못하는 짓이긴 했지.”
정령을 따먹는다거나,
님프들을 세워두고 한 번씩 박는다거나.
최후에는 여왕을 향해, 딸을 두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건, 그건 음… 어쩔 수 없는.”
“연아. 억지로 두둔하려 안해도 돼.”
홍연은 위스키 한 잔을 홀짝이더니, 슬며시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말하면…조금 싫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나는 숨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약간의 취기가 몰려온다.
“싫지?”
“음, 싫구나…. 그래도, 밉지는 않다.”
“그러니까, 억지로 그런 말 해도 된다니까.”
“이, 이건 정말이다! 억지가 아니라…. 나는 그냥….”
당황한 홍연이 상체를 갑자기 올려 손을 흔들었다.
꽉 조이는 나시티에 튀어나온 가슴이 숨이 막힐 듯이 출렁거렸다.
“뭘 해도 미워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왜?”
이유를 모르겠네.
“결국 힘을 늘려서 이곳을 번영하게 하려는 선택이잖느냐. 여자로서는… 그, 싫지만.”
횡설수설하는 홍연을 빤히 바라본다.
홍연은 내 눈길에 잔뜩 얼굴이 빨개져선 손가락을 꼬물대며 크게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호통을 치던 애가, 내 앞에서는 이렇게 소심해진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엽다.
-스윽.
내 손이 홍연의 어깨를 끌어당기자. 홍연이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겹치는 건 그냥 버릇이야.”
일을 하다가 남는 사이, 저녁이나 새벽.
내가 활동하면서 남는 모든 시간을 육체적 관계에 쏟는 이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강박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그 행위가 굳어져서 나쁜 버릇이 됐다는 거다.
지금은 안정이 되지 않는다.
예쁘지 않아도, 그게 나무라도. 일단 힘을 얻고, 몸도 안고 있어야만 내가 산다.
-물컹.
가슴을 쥐어짜자, 부르르 떨리는 가녀린 몸.
내 손이 나시티를 젖히고 생가슴을 주무르자, 홍연이 내 입술을 핥았다.
“…읏….”
상대에게서 전해지는 온기, 따스함.
아직도 바깥에서 할 일이 많다.
급해지는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르기 위해, 나는 내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행위를 했다.
“도원아… 흐읏…. 내 냄새를 왜 그렇게….”
베니스의 향이 지워지고, 이번에는 홍연의 향이 가득 찬다.
항상 옆에서 킥킥대던 그 녀석이 없어져서일까.
아니면 정말 취해서인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취기에 기대 연이에게 말했다.
“…밤에 같이 있어 줘.”
“!?!?!?”
깜짝 놀란 홍연이, 숨을 헙 틀어막는다.
“도, 도도도도. 도원…. 그, 그런 말을 갑자기… 으으으!”
얼굴이 홍당무까지 빨개져선 시선을 확 돌리더니, 갑자기 내 고개를 껴안는 홍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
“나, 나는 네 거다 도원아….”
녹아내리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