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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눈에 반해 버린다는 것 (7/26)

6. 첫눈에 반해 버린다는 것

캄캄한 밤을 비추는 달빛이 훤했다. 그 눈부심에 선잠에서 깬 레이라가 눈을 살포시 떴다. 유리창 너머 밤을 비추는 달빛은 커다란 등불을 켠 것처럼 밝았다.

레이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낮처럼 훤한 시야에 새벽 2시를 알리는 시계가 고스란히 비쳤다. 입을 딱 벌린 레이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벼운 실크 카디건을 대충 몸에 걸친 레이라는 달빛을 따라 테라스로 나섰다. 아직 잠이 가시지 않았는지 졸린 눈을 비비적대던 레이라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 환하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작게 빛나야 할 별빛들은 빛을 다 빼앗긴 것처럼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덕분에 홀로 레이라의 시선을 독차지한 보름달이 의기양양 레이라를 비추었다.

밤바람마저 차갑지 않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고양되기도 했고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포근한 느낌도 들었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그것을 느끼던 레이라가 문득 코를 킁킁거렸다.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는 장미 정원. 정원을 스친 밤바람이 향기로운 장미 향을 실어 왔나 보다.

레이라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몸을 돌려 정원으로 향했다.

백색 철로 만든 동굴 모양 아치에 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꽃향기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짙었다. 커다란 아치와 백색 철을 아낌없이 사용해 만든 울타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미가 귀여웠다.

레이라의 취향대로 은은한 빛깔을 가진 장미였다. 싱그럽게 피어 있는 장미 정원은 장미로 만든 구름을 쫙 펼쳐 놓은 것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풍경을 더 환상적으로 만들어 주는 달빛이 장미의 빛깔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주인의 머리칼을 닮아 은은한 분홍빛을 띠던 장미는 보랏빛으로, 희고 청아하던 백장미는 푸른빛으로, 실크처럼 보드라운 크림색 장미는 오히려 더 희게 보이기도 했다. 그 꽃잎들은 달빛을 담뿍 머금은 채 환히 빛나고 있었다.

황홀한 밤 풍경에 숨을 집어삼키면, 그보다 더 황홀하게 느껴지는 장미 향이 레이라를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밤 산책이었지만 더없이 만족스러운 탓에 레이라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며칠째 레이라와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던 나트하는 저도 모르게 녹스 가의 저택으로 텔레포트 한 상태였다. 나트하는 불이 꺼진 저택의 고요한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더 밝게 빛나는 보름달은 마나가 가득 들어차 충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온갖 동식물들이 대지에 충만하게 들어찬 마나를 들이마시며 제 모습을 뽐냈다.

평소 같았으면 그 기운에 함께 취해 헤실헤실 웃음꽃을 피우고 돌아다녔을 나트하의 안색은 몹시 어두웠다.

모두가 잠든 새벽, 고즈넉한 남의 집 정원에 숨어든 나트하가 터덜터덜 걸어 역시 빈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자그마한 인기척이 고요한 저택을 빠져 나와 나트하가 앉아 있는 정원 근처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위협적이지도 다급하지도 않은 발걸음은 나트하에게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게 했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트하가 멍하니 앉아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휘영청 떠 있는 달빛은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춰 주었다.

푸르게 빛나는 달빛 덕분에 보라색으로 물든 은빛 머리칼이 신비로웠다. 신이 난 듯 초롱초롱한 붉은 눈동자는 달빛과 장미를 왔다 갔다 바라보며 연신 반짝이고 있었다. 밤중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고 탐스러운 입술도 배시시 미소 지은 채였다.

나트하는 멍하니 레이라의 모습을 쫓았다. 낭창한 몸은 얇은 슬립과 카디건 덕분에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바람을 맞아 오목하게 패인 배도, 도톰한 허벅지도, 탐스럽게 솟은 가슴의 굴곡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탓에 나트하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구름처럼 피어난 장미 정원 속에서 포르르 날아다니는 밤의 요정 같은 레이라는 나트하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나트하가 이제야 저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발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트하는 그녀의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였었나?’

나트하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레이라의 모습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마탑과 황성을 오가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가 레이라를 처음 본 것은 실연의 슬픔에 잠긴 그녀였다. 그때의 레이라는 늘 슬픔을 머금고 있는 솜사탕 같아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평소 사람의 표정보다는 주변에 부유하는 마나로 기분을 파악하던 그에게는 그 모습이 몹시 아프게 비쳤다. 남들 눈에 어찌 보였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트하에게는 그러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운. 그 슬픔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던 탓에, 그녀에게 다가가 보지는 못했지만 나트하는 레이라가 가녀리고 처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잔뜩 머금고 있는 레이라의 모습은, 나트하가 상상해 오던 그 어떤 여인의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꽃이 사람이 된다면, 달빛이 사람이 된다면 저런 모습일까?’

벚꽃 잎처럼, 눈송이처럼 자그마한 푸른색 꽃잎을 발끝부터 사르르 휘감고 있는 여인. 끝으로 갈수록 더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꽃잎들은 그녀의 기분을 고스란히 나트하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환희에 찬 꽃잎들, 아니 마나가 느끼게 해 주는 황홀한 아름다움이 레이라에게 존재했다. 누군가가 나트하의 심장을 향해 거칠게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신이 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정원을 산책하던 레이라가 나트하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마치 가을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붉은색 눈과 딱 마주쳐 버린 나트하는 석상처럼 쩍 굳어 버렸다.

누군가 나트하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너 지금 좆 됐다고.

그는 붉은색이 선연한 눈동자에 사로잡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나트하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나가 충만하게 차오른 보름달, 그 까만 어둠 속에서도 밝은 별처럼 가득 피어 있는 장미, 코끝을 간질이는 풍성하고 짙은 장미 향기.

그리고 제게 다가오는 여인은 무엇이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트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레이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신난 발걸음으로 정원을 배회하던 레이라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남자가 그녀의 정원 벤치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놀라 기절할 뻔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에 손을 얹은 레이라는 저가 아직 이승에 남아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성호를 그리기까지 했다.

‘유령인가? 아니, 저 아름다움은 천사인가?’

레이라는 겁도 없이 슬금슬금 의문의 미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저를 향한 남자의 시선이 집요할 정도로 딱 고정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 걸음을 멈춰야 했다.

곧은 시선이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아 신기했다. 달밤에 의문의 남자가 집에 침입했다는 것도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누구세요?”

간신히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레이라가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며 두 손을 공손히 가슴께로 끌어모았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미남자는 들려오는 레이라의 음성에도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저도 같이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레이라가 속으로 감탄을 뱉어 냈다.

정말 예쁜 사람이었다.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가던 레이라가 이곳이 저의 집, 저의 정원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정말이지 어여뻐, 아니 잘생겼다.

금빛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긴 머리칼은 잔머리나 앞머리 하나 없이 선을 맞춰 자른 것처럼 딱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넘겨 놓았는지 가르마 하나 없이 매끄럽게 등 뒤로 넘어가 있으면서도 남자의 귀나 목선 근처에 매끄럽게 걸터앉아 있는 것이 퍽 부드러워 보였다.

선이 고운 얼굴은 마치 여자로 보일 법도 했지만, 의외로 남자다운 면도 있었다. 높게 솟은 이마와 딱 맞춰 떨어지는 콧대, 날카로운 코끝은 남자의 얼굴을 날카로운 이리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데 또 그 속에 숨어 유순하게 빛나고 있는 청초한 눈매가 남자의 인상을 누그러트렸다. 나붓이 깔린 금빛 속눈썹과 반짝이는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은 금빛 눈동자는 촉촉하게 빛났다. 울다 만 강아지 같은 눈동자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동그란 눈매와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통에 남자의 인상이 이리에서 귀여운 애완견 쪽으로 뒤바뀌었다.

그 생각은 남자의 눈에서 슬쩍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입꼬리가 슬쩍 들린 입술을 보면서 확신을 하게 됐다. 남자는 말 그대로 엄청난 미남자였고, 동시에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나트하 러스티 부단장님?”

“……아.”

다소 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멍청해 보이는 얼굴까지 아름다운 남자가 레이라의 눈에 제 눈을 딱 맞춰 왔다. 고개를 살며시 반대편으로 기울인 레이라가 나트하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러스티 부단장께서, 이 시간에 저희 저택에는 왜…….”

“하아, 죄송합니다. 이리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해서, 그것이…….”

“…….”

탐스러운 입술 위에 검지를 얹은 레이라가 나트하의 옆자리에 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불편해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트하의 몸짓에, 솟아 있던 레이라의 눈매가 유순하게 풀렸다.

나트하는 제 손에 난 식은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연신 레이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좆 됐다. 이것은 예상에 없던 상황이었다. 뭐라 변명을 할 거리도 없었고, 도둑으로 몰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기에 나트하는 진즉 도망가지 못한 과거의 저를 욕했다. 나트하는 결국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왜 이곳에 계신 거예요?”

나트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음, 달빛이 충만한 밤에는 마나가 더 풍부해서 마법을 사용하기가 쉽다고 들었어요. 혹 제게 무슨 마법을 걸어 놓으셨다가, 정원에 딱 나타나신 건 아니죠?”

레이라는 그가 레사의 친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저를 스토킹한 것은 아니냐는 물음을 던져 보았다.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혹여 모를 일이었다.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스토킹은 아닌 것 같으니 됐다는 듯한 시원한 말투에 나트하가 제 옆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눈을 둘 곳이 없으니 서둘러 제 외투를 건네준 나트하는 레이라가 그것을 꼬물대며 입은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까이서 마주 본 레이라는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아름다웠다. 휘몰아치던 마나의 파동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그것도 문제였다. 사르르 휘날리는 꽃잎처럼 흩날리던 마나가 마치 눈송이처럼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멀리서 바라보던 것보다 더 느긋하게 그것을 감상하게 되었다. 물론 아름답기도 더했고.

오색찬란한 눈송이를 맞고 있는 레이라는 몸 곳곳이 그 빛에 반사되어 함께 빛났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친 동그랗고 선명한 루비색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며 황홀한 빛을 띠었다. 유순한 토끼의 눈동자 같다가도 순식간에 색을 바꿔 탐스러운 요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에 나트하는 홀리듯 레이라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명한 눈동자에도 빛을 잃지 않고 제 주장을 강력하게 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금세 나트하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 없을 정도로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걸쳐 있는 얼굴은 무척 유혹적이었다.

귀여운 콧망울과 높게 솟은 코의 조화가 그러했고 동그란 이마와 나른한 아치형 눈썹이 그러했다. 통통한 부리처럼 귀여운 입술은 새빨갛게 익어 당장이라도 입에 머금고 싶은 체리처럼 붉은빛을 띠어 색스러웠다.

나트하가 상황 파악도 잊어버린 채 헛숨을 들이켰다. 레사, 이 자식. 얼굴은 안 본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저를 빤히 바라보는 레이라의 시선에 고개를 다시 휙 돌린 나트하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토록 당황스러운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죄송합니다.”

“무얼 사과하시는 건가요?”

사과할 것이 한두 가지여야 입이 떨어질 텐데. 나트하가 멋쩍게 웃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렴치한이 되지 않으려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것 역시 퍽 청렴한 이유는 못 될 테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나트하가 레이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사실, 공녀를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이 맞아요. 요즘 바깥으로 외출을 전혀 하시지 않기에 답답한 마음에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이 그만, 저택에 들어와 버렸어요. 죄송합니다.”

“러스티 부단장께서는 마법사시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담을 넘으신 것이 아니라 텔레포트 하신 거죠?”

“네. 생각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그만.”

“마법은 신기하네요. 무의식중에, 음…….”

영혼 없이 웃은 나트하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멍청한 과거의 나, 죽어라.

“그런데, 저를 왜 만나고자 하셨나요?”

“…….”

“레사 메르세데스 단장의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나트하가 딱딱한 대답을 기계적으로 뱉어 냈다. 이렇게까지 긴장한 것도 난생처음인 것 같았다.

‘황제를 처음 알현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트하의 대답에 고개를 정면으로 휙 돌린 레이라가 약간 차가운 벤치에 몸을 기대앉았다. 고아하게 앉아 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마치 삥 뜯는 양아치처럼 방만해진 자세였다. 잠시 당황스러운 낯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트하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매력 있네, 정말.’

“그건, 부단장께서 나서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당사자가 아니시니까.”

“공녀께서는 제 친우를 만나 주시지도 않고 계시지 않나요. 그래서 찾아뵙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무례한 행동이지만…….”

“그러게요. 러스티 부단장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네요.”

빙긋 웃은 레이라가 생각보다 더 인간미 있는 나트하의 모습에 신기하다는 눈을 했다. 듣기로는 아주 다정하지만 강력한 철벽을 두른 남자라고 했었는데 레이라의 눈에는 그저 잘못을 저질러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 같았다. 다정하다더니 다정함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거지? 아, 다정할 상황이 못 돼서 그런가?

“음, 그런데 듣던 것과는 아주 다르시네요.”

“네?”

“매우 다정하신데, 철벽을 엄청 치신다고 하던걸요.”

“…….”

다소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야밤에 저지른 나트하의 행동이 더 무례했으므로 나트하는 그저 시선을 빙글 돌렸다. 뭐라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저 혼자 고개를 주억이던 레이라가 빙긋 웃었다.

“레사, 음, 레사 단장과 달리 러스티 부단장님은…….”

“저,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으음.”

레이라는 레사를 편하게 부르라는 건지 저를 편하게 부르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가 후자로 알아듣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수정하려니 부를 만한 호칭이 떠오르질 않았다. 경이라 칭하기에는 직급이 아주 높았고 소후작이라 하기엔 후계자 자리를 누이에게 넘겼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또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레이라를 의아해하던 나트하는 슬쩍 웃었다.

“그냥 이름을…….”

정말로 후자였나 보다. 레이라는 의외의 말에 눈이 살짝 커진 채 마주 웃었다. 난처한 웃음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럼 나트하도 저를 이름으로 부르세요.”

“…….”

꿀 먹은 벙어리처럼 놀란 얼굴을 한 나트하를 보며 까르르 웃은 레이라가 친구랑은 참 안 닮으셨다며 그를 놀렸다.

“레사와는 다른 점이 더 많죠.”

“그러신 것 같아요. 레사는 조금, 답답한 스타일이랄까요?”

“하하, 그렇죠.”

레이라와 헤어지기로 했을 때의 제 친우를 떠올린 나트하가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응?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당황한 표정이 된 나트하를 보며 이번에는 레이라가 빙긋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티가 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나트하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입을 꽉 다물어 버린 나트하는 레이라가 모든 것을 알고도 일부러 그리 행동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순간 쾌락에 허덕이던 제 친우의 안쓰러운 몸짓이 떠오른 탓에 얼굴이 붉어진 나트하가 시선을 아예 반대쪽으로 돌렸다.

“음, 다 알고 계신 것 같네요.”

들켜 버린 것도 같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너무나 예쁘게 들리는 탓에 나트하의 심장이 계속해서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뭐지, 몸에 문제가 있나?

나트하는 그녀 몰래 치유 마법을 중얼거렸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는 멍하니 넋을 뺐다.

‘뭐지?’

뭔지 모르겠으나 유쾌하지는 않은 감각이었다. 술렁이는 심장이 꼭 아름답지만 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품어 버린 것 같았다. 나트하는 이 이상한 기분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용기를 냈다.

“공녀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건가요?”

그래도 제법 사람답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이 나트하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고 있었다. 나트하의 질문에 고민하듯 다시 검지를 입술에 붙인 레이라가 배시시 웃음 지었다.

“글쎄요?”

“…….”

“그나저나 저는 나트하라고 부르는데, 나트하는 저를 공녀라고 부르네요. 제가 하대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으음…….”

골몰하는 표정이 귀여운 탓에 저도 모르게 웃음 지은 나트하가 냉큼 말을 놓았다.

“레이라,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

막상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니 영 어색했다. 잠깐 보여 준 나트하의 모습에 레이라는 왜 그가 항상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건지 깨달았다. 나트하의 나긋나긋한 말투와 다정하고 낮은 음색, 꿀 떨어지는 눈빛의 삼박자가 너무 잘 어울렸다. 레이라는 이상한 기분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전부 알고 계신 거군요.”

저주가 맞다는 말을 돌려서 들은 레이라가 놀란 눈을 했다. 막상 맞다는 말을 들으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럼 레사는 자신이 저주를 풀어 주지 않으면 평생을 고자로 살아야 하는 건가?

“푸는 법은 모르니까 전부랄 것까진 없지 않을까요?”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아신다면, 그렇게 해 주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나트하의 질문은 그 방법을 알고도 네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담겨 있기도 했다. 레이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풀어 줘야 하길래 저리 진지하게 물어보는 걸까?

로이가 제게 생긴 것이 저주라면 그것을 응당 풀어 줘야지 생각하고 있던 레이라는 이제야 실감이 좀 나는 것 같았다. 그간 들어온 저주를 푸는 방법 중에 정상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미간을 슬쩍 구긴 채 어여쁜 장미들에게로 시선을 옮긴 레이라는 아직도 코끝에 선명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왠지 조금 전보다 더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무래도 나트하의 체향이 섞인 듯했다.

“나트하, 당신이라면 어쩌겠어요? 나트하가 저였다면요.”

“…….”

“방법을 알고 계시니까 대답하기 편하실 것 아니에요.”

알고 있다. 그러나 나트하는 두 사람이 헤어진 과정도 전부 알고 있기에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인상을 구긴 나트하가 한숨처럼 말을 뱉어 냈다.

“글쎄요.”

“으음, 신기하네요. 경은 레사의 친우 시니까, 당연히 그러겠다 답하실 줄 알았는데.”

“레사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나요?”

“헤어진 이후로요?”

“네.”

“그 뒤로 그저 찾아와서 대뜸, 미안하다 사과하는 것만 들었죠.”

“…….”

고개를 주억인 레이라는 제 집으로 쫓아와 사과하던 레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괘씸했다. 잘 구겨진 레이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트하가 한숨을 쉬었다.

“레사가 잘했으니 봐 달라는 이야기를 하려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 드리고 의견을 묻고자 했어요. 염치없지만, 공작가의 후계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조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나트하가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도 알겠고요.”

나트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저주를 풀어 주세요, 하고 부탁해 볼 요량이었으나 입 밖으로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레사의 것을 만지지 않았으면 하는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불시에 의문과 해답이 함께 떠오른 탓에 나트하의 얼굴에서 다시 넋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나트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시선을 돌렸다. 저택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레이라가 불 켜진 저택과 나트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트하, 제가 몰래 빠져 나와서요. 아마 사라졌다는 걸 들킨 것 같은데 이대로 계시면 조금 위험한 것 아닌가요?”

“아, 그러네요.”

넋 빠진 대답에 허허 웃은 레이라가 제 얼굴을 두 손에 파묻어 버린 나트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음, 친구 걱정이 대단하네. 착각에 빠진 레이라의 생각은 전혀 모르고 있는 나트하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어느새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사르르 넘어가는 금빛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레이라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레이라는 나트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일 오후 3시. 광장 시계탑 사거리에 있는 찻집 에쉬로 오세요.”

“……네?”

“내일 만나자고요. 아, 오늘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요?”

“아, 고마워요. 공, 아니, 레이라.”

나트하의 머리카락 대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던 레이라가 그의 등을 슬쩍 밀었다.

“어서 가 보세요. 에틸한테 들키면 아마 집에 못 가실 거거든요.”

“……그럼 이따 뵐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레이라.”

공손히 두 손까지 끌어모아 곱게 인사한 나트하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벤치에 더 깊게 몸을 말아 앉았다. 턱을 괴고 앉으려던 레이라는 제 몸에 걸쳐진 나트하의 겉옷을 바라보다 픽 웃었다.

“신데렐라 같네.”

얼른 그것을 벗어 벤치 근처에 숨겨 둔 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나 여기 있어!”

아직 달이 창창한 새벽. 레이라는 잔뜩 열이 받은 에틸에게 붙잡혀 방으로 끌려들어 갔다. 레이라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에틸의 눈치를 보았다.

“화 많이 났어요?”

“…….”

눈을 크게 뜨고 존댓말을 하며 애교를 피워 보아도.

“잘못했어.”

“…….”

용서를 빌어도.

“나 다시 나간다!”

“…….”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해도, 에틸은 반응이 없었다. 이제는 제법 무서워진 레이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꼿꼿이 서 있는 에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달빛이 예뻐서 잠깐 구경나간 건데…….”

“…….”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응? 내가 잘못했다니까아.”

“같이 있던 놈은, 누굽니까.”

“응?”

동그랗게 뜬 눈이 시선을 슬쩍 피하는 것을 보며 에틸은 확신했다. 정말 옆에 누군가가 있었음을. 레이라가 발견된 벤치 근처를 빙글빙글 맴돌던 금빛 마나 파동을 본 에틸은 괜히 의심쩍어 화난 척 연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저렇게 귀엽게 굴 줄은 몰랐지만.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려 더 딱딱하게 굳어진 인상을 만든 에틸이 미간까지 구겼다.

“어떻게 알았어? 먼저 말 안 하고, 화 풀리면 말하려고 했더니……. 그럼 진작 말하지! 바로 그것부터 말했을 텐데! 다른 걸로 화가 난 줄 알았잖아.”

“흐음.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그래서 대체 누굽니까?”

아직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표정을 흘깃흘깃 엿보던 레이라가 침대에 폭 주저앉았다.

“나트하 러스티. 부단장께서 직접 오셨더라고.”

“우연히? 아니지, 저 모르게 약속이라도 하고 만난 겁니까?”

“아냐! 맨날 붙어 있었으면서! 그런 의심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날 만나려고 며칠 고생 좀 한 것 같았어. 그냥 답답해서 걷던 중에 무의식중에 우리 집으로 텔레포트를 했는데 내가 딱 나타났다고 하던데?”

“……개수작이로군요.”

“정말인 것 같았어. 내가 나타나니까 놀라서 쩍 굳어 있더라고.”

다시 생각해 보니 놀라서 굳은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 옷차림을 내려다본 레이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씨.

“이제 깨달았나 봅니다. 제가 왜, 화가 난 것인지.”

“그러네…….”

“그 꼴을 하고 제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났다. 이겁니까?”

레이라의 턱선을 훑던 에틸의 손길이 어느새 귓가를 쓸고 귓불을 꼬집고 종국엔 유두를 콱 꼬집었다.

“누가 있을지 읏……, 몰랐어. 새벽 2시였잖아…….”

“일단, 그 차림으로 밖을 돌아다닌 것부터가 잘못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레이라.”

느긋한 음성이 레이라의 귓바퀴에 척 달라붙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라의 귀에 입을 딱 붙인 에틸이 혀를 내밀어 그녀의 귀를 천천히 핥아 올렸다.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리던 레이라가 에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미안해. 누가 올 줄은 몰랐지이…….”

레이라는 자다 깨서 급히 나왔는지 얇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화내지 말라는 듯 말랑말랑한 태도가 사랑스러운 탓에 굳어 있던 에틸의 근육이 살살 풀어졌다.

제 품에 비비적거리느라 헝클어진 머리칼을 곱게 넘겨 주던 에틸이 빙긋 웃었다.

“잘못한 줄은 알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 똑똑한 우리 아가씨이시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응?”

불안하게 뜨인 귀여운 눈가에 작게 입을 맞춘 에틸이 레이라를 덜렁 들어 올렸다. 발을 달랑거리며 침대로 가겠거니 생각하던 레이라는 에틸이 제 방 테라스 창을 열어젖히자 몸을 한껏 움츠렸다.

“……에틸?”

“어떤 벌을 줄지,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시길래. 벌이니까, 상을 주듯 하면 안 될 것 아닙니까.”

테라스 창을 쾅 닫은 에틸이 반짝반짝한 대리석 난간에 레이라를 앉혀 두고 긴 팔로 얼굴을 비스듬히 괴며 섰다. 밝은 달빛을 등진 채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레이라의 모습을 한참이나 감상하듯 구경하던 에틸이 레이라의 카디건을 벗겨 휙 집어던졌다. 난간 뒤로 넘어간 카디건은 수풀 위로 떨어졌는지 작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재빠르게 카디건을 벗긴 것과는 다르게 이번엔 느긋한 손짓이었다. 에틸이 레이라의 동그란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얇은 슬립 끈을 팔 쪽으로 슬며시 젖혔다.

스르륵. 매끄러운 실크는 보드라운 레이라의 몸을 타고 힘없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잡으려 하는 그녀의 손을 멀리 치워 낸 에틸이 레이라를 일으켜 슬립을 완전히 벗겨 냈다.

“힉, 뭐, 뭐야!”

차가운 공기에 맨몸이 노출되자 움찔 떠는 레이라의 모습은 작은 토끼 같았다.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가리는 모양이 야릇했다. 가녀린 팔에 뭉개진 가슴이 비죽 튀어나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쉿.”

레이라는 에틸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에틸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레이라를 다시 난간 위에 앉혔다. 차가운 대리석에 맨살이 닿자 그녀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흠칫 놀란 레이라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엉덩이에 느껴지는 차가움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자연스레 모아진 그녀의 다리가 인어처럼 꼬아졌다.

가만히 레이라를 바라보는 에틸의 짙은 눈빛이 또 진득한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눈빛에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볼 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라 제 모습이 에틸에게 또렷이 보일 것 같았다.

여전히 그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이라는 다리가 배배 꼬이고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순간 이곳이 밖이라는 생각에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그래도 여기서는 조금.”

“소리만 내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모를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 흡.”

에틸은 저를 바라보며 긴장하던 레이라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자마자 꼿꼿이 솟은 그녀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놀랐는지 파득대는 그녀의 어깨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시 레이라의 시선을 빼앗아 온 에틸이 허리를 숙여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아흑, 흐읏.”

시선은 고스란히 레이라의 눈에 맞춘 채였다. 이로 잘근잘근 깨물고 보란 듯이 혀를 빼내 느긋하게 핥았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 눈동자가 만족스러웠다.

눈웃음이 맺힌 에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레이라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고 있었다. 신음 소리를 삼키려 깨문 입술에 검지가 파고들었다.

그가 입을 떼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바람이 스치자 유두가 더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약간 차가워진 살갗을 뜨거운 혀가 빙글빙글 타고 내리며 희롱했다. 차가워지면 뜨거운 혀가 달래듯 달라붙다가 또다시 차가워졌다. 어느새 긴 머리카락을 젖히고 등허리를 간질이는 손짓에 레이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흑, 들어가서……, 꺄앙.”

대답 없이 유두를 콱 깨문 에틸이 레이라의 신음을 틀어막으며 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녀의 입 안에 들어간 그의 손가락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꽤 아팠는지 눈가에 눈물을 매단 그녀가 바로 앉으며 에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바뀐 자세에 허리가 더 굽혀지자 불편했는지, 에틸이 레이라의 등에 손을 얹어 지탱하며 그녀를 허공 위로 뉘었다.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에틸을 더 꽉 껴안은 레이라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남은 팔로 레이라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다독이던 에틸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놓아 버릴 뻔했다. 불쑥 들어온 하얀 발이 에틸의 음경 위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기가 막힌지 어이없이 웃은 에틸이 게걸스레 그녀의 가슴을 물고 빨았다.

에틸은 레이라의 유두가 퉁퉁 불어오고 홧홧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집요하게 빨아 댔다. 그만하라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티 테이블 위로 눕혀 두었다.

유두에서 떨어진 입술이 곧바로 레이라의 비부로 향했다. 축축하다 못해 질질 흐르고 있는 액을 길게 핥아 마신 에틸이 두 손으로 그녀의 유두를 비틀어 꼬집었다.

“으으응! 아앗, 안 돼에…….”

클리토리스를 콱 깨물고 뭉근하게 혀를 놀려 핥아 준 에틸이 제 바지를 휙휙 풀어 집어던졌다. 울컥울컥 터져 나온 애액이 비부를 다시 축축하게 적셨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에틸의 남성도 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귀두를 제 손으로 몇 번 문질러 쿠퍼액을 펴 바르고는 예고도 없이 질 안으로 제 것을 푹 밀어 넣었다.

“하읏!”

레이라의 입을 틀어막은 손이 한발 늦게 그녀에게 닿았다. 흐물흐물 풀어져 있던 질은 에틸의 것을 꽉 물어 당기며 꿀꺽 집어삼켰다. 허리를 작게 흔들며 레이라가 제 것에 익숙해지도록 기다린 에틸이 허리를 길게 빼고 다시 콱 처박았다.

등허리가 휘도록 몸을 꺾은 레이라가 신음을 참으려 에틸의 손을 꽉 깨물었다. 흐리멍덩하게 풀린 붉은 눈동자가 애욕을 쫓으며 그를 따라왔다. 그것을 느낀 에틸이 붉은 눈동자에 저를 빤히 맞춘 채 빙긋 웃음 지었다.

레이라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탓에 손을 바동거리며 에틸의 등을 긁어댔다. 손에 잡힌 셔츠를 꼭 말아 쥔 그녀가 그의 움직임에 숨을 집어삼켰다.

“흐윽! 으응.”

거친 삽입에 음부에서 물방울이 팡팡 튀어 올랐다. 퍽 소리 나게 맞닿은 에틸의 치골과 레이라의 허벅지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질 주름이 에틸의 음경을 자근자근 씹으며 빠른 진퇴를 버겁게 버티고 있었다. 한계까지, 더 한계까지 빨라지는 움직임에 레이라가 거칠게 도리질하며 눈물을 뿌렸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머리칼이 바람도 마다하며 땀방울을 실어 날랐다.

“하아앙! 아윽, 좋아! 흐응.”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하아. 그러십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를 놀리듯 허리를 멈추지 않는 에틸이 레이라의 볼에 입술을 쪽쪽 댔다. 놀란 듯 제 것을 더 꽉 물어오는 레이라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침이 질질 흐르는 손을 레이라의 입에서 빼낸 에틸이 어디 버텨 보라는 듯 얄밉게 눈짓했다.

자비 없는 허리 짓이 더 거세진 탓에 레이라의 허리가 탁 풀렸다 힘이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납작한 배 위로 뚝뚝 떨어지는 에틸의 땀방울이 오목하게 고일 새도 없이 흔들거리는 몸짓에 흩어졌다.

곧 낭창하게 뻗은 레이라의 다리가 에틸의 허리를 거세게 휘감았다. 절정에 달한 것을 알리듯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그에게 닿아 왔다.

조금 느긋해진 음경이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며 뭉근하게 문질러졌다. 그 와중에도 붕 뜬 엉덩이가 더해달라는 듯이 에틸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욕심은, 많아 가지고……, 읏, 가고 있으면서도, 후우……, 더 해 달라고, 보채는 겁니까?”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에틸이 레이라의 턱을 잡아 올려 입을 맞추고 허리를 콱 부여잡았다. 레이라는 입 안으로 파고드는 혀를 감아 볼 새도 없이 다시 거칠어진 허리 짓에 신음을 내질렀다. 에틸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삼키며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절정이 더 커다란 무언가로 바뀐 채 레이라의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발갛게 익은 채 우뚝 솟은 유두가 사르르 스치는 밤바람에도 몸을 파르르 떨며 절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떡 주무르듯 제 것을 쥐었다 놓아주던 질 안이 아주 끊어 먹을 듯이 꽉 죄어들자 에틸이 신음을 삼키며 더 쑤셔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몸을 파묻었다. 영혼까지 토해 내듯 뱉어 낸 정액이 울컥울컥 레이라의 안을 때렸다. 그녀를 꽉 껴안은 에틸이 허리를 살금살금 움직이며 쏟아 버린 욕망을 달랬다.

“하아, 아아…….”

“후우…….”

아직 바들거리는 레이라의 안이 미치도록 좋아서, 에틸은 제 욕심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튼튼한 티 테이블을 짚고 허리를 세운 그가 그녀의 한쪽 다리를 제 어깨에 척 걸쳤다. 동그랗게 뜨인 레이라의 눈이 처량하게 에틸을 올려다보았다.

“에틸?”

“안 됩니다, 죽질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아앙! 들어가서…….”

다시 시작된 허리 짓이 느긋하게 그녀의 안을 헤집었다. 레이라는 이를 꽉 깨물며 아래에서도 에틸의 것을 꽉 깨물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서늘한 밤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욕정이 그곳에 있었다.

에틸에게 잔뜩 시달린 레이라는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그래도 일단 나트하와 만나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해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침대에서 떼어 냈다. 비척비척 일어나는 레이라를 흥미롭게 관찰하던 에틸이 몸을 일으켰다.

“흐음, 더 괴롭혀도 됐을 걸 그랬군요.”

“아니거든! 억지로 일어나는 거잖아!”

짹짹거리는 것도 귀엽다는 듯 빙긋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눈가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그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 들어 직접 씻기고 화장대 앞에 앉혀 주기까지 했다.

새벽녘, 진한 정사를 나누고 후희를 즐기던 중 레이라는 대뜸 나트하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에틸은 대번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그러나 곧 저주라는 말에 만남을 허락했다. 사실 허락할 것도 없었다. 에틸이 레이라의 행동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이라는 어느새 제 일정을 에틸에게 꼬박꼬박 얘기하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굴면서도 그런 그녀의 반응이 좋아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려야 했다.

에틸이 레이라와 나트하의 만남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레사를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이유가 컸다. 또 정말로 그것이 저주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제국 내에 그것을 풀 수 있는 인물도 나트하 하나뿐일 터였다.

“그럼 귀가 시간은 언제쯤이십니까, 아가씨?”

레이라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톡톡 두드리며 수분을 빼고 있던 에틸이 능글맞게 물었다.

“……호위로 따라갈 생각은 하지도 마.”

“어째서죠?”

정말 모르겠다는 새치름한 얼굴을 한 에틸이 상처 받았다는 듯 가슴께를 움켜쥐기까지 했다. 그것을 어이없는 눈으로 훑은 레이라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했다. 에틸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수건을 집어 바구니에 툭 던져 넣고 향유와 브러시를 꺼냈다. 색스러운 붉은 입술을 톡 내놓고 있는 걸 보니 삐진 척을 하는 것 같았다.

“약혼자라며? 무슨 약혼자가 호위를 해!”

“제 약혼자를 제가 지키겠다는데, 그 누가 제게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씨?”

“이럴 때만 아가씨래. 레이라, 쥐금 부터 나눈 레이라를 여닌으로 대할 테뉘, 레이라도 그러케 해 주시겠습니꽈. 하더니.”

느끼한 목소리로 과장되게 에틸이 했던 대사를 따라 한 레이라는 팔짱까지 끼고 에틸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것이 귀여워 보여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던 에틸이 레이라의 팔 사이에 갇혀 봉긋하게 모아진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광경이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기에 에틸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윗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꺄악!”

아직까지 보송보송한 수건 재질의 가운을 입고 있던 레이라가 빽 소리를 지르며 에틸을 떼어 냈다.

“어차피 벗겨질 거, 뭘 또 그렇게까지 감싸실까요.”

“하, 하지 마! 나 나가야 한다니까!”

“호위 보고 호위를 하지 말라고 하시기에 약속이 취소된 줄 알았습니다. 아가씨.”

손에 쥔 물건을 화장대 위에 툭툭 올려놓은 에틸이 레이라의 손을 간단하게 떼어 냈다. 여미고 있던 가운을 활짝 펼친 그가 그녀의 가슴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제 말이 끝나자마자 유두를 물고 할짝거리는 에틸의 여상한 얼굴을 보며 뺨을 새빨갛게 물들여야 했다.

머리 위로 잡힌 양손 덕분에 더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탐스러웠다. 만족스럽게 웃은 에틸이 혀를 길게 빼내 밑 가슴과 유두를 핥고 겨드랑이를 핥기 시작했을 때, 레이라는 항복했다.

“가자! 같이 가자! 대신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거야!”

“호위이니 당연한 것을요.”

배시시 웃으며 레이라의 팔을 놔준 에틸이 그녀의 가운을 야무지게 여며 주며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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