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1화 > 우당탕탕 연인 시장 (1)
상처투성이의 고목이 여기저기 드러난 곪은 아픔을 두고, 말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순간에 비쳐 보인 웃음은 과연, 누구를 위한 미소였을지.
아이를 위해 수목이 되었고 학살을 자행하는 악마로서 살아왔다.
맥없이 내려간 눈꺼풀에 밀려 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목의 신체를 하고 있음에도 죽는 순간만은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걸까?
이시헌.
그는 분명 다른 세계의 이시헌이었다.
처음부터 이 남자가 잘못된 길을 걷지는 않았으리라.
온갖 수를 다 써봤지만, 그럼에도 통하지 않아 주변의 모든 걸 빼앗긴 뒤, 끝내 무너진 것이겠지.
─포옥.
그의 비참한 최후에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가슴에 더해진 안도감과 은연중에 피어오르는 불쾌함. 침울감. 그리고 불안.
혼합되지 않는 여러 감정이 치고박으며 두통을 유발했다.
“…….”
이시헌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지나쳐간 악마의 낯빛이 눈앞에 점멸해가며 나타났고, 다가온 여인들이 그의 품을 껴안았다.
점차 더해지는 그녀들의 무게에 이시헌의 몸이 기울어졌다.
이들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정리할 것도 많고, 알려야 할 것도 무척이나 많았지만.
지금은 쉬자.
그들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
한동안 꽤 바쁜 일상을 맞이해야 했다.
일상이라고 해야하나.
지금 대한민국의 상태를 미루어 말해보자면, 말 그대로 좆됐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이다.
전 현자. 알바는 왕의 잔해를 처리한 후 블랑쉬와 함께 복원 작업에 힘을 쏟았다.
이번 토벌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별은 한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제 2의 무궁이라는 별명과 함께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불온한 플라워의 움직임이 관측되었다.
며칠을 주기로 발발한 테러 행위가 각국에 심각한 손해를 입혔고, 이들이 믿던 ‘신’이라는 근간 자체가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플라워의 움직임은 마치 처음부터 이를 계산했다는 듯 철저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목인교도의 힘은 온건파 강경파 할 것 없이 크게 위축되었다.
냉전은 끝을 맞이해, 다른 파란을 불러올 예고를 마쳤고. 목인교도는 ‘용사’ 정시우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눈치챈 여러 세계수가 현신해 국가를 지탱할 힘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토벌을 집도한 목령왕은.
-딸깍.
“시헌이는?”
“아직도 자고 있어.”
제 딸 시바와 함께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별의 물음에 사과를 깎던 세영이 답했다. 앞치마를 한 세영은 과도째로 사과를 내밀었고, 별은 사과를 뇸뇸 씹으며 투정을 부렸다.
“잉. 할 말이 엄청 많은데 일어나질 않네.”
“냅둬, 전 현자님이 말씀하셨잖아. 시바랑 시헌인 몸에 부담이 너무 많아서 저렇게 조치한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글치…. 어떻게 사람이 3년이나 생존 사실을 숨기냐?”
섭섭당 대표 별이,
입술이 댓발 나와서 눈물방울이 차올랐다.
“……근데 넌 왜 멀쩡해보이냐?”
사실 미리 알고 있었어.
그리 말했다간 몹시 빡친 별이 길길이 날뛸 것이다.
세영은 자신이 깎은 사과로 본인의 입을 막아버렸다.
-부스럭.
그때, 이시헌의 침실에서 울리는 불온한 소리.
사과를 꿀떡 삼킨 별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방 안에 숨어든 녀석에게 소리쳤다.
“야, 노랭이! 너 또 시헌이 못 자게 괴롭히지!”
“…!”
어깨를 잔뜩 부풀리곤 이시헌의 방으로 들어간 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 리트리버를 질질 끌고 왔다.
목덜미를 잡힌 댕댕이가 억울한 듯 낑낑대며 끌려 나온다.
“또, 또또또또 나쁜짓!”
“잉….”
“하여간에 애는 진짜.”
최강의 헌터 ‘사냥꾼’이 오래전에 죽은 산수유라는 진실을 알았을 때. 별을 포함한 여인 일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가슴이 크다 했어.
그때 이시헌이 해내긴 했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산수유가 보여주는 기행은 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히에엑 세영아 얘 봐!! 이젠 브라도 안 차고 다니네?”
“…….”
“또 자는 시헌이한테 젖 물리려고, 이 요망한 뇬이!! 이이익!”
별의 손이 산수유의 가슴을 우악스럽게 짜낸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살덩이가 꽉 조여왔다.
“으읏…으응!”
발버둥치는 리트리버.
얼마나 치고받았을까, 현관이 열리며 한 꼬마 마녀가 쑥스럽게 들어왔다.
“…저, 저기.”
마로니에 블랑쉬.
산수유의 가슴을 쪽쪽 짜내던 별이 몸을 굳히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아, 어서와. 그러니까…. 현자님?”
“블, 블랑쉬라고 불러도 돼요.”
“응. 블랑쉬. 아, 시헌이 방은 이쪽이야.”
“네!”
꽃다발을 품에 안은 블랑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이시헌의 방에 들어갔다.
오늘은 병문안.
자고 있는 시헌이를 보기 위해 너도나도 몰려들 예정이다.
별은 산수유의 정수리를 꾹 누른 채 마로니에가 들어간 방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시헌이가 쟤도 꼬셨다~ 이 말이지? 프랑스의 아이돌을?”
“그런 셈이네.”
“으휴 못 살아 진짜잉!”
세영의 체념 섞인 말에 별이 발꿈치로 땅을 찍었다.
오늘 여인들이 모이는 이유.
병문안의 구실도 있었지만, 진실은 연인끼리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다.
하루가 다르게 문어 다리를 걸쳐가는 이시헌을 막을 수 없으니까.
늘어나는 건 둘째 치더라도 너무 혼잡해지지 않게 이해관계를 구축하자.
이만한 수의 일부다처는 역사에서도 손에 꼽는 경우이지만, 달리 말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다른 여인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며, 모두 이곳에 모이기로 했다.
요컨대. 애인들의 원탁 회의.
-덜컥.
마침 방에서 나온 마로니에가 조심스럽게 쭈뼛대며 세영과 별의 눈치를 보았다.
자고 있는 시헌의 뺨에 뽀뽀라도 했는지 살짝 붉어진 얼굴.
‘……귀엽네.’
별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으로 붉어졌다.
‘내가 설 곳이 없으면 어쩌지? 나 시발, 밀려나는 거 아니야?’
망상이 심해진다.
슬슬 자가당착에 빠지기 시작한 별.
‘아, 아냐! 시헌이가 나도 이쁘고 귀엽댔어!’
“저어. 협회장님.”
“어, 언니라고 불러!”
“그. 그럼 별 언니…?”
꺄아악! 소리가 나올 정도의 귀여움이다.
누가 여기다 아기고양이 데려놓으래?
별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고, 세영은 그런 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앉아.”
“아, 네…. 그런데 여기 모인 사람은 그럼.”
“응.”
이시헌의 어장이다.
‘아.’ 소리낸 마로니에가 모자를 벗고 삐죽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그루밍에 별의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아직 다 모인 건 아니니까. 편히 있어. 차라도 마시면서.”
“아…. 그럼 혹시, 괜찮으면 차랑 같이 과자는 어때요? 직접 구웠는데.”
호주머니를 조심스레 꺼낸 블랑쉬가 직접 구운 쿠키들을 꺼내 보였다.
어마무시한 애교! 심지어 맛있다!
초콜릿 펜으로 귀를 모나게 그린 고양이 쿠키에 별이 심장을 쥐어 감쌌다.
“너 뭐하냐.”
세영이 그런 별을 한심하게 바라본 것은 둘째였다.
‘어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로니에의 수제 쿠키로 배를 채워버렸다.
소매로 입가의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낸 별이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고심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순위가 밀려.’
내세울 게 없는 무특징 첩실은 잊혀지기 마련.
이렇게나 많은 연인 사이에서 스타후르츠마냥 상큼하게 톡톡 튀기란 무지막지하게 어려웠다.
‘사랑받아야 해. 강박에 빠질 수밖에 없잖아. 그래 이건 마치….’
목을 매는 취업 시장!!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신중하게 강점을 만드는, 우리는 취준생.
별은 마로니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귀여움은, 마치 서울대 마로니에!
“큭.”
“…? 아. 쿠키 맛은 어떤가요?”
“존나 맛있어….”
“아! 다행이에요, 헤헤.”
대기업이 바라는 중고신인 이세영은 논외로 쳐야했다.
‘저 녀석은 말하자면, 그래…. 스타트 기업일 적부터 함께해온 회장의 사랑을 받는 임원이라고. 아무리 병크를 터뜨려도 잘리지 않는!’
별은 침을 삼키며 산수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로니에가 가져온 쿠키를 씹어 먹으며, 마로니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
둘은 안면이 있던 건지 손도 잡고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수유…맞지?”
“응.”
“다행이다. 기사 떴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시헌이가 지켜준 거야?”
고양이와 강아지가 서로 핥아주며 웃는다.
저건…. 취업 동기!
노랭이 쟤도 한 귀여움 해서 문제다.
‘심지어 가슴은 부동의 탑티어…. 자격증은 하나 없는데, 대학이 하버드야!’
서울대 마로니에.
회장 인맥 이세영.
옵빠이 하버드 산수유.
별은 땀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저 세 명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
서른 날백수, 귀척 오지고, 지방 대학에, 게임 좋아하는 오타쿠.
가진 자격증도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뿐인 토익 650따리 널리고 널린 노동자!
“…….”
별은,
절망했다.
어디선가 보았던, 도박 묵시록 주인공의 표정을 한 별이 속으로 엉엉 울었다.
‘아. 아니 그래도… 내가 스펙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
전형적인 취준생의 구차하고 기다랗기 짝이 없는 변명!
이세영은 별을 보며 생각했다.
‘쟤 또 이상한 상상하네.’
벌써 몇 년지기인지도 모를 친구이기에 속을 훤히 꿰뚫어 본다.
이시헌이 뭐 좀 모났다고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걸까.
‘…….’
그렇게 말은 하지만, 세영 역시 불안감을 느끼고는 있었다.
관계를 너무 오래 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사랑을 재확인 한 적은 없으니까.
믿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 이시헌이다.
절대 내 곁을 떨어지지 않겠다 해놓고, 기어코 도망친 희대의 난봉꾼.
-사각.
“후우…. 이시헌 일어나면 보자.”
깎던 사과가 깊게 파인다. 세영과 별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젊고 귀여운 산수유와 마로니에.
감정의 교류가 깊었던 세영과 별이.
어쩌다 갈린 파벌에 신경전이 오간다.
-덜컥.
그때. 두 진영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
연분홍색 머리카락, 울음을 참고 있는 예쁜 얼굴.
예전에 그와 함께 다닐 적에 입은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진달래가 손가방을 쥐고 나타났다.
‘아.’
별은 직감했다.
내 순위가 또 하나 밀렸노라고.
회장의 아이를 키운, 애정하는 비서….
별의 망상회로가 고장나기 직전이었다.
*****
방에 들어와,
꽃을 두고.
그의 앞에 선다.
골아 떨어진 그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지만 울음을 어떻게 참으랴.
늘 꿈에 그리던 순간이었다.
차라리 그이 혼자 있었다면 의젓하게 서 있었을 텐데.
시바와 행복하게 마주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진달래는 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녀는 그리워했던 사랑과 가족을 되찾았다.
달래의 손이 눈을 감은 이시헌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살짝 땀에 젖어있었지만 괜찮다.
시바의 엄마는 그렇게, 한참이나 두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