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마룻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11/26)

10. 마룻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녹스 공작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얹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제 딸아이와 에틸 그리고 대단한 전설을 마주하던 때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폭신한 침대도 인체 공학 어쩌고 하던 베개조차도 그의 시름을 잊게 해 주지는 못했다.

“아버지, 저 저주에 걸렸어요.”

시큰둥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내용은 아주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공작은 제 딸아이의 덤덤한 목소리 안에 담긴 짙은 그림자를 절절히 느꼈다. 레이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아비가 되어서 어찌 모를 수 있었겠는가.

“반려를 셋 이상 두어야 죽지 않을 수 있대요. 푸는 방법이 너무 난해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제 결혼 문제는 아버지께서 꼭 아셔야 하니까 미리 말씀드려요.”

아마 공작은 레이라와 에틸 둘이서 찾아와 이런 소리를 했더라면 껄껄 웃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옆에 앉아 곱게 차를 마시는 남자의 이름이.

“타이니아스 님.”

그래. 그 옆에 앉은 이가 전설로만 존재한다던 그……, 드래곤이었다.

“하아.”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이미 저세상 어딘가로 떠나 버릴 것처럼 위험했다.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

세간에 그렇게만 알려져 있으나 공작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유희 따위를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구세주, 구원자, 신.

대단히 곤란한 사건과 사고에 나타나 그것을 확실히 해결해 주는 그를 황실에서 칭하는 말이었다. 그가 나타난 지 오래라 그저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으로 아는 이가 많지만, 그는 인간을 수호해 주던 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제 딸아이의 옆에 나타나 저주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하아.”

버릇처럼 한숨을 내쉰 그의 귓가에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오게.”

훤칠한 키에 남자가 보아도 멋진 얼굴, 대단한 칼 솜씨와 마나, 똑똑하기까지 한 제 사윗감의 등장이었다.

공작은 무거워진 몸을 낑낑대며 일으켰다. 레이라처럼 그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온몸에 진이 다 빠져 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상태였다.

에틸이 빠르게 다가와 공작을 도와 그를 일으켜 주었다. 베개를 쌓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게 해 주는 배려마저 고마웠다.

공작은 레이라가 뭐하나 빠지지 않는 이 멋진 남자를 두고 왜 레사 따위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아직도 이해되질 않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조금 쉬면 되겠지. 내심 티를 못 냈는데, 사안이 사안이니 어쩌겠는가.”

“걱정되시겠지만, 저와 아가씨를 믿어 주십시오.”

“에틸.”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달래고 진정시키는 에틸을 향해 공작이 미안한 눈을 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을 에틸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부른 것이었다. 자신이 위로받자고 찾아오라 한 것이 아니었다. 공작은 그의 위로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 각하.”

“미안하네.”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에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녹스 공작은 그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라 신기해하면서도 제 할 말을 더듬더듬 떠올렸다.

“내 자네가 레이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그것과 지금 상황은 다른 문제지 않은가. 황비일지라도 황제의 곁에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반기지 못하는데, 자네는.”

“저는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습니다. 각하.”

“에틸.”

“제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아가씨를 바라만 보았는지 아실 겁니다. 제가 왜 나서지 않았는지도 아실 테죠. 각하, 제가 이별을 겪은 아가씨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공작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에틸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묘하게 서늘한 얼굴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무어라?”

“되돌려서 그자를 만나게 하지 말자는 생각이 아니라, 헤어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제겐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딴 놈 대신 나를 만나면 좋을 텐데. 차라리 내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남들이라면 이런 생각부터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공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에틸이 아닌데도 딱 그렇게만 생각했다. 에틸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는 말이 아니었다. 녹스 공작은 레사와 헤어진 레이라를 보며 차라리 에틸을 만났더라면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사람이었다.

“제겐 아가씨께 손을 내밀고 싶어지면 손을 감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마음이 드러날까 숨기고 안아 주고 싶으면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아마 그자와 아가씨께서 결혼하셨다면 저는 평생을 호위 기사로 살다 죽었을지 모릅니다.”

공작은 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백작위를 받고도 공녀의 호위 기사를 하겠다 고집부리던 에틸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대체 이자는 왜 그리도 제 감정을 숨기려고만 했을까.

“저는 제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아가씨께 도움이 된다면, 그러면서도 그녀가 저를 원해 준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너는 절대 자격이 없지 않다.”

공작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에틸이 무언가 부족했더라면 녹스 공작이 그를 신랑감으로 점찍을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이빨을 숨긴 늑대였고 발톱을 숨긴 와이번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날개를 활짝 펴고 언제든 공작저를 뛰쳐나가 훨훨 날 수 있을 텐데도 그저 레이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차고 넘칠 정도로 자격을 갖췄지. 나는 네가, 왜 그렇게만 생각하며 너를 깎아 먹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하하, 아마 아가씨께서도 이 말을 들으셨다면 멍청이라며 제 정강이를 걷어차시겠죠. 그런데 어떤 인간이, 신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각하. 제게는 그녀가 신이자,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니 죽는 날까지 제가 더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허…….”

공작은 아주 산뜻하게 웃으며 놀라운 말을 하는 에틸을 향해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한낱 인간에게 타이니아스가 구원자이듯, 에틸 페르세나에게는 레이라 녹스가 구원자였다.

공작은 그저 괜찮다며 고개를 주억이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는 그를 보며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왜 제 딸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싶던 억울함도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웃는 에틸을 본다면, 저주를 받은 레이라가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맙네.”

“아닙니다.”

정말로 에틸은 티끌 한 점 없이 웃고 있었다. 공작은 그 미소에 에틸만큼 레이라를 사랑해 줄 남자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라 여겼으나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저만큼 사랑해 주고 아껴 줄 이들이 레이라의 곁에 남는다면, 그깟 저주쯤이야 호재라 여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 ✲

이틀 뒤, 옅은 색 장미들이 구름처럼 피어 있는 정원 한가운데에 커다란 티 테이블이 놓였다.

낮에만 가동되는 커다란 분수에는 앙증맞은 아기 천사상이 조르르 줄을 서 불고 있는 나팔에서 물줄기를 시원하게 터트렸다. 좌우로 일곱 개씩 줄지어 놓여 있는 천사 상들은 비슷한 복장이지만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장인의 작품이었다.

그것만큼 훌륭한 티 테이블은 백색철로 만든 뼈대에 아름답게 조각한 크리스털을 얹은 작품이었으나 고운 레이스 자락 아래로 몸을 숨겨 놓았다. 촘촘한 장미가 아름다운 레이스 위에는 갖가지 디저트들이 장식처럼 자리했다.

분수대 바닥, 얕게 찰랑거리고 있는 물에 비친 윤슬을 바라보던 에틸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꾸덕꾸덕한 초콜릿을 매끄럽고 둥그렇게 뭉쳐 만든 케이크를 두 판째 먹어 치운 피오니안이 다른 디저트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는 뭉근하게 졸인 딸기가 가득 올려진 타르트를 집었다. 보기만 해도 입이 달아 죽겠다는 양, 미간을 작게 구긴 에틸이 신기한 동물 보듯 피오니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그 옆에 앉아 레몬 타르트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두 분,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응!”

“그렇다.”

미지근해진 찻잔을 내려놓은 에틸이 서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햄스터처럼 볼에 타르트를 가득 집어넣고 전투적으로 씹고 있는 레이라와 조각낸 타르트를 고상하게 포크로 가르고 있는 피오니안.

두 남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정원을 돌아다니며 에틸의 속을 긁어놓았다. 그러더니 대뜸 삿대질을 해 가며 싸우고 지금 씩씩대며 디저트를 깨부수고 있었다. 난감하게 눈을 굴린 에틸이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대체 왜 싸우셨습니까?”

“…….”

“…….”

포크질을 뚝 멈춘 두 남녀가 에틸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팩 돌리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는지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 꼴에 어이가 없어 허허 웃은 에틸이 제 얼굴에서 표정을 싹 걷어 냈다.

“디저트를, 그만 물리라 할까요?”

“피오니안이 나더러 두 번째 반려로 레사 메르세데스는 어떻냐고 그랬어!”

“내가 언제 그리 말했나, ‘그자가 혹시 두 번째 반려인가?’라고 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고! 내가 두 번째는 아직 없다고 했잖아! 거기다가 나처럼 토끼 같은 애한테는 토끼…….”

에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진 것을 확인한 레이라가 입을 딱 다물었다. 이미 테이블 위에 포크를 가지런히 정리한 피오니안은 처연한 표정 연기를 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에틸이 기다란 한숨을 뱉었다.

“두 분 사랑싸움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무슨.”

에틸은 서로를 마주 째려보는 두 남녀의 행태에 혀까지 차 보였다. 그는 마침 서류를 한 아름 껴안고 공작저에 찾아온 데이지에게 레이라를 냉큼 떠넘겨 보내 버렸다.

입을 내밀며 일을 하러 떠난 레이라의 빈자리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오니안의 시선이 에틸을 향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고 있던 에틸이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가 났나?”

“왜 제 눈치를 보십니까?”

‘그야, 네가 이 공작저 내에서 가장 불편하니까 그렇지.’

차마 말은 꺼내지 못한 피오니안이 입맛을 쩝 다셨다. 피오니안에게 있어 ‘불편하다’라고 느낀 인간은 에틸이 두 번째였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분위기와 마나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불편하다고 표현했지만 이상하게 소름 끼친다 혹은, 본능적으로 그를 존중하게 된다는 것에 가까웠다.

피오니안은 저만 보면 앙앙거리는 레이라와 철없이 뚱땅거리며 몇 번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에틸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무어라 하지는 않았으나 눈빛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취급을 처음 받아보았기에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를 그리 취급한 것에 대한 화는 나지도 않았다.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얼음 같았고 인상을 쓰면 악귀보다 무서웠다.

아마 눈빛만으로 공격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면 그 최강자는 에틸일 것이리라. 푸르름이 가득한 눈이 검게 물들면 그 어둠에 공허가 가득 들어찬 것 같으면서도 분노가 끓어오른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동자 안에 가득 들어찬 검은 마나가 꿀렁꿀렁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피오니안은 그것이 소름끼쳤다. 한낱 인간이 어찌 그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마치 코앞에 귀신을 마주한 느낌이었지…….’

다시 그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피오니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하의 드래곤조차도 소름 끼치게 하는 눈빛을 가진 에틸은 그저 여상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피오니안 님.”

“응?”

몰래 에틸을 흉보고 있던 피오니안이 저를 부르는 당사자의 부름에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아, 내 권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레이라를 사랑하십니까?”

“…….”

“아니, 아직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계십니까?”

꼬고 있던 긴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며 바짓단을 탁탁 털던 에틸이 담백하게 물었다.

피오니안은 다시 디저트로 향하던 포크를 뚝 떨어트렸다. 산뜻하기까지 한 에틸의 질문은 3일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받게 된 피오니안은 작게 인상을 구겼다.

“왜 자꾸 그것을 묻는 것이지?”

“자꾸 아니라고만 하시니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니까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겠나.”

“피오니안 님, 실례지만 마지막 사랑이 언제쯤이셨습니까?”

“없다.”

피오니안은 다시 짜증이 치솟아 담백한 치즈 케이크를 내려놓고 생크림 위에 체리가 가득 올라간 초콜릿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먹음직스러운 케이크 위로 포크를 푹 찍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신 겁니까?”

“그렇다.”

“그러니 그렇게……. 으음.”

작게 중얼거린 에틸이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에틸이 보기엔 저 대단한 드래곤이자 정령이신 전설께서는 레이라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한다던 피오니안은 디저트가 눈앞에 있을 때면 바라만 보아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곤 했다. 에틸이나 녹스 공작이 디저트를 먹을라치면 아닌 것 같으면서도 눈을 부라릴 정도였다.

그런데 레이라에겐 언제 그랬냐는 듯 너그럽게 디저트를 양보했다. 심지어 그녀가 디저트를 양껏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기까지 했다.

또 있었다. 레이라와 둘이서 산책을 할 때면 깨질까, 부서질까 몹시 염려된다는 표정을 지었고 심지어 마나 실드를 두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에틸과 레이라가 손을 잡거나 짧은 키스를 나누는 것을 볼 때마다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분명, 그것은 사랑이었다.

볼을 긁적인 에틸이 측은한 표정으로 피오니안을 흘끔거렸다. 요 며칠 레이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에틸은 그녀에게 찾아온 저주를 확실히 받아들였다.

그는 어차피 일어난 일, 빠르게 받아들이고 대처를 하는 편이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저주로 인해 레이라가 죽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틸은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살기보다, 그녀를 누군가와 함께 사랑해 주리라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몇 명이 될지,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남은 시간은 일주일뿐이었다. 그러나 이 다급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굴고 있는 레이라 덕분에, 에틸만 애간장이 녹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유력한 후보인 두 사람마저 제 마음처럼 굴지 않았다. 피오니안은 분명 레이라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만 했고 나트하는 제 친우인 레사 때문인지 영 망설이고만 있었다.

옆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폭 내쉰 에틸은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피오니안 님.”

“또 뭔가.”

“그, 레이라가 읽던 소설에 입덕 부정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아니하고 부정만 하는 시기를 칭하는 말입니다.”

“…….”

포크질을 딱 멈춘 피오니안이 에틸을 휙 쏘아보았다.

‘이 요망한 놈 같으니라고.’

“자꾸 그렇게 아니라고만 하시면, 차례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혹시 모르지요. 정말 레사 메르세데스가 끼어들지도…….”

“…….”

“그리 생각해 보실 때, 마음이 공허하거나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지끈거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맞습니다.”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에틸이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멍을 때리고 있는 피오니안을 탐색하듯 샅샅이 훑었다.

피오니안은 지금 제 가슴의 두근거림이 에틸이 말한 공허함이나, 지끈거리는 것이 맞는지 의아했다. 이토록 작은 고통이 무슨 사랑의 근거가 된다는 것인가.

이런 기분은 작은 동물을 키울까 말까 고민하다 남에게 빼앗겼을 때도 느꼈었고……. 그러고 보니 레이라를 가만히 보고 있을 때면 그 작고 앙증맞은 동물이 귀여운 짓을 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에이 역시, 저는 그저 레이라를 귀여운 동물 보듯 하고 있는 것이 맞다. 고개를 주억인 피오니안이 에틸을 향해 혀를 쯧쯧 찼다.

“아니다. 나는 레이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귀여워하는 것이다.”

“……그러십니까.”

한심하다는 눈빛을 티 내지 않으려 눈을 감아 버린 에틸이 코끝에 스치는 장미 향기를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갈 길이 너무 멀었다.

✲ ✲ ✲

반쯤 넋을 놓고 서류에 사인을 휘갈기고 있던 레이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화들짝 놀란 데이지가 들고 있던 도장을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운 데이지에게 대뜸 질문이 날아들었다.

“데이지. 나 며칠 전보다 더 못생겼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요?”

“에틸이, 음…….”

“왜요? 백작님이 아가씨께 덜 치근대기라도 하나요?”

“어, 정확해.”

고개를 미친 듯이 위아래로 주억인 레이라가 그것이 못내 불만이었던 듯 신세 한탄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에는 얼굴만 마주쳐도 쪽쪽거리더니 이제는 슬쩍 손만 잡는다. 아무리 피오니안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지만, 밤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데이지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억울해 보였다. 한참을 고개를 주억이며 레이라를 짹짹대는 병아리 보듯 하던 데이지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가씨, 페르세나 백작을 진심으로 대하기로 하셨군요?”

“응. 나도 에틸이 좋으니까.”

“좋네요. 음, 그럼 밤에 직접 찾아가 보시는 건 어때요? 기다리는 것도 좋겠지만, 아가씨께서 먼저 다가가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그, 그럴까? 그래도…….”

“어차피 페르세나 백작님 방은 아가씨 방과 가깝잖아요? 밤에 몰래 찾아가 보세요. 음, 속옷도 추천해 드려요?”

“아니, 그건 됐어…….”

작은 주먹을 꼭 말아 쥔 레이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근을 코앞에 둔 토끼처럼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다시 서류에 코를 파묻었다. 전투적으로 뒤바뀐 사인이 서류 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빙긋 웃은 데이지는 레이라를 위한 아니, 새 부군들을 위한 속옷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나트하는 오후 느지막이 녹스가의 저택에 방문했다. 이것은 공식적인 첫 초대로 녹스 공작이 주최한 저녁 만찬에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공작이 왜 저를 초대했는지 의문이었으나 저주에 관련된 것이겠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레이라와 뜨겁게 연애하던 레사조차 받아보지 못한 초대장을 받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트하는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한 참이었다. 그런데.

“어허허! 어서 오게! 아주 훤칠하구만!”

나트하는 환히 웃으며 제 손을 꼭 붙잡은 녹스 공작에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붙잡아 올리며 공작에게 마주 웃었다.

“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무얼! 반갑네, 나트하! 아, 내가 이리 편하게 불러도 되겠지? 듣자 하니 내 딸아이와 사이좋게 지낸다 하던데!”

“그, 그럼요. 당연합니다. 부디 편하게 불러 주세요.”

“어허허! 아주 착한 심성을 가졌다더니, 말 그대로야! 얼른 들어오게! 집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

“예, 예.”

공작은 나트하의 손을 아주 다정히 붙잡고 이끌었다. 그는 공작이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더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가 의외의 환대에, 그것도 엄청난 환대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는 나트하보다 더 당황한 표정이었다.

공작의 이런 행동은 며칠 전 레이라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것을 들은 이후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충격적인 소식에 아주 잠깐 앓아누웠으나 에틸만 괜찮다면 다 잘되었다며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시작한 것이 레이라의 신랑감 찾기였다. 단 하루 만에 수도 안에 존재하는 온갖 남자들의 신상 명세서가 공작의 집무실 테이블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녹스 공작만의 비밀이었다.

그 후보 중 하나인 나트하가 공작저를 방문한다기에 공작은 냅다 초대장을 던져 버렸다. 레사의 친우라는 사실은 저 멀리 치워 버린 공작은 그저 나트하를 두 팔 벌려 환영할 뿐이었다.

나트하는 어색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웃으며 녹스 공작이 붙잡은 제 손을 흘끔거렸다.

“아, 이것 보게, 레이라가 여덟 살 때 그린 그림이지. 어떤가?”

“아주 아름답군요.”

“그렇지? 역시 보는 눈이 있구만.”

아직도 손을 붙잡고 나트하를 끌어당긴 공작은 집사를 물리치고 그를 직접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나트하는 레이라가 그린 그림, 조각 심지어는 저택의 역사까지 꼼꼼하게 주워들으며 축축해진 손을 걱정했다.

한껏 어색하게 웃는 나트하와 몹시 행복한 얼굴의 녹스 공작이 만찬장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라는 오지 않는 공작을 걱정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기다리던 에틸은 공작의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여 몰래 웃어야 했다.

“자, 어서 앉게. 레이라, 손님께 인사 드리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레이라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앗겨 버린 것 같은 공작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나트하를 향해 미안한 눈을 했다.

“나트하, 어서 오세요. 아버지께서 꼭 직접 마중하고 싶어 하셔서,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혹 불편했다면 죄송해요.”

“하하, 아니에요. 각하께서 직접 반겨 주셔서 더 좋았어요. 이렇게 환대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각하.”

“어색하게 그 무슨 호칭인가! 이곳은 내 집이니 그저 아버님, 하고 불러도 되네.”

“아…….”

“…….”

“주책 부리지 마시고 앉으세요. 아버지.”

싸늘한 딸의 눈빛에 녹스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만찬장에 나타난 피오니안과 나트하가 인사를 나누자 식사가 시작됐다.

녹스가의 만찬은 코스 요리였다. 커다란 식탁 위에 먹지도 않을 음식이 가득할 것을 생각하던 나트하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애피타이저는 호두와 짭짤한 치즈를 넣어 구운 빵과 부드러운 밀 빵입니다. 이것을 향긋한 올리브유와 치즈 스프레드, 새우와 아보카도를 넣은 소스에 찍어 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기다란 모자를 쓴 요리사가 흐뭇한 얼굴로 빵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이어서 음식이 들어 있는 접시가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상큼한 크랜베리와 아몬드, 발사믹 소스를 뿌린 샐러드와 생 햄을 얇게 저며 올린 뒤 구운 치즈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담백한 맛의 샐러드입니다. 빵 위에 올려 드셔도 맛있습니다.”

나트하는 요리사가 왜 제 옆에 붙어서 과한 설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요리사는 신난 얼굴로 나트하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바질 페스토를 얹은 것과 말려서 올리브유에 재운 토마토, 베이컨을 버무린 브루스케타입니다. 부단장께서 좋아하신다고 들어 준비해 보았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부담스럽게 친절한 것은 녹스 공작뿐만이 아니었다. 나트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브루스케타를 깨물었다. 불편함과 다르게 음식은 매우 맛있었다.

이후로도 요리사의 공격은 계속됐다. 캐비어를 올린 버섯구이, 토마토소스 가지구이, 새우 버터구이, 연어 카르파초가 지나자 드디어 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트하는 이미 빵빵해지기 직전인 제 배를 내려다보며 배부른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던 레이라는 드디어 요리사를 말려 주었다.

“제이, 그만해요. 대체 언제까지 손님을 괴롭게 할 거예요?”

“괴롭히다니요! 억울합니다!”

“그러다 나트하는 애피타이저만 먹고 집에 가겠어요. 제이가 부담스럽게 구니까 나트하가 거절도 못 하고 먹고 있잖아요.”

“아…….”

“저는 괜찮아요.”

애써 손사래를 친 나트하를 보며 세상 더없이 착한 무언가를 보듯 하던 제이는 결국 축객령에 쓸쓸히 떠나갔다. 그가 나트하에게 요란하게 군 것은 다 녹스 공작의 술수 덕분이었다. 짜증나고 귀찮게 굴 때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가 보고 싶다나?

제이는 흐뭇하게 웃던 공작의 풀린 얼굴을 떠올리며 후련한 듯 발을 놀렸다.

나트하는 그가 마지막으로 제게 건네준 게살 수프를 뒤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눈을 반짝이며 음식이 나오는 족족 입에 집어넣는 피오니안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저는 한 입씩만 먹어도 배가 터지기 직전인데 피오니안은 배 속에 인벤토리라도 있는 것처럼 여상한 표정이었다.

그때 즐거운 얼굴로 오렌지 소스를 얹은 사슴 스테이크를 썰던 피오니안이 아직 샐러드를 깨작거리는 레이라를 타박했다.

“그리 깨작거리니, 다 자라지 못하고 이리도 작은 것이 아닌가.”

“아이, 참. 제가 이리 작아서 귀엽다는 말씀이시죠?”

이를 악문 레이라가 건너편에 있는 피오니안의 정강이를 가격하려 발을 흔들었다. 그는 닿지도 않을 텐데 혹여 조막만 한 발이 다칠까 봐 쩔쩔매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만해라. 내가 잘못했다.”

“흥. 저도 고기 먹을 거예요. 아까 누구 때문에 디저트를 너무 먹었더니, 아직도 배가 불러서 그래요.”

샐러드를 밀어내고 민트 셔벗을 작게 입에 문 레이라가 마음에 든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것도 먹어 보라는 듯 피오니안에게 고갯짓하는 그녀에 나트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그새 꽤나 친해지셨네요.”

“아, 피오니안이 생각보다 만만, 아니, 성격이 좋아요!”

눈썹을 작게 꿈틀댄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말뜻을 이해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나트하는 고개를 주억이며 ‘성격이 좋은 분이셨구나’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을 귀신같이 주워들은 에틸이 나트하를 향해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입을 벙긋거렸다.

“아…….”

눈앞의 전설께서도 연적이었구나. 남들 모르게 한숨을 쉰 나트하에게 녹스 공작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우리 나트하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 연인은 있고?”

“예? 아, 이상형……. 특별히 말씀 드릴 만한 이상형이 있는 것은 아니나 마음에 둔 여인은 있습니다. 연인은 아니지만요.”

그는 ‘우리’ 나트하라 표현한 녹스 공작 덕분에 칼질을 삐끗거렸다.

“그러한가. 쯧. 레이라와는 저주 때문에 알게 되었다지?”

“네.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보다 더 마법과 저주에 박식하신 분이 계시니 민망할 따름이네요.”

“하하하하. 마음 씀씀이가 아주 어여쁜 자라 하더니 정말이군. 자네는 어찌 자네 친구와는 영 딴판인 것이 더 마음에 드는군.”

싸늘해진 분위기에 공작의 웃음소리만 쩌렁쩌렁했다. 피오니안만 듣는 둥 마는 둥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다시금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낀 나트하는 어째 녹스가에 올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대하는 에틸의 태도가 퍽 달라졌다.

‘지난번, 저택을 떠나기 전부터였던 것도 같은데…….’

나트하는 에틸을 흘깃거리다 빙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나트하는 타이니아스와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에틸의 배려로 레이라와 둘이 산책을 하게 됐다. 공작저 뒤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동산을 지나 커다란 호수로 이어진 길을 걷던 두 사람은 먹먹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에틸의 생각을 하는 중이었고 나트하는 레이라에게 제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금세 어둠이 내려앉은 호숫가는 곳곳에 켜진 마법 등이 수면을 너울너울 비추고 있었다. 은은한 분위기와 정취에 마음을 놓은 두 사람은 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호숫가라서 그런지 몰라도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나트하는 겉옷을 벗어 레이라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폭신폭신한 풀잎을 밟는 느낌도 좋았고 딱딱하지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돌멩이를 밟는 느낌도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붉어진 얼굴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고 머릿속까지 차갑게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나트하는 긴장되는 숨을 얕게 내뱉었다.

레이라는 나트하가 저 때문에 한숨을 쉰다고 착각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미안해요. 나트하. 제가 너무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죠?”

“네? 아니에요. 저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걸요.”

“……하하.”

“이곳은 참 좋네요. 수도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죠?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던 곳이었어요. 저쪽에 보면 작고 귀여운 정자도 있어요. 낮이면 그쪽에서 티타임을 가져도 좋은데…….”

“아, 그거 좋겠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초대해 주세요.”

“그럼요.”

배시시 웃은 레이라는 나트하가 덮어 준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옷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레사에게는 제가 잘 이야기했어요. 궁금해하셨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에요. 궁금했어요. 그는 괜찮은가요?”

“레이라에게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요.”

“…….”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기 탓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멀리 보이는 검은 숲을 응시하던 레이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사 메르세데스,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왕 이렇게 되어 버린 거, 그를 받아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레사의 저주를 풀어 줄 길이 요원해져 버렸으니 그와 레이라가 함께한다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저주뿐일 테니까. 그러나 레이라는 아직 레사와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응어리진 마음이 있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던 순간. 그것은 아직도 떠올리기만 해도 레이라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기억으로 존재했다.

“나트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레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도 그를 받아들여야 맞는 걸까요?”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를 아직 사랑하신다면…….”

“으음. 전처럼 레사가 없으면 죽어 버릴 것처럼 힘들지는 않지만, 제게는 첫사랑이었으니까…….”

나트하는 흐릿해진 표정을 짓는 레이라에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짜르르 울리는 심장이 아팠다.

‘나는, 어째서 당신에게 반해 버렸을까요?’

“나트하는 첫사랑이 언제였어요?”

“…….”

“지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그 사람이 첫사랑인가요?”

“네. 맞아요.”

그렇구나. 작게 중얼거린 레이라의 음성이 나트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백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을까? 그녀가 레사를 용서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가 빠져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트하는 레사의 얼굴을 떠올리다 레이라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요히 빛나는 달빛이 살그머니 비춘 얼굴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어여뻤다. 나트하는 제 심장이 그때처럼 아릿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아름다웠고, 보고 있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트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레이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트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레사를 용서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

“지금은 그가 불행하거나 아파했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제가 그 사람을 통해서 행복해진다는 상상도 잘 안 되거든요. 예전에는 제 미래를 그리는 일에 항상 레사가 빠지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런가요.”

“실망했어요? 나트하는 제가 레사에게 다시 돌아갔으면 해서 찾아왔…….”

“아니에요.”

응? 눈이 동그래진 레이라가 시선을 돌려 나트하를 마주했다.

“처음엔 그랬어요. 레이라를 만나서 레사의 마음을 알려 주고, 혹시 두 사람의 오해나 불신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다면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어요. 그런데, 제가 레이라를 만났을 때…….”

“…….”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모습은 레사가 없어서 무척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얼굴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당신이 환하게 웃으며 달빛 아래를 노닐고 꽃밭을 서성이는 모습이 너무, 너무나도 아름다웠어요. 덕분에 첫눈에 반해 버렸죠. 저는 레사를 위해서 당신을 찾아왔던 것이 아니에요. 그저 레이라를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자꾸만 찾아왔던 거예요.”

“…….”

입을 딱 벌린 레이라는 귀 끝이 붉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냉큼 귀를 손으로 감쌌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이미 볼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트하는 레이라의 얼굴보다 더 붉은 얼굴을 하고 이미 시선을 멀리 돌리고 있었다.

장미 꽃잎처럼 붉어진 나트하의 귓바퀴를 보게 된 레이라는 아직도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하던 레이라는 나트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나트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레이라에게 레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그를 대신해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후로 만날 때도 레사를 먼저 언급한 것은 저나 에틸이었다. 레사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딱히 두 사람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친구를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는 언급도 전혀 없었다.

“제가, 레이라를…….”

나트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손끝을 떠는 것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쥔 그는 어느새 눈물이 차오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그의 모습은…….

“귀여워.”

“네?”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강아지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뒤 다급히 제 입을 가렸다.

나트하는 이미 넋이 나가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엄청나게 미안해졌다.

“제가 지금 입 밖으로 말을 뱉었나요?”

“…….”

“미안해요.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게…….”

나트하는 간식을 뺏겨 삐친 강아지처럼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그가 터질 듯이 붉어진 제 귀를 숨기려 노력하더니 레이라에게서 등까지 돌렸다.

레이라는 토라진 강아지를 처음 보는 주인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쩔 줄 모르고 쥐었다 폈다 부산을 떨던 그녀의 손이 에라 모르겠다, 나트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는 그녀가 붙잡은 제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트하, 그러니까…….”

“제가 레이라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

“좋아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사랑하는 것 같아요.”

또르르, 그림처럼 떨어진 눈물방울이 레이라의 손등 위로 톡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방울의 촉감에 몸을 떨던 그녀의 볼이 더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새 나트하는 레이라의 눈을 단단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부끄러워 하던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결연했다.

반듯하고 또렷한 금빛 눈동자가 레이라의 얼굴을 황홀하게 응시하며 제 마음을 전해 왔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거운 시선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레이라의 것인지 나트하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두 사람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나트하.”

“제 마음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어요. 아니, 그러시겠죠. 하지만…….”

금빛 속눈썹이 다시 촉촉하게 젖었다.

붉어진 눈가와 코끝, 파르르 떨리는 금빛 눈동자, 얕게 깨문 입술. 처연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레이라가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더 꽉 쥐었다.

팔랑팔랑 움직인 속눈썹이 다시 눈물방울을 톡 떨어트렸다. 레이라는 우는 얼굴마저 아름다운 남자에게 받은 고백을 마음 깊이 곱씹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그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안고 밤을 보냈을까. 친구의 연인이었던 여자, 저주에 걸린 여자. 그의 예쁜 얼굴만큼이나 예쁜 마음은 분명, 저를 돕고 싶어 하며 제 속을 밝힌 것일 터였다.

“저를 돕고 싶었던 거죠?”

“그건 맞지만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알 것 같아요. 나트하의 눈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달빛처럼 흐리게 웃음 지은 레이라의 얼굴은 묘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나트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치 사형 선고를 눈앞에 둔 사형수가 된 심정이었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저도 나트하가 좋아요. 나트하의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가요?”

“이미 알고 있는 걸요. 저는 레이라가 저주에 걸렸다는 것, 그 두 번째 저주에 한순간이지만 감사하기까지 했어요. 제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이기적이라 미안해요. 그렇지만, 제 마음이……, 그렇게라도 당신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솔직한 고백은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렇다고 저주를 감사해하다니 너무하신 것 아닌가요. 하며 나트하를 작게 타박했다. 가시로 찌르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던 그가 작게 사과를 건네자 레이라는 크게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귀여운 남자였다.

“에틸이…….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산책해 보라고 권유한 거군요.”

“…….”

“두 사람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레이라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에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 거예요.”

“네? 찻집에서요?”

“네.”

자신만 몰랐다는 게 약간 억울해진 레이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호숫가로 시선을 옮겼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을 귀엽게 바라보고 있던 나트하가 빙긋 웃었다. 어느새 멈춘 눈물에 눈가를 슥슥 문지른 그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레이라.”

“네?”

귀여운 목소리에 다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은 레이라가 눈을 반짝였다.

“고마워요.”

“귀여워라.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죠. 그보다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저는…….”

“괜찮아요. 사실 에틸이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면 안 되겠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더라고요.”

“아하하, 맞아요.”

달빛 아래 앉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은 어색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확실하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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