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617화 (617/657)

< 617화 > 세 가지 카드 (3)

─우우우웅!

질척한 마기가 에리니에스의 굴곡진 몸을 감싸더니, 내 몸과 이어질 준비를 마쳤다.

이완된 여체의 몸은 인간 여성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꿀럭, 꿀럭-

강제로 비어있는 그녀의 뱃속을 점점 내 것으로 채워나갔다.

올바른 정령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마력 생명체인 정령의 신체를 나에게 맞추는 과정.

【 ……끄읍. 】

이를 악문 에리니에스가 발버둥을 치며 마기를 밀어낸다.

‘뭐하는 거야?’

【 …이런 짓은 하지 말아요. 제발 그만두세요. 】

자비를 구하는 여왕의 목소리가 애걸하게 울린다.

‘정령화를 하겠다고 계약했을 텐데.’

급하다.

품에서 포션을 꺼내 입에 머금은 다음. 마기의 출력을 높인다.

에리니에스의 저항이 무색하게 그녀의 몸이 점점 더러운 색으로 물들어 갔다.

【 흐으윽…! 도대체 이 마력은…. 말도 안 돼! 】

저항이 강하고, 마음처럼 휘두르기 쉽지가 않다.

괜히 정령의 여왕이 아니다. 하물며 왕관 사용자. 에리니에스의 의지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정령화는 택도 없었다.

나는 바로 다음 포션을 마시며 그녀에게 종용했다.

‘받아들여.’

【 싫어요…. 】

‘이게 네 딸을 구하는 일일 거야.’

【 제 힘으로 충분히 저 남자를 이겨낼 수… 흐그으읍! 】

마기로 민감한 곳을 찾아 비틀자. 에리니에스의 몸이 뒤틀렸다.

고고한 여왕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는 것은 한 순간.

새하얀 드레스 속 그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아찔한 숨이 퍼져나간다.

【 ……. 】

보여줄 건 충분히 보여줬다. 수목의 왕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에리니에스는 마지막 일선을 넘길 주저하고 있었다.

마기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알고 있잖아.’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토벌은 힘들다고, 몸으로 충분히 깨달았겠지.

악마를 쓰러뜨리기엔 힘이 부족하니 속으로 갈등할 수밖에.

─꾸득, 끄드득.

판도(Pando)를 흡수한 수목의 왕이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이나마 환희에 물들었던 주변 사람들이 다시 절망에 빠졌다.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정시우는 더 이상 힘을 내기 애매하다.

산수유는 시간을 끌 수는 있어도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는 없었다.

‘당신.’

그때 알바의 전음이 울렸다.

‘저 이물의 크기가 줄어들었어요.’

‘이물이라면… 저 위에 있는 저거?’

수긍한 알바가 하늘에서 내려와 숨을 몰아쉬었다.

수목의 왕의 모든 마법을 쳐낸 알바다.

수유와 시우의 도움을 받은 나와 달리 사실상 혼자 해결한 셈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하려는 건 정령화죠…. 더 할 수 있겠어요? 포션은요.’

‘해내야지. 포션은 절반 정도 남았어.’

‘후후, 도망쳐서 숨어 사는 것도 방법이에요.’

장난이 조금 섞인 알바의 말에 나는 얼떨떨하게 웃었다.

‘도망은 무슨. 행복해지기 전에 이 차원이 망할 걸.’

‘몇 년만 지나면 제 위키가 다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아빠의 실수를 딸에게 넘기고 싶진 않다.

다른 세계라고는 하나 자기 아빠를 죽일 위키의 감정은 생각해 줘야지.

‘여왕…. 잘도 저런 존재를 끌고 왔군요.’

운이 조금 따랐다.

나는 바로 다음 포션을 머금었다. 달짝지근하게 퍼지는 끈적함이 너무 자극적이라 두통마저 어릴 정도였다.

그때 알바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와드릴게요.’

공중에 떠 있는 나와 에리니에스가 한 순간에 알바의 마력으로 엮였다.

【 으으으읏! 】

뻑뻑한 곳을 억지로 밀어내어 연결시키려는 느낌.

정령화는 처음이 가장 어렵고 아프다.

막말로 몸으로 맺는 관계와 비등하다.

비유하자면, 이어지는 순간 알바가 상냥하게 내 등을 밀어준 셈.

에리니에스는 그조차 애를 쓰며 막아냈다.

【 제가, 혼자 쓰러트릴 수 있어요. 】

‘힘들어.’

【 흐읍, 끄으윽. 저는 알카디아의 여왕…! 】

에리니에스의 손이 앞으로 향하더니. 마기로 응축된 마법이 쏘아졌다.

─콰아아앙!

하늘을 뒤덮는 폭음.

일어난 파동이 악마를 향해 쏘아져나갔지만 허무하게 대검에 잘려나간다.

【 어째서, 대체 왜! 】

경악한 에리니에스가 왕관을 진동시키며 다시 힘을 끌어모았다.

평정심이 흔들리니 마법도 거기까지다.

나를 상대로는 훌륭했던 전투력도, 압도되는 상대에겐 이렇게 무력했다.

심지어 정령계의 왕관을 사용했음에도.

본신으로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에리니에스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 힘이 필요했고.

“…이시헌.”

악마의 몸이 나를 향해 기울어지더니 곧 부닥칠 작정으로 날아왔다.

【 이곳이 알카디아였다면…. 】

‘그땐 떼죽음이니 힘을 넘겨.’

【 읏, 끄으으! 】

다가오는 수목의 왕.

에리니에스는 있는 힘껏 버티다 결국 굴복하였는지, 저항을 풀어 내 마기를 받아들였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내지 않은 그녀. 머지않아 에리니에스의 신체가 나와 동화되었다.

【 정령화 】

또 다른 힘의 극의.

들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시야가 확장된다.

폭증한 오감이 예민해져, 인간의 경계를 초월한 상태에 다다랐다.

바람과 마력의 흐름이 관측된다. 아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 안에 가득 차듯 들어왔다.

─후우우웅!

수목의 왕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거대한 무리의 마력들.

스스로 태풍의 눈이 된 양. 온 세상의 마력을 빨아드린 왕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당신…!’

알바의 전음을 씹으며 팔을 뻗었다.

【 천마신공(天魔神功) · 정령의 태세 】

손과 팔에 두른 마기가 빙글빙글 맴돌며 막을 만들었다.

-파바밧!

증폭된 감각으로 이성이 멀어지고 본능이 의식을 차지했다.

머릿속으로 판단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수족이 움직였다.

대검을 피하고, 턱을 후려친다.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행위는 잠시나마 악마의 속도를 상회했고.

-쾅!

고개가 돌아간 악마의 심장을 향해 아귀를 펼쳐 마기를 퍼뜨렸다.

【 화련등보(華聯燈?) 】

회피와 기동, 그리고 격을 초월한 마법.

아귀에서 펼쳐진 검은 파동이 왕의 왼쪽 가슴을 뚫고 팔과 어깨를 수몰시켰다.

“…또 다른 힘인가.”

미처 해석되지 않은 마법에 대검을 떨어뜨린 악마가 물러선다.

하늘에서 몰려온 나무의 갑피가 텅 빈 그의 몸을 수복했다.

‘파악할 틈도 없이 몰아붙여야 해.’

【 끄으으읍…. 】

고통이 심한지 경련까지 하는 에리니에스.

단계적으로 올려야 할 힘을 한 번에 끌어내었으니, 적응이 되지 않을 법하다.

‘버텨. 여왕이잖아.’

【 그게 무슨 상…. 읏, 관인데요! 】

앞으로 더 거칠게 다룰 예정이니까.

에리니에스의 비명을 들으며 양 손에 마기를 증폭시켰다.

-쿠구구구구!

공간을 두드리자 깨진 유리처럼 일어난 균열이 악마를 향해 뻗어나갔다.

마땅히 급을 정하지 않은 마법.

정체 모를 인력이 공간의 균열에서 뿜어져 나왔고, 악마의 몸이 갈라졌다.

─쿠웅!

밀려온 어둠이 하늘을 감싼다. 징그러운 판도가 완전히 가려지고 거대한 마기의 파도가 뒤를 이었다.

악마를 향해 몰아치는 무수한 마법들.

【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의 힘을…. 】

정령들의 신체는 이렇게나 효율이 뛰어나다.

이 상태라면 불가능했던 일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 천마신공(天魔神功) · 정령의 태세 · 완성형 】

마기를 폭주시키자 팽창하는 근육.

이제부턴 일대일이다.

품에서 마지막 포션을 꺼내 입에 물었다.

단전에 넘칠듯한 마기를 모두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등 뒤로 병을 던지자,

-쨍그랑!

이윽고 울리는 파열음.

왕은 나를 보며 눈을 기울였다.

“…준비해온 게 많군.”

대검을 떨어뜨리더니. 주먹을 쥐어 마력을 터뜨린다.

왕이 입을 벌리고 숨을 끌어모은다.

왕관이 맥동하자 붉은 기운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다.

“인정하마.”

질척이는 왕관의 폭주. 그 안에서 인자의 비명이 들려온다.

저기서 더 강해진다.

그게 가능한 건가?

뒤덮인 갑피가 두터워지더니, 왕의 머리에 붉은 빛이 덧씌워졌다.

【 4차 동화 】

순간, 도시를 삼킨 거대한 빛무리.

내가 펼쳐놓은 마법이 터져나온 휘광에 무력화되어 사라진다.

─번쩌어억!!

광명에 되삼켜져 세상이 빛으로 가득찬다.

더럽고 역겨운 색의 빛.

이어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가,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었는지.”

“…….”

“이젠 알 것 같다. 너는 강하다.”

왕관은 단계에 걸쳐 몸에 동화해 힘을 제공한다.

그 단계가 높아질수록, 이성을 잃고 폭주할 공산이 크고.

솔직히 나조차 왕관을 전부 받아들이긴 버거웠다.

놈은 왕관을 지배한 모든 차원의 유일한 인간이다.

인자를 굴복시키고, 부러진 왕관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반으로 갈라진 왕관이기에 그게 가능했던 거겠지만.

“왕관과 결합했나.”

악마의 머리 위로 돌출된 왕관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시관이 완전히 몸에 동화되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전달하고 있다.

-파지직.

팔뚝을 타고 흘러나온 마력이 악마의 아귀에 맺힌다.

마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응축된 위험한 힘에 내 뺨이 경련했다.

────!!!!!

고막이 터질 정도로 거친 마력의 울림이 천지를 뒤덮었다.

알바조차 견디지 못하고 두 팔을 움츠릴 정도.

“…순 괴물이군.”

이성을 반쯤 잃은 살기어린 악마의 눈동자가 내 목을 쳐다본다.

아까와는 달리, 넋을 놓은 놈에겐 살의와 공격성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마물을 보는 기분이다.

광기에 짓물린 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다 움츠린 놈은 입을 벌려 진득한 타액을 떨어뜨렸다.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이 쩍 벌어진다.

입안과 목청을 뒤덮은 나무의 갑피가 그의 정체성을 헤집어 놓았다.

돌아올 수 없는 전철을 밟는다는 건, 저런거겠지.

나는 침묵 후 자세를 잡았다.

*****

[…가지와 이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균열도 닫히고 있어요.]

죽어나간 헌터와 박살 난 병기가 전장을 채운 이 순간.

처음으로 희망을 본 이들은 직후 울린 ‘괴성’에 다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울 중심.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관측될 수준의 마력 반응.

[이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 있는 민간인 정도는 전부 죽일 수 있는 게 아닌지.]

별은 자꾸 뜯어서 피가 나는 입술을 가리며, 침묵에 빠졌다.

강대한 마력 반응은 두 곳에서 관찰되고 있었다.

하나는 악마이고, 다른 하나는.

‘이시헌….’

이시헌이 재앙에 맞서고 있다.

별의 눈이 어느 한 곳에 옮겨갔다. 이시헌이 끌고온 여인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구슬과 홍연, 태양과 아오리. 그리고 치유와 인내의 세계수.

아. 하나 더 있었다.

“잠, 잠시만요. 기다려주세요!”

발을 동동 구르며 사상자를 치료하고 있는 귀여운 마로니에.

새로이 나타난 현자라던가. 대마법사 아비가 블랑쉬를 지켜보며 어르신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의 시선에 아비가 블랑쉬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아, 협회장. 이제 어쩔겐가?”

“…도우러 가야죠. 전선은 이겨냈으니.”

“돕는다라…. 우리가 간다고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말이 안 되는 힘이야.”

할 수 있는게 없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정점에 달하는 두 사람이 부닥치고 있는데, 경지도 넘지 못한 이들이 뭘 하겠는가.

“세피로트님이나, 오대 세계수라면… 반향을 가져올지도 모르지.”

대리자가 펼치는 세계수의 힘과 달리, 본신의 힘은 광활하다.

그러나 엉덩이 무거운 수목들이 대체 뭘 돕겠는가.

항상 나서다가 죽어가는 건 우리 인간이나 목인들이다.

“그래도, 가야겠어요.”

“그런가. 저 여인들도 전부 따를 모양이던데.”

“…저 분들은 그 사람의 신하니까요.”

전선이 정리되는 즉시 구슬과 홍연은 앞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별은 주먹을 쥐고, 한숨을 쉬었다.

‘세영이도 오고 있어.’

시바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모이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무언가 잃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잃더라도.’

그 옆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다.

예전에는 그리하지 못했으니까.

“…저, 저기. 헌터 협회 회장님?”

그때. 커다란 모자를 쓴 귀여운 마녀가 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치료 행위를 거의 마친 걸까.

“아, 네. 현자님.”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자 보이는 귀여운 베이비 페이스.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눈동자의 마로니에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중앙에 가시는 거라면. 함께 갈 수 없나요?”

“?”

불안해 미치겠다는 듯 동동 구르는 발.

귀여운 모습에 얼핏 섞인 쓸쓸함에, 별의 감각이 다시 발동했다.

‘애처(愛妻)…?’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첩실의 왕으로써 식은땀이 난다. 자리가 위협 받는다.

별의 정수리 털 레이더가 폭주하듯 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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