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8. 상반된 첫 만남 (9/26)

8. 상반된 첫 만남

비가 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비 소식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숲은 미약한 활기를 띠었다. 마른 풀잎은 허겁지겁 목을 축였고, 오래된 고목들은 제 몸에 붙은 먼지를 시원하게 떼어 냈다.

즐거운 비명이 가득 찬 숲은 싱그럽게 물이 올라 푸르렀다. 몸단장을 새로 하며 빗물을 흠뻑 들이마신 온갖 생명체들과 함께 덩달아 흥이 난 비구름은 반락하게 비를 뿌리며 바람을 타고 산꼭대기로 향했다.

검은 바위가 가득한 산꼭대기에는, 울컥울컥 끓는 용암이 자리하고 있었다. 뭉근하지만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용암에 떨어진 빗방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치이익, 치이익.

빗방울이 닿아 검게 변한 표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붉은 화기를 띄며 새로이 끓어올랐다. 서러워진 빗방울이 가엽게도 우짖었다. 용암 한가운데, 바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시커멓고 거대한 무언가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부스스 눈을 떴다.

용암을 닮아 시뻘겋지만 밝은 금빛이 별처럼 가득 박혀 있는 신비로운 눈동자는 세로로 쫙 찢어진 동공을 갖고 있었다. 무언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슥 훑어보더니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우르릉 우르릉, 산이 거칠게 신음을 뱉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시커먼 재 가루가 눈 녹듯 사라지며 드러난 몸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은 비늘이 빼곡하게 덮인 파충류의 그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이 숨을 크게 깊이 들이마셨다.

쩌적, 쩌저적.

땅이 갈라졌다가 이어 붙는 소리와 함께 굳어진 땅에서 화기가 싹 거둬졌다. 펄펄 끓던 용암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자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산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시원하게 내리는 빗방울은 맑은 소리를 내며 바위를 반질반질하게 닦기 시작했다. 짙은 화기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거둬 마신 드래곤은 유백색을 띠고 있었다.

붉던 눈동자도, 비늘도 모두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띠는 커다란 눈동자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유려한 빛을 띤 비늘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이 마음에 드는 듯 즐거워 보이는 모양새였다. 곧 커다란 날개를 펼친 드래곤이 몽글몽글 무거운 회백색 구름을 밟고 멀리 날아올랐다.

✲ ✲ ✲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플랑베르주를 보드라운 천으로 문질러 닦고 있던 레사는 어지럽게 물결치는 칼날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 짙게 드리워진 눈 그늘과 쏙 들어간 뺨이 창백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볼품없어진 제 모습에 버릇처럼 한숨을 쉬며 제 애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레사가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잠이나 자 볼 요량으로 구름처럼 포근한 침대 위에 반듯하게 몸을 뉘인 레사는 홧홧하게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랫배에서 시작한 기이한 느낌은 점점 레사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흐악!”

절로 배배 꼬이는 몸은 쾌락을 갈구하며 거칠게 허덕였다. 시트 자락에, 옷자락에 피부가 스치는 작은 감각이 나비 효과처럼 제 몸을 한계까지 부풀리며 닿아 왔다. 신음을 참고 삼켜 내도 금세 또 다른 자극이 생겨났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약을 사발로 들이켠 것처럼 성욕이 활활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고간을 부여잡고 움직이거나 누군가의 안으로 제 것을 밀어 넣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어찌…….

“하, 이건 또……. 뭐, 하악, 하.”

그가 몸을 뒤틀지 않으려 애쓰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레사는 온몸에 옷자락이 척척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짐승 같은 몸이 고스란히 윤곽을 드러냈다.

답답해서 열어 둔 창으로 옅게 살랑이는 바람이 레사의 몸에 사르르 달라붙었다. 나비 날갯짓 같은 작은 바람 한 자락이 스치는 것마저 그에게는 커다란 쾌락이었다. 불에 닿은 것처럼 몸을 움찔움찔 떨던 레사가 눈을 홉떴다.

침대 위를 벗어나면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에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도 빳빳하게 서 있는 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 하나 꼼짝 않고 온몸이 굳어 버린 것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레사가 제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제 것을 만지고 핥고 빠는 느낌이 났다. 무엇에 젖어 있는 건지 액체를 흠뻑 적신 끈적한 손과 매끄럽고 앙증맞은 혀, 그 어떤 것보다 레사를 달뜨게 하는 뜨거운 입 안이었다.

당장이라도 정액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도 사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더, 조금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게 되어 절로 시트에 손을 박아 넣었다. 그는 애원하듯 몸을 엎드린 채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신음을 삼켰다. 절로 달달 떨리고 있는 허리는 주체할 수가 없어 내버려 두었다.

시트를 더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정성껏 애무하던 평소와는 다른 거친 자극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를 세워 깨물렸고 날카로운 송곳니에 제 것이 스치기도 했다. 입으로 쪽쪽 빨아들이는 강한 압력에 제 것이 터져 버릴 것 같았고, 귀두를 후벼 파는 혀끝은 제 것을 뚫고 요도 안으로 혀를 집어넣을 기세로 거칠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황홀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해, 미칠 것처럼 짜증이 치솟다가도 쾌감에 잠식된 머리는 절로 제 감정을 꺾어 버렸다. 제 것을 오물오물 씹어 대는 입 안에 정액을 토해 내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곧 머리까지 가득 차 있던 열이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막혔던 숨을 터트린 레사가 할딱이며 몸을 똑바로 눕혔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얼음물에 폭 담은 것처럼 들끓던 불씨가 확 사그라들었고 온몸이 축축했다.

“이건, 또…….”

땀에 젖어 색스러워진 흑발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뱉은 레사는 바싹 마른 육포처럼 수분이 빠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입맛을 다시며 힘이 다 빠져 버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삐끗, 넘어질 뻔한 터라 몸에 힘을 꽉 주었다. 챠르 숲에 산다는 언데드 몬스터처럼 비척비척 걸어 물을 한 잔 마신 레사는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작은 행동에도 기운이 전부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레사는 폭신한 소파에 죽은 것처럼 느슨하게 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저주가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것 같은데.”

까만 머리칼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슬릴 법도 한데 레사는 고민에 잠겨 무던하게 넘기고 있었다. 그저 기운이 없어 멍하니 눈을 뜨고만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방 귀퉁이에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이마에 손을 얹어 억지로 눈을 감은 레사가 한숨을 탁 뱉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레사에게 찾아온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것이 터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허리를 꺾으며 고통을 인내한 레사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하악, 하.”

나트하가 제 눈앞에 폭탄을 집어 던졌을 때처럼 눈앞이 번쩍번쩍했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손끝이 달달 떨렸다. 음경을 터트리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가 공포에 젖었다. 이지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떨리고 있는 눈동자는 고통을 감내하듯 눈꺼풀 속으로 사라졌다.

종이를 접듯 반으로 접힌 몸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은 있으나, 다친 부위가 제게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치료를 해 주긴 하는 걸까, 이대로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영영 못쓰게 되어 버린 건가.

온갖 생각이 떠도는 통에 이제는 머리까지 아픈 것 같았다. 레사가 인상을 더 구겼다.

“그래도 때리거나 상처 입히지는 않는다니 다행이다. 못된 주인한테 갔으면 어쩔 뻔했어? 원상태로 회복되긴 할 테지만, 아프게 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렇지?”

“네가 쾌락을 고통처럼 느껴 봐야, 그딴 소리를 하지 않겠지.”

희미하게 떠오르는 제 친우와의 대화에 레사의 낯이 대충 구겨 놓은 서류 뭉치처럼 일그러졌다. 쾌락을 고통처럼? 하. 제가 한 말이지만 그 같은 개소리가 없었다. 쾌락은 쾌락이고, 고통은 고통이었다. 아파 보니 뼈저리게 느껴졌다.

고통에 아주 미약하게 익숙해진 레사가 당장 진통제를 찾아 통째로 씹어 삼키며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진통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통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고통이 워낙 컸던 탓에 레사는 그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진 머리는 제 것이 누구의 손에 있는 것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분노를 쏟아 내고 있었다. 곧 떠오른 레이라의 얼굴에 레사가 제 머리를 흔들었다. 고통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꽉 참던 그의 머릿속으로는 의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대체 왜 이제 보기 싫어져서 그것까지 망가트리고 싶어진 건가? 아니, 레이라는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혹시 에틸 페르세나? 핏줄이 불거진 손을 꽉 말아 쥔 레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레사는 등신처럼 레이라를 놓쳐 버린 저를 한심해하던 에틸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 더없이 한심한 것을 보듯 가소롭다는 눈빛.

기회는 이미 사라졌으니 체념하라는 듯 비웃던 눈빛.

레이라를 가진 것이 저라는 것을 알리듯 당당하던 눈빛.

‘아니, 그가 정말 나를 그렇게 보았나? 그저 내 자격지심 때문인 것은 아닐까?’

레사는 자괴감과 허탈함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에틸이 제게 보인 눈빛이라 생각하던 것은 레이라를 사랑하는 그에게 제가 보내던 눈빛임을. 단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도.

“많이 아파?”

“…….”

아이처럼 해사한 말투지만 완연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이곳은 레사의 방이다.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들어올 수는 없었다. 레사는 헛것을 들었나 싶었지만 제 옆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존재감은 그대로였다.

레사는 단번에 등줄기까지 소름이 꽉 차는 것을 느꼈다. 동상처럼 굳은 그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갔다. 잘 닦아 세워 놓은 플랑베르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레사는 정체불명의 괴한이 난입한 난감한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누구지? 어째야 하지?’

그는 말아 쥔 주먹에서 슬쩍 힘을 풀었다. 의문의 남자는 레사가 저를 짙게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 카펫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흐응, 많이 아픈가 보네.”

조롱하듯 키득키득 웃으며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는 느긋한 몸짓으로 침대 오른편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레사의 눈앞에 앉은 남자는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단추를 단단히 여민 검은색 프록코트, 목까지 올라오는 하이칼라 드레스 셔츠에 검은색 크라바트, 검은색 가죽 장갑까지.

남자는 온몸을 꽁꽁 감싸듯 온갖 것을 착용한 상태였다. 보이는 살갗이라고는 얼굴이 전부였으나, 남자의 얼굴은 흐린 안개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의뭉스러운 모습에 레사의 눈이 살기로 가득 찼다.

그 눈빛에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는 소리를 냈다.

✲ ✲ ✲

나트하가 알려 준 저주의 내용은 그 이름처럼 음란하고, 터무니없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온 마나와 섞여 완연한 흑색이 되어 버린 에틸의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배어 나왔다. 나트하는 제 눈앞까지 다가온 불길한 느낌의 검은 마나를 빤히 응시했다.

‘역시, 화가 났네.’

“그 내용을 확실하게 믿게 해 줄 ‘증거’가 있습니까?”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어 뱉듯 말을 꺼낸 에틸이 나트하에게 겨누고 있던 마나를 제 마음의 모양처럼 곱게 다듬었다. 수십, 수백 개의 칼날처럼 벼려진 마나에 서슬이 시퍼런 예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나트하는 등 언저리로 흐르는 식은땀을 모른 체하며 에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 저주를 거는 것에 성공했던 술사가 적은 일기장이 마탑에 있었어요.”

“하, 왜 하필 세 명인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까?”

아. 그 부분 때문에 믿지 못하는 건가. 납득하듯 고개를 주억인 나트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레이라를 힐끔거렸다. 꽤나 충격이 크겠지. 계속 듣고 있으면 더 충격을 받을 것 같은데…….

나트하의 마음에 이름 모를 죄책감이 무럭무럭 샘솟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입을 달싹이다 고개를 푹 숙였다.

한숨을 뱉은 에틸이 아직도 석상처럼 굳어 있는 레이라를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질질 끌려가 품에 안긴 그녀가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처량하게 흔들거리는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나트하는 아무도 모르게 실낱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셋일 수도 혹은, 넷이나 다섯일 수도 있어요.”

“…….”

“그 부분만은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아서요. 일단, 그리 적혀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저 저주라면 레사에게 걸려 있는 술식만으로도 내용 파악이 가능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것까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

알을 품듯 레이라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던 에틸이 연신 말을 잇는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다섯이라는 말이 나트하의 입에서 나왔던 순간 움찔 몸을 떨던 레이라는 다시금 커다란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에틸은 흘러나오려는 한숨과 침음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레이라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널따란 응접실에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에틸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고 또 닦아 주며 그녀를 한참이나 어르고 달랬다.

그 차가운 남자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마냥 다정하게 군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트하는 엉엉 우는 레이라에게 미안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에틸이 제 품에서 부드럽게 레이라를 떼어 냈다.

“레이라. 가서 세안을 하세요. 집사에게 이야기해 놓을 테니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누워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

“제가, 곧 갈 테니……, 그만, 울고요.”

대답 대신 시든 꽃처럼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라는 에틸이 부른 제 하녀의 부축을 받아 응접실을 벗어났다. 응접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에틸의 마나가 폭주하듯 뻗어 나왔다. 성난 뱀처럼 똬리를 푼 마나가 허공을 빙빙 돌며 거칠게 울음을 토해 냈다. 화들짝 놀란 나트하가 냉큼 방어막을 휘감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제 머리를 쓸어 올린 에틸이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직은.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그저, 보여서 놀란 것뿐이니.”

의외의 인사에 더 놀란 가자미눈을 한 나트하가 냉큼 고개를 주억였다.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약간 느슨해진 듯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뭡니까.”

“…….”

대답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나트하를 바라보고 있는 에틸은 어느새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과 검은 마나를 번갈아 바라본 나트하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큼, 사정을 십……만 번 시키거나, 레사를 포함 사랑하는 다섯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 풀릴 수도…….”

“수도? 확실치 않다는 겁니까?”

“그리 써 있기는 하지만, 그 저주를 푼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

에틸은 기가 찬다는 말을 이처럼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확실치 않으나 방법은 저것뿐이라는 것이 황당했다. 그러면서도 믿지 않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레사에게만 걸린 저주였다면 뒤도 볼 것 없이 모르는 일인 양 지냈을 텐데 이것은 이제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섯 명과……. 후, 대체 어떤 미친놈이.’

행위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섯이 될 수가 있는 것인가? 영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에 에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횟수와 내용이었다. 에틸은 그저 천장과 바닥을 한 번씩 바라보다 나트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미약을 먹은 것 같은 상태를 해제할 수 있는 마법은 없습니까?”

“연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완벽하게 멀쩡한 상태로는 만들 수 없을 거예요.”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일까. 그 좆같은 공자 놈은 어떻게 그딴 저주를 받았을까? 받을 거였으면 저 혼자 괴로워할 것이지. 왜 온갖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는 걸까. 정말로 전부 레이라가 뒤집어써야 하는 건가. 이럴 거면 차라리 그 새끼를……. 흉흉해진 머릿속과 함께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에틸의 마나가 사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민트색 일색이라 산뜻하기까지 하던 공간에 어둠이 드리웠다. 나트하와 에틸을 제외한 모든 색을 아귀처럼 집어삼킨 어둠은 이른 밤을 불러왔다. 두 남자를 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에 어리둥절해진 나트하가 신기한 눈으로 제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고 에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나붓이 내리깐 은빛 속눈썹이 한 올 한 올 세세하게도 보였다.

나트하는 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에틸의 입이 열리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레사 메르세데스, 그자를 죽인다면 저주는 어떻게 됩니까?”

“…….”

검은 결계 속에서, 나트하는 제 눈을 꽉 감았다. 에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그는 그 자체로 이미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틸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자를 죽이면, 레이라에게 걸린 저주는 사라지는 거로군요.”

“확신할 수는 없어요. 높은 확률로 그렇다고 설명이 되긴 하지만…….”

“마법사들이 말하는 ‘높은 확률’이란, 아주 긍정적인 시선이 아니었습니까?”

낮게 한숨을 쉰 나트하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확실하지 않아요. 그리고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그 갑작스러운 저주에 레사의 잘못이 있다면……. 그건, 그저 저주에 걸렸을 때. 그때 레사가 레이라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유. 그것 하나일 텐데.”

“그럼, 그자가 레이라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자 때문에 레이라에게 생긴 일을 이해해야 합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버럭 소리 지른 나트하에게 무감한 검은 시선이 닿아 왔다. 그 싸늘하기까지 한 시선에는 감정이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허한 눈동자와 닮은 새카만 마나를 바라보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아 나트하는 제 팔을 문질렀다. 제법 두려웠지만 나트하는 굽히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사의 탓은 아니잖아요. 레사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요! 이 일을 알게 된다면 가장 힘들어할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요? 레사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저는 제 친우가 자살하지 않도록 말려야 할 거예요.”

“이 상황이 그자의 탓이 아니라고만은 못 하겠습니다. 저였더라면, 그 뭣 같은 마수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단칼에 죽여 버렸을 테니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습니다. 완전한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저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짚은 에틸이 제 마나를 거뒀다. 휘적휘적 움직이는 한 손이 허망하게 흩어지는 마나를 꼴깍꼴깍 집어삼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레사를 죽여 버린다면, 제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나 그 덕분에 레이라가 잘못된다면 에틸은 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제 손으로 레사를 죽이더라도 저주에 대한 확신을 가진 뒤여야만 했다.

에틸은 레이라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던 것이지 그녀에게 해를 끼치려 살아 있던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입술을 짓씹은 에틸이 레사와 그에게 저주를 내린 마수를 떠올렸다. 그 뭣 같은 마수는 왜 이토록 고약한 저주를 내린 걸까.

밝아진 시야에 응접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고 향긋한 꽃차와 달콤한 디저트의 향기가 한꺼번에 나트하를 덮쳐 왔다. 레사를 생각하는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나트하가 달콤한 향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퍽 예쁘장한 나트하의 얼굴을 흘깃 바라본 에틸이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 일단 레이라에게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 마음을 이해시키는 것도 힘이 드니.”

“……그럴 수밖에 없죠.”

“후…….”

눈이 퉁퉁 부은 레이라가 응접실을 빠져나간 이후로 두 남자는 숨 쉬듯이 한숨을 내뱉고 있었는데 이제는 말하기도 지쳤는지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는 두 남자는 여전히 아니, 점점 더 착잡한 얼굴이었다. 거칠게 머리를 털어 쓸어 올리는 에틸과 난처하다는 듯 제 얼굴을 감싼 나트하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레사에게도 말을 해야 하긴 할 것 같아요.”

“하아……. 레이라에게 먼저 말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라를 떠올리자 비슷한 표정이 된 두 남자가 동시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 ✲

하녀에게 부축을 받은 레이라는 제 방 침대 위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걱정을 놓지 못하던 하녀는 세숫물을 가지러 억지로 발을 뗐다. 하녀가 뒤를 여러 번 돌아보며 문을 닫았다.

레이라는 갑자기 혼자 있다는 것이 서러워졌다. 자신이 힘들어할 때면 늘 곁에서 손을 잡아 주던 시녀 데이지가 없다는 것이 갑자기 서러웠다. 또 에틸이 무엇 때문에 저를 혼자 보냈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가 곁에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촉촉하게 젖은 레이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펑펑 터져 나왔다. 소리 내 울고 있는 그녀의 눈앞으로 작은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채 울고 있는 레이라는 아직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서서히 모여드는 빛은 점점 제 몸을 커다랗게 부풀리고 있었다. 손에 쥔 에틸의 손수건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은 레이라가 발개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라락, 사라락. 제 눈앞에서 서서히 모여들고 있는 오색 빛깔의 찬란한 빛무리를 멍하니 응시한 그녀가 제 눈을 비볐다. 너무 울어서 헛것이 보이나?

아무리 눈을 비벼 보아도 눈앞의 빛무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점점 제 형체를 갖춰 가고 있었다. 의문스러운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딱 벌렸다.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붉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색의 고운 아미, 균형 잡힌 얼굴에 탄탄한 몸을 가진 남성이었다.

방 한가운데였지만 남자는 꼭 물속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신전 벽화나 조각에서 보던 기다란 천을 둘둘 감은 남자의 옷은 하느작하느작 힘없이 나풀거렸다. 동시에 그의 머리칼도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을 부유하며 서서히 흔들거렸다.

‘이건 또 뭐야? 누구지?’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더 비벼 본 레이라가 이번에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뭐, 레사의 그것도 떨어져 내 것이 된 판인데. 겨우 물에 빠진 남자 하나가 나타난 것이 뭐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자조하듯 웃은 레이라가 잔뜩 부은 눈을 꾹꾹 누르며 방만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 한쪽 팔로 고개를 괴며 다리를 꼬고 누운 그녀의 모습은 방탕한 여신을 연상케 했다. 눈이 조금 많이 부어 있긴 했지만.

시선을 야무지게 들어 올린 레이라는 드레스에 맞는 구두를 고를 때처럼 몹시 진지한 눈으로 제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두 눈을 얌전히 감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남자의 외형은 누구에게도 비견 되지 않을 만큼 고왔다.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남자의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은 레이라만큼이나 길어 보였다. 그것이 허공을 둥둥 부유하는 모양새는 사실, 썩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지켜보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물론 신기하게도 남자의 얼굴을 보면 절로 감탄이 흘러나와 그 마음이 쏙 사라졌지만.

자체 발광하는 기능을 탑재한 아름다운 얼굴은 나트하만큼이나 어여쁘고, 레사만큼이나 남자다웠으며, 에틸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그런데 또 묘하게 따스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고 신성하고 청명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레이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남자는 좌우 대칭마저 완벽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눈을 뜨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박제해 모시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기에 그녀는 그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사람 형상이 된 남자가 서서히 가라앉더니 바닥에 발을 딛고 똑바로 섰다. 올곧은 자세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묘한 위압감까지 풍겼다. 그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이 됐는지 레이라는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순간 남자의 고개가 뒤로 슬쩍 젖혀지며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그시 감은 눈은 붉은 속눈썹을 걷어 내며 제 눈동자를 빼꼼 드러냈다. 보석처럼 찬란하기까지 한 눈동자가 남자의 미모를 완벽하게 완성시키는 순간이었다.

“……우와.”

레이라는 속도 없이 감탄을 터트렸다.

고민과 체념, 슬픔, 절망을 죄 빼앗아 가는 훌륭한 미모였다.

남자는 그녀의 감탄을 들었는지 픽 웃는 것도 같았다. 레이라는 당장이라도 손뼉을 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슬쩍 아니, 자세히 보아야 티가 날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가 남자의 인상을 유해 보이게 했다. 그저 분위기가 그런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방만한 자세로 두 손만 공손히 끌어모은 채 남자를 감상하던 레이라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이 조금 그랬지만 더 자세히 보고 싶은 탓이었다.

“와아…….”

단풍잎이 떨어지듯 스르륵 내려앉은 남자의 머리칼은 그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였다. 컬이 곱게 잡힌 머리카락은 번쩍번쩍 윤이 났고, 왠지 모르게 남자의 등 뒤로 후광을 비추게 해 주는 것도 같았다.

“당신은, 당신은 신이신 가요?”

퍽 불쾌한 말을 들은 것처럼 수려하기만 한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기에 찾아와 봤더니. 이거, 영…….”

‘와 씨, 목소리도 끝내준다!’

레이라는 제 귀가 혹시 떨어진 것은 아닐까 더듬어 보며 눈을 빛냈다. 무어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저주에 걸린 것이 너인가?”

“……네?”

“맞나 보군.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계가 한가득이더니. 이 방에는, 어째서 결계가 하나도 없지?”

“아, 그건 사정이 있어서……. 마석을 주문해 놓았으니 이곳에도 곧 결계가 생길 거예요.”

에틸이 망가트려 놓은 결계를 생각하던 레이라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저주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난 탓에 그녀의 눈가가 밤이슬을 맞은 풀잎처럼 다시 촉촉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풀이 죽은 토끼를 연상하던 남자가 말을 돌렸다.

“내가 직접 결계를 만들어 주지. 대신, 이곳으로 언제든 워프를 하겠다.”

“네?”

눈물이 쏙 들어간 레이라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녀는 좌절의 순간 나타난 신비한 남자가 저를 구원해 줄 신인가 생각했다가 아닌 것 같아 조금 억울한 참이었다. 게다가 잘생기고 예쁘면 다인가? 뭔데 제 방에 맘대로…….

“감사합니다.”

“하, 너 아주 재미있군.”

이번엔 확실히 웃음을 만들어 낸 표정이 눈이 부시도록 어여뻤다. 햇살 같은 미소에 얼굴이 붉어진 레이라는 제 볼을 감싸며 황홀해 하더니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 강렬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레이라의 눈을 피했다. 슬쩍, 그녀에게서 한 발짝 멀리 떨어지기까지 한 남자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레이라에게 물었다.

“얼굴을 엄청나게 밝히는군. 요즘 인간들은 다 이 모양인가?”

“그건 아닐 거예요. 응? 요즘 인간들? 대체 누구세요?”

붉은 눈동자,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귀여운 얼굴. 솜방망이처럼 말아 쥔 앙증맞은 손과 자그마한 체구. 으음. 고민하는 듯 신음성을 뱉은 남자는 레이라의 모든 것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겉모습만 훑어보는 것 같은데도 레이라는 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심이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몹시 진지했고, 또 신중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해서 꾹 참고 있어야 했지만.

레이라는 몹시 잘생겼지만 이상한 남자가 제 방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남자를 쫓아내면 엄청나게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자는 고귀한 분위기와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어째서인지 몹시 선량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보면 볼수록 제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다는 희미한 믿음도 생기게 했다. 아니, 그저 찬란하게 빛나는 저 눈동자와 마주쳤던 순간부터 남자에게 이유 모를 호감이 퐁퐁 솟고 있는지도 몰랐다.

레이라는 고개를 다시 갸웃거렸다. 그녀의 직감이 맞았다. 그의 눈동자는 그와 눈이 마주친 모든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했다. 심지어는 그에게 적의를 가진 상대라도 절로 마음을 풀어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레이라를 하찮게 보던 남자는 제 신분을 밝힐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하고 난 뒤였다.

“피오니안 R. 타이니아스.”

“…….”

피오니안이 제 정체를 밝히자 레이라의 입이 딱 벌어졌다. 타이니아스. 타이니아스는 제국에 아니 온 세상이 신처럼 떠받드는 자의 이름이었다.

요정의 숲을 밀어 버리고 황성을 지으려던 황제.

유난히 악독하기로 유명하던 악녀.

유별나게 전쟁을 좋아하던 폭군.

세기의 탕녀라 불리던 여인.

대단한 미인을 두고 싸우던 두 나라의 왕.

왕을 잡아먹고 거죽을 뒤집어쓴 악마.

수백 척의 배를 약탈한 해적왕.

이 ‘특별한’ 자들의 근처에는 늘 타이니아스가 있었다.

그의 호의는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다. 타이니아스는 요정의 숲을 밀어 버리려던 황제를 대머리로 만들었다. 유난히 악독했던 악녀를 찢어 죽였으며, 유별나게 전쟁을 좋아하던 폭군을 선봉에서 도왔다. 세기의 탕녀라 불리던 여인의 생명력을 모조리 앗아 갔으며, 대단한 미인을 두고 싸우던 두 나라의 왕을 제치고 미녀를 차지하기도 했다. 왕을 잡아먹은 악마를 한입에 삼켰고 온갖 배를 약탈하던 해적왕과 함께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타이니아스의 호의를 드래곤의 유희라 부르기도, 정령왕의 분노라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타이니아스가 인세에 관여한 모든 사건, 사고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거나 범상치 않았기에 이르는 말이었다.

레이라는 저가 처한 상황이 눈앞의 살아 있는 신화에게 몹시 흥미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저를 도와주러 온 건가 싶어 미약한 고마움이 들기도 했다. 배고픈 아기 새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던 그녀가 입을 합 다물었다.

불을 품은 바람과도 같고, 땅을 딛고 선 물과도 같다는 전설의 정령. 딱딱하고 튼튼한 비늘과 강철도 찢는다는 강인한 발톱, 다이아몬드도 씹어 삼킨다는 날카로운 이빨과 태풍 같은 브레스를 가진 지상 최강의 존재, 드래곤.

곱게 손을 모은 레이라가 신화로 존재해 온 남자에게 예를 갖췄다.

“영원한 광휘를 뵙습니다.”

“그 인사는 무척 오랜만이군. 허나, 그럴 것 없다.”

“네?”

“그렇게 낯간지러운 예는 지긋지긋하다.”

“네, 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레이라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데 초면에 이런 질문은 실례인 것은 알지만…….”

“나는 드래곤이며, 정령이고, 인간이다.”

“……아.”

‘대체 그게 뭔데?’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아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것을 지켜보며 눈을 가늘게 뜬 피오니안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자신을 만난 모든 인간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대체 당신은 드래곤이세요, 정령이세요? 넌덜머리가 나는 질문의 해답은 피오니안도 몰랐다. 이 세상에, 피오니안 R. 타이니아스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피오니안은 아직도 멍청한 인형처럼 고개를 비틀고 있는 레이라를 보며 손을 딱딱 튕겼다.

“너 아주 재미있는 저주에 걸렸던데 괜찮은가?”

“……아니요.”

“그럼 다행이군. 그런 재미있어 보이는 저주는 아주 희귀한 것이니…….”

“다행, 이라고요?”

표독스럽게 떠진 레이라의 눈이 귀여워 작게 웃어 버린 피오니안이 제 입을 가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눈만 몇 대나 얻어맞은 붕어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그것을 세모꼴로 뜬 모습이 퍽 귀여웠다. 피오니안은 작고 귀여운 것을 아주 좋아했다.

“너, 이제 보니, 퍽 귀엽군.”

“…….”

화를 내려다 말문이 막힌 레이라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얼렁뚱땅 사그라든 화를 다시 내기도 뭐했다. 그보다 거대한 존재에게 화를 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저주는 왜 물어보신 거예요? 풀어 주시려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럼 재미가 없을 텐데.”

“…….”

제 목덜미를 부여잡은 레이라가 작은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그래도……, 전설을 칠 수야 없지. 내가 참자. 한 대 쳤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어. 그래, 참는 게 이기는 거야.’

어금니를 꽉 깨문 레이라가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고 있는 그녀를 숨 쉬는 연습이라도 하는 귀여운 생명체를 보듯 하던 피오니안이 말했다.

“흐음, 귀여운 것도 있고 즐거워 보이니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을까? 자세히 지켜본다면 더 즐거울 테지.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지?”

스트레스 지수가 하늘을 뚫어 버린 레이라가 눈을 다시 귀엽게 아니, 세모꼴로 뜨고 날렵하게 발을 놀렸다. 퍽 소리와 함께 힘차게 뻗은 그녀의 발에서 말캉한 느낌이 났다.

졸지에 급소를 얻어맞은 피오니안은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풀썩 고꾸라졌다. 황망한 얼굴로 꼬리뼈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몹시 난처해 보였다.

레이라는 바닥에 쓰러진 피오니안을 한 번, 제 다리를 한 번 바라보다 몹시 창백해졌다. 저질러 버렸다! 그저 한 대 치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주먹을 말렸더니, 발이 나가다니! 내가 누군가를 발로 찼다! 그것도 하필 타이니아스를!

얻어맞고 픽 쓰러진 피오니안보다도 더 안쓰러워진 인상의 레이라가 발을 동동 구르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색이 된 얼굴로 꼬리뼈를 두드리는 그의 손을 떼어 낸 그녀는 그가 하던 대로, 저가 대신 꼬리뼈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살려만 주세요!”

“하, 하하하하!”

박력 있게, 저를 냉큼 걷어찬 귀여운 생물이 안색이 하얗게 질려 무릎까지 꿇고 제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피오니안은 고통도 잊고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는 제 정체를 밝히고 난 뒤에 얻어맞아 본 것이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가 피오니안을 주먹으로 친다면 주먹이 부서졌지 그가 아파 본 적이 없었으니 더 그러했다.

피오니안은 눈을 귀엽게 뜬 레이라가 저를 발로 걷어차려 했을 찰나, 몹시 당황스러웠다. 저 귀여운 생물의 다리가 부러질 텐데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레이라의 발이 부러지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고통스러웠다.

피오니안은 저도 그곳을 얻어맞으면 몸을 고꾸라뜨릴 정도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놀라웠다. 그는 눈앞에서 제 허리를 팡팡 두드리고 있는 귀여운 생물을 흥미롭다는 듯 응시했다. 그녀는 만난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가 평생 동안 찾지 못했던 자신의 약점을 단번에 찾아냈다. 낮은 목소리로 한참을 웃던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손을 가볍게 떼어 냈다.

“너무 화가 나서 실성하신 것은 아니죠?”

피오니안은 볼썽사납게 몸을 굽히고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심각하게 없어 보이는 모습까지도 아름답고 멋지기만 했다. 그를 황홀하지만 어딘가 안타깝게 바라본 레이라가 눈을 가련하게 떴다.

“아니다. 뭐, 어이가 없긴 하지만……, 내게도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잘된 일이지.”

레이라는 아직도 나라 잃은 망령처럼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픽 웃은 피오니안이 부러 인상을 굳혔다.

“그래도 그렇지. 내게 감히 발길질을 하다니.”

“…….”

잔뜩 쪼그라든 레이라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얻어맞은 붕어 같은 그녀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저주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나쁜 짓을 좀 해 볼 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붉은색 눈에 피오니안이 다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를 발로 찬 것은, 그대가 처음이다.”

“…….”

“다시 묻지. 이름이 무엇이지?”

“레, 레이라 녹스예요.”

“일어나라.”

조건 반사처럼 몸을 벌떡 일으킨 레이라가 조심스레 피오니안과 눈을 맞추었다. 아, 예쁘다.

“내가 너의 저주를 풀어 줄 수는 없다. 대신, 이곳에서 머물며 너를 지켜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너를 도와주겠다.”

“저주를 풀어 주시는 게 저를 돕는 건데요?”

“그건 안 된다.”

‘저주도 감당하기 힘든데, 관람객까지 들이라고?’

억울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던 탓에 레이라가 제 미간을 파사삭 구겼다. 옹송그려 쥐고 있는 작은 주먹이 희게 질리는 것을 본 피오니안이 그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제 고간 쪽에 방어 마법을……. 으음, 그저 슬쩍 가렸다. 레이라가 제 눈가를 닦으며 피오니안을 흘끗거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도와주실 수 있는데요?”

“글쎄?”

역시, 밉상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레이라가 침대 맡에 폭 주저앉았다. 대단하신 분께서 나타나면 무엇 하나. 정작 제일 원하는 것은 들어주지도 않겠다는데. 허망한 표정이 된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토끼처럼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피오니안은 난감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귀여운 것이 울면 더 귀엽긴 한데, 달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손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던 피오니안은 무언가 결심한 결연한 표정으로 레이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더없이 비장하게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약간 거친 행동에 눈을 깜빡이던 레이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무엇이 그리 서러워 우는 거지?”

“저주받은 것부터 서러워요. 무슨 저주가 이따위인지……. 심지어 저한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주는 제가 걸린 거잖아요. 그것도 전 연인에게 걸린 저주가! 헤어지고 받은 선물이 이런 것이라니……. 저더러 두 명의 남성과 관계를 하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다섯 명이랑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

“어떻게, 그런 짓을 어떻게 할 수 있어요!”

“나는 열 명 이상의 남자와 관계하던 여인도 봤다.”

“…….”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때를 회상하듯 아득해진 피오니안의 눈동자가 흐리게 빛났다. 레이라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었다.

‘열 명 이상? 대체 어떤 미친 여자가 그런 짓을. 아, 그 세기의 탕녀라는 그 여자인가? 내가 그런 여자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어야 할 정도인가?’

경악에 찬 레이라의 목소리가 까랑까랑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무엇이 문제지? 너는 저주에 걸렸고, 네가 말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과도한 흥분 상태가 이어져 결국 죽어 버릴 텐데.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

그 흥분되는 상태가 이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거였구나. 안색이 더 나빠진 레이라가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힘없이 푹 숙여진 고개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피오니안은 비 맞은 토끼를 바라보듯 레이라를 세상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귀여운데, 불쌍하기까지 하다. 벌써부터 이리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데.

“일단,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보거라. 들어 보고 판단해 줄 테니.”

힘없이 눈을 들어 올린 레이라가 멀거니 피오니안을 응시했다. 그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난 것도 같았다.

레이라는 한숨을 푹 쉬더니 체념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사와 만나기 시작한 것부터 조금 전까지. 그녀는 피오니안에게 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장황한 설명까지 덧붙였는데 그것은 피오니안이 레이라에게 건 암시 때문이었다.

토벌에 다녀온 레사가 찾아와 대뜸 미안하다 했을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제게 협박 같은 고백을 내지른 에틸이 실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도. 그래서인지 그가 싫지 않고 오히려 좋은 것도. 달밤에 만났던 나트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것도.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처럼 고개를 살랑거리며 레이라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던 피오니안은,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하나 끌어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레이라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피오니안의 손 위에는 어느새 분홍빛 찻잔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분홍 토끼가 그려진 찻잔을 내밀었다. 그것을 홀짝이며 이야기를 끝마친 레이라는 그저 털어놓기만 했을 뿐인데도 마음이 약간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 마법사, 나트하라고 했나? 꽤나 마법을 잘 다루는 모양이군.”

“그런 걸 듣기만 해서 알 수 있어요?”

턱을 괴고 느슨히 기대앉은 피오니안의 모습은 앉아 있는 조각상 같았다. 또 겉모습에 현혹된 레이라의 눈이 멍하니 풀어지려 했다.

“그래. 그는 제법 제대로 알고 있다. 너는 흥분 상태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9일 안에 두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해야 하고, 그 뒤로 또 30일의 유예 기간 동안 한 명의 남자를 더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게 끝이 아니다.”

선명한 빛이 돌아온 레이라의 눈동자에 경악이 가득 비쳤다.

“그럼 정말로 네 명, 다섯 명까지 늘어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렇게까지 늘어나지는 않을 거다. 헌데 그 부분은 나도 확신할 수가 없군. 그것보다는 그 세 명과 잠자리라는 요건이 충족되고 나면, 너는 10일에 한 번씩 발정하는 몸을 가지게 된다. 두 명 이상의 남자와 잠자리를 해야 흥분이 사그라지지.”

“…….”

“즉, 너는 몇 번의 조건 충족을 위해 몇 명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삶을 살아갈 반려를 셋 이상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입을 딱 벌린 레이라가 치맛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피오니안은 그녀가 정말로 귀여웠다. 당찬 성격에 제법 똑똑해 보이는데 애정에는 한없이 약한 것이 귀여웠고, 제 얼굴도 귀엽고 예쁘긴 매한가지인데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귀여웠다.

가만 들어 보니 쾌락에 약한 것 같은데, 또 제 정절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질러 대는 것도 앙큼했다. 저를 보고 대뜸 ‘신이신 가요?’ 외쳐 사이비를 믿는 정신 나간 여자인가 싶었었는데 그저 귀여운 여인이었다. 몰래 웃은 피오니안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다정한 눈빛을 했다.

“일반적인 여인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남자들은 정부를 몇 명씩 거느리고 산다. 황제만 해도 수십 수백 명의 비를 두지.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욕 한 자락 얻어먹지 않는데 너라고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있나? 너는 공작가의 단 하나뿐인 상속자인데.”

“하아…….”

피오니안이 생각하기에 레이라는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자신은 저질러야 한다는 점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딴 것을 힘들어해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녀는……. 피오니안은 귀여운 것을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는 레이라를 살살 꼬드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 더 까다롭다. 그저 너는 즐기면 되는 것이지. 오히려 너는 남보다 방탕하게 살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런 기회 따위 바라지 않아요. 저주를 푸는 방법은 뭔가요?”

“그 레사라는 자의 성기를 십만 번 사정시키는 것. 정확하게 말하자면 99889회 남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네가 사랑하는 다섯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다섯 명의 남자여야 한다.”

“……하.”

기가 막힌지 헛숨을 뱉은 레이라가 삐딱한 표정으로 제 눈을 슥슥 닦아 냈다. 고개를 좌우로 휘저은 피오니안은 그녀의 눈가에 달라붙은 손을 떼어 냈다. 그는 레이라의 눈에 치유 마법을 걸어 주며 작게 혀를 찼다. 퉁퉁 부어 있던 붕어눈이 삭 가라앉자 어여쁜 눈매가 드러났다. 유순하나 유혹적인 눈을 지그시 응시하던 피오니안이 입을 슬쩍 벌렸다.

“귀여웠는데 아쉽게 됐군.”

“왜 자꾸 부은 눈을 귀엽다고 하세요? 취향이 조금…….”

“지금은 전보다 더 귀엽다.”

“…….”

꽤나 어여쁨을 받고 있겠군. 작게 중얼거린 피오니안이 픽 웃으며 차를 마셨다. 볼이 약간 붉어진 레이라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바람둥이! 맞죠? 숨 쉬듯이 여인들을 꼬시고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

“아니다. 나는 여태까지 동정이니. 네가 듣고 판단한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다.”

“네?”

고개를 레이라의 반대편으로 휙 돌린 피오니안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질문만큼 자주 듣는 저 발언은 그에게 있어 아주 억울한 것이었는데, 그는 오늘만큼 답삭 정답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덕분에 무척 당황스러워진 피오니안이 고개를 푹 떨구기까지 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멍청한 표정을 한 레이라가 제 귀를 슥슥 문질렀다.

“그, 뭐지……? 대단한 세기의 미녀를 두고 싸우던 두 왕 사이에 끼어들어 미녀를…….”

“그 여인은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도와주었을 뿐이다.”

“엄청나게 방탕했던 여인이, 타이니아스를 배신한 뒤에 말라 죽었다고…….”

“그 여인은 이놈 저놈 다 건드리고 다니다가 결국 악마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그 악마가 그녀의 정기를 다 빨아 마셨지.”

“아…….”

깨달음을 얻은 레이라가 멍하니 고개를 주억이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피오니안을 훑었다. 저 외모에, 저 몸을 가지고 그 오랜 세월을 홀로……. 측은한 눈빛이 제게 닿는 것을 느꼈는지 불쾌한 얼굴이 된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흘겨보았다.

“그 눈빛은 뭐지? 나는 그저, 반려를 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

피오니안은 작게 당황했다. 그의 이상형은……. 붉은 작약처럼 매혹적이나 토끼처럼 귀여운 눈과 밝고 달콤해 보이는 사랑스러운 빛을 품은 머리카락. 톡 튀어나온 새의 부리처럼 귀엽고 도톰한 구름처럼 부드러운 입술과 토끼의 솜방망이처럼 앙증맞고 동글동글한 하얀 손. 답삭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작은 체구와 달콤한 향기가 배어 있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은 피오니안이 머뭇머뭇 눈동자를 굴리다가 레이라를 빤히 훑어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녀는 그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긴 세월 동안 이상형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레이라만큼 사랑스러워 보이는 생물은 없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이 참 귀여웠지……. 가만, 첫 만남부터 울고 있어서 더 그래 보인 건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피오니안이 괜히 레이라를 타박했다.

“그런 것을 왜 묻지?”

“비슷하면 저도 입후보하려고요. 어차피 세 명 이상 모아야 한다면서요? 타이니아스 님도 남성 아닌가요?”

“뭐?”

“잘생겼지, 몸 좋지, 돈도 많으실 테고, 그 누구보다 명성이 자자하시고! 여태, 그, 혼자셨다니까 순정파이실 것 같고! 또……, 음, 나이가 조금……. 나이 차가 조금 많이 나긴 하지만, 타이니아스 같은 남편감이 어디 있겠…….”

심할 정도로 솔직한 레이라의 발언에 얼굴이 새빨개진 피오니안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도망치듯 후다닥 사라진 자리에는 반짝이 가루처럼 흩날리는 빛 입자 몇 개만 남아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피오니안의 장점을 나열하던 레이라는 뒤늦게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훑었다.

“뭐지?”

의아한 표정이 된 레이라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휑했다.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던 찻잔까지 들고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덩그러니 제 앞에 놓인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곧 소리 내 웃었다.

“생각보다 엄청 귀여운 사람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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