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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차는 이미 떠났다 (5/26)

4. 마차는 이미 떠났다

레사는 불안했다. 무언가 하고 있을 때나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때 불시에 제게 가해질 자극이 두려웠다. 적당한 자극이라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니 그게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그러나 레사가 두려워하든지, 무서워하든지, 불안해하든지 말든지 일은 해야 했다.

딱히 토벌하러 다녀야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레사는 공작저에서 근무를 하겠다 요청했다. 덕분에 부단장이자 레사의 친우인 나트하 러스티만 메르세데스 공작저와 황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빠졌을 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정한 성품을 가진 나트하는 제 친우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싫은 소리 하나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해 주었다.

메르세데스 공작저 본관에 위치한 레사의 집무실.

오늘도 나트하와 머리를 맞대고 있던 레사가 갑자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기 시작했다. 나트하는 금빛 눈을 측은하게 뜨고 제 친우를 바라보았다.

“레사, 몸이 그렇게 좋지 않으면 들어가 쉬어.”

“하아…….”

밭은 숨을 뱉어 내는 레사의 얼굴이 창백했다. 대체 어디가 좋지 않기에 저 모양이 된 거지? 많이 고통스러운가?

나트하의 어여쁜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치유 마법이라도 걸어 보려 레사의 곁으로 다가가던 나트하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레사는 지금 고통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트하가 마법을 쓰려 했기 때문에 흩어져 있던 대기의 마나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공명하듯 찌릿찌릿한 레사의 푸른빛 마나는 분명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너…… 너, 저주에라도 걸린 거야? 아픈 게 아니었어?”

“조용히 좀, 하아……. 해 봐. 미치겠네, 진짜.”

닥치라는 말에 정말 입을 닥친 나트하가 길고 긴 술식을 손으로 써 내려갔다. 밝은 금빛으로 물든 마나가 나트하의 손가락을 타고 나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냈다. 그것을 레사에게 휙 집어던진 나트하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 이딴 저주가 다 있지?

“너 지금, 음경이 사라진 상태지만 감각은 느끼고 있는 거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간 추측이었다. 아니, 나트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하, 곤란하네.”

오늘은 웬일로 레이라가 더 괴롭히지 않고 레사의 귀두를 빠르게 문지르며 사정을 유도하고 있었다. 꿀렁꿀렁 쏟아질 제 정액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탓에 레사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씨발, 진짜. 그 입 좀.”

“사정했어?”

잠시 말이 없어진 레사를 측은히 바라보던 나트하가 약간 민망한지 볼을 긁적였다. 퍼질러져 있던 몸을 편 레사가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트하를 쏘아보았다.

“너는 대체, 수치심이라는 게 없는 거냐? 아니면 내가 수치심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친구끼리 뭘, 너 그 상태로 계속 지냈던 거야? 차라리 내게 먼저 말을 하지.”

“해결책이 있어?”

“당장은 없지.”

그럼 닥치고 있으라는 듯 형형해진 레사의 눈빛에도 나트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트하 러스티. 소드 마스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국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를 차지할 만큼 마법에 뛰어난 마검사. 그는 반쪽짜리 부단장이 아니냐는 헛소문에도 헤헤 웃을 정도로 속없이 착한 남자였다.

다정하고 착한 성격에 큰 키, 검으로 다져진 몸. 게다가 여자처럼 예쁜 얼굴인 나트하는 남녀 불문한 모든 이들을 줄줄이 제 뒤에 붙이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는데 그들은 나트하와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바보가 아닌 이상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다정함과 친절함은 철벽의 일환이라는 것을.

그는 제 사람이 아니라면 길가에 치인 돌멩이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 말은 나트하가 길 가다 발에 치인 돌멩이에게까지 다정한 남자라는 뜻도 되었다.

아무튼 돌멩이에게까지 다정한 남자인 나트하는 아직도 연애 한 번 못 해 봤다. 그는 왜 연애를 하지 않냐 물어오던 레사에게, 마나가 풍부하게 차오른 보름달이 가득 떠오른 밤에 산책하다 만날 제 운명의 짝을 기다리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를 들먹였다. 레사는 나트하의 말을 듣고 그가 마법사라 약간 이상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란 제국에 딱 다섯뿐인 소드 마스터보다 희귀한 존재로 제국에는 나트하 단 한 명뿐이었다. 어디 비교를 해 볼 사람이 없으니 그저 마법사란 다 나트하 같은가 보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밤 산책은커녕 해가 떠 있을 때조차 잘 돌아다니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다정하고 착하지만 어딘가 조금 이상한 마법사인 나트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마법과 마나였다. 고로, 나트하 러스티는 지금 친구를 걱정하는 다정함 따위는 집어던질 정도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저주는 마법의 일종이기도 해. 그런데 아주 특별한 저주네.”

“하…….”

‘그래서 내가 네놈에게도 말을 못 꺼낸 것이 아니었겠냐, 제발 그 입 좀 닥쳐 봐…….’

레사는 좌절하며 마음속으로만 말을 뱉어 냈다. 나트하가 이 일을 알아차렸으니 자신에게 가질 관심이 지대해질 게 빤했다. 벌써부터 피곤해진 그는 더 아연한 기분이었다. 저주 하나만으로도 지금은 벅찼다.

“네 음경이 누구한테 가 있는지 아는 거야?”

“…….”

“알고 있나 보네. 누구기에 대낮부터 그렇게 만지고 있는 거지? 대단한 여성분이시네.”

레사는 저 금빛 눈이 몹시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헛소리 말고, 일이나 해.”

“그것 때문에 출근 못 하는 거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발기하지 않는 약이랑 음경에 가해질 자극을 억제하는 약을 먹으면 되잖아?”

입을 딱 다문 레사가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하나 싶은 얼굴로 나트하를 쏘아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죽고 싶은데, 아주 영영 고자로 살라는 말인가?

“나더러 지금 영원히 고자로 살라는 말이냐?”

“일시적인 거지. 내가 친구한테 그런 약을 먹일 리가 있겠어? 내가 연구한 약 중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게 있었어. 음, 만든 의도와 나온 결과가 달라서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쓸모가 있겠네.”

레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약을 먹는다면 당장 발기가 되지 않을 테니 지금처럼 쾌락에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커지지 않을 제 것을 바라보거나 만지거나 입에 넣어 볼 레이라의 얼굴이.

‘하, 씨발 이딴 걸 고민이라고 해야 하다니.’

“됐어.”

“그러고 살게?”

“해결할 거야.”

“흐음, 일단 알았어. 그래도 약은 전해 줄게.”

약간 시무룩해진 나트하가 테이블 위로 던져 놓았던 서류철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네 음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야 저주를 풀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그게 누구야? 나도 아는 사람인가?”

“…….”

“아!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네 음경을 빼앗아 와도 다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아.”

“뭐?”

“그게 그런 저주야. 근데, 그걸 때리거나 음……. 그래도 폭행은 없는 거지?”

찰진 발음에 귀에 팍팍 꽂히는 욕설이 들려오자 마나로 제 귀를 슬쩍 막은 나트하가 레사를 흘겨보았다. 궁금한 걸 물어도 못 보나. 치사하게.

“너 원래 입이 그렇게 거칠었어?”

“그랬을 것 같냐?”

“되게 까칠해졌어. 저주에 걸려서 그런가…….”

“나한테 신경 좀 꺼주라, 제발.”

저걸 콱, 쥐어박아 버릴 수도 없고. 한숨을 내쉰 레사가 기운 없이 제 몫의 서류를 집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였다.

“그래서, 저주를 푸는 방법이 뭐야.”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뱉은 레사를 향해 아주 활짝 웃은 나트하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저주가 걸리기 전에 술사가 너한테 한 말을 알려 주면 말해 줄게!”

어딘가 신나 보이기까지 한 물음에 레사가 재차 숨을 길게 뱉었다.

레사는 몹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반대로 여전히 고운 얼굴로 샐쭉 미소 지은 나트하는 왜 이해를 못 하냐며 타박하듯 그를 훑었다.

“이해가 안 됐어? 그 상태로 사정을 만 번 하거나, 네 음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랑 네가 관계를 맺으면 된다니까? 물론 서로 아주 사랑하는 상태여야 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내가 미리 마법을 걸어 줄 순 있어. 서로에게 그렇게 느끼고, 보이도록.”

“…….”

“뭐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잘해 봐. 혹시 알아? 내 마법도 필요 없을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될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나트하의 얼굴이 아주 밝았다. 그것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레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자식은,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르겠다.

“아,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참, 그걸 잊고 있었네.”

나트하가 급격히 우울해진 얼굴로 레사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제 친우가 걱정이 된다는 듯이.

“어떻게 할 거야? 그럼 정말로 끝이거나, 상처를 주게 되겠네.”

“……하아. 일단, 방법을 알려 준 건 고맙다.”

대답하기 싫다는 듯 레사가 말을 돌리자 샐쭉하게 바라본 나트하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로, 그보단 마법이 필요해지면 이야기해. 네 일인데, 가장 먼저 도와줄 테니까.”

“…….”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레사가 눈을 돌렸다. 이미 사랑하고 있는 여자인데, 마법까지 걸어 뭘 더 어떻게 사랑하란 건가. 그보다 레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구절이 있었다.

서로 관계를 맺는다? 똑! 떨어진 자지로 뭘 어떻게 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흔들거리는 레사의 눈빛이 나트하에게 향했다.

“그보다, 내 것은 이미…… 떨어졌는데, 관계를 어떻게 맺으라는 거지?”

“아, 그건 상대방이 알아서 할 거야. 소유자가 원하는 곳이면 붙였다 떼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네 거니까, 소유자가 원하면 너한테는 더 찰싹 붙어 있겠지.”

“…….”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레사가 허허 웃었다. 정말 황당한 저주가 아닐 수 없었다. 레이라가 제 것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놓고 삽입했을까 싶었는데. 그럼 어디다 딱 붙여 놓고 몸을…….

음란한 상상에 낯이 붉어진 레사가 제 얼굴을 쓸었다. 저주를 없애는 조건은 지금 듣기에는 아주 쉬웠다. 레이라와 자신은 아직 사랑하는 사이이니,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주 따위야 아주 쉽게 풀 수 있을 거였다. 일단 그녀와 관계 회복이 먼저였다.

공작저에서 마주쳤던 레이라를 생각하던 레사는 약혼자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에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국 최고의 소드 마스터, 녹스의 개라 불려도 기분 좋다는 듯 피식 웃고 마는 에틸 페르세나.

그가 레이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가장 강한 적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던 레사는 전력으로 레이라를 되찾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레이라를 향해 제 꼬리를 흔들기 전에 나서야 했다.

✲ ✲ ✲

녹스 공작이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것은 공작의 기분이 몹시 좋을 때 튀어나오는 버릇 같은 것이었다. 레이라는 공작의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딱 벌렸다.

“아버지?”

“약혼식은 언제가 좋을까? 에틸, 원하는 날이 있느냐?”

“아빠!”

에틸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녹스 공작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붉어진 낯을 가리지 못한 채 좋다며 에틸을 따라 웃었다. 가운데에 끼어 있던 레이라만 이마를 잔뜩 구긴 채였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그럼, 들었다마다. 둘이서 연애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허허!”

“…….”

하 씨, 자기 좋을 대로 들었잖아! 레이라가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에틸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말아 쥐며 그것을 말렸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녹스 공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약혼식은 조금 이른 것 같습니다. 공표만 해 주십시오.”

“어째서? 식부터 냉큼 올려야지!”

“…….”

레이라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일단, 연애 먼저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허허허, 그것도 좋지. 좋아. 내 천년 묵은 체증이 쭉 가신 것 같네. 으하하!”

녹스 공작은 레이라의 눈에는 약간 모자라 보이지만 호쾌하게 웃으며 팔걸이를 팡팡 내리쳤다. 에틸이 여우가 꼬리를 살랑대듯 새초롬히 웃으며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레이라가 졌다는 듯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꽃이 만개한 듯 공작을 웃게 한 사건의 발단은, 레이라가 제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는다면 에틸과 만나 보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조금이나마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했던 발언에 활짝 웃던 에틸이 냉큼 공작에게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제 아버지가 저토록 호쾌하게 저와 에틸의 연애를 반길 거라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레이라는 이미 짐승의 아가리에 들어가 있으면서, 아직 잡히지 않았다 안도한 거였다. 짧았던 자유를 그리며 그녀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에틸이 협박과 회유, 유혹의 말을 꺼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밤, 레이라는 제 인생에 있어 두 번째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에틸은 아주 능수능란했다. 고작 자위하는 것을 들켰다가 협박과 회유를 통해 연애를 시작하게 된 레이라는 어이가 없다 한탄하며 멍하니 앉아 휙휙 뒤바뀌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다 정신을 차리면 제 방 안이었고, 다시 깜빡이다 정신을 차리면 마차 안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지.’

휙휙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제 방 건너편에 위치한 테라스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틸은 레이라가 싫어하지 않을 정도의 스킨십을 시도 때도 없이 시도했고, 그것은 하는 족족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덕분에 레이라는 여태 레사의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아니 못 하고 있었다. 에틸은 레이라가 마차를 오르내릴 때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에스코트하며 목선에 입술을 살짝 누르거나 볼에 잔 키스를 뿌렸다.

길을 걷고 있으면 어느새 깍지 낀 손이 따스하게 그녀의 손을 맞잡고 있었고 차를 마시거나 마차에 앉을 때면 레이라의 몸은 에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거절하려 눈치를 볼 때면 이미 늦었거나 싫다고 말하기 어색할 정도로 편안하기까지 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모른 체하던 레이라가 의자에 폭 기대앉았다. 오늘따라 의자가 더 편안하네,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에틸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협박에 ‘그러자!’ 하고 만나기로 한 사이이지만, 레이라는 에틸이 싫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주는 작은 스킨십들 또한 싫지 않았다. 피하고자 했다면 몇 번이고 그럴 수 있었고 하지 말아 달라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라는 그러지 않았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거나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신기했다. 레사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서도 이처럼 두근거릴 수 있다는 것이. 게다가 그 상대가 에틸 페르세나라는 것이.

어쩌면 레이라는 생각보다 에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익숙하게 입 앞으로 배달 온 케이크를 답삭 받아먹은 후 화들짝 놀랐다.

“맛있습니까, 레이라?”

“…….”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이 귀여운지 제 입술을 꿀 떨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에틸에게 레이라가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좋다고 날름 받아먹어 놓고 맛없다고 하기는 좀……. 그나저나 내가 언제 무릎 위에 앉은 거지? 좋은 향기도 나잖아? 아, 목소리는 또 왜 저렇게 좋은 거야.’

자연스럽게 에틸의 목 언저리에 머리를 비비던 그녀는 또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피식 웃은 에틸이 케이크를 장식하던 딸기를 생크림에 푹 찍었다. 저도 모르게 또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은 레이라는 에라 모르겠다 그에게 기대앉았다.

편안하게 몸을 늘어트린 레이라를 보며 에틸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다루기 쉽다고 해야 할지, 어렵다고 해야 할지. 생크림이 묻어 있는 붉은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 에틸이 제 입술로 옮겨 온 생크림을 핥았다.

입이 딱 벌어진 레이라의 멍한 표정이 볼만했다. 딱 하루 살펴본 결과, 그녀는 이런 스킨십과 퍼부어 주는 애정에 약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에틸이 레이라를 잡아먹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제대로 된 ‘관계’를 만드는 거였지 않았겠나.

약혼자라는 위치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저지른 일이었는데 이게 꽤나 잘 먹혔다.

‘아, 이 얼굴이 잘 먹히는 건가?’

제 생각에 허탈하게 웃은 에틸이 그날을 떠올렸다.

에틸은 대답 없는 레이라에게 약혼자가 싫다면 레사의 호위 기사 노릇이나 해 봐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 협박 아닌 협박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던 그녀는 먼저 연애부터 해 보자고 큰 소리를 쳤다.

에틸은 그 말을 하던 레이라의 표정이 생각나 다시 웃음이 나왔다. 에틸 저가 왜 메르세데스 레사 따위의 호위 노릇을 하겠는가. 천지가 개벽해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다. 저 작은 입술에 레사 이름만 담겨도 치가 떨리는데 그 반반한 낯짝을 보면서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고개를 가로로 흔들던 에틸이 다시 픽 웃었다. 그녀는 녹스 공작이 저를 말려 주겠지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빈민가 출신인 에틸은 눈치가 빠삭했다. 공작이 저를 콕 찍어 레이라의 짝으로 들일 생각을 했던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나. 저를 볼 때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그것을 몰라본 그녀가 바보였다. 레이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지만 왜 그런지 자신에 관련된 것에는 유독 둔했다.

하긴, 그러니 지금 내 품에서 새끼 고양이처럼 안겨 있는 거겠지만. 에틸이 방긋 웃으며 레이라의 발간 얼굴을 매만졌다.

“레이라, 밤이 외롭진 않습니까?”

“…….”

다 타 버려 재가 될 것 같았던 그녀의 귓바퀴가 더 붉어졌다.

“그 장난감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어제도 잠깐 만져 줬었는데……, 레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눈을 도르르 굴리던 그녀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흐음, 지금 연인 앞에서 다른 놈 자지나 물고 빨겠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하, 그렇게 파렴치한인 줄은 몰랐군요.”

“자, 아니……. 그건 아니고…….”

“만지기만 하겠다, 뭐 그런 한심한 소리도 아닐 거라 빕니다.”

“…….”

앙다물어진 입술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에틸이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레이라는 이제 저 표정이 에틸이 화를 참고 있을 때 짓는 표정임을 알고 있었다.

조금 억울했다. 고작 자위하다 들킨 것 가지고 눈을 그렇게 뜨고 협박을 하고! 레사 걸 손에 들고 있으니 그냥 무의식중에 이름이 튀어나온 건데! 그냥 사귀자 했어도 알겠다 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레이라가 주제 파악을 빠르게 완료했다. 얼렁뚱땅 휙휙 넘어가 만나 보기로 했지만, 그녀는 레사처럼 관계가 끝나면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변하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에틸과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레이라에게 에틸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하긴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대놓고 쪽쪽거려도 기분이 좋기만 한 건가? 모르겠네.’

고민하듯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레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물론 저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로이로 자위 한 번 했기로서니 에틸이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심지어 그때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예전 애인을 생각하면서 자위를 한다면, 그걸 만약에 보거나 듣게 된다면. 그 경우엔 보통 정이 떨어져야 맞았다. 그러나 에틸은…….

레이라는 에틸이 저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건가 싶어 조금 우쭐거렸다.

‘그래도 좀 곱게 얘기 해 주지. 하긴, 나 같아도 말이 곱게 나가진 않을 것 같긴 해…….’

저도 모르게 사귀는 사이라 인정해 버린 것은 모른 채 입을 삐죽삐죽 내밀던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조울증처럼 왔다 갔다 하는 표정이 우스워 에틸이 피식피식 웃는다는 것도 모르고 레이라는 계속해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모르는 척해 왔지만, 에틸의 마음을 알고 있긴 했다. 레사와 헤어진 저를 대하는 에틸의 표정에 금이 간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 에틸의 표정은 그녀가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 보였다. 고작 그딴 놈한테서 상처를 받아 왔냐는 것처럼. 고작 그렇게 헤어질 거였으면서 만났냐는 것처럼.

‘그래 차라리 그놈보단 에틸이 백만 배는 낫지. 나는 왜 에틸을 두고 그딴 놈이 눈에 찼던 거지? 차라리 처음부터 에틸을 만났으면 좋았잖아?’

다시 고개를 주억인 레이라가 킥킥대며 웃는 통에 흔들거리는 제 의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자가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뺨을 쓸었다.

“생각은 다 끝나셨습니까?”

“응? 으응…….”

“저와 몇 가지 약속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아가씨의 복수를 돕겠다고 나선 것은 이해하셨겠죠?”

“어? 어…….”

떨떠름해진 레이라의 인상이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것 같았다. 어디 들어나 보자며 턱을 까딱거린 그녀를 못 본 체하던 에틸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어딜 가시든지 저와 파트너로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응.”

“두 번째, 지금부터 저는 완전하게. 연인 대하듯 레이라를 대할 겁니다. 레이라도 저를 그렇게 대해 주시면 좋겠군요.”

“여태 그랬……. 알았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운지 에틸이 레이라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째서 나는 항상 당신을 미워할 수 없을까. 왜 당신은 이처럼 사랑스럽기만 할까.’

발갛게 물이 든 볼을 살살 쓸던 에틸이 체념하듯 웃었다. 곧 따사로웠던 에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세 번째, 당장 그 몹쓸 장난감을 갖다 버립시다.”

“…….”

대답 없이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쥔 레이라가 애처로운 눈빛을 했다. 배고픈 새끼 고양이처럼 빛나는 애절한 눈동자에 에틸은 절로 네 뜻대로 하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에틸이 고개를 휘휘 저어 제 생각을 떨쳐 냈다.

“……안 됩니다. 그것이 정액을 내뱉을 때마다 그 새, 아니 공자 놈의 기분이 좋아질 텐데.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걔가 어딜 가거나 일하는 중에 감각을 느끼면, 음. 뭐랄까,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될 것 아냐. 그런 게 조금 고소하달까.”

“……그럼 만지는 것까지만 하도록 하죠. 아, 물론 당신이 만지는 것은 안 됩니다. 적당한 사람을 찾아볼 테니 일단 기다려 주세요. 혹, 제게 말없이 그것을 당신이 만지거나 입이나 다른 곳에 넣는다면, 아마 꽤나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겁니다.”

“아, 알았어.”

곱게 눈을 흘긴 레이라가 잡혀 살고 있을 제 미래를 상상하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긋나긋한 남자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이미 늦었습니다.”

“…….”

뜨끔했는지 레이라의 동그란 어깨가 살짝 튀어 올랐다.

“그런데, 그, 그게 음…….”

“그게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을 고용하면 될 겁니다.”

“알았어.”

기가 팍 죽은 레이라가 시무룩해 하며 대답했다. 한숨을 슬쩍 쉬며 그녀를 흘겨본 에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빙긋 웃었다.

“네 번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뭔데?”

“이걸 위해 제가 몸을 바치는 거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뭐, 뭔데?”

“아직은 그저 연인 사이이니, 이틀에 한 번. 제가 레이라의 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물론, 밤에.”

딱 벌어진 레이라의 입술이 동그란 모양을 그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

레이라는 입을 딱 다물었다가 곧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한참이나 그것을 반복하던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틸을 바라보았다.

“그, 그건 아직 좀 이르지 않을까? 아니, 그게 피, 필요할까?”

“그것은 그저 아가씨께서 밤마다 외로워하실까 걱정이 되어서 하는 약속이니 꼭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아냐. 안 외로워!”

아주 당당하게 대답한 레이라의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에틸이 그녀의 당당하기까지 한 표정을 빤히 보다 픽 비웃음을 흘렸다.

“거짓말. 그렇게 야해 빠진 신음을 줄줄 흘렸으면서,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

“또, 못 참고 그 거지 같은 장난감을 그 야한 구머…….”

에틸의 입술을 탁 막은 레이라의 하얀 손이 달달 떨렸다.

“제,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

“그건 그냥 만지고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히익!”

제 입을 막은 작은 손에서 나는 향기를 킁킁대며 맡던 에틸이 혀를 내밀었다.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을 손바닥을 날름날름 핥은 에틸이 굳어 버린 레이라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초승달처럼 휜 그의 눈꼬리와 촉촉한 눈빛은 지나치게 음란했다.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의 손바닥을 할짝할짝 핥아오는 에틸의 혀가 뜨거웠다.

빛에 반짝이는 은색 속눈썹이 아름다웠고 차갑기만 할 표정에 온기가 스미는 것이 좋았다. 야하게 움직이는 혀는 조금 곤란하지만.

‘손을 떼야 하는데…….’

가슴이 찌르르 울리고 아랫배가 꽉 죄는 것 같았다.

에틸은 그녀의 손바닥 주름을 셀 정도로 꼼꼼하고 느릿하게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은 레이라는 제 손바닥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냈다. 치맛자락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은 그녀가 에틸을 휙 쏘아보았다.

아쉽다는 듯 입술을 느리게 핥은 붉은 혀가 빙긋 웃은 입꼬리 사이로 쏙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앉아 그것을 고스란히 바라본 레이라는 목까지 시뻘게진 상태였다.

“그 얼굴은, 지금 당장 제 방으로 와 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레이라?”

에틸은 레이라의 귓가에 속삭이듯 작게 말을 뱉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작게 입 맞추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

새빨갛다 못해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레이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래가, 이미 축축하게 젖은 것 같았다.

레이라는 에틸에게 그대로 들려 방으로 옮겨졌다. 그녀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통에 에틸은 웃음을 꾹 참았다. 레이라는 머릿속이 하얘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에틸은 아주 유해한 남자였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툭툭 뱉는 음란한 말들과 방싯 웃는 어여쁜 얼굴로 살금살금 행해지는 스킨십.

얼렁뚱땅 사귀기로 합의한 사이인데 누가 보면 몇 년은 만난 연인인 줄 알 것 같았다. 그저 친한 호위 기사의 위치에서 딱 이틀 만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물론 싫지가 않아 거부하지 않은 레이라 제 탓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에틸은 멈추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처럼 굴었다. 직진, 직진! 오직 직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뭐야, 언제 침대 위에 눕혀진 거지?’

눈을 홉뜬 레이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야!”

“뭐긴요, 일단은 ……연습?”

애교라도 피우듯 고개를 갸웃거린 에틸의 표정이 해사했다. 후광이라도 비추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에 입을 딱 다문 레이라가 찔끔찔끔 뒤로 물러섰다.

“그, 그만. 다가오지 마!”

“음, 오늘은 침대 위로 올라갈 생각까진 없었는데, 레이라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겠군요.”

잔뜩 빛나는 얼굴이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앙증맞은 발에 신겨진 푸른색 구두를 벗겨 휙휙 집어던진 에틸이 레이라의 발목 위에 손을 얹어 들어 올렸다. 반동으로 몸을 눕혀 버린 그녀가 바동거렸다.

“놔, 놔줘!”

“그럴까요?”

에틸이 레이라의 발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뭐야? 내려놓으라 한다고 진짜 내려놓네?’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구경한 에틸이 레이라의 발목 위에 손을 대고 느긋하게 쓸어 올렸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남는 발목부터 스타킹을 신어 더 하얗게 보이는 종아리와 반듯한 정강이, 하얗고 모양 좋은 무릎, 살집이 통통한 허벅지까지. 바르르 떨린 레이라의 몸짓이 덫에 걸린 토끼처럼 보였다.

“하으으, 그 그렇다고 내려놓고, 읏……, 만지라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디까지, 연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레이라?”

허벅지를 둥글게 문지르던 손짓이 허벅지 안쪽을 향해 가자 그녀는 다리를 꽉 오므렸다. 레이라는 누워 있었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에틸이 버티고 있었다. 해서 레이라는 다리를 오므린다는 게 오므린 채로 들어 버렸다.

그녀는 절로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두 다리를 모아 쥐고 있는 레이라 덕분에 드러난 탱탱한 엉덩이를 실컷 감상하게 생긴 에틸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유혹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다리를 제 손에 쥐고 엉덩이 아래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몸을 움찔거린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으읏, 아니야! 앗, 다리 놔줘!”

“이번엔 싫습니다. 당신이, 먼저 들어 줬으니까.”

쪽쪽 대는 입맞춤이 허벅지에서 엉덩이 쪽으로 향하자 레이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젖었단 말이야! 진짜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할 거야!’

격렬하게 바동거리는 몸짓이 가여워 혀를 쯧, 하고 찬 에틸이 그녀의 다리를 놔주었다.

새우처럼 곱게 눕혀진 레이라는 제 치맛자락을 끌어 내리며 에틸을 쏘아보았다.

“바, 바람둥이 맞잖아! 뭐가 이렇게 익숙해?”

“벌써 질투하는 겁니까? 기분이 나쁘지 않군요.”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레이라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에틸이 제 옆으로 오라는 듯 손을 팡팡 두드렸다. 힐끔힐끔 에틸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가 왜 말을 듣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데굴데굴 굴러 에틸의 옆자리에 누웠다. 커다란 침대에 딱 붙어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진하게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키스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다리를 핥아 버렸군요.”

“…….”

역광 때문인지 에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레이라는 눈을 찌푸렸다. 그 귀여운 표정을 색스럽게 바라보며 웃은 에틸이 그녀의 턱을 손에 쥐고 끌어당기듯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것에 안심이 되었다는 듯 레이라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녀를 옭아맬 듯 보던 에틸이 한 손으로는 레이라의 턱을, 다른 손은 뒷머리를 받쳐 잡았다. 그는 그녀를 더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에틸이 레이라의 숨을 전부 빼앗아 갔다. 처음과 다르게 거칠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뱀처럼 뒤엉켰다. 숨을 몽땅 빼앗긴 그녀는 그의 혀가 생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쪽쪽 빨았다.

호흡이 찰 때마다 한 번씩 넘어오는 뜨거운 공기가 달콤하기까지 했다. 레이라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달콤한 타액이 삼켜질 겨를도 없이 레이라의 턱을 타고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목구멍 깊숙이까지 치고 빠져나가는 얄미운 에틸의 혀가 레이라의 입천장이며 혀, 이를 몽땅 건드렸다.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맛보겠다는 듯 격렬하게 이어진 키스에 그녀는 흐느적흐느적 녹아 버리고 있었다.

입 안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갈 때면 머릿속에 전기가 짜르르 울렸고 간지러운 기분에 발끝이 곱아들어 갔다. 몽롱한 기분은 약에 취한 듯 혼탁했지만 에틸에게서 나는 상쾌한 향기와 타 버릴 듯 뜨거운 혀끝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레이라가 다리를 배배 꼬며 에틸을 재촉했다. 그 애처로운 몸짓에도 빙긋 웃기만 하는 에틸이 미운지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콩콩 때렸다. 그럴수록 더 짙어지는 키스에 힘이 쭉 빠졌는지 레이라의 손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에 옷을 쥐어뜯던 그녀는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에틸의 손아귀에 제 손을 홀랑 빼앗겼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에틸이 다리를 벌려 레이라를 가두고 양손을 한 번에 쥐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단단히 구속되어 투지를 잃은 레이라의 눈이 흐리게 빛났다.

바로 다시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레이라의 눈동자를 마주한 에틸이 그녀의 볼이며 눈, 코, 이마, 귓가에 자잘한 뽀뽀를 흩뿌렸다. 어느새 다시 시작된 키스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살살 달래듯 여기저기 문지르는 혀가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찐득했다.

움찔움찔 튀어 오르는 레이라의 몸짓을 느끼며 입 안을 마음껏 헤집는 에틸의 키스는 마치 섹스처럼 황홀했다. 튜브톱 형식의 드레스는 이미 끈이 풀려 그녀의 가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에틸의 손놀림은 레이라에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드러난 그녀의 맨 가슴을 손에 쥔 그가 작게 신음했다.

“하…….”

“으응.”

큰 손에 꽉 차고도 남는 부드러운 살덩이가 만족스러운지 키스가 한결 느긋해졌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뭉그러지는 가슴을 실컷 주무르고 가슴 아래를 쓸어 올리듯 쓰다듬고 둥글게 원을 그리듯 매만지기를 반복한 에틸이 손가락 사이에 붉은 유두를 끼워 꼬집듯이 비틀며 입술을 뗐다.

흐트러진 붉은 눈빛과 반질반질 빛나는 붉은 입술. 딱 먹기 좋게 발긋해진 희고 고운 피부.

레이라의 전부를 눈에 새길 기세로 미간을 찌푸린 에틸의 모습도 섹시하긴 마찬가지였다. 내리깔듯 반쯤 뜬 눈과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는 주름진 미간, 키스로 더 붉어진 입술 그리고 탄식하듯 뱉어 내는 에틸의 숨소리는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서로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은 레이라가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다시 입을 맞췄다. 다시 격렬해진 키스와 함께 가슴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그녀가 신음을 뱉어 냈다.

“으으응, 으읍”

간지러운 것을 긁어 주듯 시원하기까지 한 쾌감이었다. 유두를 꼬집고, 문지르고, 튕기는 손길이 거부할 수 없게 아니, 거부하기 싫을 만큼 좋았다.

에틸은 그녀의 두 팔과 커다란 가슴을 양손으로 나누어 쥐고 있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신음으로 뒤바뀌곤 했다.

레이라는 다시 에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퐁퐁 피어오른 쾌감에 거부가 사라져 버린 몸짓이 애처롭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저를 끌어당기며 떨어지기 싫다는 듯 닿아오는 레이라가 기꺼워 에틸의 입술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후, 빨아 달라는 눈빛인데 맞습니까?”

“하아, 아니야!”

“아직도 그리 앙칼진 대답을 할 겨를이 남아 있나 봅니다.”

빙긋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흠칫흠칫 떨리는 그녀의 몸은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에틸을 제 가슴 쪽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나른하게 웃으며 유혹을 물리친 에틸이 입술을 뗐다. 무해한 웃음을 머금은 에틸이 레이라의 유두를 튕겼다.

“하읏.”

“이렇게 예민한 몸을 가졌으면서, 네 번째 조항이 필요 없다 했던 겁니까.”

단정하게 뱉어 낸 말은, 분명 빈정거리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부끄럽기만 했다. 레이라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건, 에틸이…….”

“싫습니까?”

순식간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측은한 눈을 한 에틸은, 말을 하면서도 레이라의 가슴을 지분대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아니, 좋아.”

제 손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바스러지지 않게 움켜쥔 에틸이 포식한 짐승처럼 나른히 웃었다.

에틸의 유혹이 빛을 발했던 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공작저에 찾아온 손님이 녹스 공작에게 멱살을 잡혀 흔들거리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레이라를 찾아온 시종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아, 아가씨!”

레이라에게 급하게 옷을 입혀 준 에틸은 중간중간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쉬워서 큰일이겠군요. 레이라.”

“읏, 아니야! 근데 누가 찾아왔길래 아버지가 멱살까지 잡은 거야?”

“메르세데스 레사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

움직임이 멈춘 레이라를 향해 빙 돌아 시선을 맞춘 에틸이 방긋 웃었다.

“음, 전 남자 친구와의 두 번째 대면이라,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구겨진 드레스 자락까지 완벽하게 매만져 준 에틸이 레이라의 손을 부드럽게 끌었다.

“일단, 그 장난감부터 제게 주시겠습니까, 레이라.”

“……그건 왜?”

“역겹지만 저라도 만지고 있어야 레이라를 의심 안 할 거 아닙니까.”

정말 싫다는 듯 구겨진 얼굴을 보며 웃음이 터진 레이라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에틸에게 로이를 내주었다. 묵직한 살덩이에 축 처진 주머니를 받은 에틸이 미간을 구기며 손끝으로 주머니를 잡아챘다.

“그렇게 만지기 싫으면서 어쩌려고?”

“마나를 두르고 만지면 됩니다.”

여상하게 대답한 에틸이 레이라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어서 가세요. 빨리 가서 그 모자란 놈을 보내셔야 할 것 아닙니까. 각하께서 곤란해하실 것 같은데.”

“……알았어.”

방문을 열고 나온 그녀가 시종들에게 떠밀려 걷는 순간에도 에틸은 주머니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잡혀 있는 주머니가 살기에 놀라 움찔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냥, 확 터트려 버리는 것이…….”

에틸이 흉흉한 기세로 웃음을 뿌리며 주머니를 들여다보았다.

✲ ✲ ✲

레사는 몸에서 힘을 빼고 흔드는 대로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멱살을 잡힌 것은 처음이라 얼마나 흔들려 줘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녹스 공작의 얼굴을 슥 훑은 레사가 집어던지듯 멱살을 내려놓고 씩씩대는 녹스 공작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멱살 잡혔던 사람이 멱살잡이에 힘이 빠져 헥헥 대는 사람을 다독이는 이상한 광경에 시종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괜찮으십니까?”

“놔라!”

녹스 공작은 얄밉기까지 한 낯짝을 밀어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멱살 잡힌 놈이 저렇게 나오면 당황스럽지! 뭔데, 왜 계속 예의 바르고 난리야!’

게다가 별일 없었던 것처럼 멀끔한 꼴을 보니 더 짜증이 치솟았다.

‘저 옷감은 뭔데 구겨지지도 않는 거지?’

녹스 공작이 인상을 잔뜩 쓰고 레사를 힐끔거렸다. 반지르르 빛나는 잘생긴 낯짝 하며 탄탄한 몸, 그 고귀하신 혈통에 성품 또한 훌륭하다지. 물론 제 딸에겐 전혀 아니었지만. 녹스 공작이 다시 인상을 흉악하게 찌푸렸다.

움찔 놀란 레사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차를 내온 집사가 두 사람의 앞에 냉차를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그것을 단 번에 들이켠 녹스 공작이 주인 없는 찻잔을 느긋이 바라보다 레사에게 떨떠름히 앉으라고 명했다.

“감사합니다.”

다소곳하게 앉은 레사가 말 한마디 없이 이마를 짚은 녹스 공작을 흘긋 바라보았다.

“자네 미쳤는가?”

진정이 된 것인지 헐떡임이 사라진 공작의 음성이 낮게 흘러나왔다.

“…….”

“이제 와, 다시 내 딸을 달라? 심지어 뭐, 결혼? 결혼하고 싶다? 두 사람은 헤어진 것 아니었나?”

“…….”

“두 사람은 이미 헤어진 것 아니냐 묻지 않나! 내 딸이 엉엉 울며 지낸 것만 한 달이었네. 한 달! 안 그래도 삐쩍 마른 녀석이, 그 고운 눈에 눈물을 매달고! 짓무른 눈을 하고 지낸 것이 한 달이었다고! 그런데, 자네는 이제 와 한다는 말이 그딴 것뿐인가?”

“…….”

“왜!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깝기라도 한가? 응? 말해 보게!”

다시 열이 받았는지 잔뜩 벌게진 얼굴의 녹스 공작이 레사를 향해 삿대질까지 했다.

“이제 보니 자네 부친만 그리 양아치 같은 것이 아니었구만, 자네는 더 한 양아치가 아닌가? 헤어졌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여태 왜 찾아오지 않았나? 서로 남자, 여자 옆구리에 끼고 길거리는 왜 쏘다녔으며, 왜 연서 한 장 집으로 오지 않았냐는 말일세! 내 딸 홀로 이별을 겪을 동안 자네는 뭘 했느냔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저 아직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게 그녀에게 사과를 할 기회를 주십시오.”

“죄송할 짓을 왜 하고, 기회를 왜 엄한 사람한테 달라는지 모르겠군. 사과 또한 그렇지, 그것은 자네 편하자고 하는 짓이네. 내 딸아이는 자네의 사과를 기다리지 않아!”

공작의 낯빛에 열이 차올랐다. 벌겋게 변한 안색을 흘끔거린 집사는 공작의 찻잔에 냉차를 더 부어 주었다. 냉큼 그것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켠 녹스 공작이 다시 노성을 질렀다.

“나도 이처럼 열이 받는데! 내 딸은 더 하겠지!”

“…….”

“하! 기회? 이제 와 내게 결혼 허락을 받겠다? 그것은 레이라와 녹스 공작가를 기만하는 이야기야!”

“죄송합니다.”

“그딴 소리나 할 거면 찾아오지 말게, 솔직히 자네 얼굴 보고 싶지도 않아.”

입을 다물고 있는 레사의 눈빛이 처참했다. 녹스 공작이 무언가 시원하지만 언짢은 기분을 느끼며 턱을 받쳐 앉았다. 짜증은 나고 화도 나는데, 저 꼴을 보니 뭔가 불쌍하기도 하고. 녹스 공작은 다 죽어갈 듯 애처롭던 레이라의 모습을 떠올리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아직, 레이라를 사랑합니다.”

“그렇겠지. 자네 낯짝을 보면 빤하네. 그러나 누가 그걸 물었나? 내 딸은 더 이상 자네를 원하지 않네. 레이라에겐 에틸이 있어.”

“그때 그 약혼자라는 말이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내 딸을 그만 괴롭히란 말일세! 그리 결혼을 하고 싶었으면, 내 자네 부친과 개처럼 싸울 때 레이라와 다투고 헤어질 것이 아니라 자네 부친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시켰었어야지. 내가 바보인 줄 아나?”

꽉 쥐어진 레사의 손과 힘이 잔뜩 들어간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본 녹스 공작이 혀를 쯧쯧 찼다. 아주 폭풍우 부는 날 띄워 놓은 돛단배처럼 사정없이 떨리는 것이 퍽 충격적인 듯했다.

곧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쫑긋 귀를 세운 녹스 공작이 집사를 쏘아봤다. 잔뜩 당황한 집사가 시종에게 눈짓하자 귀엣말이 오갔다.

“……각하, 아가씨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하. 대체 또 누가 가서 떠벌린 것이야.”

머리를 짚은 공작이 레이라의 방문을 거절하라 명했다.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곧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응접실에서 멀어졌다.

레이라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레사는 제 손을 쥐었다 폈다. 그녀와 자신의 거리는 지금과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문을 하나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기분. 꼭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잡히지 않고,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닿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레사의 표정을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듯 집요하게 바라보던 녹스 공작이 턱을 비스듬히 괴었다.

“자네는 왜 여태 레이라를 찾아오지 않았나? 헤어질 심산이 아니었더라면, 왜 그렇게 의뭉스럽게 굴었느냔 말일세.”

“……처음엔 헤어지려 한 것이 맞습니다. 압니다, 제가 경솔했었다는 걸. 그러나……. 후.”

“하.”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레사가 녹스 공작에게 눈을 맞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아주 위독하셨던 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벅차하셨습니다. 제 문제를 신경 쓰시느라 어머니께서 그렇게 되시는 것도 몰랐다며 자책하셨죠. 자식 된 도리에서, 아버지의 신경을 조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내 자네 어머니의 병환은 잘 알고 있으니.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째 이유를 들으니 더 열이 받는지 모르겠군.”

그래 헤어지자 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나온 것이다. 이 말이지. 녹스 공작은 레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연애 문제로 속 썩이고 있는 아들과 병환이 깊은 아내 사이에서 힘들어했을 메르세데스 공작의 마음도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딸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물론 상관이 없어진 이유는 오롯이 레사 때문이었다. 레사가 레이라와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었더라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라면, 양해를 구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더라면 레이라는 기어이 그렇게 하겠노라 했을 터였다. 아니,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겠지.

“자네는 그저 혼자 생각하고 혼자 답을 내린 것이 아닌가. 레이라에게는 그저 이별 통보만 달랑 해 버린 것이지. 함께하는 이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이해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네. 레이라는 그것만으로 자네에게 큰 상처를 받았고.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 상황에서 솔직하게만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레이라가 그렇게 혼자 속 끓이지 않았겠지. 설령 그 말을 듣고도 헤어졌더라도 저토록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네. 자네는 그저 자네 편하자고 사랑하는 사람을 내버린 거야. 그런 이기적인 놈을 내 사윗감으로 둘 것 같나? 자네가 말해 보게. 내가 레이라를 그런 등신 머저리한테 내줄 정도로, 내 딸이 어디가 많이 모자란가?”

레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녹스 공작은 혹 정말로 레이라가 어디 모자랐더라도 저 같은 머저리에게 딸을 내놓기 싫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는 대놓고 레사를 비꼬면서도 할 말이 없게 했다.

어째 녹스 공작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더 병신처럼 느껴졌다. 죄책감이 발을 찌르다 목 언저리까지 찔러 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대체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됐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참지 못한 레사가 제 눈을 꾹 눌렀다 뗐다. 울컥울컥 감정이 토해져 나오려 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레사가 녹스 공작의 말을 경청했다.

“솔직하게 황태자가 네 살만 더 많았더라도 나는 황태자에게 보냈을 거네. 드래곤이 살아 있었다면 드래곤에게 내주었겠지. 아니, 더 솔직하게는 그 어떤 완벽한 이가 와도 내어 주기 아깝네. 레이라가 똑똑하고 어여쁘고 착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딸이기 때문에.”

녹스 공작의 발언에 고개를 주억이던 레사가 한숨을 삼켰다.

“자네가 아비였다면 어땠겠는가? 응?”

“…….”

“자네가 나라면 자네가 어여뻐 보일 것 같은가?”

“죄송합니다.”

“그럼 여기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나? 이제 와 자네 어머니의 병세가 좀 호전된 것 같으니 다시 내 딸에게 치근덕대 보겠다? 아니면, 내가 상처를 준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빌어 주어야겠다? 답이 무엇인 것 같은가?”

“…….”

입을 꾹 다문 레사를 바라보던 녹스 공작이 피식 웃었다.

“혹여나 레이라와 다시 만난다고 해도 전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자네는 또 혼자 내버려 두겠지. 내가 그 꼴을 봐야 하나? 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은 하지 말게. 내 자네를 어찌 믿을 수 있겠어. 나는 에틸을 시켜 자네를 암살할 수도 있었고, 자네의 가문 기둥 몇 개 정도는 내 선에서 뽑아 버릴 수도 있었네. 내가 그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

이를 악물었는지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레사의 표정이 보였다. 그래. 녹스 공작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레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을 수도 있었고, 메르세데스 가문의 기둥 몇 개 정도는 뽑아 버렸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면 거센 후폭풍이 일었겠지만, 그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레이라 때문이지. 레이라 고 예쁜 것이 얼마나 자네를 그리워하며 울었던지, 아마 그때 내 눈앞에 있었더라면 자네를 찢어 죽이는 데에서 그치지 못했을 거야. 레사 메르세데스, 나는 내 딸이 더는 슬퍼하고 아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각하, 저는 달라질 겁니다. 저는…….”

“자네가 달라진다 한들, 상대방이 그러지 않겠다 하면 어쩔 것인가? 또 자네 욕심만 채우고 자네 이기심만 채우려 레이라를 괴롭힐 것인가? 나는 그런 자에게 내 딸을 주기 싫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네.”

“…….”

“그래 지금처럼. 자네는 지금도 싫다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지.”

자신의 말이 백번 천번 맞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녹스 공작이 눈을 매섭게 떴다. 제 잘못을 알긴 하는 것인지 말없이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어 버린 레사를 향해 비릿하게 웃은 녹스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게, 내 손으로는 절대 내 딸을 자네와 만나게 해 주지는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손님을 두고 휙 떠나 버린 녹스 공작의 빈자리만 멀뚱히 바라보던 레사가 곧 굳은 몸을 일으켰다. 제 실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이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그때 자신이 갖고 있었던 속마음을 전부 내보인다면 착한 레이라는 분명 제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 처음부터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던 녹스 공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면……. 레사는 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다시 주저앉은 소파는 레이라처럼 포근했고, 또 차가웠다.

병신같이, 왜 이리도 후회할 줄 모르고 내 생각만 했을까. 병신같이, 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을 이제야 깨달은 걸까. 미친놈, 병신 새끼.

후회하는 남자의 곁에 짙은 외로움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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