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혼란 속에서 피어난 감정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웃음이 묻어난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레사는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보다 그에 대한 혐오감이 깊게 차오르는 것이 의아했다.
“이 한심한 꼴을 보기 위해서 친히 찾아왔지! 생각보다 더 즐거운데?”
“…….”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낸 남자는 레사를 자세히 보려는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레사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시커먼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에 과하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만 붉게 반짝였다. 안광이 형형한 남자의 눈빛에는 온갖 기분 나쁜 감정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묘하게 공포감을 주면서도 퍽 익숙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다시 꽉 말아 쥔 레사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자 침입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레사가 그에게 집어 던질 요량으로 뭉친 뾰족한 마나가 파사삭 흩어져 버렸다.
레사는 아차 싶은 얼굴을 급히 숨겼다. 입 안으로 한숨을 삼킨 레사는 제 한심한 작태를 꼬집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눈앞 남자의 정체는 분명…….
“넌, 뭐지?”
“나? 자기소개를 해 주길 바라?”
해사하게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는 마치 연극을 하듯 과한 동작으로 제 머리 위에 쓰고 있던 까만 실크 모자를 벗어 가슴께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게 과한 친절이 깃든 동작이었다.
“나는, 네가 죽인 마수들의 아버지이자. 카르도베르 레퀴엠, 마지막 레퀴엠이라 불리기도 하지.”
아이 같은 말투가 사라진 카르도베르의 음성이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아마 그것이 그의 본 모습인 것 같았다. 레사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팔을 응시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이름보다는 그의 이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최후의 악마이자, 마지막 레퀴엠.
“네가 죽인 그 마수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겠지!”
베르는 언제 예의를 차렸냐는 듯 장난스레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빙글, 유려한 턴 이후로 매끄럽게 착지한 베르가 다시 아이가 노래하듯 말을 읊조렸다. 그는 춤을 추듯 스텝을 밟고, 턴을 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움직임과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동자.
힘이 쭉 빠져 버린 레사의 몸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사는 그저 베르의 입이 있을 법한 위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베르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카펫이 깔린 바닥을 탁탁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거. 그것도 너는, 몰랐겠지? 당연히 그랬을 거야!”
지팡이를 바닥에 고정하고 컴퍼스처럼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베르는 여전히 즐겁게 장난치는 아이를 연기하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는 베르의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레사의 귓가를 떠돌았다. 마법인 듯했다.
“네가 죽인 내 아이들의 수가 수백에 달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할 수 있겠어? 그렇지?”
점점 스산하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극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듯 격렬한 소음이었다. 손을 들어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느낀 레사는 제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네가 그 아이를 죽여주길 바랐어. 그래야 그 아이가 네게 저주를 걸 수 있었을 테니까! 어땠어? 고자가 된 기분은? 절망했어? 좆같다고 욕을 했을까? 어쨌든 좋지는 않았겠지?”
말만 해도 즐겁다는 듯 기뻐하는 베르의 음성은 고스란히 레사의 귓가에 쏙쏙 틀어박혔다.
“왜! 내가 이렇게 친히 나타나서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어떻게 생각해? 내가 왜 나타난 것 같아?”
베르는 파르르 떨리는 레사의 눈동자를 보며,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대단히 품위 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으며 긴 다리를 매끄럽게 꼬았다.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등 뒤로 휙 집어 던진 베르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와 동시에 찐득해 보이는 검붉은 연기가 허공을 가르고 새어 나왔다. 뭉글뭉글 혹은 찐득찐득하게 모여든 검붉은 연기는 입을 쩍 벌리고 날아오는 지팡이를 날름 집어삼켰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레사의 눈이 흐려지자 베르는 제게 집중하라는 듯 손뼉을 짝짝 마주쳤다.
“너는 절대로! 심지어, 네 목숨을 던져 넣어도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을 거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베르의 행동은 마치 꿈을 꾸는 소녀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는 몸짓이었다. 대꾸조차 하지 못하도록 입이 틀어 막힌 레사는 그저 베르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에게 건 저주는 두 가지. 네가 가장 사랑하지만, 네 것이 아닌 여인에게 자지를 빼앗겨 고자가 되는 것! 그리고,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를 절대 너 혼자서는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의아한 눈빛이 느껴졌는지 베르가 더 크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긴, 그녀는 한평생 한 남자로는 절대, 만족을 못 할 거라는 소리지.”
이제 내가 왜 왔는지 감이 좀 잡히나? 깔깔 웃으며 말을 잇는 목소리에 레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저 말들은 무슨 뜻이지? 저주가 두 가지라는 것이, 눈앞의 악마가 지껄이는 말 전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네게 선전 포고를 하러 왔어! 나, 그녀를 꼬실 거거든! 레이라 녹스라고 하던가? 듣기로는 아주 어여쁘다고 하니, 내게 그리 손해는 아니겠지.”
‘대체 레이라를 왜…….’
끔찍한 예감에 치를 떤 레사는 정신을 베르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소중한 것을 네가 앗아 갔으니, 너의 소중한 것은 내가 가져야 하지 않겠어?”
짙은 살기가 밴 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맺혔다.
“그런데, 내가 조금 확실한 것을 좋아하거든. 혹시 모르니, 하나로는 부족하도록 저주를 걸었지. 어때? 이제 내 말이 이해가 됐나? 이 정도면 전부 이야기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야.”
우드득, 목이 기괴한 모양으로 꺾이며 베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피처럼 검붉은 눈과 창백하고 미끈한 얼굴을 가진 악마. 그는 황홀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레사는 보랏빛이 감도는 붉은 입술이 귀 끝까지 쫙 찢어져 있는 것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부 사라졌다고 알려진 순혈 악마의 잔해가 제 눈앞에 있었다. 가지런한 사이로 톡 도드라진 송곳니는 뱀파이어의 그것이었다.
‘뱀파이어 중 아직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니!’
믿기질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악마의 권속이 악마인 척 행세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레사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정말로 ‘악마’였다.
뱀파이어는 악마 중에서도 상위 종으로 악독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종이었다. 악마의 씨를 말려 버렸다는 타이니아스의 말은 거짓이었던 걸까? 레사의 눈동자에 혼란함이 담겼다.
턱이 빠져라 입을 크게 벌린 베르는 아직도 깔깔 웃으며 레사를 농락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몸을 떨면서도, 레사는 베르가 제게 한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가 정말로 악마라면, 베르의 말을 흘려 넘겨선 안 됐다. 그가 본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은 레사에게 경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걸린 저주가 지금 눈앞에 있는 악마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저주가 둘이라는 것.
그중 하나가 레이라에게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눈앞의 악마가 레이라에게 구애를 하려 한다는 것.
……그것이 전부 제 탓이라는 것.
모든 것을 이해한 레사의 눈빛이 침착하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분노와 자괴감이 어느덧 자리하고 있던 공포를 밀어내 버린 순간이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틀어쥔 레사가 베르를 향해 팔을 뻗었을 때, 베르는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 ✲ ✲
긴 잠에서 깬 피오니안은 레이라보다 레사를 먼저 찾아왔었다. 덕분에 그는 레사와 베르의 만남을 지켜 볼 수 있었다. 피오니안은 쓰게 웃었다.
“분노한 마지막 레퀴엠이라, 이거 정말 희귀한 걸 보게 됐군.”
베르의 뒷덜미를 쥔 피오니안이 짙게 웃었다. 당황이 가득 들어찬 베르의 동공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타이니아스?”
“왜? 이런 짓을 벌였으면서, 내가 나타날 거란 예상은 못 했나 보지?”
“…….”
항복하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린 베르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저자가 누굴 죽였기에 그렇게 화가 났지?”
“에이브, 티라, 카이튼, 뮬리아, 뮬리안, 네이튼. 수없이 많지. 그리고 저 새끼는, 칼리를 죽였어!”
“…….”
결국 그것이 문제였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피오니안이 베르의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창백했던 안색이 마치 만년설처럼 허예진 베르가 제 옷깃을 탈탈 털었다. 퍽 억울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평소의 배는 창백해 보였기에 피오니안은 베르를 나무라기 전에 이유부터 캐묻기로 했다.
“칼리가 어떻게 저자의 손에 죽을 수가 있었지?”
“꽃을 꺾으러 간다고 했어. 내 방이 너무 창백하지 않느냐고. 고 예쁜 것이.”
“…….”
“내가 멍청했지. 그 아이가 꽃을 꺾겠다고 이곳까지 왔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네이튼의 곁으로.”
마수들이 제멋대로 제국에 있었다는 것에 눈썹을 씰룩인 피오니안의 표정을 못 본 체하던 베르가 말을 이었다.
“네이튼은 날 닮아 꽃을 좋아했으니 온갖 식물을 키우곤 했어. 들판에, 산에, 제 발길이 닿는 곳마다 씨앗을 뿌리곤 했지. 칼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네이튼을 찾아갔고, 그날은 하필 저 새끼가 네이튼을 죽이겠다 찾아온 날이었어.”
분을 못 이기는지 씩씩대는 베르의 가슴이 측은했다.
“그래. 단지 인간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괴물이겠지. 그 흉악하게 생긴 마수 새끼가 꽃을 좋아하고, 다정한 성품을 가졌으며 인간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어? 응? 칼리 그 아이는 그저 제 아버지를 위한 꽃을 꺾으러 제가 동생처럼 여기는 이를 찾아간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응? 안 그래? 그런데……! 그래도! 그 아이들은 내 아이들이잖아. 내 피로 낳고, 내가 직접 빚은 아이들이잖아. 내가 내 아이들을 죽인 남자 하나도 미워하지 못한다면, 내 아이가 죽은 것에 분노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버지란 말을 듣고 살 자격이 없지. 안 그래?”
다다닥, 말을 쏘아붙인 베르가 피오니안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휙 사라져 버렸다. 한숨을 내뱉은 피오니안은 그가 사라지고 남은 잔상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딱 한 명 태어났고 아직도 한 명뿐인 타이니아스와는 달리, 악마, 그것도 뱀파이어는 인간처럼 수가 많았던 종족이었다. 인간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먹던 그들은 결국 피오니안의 손에 멸족했고 단 한 명, 베르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뱀파이어들의 별종으로 피보다 꽃을 더 좋아하고 제 피로 만든 마수들만을 옆에 두고 한량처럼 살던, 웃음과 장난이 많은 꽤 괜찮은 악마였다.
그러니 베르는 제 혈족이 몽땅 타 죽었음에도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아직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였다. 레사의 손에 죽은 칼리라는 이는 베르가 맨 처음 빚어낸 마수였다. 베르는 칼리를 제 딸처럼 여기며 아꼈고 늘 곁에 두었다. 그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슬픔을 나누던 단 하나의 존재였다.
때문에 피오니안은 베르의 분노를 이해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피오니안은 몇 번이나 베르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었다. 하나의 존재에게 모든 마음을 준다면, 그 존재를 잃었을 때 전부를 잃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피오니안은 그것이 두려워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그저 작게 아끼던, 별처럼 수많은 이를 떠나보내며 작게 슬퍼하고 작게 그리워했을 뿐이었다. 고작 백 년을 사는 인간들도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긴 생을 사는 피오니안과 베르는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사고이며 이미 예상했었던 일이기도 했지만 제법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유희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면 이처럼 복잡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작은 사고를 저지른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심각하다 여겨야 하는 걸까.
그나마 인간과 저의 차이를 잘 알고 있고,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 정도의 복수에서 그친 것이리라 생각하며 제 마음을 다독인 피오니안이 목적지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 ✲ ✲
레이라는 하녀가 들고 온 세숫물을 보며 놀랐고, 하녀는 멀쩡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놀랐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응? 뭐, 괜찮지는 않은데……. 그래 뭐.”
이상한 대답과 함께 물을 튀겨 가며 세안을 시작한 레이라를 부드럽게 밀친 하녀가 그녀의 얼굴을 오래 된 도자기 다루듯 부드럽게 닦아 냈다. 울고 나면 살찐 붕어처럼 퉁퉁 붓는 제 아가씨의 눈가가 희한하게 멀쩡해진 것이 몹시 수상했으나 하녀는 그저 입을 곱게 다물 뿐이었다.
“샤샤. 나 데이지가 보고 싶어.”
“오시라고 연락을 넣을까요?”
“그래 줄래? 어차피 내일쯤 보겠지만……. 오늘 꼭 보고 싶다고 전해 줘.”
“알겠어요. 그럼, 차는 여기 둘 테니까 드시고 계세요.”
포르르 사라지는 샤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티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아 찻잔을 매만졌다. 분홍빛 찻잔을 보니 토끼가 그려져 있던 피오니안의 찻잔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그려졌다.
“발로 거기를 찼는데도 웃었었지. 으음. 성격이 무지 좋은가?”
호로록, 달콤하고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피오니안을 떠올린 레이라가 피식피식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얼굴을 하고 평생 수절하면서 살았을 수가 있지? 여자들이 전부 눈을 뒤에다 달고 다녔나?”
이것저것 떠올리던 레이라는 제가 피오니안의 약점을 알게 됐다는 것을 떠올렸다. 퍽 놀란 것 같았고 약점을 찾아낸 것이 다행스럽다 했었다.
“여태 약점이 없었나? 하긴, 타이니아스의 약점이라니 들어 본 적이 없긴 하네. 아마 다시 만나겠지? 그때는 꼭 약점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해 봐야겠다!”
에틸에게 배운 것을 고스란히 써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레이라가 고개를 주억이고 있을 때였다.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달칵 소리와 함께 나트하를 뒤에 매단 에틸이 머뭇거리며 레이라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당당하게 드나들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에 이유를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이라, 진정이 좀 됐습니까?”
“…….”
시한폭탄 근처에 다다른 사람처럼 머뭇머뭇 다가오던 에틸이 레이라의 얼굴을 빤히 보다 제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싶어 멋쩍게 제 얼굴을 만지작대던 그녀의 손이 제 눈을 더듬어 보고 옆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앉아. 나트하도 앉으세요.”
레이라의 맞은편에 착착 걸터앉은 두 남자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부기가 어떻게 쏙 빠졌는지 궁금해하는 눈치라 레이라는 먼저 답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타이니아스가 나타났다는 걸 알려도 될까? 되겠지?’
“어, 음……. 두 사람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타이니아스가 찾아왔어요.”
“예?”
“네?”
에틸은 뭔 소린가 싶어 얼굴을 찌푸렸고, 나트하는 제 귀를 더듬었다. 레이라가 아직도 긁적이고 있던 옆머리의 위쪽을 긁적거리며 다시 이야기했다.
“타이니아스가 찾아왔어요. 저주를 풀어 줄 수는 없는데, 도와는 주겠다고.”
“…….”
“…….”
“다른 설명들도 해 줘서 다 들었어요. 다섯 명이 될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저주를 푸는 방법과 세 명이랑 관계를 해도 열흘에 한 번씩 발정한다는 것, 그리고 발정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다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레이라는 그저 제게 설명을 하려 했을 두 남자의 수고를 덜어 주려 들은 것을 줄줄 읊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경악하듯 놀란 것 같았다.
“……응?”
“열흘에 한 번씩 발정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죽을, 수도……, 있는 거였습니까?”
칼날처럼 벼려진 에틸의 질문은 나트하에게 향한 것이었다.
“……저도 그것까진 몰랐어요. 레이라를 찾아온 분이 타이니아스 님이 맞다면 그것이 사실이겠죠.”
“하…….”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에틸은 나트하에게 들은 것과 레이라가 피오니안에게 들은 사실을 번갈아 확인했다. 추가 사항이 있을 것이란 걸 상상도 못 해 봤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침착하게 제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을 수도 있다니, 그건 너무하지 않나.’
이를 꽉 깨문 에틸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는 레이라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에 퍽 놀란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에틸은 제 마음을 두 번 세 번 구겨 접으며 욕심을 버렸다. 차오르면 또 버렸다. 그는 레이라보다 먼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레이라, 그 타이니아스 님은…….”
“아,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다시 오시겠죠?”
“그렇군요. 혹시 저도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저주와 마법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요.”
수줍게 얼굴을 붉힌 나트하는 무언가 굉장히 열정적인 얼굴이었다. 그러나 레이라와 몇 번 눈을 마주하자 점점 에틸과 표정이 비슷해졌다.
‘아, 내 걱정을 하나 보네.’
두 사람의 표정을 읽은 레이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에틸은 알까. 몇 번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싫은 티를 그렇게 내던 나트하와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을.
“일단 저는 돌아가 볼게요. 두 분이 나눌 이야기가 많을 듯해요.”
“배려해 주셔서 고마워요. 나트하.”
“아니에요. 오늘 무턱대고 말을 꺼내 버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미안해요. 레이라.”
“알려 달라고 한 건 저인데요……. 나트하가 사과할 필요는 없죠. 그래도 고마워요. 신경 써 주신 것 같아서 기뻐요.”
배시시 웃은 레이라가 나트하를 배웅하자며 에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싫다고 얼굴을 구길 것 같았던 예상과 달리 에틸은 벌떡 일어나 나트하를 웃으며 배웅까지 해 주었다. 영 얼떨떨한 얼굴로 에틸의 배웅을 받은 나트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라졌다.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에틸과 레이라는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샤샤는 레이라를 위한 디저트를 한 아름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그 마음씨가 어여뻐 그녀는 작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에틸도 그랬었지. 아까운 디저트를 한 입도 못 먹었네.’
아쉬움에 입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레이라의 얼굴을 마주한 에틸이 몰래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레이라. 일단,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 응. 그건 알고 있지만…….”
손을 꼼지락대는 레이라를 향해 케이크며 쿠키, 타르트 접시를 밀어 준 에틸이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며 말했다.
“겨우 9일 남았습니다. 확실하게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
“혹시, 제 걱정을 하신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뭐?”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메르세데스 공자에게 돌아가도 좋다던 것.”
저는 기꺼이 보내 줄 수 있다던 이야기 말입니다. 작게 내뱉은 에틸의 말에 레이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지금 꺼낸다는 것은 자신은 상관없으니 다른 남자와 함께해도 좋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인간 된 도리로 연인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생각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이리 코앞에 있는데. 레이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혼 없이 딸기를 입에 물고 있던 레이라는 급히 입에 든 것을 꼭꼭 씹어 삼켰다. 단것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 있었구나. 쓰디쓴 고약이라도 씹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저를 몰래 타박하며 입술을 씹었다. 에틸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한데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디저트나 먹고 있다니.
“에틸.”
“네.”
“타이니아스가 그랬어. 나는 그저 저주의 페널티 조건을 만족시킬 남자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내 평생을 함께할 반려들을 구해야 한다고.”
“…….”
“에틸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그래도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가 있겠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은데.”
검은빛을 미약하게 품은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니 에틸이 얼마나 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이 괜찮지, 어디 괜찮을 수가 있겠나.
레이라는 먹먹해진 마음을 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오르내리는 가슴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에틸은 그저 바닥을 바라본 채였다.
“아직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해야겠지.”
레이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횡설수설했다. 가만히 그녀를 기다려 주던 에틸은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체리 알 같은 입을 달싹이던 레이라가 작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에틸. 괜찮다면, 에틸이……, 내 곁에 계속 남아 줬으면 좋겠어. 내 반려가 돼 주었으면 좋겠어. 비록, 나는 에틸 말고도…….”
“좋습니다. 좋아요. 레이라.”
빛과 같은 속도로 대답한 에틸이 레이라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서로의 숨이 닿는 거리까지 바짝 다가선 에틸이 레이라를 제 품에 소중히 가뒀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가느다란 숨소리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해졌다. 레이라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에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더없이 미안했다.
“미안해. 에틸, 이런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싫겠지만…….”
“그런 소리, 하. 레이라. 저는 당신을 강제로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당신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일 수도 없었어요. 그럴 수가 없어서, 자격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 당신 앞에서는 당당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제게 떠나라 하시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텐데. 그러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저주가, 제가 당신을 욕심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레이라가 눈을 감았다 떴다. 에틸을 껴안은 손에 힘을 더 꽉 준 그녀가 그가 제게 해 주었듯 그의 등을 작게 도닥였다.
“파렴치했던 제 태도 탓에, 제 마음을 오해한 당신께서 저를 버리시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표현했어야 했을까, 왜 더 다정히 다가가지 못했을까. 오늘 하루에도 온갖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제가 당신께 들을 수 있는 말이, 청혼이나 다름없는 것이라면……. 저는 당신께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 상처를 받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께서 제게 미안해하실 일은 단 하나도 없어요.”
“에틸…….”
“저는 그저 좋습니다. 당신이 저주에 걸렸더라도, 영영 제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저 제 곁에만 있어 준다면. 당신께서 제 곁에, 제 곁에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을 잇는 에틸의 눈에 말간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말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레이라.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와 당신을 공유해야 하더라도, 당신이 바보가 되어 버리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혹여 당신이 저를 버리시더라도…….”
흑색 마나가 가득하던 눈은 어느새 침착하게 가라앉아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에틸의 푸른 눈동자가 레이라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레이라는 메두사를 본 누군가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뒤로도 두서없이, 그리고 계속해서 애정 어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속삭이는 에틸의 진심이 절절하게 가슴이 떨리도록 미어지도록 애달파서. 레이라는 그저 멍하니 에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그녀는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 어떤 시련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바닥에 무릎까지 꿇은 에틸이 레이라의 배에 제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보석처럼 똑똑 떨어지는 얼굴이 너무 어여뻤다. 그녀는 계속 사랑을, 미안함을 속삭이는 그의 머리 위로 작은 키스를 꽃비처럼 뿌렸다. 눈물이 가득 매달린 레이라의 눈은 어느새 곱게 접혀 있었다.
“고마워, 에틸. 나도 많이 좋아해.”
흐느낌이 커진 에틸의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들썩였다. 눈 녹듯 사르르 녹아 버린 걱정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나비처럼 아름답게 흩어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인 레이라가 눈물을 비처럼 쏟아 내는 에틸의 고개를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그녀가 먼저 입 맞춘 키스는 눈물을 잔뜩 머금었음에도 꿀처럼 달콤했다.
레이라는 당황한 듯 숨어 버리는 에틸의 혀를 부드럽게 찾아 문지르며 그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것처럼 급하게 숨을 집어삼킨 그가 그녀의 고개를 깊게 끌어당겼다. 다정하게 호흡을 나누고, 사랑스럽게 혀를 얽는 키스에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에틸은 처음으로 레이라에게 제가 온전하고 완벽하게 받아들여졌음을 깨달았다. 쪽쪽, 사랑스럽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버린 마음이 불쑥 새어 나왔다.
“사랑합니다. 레이라.”
세상에! 에틸의 얼굴에, 지금 꽃이 피어 있었다! 딱 벌어진 입을 가린 레이라는 환하게 웃으며 볼을 붉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과 여우처럼 예쁘게 웃음 지은 얼굴에 넋을 빼버린 그녀는 그에게 답삭 들어 올려져, 그의 다리 위에 놓일 때까지도 넋을 되찾지 못했다.
도톰하고 귀여운 볼에 키스를 뿌리고 이마, 코, 입술, 눈가에 연이어 쪽쪽 닿아 오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레이라는 에틸의 얼굴을 고양이처럼 밀쳐 내면서도 어딘가 멍한 얼굴이었다.
에틸은 제 얼굴을 밀어내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고 여전히 꽃이 만개한 듯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다시금 쪽쪽 키스를 퍼부은 그가 만족스레 목울음을 냈다. 에틸의 입술이 얼굴을 넘어 목 언저리를 지난 뒤 살짝 드러난 앙가슴으로까지 내려갔다. 레이라의 가출했던 정신은 그때가 되어서야 되돌아왔다.
“뭐, 뭐야…….”
“어디까지 사랑스러운지 맛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전부 다네요.”
민망했는지 볼이 달아오른 레이라가 튀어나오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히 웃던 에틸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에도 작게 쪽쪽, 입술을 부딪쳐 왔다.
“당신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사랑스럽다고 귀여워 죽겠다고 수시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에틸을 뒤에서 조종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레이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모종의 사건으로 연인이 되기 전까지 에틸은 레이라에게 늘 그랬었다는 걸. 비록 그때는 웃는 얼굴이 아니라 진지한 얼굴로 농담처럼 달콤한 이야기들을 하는 거였고, 연인을 대하기보다는 귀여운 여동생이나 제 아가씨에게 하듯 했지만 말이다.
어느새 진지해진 눈으로 에틸을 바라본 레이라가 그의 뺨 위에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에틸.”
“네.”
얌전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바닥에 작게 입을 맞춘 에틸이 다시 해사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반짝이기까지 한 시선은 몹시 푸르렀다.
“고마워. 에틸이 아니었다면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야. 저주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나 에틸이 없었다면 아직도 레사를 미워하는 데에 내 시간을 다 쓰고 있었을 거야. 방법은 과격했다고 생각하지만, 에틸이 내게 와 줘서 고마웠어. 사랑해 주고, 솔직한 마음을 다 보여줘서 고마웠어. 에틸은 몰랐을 거라고, 불안했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걸. 싫지 않았어, 오히려 좋았어. 나는, 에틸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어.”
“레이라.”
“사실 말로 해 본 적은 없지만, 죽고 싶었던 날도 있었던 것 같아. 남들이 웃는 게 기분이 나빴고 못된 마음이 들기도 했어.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어. 그저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고 내 생각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싫었어. 그래서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어.”
다시 슬픔으로 물들려 하는 눈동자에 레이라는 그의 눈가에 작게 입을 맞추며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만 미워할 거야. 나는 나를 위해서 살 거야. 또 에틸을 위해서 살 거야.”
“…….”
딱 벌어진 에틸의 입은 레이라가 자주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을 지은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나를 위해 살아 주겠다니……. 이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까.’
에틸보다 먼저 그를 끌어안은 레이라는 그에게 몸을 폭 기대며 사랑스레 볼을 비볐다.
“내 사람들은, 내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줄 거야. 이깟 저주에 지지 않을게. 마음 굳게 먹을 테니까 에틸도 힘들 땐 힘들다고 이야기해 줘야 해. 사랑은 두 사람이 할 때도 힘든 건데 내 옆에 에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있다면……. 나 그거 잘 알고 있으니까. 괜히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싫은 건 싫다고도 해 줘야 해. 알았지?”
“알겠습니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에틸, 나도, 나도…….”
에틸은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하면서도 저를 꽉 끌어안은 레이라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지 않은 뒷이야기마저도 다 들었다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전보다 더 진해진 미소에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레이라는 그저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품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 ✲ ✲
레이라의 근처를 서성거리다 지붕 위에 털썩 걸터앉은 피오니안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에게 절절히 제 마음을 고백하는 작은 목소리가 웅얼웅얼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것이 첫 번째로군.”
검고 검은 흑빛의 마나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미남. 피오니안이 본 에틸은 그가 보았던 수많은 강자 중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강인한 마나를 타고난 남자였다. 카르도베르와 마주하던 비실비실한 남자를 떠올리던 피오니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런 놈을 두고 그런 비실비실한 자를 만났던 거지?”
인간치고는 꽤나 괜찮은 마나를 타고난 자였으나, 에틸을 보고 나니 그자는 한참이나 부족해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레사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레사의 성을 떠올려 보던 피오니안이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짤그락짤그락. 사탕이 반쯤 담긴 병에서 붉은색 사탕 한 알을 꺼내 제 입에 쏙 집어넣은 피오니안이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볼록 튀어나온 볼마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어느새 짙어져 버린 분홍빛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 메르세데스. 레사 메르세데스였지.”
✲ ✲ ✲
푸르름이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두 남자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두 남자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반짝임을 가득 머금은 긴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미남은 방금 막 지은 죄를 고해성사한 듯 후련하지만, 죄책감이 그득히 묻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귀에 살랑이는 흑발을 가진 남자다운 얼굴의 조각 같은 미남은 영혼을 죄 털려 버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이라가.”
“…….”
“그딴, 저주에……, 걸렸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트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처참해진 제 친우의 낯에 안색이 새파래진 그가 다시 고개를 푹 꺼트렸다.
“저주가, 그녀에게 남자를 셋 이상 두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대체…….”
“네게 찾아왔다던 그 악마도 그렇게 이야기했다며 혼자는 가지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럼, 레이라는 평생을…….”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는지 제 머리를 짚은 레사가 한숨을 탁 뱉었다. 지금 그는 세상의 종말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레이라에게 생겼다는 저주가 무엇인지 들은 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풀리는 건데.”
“더 어려워졌어. 레이라를 사랑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다섯 명의 남자와 함께 관계를 하거나, 네가 사정을 십만 번 해야 해.”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레사의 낯이 미간을 와그작 구겼다.
“네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마법을 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 마법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거는 마법이야. 눈앞의 상대를 사랑했던 그때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환각 마법이지. 그런데 다섯 명을 한꺼번에 사랑한 적이 레이라에게 있을까?”
“없겠지.”
그런 여자가 어디 있겠나. 결국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얹은 레사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괴로워하는 레사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트하는 저도 같이 한숨을 내뱉었다. 레사의 마음처럼 끔찍하지는 않지만 나트하에게도 퍽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에게는 제 친우를 향한 죄책감까지 얹어진 상황이었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레이라를 원하는 남자들을 찾아야겠지.”
“…….”
화려한 발음을 뽐내듯 줄줄이 욕설을 내뱉던 레사가 말을 딱 멈추며 나트하를 응시했다. 어째 그 시선에 해부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나트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나트하. 레이라를…….”
“…….”
“좋아, 아니. 사랑하고 있어?”
시간 정지 마법처럼 몸을 딱 굳혀 버린 나트하가 눈동자만 굴려 레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적어도 내 입으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죄책감이 진득하게 묻어난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다시 땅에 처박은 나트하가 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착잡했다.
나트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레사는 여전히 제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 미동도 없었다. 거의 확신을 담고 있는 레사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레사는 제 친우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이 저와 퍽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트하가 레이라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그림자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 표정은 꼭 그녀가 걱정이 되어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나트하의 성격상 그녀를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그가 제 친우를 눈앞에 두고서도 다른 이를 걱정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랑일 터였다.
“왜 그 이야기부터 하지 않았지?”
“네게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잖아. 미안해야 할……, 일이니까.”
“어차피 이렇게 되어 버린 거,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한다. 나트하, 네가 보기엔 그중 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레사.”
“나트하. 나는, 나는 이제 불가능해.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어.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있지. 나는 그녀가 나를 원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곁에 다가가지 않을 거야. 염치가 있어야지,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커다란 손으로 완전히 눈을 가려 버린 레사는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당장 내가 죽어 버리고, 그녀가 멀쩡해진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렇게 죽을 수 있어. 내 탓이니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마음이야. 그런데 그건 아닐 테지. 그 악마 놈이라면 내 인생이,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인생이 저주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
“내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나트하. 그녀가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차라리, 너라도 그녀의 곁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해. 적어도 그녀에게 해를 가할 남자가 아니라 네가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에 나는 안도할 테니까.”
작게 흘러나온 레사의 솔직한 이야기에 나트하는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듯 눈물이 그득히 맺힌 나트하의 눈동자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 친우를 향해 있었다.
✲ ✲ ✲
오랜만에 아무 일거리도 들고 있지 않은 가벼운 손으로 레이라를 찾아온 데이지는 그녀의 안색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에 경악하며 샤샤를 나무랐다. 이에 기겁한 레이라는 데이지를 뜯어말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지는 레이라의 입에서 사실이 나올 때까지 괜스레 샤샤를 타박하는 척 연기를 이어 갔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듣게 된 그녀는 예상과는 다르게 훨씬 표정이 좋아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직 레이라가 본 데이지의 표정 중에 가장 밝아 보였다.
“표정이 왜 그래?”
“뭐가요 아가씨?”
“너 왜 웃고 있냐고. 내가 저주에 걸린 게 좋아? 혹시, 날 미워하고 있었어?”
푸하하.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크게 웃은 데이지가 코끝을 찡그리며 레이라의 손을 꽉 쥐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께서 한 남자에게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전설 속의 드래곤이나 정령왕이 나타난다면야 이해하겠지만, 겨우 레사 메르세데스, 에틸 페르세나라니요? 아가씨, 이건 기회예요!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어요!”
환희에 찬 데이지의 눈빛에 광기마저 서린 것 같았다. 그것을 떨떠름히 바라보던 레이라가 표정을 싹 굳혔다.
‘그래, 이런 아이였지. 그래도 저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한 사람은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나.’
레이라는 데이지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데이지는 ‘대단하고 멋진’ 저주에 대해 한참이나 떠들어 대더니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의아해진 레이라가 데이지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번쩍번쩍한 검은 성장 차림에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타난 남자.
두 여자가 동시에 탄성을 터트렸다.
“와.”
“우와…….”
처음 나타났던 곳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곳에 떡하니 나타난 피오니안이 레이라와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잡은 듯했다.
“아가씨, 제가 지금 천국에 와 있는 걸까요?”
“아닌 것 같아.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거든.”
“누군데요?”
“나는 피오니안 R. 타이니아스다.”
레이라 대신 제 입으로 신분을 밝힌 피오니안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들의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방금 얘기한 드래곤이며 정령왕이라 칭하는 단 하나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감격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환희에 감싸인 데이지가 턱이 빠지도록 놀란 얼굴로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아가씨, 이분이 새로운 부군이신가요?”
초롱초롱, 밤의 마법 등보다도 밝은 시선이 레이라에게 닿았다. 밝은 주홍빛 시선이 어서 맞다고 대답하라는 것처럼 레이라를 채근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벌게진 레이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왜죠? 저는 꼭 저분이 아가씨의 부군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타이니아스 님! 제가 아는 그 타이니아스 님이시겠죠? 그렇죠?”
“……그렇다.”
레이라와 데이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던 피오니안이 얼결에 대답했다. 이 정신없는 생물은 또 뭘까. 그는 괜히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아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저희 아가씨 어떠세요? 이 얼굴을 보세요! 깐 달걀처럼 매끈매끈하고 하얗죠? 이건 타고나야 한답니다! 눈동자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이 야시시한 눈매와 마치 토끼처럼 앙증맞은 눈동자의 조화를 보세요!”
데이지는 레이라가 최고급 상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홍보를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에 입을 딱 다물어 버린 피오니안은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민망한 얼굴로 데이지를 말리려던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반응에 기분이 약간 언짢아졌다.
레이라가 저를 말리지 않자 아예 그의 근처로 자리를 옮겨 간 데이지가 제 주인의 장점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몹시 곤혹스러워진 피오니안은 레이라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당장 구해 달라는 구원의 눈빛이었다.
레이라도 그것을 느꼈으나 조금 전 피오니안처럼 고개를 팩 돌려 버린 채 팔짱까지 끼며 그것을 무시했다.
난생처음 눈앞에서 대놓고 무시를 겪은 피오니안은 당황스러웠다. 화를 내기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애매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데이지의 말이 줄줄이 맞는 말뿐이라 속으로만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제 주인과 연애를 해 보심이 어떠느냐며 꼬드기는 데이지의 대담한 말이 그를 괴롭게 했다.
역시 조금 더 놀다가 들어올 것을 그랬다. 회한에 잠긴 얼굴을 한 피오니안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깜짝 놀란 데이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어난 데이지의 눈높이를 따라 고개가 들린 레이라는 지금 그녀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제정신이 들었나 보네.’
“아가씨,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할 일이 태산인데요.”
“벌써 가게?”
“네. 내일모레에 들를 테니, 저 없다고 울지 말고 계세요.”
“……알았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데이지가 활기를 약간 되찾은 피오니안에게도 곱게 인사를 올리고 떠나갔다.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준 것 같은 이 기묘한 느낌은 무엇일까. 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웃은 레이라가 피오니안을 흘깃거렸다.
“몹시 시끄러운 생물이었다.”
“귀엽죠? 그래도 저보다 언니예요. 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빙긋 웃은 레이라가 ‘저도 데이지를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 피오니안은 그제야 그 생물의 이름이 데이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감히 내 앞에서 제 소개도 하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 낸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향해 느끼한 눈빛을 했다.
“약혼자와는 이야기를 잘 끝냈나?”
“네. 어디서 몰래 듣고 계셨던 것은 아니죠?”
“…….”
“진짜 순진하시구나. 타이니아스 님, 정말 제 남편감으로 입후보하실 생각 없으세요? 제가 잘해 드릴게요.”
어림없는 소리, 하며 흥 콧방귀를 뀐 타이니아스가 어디서 커다란 사탕 병을 꺼낸 뒤 사탕을 하나 입에 물었다.
레이라는 그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멍한 표정을 짓다 저도 하나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레이라의 손 위에 하얀 토끼 모양 사탕을 한 알 올려 주었다.
“이것도 토끼네…….”
“뭐라고 했나?”
“아니에요.”
“그보다 내 이름은 피오니안이다. 타이니아스가 아니다.”
“제가 타이니아스 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되나요?”
“괜찮다.”
커다란 사탕을 반대쪽 볼로 굴리며 레이라에게 고개를 주억인 피오니안이 사탕 병을 다시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홀쭉한 주머니와 볼이 톡 튀어나온 그를 번갈아 바라본 레이라가 마법이구나 생각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피오니안. 그럼 말도 놔도 돼?”
“이미 놓은 것 아닌가?”
“진짜 화를 안 내네. 혹시, 내가 피오니안의 약점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거야?”
“아니다. 그래도 그것은 비밀로 해 주길 바란다.”
피오니안은 제 약점을 떠올렸는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얼굴을 복사꽃처럼 붉히며 레이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얼굴에 폭 빠져 버리려 하는 정신을 다급히 가다듬은 그녀가 제 입꼬리를 비열하게 끌어올렸다.
“내가 이걸 누군가에게 말해 버리면 어쩔 건데?”
“…….”
“비밀 유지의 대가는 줘야지,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냐?”
피오니안에게는 어설프기만 한 레이라의 협박은 앙큼한 토끼가 제 토실토실한 발을 들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제 입가를 가리고 이를 꽉 사리물어야 했다. 꽤나 진지한 얼굴로 협박 비슷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 레이라는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피오니안이 당황한 척 물었다.
“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수천 년간 갈고닦은 피오니안의 연기는 완벽했다. 다이아몬드 같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던 레이라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말했다.
“당신.”
“큽, 아하하!”
참지 못하고 빵 터진 피오니안이 제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라는 껄껄 웃어 대는 그를 향해 멍한 낯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한참이나 웃어 대던 피오니안이 눈에 눈물을 매단 채 조금 진정했다. 그러나 레이라의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다시 터져 나오는 탓에 그는 거의 꺽꺽대고 있었다.
커다랗고 예쁜 손으로 제 입을 가린 그가 그녀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다간 호흡 곤란으로 죽은 한심한 드래곤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지.”
얼굴이 여름 볕에 익어 버린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오른 레이라가 도망치듯 제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등 뒤로 유쾌하게 웃는 피오니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