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랑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도 있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먹게 된 레이라와 에틸은 피오니안에게 잔소리 폭격을 당해야 했다. 어째서인지 머리칼이 피처럼 검붉어진 피오니안은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하며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나트하를 손님으로 초대해 놓고 여태 퍼질러 자고 일어나는 것이 맞는 행동이냐. 잠만 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때와 장소를 가린 것이 맞느냐. 나트하에게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영혼 빠진 시체처럼 흐느적대다 돌아갔다. 걱정도 되지 않느냐 연락이라도 해 봐라.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 맞느냐 등등.
레이라는 밥을 먹고 있는데도 쭉쭉 빠져나가는 기운을 느끼며 한숨을 꿀꺽 삼켰다. 지금 한숨을 쉬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머리카락 색이 바뀌는 건지 피오니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왜인지 식사를 하기 전보다 더 핼쑥해진 볼을 쓸어 보던 레이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피오니안의 이상 행동에서 벗어나 보려 노력하는 몸짓이었다. 허나 레이라는 입술을 새 부리처럼 내밀고 사탕을 아득아득 씹고 있는 그의 모습을 봐 버렸다. 막 도망가려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이고 앉았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에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레이라는 고개를 주억였다. 에틸은 생각보다 마음이 여렸다.
두 사람은 비슷한 표정으로 피오니안을 샅샅이 훑었다. 디저트, 아니. 당분이 부족해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해서 시종을 닦달해 달콤한 것을 쫙 펼쳐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팥이 듬뿍 들어간 생크림 빵을 냉큼 입에 물면서도 레이라를 향한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여전히 검붉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 나트하에게는 못 할 짓을 하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왜 피오니안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레이라는 도통 그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예쁘면 다인가? 왜 갑자기 안 하던 성질을 부리는 거지?’
그녀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가느다란 한숨을 뱉었다. 몰래 쉰다고 쉰 건데, 또 귀신같이 그것을 들은 피오니안이 다시 눈을 세모꼴로 뜨고 레이라를 흘겨보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지 않아?”
최대한 조심스레 물어본 레이라의 질문에 피오니안의 인상이 와그작 구겨졌다.
“나트하에게 연락이나 해라.”
처음 듣는 낮은 목소리에 놀란 레이라는 얌전히 고개를 주억였다. 뾰족했던 기세가 둥글게 누그러지면서도 피오니안은 제 마음을 숨기질 못했다. 언짢음이 가득 한 표정은 디저트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에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피오니안이 디저트를 가져다 나르느라 바쁜 시종 중 한 명을 불러 마법 구를 가져오라 명했다.
“예!”
신경질이 잔뜩 묻어난 피오니안의 목소리에 기겁한 시종이 거의 기사처럼 우렁차게 대답했다. 시종은 빠른 발걸음으로 뛰어나갔다.
흡사 드래곤 레어를 뛰쳐나가는 악당 1의 모습 같아 보일 정도였다. 레이라는 측은한 시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련한 눈을 했다.
‘저렇게 뛰면 넘어진다고 늘 얘기했는데.’
눈앞에서 사라진 시종의 모습을 흩어 버리려 고개를 젓던 레이라는 에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언가 난처한 표정으로 피오니안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난처한 표정이라기보다는 답답해 죽겠고 한심해 죽겠는데 그것이 퍽 불쌍해서 측은하다는 느낌인 것 같기도 했다.
레이라가 그렇게 느꼈으니 피오니안도 눈치를 챘을 법도 했다. 헌데 그는 그저 제 심장 쪽에 손을 올려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뭐야 대체……. 디저트가 너무 좋아서 심장이 아픈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라는 초콜릿이 코팅된 오렌지 필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상큼한 오렌지의 향과 맛이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초콜릿과 잘 어울렸다. 그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레이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따가운 눈빛이 콱 날아 들어왔다.
시무룩해 있어도 화를 내고, 좋아하는 기색을 보여도 화를 낸다. 레이라의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는 것이 티가 났는지 피오니안이 삐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황당함에 입이 딱 벌어진 레이라는 손에 닿은 따뜻하고 익숙한 촉감을 느꼈다. 에틸의 손은 그녀를 달래 주듯 간지러운 살갗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짜증이 쏙 들어간 레이라는 바보처럼 배시시 웃고 말았다.
피오니안은 그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혀까지 쯧쯧 차기 시작했다. 그는 레이라와 에틸을 번갈아 바라보며 초콜릿 타르트 조각을 단숨에 씹어 먹었다.
그 행동은 레이라 혹은 에틸을 당장 저 초콜릿 타르트처럼 씹어 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뾰족한 눈초리에는 무시무시한 기운까지 풍겨 왔다. 레이라는 커플을 눈앞에 두고 보려니 심통이 났나 싶어 슬며시 잡힌 손을 빼냈다.
‘아니! 저가 옆에서 보게 해 달라고 했으면서 왜 짜증을 내는 거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고 있는 레이라의 눈앞으로 부리나케 걸어온 시종이 마법 구를 내려놓았다. 아주 알 품는 어미 새처럼 고이 껴안고 왔는지 따끈따끈해진 마법 구가 곧 부화라도 할 기세였다.
레이라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나트하가 알려 준 대로 마법구를 작동시켰다. 그녀는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나트하를 떠올리면서 왼쪽, 오른쪽 버튼을 동시에 세 번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몇 번 지나가고 곧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트하 러스티입니다.
“나트하! 출근은 잘했어요?”
반가움에 커다래진 레이라의 목소리가 냉큼 튀어나왔다. 작게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어요. 잘 잤나요, 레이라? 좋은 꿈 꾸셨겠지요?
예쁘게 웃고 있을 얼굴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다정한 말씨였다. 레이라는 아마도 살랑살랑,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칼을 귀 뒤로 곱게 넘긴 채 청아하게 웃고 있을 나트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절로 활짝 웃음 지은 레이라는 괜히 나트하에게 투정을 부렸다. 두서없이 줄줄 쏟아진 질문에도 웃음이 묻어난 나트하의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어제는 그……, 당황스러워서 그랬어요. 보기 싫고 불편할 리가 있나요. 저도 제가 도망을 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아침에 인사도 없이 나간 것은 아니고 레이라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요. 퇴근하면 공작저로 레이라를 보러 갈게요.
묻는 말에 하나도 빼먹지 않고 대답을 해 준 나트하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타이니아스 님은, 잘 계시나요?
어째서 이 타이밍에 그것을 묻는지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레이라는 왠지 그가 삐진 것 같다. 자꾸 나를 구박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작게 속삭였다. 에틸이 그것을 들었는지 몰래 웃었다.
레이라는 에틸의 웃음소리에 피오니안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며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눈치를 보며 흘끔거리니 그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왜 화가 나셨을까요. 저는 괜찮으니 기분 푸시라 전해 주세요. 그리고 레이라.
“네?”
사방을 분주하게 살피던 레이라의 고개가 마법 구를 향해 휙 돌아왔다. 빤히 그것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놀란 것처럼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나트하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보고 싶어요.
정적이 흐르는 테이블 위로 질척한 초콜릿 타르트가 퍽, 뒤집혀 떨어졌다. 레이라는 아마도 또 빨갛게 익어 버렸을 볼을 감싼 채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에틸의 눈치를 살폈다.
에틸은 조금 놀란 눈이었지만 레이라를 향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웃으려던 그녀는 저를 향한 강렬한 시선을 느끼며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렸다.
레이라는 본능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그녀는 곧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피오니안의 얼굴을 마주했다. 에틸과 피오니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레이라는 두 사람의 표정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피오니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 불안했고, 무엇이 싫은지 모르겠지만 전부 싫었고, 같은 이유로 짜증이 났고, 화도 났다. 부정적인 생각만 갖고 사는 요정들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모여 싸우는 기분이었다. 날개를 활짝 펴고 거칠게 활강하고 있을 때나 느끼던 선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끼던 동물을 빼앗겼을 때보다도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울컥 터져 나온 마음이 분노인지 허망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에틸과 레이라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나트하와 레이라가 서로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그것이 왜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오니안은 저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라의 표정도 싫었다. 아니, 싫지 않았다.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사랑스러웠다.
“하.”
어이가 없어 튀어나온 피오니안의 짧은 한숨 소리에 에틸의 긴 한숨이 더해졌다. 답답함에 제 머리만 쓸어 넘기던 에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피오니안 님, 저와 잠깐 대화를 좀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잠시 다녀올 테니 나트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라며 속삭인 에틸이 피오니안을 끌고 나가 버렸다. 레이라는 디저트와 함께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뒤늦게 답을 기다리고 있을 나트하의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버버 입을 열었다.
“어, 저……. 나트하? 미안해요. 오늘 따라 피오니안의 상태가 이상하네요.”
-그런가요?
“네. 아 참, 저도 보고 싶어요!”
-하하, 그렇다니 영광이네요. 피오니안 님은 에틸이 모시고 나갔나 보군요?
“음? 네. 꼭 보고 있는 것처럼 잘 알고 있네요.”
-아, 그게, 어. 에틸이 레이라에게 속삭이는 것이 들렸어요.
굉장히 당황한 듯한 음성이었으나 레이라는 지금 피오니안과 에틸이 신경 쓰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트하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 ✲ ✲
시들어 버린 꽃송이, 노랗게 익어 버린 잎사귀, 모나게 자란 나뭇가지.
녹스 공작저의 정원사 필립은 풀잎을 정리하다 죽상을 하고 정원에 나타난 피오니안을 보게 됐다.
‘항상 웃고 다니던, 약간 바보 같기까지 한 손님께서 왜 표정이…….’
필립은 당황스러움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가가 볼까 고민했다. 머뭇거리던 그는 피오니안의 등 뒤로 나타난 에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정원 가위와 사다리를 냅다 던져 놓고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동글동글 귀여운 모양이 된 나무들은 방금 이발을 마쳤는지 싱그러운 내음을 풍겼다. 오늘 따라 꽃향기보다 향긋한 풀 내음이 짙게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 때문이었다.
코를 찡긋거린 피오니안이 정원 벤치에 세상 고아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그 옆에 자리한 에틸은 멀리 보이는 풀과 나뭇가지 무더기를 바라보며 당장 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 저리 도망치듯 가 버리는 거지?’
멀리 사라지는 필립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쫓던 에틸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머뭇거렸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정원에 놓인 쓰레기 치우기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으음.”
에틸은 아마도 레이라가 가져다 놓았을 노란 체크무늬 담요를 살금살금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한참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그가 그것을 제 무릎 위로 얌전히 얹어놓았다. 피오니안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에틸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짜증 나고 화도 나고 아무튼 기분이 좋지는 않으신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고 계십니까?”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 같은 질문이었다. 피오니안은 멍한 표정으로 홀린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지금 누군가가 나타나 가장 믿는 이가 누구냐 묻는다면 에틸이라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식자를 가지고 노는 사냥감을 보듯 눈을 동그랗게 뜬 피오니안이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렸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늦으면 뺏길 테니 서두르셔야 한다고요.”
파삭. 믿음이 와장창 깨지는 환청이 들린 것 같았다. 피오니안이 제 귀를 더듬어 보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황당한 표정을 했다.
“그 감정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면 좋겠는데 아니라는 것이 답답하고. 빼앗긴 것에 화가 나고.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것에 짜증이 나고. 온갖 어두운 감정을 삼킨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지죠.”
언제 깨졌었냐는 듯 튼튼하게 달라붙은 믿음이라는 것이 다시 단단해졌다. 피오니안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것이 질투로군.”
“그러면서도 그녀가 어여뻐 보이기만 하니 기가 차실 테고, 분명 미운데도 미워지지 않는 것이 의아하기만 하실 것 같은데. 아닙니까?”
처음 보는 생물을 대하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피오니안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에틸의 말을 경청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굳어진 피오니안의 온몸에서 야릇한 꽃향기가 새어 나왔다.
“……뭐라고?”
저녁노을처럼 붉어진 피오니안의 얼굴은 화사하게 피어난 꽃 같았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제 얼굴을 감싼 피오니안의 손이 달달 떨려 왔다.
에틸은 한숨을 폭 내쉬며 긍정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사형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아연한 피오니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웃는 얼굴이 있었다.
장난을 치는 귀여운 얼굴. 단것을 먹고 행복해하는 아이 같은 얼굴. 곱게 피어난 꽃을 보며 설레던 얼굴. 저를 반갑게 맞아 주며 환하게 웃던 얼굴. 코끝을 찡그리며 난처한 듯 웃는 얼굴. 그래, 그 작은 손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을 내리깔 때 드러나는 관능적인 표정에 가슴이 뛰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시비를 걸 때도 그저 귀여워 안아 주고 싶었다. 졸릴 때면 하품을 하기보단 눈을 비비적거린다. 토라질 때면 왼쪽 볼을 부풀린다. 배가 고프면 없던 투정이 생긴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귀여운 뺨에 자리한 보조개가 예쁘게 파이는 작은 습관들까지도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나는 왜 그녀의 작은 습관들을 눈여겨봤을까? 왜 그것이 이토록 사랑스러울까.
피오니안은 긍정했다. 동시에 부정했다. 사랑이라 하더라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난생처음 사랑을 자각한 남자는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뱀파이어의 낯짝처럼 파리한 안색과 탁 풀려 있는 동공은 그의 심리 상태가 몹시 불안하다는 것을 방증했다.
위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피오니안을 응시하던 에틸이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맑은 불꽃이 화르르, 타오르며 피오니안의 전신을 휘감았다. 밝은 금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투명하고 뜨거웠다.
제 분을 못 이길 정도로 타오른 불꽃이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짙은 화기와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는 그것은 펄펄 끓고 있는 용암을 닮아 있었다.
다행히도 피오니안의 몸에서 떨어진 불꽃은 주변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몸에 그것을 둘둘 감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피오니안의 모습은 절로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에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불꽃과 피오니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을 머뭇거렸다. 닿으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에틸에게 선연한 두려움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이질적인 공포였다. 일단 지켜보자 싶어 손을 거둔 에틸이 입술을 떼며 피오니안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불꽃 속으로 사르르 녹아드는 것처럼, 형체가 흐느적거리던 피오니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에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고운 아미를 왈칵 찌푸린 에틸이 다시 깊은 한숨을 흘렸다.
✲ ✲ ✲
오랜만에 출근 한 레사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다. 레사는 가장 먼저 싱글벙글한 얼굴로 기사단 주변을 기웃거리며 돌멩이를 주워 풀숲에 던지던 나트하를 잡아 왔다.
갑자기 나타난 저를 보고 얼굴이 죽상이 되는 걸 보니 무슨 일로 웃고 있었는지를 짐작한 레사가 자조하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얌전히 끌려온 나트하는 아직은 제법 따뜻한 초가을에 펄펄 끓는 커피를 내어 준 제 친우에게 떨떠름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어딜 보아도 쓰디쓴 커피를 째려보았다.
레사는 그것이 우스워 입꼬리가 비죽 솟아 있었다.
“저기, 나…….”
“알고 있다. 네가 레이라에게 고백한 것도, 그녀가 그것을 받아 준 것도.”
“뭐?”
“너는 항상 얼굴에 다 쓰여 있다고 하지 않았나.”
머뭇머뭇 제 얼굴을 더듬어 보던 나트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레사는 그 측은한 표정으로도 제 기분을 살피려 애쓰는 친우의 눈초리에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괜찮다. 아니, 그 빌어먹을 마수를 토벌하러 다녀온 이후로 단 하루도 괜찮았던 날이 없었지. 그런데 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째서 내게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군.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너와 주먹다짐을 해도 모자랄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 나트하. 네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네가 그녀를 지킬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겠지.”
“레사.”
“나는 그녀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한다는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사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뜨거운 커피를 그림처럼 마시며 애써 괜찮은 척 하는 레사를 향해 나트하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레사는 꽤 오래 출근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테이블 위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라는 것처럼 매끈매끈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흠칫 떨린 나트하의 몸이 레사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슬쩍 틀어졌다.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린 나트하가 레사의 손 근처 어딘가를 바라봤다.
‘저렇게 미안해하면서 고백은 어떻게 한 걸까.’
속으로 혀를 찬 레사가 입술을 열었다.
“에틸 페르세나. 그자는 레이라를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게 해 줄 테지. 나트하, 너도 그래야 한다.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녀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것으로 갚았으면 좋겠다. 너 혼자서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힘들 때도 있겠지만…….”
느릿하게 잔을 내려놓은 레사는 마치 안심이 된다는 것처럼 가지런히 웃었다.
아직 부르터 있는 입술과 홀쭉한 뺨에 절로 가슴이 아파 왔다. 나트하는 제 가슴을 문질렀다. 그냥 욕이라도 시원하게 얻어먹거나 주먹질을 당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저렇게 아프게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을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트하에 레사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대앉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아 나트하는 더 마음이 쓰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도록 나트하는 제 표정을 황급히 감추었다.
“그리고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게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나? 레이라는 모르게 내가 도울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한다. 물론 너도 있고 페르세나에 타이니아스 님까지 계신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응. 알았어.”
나직하게 웃은 레사는 여전히 우울한 눈빛이었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보고 창밖을 보다 할 말을 다 했다는 것처럼 눈을 축 내리깔았다. 검은 속눈썹에 숨어 버린 푸른 눈동자가 여전히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을 것 같아 나트하는 숨을 참았다.
슬프기도, 안타깝기도, 화가 나기도, 그리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네 슬픔을 더 솔직하게 위로해 주고 달래 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내가 네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부 털어놓는다면. 그것이 그저 적선하듯 내뱉은 값싼 위로로 들릴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고운 손을 꽉 말아 쥐며 울음을 삼키는 나트하를 눈치챈 레사는 그저 모르는 척 눈을 감을 뿐이었다.
✲ ✲ ✲
오리처럼 입이 툭 튀어나온 레이라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토라진 상태였다. 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미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중이었다. 별 효과는 없어 보였지만.
“레, 레이라.”
“왜요?”
“…….”
퉁명한 목소리도 귀여운 탓에 웃음이 나올 뻔했는지 입을 틀어막은 남자가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레이라의 입술은 당연히 더 튀어나왔다. 그것을 번개같이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퍽 애처롭게 바뀌었다. 그러나 레이라는 이미 몸을 홱 비틀어 벽을 향해 있었다.
상황이 몹시 궁굴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뒤늦게 후회를 하며 제 뺨을 짝짝 두드렸다. 이런 상황에 면역력이 전혀 없던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하는데 물 한 방울 못 찾고 있는 집주인 같은 안색에 몰래 그것을 흘겨보던 레이라는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남자는 그런 레이라의 표정은 보지 못했으므로 계속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난처한 상황의 시작은 두 사람의 첫 데이트였다. 차랑차랑하게 핀 꽃을 보러 가자고 잡은 데이트 약속은 때아닌 빗줄기에 계획을 틀어야 했다.
거친 빗줄기에 여린 꽃송이는 다 떨어져 버릴 테니 레이라는 살짝 풀이 죽었다. 그러나 남자의 개인 연구실에 놀러 갈 생각에 부푼 마음을 갖고 금세 잊어 버렸다.
개인 연구실의 주인인 나트하는 그녀에게 사계절이 담긴 창을 보여 주었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몹시 황홀한 표정으로 창밖의 풍경을 즐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진 레이라가 행복한 표정으로 나트하를 답삭 껴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화들짝 놀란 그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슬쩍 밀쳐 버린 것이다. 레이라는 자신이 밀쳐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입이 뚱하게 나와 버렸다.
“나트하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죠?”
“…….”
“나를 밀쳐 버리다니…….”
그저 스킨십에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터라 그랬다는 말을 네 번이나 한 것 같은데……. 나트하는 침울한 표정으로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이 닿자 사르륵 풀리는 긴 머리칼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레이라는 입술을 최대한 내밀고 삐진 척 연기 중이었다. 그녀는 나트하 몰래 따뜻한 햇볕과 단풍이 가득한 가을 호수를 흘끔거렸다. 그 풍경과 나트하의 머리카락이 닮았다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전장에 목을 바치러 나가는 장수처럼 결연한 표정을 한 나트하가 레이라의 옆자리에 냉큼 주저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약간의 대담함에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거린 레이라가 찬찬히 나트하를 돌아보았다.
상처 입은 나비처럼 내리깐 속눈썹과 촉촉한 금빛 눈망울이 예뻤다. 슬쩍 깨문 붉은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 있게 흐트러진 머리칼은 그를 더 처연하게 보이게 했다.
레이라는 나트하의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붙잡힌 손이 달달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귀여운 남자는 손을 잡는 간단한 접촉도 부끄러운가 보다. 몰래 웃음 지은 레이라는 나트하의 얼굴 아래에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놀랐는지 파드득 몸을 떨던 그는 또 레이라가 토라질까,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이라는 아직도 꽉 깨문 나트하의 입술이 안쓰러워 희끗희끗하게 질린 입술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작은 바람이 스치듯 슬쩍 마주한 입술에도 나트하는 인형처럼 말랑하게 굳어 버렸다.
‘방금, 뭐였지?’
발갛게 익은 귀 끝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트하는 사고가 멈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톡 치면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릴 것처럼 넋을 뺀 나트하를 향한 레이라의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나트하처럼 순진한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레사와 에틸을 만난 것이 다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이걸 어쩌나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확 잡아 먹어 버리고 싶은데……. 응?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레이라는 로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손이 나트하의 볼을 살짝 감쌌다. 시원한 손바닥이 따뜻한 볼에 닿자 나트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하얀 손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허벅지에 딱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목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팔도, 입술에 닿은 촉촉하고 달콤한 체온도 연달아 이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나트하는 그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레이라는 온순한 그의 입술을 살살 핥았다. 헙, 들이켜진 놀란 숨과 함께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혀를 밀어 넣었다. 달달 떨리는 그의 몸을 쓰다듬고 뒤로 빠지려는 고개를 끌어당겼다. 도망가려는 수줍은 혀끝은 금세 레이라의 혀에 휘감겨 끌려 나와야 했다.
나트하는 그녀가 제게 주는 다디단 타액과 황홀한 숨결을 들이마셨다.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쉬기가 곤란한 탓에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타이밍에 맞춰 훅 들어오는 공기마저 달콤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다가도 레이라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가 전부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손끝이 시리다가도 펄펄 끓는 용암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듯 온몸이 뜨거웠다.
나트하는 제 입술을 놓아주고 제게서 멀어지려는 레이라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아직도 수줍은 혀는 부드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레이라는 나트하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다정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상큼한 시트러스의 향기가 나는 그의 품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생각처럼 따스했다.
강아지처럼 유순했던 눈빛에 몽롱한 색기가 떠오르자, 레이라는 등골에 짜릿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키스는 아주 완벽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정직하게 입술만 부딪쳐 왔다. 레이라는 묘하게 거슬려하며 그의 손을 들어다 제 가슴 위에 얹어 놓았다. 나트하의 품에 더 찰싹 달라붙기도 했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가만가만 가슴을 문질렀다. 원을 그리듯 다정하게 매만지는 손길은 행여 힘을 주면 아파할까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레이라는 가슴 속까지 간질간질한 애무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커다랗고 고운 손 위에 작고 하얀 손이 닿았다. 레이라는 제 손에 힘을 주어 나트하의 손을 꽉 문질렀다.
시키는 대로 잘 움직이는 그는 역시 레이라의 의도를 읽어 냈는지, 전보다 훨씬 거칠게 가슴을 매만졌다. 그래 봐야 남들의 반도 되지 않는 힘이기는 했다. 나트하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린 레이라가 그의 허리 위에 걸터앉아 드레스의 끈을 풀었다. 옅은 분홍빛 튜브톱 드레스는 그녀의 손길에 손쉽게 흐트러졌다.
레이라의 옆구리에 붙어 있던 단추가 풀리는 동안 제 눈도 같이 풀려 가고 있던 나트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봉인이 해제되듯 툭 튀어나온 가슴에 나트하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부끄러운지 목까지 빨갛게 익어 버린 나트하였다. 레이라는 그 얼굴이 귀여워 허리를 숙여 발간 뺨에 잔 키스를 뿌렸다. 조심히 닿아 오는 그녀의 입술이 싫지 않았다. 아니, 미치도록 좋았다.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트하는 그 언젠가처럼 제 심장이 고장 나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감춰 보려 나트하는 커다란 손에 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어느새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레이라의 손길에 놀라 몸을 파드닥거린 그가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레, 레이라…….”
“싫어요?”
수줍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한 레이라가 애원하듯 굴었다. 나트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 아니. 싫은 것은 아닌데요.”
“그럼요?”
“이, 일단……. 여긴 침대도 아니고…….”
“아.”
시무룩해진 레이라의 표정에 나트하는 몹쓸 짓이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냉큼 마법으로 침대를 불러왔다. 커다란 소음을 내며 나타난 침대와 함께 환하게 켜져 있던 마법 등이 하나둘 꺼졌다. 대낮처럼 반짝이던 바깥 풍경들도 밤이 찾아온 것처럼 어둑어둑해졌다. 어둠이 드리운 방 안에 혼란과 흥분을 담은 거친 숨소리가 깔렸다.
레이라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눕힌 나트하는 일단 눕히긴 했으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얼굴에 레이라는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녀가 나트하의 셔츠 단추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하늘하늘한 실크 셔츠는 금세 반으로 나뉜 채 나트하의 속살을 드러냈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생각했던 것처럼 예뻤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 레이라를 당황케 했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금빛 문장은 몹시 신비로웠고 가느다란 허리는 야릇했다.
‘단아하고 고운 얼굴에 이런 짐승 같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니.’
약간의 배신감까지 드는 몸은 정말 섹시함 그 자체였다. 근육을 잔뜩 키운 다음 한계까지 압축을 시키면 이런 모양이 될까 싶었다. 탄탄한 몸은 쩍쩍 갈라진 근육을 품고 있으면서도 낭창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붉어진 그의 얼굴과 합쳐지자 묘한 시너지를 냈다.
분명 레이라의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은 나트하인데 그녀는 왠지 저가 그를 범하려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기분만 낼 필요는 없잖아?’
눈을 반짝인 레이라가 냉큼 자세를 뒤집었다. 그녀가 손끝에 힘을 주고 살짝 밀자 나트하는 침대 위로 살포시 누워 주었다.
레이라는 드레스를 휙 뒤집어 벗고 나트하의 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첫날밤 새 신부처럼 얼굴을 붉힌 나트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레이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커다란 손을 다시 제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살갗에 뜨거운 손아귀가 닿는 느낌과 함께 긴 손가락이 꼬물꼬물 제 가슴을 매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라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나트하는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워 넣고 살짝살짝 비틀었다. 그는 열렬하지만 부드럽게 가슴을 주물렀다.
마음이 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 레이라를 절로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슬금슬금 나트하의 허리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음부에 딱 맞춘 것처럼 닿는 나트하의 물건은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묘한 만족감과 함께 레이라의 입술에서 탁한 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야릇해진 레이라를 잡아먹을 것처럼 보던 나트하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이라는 홀린 것처럼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흡착되듯 딱 맞물린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왔다 갔다. 격렬하게 문지르고 달콤하게 빨아들이고 새치름하게 깨물었다. 만족감이 담긴 신음과 한숨을 교환하고 숨결 한 자락마저 빨아 마시듯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거칠어진 손짓은 꼬집듯이 유두를 희롱하고 가슴을 뭉갰다.
레이라는 행여 질세라 작은 손가락으로 나트하의 몸 곳곳을 쓸어내렸다. 귀 끝을 매만지고 목 언저리를 타고 내려오는 손톱이 가느다란 자극과 간지러움을 낳았다. 레이라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나트하의 피부 결을 느끼며 그의 매끈한 몸 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듯 손을 내렸다.
“아으읏.”
“흐응.”
입술을 떼어 낸 레이라가 그의 볼, 귓가, 목, 쇄골에 점을 찍듯 입술을 꾹꾹 눌렀다. 혀끝을 세워 작고 고운 빛을 띤 유두를 핥자 나트하가 간지럽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어떻게 된 게 가슴까지 예쁜 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레이라는 그의 유두를 깨물고 느리게 문질렀다. 확연하게 커진 움찔거림에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래서 남자들이 애무를 열심히 하는 거구나.’
쪽쪽, 살갗을 물고 빠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리자 나트하의 얼굴은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소리가 주는 간지러운 자극과 느껴지는 쾌감은 제 몸에 존재하던 힘을 전부 빼앗아 한곳에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바지, 벗어 줘요.”
“…….”
나트하는 새빨간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레이라가 제 엉덩이를 살며시 들어 올리자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손을 더듬거렸다. 어색한 손짓은 몹시 다급했으나 몇 번이나 헛손질하기도 했다.
느릿한 손놀림과 부끄러워 죽겠다는 양 입술을 깨문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레이라는 그의 얼굴에 입술을 쪽쪽 부딪치며 볼을 비볐다.
‘귀여움 받는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나트하는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레이라를 밀쳐 내지는 못했다. 그는 그저 어색하게 웃음을 매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바지를 벗고 얌전히 다리를 모았다.
바지를 벗어 달란다고 또 바지만 달랑 벗어 준 나트하를 향해 레이라의 뾰족한 눈빛이 닿았다. 그 눈빛에 흠칫 놀란 나트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팬티를 벗어 던졌다.
그를 예쁜 먹잇감 보듯 하던 레이라는 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앙칼진 암고양이처럼 그를 할퀴었다.
나트하는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를 향해 고정된 시선이 발긋한 얼굴을 한참 맴돌았다. 여우처럼 휜 눈꼬리가, 예쁘게 솟은 광대가 사랑스러웠다. 뺨을 발갛게 물들인 나트하는 더듬더듬 움직여 레이라의 가슴을 손에 가득 쥐었다.
“흐응, 나트하. 가슴, 좋아요?”
착한 아이를 대하듯 사랑스러움이 담뿍 담긴 말투였다. 레이라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그의 남근 위로 자리를 잡았다.
나트하는 긴 숨을 뱉어 냈다.
“레이라의 온몸이, 후……. 다 좋아요.”
대답을 하는 그의 머릿속으로 지난밤에 보았던 레이라의 속옷이 스쳐 지나갔다. 가느다란 실 몇 가닥과 손가락 두 개보다 작은 천 쪼가리로 만들어 진 속옷은 그녀 맨살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질척하게 젖은 음부와 쇠몽둥이처럼 딱딱하게 발기한 남근이 서로 몸을 비볐다. 뜨겁게 달아오른 비부에서 질척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나트하 정말, 예쁘네요.”
“……무슨. 소리에요. 예쁜, 흣, 건……. 당신인데요.”
미끄러워진 하초에 레이라의 허리 짓이 빨라지자 나트하의 얼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미간을 구긴 표정이 지나치게 야릇했다. 평소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을 가지고 있던 나트하의 새로운 이면이었다. 레이라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 같았다.
뾰족하게 일어선 클리토리스와 귀두가 비벼지자 나트하가 레이라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미끄러운 균열 사이를 왕복하던 커다란 남근이 얌전히 허리를 잡혀 준 채 비부를 내어 준 그녀의 틈을 파고들어 몸을 흔들었다. 거칠게 비벼지는 음부에서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라는 제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앙! 앗, 안 돼에……. 나트하는 읏……. 가만히 있어 주기로 했잖아요.”
누워 있으라고만 이해했던 나트하는 작은 불만이 생겼다. 그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하나 생겨났다.
레이라는 빙긋 웃으며 제 허리를 감싼 단단하고 고운 손을 떼어 냈다. 아쉬움에 흐트러진 금빛 눈동자에 나른한 숨을 흘린 그녀가 팬티 끈을 풀었다. 순식간에 풀린 끈이 나풀나풀 허벅지 위로 내려앉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팬티를 휙 집어던졌다. 레이라는 전보다 확실하게 닿아 오는 나트하의 것을 느끼며 허리를 흔들었다. 가랑이 사이에 음란하게 튀어나온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기로 했다.
“으윽, 하…….”
거친 자극에 움찔움찔 떨리는 커다란 몸이 만족스러웠다. 레이라는 나트하를 확실히 괴롭혀 주고 싶었다. 잔뜩 느끼게 해 몸서리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뭉근하게 움직이던 엉덩이를 떼어 내고 탄탄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꼽에 닿을 것처럼 빳빳하게 일어선 나트하의 것에 레이라는 절로 뺨을 붉혔다. 어떻게 된 것인지……. 나트하는 그것까지 예뻤다. 유두도, 남근도 전부 귀엽고 예쁜 모양이었다. 레이라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귀두를 살살 쓰다듬었다. 연유를 뿌린 딸기 냄새가 날 것 같은 선단에 입을 맞춘 레이라가 혀를 내밀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뜨거운 혀끝을 인내하던 나트하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레이라의 한쪽 볼을 쥐었다. 꽃물이 든 뺨이 사랑스러웠다. 영원 같은 자극을 주는 입 안이 미치도록 좋았다. 아득해지는 머릿속을 차곡차곡 정리하듯 인내하던 그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하윽.”
탱탱하게 부푼 귀두를 핥는 혀가 간지러웠다. 울퉁불퉁 일어선 핏줄의 틈새를 날름거리고 요도구를 헤집을 때마다 허리가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쾌감에 시야가 아른아른 희미해지려 했다.
간헐천처럼 뿜어져 버리려는 사정감을 가까스로 내리누른 나트하가 레이라의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레이라가 제 송곳니로 귀두를 긁어 버렸다. 울컥울컥 터져 버린 정액이 그녀의 입을 가득 채웠다.
“흐앗! 아윽.”
부지불식간에 참던 것이 터져 버렸다. 환희에 가득 찬 머릿속을 빠르게 흐트러트린 그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흐린 눈동자가 선명해지자 꼴깍꼴깍 무언가를 삼키는 레이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나트하는 기겁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레이라의 고개를 제 고간에서 떼어 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희게 질린 얼굴에 강아지같이 축 처진 눈초리가 서큐버스처럼 정액을 받아 마신 뒤, 붉은 입술을 핥는 음란한 혀끝을 응시했다.
레이라는 입꼬리로 새어 나온 정액을 훑어 입 안으로 밀어 넣고 검지를 할짝거렸다. 붉게 물든 눈가가 색스러웠다. 야하기 짝이 없는 입술은 당장 핥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처럼 탐스러웠다.
나트하는 제 눈앞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뇌까지 타 버렸는지 자글자글 익어 버린 머리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허리를 서서히 들어 올리는 레이라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아직도 야릇한 표정이었다.
빨갛게 익은 뺨이 커다란 손에 감싸였다. 나트하는 레이라의 얼굴을 쥐고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았다. 촉촉한 입술 사이를 매끄럽게 파고든 혀가 그녀의 입 안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느리게 움직이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키스였다. 다정하게 혀를 문지르고 목 끝까지 혀를 밀어 넣어 구석구석 핥아 내린다. 잘근잘근 깨물리는 혀는 아프지 않고 짜릿짜릿하기만 했다.
순진한 강아지가 늑대처럼 느껴졌다. 레이라는 제 몸에 닿아 오는 나트하의 손길이 저를 불태워 버릴 것처럼 뜨겁다는 것이 기꺼웠다. 만지기 아깝다는 것처럼 가슴을 매만지고 쓰다듬는다. 장난스럽게 유두를 꼬집다가도 행여나 아플까 살금살금 문질렀다. 답답할 만큼 느릿한 손길로 등을 쓸어내리고 귓불을 문지르고 얇은 옆구리를 간질인다.
입술이 겨우겨우 떨어지자 막혔던 숨을 터트린 레이라가 나트하의 품에 찰싹 달라붙어 몸을 비비적거렸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이 더 만져 달라는 것처럼 가련했다. 입술을 내려 레이라의 목을 빨아들이던 나트하가 가슴을 베어 물기도 하고 허리를 깨물기도 했다.
간지러운 자극에 레이라는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안달이 난 것처럼, 그녀의 몸이 배배 꼬였다. 온몸을 맛보겠다는 듯 여기저기 핥아 오는 혀가 간지럽고, 얄미웠고, 좋았다.
“하으으, 으응! 더, 더 해 줘요.”
“맛있어요. 레이라.”
생글거리는 눈웃음이 발긋해진 레이라의 피부를 훑었다. 다시 간지럽게 붙는 입술을 막으려 팔을 뻗은 레이라가 그를 저지하려 했다.
가볍게 그녀의 손을 모아 쥔 나트하가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레이라의 목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곧 질척하게 새어 나온 애액이 흥건한 음부를 손으로 훑어보던 나트하가 선명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얼굴 위에 올려 두었다. 졸지에 그 어여쁜 얼굴 위에 제 음부를 올려 둔 채로 주저앉게 된 레이라가 울상을 지었다.
“으읏, 이건…….”
음부에 얼굴을 파묻은 나트하가 게걸스레 애액을 빨아 마셨다. 엉덩이를 비틀고 다리를 바동거려 보려 해도 꽉 잡힌 허벅지는 미동도 없었다.
“아흐윽! 앙, 아앗.”
클리토리스를 혀로 비비고 깨무는 동안 레이라의 질구를 간지럽히던 나트하의 손가락에 애액이 잔뜩 묻어났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그녀의 뜨거운 안을 매끄럽게 파고들어 왔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은 생각보다 힘겹게 진퇴를 겪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힘주어 깨물고 있는 것처럼 잔뜩 조여드는 내벽에 나트하는 아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쫀득하고 뜨거운 내부는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애액을 잔뜩 토해 냈다.
“하, 너무 좁아요. 레이라. 이곳에, 제 것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으응, 읏!”
새로이 흘러나온 애액도 전부 마셔 버린 나트하는 레이라의 클리토리스며 소음순, 질구를 전부 할짝거렸다. 그가 헛숨을 뱉으며 손가락을 꽉꽉 눌렀다. 좁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질 내부는 나트하의 손가락을 막힘없이 받아먹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두 개, 세 개로 늘려 가며 레이라의 음부 여기저기를 핥았다.
그는 클리토리스를 핥을 때 그녀의 신음 소리가 더 격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혀에 힘을 주어 누르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손가락은 여전히 질을 들쑤시고 있었고 능숙해진 혀끝은 레이라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폈다.
통통한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며 나트하의 얼굴을 꽉 조였다. 그는 혀를 더 야릇하게 놀렸다. 빠르게 위아래로 할짝대다, 입술로 클리토리스를 물고 혀로 빠르게 문질렀다.
“아아앙!”
절정에 달한 듯 왈칵 터져 나온 애액이 시큼했다.
나트하는 그것도 전부 핥아 마셨다. 그는 마셔도, 마셔도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속까지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그녀를 다시 들어 올려 제 남근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문질렀다. 하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던 레이라는 몽롱한 눈으로 허리를 들썩였다.
“하, 정말, 예쁘네요. 레이라.”
어서 넣어 달라는 것처럼 교태를 부리는 레이라의 몸짓이 애달팠다. 나트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핥았다.
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정전이 온 것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기분이기도 했다.
나트하는 그녀의 통통한 허벅지를 활짝 벌리며 귀두를 서서히 밀어 넣었다. 매끄럽게 젖어 있는 질구에 잡아먹힐 듯 파고든 귀두가 쿵쿵 울렸다. 심장이 자지로 가버린 것은 아닐까, 나트하는 황홀한 기분에 온전치 못한 생각을 떠올렸다. 귀두만 넣었을 뿐인데도 미칠 것처럼 좋았다. 이대로 녹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잠시 그것을 음미하며 움직임을 멈춘 나트하가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파고든 남근이 꼬챙이처럼 그녀를 꿰뚫었다.
“아아앙!”
뿌리 끝까지 집어 삼켜진 자지에 레이라가 비명을 질렀다.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죽을 정도로 좋았다. 그것은 나트하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최대로 늘려 제 것을 물어 삼킨 레이라의 안은 남근을 꽉 물었다 풀어 주기를 반복했다. 작은 돌기들이 저를 핥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주물러 주는 것 같기도 했고, 심지어 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물오물, 나트하를 맛있게도 집어삼킨 레이라가 만족스러운 숨을 뱉었다.
“하으읏……. 흐으…….”
“……으윽.”
행여 어디로 도망갈세라 레이라를 꽉 껴안은 나트하가 제 허리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꽉 들어찬 남근이 주는 포만감을 느끼며 레이라가 교성을 내질렀다. 달큰한 신음을 배경으로 허리 짓을 시작한 나트하가 커튼처럼 드리운 레이라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정염이 가득 찬 눈빛을 그녀에게 맞췄다.
흉흉한 기세로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자극적이었다. 예쁘기만 하던 얼굴이 어느새 완연한 남자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사리물고 있는 입술은 비틀어져 올라가 비릿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고, 날카로운 금빛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안광이 비출 것처럼 짐승을 닮아 있었다.
낭창하고 가느다란 허리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쾅쾅 치받는 허리 짓에 온몸이 부서져 버릴 것처럼 거친 쾌감이 일었다.
“하아앙! 아응! 으읏!”
“……후, 미치게, 좋아요. 레이라. 어떻게 이렇, 게 좋을 수가 있을까요?”
“하앙……. 나도, 앙! 좋아, 요.”
어디서 배운 건지 아니면 본능인 건지. 레이라의 허리를 꽉 쥔 나트하는 거세게 허리를 처박으면서도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고 있었다.
신경 하나하나가 도화선처럼 느껴졌다. 불꽃이 달라붙어 짜릿짜릿하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점점 중앙을 향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곧 터트릴 폭탄을 대비해 옅은 자극을 흩뿌리는 불꽃은, 제 몸을 기어이 불살랐다.
빠르게 다가오는 절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을 기대하던 레이라는 몸을 부르르 떨며 나트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흐응, 안아, 윽……. 줘요.”
레이라를 품에 가득 안고서 허리를 뭉근히 문지르던 나트하가 다시 거세게 허리를 찧었다. 발딱 일어서 있던 클리토리스가 그의 음모에 쓸려가며 절정을 바짝 불러왔다. 레이라는 제 엉덩이에 찰싹찰싹 달라붙어 오는 고환과 유두를 꽉 꼬집는 손길에 허리를 휘었다. 화려하게 발화한 폭탄이 커다란 오르가슴을 터트렸다.
발발 떨리는 레이라의 몸을 더 힘주어 껴안은 그는 제 것을 꽉꽉 씹어 대는 질 벽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매끈하게 젖은 등을 소록소록 쓰다듬으며 제 몸을 일으킨 나트하가 그녀를 꽉 그러안고 허리를 튕겼다.
힘이 빠지려던 레이라의 몸뚱이가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다시 기력을 끌어모았다. 가느다란 허리가 파르르 떨며 몸을 세웠다. 그녀는 눈을 측은히 떴으나 곧 파르르 떨리며 감겨 버렸다.
그 안타까움이 어째서인지 야릇하게만 보여 나트하는 제 허리를 더 빠르게 치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찔러 오는 삽입감에 채 가시지 않은 오르가슴이 더 뜨겁게 피어올랐다.
“아아앙, 아흑!”
“하……. 너무, 조이지……, 마세요. 레이라.”
“내가 그러려고, 으으응, 그러는 게 아닌데에…….”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쥐고 방아 찧듯 쿵쿵거리던 나트하가 제 엉덩이를 레이라에게 콱 처박고 뭉근하게 내리누르듯 허리를 돌렸다.
“하흐으으응!”
화려한 피날레처럼 다시금 터져 버린 절정에 레이라는 결국 나트하를 덮치듯 껴안고 몸을 떨어야 했다. 밝았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제 것을 꽉꽉 물어오며 움찔거리는 내벽에 참고 있던 인내심을 죄 쏟아 버린 나트하도 몸을 부르르 떨며 정액을 토해 냈다.
틈 하나 없이 몸을 겹친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으며 길고 긴 절정을 내달렸다. 달빛이 긴 창을 비추며 들어와 나신을 훤히 비췄다.
나트하는 열이 올라 뜨끈해진 레이라의 몸을 감싸 안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름답고 황홀했다. 지독한 쾌감을 맛본 그의 몸뚱이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처럼 자극을 더 원해왔다.
여전히 작아지지 않은 거대한 남근이 레이라의 안을 은근히 문질렀다. 야금야금 움직이는 허리 짓에 그녀는 팔을 뻗어 그를 꽉 껴안았다.
“더, 더 하고 싶어요.”
싫은가요? 부끄러운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애원하듯 촉촉한 눈으로 저를 보는 나트하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레이라는 그의 볼에 작게 입을 맞추어 답을 대신했다.
자궁구에 꽉 맞춰진 음경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내벽을 자극해 댔다. 허리가 절로 들썩여지는 극점을 찾아낸 나트하가 그곳에 닿을 듯 닿지 않게 허리를 쳐올렸다.
“하윽, 으으응…….”
“영원히, 흐으……. 넣고 있고 싶어요.”
레이라가 안달을 할수록 그녀의 내부는 나트하를 미친 것처럼 깨물고 오물거렸다. 그냥 넣고만 있어도 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트하는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저가 원하는 곳에 음경을 맞추려 하는 레이라의 움직임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는 그녀를 곱게 눕힌 뒤 짐승처럼 빠르게 올라탔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발딱 일어선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조신하게 허리를 굴리던 나트하가 레이라의 귀를 깨물고 유두를 핥았다. 감질나게 다가오는 움직임과 애무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꾸준하게 쾌감을 쌓아 가고 있었다.
나트하는 벌써 이 질척하고 뜨거운 행위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가 애를 태우는 것처럼 레이라가 원하는 곳을 드문드문 찔렀다. 그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마침내 받은 선물처럼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안달이 나, 요염하게 흔들리는 엉덩이가 나트하의 허리 짓에 맞춰 들썩였다. 사락사락 스치는 시트 소리까지 달콤하게 들려와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폭 빠졌음을 다시 깨달아야 했다.
나트하는 꽉 조이는 레이라의 내부를 제 것으로 문지르고 찌를 때마다 녹아 버린 고양이처럼 반응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수확하기 직전의 라즈베리처럼 먹음직스럽게 익은 유두를 입에 넣은 나트하가 혀를 살살 굴렸다.
손가락이 폭 파묻히는 커다란 젖가슴을 부드러이 매만졌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움직이는 나트하의 손이 요란하게 움직이는 허리 짓과 대비되었다. 점점 거세지는 허리 짓은 집요하게 극점을 찔러 대고 있었다.
“아앗! 하윽, 흐으응!”
“하아…….”
레이라는 탄탄하게 뭉친 구름을 다리 사이에 가둔 채 망연한 쾌락을 탐하는 요부가 된 기분이었다. 퍽퍽퍽, 기계처럼 정확하게 저가 원하는 곳을 찔러 대는 남근이 황홀했다. 반짝반짝한 희열이 몸 한가운데로 뭉쳤다 흩어지며 작고 얕은 절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거대한 해일이 밀려들 듯 말 듯 그녀를 애태우며 작은 절정을 다시 흩뿌렸다.
파르르 떨리는 가녀린 몸을 섬세하게 매만지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눈이 쌓이듯 차곡차곡 쌓인 절정감이 뭉근하고 거대하게 피어올랐다. 레이라는 제 안을 들쑤시는 요물 같은 남자를 더 꽉 조이고 풀어 주며 자극했다.
땀방울을 보석처럼 매단 나트하가 빠르게 허리를 튕겼다. 두 사람의 주위로 팡팡 튀기는 애액과 정액이 시트 위를 점점이 수놓았다.
자그마한 유두를 콱 꼬집은 그는 가느다란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붕 뜬 엉덩이와 허리에 놀란 그녀가 나트하의 탄탄한 몸에 다리를 휘어 감았다. 아귀가 딱 맞물리듯 삽입감이 깊어졌다. 레이라의 허리는 당장 쏘아지기 직전의 활대처럼 휘어 있었다.
난잡한 색으로 물든 그녀의 눈빛이 느른히 그에게 닿았다.
“야한, 눈이에요. 레이라.”
“흐으응, 아앙!”
비틀리고 꺾이는 허리가 가여울 법도 한데, 나트하의 허리 짓은 점점 더 격정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절정에 가까워졌는지 레이라의 허벅지가 달달 떨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으로 귀두를 꽉 붙잡힌 것처럼 내부가 꽉 조여들었다. 핏줄이 불거진 기둥과 뿌리 끝까지 순차적으로 조여든 질 벽이 아스라한 작은 떨림을 더하며 나트하를 미치게 했다.
레이라는 뭉근하게 터져 버린 절정에 숨도 쉬지 못한 채 허덕였다. 검게 물들어 버린 시야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작은 소리 하나, 작은 빛 한 자락 들지 않는 새카만 절정이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폭풍 같은 쾌감은 고스란히 나트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으윽, 제 것을, 끊어 버리실……. 하.”
말을 채 끝내지 못한 그는 진득한 숨을 터트렸다. 나트하의 등 위에 손톱을 콱 박아 넣은 레이라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떨림에 따라 조물조물 조였다가 풀리는 질 벽이 선명했다.
나트하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더 거세게 박아 넣었다.
“레이라, 레이, 흣, 라…….”
한계까지 치달은 몸짓에 거친 숨을 토해 낸 나트하가 그녀의 자궁구에 귀두를 딱 맞춘 채 정액을 벌컥벌컥 토해 냈다.
길고 긴 사정과 콸콸 쏟아 붓듯 터져 나온 정액에 레이라는 배가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하게 차오르는 몽글몽글한 감각은 요연한 절정 속을 헤매는 그녀의 정신을 간신히 나트하에게 붙여 주었다.
레이라는 그의 몸을 힘껏 마주 안았다. 나트하는 제 몸속에서 정액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얕은 추삽질을 반복하며 허리를 치댔다.
뒤늦게 쾌락에 눈을 뜬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는 볼을 발갛게 붉히면서도 지쳐 흐느적대는 레이라의 곁에 딱 달라붙어 치근덕거리며 몇 번이나 더 허리를 튕겨 댔다. 먼저 백기를 들어 항복을 선언한 그녀는 진이 다 빠졌다며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가냘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레이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트하가 그녀의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리고 있던 머리칼을 곱게 넘겨 주었다. 시중을 드는 시종처럼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러나 챙김을 주고 귀여움을 주겠다는 듯 애정이 담뿍 묻어 있기도 했다.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던 레이라는 나트하의 손에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나트하.”
“……네.”
아직도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건지 수줍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아니, 아니지. 아깐 그렇게 짐승 같더니?’
레이라는 급격히 억울해져 눈을 반짝 떴다. 그러나 저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고 있던 나트하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듣기 좋은 미성이 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이라는 귀에 꿀을 덕지덕지 바른 것 같은 기분에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레이라.”
“네?”
“저도 그냥 불러 봤어요.”
웃음이 묻어난 나트하의 목소리에 레이라는 저도 같이 웃어 버렸다. 그녀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나트하는 정말이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분위기를 타고난 남자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레이라는 저가 그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어 줬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몸을 섞는 것도,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가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전부 상상도 못 해 봤던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위화감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대화나 행동을 할 때, 은연중에 저를 낮추면서도 비굴해 보이거나 함부로 굴어도 되는 사람처럼은 느껴지지 않게 행동할 줄 알았다. 다정하고 따스한 외모와 분위기에 늘 상대를 배려해 주는 것처럼 한발 물러선 태도였다. 그것이 꼭 무언가 고민이 생긴다면 당장에라도 털어놓고 위안을 얻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런 남자가 철벽을 치는 데에는 선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레이라는 미소를 은은히 머금은 채 그에게 기대 그의 생각을 했다.
곧 그녀는 나트하에게 작은 키스를 받았고 몸을 발딱 일으켰다. 몸이 축축 늘어지며 힘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의 키스에 한 번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신기한 경험을 한 탓이었다.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뭘 어떻게 한 거예요?”
“기력을 되찾게 해 주는 주문을 걸었어요. 데이트는 이제 시작인데……. 침대 위에서만 보낼 수는 없잖아요.”
“……헤헤, 고마워요.”
배시시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나트하는 간지러운 목덜미를 쓸었다.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던 그는 자연스레 제게 안겨 오는 레이라를 마법으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파릇파릇한 새순을 매단 나무 주위로 팝콘 같은 꽃송이를 가득 매단 꽃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꽃 내음을 소복이 품은 바람이 사르르 불어오면 함박눈처럼 사락사락 내리는 꽃잎들이 바람결을 타고 하늘하늘 흐드러졌다.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이 작은 빛을 뿜어내며 녹아들 듯 사라진 자리에는 짙고 고운 빛으로 물든 봄꽃들이 제 자리라는 양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꽃들 사이로 햇살을 함빡 머금은 호수가 비추는 자글자글한 윤슬까지 더해졌다. 세상에 둘도 없을 그 풍경은, 가슴에 지고 있던 짐을 나누어 지어줄 것처럼 레이라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이런 봄을 좋아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간지러운 봄바람을 만나, 코끝이 찡할 정도로 짙은 향기를 품어, 가슴 속 깊은 마음조차 짙게 술렁이는 봄.
이런 봄이면 레이라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들꽃을 따러 다녔다. 한 바구니 가득 딴 꽃들은 작은 부케를 만들어 소중히 여기던 이들의 손에 하나씩 쥐여 주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데이지와 함께, 레사를 만나고 나서는 레사와 함께하기도 했다.
봄. 얼어붙어 있던 모든 것이 녹아, 새싹이 움트는 연둣빛 계절. 내년 봄에는 또 누구와 꽃을 따러 갈까 생각하던 레이라는 그즈음 제게는 나트하와 에틸 그리고 또 누군가가 함께 있어 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품었다.
레이라는 상냥하게 제 손을 잡아 오는 나트하의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바라보며 함빡 웃었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을 마주 잡은 작고 앙증맞은 손이 신이 난다는 듯 한들한들 흔들거렸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