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619화 (619/657)

< 619화 > 내 아이가 죽지 않는 유일한 세계

“삐!”

전장은 삽시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별안간 튀어나온 시바에 의해서였다.

-톡톡톡톡!

부수어진 바위를 위태위태하게 올라서서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간다.

싸울 능력조차 없는 다섯 살 배기 꼬마 아이가 대체 어떻게 저기까지 간 걸까.

시바의 몸에서 연두색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싱그러운 색과, 놀라운 속도.

“시바쨩!!”

시헌의 딸을 데려온 두 사람은 돌연히 일어난 시바의 행동에 당황해 온 힘을 다해 쫓아오고 있었다.

뒤늦게 확인한 알바가 손을 쓰려 했을 땐 이미 늦은 뒤.

‘안돼.’

수목의 왕은 이미 이성을 잃고 폭주한지 오래다.

지금 시바가 뛰쳐 나갔다간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몰랐다.

몇 초의 간극, 최대한 빠른 판단을 내린 알바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드드드득.

산수유의 마력이 터져나오며 알바의 의식이 톡- 끊어졌다.

두통이 몰려오며 시야가 아득해지기도 잠시.

재빨리 시각을 되찾은 알바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올려보았지만, 그녀가 저지하고 있던 산수유의 힘이 알바를 겁박했다.

“읏!”

당장 이시헌을 향해 뛰어가려는 그 힘은 추측조차 못 할 규모.

몸집을 키우는 호숫가. 해방한 산수유를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무한한 두뇌를 가진 그녀조차 버거운 상황.

주박으로 이를 막던 알바의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당장 놔…! 시, 시헌이 이러다 죽으면….”

이성을 잃은 산수유가 소리를 지르며 기를 쓰자, 알바의 손발이 추를 단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치를 깨부순 마법과,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

두 사람의 마력 다툼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알바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가까스로 전음을 짜내었다.

‘당신. 거기 시바-’

시바가 가고 있어요.

뒤이은 말이 짜내지기도 전에 산수유의 마력이 그녀를 억눌렀다.

도중에 몇몇 기사가 시바를 지키기 위해 막아섰지만. 요리조리 틈을 노린 시바가 아빠를 눈에 담기 위해 몸을 날렸다.

“빠아!”

아빠가 저기에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단지 그를 눈에 담기 위한 모습이다.

“잠깐. 읏! 이시바!!”

“시바쨔아앙!”

수연과 사쿠의 이를 악문 고성이 전장을 울렸다. 두 사람의 전력보다 더 빨리 도착한 시바의 몸이 이윽고 멈춰섰다.

“…아빠?”

30m.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뒤에 다가오는 수연과 사쿠를 인식하기도 전에 시바를 본 두 아빠가 움직였다.

온몸이 찢어진 이시헌이 몸을 날린다.

수목의 왕의 손이 뻗어나가 ‘가지’를 뿜어댔다.

인식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일어난 현상. 시바의 몸에서 싱그러운 기운이 떨어져 나갔다.

멍한 얼굴의 딸 아이가 지친 아빠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빠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늘 시바를 귀여워 해주고 자랑스러워 했던.

하지만 어리고 여린 정신의 꼬마는 이 상황을 인식하는 것조차 시간이 걸렸다.

검은 옷을 입은 멋진 아버지.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 사람이 시바의 몸을 감싸듯이 덮고 있었다.

-똑.

시바의 볼에 떨어지는 변질된 색의 핏방울.

콧잔등에 맺힌 피를 본 시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시바의 아빠는 지쳐 있었다.

“빠아…? 삐…. 피.”

풀린 동공. 한쪽 눈은 감긴 채, 다른 눈으로 눈웃음을 짓는다.

먼지투성이의 뺨을 떤 남자가 시바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툭, 툭.

몸을 완전히 관통한 ‘가지’가 양 어깻죽지를 관통해 있다.

복부와 등허리에 박힌 ‘가지’역시, 그의 신체 장기를 들쑤시고 있었다.

아이의 앞이기 때문일까, 이시헌의 양다리엔 지친 탓에 일던 떨림이 멎어있었다.

최대한 아파보이지 않게 듬직한 모습으로.

“시바.”

“…삐.”

오열하는 소리가 가득 찬다. 울음투성이의 전장에 새하얀 판막이 생겨났다.

“뚝.”

시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 갈라진 입술이 얇아지며 호선을 그렸다.

달려오던 사쿠와 수연이 이시헌의 모습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원형을 잃어버린 악마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제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파앗!!!

알바의 주박에서 풀려난 산수유가 악마를 덮쳤다.

손에서 펼쳐진 샛노란 마력이 악마의 앞전에 터지자. 그는 산수유의 목을 베기보단 저항 없이 물러서길 택했다.

벙찐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악마.

알바는 부녀의 재회를 아무도 볼 수 없게 새하얀 안개를 꾸려 퍼뜨렸다.

“……빠아. 삐아아앙….”

여린 시바의 목소리가 귓전에 딸랑이며 달라붙었다.

호흡이 끊어졌다 돌아오길 반복한 시헌은 시바의 품을 끌어안고 놓질 않았다.

그간 보지 않으려 했던 딸 아이.

시야가 흐릿해진 사이에도 시바의 이목구비만은명확히 보이는지.

이시헌은 익숙하게 시바의 등을 두드렸다.

“시바, 뚝. 그쳐야지.”

“빠아… 흑, 삐이이이잉!”

“피가 아니라, 아빠가 그린 분장이야.”

그런 말에 속을 리가 있을까.

시바는 모든지 알고 있었다. 전말은 몰라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빠아, 으으으응. 아빠아아….”

피에 젖은 흑룡포에 눈물지은 볼을 연달아 비벼대며 우는 시바.

고릿하게 퍼져가는 지독한 혈향에 몸서리쳐도 이상하지 않은데, 시바는 더더욱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3년이다.

우리가 헤어진지 3년이나 지났다.

얼굴에 두껍게 깔아놓은 아빠의 부끄러운 가면도 벗겨지고, 어려진 시바는 옛날의 동심으로 돌아와 상처를 잊었다.

-턱, 턱!

‘가지’가 움직이며 이시헌의 폐를 지분댔다.

‘가지’가 턱턱- 그의 몸을 흔들어댈 때마다 시헌의 몸이 바람 앞 밀밭처럼 흔들렸다.

“…….”

“빠…아?”

고개를 숙인 시헌의 얼굴에 진 그림자.

시바가 다급하게 아빠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그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가-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툭, 한 마디를 뱉은 후. 그는 제 딸을 힘껏 밀쳤다.

밀쳐진 시바가 뒤로 내동댕이쳐진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엎어진 시바가 다급하게 아빠를 바라보았다.

시바가 올려다보기엔 너무나 커다랗고 듬직한 아빠.

그의 가슴을 들쑤신 ‘가지’가 이시헌의 몸에서 뽑혀나가며 시꺼먼 혈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회색빛으로 탁해진 동공.

두 주먹을 쥔 이시헌의 신체가 기우뚱 꺾이다 멈춰섰다.

─우우웅!

의식을 잃은 채 짜내는 마기. 시체나 다름없는 몸뚱이에서 터져나온 마력이 몸을 뒤덮었다.

의식없이 목적만을 가진 인형처럼 고개를 돌린 이시헌.

생각이 멈춰서인지, 그는 그만 피로 흠뻑 젖은 등을 내보이고 말았다.

“…삐.”

시바의 눈망울이 더 떨린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던 것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일어서려던 찰나.

─번쩍!

두 손으로는 셀 수 없을 수의 여인들이, 시바와 이시헌을 감싸듯 나타났다.

*****

짧은 블랑쉬의 두 팔이 이시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새하얀 마녀 복장에, 핏빛 꽃잎이 번져나갔다.

“몽셰리… 그만. 너무 다쳤어.”

빈사가 된 그를 보자마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나 아오리, 세계수들, 홍연부터 별, 다른 여인들까지.

당혹스러움에 비명을 지를 법도 한데. 그녀들은 침착하게 이시헌을 말리길 택했다.

─크르르륵.

여인들의 위로 거대한 늑대가 이시헌을 지키듯 그들을 감싼다.

붉은 수목의 늑대, ‘해방’을 거친 구슬이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온 힘을 꺼내들었다.

“……시헌아?”

별이 묻는다. 대답은 없었다.

“씌잉….”

울컥 눈물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참아낸 별이 쌍수를 들고 앞서나갔다.

이미 이성을 놓은 산수유는 언제든지 악마를 베어낼 수 있도록 온 신경을 기울인 상태.

“…….”

“…….”

사쿠와 수연은 얼떨결에 그들에 섞여, 이시헌의 구멍 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토벌됐을 터인 그가 왜 살아있는가.

그 이유는 지금 당장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세계수가 해내지 못한 걸 그는 하려고 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무수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한국의 국목인 수연에겐 은원이나 마찬가지, 사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드득.

이시헌의 굳은 팔이 움직인다. 앞서가려는 그 행위에 블랑쉬가 질질 끌렸다.

“서방님 잠시만요!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정말 죽어요…!”

“당신…. 지금은 그만 멈춰서-”

알바와 치유가 그 팔을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마력과 권능을 토했다.

포션이 몸을 적신다. 피투성이 고개를 숙인 이시헌이 희미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채가 서린 그의 탁한 눈동자가 수목의 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

“…….”

그것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나타나더니,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세를 잡은 여인들.

넋을 놓은 악마는 양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긁어댔다.

그의 허망한 눈짓이 살벌하게 꽂혔다.

“왜….”

왕은 아빠의 다리를 감싼 시바와 여인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멀쩡한 건데.

죽어라 노력했는데, 왜 난 저렇게 될 수 없는 건데….

“….”

왕의 몸에서 ‘가지’가 솟아난다. 그의 몸이 움직일 기세를 보이자 별과 산수유가 무기를 치켜 올렸다.

“윽, 끄으읍. 끄으!”

비틀거린 악마가 얼굴을 뜯어대며 답답한 소음을 냈다.

모든 게 밉다. 그냥 전부.

악마의 눈앞에 저들의 죽음이 하나씩 새겨졌다.

약물에 중독되어 실험에 끝을 맞이한 산수유.

피를 흘리는 연구실의 손자국이 눈에 남는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그의 이름을 되뇌이곤 했다.

토벌대를 혼자 막아보겠다며 억지 웃음을 지으며 검을 빼든 한별.

사지가 분리된 채 돌아온 그 참담한 광경을 기억한다.

무궁에게 죽음을 맞이한 아오리도, 태양도.

하물며 끝내 죽어간 내 딸 아이까지.

“읍, 끄으으으으!!”

악마의 입이 벌려지자 침방울이 튀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산수유가 먼저 검을 빼들어 튀어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여인들에 보호되듯 감싸였던 시바가 울분에 차 소리쳤다.

“미어!!!!!!!!!”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친 그 여린 목소리.

분노에 찬 악마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아저씨, 미어…. 왜 시바 아빠 괴롭…혀?”

당황한 여인들이 시바를 안으려 했지만, 거칠게 저항했다.

분노에 가득 찬 시바가 눈물을 흘리며 악마의 속을 쑤셔팠다.

“사라져… 미어. 저리 가!!”

혐오에 찌들어 소리치는 여린 목소리.

아이가 말했다.

악마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의 아이가.

“…….”

시바는 아픈 아빠를 너무 사랑해 울고 있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꽉 잡고 복받친 서러움에 아빠의 다리를 다시 껴안았다.

그 목소리에 담긴 혼잡한 감정이 악마의 목을 매이게 했다.

차갑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커진 동공이 점차 흐려지며, 악마의 입이 닫혔다.

맹목적인 사랑.

내가 얻고자 한 것이 저기에 있었다.

어려진 시바는 조금이지만 어른일 적의 기억도 남아있는지. ‘아저씨’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조금 정이 남아있는 목소리.

그럼에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이 악마의 가슴을 산산조각내었다.

─툭

그때. 이시헌이 발을 내딛었다.

죽음에 완전히 몰린 상태의 몸을 이끌고, 살기가 흘러넘치는 험상궂은 눈초리를 유지한 채.

아픈 팔을 들어올려 마기를 뿜어댔다.

‘….’

의지가 꺾인 악마가 팔을 내리고 주저앉기 직전.

악마는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어느 순간이 잘못된 걸까.’

모든 실패를 맛보았다.

여러 차원을 무너뜨리며, 시바를 살릴 방도는 이것뿐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내 운명은 고통받을 뿐이라고. 무수한 선택으로 무수하게 태어난 나를 다른 방식으로 죽여가면서 확신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순결의 세계수.

그녀는 다른 차원의 경우를 보고 운명을 비틀 힘이 있다고 하였다.

만약 지금까지의 차원을 확인한 순결이, 이 세계의 이시헌을 여기까지 도달하도록 도움을 준 거라면.

순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처음부터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목적은 이거였나.’

악마는 이해했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순결이 그에게 사과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녀들은 이 세계보다 더 적은 차원을 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나 많은 경우의 수에서.

오직 이곳만이 완성된, 내 아이가 죽지 않는 유일한 세계.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 딸은-’

죽음을 피할 수 없던 것이다.

“아.”

공허한 왕이 헛숨을 내뿜은 순간이었다.

【 끼히익? 】

‘가지’가 그의 몸을 덮치더니. 신체를 관통해 왕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악마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슬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목걸이를 쥐어뜯었다.

‘아빠 힘내세요.’라고 적힌 색종이 목걸이.

그의 목에서 평생 동안 떨어지지 않았던 그것이, 진흙에 갇혀 뭉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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