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593화 (593/657)

< 593화 > 사과

뜨거운 차가 우리의 열기와 함께 거의 식어버렸을 즈음. 세영에게 쭉 숨긴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내가 3년 전에 왕관과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계약을 따라 현 체제를 무너뜨리고 이 땅을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사실.

지금까지 일이 이렇게 흘러온 것이 내 목숨을 버린다는 극단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도 전부 알렸다.

“그럼 정말 죽었던 거야?”

“사실, 그렇지.”

진실을 고하자 얼굴을 빨갛게 하더니 손으로 내 뺨을 부여잡은 세영.

“한 대 더 맞아.”

“….”

-퍽!

주먹이 날아오더니 얼굴에 파 묻힌다.

나는 세영의 타격기를 모조리 허락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만 해도-”

-퍽!

“이 방법밖-”

-퍼억!

“-콜록, 없다고 생각했어.”

3년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세영의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일이 되었다.

“나만, 나만 몰아붙였어? 이 개새끼야?”

아니, 전부 다.

세영과 달래, 별에게 할 말은 없었다.

내가 한 행위는 이기적인 선택이기도,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타인이 이해하기 힘든 행위였다.

나는 내가 이딴 일을 하면서도 그 사실이 들통나지 않기를 원했다.

‘이딴 일’. 연인이 아닌 누군가와 몸을 섞고, 심지어는 그 안에서 쾌락을 즐기게 된다는 것.

그런 주제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도망친 것.

당시만 해도 그따위 모순에 깨나 시달려왔었다.

계약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인을 배신해야 하는데, 추악하게도 격려와 사랑은 또 받고 싶어서.

시간이 급하다는 이유로 둘러대고 나는 그녀들에게서 자취를 감추었다.

반응은 예상했다.

죽음이라는 허울로 가슴에 난도질을 한 것은 효과가 좋았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지 못했다.

잠깐, 말이 다르다. 마음은 생각지 못했다면서 반응은 예상했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

정리하자면, 몇몇년들이 나보고 미친놈 같댄다.

문제는 거기에 대고 나도 반박하지 못했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몇 명을 더 몰아넣어야 하는지.

끝에 닿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인과 정분이 나야 하는지.

나도 내가 망가졌다고.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때가 언젠지 아는가.

사창가에서 몇 푼에 몸을 팔며 낭만 따위를 중얼대는 창녀들의 논리를 내 쪽에서 이해한 순간이었다.

“…….”

그 치욕스런 경험들을,

내가 어떻게 말해.

머리에 열을 그득히 채우는 온갖 역겨운 모순들이 뇌의 주름을 따라 들끓고.

뜨겁게 가라앉은 뇌수를 자각해 차분함을 돌이키고자 숨을 골랐다.

그러면 얼굴이 불거져.

수치심에 손이 떨리고.

하염없는 죄책감은 혀끝을 톡톡 건드리며 사과의 말끝을 종용한다.

“…이시헌.”

용서받기는 쉽겠지. 뭐든 저지르고 보는 게 형편에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그 짧은 시일 내에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껴안고. 젖을 물고.

완성된 몸에 반해, 가뜩이나 처참한 인간성은 갈수록 마모되는 것 같다.

그 모든 게 누가 바라지도 않은 내 선택에 의한 변화.

과연 누굴 탓할까.

“야.”

“?”

“숨 쉬어. 심호흡 해. 천천히.”

눈치채고 보니 세영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따스함에 눈에 힘이 들어간다.

핏줄이 서고, 입에 진한 쇠맛이 느껴졌다.

“괜찮아. 야. 네 여친이 용서해주겠다잖아. 네가 뭔 짓을 해도, 어? 뭘 그렇게 빡시게 고민하고 그래. 너 시발 여기 오자마자 여자 강간한 거 생각 안 해?”

퉁퉁 부은 눈, 속이 답답한 듯 다가온 세영이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몸은 산만해져서, 미련한 개새끼같은 건 여전해가지구….”

“….”

“왜 그러는데. 응?”

사과해야한다.

사과하는 게 맞는데….

여기서 용서를 구한들, 나는 이 사람에게 계속 실망만을 안겨주게 될 거다.

그 말은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말이고.

쭉 이어지는 관계에 있어 용서란, 개선될 여지가 남아있는 사람만이 비는 것이기에, 고칠 수 없다면 그건 그저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건 그러한 마음가짐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상황을 무마하는 말로 덮지 않겠다.

하지만 진실을 전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나?

지금껏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앞서 말한 수치심이 존재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기에, 되도록 일을 늦게 미뤄서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실제로 그리하는 편이 내 사람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도 하니, 상황이 잘 맞아떨어지며 마음 또한 편해졌었다.

‘난.’

나는.

수억의 영웅이 되어도, 곁에 있는 사람에겐 몹쓸 놈이었다.

누군가의 찬양을 받을수록 나 자신은 작아질 뿐이었고.

그것을 털어낼 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딱 한 번만, 이 정신이 남아있을 때 목소리를 내어보자.

나는 세영의 손을 잡고 숨을 들이쉬었다.

“…미안해.”

이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격을 논할 건, 자신이 아니었기에.

이 빌어먹을 운명을 모조리 설명한 뒤, 미움이라도 받아내겠다.

*****

은하수에 노를 저어가는 달은 늘 곡선을 그리다, 해가 뜨기 전의 내 의식과 함께 가라앉는다.

모텔 침대의 선잠을 보내고 나면, 묘한 공허함에 더해지는 찝찝함이 다음에 피우는 담배의 맛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또 지명이야? 체력이 남긴 해 오빠?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난 뒤 반복해온 루틴은 하루 세 번, 여자를 골라 안는 것.

-…목인 여자는 여기 나밖에 없어. 수종은 대체 왜 물어보는데?

대충 적응이 되겠거니 했는데, 이런 짓도 이제 못해 먹겠다.

‘…시발.’

그 한 줌의 마력을 얻기 위해 깎아내리는 정신.

그럼에도 쾌락에 중독되어가는 현실이 역겹기 그지 없았다.

허리에 힘을 주어 무의미하게 골반을 튕길 때마다 바뀌는 표정. 거울에 비친 모습은 못난 난봉꾼의 것.

그 직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며 정체성이 흐려지고,

이대로면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될 것 같아. 나는 그게 보기 싫어 항상 거울을 덮어두었다.

【 왕은 더 많은 여자를 안아야할 것. 지키지 못한다면 왕관을 쓸 생각도 하지 마. 】

인자의 목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신경을 긁어 온다.

이 씹 잼민이 새끼는 제발 좀 닥치고 살았으면 좋겠다.

【 그래서? 】

그래서는 뭐 시발아.

늘 욕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은 말로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밥을 먹기 전에도,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 짧은 30분간의 교류.

흔들고, 쥐고, 짜내고. 뇌에 들끓는 중독 물질에 젖어 제대로 생각도 못했다.

‘분명.’

내가 지금껏 관계로 얻어왔던 건, 이런 방향의 쾌락이 아니었는데.

머리를 긁으며 뒤로 넘기고 뜨거운 이마를 식힌다.

“…그만하고 싶다.”

숨 한 번에 온갖 잡년의 향이 배어나온다. 입을 다시고, 혀를 뒤챌 때마다 그게 생각나서 칼로 혓바닥을 저며내고 싶을 정도로.

하지 않을 거다, 수십 번 다짐하면서도 자고 일어난 뒤에는 늘 그 년들의 썩은내가 피어났다.

시시각각 내 몸이 더럽혀지는 기분이다.

아무리 씻어내도 생각나고, 몸이 닿은 곳은 간지럽다.

차라리 수목을 덮칠 때는 이런 부작용이 없었다.

대신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 순간엔 말로 할 수 없는 가학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

이렇게 지랄 염병을 떨면,

내가 일상으로 돌아간들, 그 사람들과 몸을 섞는 게 가능할까?

자책할 수밖에 없다. 왕관의 그릇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은 그따위의 것들이었다.

“…읍. 우욱, 씨발.”

거하니 변기통에 식사를 비워내고 나면, 직후 가슴에 박힌 공허함을 감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제보다 늘어있는 마력은 앞으로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주고 확신을 안겨다 준다.

이렇게 3개월 째.

어제는 업계에 소문이 나버렸다.

섹스할 때 보이는 내 얼굴이 무섭다며 거부하더라.

최대한 오랫동안 힘을 흡수하기 위해, 쾌락을 주길 꺼리고 있었는데.

여자야 다른 나라에서 구하면 된다지만, 업계의 년들에게도 거부당하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우울함이 몰려왔다.

[식목 도감]

“아직 한참 남았어.”

태양이 건네주었던 사전을 살피며, 어제 먹은 여자의 수종을 체크한다.

-사각.

볼펜의 잉크가 잘 묻지 않아 짜증이 나서 깨트려 버렸다.

이제 남은 건 훈련.

던전에 가서 뒤지게 구르는 일.

그 다음엔 섹스. 훈련. 섹스. 훈련.

“…….”

-쿵, 쿵.

심장이 마구 두근 거리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나는 침대에 웅크려 한참을 밖을 바라보다, 얼굴을 손톱 자국이 남을 정도로 벅벅 긁으며 소리를 지르려던 걸 참아냈다.

스승님의 얼굴을 떠올린다.

약간 몸이 가라앉았다.

딸의 미소를 떠올리니, 이를 악 물게 된다.

‘그 많은 잠재력으로도 부족해.’

이렇게 해서 내가 다 이겨내야만. 이딴 짓을 끝낼 수 있다.

그런데 그 전에 내가 무너질까 겁이 난다.

나는 부수어진 볼펜 대신, 다른 펜을 꺼내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리려다 그것을 집어 던졌다.

일기라도 쓸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지금은 이 추악한 일을 기록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미 죽은 인간이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나를 그리워하고 고통 받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하루 빨리 강해져야 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만날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더. 빨리.’

그럴수록 떠오르는 마음의 생각.

이렇게 강해진들, 마지막에 아무도 날 돌아봐 주지 않는다면?

-스르륵.

흐르는 눈물이 내 감정을 대변한다.

이따금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곤 하는데, 나도 그 타이밍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참 병신같은 몸뚱아리다.

경지를 넘었는데, 감정 하나 조절 못하는 게 말이나 되나.

-짝! 짝!

뺨을 때려 진정한다. 얼얼하게 뺨이 퉁퉁 부을 때까지 후려쳤다.

“약해지지 말자, 약해지지 말자. 나는 개새끼. 나는 개새끼….”

그럼에도 불안감은 도저히 지워낼 수 없었다.

이상했다.

…이 선택을 내린 것은 나인데 왜 내가 가장 불안한지.

그 지독한 모순을 떠올리는 나도 미친 듯이 미웠다.

나는 도감을 펼쳐 순식간에 그 내용을 읽어내렸다.

‘아직 남아있는 도감은….’

최소 수천 그루.

수목을 포함하면 더 많았다.

이 한 그루 한 그루에, 섹스할 때마다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낀다면 틀림없이 난 그 도중에 무너질 터.

이미 몸은 더러워진 마당에, 마음마저 꺾이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었다.

진짜 죽으면 여기까지 온 게 무슨 헛고생인가.

차라리 미움 받을 각오를 해서라도,

‘…….’

나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더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감정?”

그래, 감정.

‘뇌의 일부만 골라 망가뜨린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못해도 현자라면 타인의 번연체를 일부 파괴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나에게는 치유의 권능이 있으니, 잠시 망가뜨렸다가 고치는 것도 충분히….

‘윽.’

나는 거기까지 다다른 위험한 생각을 스스로 멈춰 세웠다.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이 방법만은 최후의 방안으로만 남겨두어야 한다.

‘하다 못해 약물로 조절이 가능하다면.’

지금은 그거라도 기대고 싶다.

약물에 대해선 현자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지만, 영구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현자가 생각하는 약물이 이 감정을 조절하는 약인지, 어떤 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읍, 후우.”

지금은 부디 일이 잘 되길 기원할 뿐이다.

내 무력함이 너무 미웠다.

*****

기억을 모조리 꺼내 그걸 전부 심어주는 건 꽤 어렵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 그리고 스스로 그걸 절제해야만 했던 일.

나에 대한 치부를 드러내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나는 건조하게 설명했다.

나는 지금 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 힘을 끌고 가야 했고, 내 성장을 위해선 무엇이든 발판으로 삼아야 했다.

“…….”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그러진 미소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야.”

-뚝.

“울어? 울보야?”

마치 3년 전 그때처럼, 호흡이 흐트러지고 눈가에서 물이 떨어진다.

잠시 끊어놓은 것들이 올라오며 꺽꺽대자, 당황한 세영이 내 품을 안았다.

무척이나 미안했다.

이런 빌어먹을 몸이라,

도저히 그 더러운 행위를 떼어놓을 수 없고,

하물며 즐기기까지 하는 놈이라서.

그러니 차라리 네가 여기서 날 차버리고 도망갔으면 좋겠다고 지나치게 솔직한 말까지 해버렸다.

까마귀의 수장인 그녀라면 충분히 그 셋을 보호할 수 있을 거니까.

나도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중간부턴 허둥지둥 말이 섞여서 이상해져버렸지만, 세영은 얌전히 그 말을 들었다.

“…그게 다야?”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뱉었다.

내 더러운 숨결이 세영의 뺨에 닿는다.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만 같아 손으로 마구 비벼주고 싶었지만, 팔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각하니 트이는 감정, 이후 또 억누를 그것을 한순간만 내보이며 미안함을 전했다.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닌, 응당 해야하는 것.

“……후.”

세영은 후련한 듯한 숨을 내뱉더니, 의미심장한 손길로 내 등을 두드렸다.

이윽고 그녀의 한 마디가 내 귀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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