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600화 (600/657)

< 600화 > 거성의 몰락

“아저씨?”

시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까마득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카페의 빛을 되찾았다.

“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흉몽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자신을 구원할 마지막 기회를 돌이켰다고 해야 하나.

왕은 할 말을 찾지 못해 눈앞의 쓴 물을 삼켰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돌이킨 과거가 그의 심장을 쥐어뜯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별일 아니다.”

“딱 봐도 별일인데요, 아저씨. 솔직히 말해요.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요.”

“…친구란 건 보통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를 두고 부르는 사이는 아니지.”

“아닌데요. 우린 친군데요?”

시바의 시선이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떨어졌다.

이시바의 상태창에는 그녀와 왕의 사이를 반증할 법정 자료가 차고 넘쳤다.

“…자기도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보글보글.

시바가 앙 깨물고 있는 빨대에 공기를 불어넣자, 넘어간 공기가 라떼를 끓였다.

부글부글 일어난 거품은 컵에 보글보글 가득 찼다.

“…화난 건 아니겠지?”

“아닌데요.”

하는 말은 그렇지만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

“저도 아저씨 친구 안할래요. 삐.”

시바의 친구 퀘스트.

그녀가 퀘스트를 깰 수 있도록 도와준 세 사람은 동백과 밤, 그리고 이 남자다.

그중 동백은 납치되었고, 밤은 바쁘다며 도통 만나주질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겨우 약속을 잡았는데. 한다는 소리가 친구가 아니라니.

여린 시바의 마음엔 생채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

“왜 사과하는데요? 친구 아니라면서요. 친구 아닌 사이엔 사과 할 필요도 없어요.”

거친 시바의 속사포랩!

아버지의 심장을 팍팍 뚫는 말에 왕이 질끈 눈을 감았다.

시바는 상처받아 한참이나 말 없는 왕을 바라보다가,

“엣휴….”

한숨을 쉬곤 고개를 숙였다.

“말실수 했죠.”

“그렇군. 실수했구나.”

납득하자, 발그레 웃는 시바.

“그럼 괜찮아요! 다신 그런 소리 하기만 해봐.”

그 미소에 왕이 잠시 넋을 놓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움만 부각되는 딸 아이의 모습.

하지만 왕이 당면한 상황은 밝지 않았다. 눈앞의 시바는 그의 딸이 아니었고, 정말 자신을 사랑했던 딸은 이미 죽었다.

그의 딸을 살리기 위해선, 저 아름다운 천사의 목을 왕이 스스로 매달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끼리릭?

그의 등허리를 타고 튀어나온 수목의 뿌리가 바닷속 말미잘처럼 꿈틀거렸다.

‘아직 아니야. 마지막에 해도 돼.’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만큼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저씨.”

그런 왕의 속내를 모르는 시바는 그저 실실 웃는다.

허허실실이라고, 순수한 그녀의 모습이 왕의 약점만을 골라 찔렀다.

참으로 독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시바는 턱을 괴곤 말랑한 입술을 꿍실거리며 말했다.

“아저씬 가끔보면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 나한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

엄한 노숙자가 숨겨봐야 뭘 숨기겠어.

“그쵸? 그런데 이상하게 아저씨만 보면 몬가… 몬가에요.”

“?”

설명하긴 힘든데, 아무튼.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었나? 뭔가, 음. 아빠 같아서.”

분위기나 외모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바가 왕에게서 향수를 느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 둘의 만남은 생각보다 극적이다.

편의점에서 요기를 하던 시바에게 갑자기 찾아와서, 시바의 이야기나 고민을 들어준 것.

이런 식으로 친해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자연스러운 듯 하면서도, 뭔가 애매하다.

드라마 각본조차 이렇게 써내린다면 욕을 먹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둘의 기묘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던 건, 시바나 왕이나 서로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왕에겐 제 딸의 추억을.

그리고, 시바 역시….

“아아! 아무튼,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으면 돼요. 아저씨 새출발하는 거 제가 도왔으니까, 그 은혜 평생 값아야죠.”

갑자기 사라지지 말아달라.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이지만, 단어 끝에 터져 나오는 한숨에는 쓸쓸함과 서글픔이 묻어나왔다.

“아저씨랑 전 친구니까!”

무척이나 달콤한 제안,

하지만 시바는 그의 딸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구하고자 했던 건 다른 곳에 있었기에.

-시바는 괜찮아요.

왕은 끝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

왕은 하염없이 밤길을 걸었다.

머리를 꽉 채운 불순한 상상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웅!

밤공기엔 미세먼지가 섞여 살짝 칼칼하다.

중국이 멸망했는데도 공기가 이 모양 이 꼴인 건 한국이 그만큼이나 많이 발전했다는 상징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운치있는 향은 아니다.

-터벅.

왕은 계속 걸었다.

골목의 입구를 봉쇄한 알 수 없는 마법을 무시하고, 어두운 골목에 들어와 멈춰섰다.

음식물 종량제 봉투가 찢어져 국물이 흐르는 바닥.

신발 자국이 찍혔지만 불쾌함을 느끼진 않았다.

-터벅.

왕은 어느 한 곳에서 멈춰섰다.

그 앞엔 휠체어를 탄 희끗한 머리의 노인이 대검을 손에 쥐고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흠. 말이 많은 것 치곤 그다지, 패기 있는 모습은 아닌데.”

흉터가 가득한 얼굴. 검을 든 귀신.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눈 하나는 죽지 않은 노장.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

호랑이의 얼룩이 깃든 헤진 무복이 그의 품을 감싸안고 있었다.

-스스스.

마력의 실이 잡아 당겨지자, 주변의 소음이 차단 된다.

무궁의 양옆으로 얼굴을 가린 검사 둘이 검집에 손을 얹고 왕을 위협했다.

“세계를 무너뜨릴 힘이 있다지?”

“무궁.”

“고작 시련의 허물이, 무슨 힘이 있나 궁금했는데….”

무궁의 시선이 왕의 몸 전체를 기분 나쁘게 훑었다.

“정녕 괴물이었군.”

달빛이 기울어, 골목에 빛이 들어온다.

그 희미한 빛줄기에 왕의 얼굴이 드러나자, 무궁의 눈이 찌푸러졌다.

이시헌.

언젠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천마의 제자.

마흔이 넘어 늙은 시헌의 모습에 무궁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끄흐흐흐. 그런거로군?”

시련의 대상이 이시헌이다.

“흐흐흐, 크흐흐흐!!”

무궁은 입을 벌리고 치아를 훤히 드러내며 미치광이처럼 웃었다.

자신의 미간을 덮고 한참이나 끽끽댄 무궁이,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 사이로 수목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아해가, 기어코 살아 올라섰구만.”

“…….”

“이시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왕의 손이 까딱거렸다.

살기가 진하게 퍼져나오자 양 옆의 검사가 검을 빼들었다.

그 중 한 명이 경고의 의미를 담아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라. 무궁님께선 할 이야기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기살이 날아들어 검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파아아악!

코뼈를 꿰뚫고 들어간 수목의 줄기가 검사를 내팽겨친다.

뇌수와 뼈 파편이 흩날렸다. 무궁의 몸과 얼굴에도 피가 튀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읏, 네놈!”

“가만히 있어라. 아해야.”

나서려는 검사를 무궁이 막아세웠다.

왕은 피가 묻은 줄기를 자기 몸에 거두며 물었다.

“죽으려고 온 건가.”

“끄흐흐. 그 정도로 노망이 나진 않았네. 상수(上壽)가 넘도록 일군 나라를 무너뜨릴 놈이 있다는데. 도통 궁금해야지. 어떻게 찾지 않고, 말을 나누지 않을 수 있겠나?”

그리 말한 무궁이 옆을 흘겼다.

죽은 검사의 시체를 향해 쯔쯔. 혀를 찬 그가 자신의 실수를 뉘우쳤다.

“쓸데없이 젊은 인재만 하나 놓쳤구만. 어떻게 키워놓은 놈인데….”

왕은 공격하지 않고 무궁을 빤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살육이 일어날 것같은 분위기였지만, 검사의 죽음 이후 실제로 그들이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군.”

“무엇이 다행이란 거지?”

“네놈이 살아 있어서. 아니, 이 세계의 네가 살아 있어서.”

무궁은 입을 다셨다.

“이백을 넘게 살아와도, 이 짜릿함은 변치 않는군. 그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순간의 쾌락.

무궁의 눈에 광기가 감돌았다.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시헌이 살아있었다.

세계수나 플라워조차 눈치를 볼 존재.

다른 누구도 아닌 목령왕이 이시헌이라는 건, 몹시 환영할 일이었다.

“그래, 나는 어떻게 죽었지?”

“…….”

“다른 세계에서 온 그놈, 너 말이다. 네놈이라면 분명히 내 목을 취했겠지.”

“항상 꺼림칙한 놈이었지.”

증오 섞인 말 한 마디가 칭찬이라도 되는 양, 또 웃기 시작하는 노인.

그는 조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쳐 있었다.

꺼림칙하다.

수목의 왕이 표현한 무궁은 그 단어로도 표현을 다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어 그를 빼놓을 수 없는 만큼. 그가 보였었던 국가를 향한 집착은 어마어마했으니까.

무너지는 세계.

목령왕의 탄생.

플라워와 세계수의 대립.

멸망 직전인 세계에서 시류를 읽고 판단하는 그의 눈은 정확했다.

경지를 뛰어넘은 무궁에게 세계수는 도구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수의 앞잡이? 신에게 무릎을 꿇은 구차한 놈?

여러 무인들이 그를 비난했으나, 마지막에 살아남은 건 오직 무궁이었다.

승리자.

악독함과 꾀, 실력, 노련함. 모두를 가진 무궁이 그토록 강했던 천마를 쓰러뜨리고 살아남은 이유.

“왜 그렇게 이 나라에 집착하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지.”

왕의 말에 무궁의 눈이 기울어진다.

무궁은 굽은 허리를 숙여,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흙을 한 줌 쥐었다.

부수어진 아스팔트의 틈에 자라난 새싹이 흙에 섞여 손에 들어왔다.

“이 땅이 곧 내 뿌리이자 혈액이야. 내 모든 것. 모든 걸 바쳐 이루어낸 것.”

무궁이 이시헌을 보고 그렇게나 웃어댔던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이 늙은 놈의 목숨은 처음부터 중히 생각지도 않았다네. 세계수가 몰락하고 다음에 찾아올 시대 역시, 한국은 유지되어야 해.”

세계수의 시대에 무궁은 필요했다. 누구보다 먼저 손을 더럽히고, 경쟁자를 제거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다음 대에 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빈 쭉정이.

그가 가진 권력은 이제 하등 쓸모없다.

무궁의 말을 가만 듣던 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별.”

“응?”

“별이 죽지 않았더군.”

“흐흐, 그 세계에선 그 계집을 내 손으로 죽였나 보군?”

별은 무궁의 손에 죽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별은 무궁에게 죽지 않았다.

무궁은 소름끼치는 현실을 알려주었다.

“네가 그만큼 한심해 보였나 보군.”

“…….”

이시헌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무궁이 그녀를 노리지 않고 오히려 협회장의 자리까지 건네주었던 건.

무궁이 이시헌의 가능성을 엿보아서였다.

“나는 언제나 만에 하나를 고려한다네. 네놈이 살아 돌아올 생각, 그리고 정말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별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 별이 계속하여 한국을 지탱하고 있다면,

이시헌이 돌아와 현 체재를 무너뜨렸을 때, 무궁이 죽은 이후에도 이 국가는 별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번영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손녀인 수연조차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적이 있지 않던가?

“체제가 바뀔 필요가 있지, 거기서 입는 출혈은 별 게 아니야.”

언제나 변화해야만 살아남는 시대다.

대한민국 또한, 세계수의 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한국의 미래를 맡긴 것이고. 한국은 점차 왕의 끄나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 다가올 사회의 주요국이 된다.

“이제 이해가 되느냐?”

그래서다.

그래서 그가 웃었던 것이다.

국가의 수목, 꽃 그 자체.

영화로운 무궁화의 눈은 제 뜻을 관철하며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가.”

왕은 나직히 대답했다. 그의 품에서 수목의 뿌리가 튀어나왔다.

무궁은 검을 더듬으며 소름끼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붉은 눈이 달빛을 받아 서슬퍼렇게 빛났다.

“-이제 내 차례지.”

한국의 대들보. 무궁.

그는 지금껏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던 억제기다.

적폐인 그가 뽑혀나가는 것으로 한국은 끝없이 변화할 것이다.

멈춘 조직이 유기적으로 뒤틀리고, 경쟁하고, 싸우며, 끝내 하나의 답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그게, 무궁이 원하는 바다.

얼마든지 물어뜯어라.

쾌락이 묻어나오는 무궁의 눈동자를 본 왕이 자비없이 답했다.

“너는 이번에도 틀렸군.”

그 가정이 이루어지려면, 가장 먼저 내가 죽어야 할 거다.

“이 세계 역시, 곧 무너질 테니.”

-쐐애액!

수목의 줄기가 뻗어간다.

마지막으로 남은 검사 한 명이 무궁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뾰족한 송곳이 늙은 노인의 주름살을 향해 뻗어갔고.

이어 피가 산개했다.

뜨끈한 피가 거미줄처럼 엮여, 한 장의 꽃잎을 만든다.

힘없는 노인의 얼굴이 경련한다. 늙어서 수축된 근육이 떨리다 멈추었고.

뒷골목에 피어난 무궁화는 왕의 발에 밟혀 덧없이 사라졌다.

무궁의 눈은 여전히 차분했다. 오히려 그를 비웃는 듯, 그는 쥐고 있던 대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다.

어린 소천마, 이시헌과는 달리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걸까.

자신의 세계에서 무너졌던 왕을 보며 조소하는 듯하다.

-툭.

무궁의 몸이 휠체어에서 떨어졌다.

두 번째 거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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