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저주
약속 시각 훨씬 전부터 찻집에 앉아 레이라를 기다리던 나트하는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벌써 세 번째 주문한 레몬 티를 또 한 번에 들이켰다. 천정을 향했다 내려온 나트하의 시선에 치마 밑단에 벚꽃을 가득 매단 레이라가 들어왔다.
레이라가 오늘 입은 옅은 분홍색 드레스는 봄 햇살에 흐드러지게 피다 눈송이처럼 떨어진 벚꽃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었다. 허리에 매달린 꽃잎을 시작으로 치마 밑단으로 갈수록 많아지는 꽃잎과 꽃송이들은 쑥스러운 듯 분홍빛 볼 터치를 한 것처럼 발그레했다.
움직일 때마다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어둡던 새벽녘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와 흡사했다. 나트하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는 어젯밤 잠들기 전, 그녀를 마주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오늘은 꼭 인사부터 건네야겠다 다짐했던 것이 또 수포로 돌아가려 했으나 나트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멍하니 레이라를 바라보던 나트하의 시야에 흰색 기사단 정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에틸이 나타났다.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린 에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트하를 훑고 있었다.
전 연인의 친구를 만난다는 것도 황당했는데, 그 놈이 제 친구의 옛 연인을 마음에 품고 있다니. 이건 또 뭐 하자는 걸까.
에틸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이 파렴치한 자식은 또 어찌 처리해야 하나 골을 짚었다. 먹이를 꾀어 유인하더니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국의 검이 전 연인이고, 제국에 하나뿐인 마법사는 제 연적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약혼자 되실 분은 이만저만한 거물이 아닐 모양이었다.
그래도 레이라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입은 열지 않은 에틸이 나트하를 향해 세상 해맑게 웃으며 살기를 듬뿍 담은 눈빛을 보내 주었다. 제 마음에 지레 찔린 나트하는 에틸의 사인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나트하!”
“어서 오세요. 레이라. 어제 일은 정말 죄송했어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무례만 저질렀네요.”
“아니에요! 신경 쓰이면 우리 제대로 소개할까요?”
기쁜 듯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배시시 미소 지은 레이라가 어여뻐 나트하도 함께 웃었다. 순간 느껴지는 살기가 따끔따끔 나트하의 볼을 찔러 댔다. 그는 용케 흠칫거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트하가 옆통수에 식은땀을 매단 채 레이라의 장단에 맞춰 곱게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실 기사단 부단장 나트하 러스티라고 합니다.”
“저 또한 제국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라 녹스라고 해요.”
희고 예쁜 손을 뻗어 손등에 키스까지 받은 레이라가 행복한 얼굴로 볼을 쓰다듬었다. 아주 놀고들 있다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에틸의 얼굴에 민망하게 웃은 나트하를 보며 레이라도 눈치라는 것을 키웠다.
“이쪽은, 제 약혼자 에틸 페르세나 백작이에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르세나 백작.”
에틸은 무어라 대답도 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튀어나온 손만 마주 잡아 나트하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가 레이라의 의자를 당겨 주며 앉으라고 눈짓했다. 레이라는 설마 말은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했다고 이러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기막힌 눈으로 에틸을 흘겨보며 나트하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린 에틸이 그녀를 눈빛으로 재촉했다. 레이라는 눈으로 에틸에게 욕을 하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에틸에게서 칼날 같은 눈빛을 받은 나트하는 흐르는 식은땀을 마법으로 날려 보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트하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정신이 이렇게 없었나 싶다가도 이렇게 파리가 날리던 찻집이 아니었는데 왜일까 생각하던 나트하가 문득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치맛자락을 매만져 정리하던 그녀가 나트하의 시선을 눈치채며 빙긋 웃었다.
“맞아요. 여기 제 찻집이거든요. 그것보다 일찍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제가 너무 늦었나요?”
“아니에요. 제가 일찍 나온 것을요. 그보다 페르세나 백작은 자리에 앉지 않으시는 건가요?”
“에틸은 오늘 호위로 따라온 거예요.”
“아…….”
나트하는 에틸이 몹시 신경 쓰였다. 인사를 건성건성 하는 거야 익숙했다.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익숙했다. 원래 그런 인물이니까.
그러나 목숨을 위협 받고 있는 황족을 호위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석인데도 제 호위 대상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에틸의 자세가…….
누구한테서 레이라를 지키겠다는 건지 잘 알아들은 나트하가 허탈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려 코를 쓱쓱 문질렀다. 헛기침까지 큼큼 내뱉은 그가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떻겠냐 권했고 에틸은 거절하지 않았다.
“페르세나 백작.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흘긋. 레이라를 바라본 에틸이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마지못해 입을 연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그저 저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이야기들 나누시면 됩니다. 하시던 대로 이름도 부르시고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절대 잊지 말고, 꼭 편하지 않게 대화 나누고, 이름 따위는 부르지도 말라는 협박이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당장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짐승이 버젓이 눈앞에 있는데, 누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나트하가 몰래 한숨을 뱉어 냈다.
나트하는 아무리 그래도 임자 있는 사람을,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어찌해 볼까 싶은 이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제 눈빛 한 번에 마음을 들켰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레이라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맞지만 결단코 수작을 걸어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달밤에 그녀를 만났을 때의 제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바보 같았기에, 지금만큼은 자신이 그때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뭐 그마저도 쉽지 않을 듯싶었지만…….
과하게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던 나트하는 에틸이 그녀의 약혼자라는 것을 상기했다. 레이라 녹스는 에틸 페르세나의 약혼자였고, 나트하는 그의 영역에 침범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나트하는 괜히 에틸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레이라는 테이블 밑으로 에틸의 탄탄한 허벅지를 콕콕 찌르며 눈을 흘겼다. 뭐 어쩌라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인 에틸이 아무렇지 않게 차를 주문하고 디저트를 골랐다.
“나트하. 에틸이 불편하면 가라고 할까요?”
결국 참다못한 레이라가 나트하가 앉은 쪽으로 허리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물론 에틸의 귀에도 들렸지만, 에틸은 모른 체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서로 사정은 다 알고 계신 거죠?”
“네. 그러니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무슨 이야기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에틸을 흘긋 바라본 나트하가 시선을 급히 옮겼다. 어마어마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마나 폭풍이 에틸의 몸을 타고 내리며 칼날처럼 벼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가깝다며 화를 내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이 상황이 즐겁게 느껴진 나트하가 빙긋 웃었다. 그가 지금부터 꺼내야 할 말은 에틸에게 있어서 개수작이나 다름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시비로 비치지 않을 리 없을 것 같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그래도 상황을 보니 레이라 앞에서는 약간 말썽을 부리지만 비교적 얌전한 강아지 행세를 하는 것 같으니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나트하가 제 머리칼을 빙글빙글 꼬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따끔따끔한 마나가 나트하의 볼을 찔러 댔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고 더해서는 레이라의 손목이라도 잡고 텔레포트를 해 버리고 싶었다. 하나 그렇게 에틸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귀여운 가면을 벗어던진 마나 폭풍이 제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테니 참아야 했다. 나트하는 최대한 소심하게 보이도록 일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라는 나트하가 손으로 금빛 머리칼을 휘감고 돌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손이 남자답네.’
그 모습을 보던 에틸은 저를 옆에 두고서도 퍽 귀여운 눈길로 다른 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언짢아 레이라의 구두를 툭 찼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채 에틸을 바라보다 멋쩍게 웃었다.
작게 이어진 침묵은 에틸이 이것저것 시켜 놓은 디저트들과 찻잔이 테이블 위를 전부 차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서빙을 마친 서버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자 나트하의 입이 열렸다.
“일단…… 그 저주는 레사에게 걸린 것이지만 그 책임은 레이라와 반씩 지고 있다고 보면 돼요.”
“…….”
“물론 레, 아니……. 공녀께서는 그저 나 몰라라 해 버리시면 끝날 일이긴 하지만, 레사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제가 찾아가려 한 것이고요.”
“제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면 다시 제게 돌아오던데……. 이건 레사에게도 해당되는 일인가요?”
“아마 다른 사람보다는 긴 시간 동안 레사에게 머물겠지만 다시 공녀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똑같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겠죠.”
고개를 주억인 레이라가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요?”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나트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굴렸다. 에틸은 관심 없다는 듯 영혼 없이 디저트를 깨작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검은 폭풍은 그대로였다.
나트하는 마음먹은 대로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요.”
✲ ✲ ✲
가을 하늘처럼 맑고 고운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눈꺼풀 속으로 사라진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매끄럽고 높은 이마에 곧게 뻗은 콧대와 적당히 도톰한 입술 날카로운 턱선까지 이어진 남자의 옆모습이 마치 명화의 한 장면처럼 고왔다.
그 고운 입술에서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오자 남자의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폭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는 아름다운 남자는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연달아 한숨을 내뱉었다.
검고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그의 머리맡에 흐드러졌다. 곧은 이마에 팔을 척 걸친 남자가 다시 눈을 떴다. 새파란 눈동자는 파도를 맞은 바다처럼 흔들거렸다.
찌푸린 미간과 함께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는 붉은 기가 돌았다. 이마에 두었던 손을 끌어내려 눈을 가린 남자에게서 짙은 눈물 냄새가 났다. 남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가라앉으면 편할까 싶어 바다에 몸을 던져 넣고 또 던져 넣어도 흘러넘치는 감정들이 남자를 튕겨 냈다. 포기하듯 생각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고스란히 느껴지는 감정들이 남자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괴롭혔다.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죄책감과 자책감이 남자의 몸을 휘감았다.
“하아…….”
늦은 이별을 겪는 레사의 한숨 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리 나약한 생각만 하게 된다는 것을 레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혀야 뭘 해 볼 것 아닌가, 레사는 지금 몸을 쓰는 것도 머리를 쓰는 것도 전부 힘들었다. 아니, 레이라 생각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 힘들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이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레사 메르세데스가 이별의 후유증으로 병신처럼 방에 처박혀 눈물이나 질질 짤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그나마 집에서 업무를 보던 것도 미뤄 둔 상태였고 매일 하던 훈련도 때려치워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폐인이 되겠구나 싶어 나트하가 자꾸 찾아와 레사를 건드렸지만 그것도 귀찮기만 했다. 다시 한숨을 푹 내쉰 레사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레이라도 이랬을까?”
이제야 그녀가 느꼈을 고통을 실감하며 한숨을 삼켰다. 저를 두고 환하게 웃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면 더 가슴이 옥죄고 답답해졌다. 레이라에게 헤어지자 말 한 이후로 비교적 밥도 잘 챙겨 먹고 일도 열심히 하던 과거의 자신을 할 수만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녀와 헤어진 것일까. 한숨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생각들은 요 며칠 레사가 반복해서 생각하던 그것이었다. 그러나 레사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레이라에게 가 있는 제 분신.
그것이 사라져서, 제게 없어서 혹은 다시 찾을 길이 없어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것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는 레이라가 드디어 저를 전부 잊어버린 것 같아서, 다 떨쳐 내 버린 것 같아서 괴로웠다. 공허했다.
달콤한 손길로 만져 주고, 뜨거운 혀끝으로 굴려 줄 때는 ‘아, 여전히 나를 잊지 않았구나’ 하는 병신 같은 희열을 느꼈었는데. 그래, 어쩌면 그때부터 레사는 그녀가 제게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대화만 나눈다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과거의 저는 얼마나 멍청했던 것일까.
“하…….”
다시 한숨을 뱉은 레사가 제 눈을 가렸다. 너무, 너무나도 레이라가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끝내 안타깝게도 붉어진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고운 얼굴을 적셨다.
✲ ✲ ✲
레이라가 좋아하는, 생크림에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를 포크로 괴롭히고 있던 에틸이 시선을 느긋하게 들어 올렸다. 이렇게까지 마나를 휘두르며 경고를 하는데도 나트하는 꼼짝도 없이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늘 웃고 다니는 허탕이라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에틸이 생각하던 것보다 거물이었고 담이 컸다. 이보다 더한 자극을 주며 반발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에틸이 제 마나를 지워 냈을 때였다.
“사정을 만 번 시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입이 떡 벌어진 레이라의 표정은 에틸 저가 그 좆같은 것을 아니 그건 좆이 맞으니……. 아무튼 그 입에 담기 싫은 것을 가지고 놀다 들켰을 때의 표정과도 흡사했다. 첫 번째 방법이 저것이라면 두 번째는 더 어렵거나 더 뭣 같은 짓이라는 소리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에틸이 레이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래도 제 마음은 진정되지 않은 탓에 그의 눈은 절로 뾰족해져 있었다. 에틸의 작은 시도에도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린 레이라를 두고 눈이 마주친 두 남자가 허공에 스파크를 튀겨 댔다. 하, 이것 봐라.
“그게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뭐 섹스라도 해야 하는 겁니까?”
“……맞아요.”
삐뚜름히 웃고 있던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 에틸의 등 뒤로 다시 거센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트하가 시선을 돌리며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노력했으나 불가능했다. 나트하는 제 앞으로 황금빛 벽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아직 설명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냥 하는 것은 안 돼요. 서로를 아주 사랑하는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야 풀릴 거예요.”
이미 기절할 듯 놀라고 있는 레이라는 제쳐 두고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부딪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시선은 검게 변한 에틸의 시선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나트하가 잘못한 것은 없었으니 당당할 수 있는 시선이었다. 굳이 잘못을 하나 찾으라면 이것을 고스란히 사실대로 알려 주고 있다는 것일까. 다시 찾아온 침묵은 전보다 훨씬 묵직하고 짙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두 남자가 아니었다.
“제가 레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방법은 쓸데없는 거겠네요.”
“그렇죠.”
언제 놀랐냐는 듯 여상하게 말을 뱉은 레이라가 찻잔을 집었다. 하얗고 고운 손끝은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올곧았다.
나트하는 환각 마법을 이용해 정사를 나누는 동안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절절히 사랑하도록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 말을 했다면 당장이라도 에틸에게 갈가리 찢겼으리라.
두 번째 방법은 나트하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레사를 돕겠다 나선 주제에 이제 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비겁하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에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끔찍한 기분이었으나 그것을 용케 참아 내고 있었다. 다시 마나를 거둬들인 에틸이 제 입술을 핥았다.
그냥 그것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나, 레이라가 그놈과 섹스를 하겠다 말한 것도 아닌데 이미 그렇게 한 것처럼 입 안이 씁쓸했다. 상상만으로도 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났다. 당장에라도 그것을 터트려 버리면 어떻게 될까. 서늘하게 웃은 에틸이 턱을 괴고 앉으며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첫 번째 방법을 정확하게 카운트하는 방법이 있나요? 아니면 쉬워지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라거나.”
“그건 연구를 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사정 지연이나, 정력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은 있지만…….”
터질 듯이 붉어진 나트하의 얼굴은 지금 레이라와 나누고 있는 대화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듯했다. 물론 레이라도 불편했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것을 물을 수 있겠냐는 생각으로 참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느낀 에틸이 미안하다는 듯 레이라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저지하며 대화를 끊어 냈다.
“레이라, 제가 물어볼 테니 곤란하면 자리를 잠깐 피해 주겠습니까?”
“아니야. 그냥 듣고 있을, 아, 나트하가 불편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게 붉어진 얼굴이었지만 나트하는 고개를 주억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물이 든 것이 묘하게 귀여워 보였다. 레이라는 제 처지도 잊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풀나풀 소리를 낼 것 같은 나트하의 속눈썹은 금가루가 사르르 뿌려진 나비 날개 같았다. 반짝반짝, 어여쁜 속눈썹 사이로 부끄럽다는 듯 숨겨진 금빛 눈동자도 너무 예뻤다. 발그레한 꽃물이 든 양 볼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저렇게 귀여운 남자가 무슨 철벽을 친다는 거지? 철벽은 무슨 강아지 같기만 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라는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볼을 콕콕 찌르던 따가운 시선이 해사한 미소 사이로 흩어졌다. 서늘하게 웃은 에틸이 은빛 머리칼을 나른하게 쓸어 넘기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일단, 확실하게 이것부터 물어보겠습니다. 레사 메르세데스, 그자는 이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당신이 레이라를 찾아온 것은 그자의 소행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독단입니까?”
“레사도 모든 내용을 알고 있어요. 제가 레이라를 만나 봐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레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고요.”
입을 다문 채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던 에틸이 골몰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왜 저 질문부터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트하를 만났을 때 너무 당황스러웠었나?
“지금 일어날 일들 대화한 모든 내용. 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합니까?”
“레이라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눈썹을 꿈틀댄 에틸이 레이라를 흘끔거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바로 나트하에게 긍정의 대답을 전했다. 에틸은 착잡한 심정으로 실현 가능한 방법에 대해 물었다.
“당사자는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일이니 동의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자에게 걸 수 있는 마법이 몇 가지나 됩니까?”
“발기를 유지하는 것보다 여러 번 사정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니까. 현재로서는 몇 가지 안 돼요. 정력을 열 배가량 높여 주는 것, 자극을 최대한으로 느끼게 하는 것 정도랄까요.”
“정력을 열 배 높인다는 것이, 사정 횟수가 열 배 만큼 늘어난다는 말과 같은 겁니까?”
“비슷한데 횟수가 열 배까지 늘어나지는 않을 거예요. 사람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재차 머리를 쓸어 넘긴 에틸이 눈을 나붓이 내리깔았다. 은빛 속눈썹 사이로 숨어 반도 드러나지 않은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사라지고 흑운이 비치고 있었다. 나트하는 그가 꽤나 열이 받은 상태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보다 그와 이처럼 길게 대화를 이어 간 것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자주 마주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퍽 신기한 일이었다.
나트하의 주변 인물들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아주 편안하게 생각했고 자주 말을 거는 편이었다. 그건 신전 사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외모도 한몫했지만, 늘 웃고 있는 다정한 성품 탓에 생긴 일이었다. 나트하는 에틸이 그의 친우처럼 다른 이에게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타입이거나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새, 아니. 공자의 그것을 레이라가 아닌 다른 이의 손으로 사정 시키는 것이 가능합니까?”
“안 돼요. 레이라가 아닌 다른 이의 손에서는 발기하지 않을 거예요.”
“하.”
씨발, 별 좆같은 저주가 다 있군. 작게 중얼거린 에틸의 음성이 두 사람의 귓가에 선명하게 흘러들어 왔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레이라가 에틸의 손을 슬며시 끌어와 마주 잡았다. 툭 튀어나온 욕설에 미간이 슬쩍 구겨졌던 나트하는 금세 제 표정을 지웠다.
‘저런 사람이었구나.’
나트하는 저도 에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주억였다. 누가 지금 나트하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면 기가 차서 웃을 것이었다.
나트하, 레사, 에틸 세 남자는 모두 타인에게 관심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무심한 성격이었다. 그저 누가 겉으로 조금 더 다정해 보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따지고 본다면 주변 인물을 가장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레사였다. 그는 늘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교육 받으며 자랐으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인상을 억지로 편 에틸이 다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정액을 최대한으로 늘리는 것, 사정 시간을 짧게 줄여 주는 것. 일단 이 두 가지는 기본으로 해결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떨어진 공자 놈의 물건을 남의 손으로 사정시키는 법도 함께 연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레이라, 아니 공녀께서 저주를 풀어 주시겠다는 말인가요?”
“그러지 않았으면 하지만 아마 레이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빙긋 웃은 레이라는 에틸의 손을 더 꽉 잡으며 제 마음을 표현했다. 만 번이라니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횟수였지만 레사와 관계를 하는 것보단 쉬워 보였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고민하던 것이 생각보다 저질스럽고 쉬운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에서 그저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애쓰고 있었다.
레이라는 자신이 생고생해서 레사의 저주를 풀어 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접어 둔 상태였다. 어찌 되었든 연관되어 버렸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마수는 저주를 레사에게 건 걸까, 레이라에게 건 걸까. 어째 저가 더 괴로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트하는 왜 에틸이 레이라를 말리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더해서 저라도 그녀를 말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씁쓸하게 웃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이유를 떠올리며 에틸을 한 번, 레이라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미 두 사람의 유대는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원래도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 시작이 더 쉬웠을까?
그런 점은 약간 부럽다고 생각하던 나트하가 제게 난생처음 찾아온 감정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제 마음속에 태어나 버린 악마가, 그녀를 갖고 싶다 속삭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처량하게 내리깔린 것이 아름다워, 레이라는 또 나트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저 얼굴이 마음에 들어 저러나. 하여간 예쁜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여전했다. 에틸이 헛웃음을 지으며 이 앙큼한 여자를 어찌할까 고민했다. 저러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자신도 심하게 중증인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에틸이 입을 열었다.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 했다.
“혹시 그 물건에 상처를 입히거나, 터트리면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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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장미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방 안.
하늘하늘한 침대 캐노피가 바람에 살랑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을 가득 비추고 앙증맞은 새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질간질하게 했다. 입꼬리를 나른하게 끌어올린 채 잠에 빠져 있던 레이라가 돌연 눈을 번쩍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핑 도는 머리를 딱 짚은 채 끙끙대던 레이라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 미쳤어 진짜!”
간밤에, 새벽에 있던 온갖 음란한 일들이 레이라의 머릿속으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중 제일이었던 것은, 로이를 들고 온 에틸이 그것을 레이라에게 주었고 그녀는 로이를 쪽쪽 빨며 그에게 무자비하게 잡아먹히던 기억이었다.
에틸은 저가 로이를 가져와 놓고선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이라의 입에서 로이를 꺼내려 노력했다. 레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떻게든 그것을 입에 물고 있으려…….
“아악!”
“레이라 당장 그걸 그 야해 빠진 입에서 꺼내지 않으면 박아 주지 않을 겁니다.”
“으으응, 시어……, 빠이 해, 응?”
씹어뱉듯 말을 뱉으며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에틸의 협박에도 흥분에 잔뜩 취해 사고가 불가능해진 레이라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다 정말 에틸이 허리 짓을 딱 멈췄고, 레이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를 재촉하듯 엉덩이를 흔들며 로이를 입 안에서 빼냈다.
“빨리이이…….”
말을 하려고 뺀 건가. 에틸이 인상을 팍 구기며, 저걸 꼭 찢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레이라는 손에 꽉 쥔 로이가 바르르 몸을 떨자 그것을 양손에 쥐고 쓰다듬었다. 에틸은 그 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에틸이 다시 허리를 놀리기 시작하자 냉큼 로이를 다시 입에 물었다. 쪽쪽 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에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
에틸은 잔뜩 열이 받은 얼굴로도 레이라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었고 로이가 정액을 울컥 뱉어 내자 그것을 거칠게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레이라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어젯밤 에틸이 집어 던진 로이의 행방을 쫓았다. 방구석에 찌그러져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티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로이는 음…….
“왜……. 왜, 피가 있지?”
겉보기에 로이의 상태는 멀쩡했다. 그러나 로이를 받치고 있는 흰색 천에,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로이를 이리저리 굴려 살펴본 뒤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던 곳에 착실히 집어넣었다. 서랍을 탁 닫은 레이라는 턱을 괴고 앉았다.
“…….”
‘아무래도 저거, 에틸이 로이를…….’
하하하. 어색하게 웃은 레이라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점심을 먹은 레이라는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었다. 에틸을 질질 끌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던 그녀는 그가 응접실 쪽으로 발을 돌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거긴 왜?”
“설명은 들어가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가 냉큼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는지 그녀가 좋아하는 꽃차를 냉침 해 얼음을 동동 띄운 냉차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어서 촉촉한 시럽을 듬뿍 먹인 바나나 파운드케이크, 바닐라 빈이 콕콕 박힌 쿠키, 딸기를 가득 얹은 커스터드 타르트, 상큼한 레몬 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가득 올린 파이가 줄줄이 들어오자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뭐야?”
“음. 스트레스 방지용 디저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응?”
고개를 갸웃거린 레이라가 어찌 됐든 좋아하는 것이 한가득 펼쳐진 것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에틸이 제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트하 러스티를 불렀으니까, 그자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저도 자세한 것은 들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하게 들은 것은 아니라서.”
“그보다, 에틸 혹시 로, 아니 그 저주 걸린 그거. 상처 입혔어?”
“…….”
찻잔을 들어 올리다 딱 멈춘 에틸의 눈동자가 먼 산을 보다 레이라에게 돌아왔다. 잠깐의 머뭇거림에 확신을 얻은 그녀가 입을 딱 벌렸다.
“진짜야?”
“그저 바닥에 내팽개쳤는데 좀 세게 내리쳤는지 피가…….”
“거짓말.”
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에틸의 말을 딱 끊은 레이라가 부러 엄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하려 했다. 귀여운 검지를 들어올리니 그가 냉큼 입을 열었다.
“뭐, 제 것도 아닌데, 피 좀 보면 어떻습니까, 아가씨. 그 로이인지 뭔지는 상처도 금방 회복될 텐데요.”
빙글빙글 웃으며 저를 놀리는 호위 기사 모드로 돌아간 에틸에게 눈을 매섭게 뜬 레이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그만해! 아니! 아가씨라고 하던가! 레이라라고 하던가! 하나만 하라고!”
“매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가씨라고 부를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에 꽤나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닙니까? 중얼거리며 제 턱을 쓰다듬은 에틸이 레이라를 보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데 제가 어떻게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겠습니까. 놀릴 때마다 이렇게 귀여운데.”
발긋해진 볼에 쉼 없이 입을 맞춘 에틸이 행복하다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꽃망울이 개화하듯 팡 터진 미소가 너무너무 예뻐서 레이라는 얼굴이 또 새빨개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얼굴도, 목소리도, 몸도 전부 레이라, 당신 취향이죠. 아닙니까?”
“…….”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인 그녀가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것에 소리 내어 웃은 에틸이 레이라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녀의 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귓가와 목까지 빨개진 레이라의 피부에 쪽쪽 입을 맞춘 에틸이 계속 제 다리를 위아래로 튕기며 어르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삐지셨습니까?”
“……아니거든.”
“그럼 부끄러운가 보군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또 얼마나 나긋나긋 듣기 좋은지! 레이라는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에틸을 흘겨보았다. 애정이 가득한 장난을 치며 놀던 두 사람은 노크하는 소리와 집사의 목소리에 냉큼 바르게 앉았다.
에틸의 다리 위에서 내려온 레이라는 그의 아쉽다는 눈길을 받으며 모른 척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귀 끝이 발갛게 물든 레이라를 향해 에틸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나트하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마음에 들었고, 오늘따라 따사로운 햇살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귀 옆에 꽃이라도 꼽고 뛰어다니고 싶었으나 꾹 참은 그가 녹스 공작저로 텔레포트를 했다.
그래도 예의 있게 정문 앞에 나타난 그가 제 방문 목적과 이름을 밝힌 뒤 집사에게 안내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라를 닮아 새하얗고 아름다운 고성은 그 내부도 매우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
웅장해 보이도록 천장을 높게 만든 로비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시각적으로 더 넓고 높아 보였다. 군데군데 연분홍빛, 금빛을 띤 가구들이 거대한 공간을 심심해 보이지 않게 했다. 커다랗고 화려한 금빛 샹들리에, 금빛 마법 등 전체적으로 파스텔이나 크림색을 띤 가구들은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나트하는 은빛이 살짝 도는 하얀 장식 테이블 위에 얹어진 화병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날 밤 정원에 가득 피어 있던 크림색 장미였다.
그의 생각은 자연히 커다란 보름달이 뜬 밤, 만났던 레이라로 이어졌다.
배시시 미소 지은 나트하는 저를 기다리는 집사의 시선에 얼른 그의 뒤를 밟았다.
“아가씨. 나트하 러스티, 황실 기사단 부단장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커다란 크림색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트색 일색인 응접실에 나란히 앉아 있던 레이라와 에틸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방긋 웃으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레이라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는 에틸이.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나트하!”
“환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성이 공녀를 닮아 아주 아름답네요.”
“제가 꾸몄으니까 당연하죠! 그보다 얼른 앉으세요. 오늘, 덥죠?”
차가운 꽃차를 받은 나트하가 찻물 속에 활짝 피어난 장미꽃에 눈을 빛냈다.
‘차까지 레이라를 닮았네’
얼굴이 살짝 발긋해진 나트하에 또 입을 헤 벌리려던 레이라가 에틸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닫았다.
“공녀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지난번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왜 레이라라고 불러 주지 않아요?”
“아, 약혼자께서 계시니 기분 나쁘실까 걱정되어 그랬어요.”
‘어쩜, 생각하는 마음씨도 예쁘잖아!’
에틸이 협박해서 그랬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는 레이라는 그저 해맑게 고개를 주억이며 에틸의 손을 잡아챘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을 제 작은 손으로 꽉 쥔 레이라가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그치?”
“네, 뭐.”
떨떠름한 표정의 에틸이 그럭저럭 고개를 주억이는 것에 성공했다. 에틸의 표정에 난처하게 웃은 나트하가 그럼 그렇게 하겠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지난번처럼 검은 마나 폭풍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경계가 사그라진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가 재차 레이라에게 물었다.
“몸은 어떠세요. 레이라?”
“아 참, 그걸 물으셨지. 근데 왜 물으시는 거예요? 몸은 당연히 괜찮……, 혹시 어제 그게 저주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요?”
얼굴을 굳힌 레이라가 고개를 휙 돌리자 에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희게 질린 그녀가 나트하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그, 그런 기분은 어제가 처음이었는데…….”
“음. 일단, 어제 그 일은 저주 때문이 맞아요.”
“…….”
레이라도, 에틸도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나트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주가 두 가지였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저주는 어제 레이라의 상태를 듣고 알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몰랐던 거였을 테고요.”
“두 번째 저주라니요?”
“원래 저주란 아주 일차원적인 거예요. 마나를 가진 사람이 ‘너에게 나쁜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시동어를 읊으면 저주가 행해지죠. 저주에 관련된 시동어와 악한 마음 그리고 마나가 있다면 누구나, 저주를 걸 수 있어요.”
“두 번째 저주라고 하신 것은 간단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맞닿아 있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에 에틸의 눈동자가 레이라를 향했다. 그는 제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작고 가녀린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레사에게 저주를 건 마수는 저주 속의 저주를 건 거예요. 이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밝혀진 것이 없어요. 그저 일반적인 저주를 걸 당시의 마음가짐이나 마나, 시동어에 변수가 생겨 더 강력한 저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만 알려져 있죠. 예를 들어 레이라가 ‘나트하는 말을 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시동어를 읊어 제게 저주를 걸었는데, 저는 말은커녕 듣지도 못하는 저주에 걸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의 저주로 이어진 또 다른 저주를 거는 거예요.”
“아, 그렇게 이중으로 걸리는 저주가 있다는 말이네요.”
“네. 그런데 지금 레사에게 걸린 저주는 원래도 아주 특별한 저주예요. 본인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풀 수도 없는 저주니까요. 일반적이라면 본인이 본인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야 하거든요.”
“……아.”
“그리고 지금 레사에게 걸려 있는 저주는, 유일하게 저주 속의 저주를 거는 방법이 알려진 저주예요. 단, 성공하기가 쉽지 않고 걸 수 있는 시전자도 아마 몇 명 안 되겠지만요.”
나트하가 친절하게 설명해 준 저주를 거는 방법은 저주를 걸 수 있는 조건에 비하면 아주 턱없이 쉬워 보였다. 레이라는 점점 더 불안해지는 제 마음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며 나트하의 말을 경청했다.
“자세하고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중요한 것만 얘기하자면, 레사가 걸린 저주의 이름은 Obscenely. 이름처럼 말 그대로 음란하며 터무니없는 저주예요. 게다가 저주 속의 저주로 발현된 덕분에 그 두 번째 저주의 대상이 레이라가 되어 버린 것이 문제이고 그 저주의 내용이 조금…….”
얼굴을 화르르 붉힌 나트하가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아 읽은 에틸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고, 레이라는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띄엄띄엄 설명을 덧붙인 나트하는 경악한 레이라의 얼굴에 옆머리를 긁적였다.
[효과]
시전자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수 있을 상대에게 대상의 신체 부위, 음경의 소유권을 양도한다.
[수칙]
1. 음경의 소유권을 양도받은 이는, 음경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2. 저주의 대상에게서 떨어진 음경은 먼지가 없고 매끄러운 곳이라면 어느 곳에라도 붙였다 뗄 수 있다.
3. 두 번째 수칙이 가능한 대상은 음경의 소유자뿐이다.
4. 음경이 제 소유권을 가진 이의 곁에서 멀리 떨어질 경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돌아온다.
5. 음경은 제 소유권을 가진 이에게만 발기, 사정이 가능하다.
[부가 효과]
저주의 대상이 사정했을 경우, 순차적으로 저주가 발생한다.
[부가 수칙]
1. 10일 이상 사정시키지 않으면, 강한 미약을 먹은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
2. 대상의 음경을 질에 삽입한 후, 10일 이내에 음경의 소유권을 가진 이를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강한 미약을 먹은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
3. 두 번째 이후, 20일 이내에 음경의 소유권을 가진 이를 사랑하는 ‘두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강한 미약을 먹은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
4. 세 번째 이후, 30일 이내에 음경의 소유권을 가진 이를 사랑하는 ‘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강한 미약을 먹은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
5. 미약의 효과는 저주의 대상과 음경의 소유권을 가진 이에게 동시에 발현된다.
6. 미약의 효과가 발현되는 시간은 오후 9시이다.
7. 미약의 효과는 조건이 충족되거나 저주가 해지될 때까지 지속된다.
8. 저주의 부가 효과로 인해, 해지 방법이 달라진다.
-숨은 고추 찾기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