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늑대를 고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미련한 양이다
레이라는 제 손에 쥐어진 것이 레사의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 방에 틀어박혀 수많은 실험을 자행했다.
핥고 빨고 문지르고 깨물고 쓰다듬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레사의 남근을 괴롭힌 레이라는 그것에게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레사의 남근이라 부르기엔 이름이 너무 길었고 또한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리하여 레사의 남근은 ‘로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로이에게는 기막힌 능력이 하나 있었다. 대리석이나 나무 등 닿는 면이 매끈하고 이물질이 없는 곳에는 척 달라붙는다는 것. 게다가 힘주어 꾹 눌러놓으면 제 자리라는 양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도 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짝 들어 올리면 뽁,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레이라는 제 침대 헤드에 로이를 붙여 놓고 온갖 실험을 빙자한 희롱을 할 수 있었다.
로이는 귀두, 귀두와 기둥이 연결되며 주름진 곳, 고환이 예민했고 사정하기 전에는 미세하게 더 검붉은 색을 띠며 딱딱해지다 부르르 떨린다는 것도 알아냈다. 핥아 주다가 입 안 깊숙이 넣고 흔들면 사정 시간이 가장 짧았고 유두나 클리토리스에 귀두를 비비적댈 때 선액이 가장 많이 흘러나왔다.
오늘 레이라는 아침부터 온갖 방법으로 로이를 흥분시키고 사정 직전에 멈추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검붉은 빛을 띠고 있는 로이는 레이라가 손끝으로 슬쩍 스치기만 해도 부르르 떨릴 정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붉어진 윗입술을 핥은 레이라가 빙긋 웃었다.
“꽤나 괴롭겠지.”
고대 서적에 적혀 있는 서큐버스도 지금 레이라의 모습에 비한다면 얌전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색정적이던 몸은 발긋하게 열이 올라 복숭앗빛을 띠었다. 깨물면 상큼한 과일 향이 날 것 같은 상상이 절로 드는 피부에는 촉촉한 땀방울이 새벽이슬처럼 내려 앉아 있었다.
붉은 입술은 쉴 새 없이 혀를 날름거리는 통에 반질반질했고 어딘가 풀려 있는 눈동자는 색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레이라는 레사를 괴롭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제 욕구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로이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레이라가 딱딱하게 발기되었던 힘이 슬쩍 풀리는 것 같아 보이자 바로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깜짝 놀라며 움찔대는 모양새가 퍽 가여웠다.
작은 자극에 로이가 다시 힘을 받으려 하자 슬금슬금 문질러 주던 손을 떼어 낸 레이라가 펼쳐 놓은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곧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았는지 배시시 웃은 레이라의 미소는…… 타락한 천사 같았다.
며칠 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위 붉은 딱지가 붙은 소설들을 싹싹 긁어모은 레이라는 제 침대 아래 숨겨 놓은 상자에 그것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중 하나를 읽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제 머리끈이 들어 있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얇은 머리 고무줄 하나를 꺼낸 레이라가 로이의 밑기둥에 그것을 몇 번 휘감아 묶었다. 터질 듯이 붉어진 로이가 꺼덕대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레이라에게 외치는 것 같았다.
헤실헤실 웃은 레이라가 귀두 끝에 입을 맞추고 살살 핥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린 그녀가 바들바들 떠는 로이를 전부 삼켰다가 침을 삼키는 것처럼 목구멍을 꽉 조였다.
고환마저 살살 쓰다듬던 레이라는 로이를 입 밖으로 꺼냈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숨이 막히고 목이 터질 것 같은 감각에 캑캑거리면서도 레이라는 즐거운 눈빛을 숨길 수가 없는지 연신 눈을 빛내며 눈꼬리를 휘었다.
눈물이 맺힌 루비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릴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 레이라는 힘겹게 로이를 뱉어 냈다. 이제는 숫제 발발 떨리는 것이, 마치 사정없이 간 것 같았다. 그 음란한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레이라는 만족스럽게 붉은 입술을 핥았다.
“이거 재미 들일 것 같단 말이야. 정들 것 같기도 하고…….”
레이라는 어느새 귀엽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려 귀두를 향해 내리눌렀다가 쪼듯이 쪽쪽거렸다. 그 자극에도 떨림을 멈추지 못한 로이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제 엄지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몇 번 굴렸다.
레이라는 젖은 손가락을 귀두 끝으로 가져다 댔다. 곧 미끈거리는 타액이 묻은 손가락이 귀두를 빙글빙글 문질렀다. 벌벌 떨던 남근이 더 팽창하듯 부풀어 올랐다. 방망이처럼 흉악해진 모습이 레이라의 음심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묶어 놨으니까 한 번 넣어 볼까.”
고민하던 레이라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졌다. 그래 봐야 얇은 슈미즈 한 장과 손바닥만 한 속옷이 전부였다. 하얀 나신이 요염하게 방 안을 활보했다.
레이라는 두리번거리며 로이를 붙여 놓고 제게 삽입하기 편해 보이는 장소를 물색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사이드 체어를 보며 눈을 빛낸 그녀가 로이를 뽁 떼어 내 그곳에 붙였다.
마치 나무 의자에 남근이 자라난 모양새였다. 우스운지 킥킥거리며 웃던 레이라가 촉촉해진 음부를 손으로 문질렀다.
“더 커진 것 같은데, 들어가려나.”
쪼그려 앉아 다시 귀두를 입에 문 레이라는 그것을 쪽쪽 빨며 제 음부를 비볐다.
“흐윽, 으응…….”
곧 손가락 하나가 매끄럽게 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꽉 무는 통에 손가락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저걸, 넣을 수 있을까. 레이라는 최대한 하체에 힘을 풀고 로이 대신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손가락이 질 안을 들이쳤다 나가는 속도와 귀두가 입 안을 들락거리는 속도가 똑같았다. 얼굴이 벌게진 레이라는 남은 손으로 유두를 꼬집고 가슴을 문지르다 손을 내려 클리토리스를 비볐다.
“흐으응, 부족해에…….”
살금살금 일렁이는 쾌감에 고개를 휘젓던 레이라는 벌떡 일어나 제 음부에 귀두를 문질렀다. 갑자기 얌전해졌던 귀두가 무엇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긴장이 되었는지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라는 의자 위로 자리를 잡고, 서서히 엉덩이를 내리며 앉았다. 오랜만인 데다 그러지 않아도 커다란 남근이 더 커져 있어 삽입이 녹록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탓에 몸만 잔뜩 달아올랐다.
그것은 로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급해진 레이라의 작은 손이 로이를 콱 틀어쥐었다. 겨우 귀두 끝만 아슬아슬하게 비비적대던 움직임이 멎자 선득해진 귀두가 몸을 움찔댔다.
팔딱거리는 심장 박동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레이라는 귀두를 질 입구에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끈하게 뻗은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레이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의 무게만큼 힘이 실린 것에 찢어질 듯 벌어진 질이 로이를 꿀꺽 집어삼켰다.
남근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렬한 삽입감에 레이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벼락이 계속해서 머리 위로 내리쳐지는 기분에 레이라의 발끝이 새우처럼 곱았다.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붉은 불꽃이 펑펑 터졌다.
초점이 사라진 붉은 눈동자가 색기를 잔뜩 머금고 빛나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 나체가 바르르 떨리자 탐스러운 가슴이 더 봉긋하게 솟는 것도 같았다.
작고 하얀 손이 딱 하나뿐인 동아줄을 쥐듯 의자를 꽉 쥐었다. 레이라의 안에 삽입된 남근, 아니 로이도 마찬가지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레이라의 눈빛이 살짝 돌아왔다.
“하아…….”
한숨 같은 신음을 뱉은 레이라는 의자를 단단히 짚고 일어서다 주저앉는 것을 반복했다. 책에서 읽은 대로, 그녀는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킬 때는 온몸에서 힘을 풀었고 다시 주저앉을 때는 하체에 힘을 꽉 주었다.
“으응! 아앗!”
이 방법은 로이만 더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레이라의 몸도 빠르게 달아오르게 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말랑한 엉덩이가 찰싹찰싹 부딪쳤다. 애액은 언제 이만큼이나 질질 새어 나왔는지 의자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통통한 엉덩이가 내려앉을 때마다 척척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진동하듯 떨리고 있는 남근은 레이라에게 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레이라는 삽입의 고통은 씻은 듯 잊어버린 채 쾌감에 잔뜩 이지러졌다.
“하아앙, 또 갈 것 같아…….”
더 빠르게 더 세게, 위아래로 움직이던 레이라가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여 앉았다.
어느새 남근은 레이라의 팔목만 하게 부풀어 있었다. 로이는 주름 하나하나 살아 숨 쉬듯 자글대는 질 안을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달싹였다.
무서울 만큼 커다란 쾌락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레이라의 목이 뒤로 확 젖혀지며 희고 커다란 가슴이 바르르 떨렸다. 커튼처럼 드리운 분홍빛 머리칼이 숨을 멈춘 채 떨리는 레이라의 몸을 타고 흔들거렸다.
간신히 바닥을 짚은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카펫을 쓸었다. 등 받침대도 없는 의자 위에서 달달 떨고 있는 하얀 나신이 위험하게도 빛났다. 애처롭게 매달린 손이 그나마 레이라가 쓰러지지 않게 버텨 주고 있었다.
레이라의 시야가 온통 붉어졌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했다. 구름 따라 둥실 떠오르는 것 같기도, 폭포를 따라 한없이 아래로 처박히는 기분이기도 했다. 꽉 감은 눈이 스르륵 열리고, 몸에 힘이 풀린 레이라가 의자를 꽉 쥐었다. 아직도 발발 떨리는 남근이 쾌락을 계속해서 불러오려 했다.
다리를 쫙 편 레이라가 바닥을 애무하듯 느릿하게 쓸며 제 두 다리를 하나로 모았다. 움찔움찔 경련하고 있는 질 주름이 한층 더 거세게 저를 조이는지 로이가 숨을 집어삼킨 것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떨림을 탁 멈췄다.
레이라의 통통한 허벅지가 물살을 가르듯 서서히 움직였다. 어색하게 일어선 그녀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흉악하게 서 있는 남근은 꼿꼿하게 일어선 채로, 모형처럼 얌전히 의자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에 팔꿈치를 올려 몸을 기댄 레이라는 그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묶어 놓은 고무줄이 애처롭게 파묻혀 있는 것도,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도 전부. 레이라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작은 바람이 닿았는지 로이가 주체를 못 하고 몸을 떨어 댔다. 어떻게 새어 나왔는지 투명한 액 한 방울이 찔끔 새어 나와 애처로움을 더했다.
레이라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민에 빠졌다.
“풀어 줄까, 말까.”
생각 같아서는 더 가지고 놀고 싶었다. 그러나 로이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고 저도 그를 괴롭힐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녀가 고민 끝에 고무줄에 손을 대자 고무줄은 조금 전의 레이라처럼 힘이 풀렸는지 톡 끊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터진 정액이 마치 물총처럼 거세게 쏘아졌다. 하얗게 칠해진 의자 위에서 분수 쇼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쫙쫙 쏘아진 정액들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레이라의 온몸이 정액에 절여지듯 폭삭 젖어 갔다.
“허…….”
멍청한 표정으로 로이가 사정하는 것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허허 웃었다.
“와, 몇 시간 동안 사정을 못 하게 막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폭주하듯 계속해서 정액을 토해 내던 로이가 맑은 액까지 분수처럼 쏘아 댔다. 레이라는 당황한 눈으로 그것을 막아 보려 하다 얌전히 앉았다.
이미 푹 젖은 레이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닥이고 테이블, 의자까지 전부 엉망이 되고 있었다. 입 근처에 튄 정액을 핥으며 아연한 눈으로 주변을 다시 훑은 레이라가 다시 허허 웃었다.
“이걸 언제 치우지…….”
✲ ✲ ✲
한편, 또 다른 곳에서 온몸을 배배 꼬다 축포처럼 쏘아진 황홀경에 기진맥진 늘어진 남자가 존재했다. 남자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몸을 달달 떨고 숨을 헐떡였다. 잔뜩 성난 거대한 짐승처럼 흉포한 기운이 침대 곁을 빙빙 맴돌았다.
“으윽……. 후우, 씨발!”
묶여 있지 않은 짐승은 저를 꽉 억누르며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어찌나 입술을 꽉 깨물었는지 핏방울이 서린 아랫입술과 군데군데 찢기고 구겨진 침대 시트가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시트를 꽉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그것을 던지듯 내려놓고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하루 종일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절정감이 또 도달하지 못한 채 픽 고개를 꺾였다. 무너지려 애쓰는 거대한 댐을 손가락 하나로 막고 있는 아슬아슬한 기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가해지는 자극은 남자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남자의 몸이 쉴 새 없이 움찔거리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꿈틀대던 근육마저 움직임을 탁 멈추자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이명이 남자의 이성이 끊겼음을 암시하듯 불길하게 울렸다.
작은 숨결 하나가 생명을 불어넣듯 남자의 것에 닿았다. 바글바글 끈적하게 끓어오르는 용암에 작은 불씨가 더해졌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펑 하고 터졌다. 절정이, 끓어오르다 못해 녹아드는 것처럼 남자를 집어삼켰다. 억눌린 신음과 몸짓이 고삐가 풀린 짐승처럼 흉포하게 날뛰었다.
“아아아악! ……흐윽!”
끝없이 이어지는 절정감은 느끼고 또 느껴도 남자를 집어삼킬 듯 거세지기만 했다. 순간 남자를 막고 있던 작은 족쇄가 탁 풀렸다. 남자의 시야가 하얗고 꺼멓게 이지러졌다. 배뇨감처럼 시원하기까지 한 사정감은 황홀하다 못해 죽을 것 같았다.
활처럼 휘어진 남자의 몸이 계속해서 허리를 튕겼다. 움찔대는 근육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마저 파르르 몸을 떨었다. 형형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어둠에 삼켜지는 것과 동시에, 레사는 정신을 잃었다.
✲ ✲ ✲
레사는 며칠째 집 밖은 구경도 못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막 기절했다 깨어난 참이었다. 그래도 황제를 알현하고 맡은 임무 수행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는 했다. 그 뒤로는 계속해서 방구석 신세였다.
황성으로 출근을 해야 했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했다. 움직이려고만 하면 그곳에 가해진 자극 덕분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것이 그 이유였다.
식사하다 몸을 발발 떨던 제 아들을 본 메르세데스 공작은 제 아들이 무슨 병이라도 얻었는지 의심했다. 레사는 놀란 제 아비의 얼굴을 보며 접시 물에 코를 콱 처박고 죽고 싶었다.
집 안 곳곳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아 고통처럼 느껴지는 쾌락을 받아들이기를 몇 번. 레사는 그저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이 제 멘탈에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온 제국에 메르세데스 소공자가 몹쓸 병을 얻어 쓰러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함께 토벌을 나섰던 기사들이 공작가로 찾아와 정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 떠들어 댔을 때는 목 끝까지 욕이 튀어 올랐다.
그래 씨발, 저주가 맞다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얼마나 꽉 눌러 참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찌 제 입으로 제 자지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말한단 말인가. 그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남자는 제국에 한 명도 없을 터였다.
그저 몸이 조금 좋지 않다는 말만을 반복해서 내뱉던 레사는 메르세데스 공작이 보낸 주치의와 수십 명의 의사에게 맥박이 조금 빠르지만, 몹시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아야 했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대체 맥박이 조금 빠르지만 건강하다는 말이 무엇이냐며 크게 호통쳤다. 그러나 그저 괜찮다며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는 레사를 향해 눈을 흘기며 못 이긴 척 넘어가 주었다.
공작은 제 아들이 늦은 이별의 아픔으로 몸져누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사는 제 아버지의 착각을 내버려 두었다.
아련한 눈을 한 레사가 손을 들어 푸른 눈을 가리고 짙은 한숨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레이라를 만나고 온 다음 날, 레사는 사정만 열두 번을 했다. 평생토록 그처럼 많은 정액을 쏟아 내 보긴 처음이었다. 쏟아 내도 쏟아 내도 레이라의 입 안은 황홀했고 손길은 유혹적이었다.
그다음 날은 아홉 번. 그다음 날은 열한 번. 그리고 오늘은 딱 한 번이었다. 단 한 번. 딱 한 번 사정한 오늘이 가장 힘들었다. 쾌락에 기절해 버리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아니, 기절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레사가 다시 떠오른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태어나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느냐 누가 묻는다면, 레사는 오늘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무엇이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입을 꽉 다문 채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겠지만.
레이라는 어찌나 예리한지, 저가 사정이라도 할라치면 털끝 하나 건들지 않고 기다렸다. 제 욕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후, 하고 그 사랑스러운 입술로 입김만 불어 주어도 사정할 것 같았지만 제게 가해진 것은 무감각 그 자체였다.
정말로 레이라는 대단한 여자였다. 아니, 레이라가 맞을까……. 맞겠지? 어쨌든 레사가 끊임없이 욕을 내뱉으며 숨이 가라앉으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자극이 가해져 왔다. 미칠 노릇이었다.
두세 번 반복할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으나 네 번, 다섯 번 반복하자 노림수라는 걸 깨달았다. 초조함에 발끝이 달달 떨렸다.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제발 사정하게 해 달라 개처럼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하늘을 날다 추락하고, 또 추락하는 그 더러운 기분이란…….
레사는 레이라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싶었다. 개처럼 핥고 빨아들이고 미친 듯이 흘레붙어 제 자지를 그녀에게 처박고 싶었다. 질척질척한 진흙탕으로 저와 함께 처박힐 때까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쾌락에 흠뻑 절어 흐릿해질 때까지. 제 정액을 그녀의 깊숙한 곳에 쏟아붓고 또 쏟아붓고 싶었다.
아니, 제발…… 제발 그녀의 손끝이라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레이라는 계속해서 레사의 연락을 칼로 자르듯 잘라 내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머릿속을 가까스로 지워 낸 레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제 얼굴을 쓸어내린 레사는 자괴감에 허우적댔다.
대체 레이라는 제게 왜 이럴까. 아니, 레이라가 맞나?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네 소중이를 가장 소중히 여겨 주지 않을 이에게 던져 주겠다더니. 레사는 이제 그 말이 백번 천번 맞는다며 고개를 주억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 느껴진 쾌락은 눈물이 나올 만큼 황홀해서, 원망하던 마음마저 재가 되어 타 버릴 정도였다. 뇌가 익어 버릴 것처럼 끝없는 절정이었다. 레이라의 머리칼을, 눈동자를, 몸을……. 심지어 손톱 하나까지 생생하게 떠올리며 거나하게 가 버렸다. 그리고 기절했지만.
다시금 레사의 입에서는 씨발, 하고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레이라가 기절한 저를 보지 못한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레사는 당장 그녀가 저를 죽이겠다 하면 제 목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하게, 사로잡혀 버렸다.
그렇게 저를 미워하면서도 야해 빠진 사랑스러운 여자.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며 눈가를 문질렀다.
대체 왜 그랬을까. 레사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혀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그녀를 보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냈던 나날들을 지울 수 있다면 당장 지워 버리고 싶었다.
저 멀리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잡지 못했던 것.
아프게 울었을 얼굴을 보며 매정하게 돌아섰던 것.
그 순간에도 들었던 후회는 지금에 와선 죽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만 들게 했다.
진한 탈력감에 뻗어 있던 레사가 조금 전 느꼈던 절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깨어난 레사의 안색은 파리했다.
✲ ✲ ✲
에틸은 이틀째 방에 콕 처박혀 나오지 않는 레이라를 걱정했다. 병신 같은 메르세데스 새끼가 공작저에 찾아온 날 뒤부터였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처럼 또 울고 있지는 않은지. 눈물과 함께 영혼까지 전부 뱉어 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던 에틸이 고개를 흔들었다.
점점 더 냉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얼굴을 본 기사들이 겁을 집어먹으며 뒷걸음질 쳤다. 소드 마스터가 내뿜는 불길한 기운의 마나를 감지한 탓이었다. 스산하게 빛나던 에틸의 검은 눈빛이 레이라를 생각하며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결국, 에틸은 참지 못하고 레이라의 방 앞까지 찾아왔다. 노크는 해야겠지 싶어 머뭇머뭇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하윽, 으응…….”
색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뭘 잘 못 들었나 싶은 에틸은 제 귀를 매만지며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흐으으……으응, 츄릅, 하아.”
무언가를 쪽쪽 빨아대는 소리, 질척이는 것을 매만지는 소리가 달콤한 교성을 뚫고 에틸의 귓가에 안착했다.
“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새빨개진 에틸의 귓가가 얼음장처럼 시린 얼굴을 사르르 녹였다. 에틸은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발기해서 잔뜩 커진 제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쳐 문가에 기대섰다.
그는 그저 어디까지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심보였다. 이틀을 방에만 콕 박혀 있더니 하는 짓이 고작 저것일까 싶어 어이가 없기도 했다.
‘괜한 걱정을 했던 걸까.’
조금은 안도한 그가 붉어진 귀 끝을 매만졌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교성과 쾌락에 젖어 바스락대는 몸짓이 시트를 흔드는 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순진해 빠진 귀여운 다람쥐로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에틸의 눈가가 한층 짙게 가라앉았다. 저렇게 야한 여자였나 싶은 묘한 감상과 함께, 레이라를 저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깨달은 분노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 낯짝 반반한 개새끼를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다.
불세출의 천재라는 수식을 달고 있는 에틸은 제국이 인정한, 아니 온 세상이 인정한 검귀였다. 마나 감응력과 강도는 마법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검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에틸의 타고난 신체 조건은 유연하며 강인했고 칼날에 자비 따윈 없었다. 게다가 마나는 백색이나 흑색에 가까울수록 강한 성질을 띠며 하위 성질의 마나를 무시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는데, 에틸의 마나는 흑색이었다.
그러니 평민이며 아무런 공을 세우지 않은 그에게 백작이라는 작위가 덜렁 내려진 것이었다. 황제는 전시에는 무조건 출전해 주겠다는 약조 하나만 받고도 벙긋 웃으며 작위를 하사했다.
세간에서는 에틸과 레사가 싸운다면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해 뜨겁게 의견이 갈리곤 했는데, 그 답은 마나를 다루는 자라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짙은 청색을 띤 레사의 마나는 완연한 검은빛 마나를 가진 에틸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에틸이 마음먹었더라면 레사는 진즉 관 뚜껑을 닫고 땅속 깊이 처박혔을 거였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레이라 때문이었다. 그래, 레사가 싫은 것도 레이라 때문이었으니 무엇을 더 설명할 수 있을까. 에틸은 알고 싶지 않았던, 상상하기도 싫었던 사실에 빠르게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
“이틀 내내 저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마음에 피식 웃던 에틸이 고개를 돌리자 작은 다람쥐처럼 떨고 있는 하녀가 보였다. 제 주인과 닮은 모양새에 픽 웃은 그는 계속 흘러나오는 교성이 신경 쓰이는지 눈을 방 쪽으로 흘깃거렸다.
소드 마스터에게나 들리는 커다란 신음 소리는 일반인에겐 들리지 않았으니 하녀는 그저 에틸의 흉흉한 기세에 놀란 것뿐이었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던 하녀 아이가 지레 겁먹으며 손에 쥔 것을 뒤로 감추었다. 이미 그게 무엇인지 봐 버린 에틸이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저딴 책은 뭐 하러 가져다 달…….’
“아앗, 레사…….”
저주의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딱 굳은 에틸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욕을 씹어뱉었다. 다시 놀란 듯 튀어 오른 하녀가 놀란듯 소리를 내며 벽에 달라붙었다.
검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한 하녀가 흉포한 기세에 픽 꼬꾸라지며 기절해 버렸다. 에틸은 흉흉하게 터져 나온 살기를 감출 생각도 없이, 가만히 굳어 있었다.
하, 그 새끼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해?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다가도 터져 나온 분노에 입을 꽉 다문 에틸이 쓰러진 하녀를 옆구리에 끼고 문 앞을 벗어났다. 은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는 에틸의 기세가 몹시 흉악했다.
다음 날, 에틸은 작정한 듯 레이라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물고 빨던 레이라는 무엇이 즐거운지 킥킥대며 웃거나 야한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가끔 사각사각 글을 적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어제처럼 레사의 이름을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하루 종일 저러고 있는 것을 한심하다 해야 할지. 에틸이 짙어진 눈을 꽉 감았다.
그는 레이라를 저대로 내버려 두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저 혼자 자위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행위였다. 물론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저건 도가 지나쳤다.
에틸은 제 주인의 성생활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레사 메르세데스를 떠올리며 할딱이는 것은 몇 번이고 뜯어말릴 생각이었다.
그는 내일이라도 레이라의 방에 걸린 결계를 풀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저 결계가 아니라면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볼 수 있을 터였다. 신음 소리에 잔뜩 부푼 제 것을 무시한 채, 에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레이라의 방에 걸린 방어 결계가 풀렸다. 역시 방문 앞을 지키고 선 에틸은 누구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온 참이었다.
쥐새끼 하나 없는 고요한 복도에 침묵이 흘렀지만, 에틸의 귓가에는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마나를 끌어 올려 주변을 감지하고 있는 탓에 레이라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눈에 담겼다.
탐스럽게 농익은 여체를 눈에 담지 않으려 애쓰던 에틸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곧 레이라의 손에 쥔 것을 정확하게 인지했는지, 에틸의 눈에 경악이 비쳤다.
“아니, 씨발! 대체 저게 뭐야.”
보석으로 만든 딜도라도 가지고 놀고 있겠거니 싶었던 에틸의 상상이 와장창 깨졌다. 저것은 딜도 따위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듯 꿈틀대는 성기는 발기할 수 있었고 액도 찔끔찔끔 흘렸다.
순간 며칠 전 마차 안에서 레이라에게 풍기던 정액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은 에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매만지던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왜 무엇이 들어 있는 건지 진즉 확인해 보지 않았을까. 에틸이 옆머리를 짚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란스러웠다.
레이라는 하루 종일 그것을 괴롭혀 댔다. 핥고 빨고 문지르다 그것이 사정이라도 할라치면 마치 관심 없다는 듯 내버려 두길 반복했다. 에틸은 레이라의 손에 있는 것이 제 것이 아님에도 약간 질린 낯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저런 짓을 반복한단 말인가. 의문을 가진 에틸의 머릿속에 온갖 가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곧 이채를 가진 눈동자가 약간의 의문을 담았다. 떠오른 하나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레이라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그래, 저 터트려 버리고 싶은 성기가 레사 메르세데스의 것이라면. 그 새끼의 것이라면 레사의 이름을 부르거나, 저토록 괴롭히고 있는 것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딴 것을 왜…….
답 없는 고민에 괴로워하던 에틸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왜 저것이 레이라에게 있는 것인지, 정말 저게 레사의 것인지는 둘째 치고라도 대체 왜 레이라는 저것을 물고 빠는 걸까. 아직도 그 빌어먹을 공자 놈이 그리도 그리운 걸까?
붉은 입술에서 레사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분노로 몸을 떨던 에틸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레이라가 기어코 그것을 제 안에 집어넣었을 때, 에틸은 제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덜컥, 소리 내는 것을 느꼈다. 분노로 시뻘게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심장이 뇌로 옮겨 간 것처럼 머리가 쿵쿵거렸다.
레이라의 환영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자 에틸은 주먹을 콱 말아 쥐고 자리를 떠났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레사를 괴롭히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더 좋을 터였다. 저렇게까지 쾌락을 탐하는 야한 몸이라면, 제 것을 물려 주지 못할 이유란 또 뭔가. 에틸은 핏방울이 새어 나오는 주먹을 모른 체하며 레이라를 떠올렸다.
✲ ✲ ✲
레이라는 기분이 좋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괴롭힌 것 같았다. 입술이 조금 아프고 목도 아팠으나 그만큼 레사를 괴롭혔다는 쾌감이 컸다.
그가 집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왔기에 레이라는 이삼일에 한 번씩만 괴롭히기로 했다. 괴로운 인상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보고 싶었고, 레이라 저도 일상생활은 해야 하니까. 며칠째 왜 방에만 틀어박혀 있느냐며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것도 지겨웠다.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오던 레이라는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에틸에게 질질 끌려 나와 찻집에 나란히 앉아 오후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림같이 어울리는 선남선녀가 제법 연인처럼 보였는지 힐끗대는 시선이 따가웠다.
누가 저를 보든지 말든지, 좋다고 히죽히죽 웃던 레이라는 저에게도 이렇게 악마 같은 마음이 있었었나 생각했다. 그래도 레사를 골려 줄 수 있는 수단이 제 손안에 착 들어온 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레이라에게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숨겨 둔 상자에 담겨 있을 로이를 상상하며 레이라는 손을 쥐었다 폈다. 어쩐지 손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래도 뒤처리가 조금 곤란하니까 적당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이상한 손 모양과 표정을 번갈아 보던 에틸은 미간을 구겼다.
“그 변태 같은 손 모양은 뭡니까?”
“응? 뭐, 뭐가? 아무것도 안 했, 아니거든.”
“표정도, 더할 나위 없이 변태 같았습니다.”
“아니라니까!”
“화내시는 것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욕구 불만입니까?”
이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째려보고 있는 레이라의 얼굴을 보던 에틸이 빙긋 웃었다.
“쯧, 늘 하는 이야기지만, 사랑싸움은 다 끝내셨습니까? 끝나셨다면…….”
레이라는 그의 입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득달같이 에틸의 말을 가로챘다.
“사랑싸움 아니라니까! 그리고, 너한텐 안 갈 거거든!”
“제 얼굴, 몸, 전부 좋아하시잖습니까.”
“…….”
말문이 막힌 레이라가 눈을 빙글 돌렸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레사에게도 그 잘생긴 얼굴에 홀랑 빠졌던 그녀였다. 사실 에틸의 얼굴이 더 취향이긴 했다. 레사가 남자답고 무뚝뚝한 미남형이라면, 에틸은 웃을 때 다정해지는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었으니까. 제 시선을 피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에틸이 레이라의 시선을 따라 몸을 옮기며 능글맞게 웃었다.
“제가 꼬시면, 넘어와 주실 겁니까?”
“꼬시지 않을 거잖아. 항상 말만 그러면서 뭘.”
“그건, 아가씨께서 마음에 둔 분이 있으니……. 아무튼 이젠 그러지 말아 볼까 합니다.”
처음 보는 표정을 하는 에틸을 지그시 바라보던 레이라가 픽 웃었다.
“퍽이나. 에틸 여자 많은 거 내가 잘 알거든?”
“누가 그럽니까? 전혀 아닌데.”
“뭐래, 저기 봐. 저기만 봐도 딱 알겠다.”
레이라의 손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에틸의 눈에 기둥 뒤로 몸을 쏙 숨기는 인영 하나가 들어왔다. 제 치맛자락은 차마 숨기지 못했는지 빼꼼 내민 채였다. 노을이지는 테라스에 앉아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이 그 치맛자락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저런 건 여자가 많은 게 아니라, 인기가 많다고 하는 겁니다. 아가씨.”
“에이.”
“제 시선은 항상 아가씨께 닿아 있는데, 왜 오해를 하고 그러십니까?”
“알았어, 알았어. 오해 안 할게. 그런 말 좀 그만해.”
레이라가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쫙 뻗어 에틸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자 에틸의 시선이 레이라의 손가락을 따라다녔다. 확 물어 버릴까 고민하던 에틸이 입맛을 다시며 하얀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아니, 지금은 물면 안 되지. 천천히 몸을 낮추고 있다가 단번에 잡아먹어야 한다. 에틸의 눈이 짙게 가라앉아 거의 흑색으로 바뀌었다. 에틸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제 눈빛을 숨겼다. 작게 한숨을 쉬며 찻잔을 매만지는 손이 약간 떨리고 있다는 것을 레이라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방에서는 혼자 무얼 하셨습니까?”
“왜?”
“제가 한 번씩, 방 밖에 서 있었다는 건 아십니까?”
“……뭐?”
“굉장히, 아주,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빨고 계시던데.”
얼굴이 새빨개진 레이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얼굴을 보려 고개를 든 에틸이 빙글빙글 웃으며 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사, 사탕을 먹은 거거든? 왜 표현을 그렇게 해!”
“흐음. 반응은 좀…….”
“에틸이 말을 이상하게 했잖아.”
애써 말을 더듬지 않고 있는 것에 안도한 레이라가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씨, 뭘 빠는 소리만 들은 게 맞겠지? 다 들킨 거면 어쩌지…….’
초조해하는 레이라를 빤히 바라보던 에틸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내렸다. 흠칫 놀란 레이라의 눈이 동그래지자 다정히 웃어 보인 에틸이 입을 열었다.
“다 들켰다는 걸, 직접 제 입으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똑똑한 아가씨께서 왜 이러실까. 작게 중얼거린 에틸의 말이 레이라의 귓가에 찰싹 달라붙었다. 찻잔을 느리게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는 에틸의 몸짓은 느긋하기까지 했다. 거대한 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이 레이라에게 묵직한 위압감을 주었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레이라의 얼굴을 보며 에틸이 해사하게 웃었다.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진한 웃음이었다. 레이라는 굶주린 짐승 앞에 던져진 토끼가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았다.
“아가씨. 제 기분이 더러워진 이유는, 당신께서 그만큼이나 음란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서가 아닙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더 커다랗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경악한 표정이었다. 에틸의 은빛 속눈썹이 내리깔리고 어둡게 빛나던 눈동자가 구름에 가려진 달처럼 모습을 감췄다. 비스듬히 걸쳐진 색스러운 웃음은 꼭 레이라를 비웃는 것 같았다.
“저는 아가씨께서, 교성을 내지르며 뱉은 이름이 아직도 레사 메르세데스라는 것. 그 하나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그자를 아직도 잊지 못하셨습니까? 그 꼴을 다 당해 놓고서도?”
“…….”
레이라는 멍한 표정으로 눈망울을 파르르 떨었다.
비수처럼 내리꽂힌 말이 그녀더러 바보가 아니냐, 멍청이냐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그것도 에틸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에틸은 레이라의 표정 하나하나를 발라먹을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저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레이라, 저는 당신이 그 새끼 이름을 부르짖으며 쾌락에 헐떡이는 소리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짓씹어 뱉듯 흘러나온 에틸의 말이 레이라의 귓가를 천둥처럼 후려쳤다.
✲ ✲ ✲
레이라의 분홍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잔잔히 웃고 있는 에틸의 얼굴이 차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식은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치마에 문질러 닦던 그녀가 달달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먼저 하나 묻고 싶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그 새끼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에틸의 말투는 묘하게 날이 서려 있었다. 레이라는 에틸의 질문에 그가 모든 것을 눈치챘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무엇을 가지고 교성을 터트렸는지를. 왜 그것을 괴롭히고 있었는지를.
“……어떻게 알았어?”
“그저 그것이 궁금하십니까?”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은 에틸이 찻잔을 매만졌다.
“제 질문에 먼저 답하신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빙긋 웃는 웃음에는 늘 있던 다정함이 사라져 있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괴롭히고 싶고,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랬어. 재미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속내를 고스란히 털어놓은 레이라가 에라 모르겠다, 의자에 폭 기대앉았다.
“재미라.”
조각 같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에틸이 픽 웃었다.
“그래요, 퍽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
“레사 메르세데스가. 아주, 재미 좋아 보일 것 같았습니다.”
레이라가 표정을 굳혔다. 저 말은, 네가 하는 짓은 복수가 아니라 그저 그를 만족시켜 주었다는 뜻이렷다.
“남자라는 생물이 그렇습니다. 레이라, 당신이 그것을 그 사랑스러운 입술로 지분대고, 음란하게 빨아 댈 때마다 그가 그저 괴로워하기만 했을 것 같습니까?”
“하…….”
“그것을 품고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 때, 그는 정말 괴로웠을까요?”
아니, 절대 아니죠. 중얼거리며 킥킥 웃는 에틸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표독스럽게 그를 째려보았다.
“그렇게 보면 있었던 일이 없어집니까? 괴롭히고 싶었다면, 상처를 주고자 했던 거라면, 다른 방법을 썼었어야죠. 제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들켰더라면 뭐라 변명하실 작정이었습니까.”
레이라가 다시 허리를 세워 앉으며 치마를 꽉 말아 쥐었다.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맞는 말이었다.
“그럼 뭘 어쩌라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당신.”
고개를 갸웃한 레이라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정말로 아까 그게 고백이라고?
“그저 복수를 원하는 거라면, 제가 있잖습니까.”
“…….”
“약혼자라고 소개했었죠. 저는 좋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레이라?”
다시 달콤하게 뒤바뀐 얼굴이 레이라를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레이라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잘못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