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Love can touch us one time
심각한 상황에 황제궁 근처가 시끌시끌했다. 마스터들을 기다리는 황제의 근처에 짙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도 같았다. 시끄러운 바깥을 정리하라 명한 황제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황제가 애용하던 푸른빛이 은은한 찻잔은 제국 북부에서 들여온 물건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차마 마시지 못한 채 고이 내려놓은 황제가 제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폐하 마스터들이 도착하였…….”
“들라 하라!”
화려하게 금칠이 된 커다란 문이 열리자 장신의 사내 넷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디터 메르세데스, 레사 메르세데스, 나트하 러스티, 에틸 페르세나.
제국 남부 국경을 수비하는 소드 마스터와 타국에 나가 있는 소드 마스터 두 사람을 뺀, 마스터 네 명이었다.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근심이 조금 사라진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앉게.”
간단하게 예를 올린 네 남자가 자리에 착석하기 무섭게 황제의 입이 바로 열렸다.
“대형 마수가 섞인 수백 개체의 마수들이 나타났네. 위치는 제국 북부, 얼음탑 근처네. 이미 작은 마을 두 개가 사라졌고, 마수들이 펜릴령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이네.”
“…….”
“누가 갈 텐가? 두 명은 가야 하네.”
황제의 시선이 나트하와 에틸에게 향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와중에 황제의 시선을 눈치챈 나트하와 에틸이 동시에 제 머리를 짚었다.
황제는 의아한 눈으로 두 남자를 훑어보았으나 곧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자네는 얼마 전까지 아프다고 골골대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러스티 부단장과 페르세나 백작이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레사의 발언에 황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틸과 나트하가 동시에 커다란 한숨을 뱉어 냈다.
황제는 다시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지?’
“저와 러스티 부단장이 동시에 가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저와 메르세데스 소공자, 아니. 각하께서 가시겠습니까?”
“누가 가든 상관은 없다만, 자네가 왜 러스티 부단장의 거취를 정하는 겐가? 두 사람, 사귀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뭔가?”
때아닌 궁금증에 어안이 벙벙해진 황제가 에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빨리 대답을 하라는 것처럼 채근이 가득한 시선이었으나 에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레사만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와 메르세데스 공작의 눈은 에틸과 나트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겨우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것이 황제의 태도로서는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에틸 페르세나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이, 그 사람의 계획까지 참견한다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믿기질 않았다.
“……지금, 그것이 중요합니까?”
황제고 뭐고 미간을 작게 구긴 에틸이 불만을 토로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제가 헛기침을 큼큼 내뱉으며 민망함을 표현했다. 그가 뒤늦게 능청을 떨며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디터, 자네는 어떠한가?”
“……페르세나 백작의 제안대로 레사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러스티 부단장에게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가 보군요.”
“그럼 그리 알고 있겠네. 디터 메르세데스, 에틸 페르세나는 오늘 당장 북부로 출정을 떠날 준비를 해 주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메르세데스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나트하와 에틸을 살폈다. 그 역시 나트하와 에틸이 대체 왜 저러는 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으나 용케 참아 내고 있었다.
“두 사람만 믿겠네.”
이만 가서 준비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은 황제가 네 남자를 쫓아 보냈다.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황제와 에틸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트하가 제 얼굴을 감싼 채 욕을 내뱉은 것도 같았다. 아무도 듣지 못했기에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 ✲ ✲
[D-Day 2]
에틸의 출정 소식에 안색이 허옇게 질린 레이라는 손을 달달 떨었다. 그녀는 당장 눈물이라도 쏟아낼 기세였다.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레이라를 달래던 에틸은 제 자리에 나트하를 끌어다 놓았다. 촉촉한 눈으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한 나트하의 표정 역시 퍽 착잡해 보였다.
“잠시.”
에틸은 어색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피오니안을 데리고 바깥을 향했다.
빠른 보폭으로 레이라에게서 멀어지도록 걷던 에틸이 주위를 슥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상황이 급박했다.
“피오니안 님, 도와주십시오.”
“…….”
입을 꾹 다문 피오니안은 멀거니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만 내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두 명이어야 합니다. 지금 답을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당장 레사 메르세데스를 찾아갈 겁니다.”
“…….”
입을 꾹 다문 피오니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다. 쓰디쓴 풀 쪼가리라도 씹은 것처럼 잔뜩 짜증 난 표정이었다.
“그냥 내가 네 대신 마수를 다 죽이고 오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귀찮아지실 텐데, 괜찮으신 겁니까?”
“…….”
아마 피오니안이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해 버린다면 깔끔하게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을 지도 몰랐다. 그는 인간들의 욕심을 잘 알고 있었다.
“피오니안, 당신께서 가장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걸 묻지?”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때맞춰 응접실에 도착한 두 남자는 나란히 마주 앉았다.
“당신의 삶에 목표가 있습니까?”
“…….”
재차 이어진 질문에도 피오니안의 입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피오니안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 혹은 살아가며 생긴 목표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제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것을 탐구하는 것을 위해 살아왔던 적도 있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 알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간절히 바랐었다.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들을 구원하고자 존재하는 것인지. 악마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들을 견제하고자 존재하는 것인지. 강대한 힘과 뛰어난 지혜와 영생의 세월이 왜 제게 주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생각들은 희미해졌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고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실마리라도 얻었더라면 피오니안은 포기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정말 단 하나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로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의욕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긴 잠을 청했다. 그것도 지겨워졌을 때는 가장 즐거워 보이고 흥미가 동하는 사건에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흐르는 시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에틸에게 할 수는 없었다.
자조하듯 미소 짓고 있는 피오니안에 에틸은 알 듯 말 듯 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모르겠군.”
에틸은 돌연 해사하게 웃음 지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활짝 핀 얼굴에 놀란 피오니안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레이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제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저도 피오니안 님처럼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고 무엇이 제게 행복을 주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가.”
“저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주 불우한 환경에 살았지만, 그런 상황도 그저 그랬습니다. 아, 별 게 아니었다는 말이 맞겠군요. 그 어떤 것에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고 원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었고, 숨을 쉬지 않으면 답답하니 쉬었고, 잠이 오면 잤죠.”
“…….”
아득한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에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피오니안은 에틸의 과거가 저와 비슷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수천 년을 살아가는 동안 단 하나의 목표에서조차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에 삶에 싫증이 난 것이었다. 고작 30년도 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인간이 왜 그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피오니안은 갑자기 에틸이 흥미로워졌다.
“그런 제게 그녀가 물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니? 당연히 없었으니 없다고 답했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니? 역시 없었으니 없다 했습니다. 한숨을 폭 쉬더군요. 너는 뭘 할 때 행복하니? 그녀는 마치 이것마저 없으면, 안될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 순간을 추억하는 것이 즐거운지 에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제게 그런 것은 없었으니 머뭇거리면서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곤란한 것을, 음……. 그러니까, 아주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괴생물을 보듯 저를 보더군요.”
“너는 왜 삶이 지겨웠던 것이지?”
피오니안의 말에 에틸이 빙긋 웃었다. 단번에 알아볼 줄 알았다는 듯이.
“그때의 제겐, 레이라가 없었으니까요.”
“…….”
어이없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피오니안의 눈빛에도 에틸은 빙긋 웃었다.
그때, 그 시절의 에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이 없었고, 취향이 없으니 따질 것이 없었고,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 좌절할 일도 없었다. 원하는 것이 없었으니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행복을 바라지 않았으니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껍데기뿐인 사람이었다. 대충 숨을 쉬고 대충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죽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 그에게 레이라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용하다 했다.
“그녀는 제가 토할 것 같다고 이야기할 때까지 음식을 먹였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담가 놓고 씻으라 종용했고, 깨끗하고 편안한 옷을 입힌 뒤에 포근한 침구 위에 눕혀 놓았습니다. 당연히 배부르고 개운하고 따스했으니 잠이 솔솔 왔습니다. 그때 곁에 앉은 그녀가 말했습니다. 어때? 이런 게 행복이야!”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에틸이 낮게 웃었다.
“배는 터지기 직전이라 토기가 치밀었고, 몸은 개운하고 편했지만 무언가 어색했고, 포근하고 따뜻한 잠자리는 어딘가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행복이라 하더군요. 어이가 없어 잠이 다 깼습니다. 제가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 뜻이 무언지 모르는 천치는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어색하게 웃은 그녀는, 무척 예뻤습니다.”
“…….”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게 밥을 먹이고, 씻기고, 누워 있는 제 곁에서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행여 잠이 달아날까 작게 속삭이며 말을 걸어 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는 것을.”
당황스러운 낯으로 변한 피오니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멍해졌다. 나붓이 눈을 내리깐 에틸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긴 묘한 표정이었다.
무엇을 그리는 듯하다가도 아련히 떠올리는 표정.
슬픈 것처럼 보이다가도 환한 미소를 그리려는 듯 간지러운 표정.
피오니안은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순간, 저는 그녀를 위해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인생의 목표가 생긴 거죠. 늘 곁에서 볼 수 있었으면,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다정한 목소리를……. 그 다정한 목소리로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묻고, 욕실 바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물 온도는 어떻냐 묻고, 잘 자라고 속삭이는 부끄러움이 묻은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산다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을 그리는 이의 표정이리라.
피오니안은 저도 모르게 서늘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왜 내게 하지?”
“소중한 한 가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면, 내 전부를 주고서라도 갖고 싶고 지키고 싶은 한 사람이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지 않습니까?”
“…….”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면, 용기를 내셨으면 했습니다. 영생의 축복을 받은 당신께 인간의 생이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잠깐의 시간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시간이, 당신의 길고 긴 시간보다 훨씬 행복할 겁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입을 꾹 닫아 버린 피오니안을 보며 에틸은 제 마음이 전해졌기를 바랐다. 레이라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동안에 에틸은 아주 행복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 때는 가지지 못했던 많은 감정과 바람이 생기기도 했다.
아주 좋기만 했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레이라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를 가지지 못했을 때도 행복했을 진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더 행복했다. 온 세상을 제 팔 안으로 껴안은, 충만한 기분이었다.
에틸은 이 기분을 피오니안이 느낀다면 절대 거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단지 계기가 필요할 뿐이리라.
제 세계에 빛을 심어 준 유일한 구원자.
에틸은 제게 그렇듯 피오니안에게도 레이라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커다란 세상에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 무채색이 가득할 세상에 찬란한 색을 입혀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러나 에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피오니안은 다른 대책을 내놓았다. 레이라의 침대 아래에 커다란 마법진을 손수 새겨 넣은 그가 거대한 마나를 불어 넣었다. 오색찬란하게 터져 나온 피오니안의 마나는 보기만 해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유자재로 마나 색을 뒤바꿀 수 있는 그는 제 고유의 마력 색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본체의 힘을 사용할 때만 나타나는 마력 색은 고대 마법 수식을 빠르게 휘돌며 마법을 시전했다.
무결점한 마나를 들여 시전 된 마법은 무려 시간 마법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뒤틀어 마법이 시전 된 공간에서의 시간을 여섯 배가량 느리게 흐르게 해 주는 마법.
피오니안은 에틸에게 주어진 30분을 세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틀 뒤에 셋이 하느니 당장 하고 가 버리라는 뜻이었다. 결국, 피오니안은 아직 한발 물러서 있겠다는 마음을 대놓고 표현한 것이었다.
✲ ✲ ✲
레이라는 저를 방에 밀어 넣고 직접 문까지 닫아 버린 피오니안의 잔영을 그렸다. 그는 에틸과 함께 방을 나서던 순간부터 그때까지 그녀를 한 번도 봐주지 않았다.
‘왜 거절당한 것 같지?’
기분이 울적해진 레이라의 턱을 매만지던 에틸이 입을 달싹였다.
그는 제게 집중하라는 듯 그녀의 턱을 당겼다.
“레이라. 이틀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피오니안 님이 걸어 주신 마법 덕분에, 침대 위에서의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더군요.”
“…….”
말없이 서 있던 나트하가 입을 딱 벌렸다. 시간 마법이라니.
“그럼, 지금 시간 마법을 걸어 두셨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단, 후……. 시간이 얼마 없으니 당장 시작하죠.”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던 레이라는 에틸과 나트하를 번갈아 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레이라.”
“응.”
“이리 오시겠습니까?”
“…….”
레이라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피오니안의 생각을 떨쳐 냈다.
‘착각이겠지.’
그녀는 에틸의 단호한 눈빛에 홀린 나비처럼 포르르 발걸음을 떼었다. 단단한 품에 꽉 갇힌 레이라는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곱게 안겨 들었다.
그녀의 가녀린 등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무어라 중얼거린 에틸이 나트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숨을 내쉰 나트하가 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며 침대 위로 곱게 몸을 누였다. 마찬가지로 나체가 된 레이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트하의 위로 포개졌다.
에틸이 제 옷을 휙휙 벗어 던지는 동안 나트하는 레이라를 품에 꽉 껴안고 이것저것 마법을 시전 했다. 세 사람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 주는 마법과 방음 처리를 단단하게 해 주는 마법. 환한 창밖을 어둡게 만들어 주는 마법과 긴장을 완화하며 미약하게 흥분을 돋워 줄 마법.
수식을 전부 읊은 나트하는 침대 곁으로 다가오는 에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 늦춰졌는지 에틸의 행동이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끼며 느려진 나트하와 레이라의 행동을 훑던 에틸은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낀 나트하가 시선을 돌리며 말랑말랑한 레이라의 몸을 뒤집어 제 위에 앉혀놓았다.
어색한 몸짓이었고 손끝이 달달 떨렸으나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여전히 조금 멍했다. 그러나 섹시한 조각상처럼 느리게 다가오는 에틸을 보며 나트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이 맞구나.’
레이라는 그제야 제 가슴을 꽉 쥐여 오는 커다란 손을 느꼈다.
“아…….”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레이라가 얕은 신음을 뱉어 내자 에틸이 빠르게 침대 위로 튀어 올랐다.
꽃잎 같은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이친 뜨거운 혓바닥이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사납게 몸을 놀렸다.
눈을 꽉 감은 채 입술을 빼앗겨 달달 떨고 있는 레이라는 가녀린 토끼 같았다.
눈앞에서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고 있는데도 나트하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몸을 살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또 진득하게.
나트하는 레이라의 긴장을 풀어 주듯 정성을 다해 다정히 굴고 있었다.
세 사람의 정사는 언젠가 꼭 있을 일이며 필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을 진즉부터 깨닫고 마음먹었던 두 남자의 행동은 거리낌 하나 없었다. 입천장을 느릿하게 쓰다듬고 허리를 간질이던 에틸의 손이 가슴 위로 올라서면 가슴을 꼬집고 문지르던 나트하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단단한 그들의 마음만큼 합이 척척 맞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레이라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리치는 비처럼 과하게 쏟아지는 자극에 잠겨 생각이 텅 비어 버린 멍한 눈빛이었다.
“예뻐요.”
나트하가 레이라의 긴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는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다정히 그러모아 오른쪽 어깨 위로 얹어 놓았다.
“여기도, 예뻐요.”
속살거리는 음성이 야릇했다.
레이라는 소름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 뒷덜미에 닿은 나트하의 입술을 느꼈다. 점을 찍듯 살근거리는 입술은 다정히 등 언저리를 배회했다.
나트하는 제 입술이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레이라가 귀여워 작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은 음부 주위를 간질이다 음핵을 꼬집고 문질렀다.
생생한 자극에 튀어 오르는 레이라의 몸을 내리누른 에틸은 이제야 그녀의 입술을 놓아 주었다.
“좋은가 보군요, 레이라.”
“하읏! 하아, 하아.”
살겠다는 듯 숨을 터트린 레이라는 몸을 바동거리려 했다. 그러나 꽉 붙잡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틸은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문 채 타박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흡, 하읏, 흐응.”
뜨거운 눈빛에 넋을 뺀 레이라는 몸을 뒤로 젖히며 나트하에게 폭삭 안기듯 몸을 맡겨 버렸다.
그녀 역시 각오해 왔던 상황이었으니 받아들이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레이라의 몸이 나긋나긋해지자 나트하는 그녀를 가볍게 지탱하며 음부를 매만지던 손을 빠르게 놀렸다. 음핵이 꼬집히는 동시에 젖꼭지를 빨고 가슴을 뭉개는 손짓이 선연했다.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손이 목선을 쓸어내렸고 다시 튀어나온 손이 옆구리를 간질였다.
몽롱해진 머릿속을 누군가 휘휘 젓는 것 같았다. 아프게 깨물린 유두에 신음이 터지고 목을 느긋하게 핥아 내리는 혀끝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와중에도 잡아먹힐 거란 두려움보다 사랑받고 있다는 희열이 차오르곤 했다.
“하으응! 하아…….”
짙어진 신음과 함께 레이라의 몸이 휙 돌아갔다. 나트하의 단단한 상체에 말랑한 가슴이 뭉개졌다.
허리를 세우고 있던 나트하가 에틸의 손짓에 등을 기대 누웠다. 발갛게 물이 오른 레이라의 얼굴을 끌어당긴 나트하가 그녀의 입술을 살살 빨아 당겼다. 느릿하게 핥아지고 쪽쪽 빨리고 깨물린 입술이 앙칼지게 그의 입술을 덮어 왔다.
에틸은 나트하의 목을 끌어당겨 거칠게 키스를 퍼붓는 레이라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가 그녀의 등에 입을 맞추며 엉덩이를 주물렀다. 끈적하게 배어 나온 애액이 만져지자 손가락에 그것을 듬뿍 묻힌 에틸이 그녀의 안을 살살 파고들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으으응, 흐응!”
레이라는 아니라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으나 영 신빙성이 없는 몸짓이었다. 한꺼번에 에틸의 손가락 두 개를 잡아먹은 그녀의 밀지에서 애액이 톡톡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발긋하고 통통한 엉덩이 사이로 잡아먹히고 있는 손가락을 흐뭇하게 보던 에틸이 입술을 내렸다. 곱게 주름진 곳을 핥고 질 벽을 문지르고 음핵을 힘주어 누르며 둥글게 굴렸다.
“으으응, 으응! 흐응.”
찹찹찹, 손가락이 빠르게 드나드는 소리에 레이라의 의식이 다시 몽롱해졌다.
느릿해진 그녀의 혀끝에 제 혀를 휘감아 빨아 당긴 나트하가 레이라의 유두를 꼬집었다.
강렬한 자극에 레이라는 입술을 떼어 냈다.
서운할 법도 한데 나트하는 그저 예쁘게 웃음 지었다. 그는 붉어진 입술을 문지르며 레이라의 몸을 꽉 그러안았다.
“레이라.”
입이 다디달았다. 소중한 것을 내뱉듯 망설이던 나트하의 입술이 레이라의 턱이며 목 주위를 서성거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위아래 할 것 없이 온몸에서 나는 것 같았다. 잔뜩 풀려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는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고 미약하게 차오르던 민망함은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두 남자는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저를 표현하고 있었다. 분명 애정이 가득 담긴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뒷덜미가 서늘하기도 했다.
빠르고 거칠어진 손가락이 그녀의 정점을 콱콱 짓누르며 질 벽을 긁었다. 혀끝에 힘을 주고 그녀의 엉덩이를 드나드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꼬집히고 긁히는 유두는 아릿아릿했고 문질러지고 툭툭 퉁겨지는 클리토리스가 간질간질했다.
“흐아아앙!”
분수처럼 터진 절정에 흠뻑 젖어 버린 나트하의 물건이 꺼덕꺼덕 움직이며 투명한 물방울을 매달았다.
나른하게 웃으며 입술을 문지른 에틸이 그녀의 엉덩이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미끌미끌해진 손가락 두 개를 홀랑 잡아먹은 엉덩이가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에틸이 손가락을 세 개, 네 개로 늘려 갔다.
몸을 떨며 나트하에게 칭얼거리듯 키스를 재촉하던 레이라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 이거 참.”
색스럽게 짙어진 웃음을 흘리던 에틸이 레이라의 엉덩이를 받쳐 잡고 휙 들어 올렸다.
“원하십니까, 레이라?”
“꺄앗! 하, 흐으.”
놀란 듯 멈칫거리던 레이라의 엉덩이가 다시 살랑거리며 답을 대신했다.
에틸은 입맛을 다시며 나트하의 물건 위로 그녀의 엉덩이를 내리눌렀다. 박자에 맞춰 제 허리를 레이라에게 착 밀착한 나트하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흐윽.”
“아앙!”
순식간에 파고들어 자궁구에 닿은 귀두가 저를 씹어 버릴 것처럼 조여드는 내벽에 몸을 연신 움찔거렸다.
고개를 젖히며 앙칼진 신음을 뱉어 낸 레이라는 나트하의 탄탄한 가슴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엉덩이를 돌리고 들썩이는 몸짓은 서큐버스 못지않게 색스러웠다.
“흐으응! 으응……. 하앙.”
“하…….”
그녀의 반응에 허탈하게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가슴을 매만지며 그녀의 뒤로 자리를 잡았다.
“망설일 필요는 없겠군요.”
그러나 나긋나긋 풀려 있던 구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인상을 작게 구긴 에틸이 다시 제 손가락을 문질렀다. 질척하게 젖은 구멍은 금세 에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발딱 서 있는 레이라의 등을 꾹 누른 그에게 맞춰 나트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트하는 제 엉덩이 아래로 베게 하나를 밀어 넣으며 허리를 살살 튕겼다. 그는 그 짧은 움직임에도 자극을 느끼는지 신음을 흘리며 움찔대는 레이라를 예쁘다며 쓰다듬었다. 또 야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입술을 쪽쪽 대기도 했다.
꽉 닫혀 있던 것이 무색하게 몸을 활짝 열어 준 구멍에 손가락을 치받던 에틸이 제 것에 향유를 들이부었다. 번들번들해진 남근을 문질러 향유를 골고루 펴 바른 그가 레이라의 엉덩이에 제 것을 가져다 댔다.
“하아……. 에틸, 으응, 무서운데…….”
“쉬이, 괜찮을 겁니다.”
말은 에틸에게서 나왔고 쓰다듬은 나트하에게서 느껴졌다. 뭉실뭉실한 구름 위를 노니는 것처럼 등을 얌전히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거짓말처럼 힘이 빠진 엉덩이에 제 것을 꾹 밀어 넣은 에틸이 아미를 찌푸렸다.
여전히 좁았다.
요망하게 저를 홀리며 낯을 바꾸는 레이라의 몸은 신기할 정도였다. 아플 만큼 조이면서도 서서히 오물거리며 제 것을 잡아먹는 광경은 살이 떨리도록 야릇했다.
“욕심은, 후, 많아서는.”
“하.”
“아앙!”
서서히 안을 파고드는 에틸의 남근에 레이라는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나로도 벅찬 크기의 음경이 두 개나 제 안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은 이미 다짐했음에도 끔찍했고 버거웠으며 또 무서웠다.
이제는 살살 쓰다듬어줘도 떨리는 레이라의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꽉 그러안은 나트하가 제 것을 반쯤 빼냈다.
“흐윽, 아아앙!”
“흣.”
“윽.”
뭉개 버릴 것처럼 거센 압력이 옅어지자마자 허리를 세게 들이민 에틸이 이를 악물었다.
나트하는 귀두가 뽑힐 것 같은 충격적인 쾌감을 느끼며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질 벽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몸을 한계까지 들이민 나트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레이라를 꽉 그러안았다.
두근두근, 아니 펄떡거리는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펑펑 터트린 레이라는 어떻게든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빠져 버린 허리는 제 말을 듣질 않았다. 가득 피어오른 쾌감은 고통까지 게걸스레 집어삼키며 황홀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몸이 두 갈래로 갈라짐과 동시에 껍질을 벗고 새로이 태어난 것 같은 희한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한계까지 자지를 처박고, 몸을 떨어 대는 감각은……. 황홀했다. 레이라의 입꼬리가 사르르 올라갔다.
그녀는 눈앞에 일렁이는 불꽃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더 안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고만 싶었다.
에틸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쾌감이 존재하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것은 나트하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자는 몸을 되는대로 치받으면서도 서로 배에 힘을 꽉 주고 절정을 미루고 있었다.
조금 더, 미칠 것 같은 이 쾌감을…….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두 남자가 번갈아 가며 움직이는 탓에 더 요란하게 느껴지는 마찰음이 쉴 새 없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계까지 다다른 절정감에 점점 빨라지는 몸놀림은 레이라가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감전된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며 절정에 달해 버린 그녀 덕분에 두 남자의 잇새로 꾹 참고 있던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으윽, 으응!”
“하악.”
“흐으.”
동시에 터져 나온 정액이 뜨거운 물총처럼 내벽을 사납게 두드렸다.
욕심이 어찌나 많은지 자지 두 개를 꼭꼭 물어 씹으며 정액을 꿀떡꿀떡 받아 삼킨 음부가 재촉하듯 몸을 떨었다.
유난히 긴 절정에 미처 작아지지 못한 채 주어진 자극을 날름날름 받아 삼킨 두 개의 음경이 다시 크기를 키워갔다. 얇은 벽 사이로 성을 내며 몸을 키우는 두 개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조금 숨이 편하게 쉬어지려는 찰나, 흐리게 풀려 버린 눈을 홉뜬 레이라는 다시금 제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두 개의 살덩이를 느꼈다. 그녀는 질린 낯으로 나트하의 어깨를 짚으며 도망치려 했다.
꽉 붙잡힌 허리가 다시 에틸의 샅으로 끌려갔다.
“레이라, 아직, 부족하잖습니까.”
“흐으, 아니! 그, 그만! 하응!”
싫다고 버겁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레이라의 몸은 기다렸다는 듯 에틸의 것을 빨아 당겼다.
“후윽.”
“하읏.”
“아앗! 하으, 으응!”
쉴 새 없이 조여드는 내부에 에틸과 나트하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에틸은 안 되겠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상체를 세웠다.
엉덩이를 에틸에게 딱 붙이게 된 레이라는 도망치다 잡힌 도둑처럼 몸을 흠칫거렸다.
결국,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그들이 두 번 더 사정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숨도 못 쉴 만큼 차오른 쾌감은 불어나고 또 불어나 흘러넘치도록 가득했다.
“하아, 하악, 하아.”
공기를 가득 채워 넣은 풍선처럼 부푼 가슴을 꽉 틀어쥔 에틸은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나트하도 마찬가지였다.
에틸이 제 것을 느릿하게 빼내며 레이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성기를 따라 몽글몽글 새어 나온 정액이 시트 위로 멍울져 떨어졌다.
이미 새어 나오던 나트하의 정액까지 흘러내린 탓에 시트가 흥건히 젖어 들었다.
나트하는 반짝이는 금빛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는 레이라의 질 안으로 다시 파고들기 시작한 에틸의 성기가 반쯤 사라졌을 때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흐으으으…….”
“후, 어떻게 된 게, 아직도……. 이렇게 좁습니까?”
“아직 부족하신가 봐요.”
레이라는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낮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음성에 억울하다 토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은 몸과 내부를 파고드는 성기에 아래를 꽉 조이고만 있었다.
긴장이 가득히 뭉친 그녀의 몸은 제 눈앞으로 자리를 잡은 나트하의 움직임에 움찔거리며 제정신을 차렸다.
정액과 애액이 묻어 번들거리지만, 퍽 어여쁜 성기가 레이라의 시야에 닿아 왔다.
꿀꺽, 야릇하게 들린 소리에 에틸이 피식 웃으며 레이라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였다.
“나트하의 자지가 먹고 싶습니까?”
“아, ……흐응!”
“빨고 싶습니까?”
“흐읏, 흐으……. 응. 아앙! 먹고 싶어.”
흐리게 가라앉은 붉은 눈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던 나트하가 그녀의 유두를 입에 물었다.
이거 어쩌나. 선수를 뺏긴 것 같은데, 아쉽습니까? 키득거리는 에틸의 음성에 레이라는 귀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낮게 가라앉아 쾌락에 헐떡이는 목소리가 미칠 것처럼 좋았다. 레이라는 가슴이 짜르르 울리는 찡한 감각을 느꼈다.
발딱 솟은 유두를 입 안에 넣어 굴리고 할짝대던 나트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쭉 뻗은 허리가 낭창하게 휘어진 모양새와 톡 도드라진 가슴의 모양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물고 빨았다.
곡선이 유려한 그림을 야릇하게 그려 놓는다면, 이럴 수 있을까?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야한 모습은 영상 구에 저장을 해 놓고 싶을 정도였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유두를 날름거리던 나트하가 레이라의 남은 한쪽 가슴을 손에 쥐었다.
풍만하게 느껴지는 가슴이 손에 착 달라붙듯 감겨 오는 것이 기꺼웠다. 아프지 않게 유두를 깨문 나트하가 고개를 들어 레이라의 입술을 찾았다.
레이라는 어두워진 짐승의 눈빛을 한 나트하의 금빛 눈동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눈빛은 마주할 때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고 뿌듯할 정도의 만족감을 일게 했다.
“으으응, 으응!”
척척척, 레이라는 밀지에 빠르게 처박히는 에틸의 성기에 몸을 달달 떨었다. 동시에 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는 나트하의 손길에 다 뱉어 내지도 못할 신음을 터트렸다.
다리가 달달 떨렸고 한계까지 꺾인 허리는 감각이 없었다. 머리가 녹아 버릴 것 같은 키스는 마냥 좋았고 에틸의 허리 짓은 만족스러웠다. 저를 만지고 쓰다듬는 나트하의 손짓은 흥분을 더 돋웠고 뜨거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까지 미칠 듯이 좋았다.
입술을 떨어트린 나트하가 제 것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에틸이 끌어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주었다.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지려던 레이라가 팔에 힘을 주고 버티며 나트하의 음경을 입에 물었다.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야릇한 냄새가 진득하게 밴 예쁜 성기에 입을 맞추고 입을 크게 벌려 귀두를 삼켰다.
“으윽.”
“흐응, 우웁…….”
“맛있습니까? 자지를, 후……. 아래위로 먹는 것도 처음이겠군요.”
부드럽게 열린 입구를 문지르듯 열고 들어간 에틸이 입꼬리를 삐뚜름히 올렸다. 뭉근하게 내부를 문지르고 레이라의 스팟을 집요하게 찔러 오는 허리 짓이 황홀했다. 흠칫흠칫 몸을 떨던 레이라가 나트하의 음경을 세게 빨아들였다.
“……하…….”
거칠게 흔들리는 몸짓에 목구멍까지 처박힌 나트하의 남근이 레이라의 숨을 꽉 틀어막았다. 순간, 절정에 달한 레이라가 몸에 힘을 잔뜩 주고 풀기를 반복했다.
떨리는 몸은 둘째 치고 목젖이 조여들자 나트하의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떨렸다. 질 벽이 주는 아찔한 자극에 에틸은 배에 힘을 꽉 주고 허리를 튕겼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부드러이 닦아 주던 나트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슬쩍 물렸다. 곧바로 따라오는 레이라의 얼굴에 에틸이 한 걸음 앞서 당겨 오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치겠네.”
절정에 달해 달달 떨리는 몸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맛있다는 듯 나트하의 성기를 물고 있는 레이라.
그 모습은 에틸의 가슴에 묘한 감정을 남겨 왔다. 불쾌한 듯하면서 귀엽기도 하고 허탈한 듯하면서도 야해 빠진 모습이 마냥 어여뻐 보이기도 했다.
쾅쾅, 못을 두드려 박듯 제 것을 그녀에게 박아 넣으면서도 저 작은 입 안을 드나드는 나트하의 것이 부러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더 거칠게 몸을 움직여 레이라의 행동을 돕고 싶기도 했다.
“하, 젠장.”
두 남자에게서 동시에 터진 말이었다.
나트하는 축축하고 뜨거운 자극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과하게 자극적인 쾌감에 꼬리뼈까지 짜릿짜릿 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른거리는 그의 시야에 눈물을 한가득 매달면서도 제 것을 좋다고 물고 있는 레이라가 잡혀 왔다.
예뻤다.
나트하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곱게 쓸어 넘겨 주었다.
예쁘고, 야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아프지는 않을까 괴롭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다가도, 더 깊게 물고 더 세게 빨아 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으응, 으으응.”
익어 버리는 것은 아닐지 염려될 정도로 뜨거운 입 안에 홧홧해진 성기의 살갗이 진득하게 몸을 파묻었다.
나트하가 출렁이는 레이라의 가슴을 쥐고 유두를 꼬집었다. 질세라 에틸의 손도 반대쪽 유두를 꼬집었다. 살금살금 비틀고 쥐는 가느다랗고 다정한 손길과 앙칼진 짐승처럼 과격한 손길이 동시에 닿아 왔다.
레이라는 몸을 달달 떨며 글썽거리는 눈을 들어 나트하를 올려다보았다.
간이고 쓸개고 몽땅 뽑아다 줘도 모자랄 것처럼 아스라한 눈빛은 나트하의 심장에 콱 틀어박혔다. 간드러지게 흘러나오는 콧소리에 귓가가 먹먹했다. 음란한 혀끝에 허리가 떨려 왔고 아찔한 표정에 가슴이 아려 왔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자극은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눈을 질끈 감은 나트하는 그녀의 뒷덜미를 얌전히 끌어당겼다.
에틸이 피치를 올리며 자궁구를 쿵쿵 두드렸다. 펄떡거리는 레이라의 몸짓이 이어질수록 두 남자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 ✲ ✲
정확히 세 시간을 꽉 채운 에틸은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걸을 때마다 철그렁거리는 쇳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귀에 거슬렸다. 울먹이며 다치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레이라의 인사가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만 같아 마음이 유난히도 무거웠다. 생각 같아서는 주머니에 넣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고 싶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뱉은 에틸은 나트하가 준 마법 구를 만지작거리며 북쪽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 ✲ ✲
울먹이는 레이라를 달래는 것은 나트하의 몫이었다.
그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너른 품에 그녀를 그러안았다. 등을 살살 쓰다듬고 붉어진 눈가를 매만지며 달콤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틸은, 아무 데도 다치지 않고 멀쩡히 돌아올 테니까요.”
“…….”
“아니면, 제가 갈 걸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그건…….”
작게 웃은 나트하가 다정히 등을 쓰다듬어 주던 손을 들어 레이라의 뺨을 닦아 주었다. 이제는 눈물이 마른 뺨에 왜 눈물 자국이 보이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아직도 촉촉하게 젖은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이것으로 그녀의 시름을 조금 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트하가 갔다면, 나트하를 걱정하고 있었을 거예요. 에틸이라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붕어처럼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입술을 쪽쪽 부딪친 나트하가 해사하게 웃었다.
환하게 핀 금빛 꽃이 만발한 것 같은 광경에 눈을 홉뜬 레이라는 제 눈이 무거워 잘 떠지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지, 지금 이 꼴로 안겨 있었던 건가?’
레이라는 이미 다 보여 준 뒤인데도 황급히 눈을 가렸다. 그녀는 나트하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기까지 했다.
갑자기 뭐 하는 걸까 생각하던 나트하는 눈을 가린 자그마한 손에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아, 귀여워라.’
나트하는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몰래 웃었다.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쥐어 내리며 차가운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힘 빠진 손이 수건을 쥐며 축 늘어졌다.
처진 어깨와 시무룩한 표정에 웃지 않으려 다시 입술을 깨문 나트하가 레이라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눈가를 살살 눌러 주었다.
“예쁜 눈이 이렇게 부을 정도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에틸도 알고 있으니 더 조심하겠죠. 적당히 상황이 정리되면 연락하라고 마법 구를 들려 보냈으니까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해요.”
“……네에.”
“상황이 영 위험하면 저나 레사가 바로 투입될 테니까, 미리 알고 있어야 해요. 레이라.”
“…….”
그는 힘 빠진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측은한 눈을 했다. 절로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게 된 나트하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얌전히 제게 몸을 맡기고 축 늘어진 레이라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트하는 감동이 차오르는 가슴에 손을 얹다 레이라의 몸을 꽉 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포옥 안겨 오는 자그마한 몸도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귀여운 정수리에 뺨을 비비던 그가 그녀의 등을 다시 쓰다듬었다.
“나트하는 왜 이렇게 다정해요?”
“음…….”
“언제부터 이렇게 다정했어요?”
“누나들 탓이 커요. 남자는 무조건 조신해야 한다고 강하게 훈육 받았거든요. 어릴 때 웃지 않고 있으면 누나들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요. 여자 말에 무조건 네네, 알겠습니다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인상을 쓰면 얼마나 드세게 험한 말을 하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레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봐야 반쯤 부릅뜬 붕어눈이었지만.
“……누나들이 무서웠겠어요.”
“지금도 무서워요. 덕분에 여자에 대한 환상 같은 건 꿈도 못 꿨죠. 어릴 때는 여자들은 원래 누나들처럼 드세고 험악한 줄 알았어요.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행동이 굳어졌고요.”
“아…….”
‘그래서 여자들한테 줄줄이 철벽을 치는구나.’
레이라는 묘하게 납득한 채 고개를 주억였다.
‘나트하의 누나들을 만나게 되면 사근사근하게 굴어야겠다. 무서운 분들이셨어.’
미래의 생각을 떠올리던 레이라의 낯이 희게 질렸다. 당당하게 그분들을 뵐 자신이 없는 탓이었다. 나쁜 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 어떡하나. 당장 내 아들, 동생 곁에서 떨어지라 하시면 어쩌나.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트하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살포시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것 같았다.
“누나들을 걱정하는 거면, 괜찮아요. 음, 조금 특이한 분들이라 제가 첩으로 들어가든 정부로 들어가든 상관 않으실 분들이거든요. 아마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신기해하실 거예요.”
“……그래도요.”
“부모님은 오히려 반기실 거예요. 혹시 남자를 좋아하느냐 물으신 적도 있거든요. 레사를 좋아하는 거면 일찌감치 포기하라고까지 하신 걸요.”
당황스러운지 입을 슬쩍 벌린 레이라가 나트하의 표정을 살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는 멀리하고, 얼마나 레사랑 붙어 다녔으면 저런 말을 들었을까…….’
“사실, 저는 누나들 손에 키워진 거나 마찬가지라 일찌감치 가주가 되는 것은 거절했었고, 절대 결혼은 하지 않겠다 선언한 적도 있어요. 아마 제 상대가 레이라라는 것을 들으시면 당장 금덩어리를 안고 찾아오실지도 몰라요.”
민망한 듯 웃는 나트하의 웃음에 레이라는 제 귀를 문질렀다. 그녀는 환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단단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제 가족들에 대해서는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부모님께선, 에틸보다 더 남자답던 누나들 덕분에 귀여운 며느리가 생겼다고 좋아하실 분들이시고, 누나들은 징그러운 남동생보다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다며 좋아하실 거예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옅게 웃은 레이라의 미소 뒤로 아직도 걱정이 묻어났다. 나트하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공작 각하께서 저를 아주 좋아하시던데. 아마 저희 저택으로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시지 않았을까요?”
“……아, 그러네요.”
“반대하실 거라면 진즉 하셨을 거예요.”
토닥토닥,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손길에 눈꺼풀이 더 무거워지려 했다.
“피곤한가요?”
“나트하가 안아 주니까 따뜻하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해서…….”
“마음에 들어 해 주니까 좋아요. 평생 안고만 있으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늘 안아 줄 테니, 제 품에 기대서 잠들어 주실래요?”
“…….”
갑자기 얻어맞은 직구에 볼을 화르륵 붉힌 레이라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입을 가리고 큭큭 웃은 나트하가 발개진 볼에 입술을 쪽쪽 붙이며 말을 이었다.
“음, 정말 그러면 에틸이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이틀이나 3일에 한 번씩만 그럴까요?”
퍽 진지하다는 것처럼 입술 위에 기다란 검지를 올려놓은 채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트하의 표정이 귀여웠다.
레이라는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려야 했다. 그녀는 큼큼 헛기침하다 그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으음……. 이것도, 좋네요.”
저가 레이라의 볼에 입을 맞출 때는 괜찮더니, 그녀가 나트하의 볼에 입을 맞추자 그의 볼이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는 나트하의 눈에 제 눈을 맞추려 레이라가 그의 볼을 딱 붙잡아 고정했다.
움찔 떨린 금빛 눈동자가 측은하게 빛났다.
“나트하, 너무 귀여워요!”
꺅 소리 지른 레이라가 나트하의 얼굴을 껴안았다. 그녀는 그치지 않고 그의 목선에 얼굴을 문지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트하는 저를 귀여워하는 레이라를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에 저도 함께 웃어 버렸다. 행복하고 따스해진 분위기에 나트하의 마음이 말랑말랑 풀려 버린 탓이었다. 그는 그녀가 이리 사랑스러운데 저를 좀 귀여워하면 어떤가 싶은 생각을 했다.
✲ ✲ ✲
친히 나서서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을 족치겠다고 마음먹은 피오니안은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린 채로 베르를 찾아 나섰다. 사실 그가 일으킨 일이 아닌 것 같았으나, 제일 만만한 것이 베르였고 이유를 알 만한 인물도 베르였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메르세데스가 근처에 머물며 여느 날처럼 레사를 따라다니던 베르는 피오니안에게 뒷덜미를 콱 잡혔다.
“왜, 왜 이래!”
“너, 지금 북쪽에 나타난 마수 떼와 상관이 있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없지! 내가 왜 내 새끼들을 떼거리로 사지에 떠밀겠냐! 득 볼 것도 없는데!”
‘그것도 그렇군.’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은 베르를 무시한 채 몰래 납득하던 피오니안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대체 왜 나타난 것이지?”
“몰라, 그것들은 내 아이들도 아니니까. 어디 박혀서 저들끼리 놀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 같던데.”
“……장막이 찢겼군.”
화들짝 놀란 어깨가 어둠 속으로 사르르 숨어 들어갔다.
악마들이 숨어 살던 마계와 연결된 게이트의 장막이 찢겼다면, 마계에 득시글거리던 마수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일은 베르가 저지른 일이나 다름없었다. 또 피오니안은 직접 그 장막을 봉인하러 가야 했고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었다.
“너, 마계 관리는 누구에게 시키고 있지?”
“…….”
“혹시 전부 내팽개치고 혼자 돌아다니는 건가?”
남의 일이라는 척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이리저리 바쁘게 돌리던 베르가 꽉 잡힌 멱살을 내려다보며 치를 떨었다. 제가 그림자가 되든 뭐가 되든 피오니안은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는 단박에 저를 붙잡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망치려는 노력이 매번 헛수고가 될 때마다 허탈했다.
“알았어! 전부 살펴보라고 할게! 당장 시킬게!”
“유지 보수를 하지 않은 네 탓이군. 이따위로 살 텐가?”
“…….”
“후……. 상실감을 느낄 네 기분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하던 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면서, 네 할 일까지 내팽개친다면 나는 너를 이곳에 둘 수 없다.”
“알았어. 확실히 처리할게. 이번만 부탁해.”
자존심 없는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용서를 구하던 베르가 냉큼 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언제 이만큼이나 데리고 왔었는지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검은 마수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피오니안의 눈치를 살피며 베르의 명을 기다렸다.
‘인간형이 열둘이나 되는군.’
피오니안은 와중에도 마수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는 베르가 명을 확실히 전하는지 꼼꼼하게 살핀 뒤 골치 아프다는 듯이 제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다 전달했어. 전부 확인하려면 한 2주 정도 걸릴 거야.”
“당당하게 말하지 마라. 여태 일은 하지 않고 사고만 치고 다닌 주제에.”
한숨을 내쉰 피오니안이 제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베르를 타박했다.
“……그래도 몰랐던 일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인간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알고 있나?”
“마수들도 그만큼 죽을 텐데 뭘.”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베르를 향해 피오니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려놓았다.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이 인간과 악마의 차이일 텐데, 때려 봐야 제 손만 아플 것이 빤했다.
세상에 단 한 명, 피오니안만이 인간과 마수의 목숨 값이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두 종족이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별이 되어 버릴 생명들이 한탄스러웠다.
제 아이들을 전부 돌려보낸 베르가 피오니안을 향해 말했다.
“너무 화내고 착잡해 하지는 마.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나야 했을 일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 장막이 찢긴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더라. 내가 관리하지 않은 곳 중 하나야.”
“그렇다면 범위를 늘릴 때가 되었군.”
일거리를 늘리겠다 선언한 피오니안에게 인상을 쓰던 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반항해도 소용없고 시키는 대로 해야 뒷일이 편해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것이 덜 맞고 욕을 덜 먹을 바른 길이었다.
“알았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또 뭔데?”
“건방지군.”
“무엇입니까, 피오니안 님.”
정중함을 과장되게 표현한 베르가 한쪽 손을 우아하게 뻗으며 제 다리 한쪽을 뒤로 물렸다.
기가 찬다는 듯이 헛숨을 뱉은 피오니안이 주먹을 슬금슬금 쥐었다. 그것을 보며 한 발 뒤로 물러선 베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후……. 너는 레사 메르세데스에게 복수하고 싶어 일을 벌였다 했다. 그런데 왜 그자의 가족을 죽이지 않고 화살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린 것이지?”
“간단하지. 인간들은 제 부모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든. 늘 생각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어. 그러니 어차피 일어날 일을 빨리 일어나게 한다고 해서 그 자식이 이만큼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어.”
“더 고통스러운 쪽을 골랐다 이건가?”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이던 베르는 피오니안의 눈빛이 퍽 흉흉해졌다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아, 사랑한다고 했지.’
괜히 말을 술술 읊었다고 생각한 베르가 난감한 얼굴로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화났어?”
“화는 진즉부터 났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피오니안은 별다른 말없이 휙 사라졌다. 아마 찢긴 장막을 보수하러 떠난 것이리라.
씁쓸하게 웃음 지은 베르는 다시 레사가 잘 보이는 허공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따라 저 나쁜 놈을 지켜보는 것이 지겨웠다.
✲ ✲ ✲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를 넘은 에틸은 마나를 휘감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짙은 피 냄새가 낭자한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날 듯이 가벼웠다.
집채만 한 오우거.
나무보다 키가 큰 오크.
땍땍거리는 이름 모를 마수까지, 에틸은 그들을 쉽게도 베어 넘겼다.
간단히 휘두르는 칼날에 찢긴 마수를 짓밟으며 그가 도착한 곳은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처참하리만치 잔혹하게 살해된 인간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도시.
아니, 도시였던 곳. 건물은 이미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고 길가엔 말라붙은 피가 낭자했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운 곳에 시체에서 나는 썩은 내가 가득할 정도이니 그 처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전부 먹지 않고, 한입 또는 두 입씩 깨작깨작 먹어 치워 죽이는 걸까.’
에틸은 아무래도 마수들의 성질이 워낙 고약해서 이거나, 그들의 입맛이 아주 까다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걷고 뛰는 동안 마주친 마수들을 단칼에 베어 넘기며 한들한들 산책하듯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느린 대형 종, 그것이 에틸의 첫 번째 표적이었다.
✲ ✲ ✲
친위대를 몽땅 끌어모아 나타난 디터 메르세데스는 에틸 페르세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나 때가 다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니 점점 찌푸려지는 인상은 험악해져갔다. 심지어 꽉 틀어쥔 그의 주먹에는 푸른색 마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라 하지 않아도 올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을 한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메르세데스 공작이 잇새로 짜증을 내뱉었다. 그는 우르르 몰려오는 검은 몬스터들을 마주할 때마다 점점 더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전부 검은빛을 띤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부 기이한 문장들을 문신처럼 온몸에 빼곡하게 새기고 있어 멀리서 보면 그저 검은색으로 보였다.
저렇게 문신을 하고 나타난 몬스터들은 그렇지 않은 몬스터들보다 힘이 훨씬 셌고 드셌다. 그들은 마치 광폭화라도 시작한 것처럼 벌게진 눈으로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무조건 입으로 집어넣고 씹어 뱉었다. 상처를 입혀도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 들었다.
산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들은 곧 성벽에 도달할 것 같았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폭약과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공성용 투석기, 발리스타를 줄줄이 바라보며 장전 준비를 명했다.
불을 지핀 화롯가에 모여든 기사들이 포탄과 폭약에 불을 댕길 준비를 했다. 거대한 투석기는 모양새가 조악해 보였으나 거대한 바윗돌을 척척 얹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발리스타에 걸어 놓은 거대한 장창이 뾰족한 날을 번뜩이며 대기했다.
두꺼운 성벽 위에 발을 딛고 선 그가 마나를 실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제 막 명령을 내리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메르세데스 공작은 민망한 헛숨을 뱉어야 했다. 멀리 다가오던 몬스터 무리가 픽픽 쓰러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성벽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던 몬스터들이 방향을 틀어 한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너른 벌판을 활용해 넓게 벌어져 있던 대형이 한 곳으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광경은…….
절로 드는 선득함에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메르세데스 공작은 커다랗게 피어나는 검은 마나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에틸 페르세나.”
폭탄을 맞은 것처럼 펑펑 터져 죽는 몬스터.
길게 늘인 검은 마나 소드에 잘리다 못해 갈아엎어지고 있는 몬스터.
검게 물든 발에 밟혀 고꾸라지는 몬스터까지. 단신으로 거대한 몬스터 무리를 척살하고 있는 남자는, 누가 뭐라 해도 에틸 페르세나였다.
“허, 정말……. 괴물이군.”
메르세데스 공작은 듣기만 했지 에틸이 싸우는 것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는 허탈한 듯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이럴 때가 아니라 저도 함께 거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 공작이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에틸이 있는 곳을 향하며 연신 감탄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에틸은 발밑에 쌓인 시체들을 지르밟고 올라 커다란 시체의 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커다란 오크와 오우거는 다리부터 베고 마나를 날려 머리를 터트렸다. 작은 몬스터들은 그저 길게 뺀 마나를 맞고 픽픽 쓰러졌으니 귀찮을 것도 없었다.
대형 종이라 불리는 몬스터 여섯 마리는 이미 오는 길에 죽여 버린 참이었다. 지금 이곳에 검은 들판처럼 자리한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을 죽이고 정찰을 한 번 하고 나면 이번 일은 끝날 터였다.
기분이 약간 좋아진 탓인지, 그의 칼날이 더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바스타드 소드를 쥔 에틸의 손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뾰족뾰족하게 돋아난 마나가 얇은 막을 생성하며 칼날을 휘감았다. 톱날처럼 흉흉하게 일어선 마나를 실은 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검에서 나는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파공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를 흩뿌리며 눈을 홉뜨고 죽은 몬스터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가느다란 마나가 실처럼 뻗어 나가기도 했고, 가시가 돋친 칼날이 잔인하게 살갗을 베고 뼈를 가르기도 했다. 또 기다랗게 늘린 칼날에 다리가 잘린 몬스터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했다. 눈이 벌게진 몬스터들은 겁도 없이 에틸에게 달려들었고 하나같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에틸을 도우려 내려온 메르세데스 공작은 입을 떡 벌린 채 멀거니 에틸을 응시했다.
몬스터들은 공작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에게만 몰려들고 있었다.
‘몬스터를 유혹하는 향이라도 뿌린 건가.’
표정 없는 차가운 얼굴에 검고 깊은 악이 자리한 동공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작은 빛에도 반짝이는 머리칼은 피를 흠뻑 머금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핏방울을 흩뿌렸다. 핏방울이 튄 얼굴은 수려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누가 저 자를 마왕이라 일컫는다면 단박에 그렇구나 하고 이해할 정도였다.
“……대체 공녀는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알아본 것이지?”
베고, 찌르고, 휘둘러지는 손속 없는 칼끝은 정확하게 목표를 양단하고 찢어발겼다.
‘웃거나 찡그린 표정이었다면 두려움이 덜했을까?’
어느새 달달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던 메르세데스 공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지금 몬스터 무리보다 에틸 페르세나가 더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