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6화 > 세 가지 카드 (2)
[말도 안 돼.]
에리니에스가 제 눈을 믿지 못해 소리쳤다.
[이 정도로 끔찍한 마력과 힘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말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널 소환할 때마다 꾸준히.’
평범한 상대가 아니다.
전력을 쓰지 않더라도 이 세계의 모든 차원을 무너뜨릴 만한 놈이라고.
‘여왕이란 작자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몇 번이나 강조한 경고를 흘려들은 것은 그녀였다.
[닥쳐요. 당신에게만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에리니에스는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악마의 마력을 해석하는데 열중했다.
나이를 먹으면 상황 대처에 노련해져야 하는데, 반대로 위기의식이 둔감해져 버렸으니 원.
‘엘레오노르였다면 지금 바로-’
[혓바닥이 잘리고 싶지 않다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세요.]
‘니 딸이 더 쩔더라.’로 자극 한 번 해주고. 나 역시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에리니에스의 자만은 예상 내.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섣불리 여왕이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령화가 필요하다는 내 말을 아득바득 부정하던 에리니에스의 콧대를 꺾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 놈한테 피해를 줄 방법은?’
[같은 격에 위치한 왕관의 힘을 쓴다면…. 불가능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정령화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 없어.’
단, 네가 생각한 수단이 실패한다면.
억지로라도 어울려 줘야겠다.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럼 답을 해.’
[당신이 모든 정령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네가 성공하면 말이지? 알았어.’
정령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꽤 큰 손해이지만. 놈을 토벌할 수 있다면 상관이 없었다.
또 한 번 맺어진 계약에 에리니에스의 감정이 요동쳤다.
-웅웅!
정령 소환의 진을 그리며 때를 기다린다.
마력 생명체 중에서도 정점에 도달한 정령을, 전투가 가능한 상태로 소환하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눈치채지 못하게 해내야 해.’
걸리지 않게 임하려면 더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했다.
[…놈의 힘을 최대한 빼주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상황은 최악이고 토벌은 아득하지만.
놀랍게도 처음 구상할 때 짜두었던 계획,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대 다의 구도를 만든 후, 닥치는대로 포션을 빨면서 상대를 갉아 먹는다.
몸을 재생할 수 있다손 쳐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결국 누구의 체력이 먼저 소모되는가의 문제.
정신력 싸움이었다.
‘기량과 경험의 차이는 수로 메꾼다.’
“스읍….”
두 팔을 뻗고 가로지은 뒤. 다시 한 번 더 마력을 마기로 치환한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
【 팔(八)의 형(形) 도원(桃園) ─ 세 번째. 경(莖) 】
한 번의 사용만으로 몸에 부하가 걸리는 극단적인 힘.
연달아 사용하면 몸에 반점이 살점에 달라붙어 타들어가고.
세 번째에는 종양같은 그 반점이 핏줄과 장기까지 침범하게 된다.
─화르륵!
마기에 동화된 신체는 세 번에 걸쳐 더욱 강화되고, 홀로 녀석과 싸워 시간을 끌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만.
─툭. 투둑.
이렇게,
내상을 입어 몸 바깥으로 혈액이 빠져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치유 】
그 틈을 치유의 권능으로 틀어막는다.
3년 전. 미숙한 마기를 사용해 몸을 폭주시켰을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힘을 끌어내는 대신 지속적인 내상을 감수하고, 그 피해를 치유로 메꾼다.
─드득, 드득.
핏줄이 끊어지고 팔과 온 몸에 검은 줄기가 솟아난다.
내 대에 이르러 완성시킨 천마신공.
그 위는 없으리라 자신하지만, 몸을 불사지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시언? 몸이.”
딱히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
단지 극도로 마기를 올려 이루어낸, 일종의 과부하일 뿐이니까.
“…….”
그런데 아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 노인네라면 이렇게 명명(命名)하지 않았을까.
토(土), 첫 번째에는 토양과 같은 반점.
엽(葉). 두 번째에는 몸에 복사 잎이 피어나며,
경(莖).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핏줄을 따라 수목의 줄기가 기어오른다.
‘너도 본 적이 없었겠지.’
이 힘을 발현하기 위해선 온갖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할 테니.
채 완성되지도 않은 나를 죽일 때와는 달리, 주먹의 무게부터가 다를 거다.
악마는 나를 흘기며 다시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상태만 보자면 내가 훨씬 무너져 있었지만, 누가 더 급할지는 봐야 안다.
─스스스!
흑도(黑桃). 검은 복사나무의 줄기가 내 뺨까지 타고 올랐다.
꽃을 남겨둔 마지막 과정.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앞으로 돌진했다.
*****
성장하고 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느끼기 쉬운 광경이었다.
─파앙! 팡! 팡!
하늘에서 거대한 폭음이 떨어지며 두 존재가 맞서 싸우고 있다.
겨우 목숨을 면한 이들이 팔다리에 힘을 풀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언.”
하늘에 터져나오는 마력을 흡수해 기력을 회복한 산수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해지는 게 아니라, 무리하는 거야.’
다른 이들은 모두 이시헌의 강함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시헌은 방금까지만 해도 일대다였던 싸움을 홀로 이끌어나가는 미친 행위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목령왕을 포함한 세 초인이 달라붙어도 압도하지 못했던 존재.
그런 악마를 상대로 막상막하의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산수유와 정시우를 합한 정도의 힘을 끌어냈다는 것.
하지만 침식되어가는 검은 반점은 척 봐도 불안했다.
‘…!’
저 형태의 모습을 그녀는 본 적이 있었다.
무리하고, 또 무리를 하다가. 자신을 두고 떠났을 때.
산수유의 심신 아래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기억이 그녀를 침식했다.
“시-”
한 기사의 검격에 목이 통째로 잘려나가는 광경.
온 몸이 반점으로 뒤덮여 있던 시체의 모습.
결국 살아났다고는 하나, 한 번 죽었던 이시헌의 모습은 산수유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될 트라우마였다.
덜덜덜- 수유의 손이 떨렸다.
이성을 잃은 그녀가 다급히 일어나 싸움에 끼어들려 하자, 이를 정시우가 막아섰다.
“수유야, 잠깐.”
“비켜. 시헌이가-”
“…이건 내가 가는 게 맞아. 방법이 있어.”
방법?
수유의 눈이 시우에게로 돌아갔다.
앞선 저항에 의해 경갑은 무너지고, 회복이 힘든 상처를 입기까지한 정시우.
대체 그 몸뚱아리로 뭘 할 수 있다는 걸까. 그녀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정시우는 거친 숨을 고르며 사실을 고했다.
그가 꺼내 놓은 방법.
“해볼게.”
이를 들은 산수유가 귀를 의심했다.
“사실이야…?”
“아마도.”
이시헌은 시간을 끌고 있다.
그가 악마와 부딪히기 직전에 그리 말하기도 했을뿐더러, 몇 가지 회심을 찌를 창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였다.
시우와 수유는 시헌이 내민 포션을 머금었다.
지금 당장 왕과 맞부딪힐 전력이 되는 유일한 두 사람이었다.
“지금 도우러 가겠습니다. 지원 마법을 부탁할게요.”
“….”
체면이 구겨진 안젤리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금 세상을 지키는 사람은 누굴까.
설령 왕을 위한 시련으로 탄생된 존재일지라도, 남들에게 비쳐보이는 모습은 그와 별개였다.
몇몇 성직자들은 신앙마저 꺾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을 구원할 사람이, 신이 아닌 적군의 왕이라니?
-툭.
준비를 마친 정시우가 다시 성검을 들고 일어섰다.
*****
부족하다.
‘멀었어?’
[조금만 더….]
주먹과 검이 맞부딪히자 공간이 찢어졌다.
속도는 이미 음속을 돌파한 상태.
귀와 눈이 인식하기도 전에 몰려오는 검짓들을 손과 발로 쳐내고 있었다.
“큽!”
검에 팔뚝이 베이자 피가 솟구쳐 나온다.
마력이 터져 나오며 놈의 힘이 내 상처부위를 혈액과 함께 터뜨리자 고통이 몰려왔다.
─우웅!
알바의 마력이 나를 감싸 고통을 가라앉게 했다.
뒤에서 믿음직스럽게 펼쳐지는 마법들은, 분명 효과가 있었지만 악마의 대처가 너무 빨랐다.
이전의 나를 넘어서고,
또 넘어서고.
몸과 영혼을 불사르는 순간에도 부상이 늘어만 간다.
‘…더.’
이를 악물어 더욱 정교하게 움직인다.
‘더, 더!’
우습게도 사람은 필요에 의해서만 성장하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여러 무공의 대안점이 솟구쳤다.
“……!”
악마는 아무 말 없이 온전히 전투에 몰입해있다.
나 역시 잡념을 없애고 부딪혔다.
-쾅!
한 방을 나눈다.
-쾅!
다시 한 방을 나누었다.
-쾅!
권무와 검격은 끊이질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몸에 상흔을 나누던 그때. 드디어 신호가 떨어졌다.
[됐…어요!]
‘그럼 지금 당장-’
“읏!”
-콰앙!
검격이 팔뚝을 후려쳤다. 팔에 두른 마기가 진동하며 근육이 짓물러 터졌다.
아무래도 공기의 변화를 눈치 채고,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
나는 무공을 구사하며 최대한 빠져나올 타이밍을 쟀다.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알아챈 시우가 움직였다.
-번쩍!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수목이 나와 악마의 사이를 끊어놓았다.
끼어든 정시우가 갑옷도 벗어던진 채 검을 휘두른다.
“….”
힘이 상당히 빠져있어 나약한 일격.
결국 나는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물린 정시우의 몸은 무방비했다.
-쿵!
검을 받아낸 악마가 이합을 휘두른다.
정시우의 몸이 양단되며 잘려나갔다.
“!”
잠시 눈을 의심한 광경. 희생이라도 해버린 걸까.
그 순간 정시우의 몸이 건조된 나무껍질로 변해가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그의 판도(Pando)가, 정시우의 몸을 구성했다.
‘살아있다.’
정시우의 생존을 확인한 즉시 정령을 소환한다.
하늘에 펼쳐진 녹색 마법진과 함께 나타난 에리니에스가 왕관을 펼치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 당장, 이 세계에서 사라지세요! 】
손아귀에 뭉친 권능과 흡사한 힘.
순리를 꿰뚫는 형질의 광선이 드러나자 악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서렸다.
─쿠과아아아!
왕관이 발광하며 뿜어진 광선이 악마를 덮친다.
악마의 신체를 구성하던 갑옷이 떨어져 나가며 그의 몸을 순식간에 관통했다.
【 읏…. 확실히 잡아냈- 】
희비가 갈리는 순간.
나는 재빠르게 포션을 물었고, 악마의 신체가 바스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정시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끄읍, 흐, 크흐흐. 해볼만 한 도박이었지? 시헌아.”
다 죽어가는 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판도(Pando)에서 새로 몸을 구성한 정시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판도(Pando).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거대한 수목의 군락.
정의의 세계수의 권능인 그것이 무슨 힘을 감추고 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아니야.’
쎄하다.
판도(Pando)는 특수한 수목의 개체.
수 천개의 수목이 사실 같은 개체로 묶인다.
정시우가 보여준 모습을 볼 때. 판도의 능력은 다른 개체로 옮겨갈 수 있는 힘이라 해석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보자 보이는 거대한 내장의 뒤척임.
저것이 정시우의 힘과 같은 형질이라면….
‘저 이물이 사라지지 않았어.’
【 그게 무슨 소리죠? 】
‘정령화를 준비해. 지금 당장.’
하늘의 판도가 갈라지며 그 크기가 줄어든다.
내장과 수목의 줄기들이 서로 압축하고, 뭉쳐지며 작아졌고.
이윽고 인간의 형태를 띄운 그것을 보자 나는 강제로 에리니에스에게 마기를 불어넣었다.
수목의 왕이다.
재차 강해진 놈이 다시 몸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 갑자기 그게 무슨- 】
“빨리.”
【 히으으윽?! 】
에리니에스의 간드러진 교성이 별안간 전장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