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And last for a lifetime (16/26)

15. And last for a lifetime

귀여운 별빛이 총총한 밤.

에틸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트하와 레이라는 서로를 꽉 껴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을 쓰다듬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두 사람의 행동은 퍽 닮아 있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네요.”

“그러게요. 지금도 싸우는 걸까요?”

“이 시간까지 싸운다면 지칠 텐데……. 아무래도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상체를 일으킨 나트하가 긴 금발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누워서 뒹굴었는데도 엉킨 것 없이 사르르 풀어지는 머리카락이 예뻤다. 그는 무언가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예쁜 입술 사이로 커다란 숨이 뱉어지는 것에 레이라는 나트하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시간만 더 기다려요. 폐하께서 두 사람만 보내기로…….”

띠링띠링띠링. 요란하게 울리는 마법 구가 빛을 팡팡 뿌려 대며 얼른 연락을 받아 보라 성화였다. 환하게 웃은 레이라가 마법 구를 작동시켰다.

“에틸!”

-네, 레이라. 저 없이 잘 계셨습니까?

“에틸이 질투할 정도로 잘 있었어, 거긴 어때?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밥은 먹었어?”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저녁도 챙겨 먹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질투할 정도로 잘 계셨다니, 그것은 조금 슬프군요.

“쳇, 질투는 하지도 않으면서. 나보다 나트하가 에틸을 더 걱정하던걸? 방금도 자기가 가 봐야겠다면서…….”

반가움에 환해진 얼굴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뱉어 냈다. 누가 들어도 신이 잔뜩 난 목소리를 에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빙긋 웃으며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는 나트하의 표정은 에틸과 비슷했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야?”

-으음, 사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괜찮겠지만, 혹시 모를 대형종이 남아 있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아마 모레 밤쯤이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응?”

걱정해 주는 것이 좋은지 나직하게 웃는 목소리가 한참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보고 싶으니 금세 끝내고 가겠습니다. 나트하, 잘 부탁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레이라.

말 한마디에 얼굴이 새빨개진 레이라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다시 기분 좋게 웃는 웃음소리가 마법 구를 타고 새어 나왔다. 역시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던 나트하가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이 새빨개지신 것을 보니, 같은 말을 하고 싶으신가 봐요. 에틸, 안녕히 주무세요.”

“에틸! 잘 자!”

-큭, 두 분께서도 불타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빛이 뚝 끊긴 마법 구는 연락이 끊겼음을 알려 주었다.

당황스러운 낯으로 뭐? 불타는 밤? 이라며 중얼거리던 레이라는 아직도 작게 미소 지은 채 저를 끌어당기는 나트하의 품에 폭 안겼다.

“불타는 밤을 보내라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네요.”

“……거짓말. 나트하는 어째 점점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요.”

“싫은가요?”

측은함을 듬뿍 담은 눈빛이 점점 그렁그렁해졌다.

레이라는 금세 당황스러운 낯으로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볼을 감쌌다.

“왜 이렇게 귀여워요? 내 심장 어쩔 거야!”

싫을 리가 있겠냐고 말하려 했는데 속마음과 뱉어 낼 말을 거꾸로 해 버린 레이라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나트하는 그녀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귀여워하시니 좋기는 한데, 제가 레이라보다 연상이라는 것은 알고 계신 거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트하는 귀여운데.”

“예뻐해 주는 게 좋기는 해요. 조금, 착잡하긴 하지만.”

고개를 주억이던 나트하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 레이라는 부끄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난감한 기분에 아미를 찌푸리려던 나트하는 활짝 웃는 레이라의 표정에 그저 같이 웃어 버렸다.

✲ ✲ ✲

녹스 공작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 진상을 떠는 무뢰한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두터운 종이 뭉치는 둘로 나뉘어 분류되었다. 녹스 공작이 손에 쥔 것만큼이나 두꺼운 뭉치들은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지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그러나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들은 탁자 위에 자리한 금빛 접시 위에 보란 듯 놓이곤 했다.

고심에 고심을 더해 종이들을 분류하는 동안 접시 위에 쌓인 종이는 어느새 열 장 내외로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인재가 없어서야……. 쯧.”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녹스 공작이 쓰레기 더미를 보좌관에게 넘기며 태우라 지시했다. 이도 저도 아니라 녹스 공작의 손에 쥐어진 한 장의 종이는 귀퉁이가 모질게 구겨진 모양새였다. 공작은 아직도 제 손에서 서류를 놓지 못하고 꽉 틀어쥐고 있었다.

레사 메르세데스, 26세.

메르세데스 공작가의 차기 가주.

21세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고 같은 해에 황실 기사단장이 됨. 흑발에 청안을 가진 남자다운 미남. (뒷장에 초상화 첨부.)

레이라 녹스 공녀와 2년 동안 연애, 현재 이별 후 미혼.

녹스 공작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제 딸아이의 이름이 거론된 마지막 부분이었다. 당장 지워 없애거나 태워 버리고 싶은 제 딸아이의 과거. 이처럼 조사를 명목으로 받아 온 종이 쪼가리에 당당하게 적힌 글자들이 어찌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녹스 공작은 인상을 왈칵 구겼다.

“후…….”

레이라의 신랑감을 찾는다는 목적으로 조금 전까지 녹스 공작이 들여다보던 서류들은 모두 제국 내에 존재하는 19세부터 26세까지의 미혼 남성들의 정보였다.

그는 딸아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공작위를 에틸에게 주거나, 방계 사람을 구해 보려 했다. 그러나 레이라에게 걸린 저주를 들은 녹스 공작은 공작위를 레이라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판단했다. 공작에게 남편이 둘이 됐든 셋이 되었든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녹스 공작은 레사 메르세데스의 온갖 신상 정보가 적힌 종이를 한참이나 읽었다. 그는 곧 악귀 같은 표정으로 그것을 공처럼 구겨 멀리 집어 던졌다. 이제야 좀 후련하다는 표정이 된 그가 금박이 입혀진 접시 위에 놓인 종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녹스 공작은 맨 위에 놓인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나트하 러스티. 26세.

러스티가의 장남이나, 작위를 포기.

누이가 셋 있으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람. 성품이 아주 올바르고 다정하다는 평이 자자함.

어릴 적부터 마법에 대해 박식했으며 현재 마검사로 활동 중.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을 계속 거절했으나 21세, 레사 메르세데스와 함께 부단장으로 입단. (그와는 절친한 친우.)

금발에 금안을 가졌으며 대단한 미남. (뒷장에 초상화 첨부.) 단 한 번도 연애 경력이 없으나 특이한 성벽을 가진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됨.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은 녹스 공작은 나트하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제 서랍 안쪽에 고이 모셔 두었다.

두 번째로 집은 종이는 에틸의 신상이 적힌 것이었다.

에틸 페르세나. 25세.

평민이었으나 소드 마스터가 된 후 백작위를 수여 받음.

녹스 공녀가 빈민촌에서 구제해 온 인재라는 소문. 녹스 공녀와 사이가 돈독함.

누구에게나 차갑고 냉소적이나 녹스 공녀 앞에서는 잘 웃는다는 소문.

제국 제일 검이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을 만큼 대단한 무위와 마나를 가졌다는 소문. 남겨진 가족이 전혀 없다는 소문.

은발에 짙은 청안을 가진 서늘한 미남. (뒷장에 초상화 첨부.)

연애 경력 확인된 바 없음.

소문투성이로 만들어진 서류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만들어 냈는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로 맞는 소문들을 조합했다는 것을 높이 사 줘야 하는지, 이딴 것도 정보라고 가져온 정보 길드를 족쳐야 하는지 헛갈렸다. 황당한 표정을 짓던 녹스 공작은 역시 그 서류도 제 서랍 안쪽에 고이 모셔 두었다.

이미 두 잘난 남자들은 제 딸아이에게 폭 빠진 이들이었다. 성격, 외모, 능력, 재력까지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두루 갖춘 것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녹스 공작은 요즘 나트하와 에틸 생각만 하면 입가가 흐물흐물 풀리곤 했다.

“이제 새로운 남자겠군.”

으음, 기대감 어린 콧소리를 낸 녹스 공작이 세 번째 종이를 들어 올렸다.

카르도베르 R. 파이어. 23세.

✲ ✲ ✲

진주색 꽃문양 공단과 크림색 레이스를 겹쳐 만든 커튼이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거렸다. 커다란 크리스털이 끼워진 창은 반쯤 열려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을 실컷 흘려보내 주었다. 싱싱하게 핀 꽃가지 끝을 사선으로 자르던 레이라는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햇살에 반짝거리는 금발보다 더 눈부신 남자가 눈을 곱게 접으며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나트하, 심심하지 않아요?”

“전혀요.”

“으음, 휴일을 이렇게 보내기 아쉽지는 않고요?”

“네. 레이라를 보고만 있어도 좋아요.”

얼굴이 불긋해진 레이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잔가시를 다 제거해 놓은 장미꽃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푸른 꽃잎에 에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이번 출정은 꽤 많은 마수가 나타났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걸까요?”

“그건 에틸이 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에틸 대신 저나 레사가 갔다면 더 오래 걸렸겠죠.”

“음?”

“레이라는 에틸이 마수를 때려 패……. 아니, 마수를 사냥하는 걸 한 번도 못 봤겠네요.”

“네. 그것보단 마수를 한 번도 못 봤으니까요.”

고개를 주억이던 레이라는 다시 꽃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나트하의 말대로라면 에틸이 그만큼 강하다는…….’

그러고 보니 어디 멀리 출정한다고 떠나도 그는 일주일 이내로 돌아오곤 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에틸은, 음……. 비교를 어디다 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가 본 사람 중에 피오니안 님 다음으로 강할 거예요.”

“그 정도예요?”

“네. 일단 마나부터 흑색이니까요. 마나의 색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가요?”

“흑색이나 백색에 가까울수록 강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더해서 흑색에 가까울수록 공격성이 짙고 백색에 가까울수록 방어성이 좋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평소에는 관심 없던 이야기였지만 나트하의 말은 흥미로웠다.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레이라의 구미를 당겼다. 호기심에 눈을 초롱초롱 뜨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레이라가 가위를 슬쩍 내려놓는 것을 보며 나트하는 다시 눈을 접어 웃었다.

“저는 마나 색이 밝은 금색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나타난 마스터 중에서는 백색에 가장 가깝다 할 수 있죠. 만약 제가 마법사가 아닌 소드 마스터였다면, 저는 그저 조금 강한 방어형 기사였을 거예요.”

마법사가 마법을 쓸 때는 상상력과 재능 그리고 마나 양에 따라 하위 마법사와 고위 마법사로 나뉜다. 이는 마나 색과는 관계없이, 공격형이 될 수도 치유형, 방어형이 될 수도 있는 마법사 본인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소드 마스터의 마나 색은 그 색에 따라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 같은 공격 효과가 생긴다. 백색 마나는 마나 소드에 단단한 방어 마법이 생겨 막기에 적합한 방어형 소드 마스터로 분류된다. 또 흑색 마나는 마나 소드에 온갖 공격 마법이 생겨 베고 찌르고 가르는 것에 적합한 공격형 소드 마스터가 된다.

나트하의 설명은 듣기 좋았고 조목조목 이해가 잘 됐다. 기계처럼 고개를 주억이며 이야기를 듣던 레이라는 처음 알았다며 손뼉까지 쳤다.

“그럼 에틸은 검으로 마법을 쓰는 것처럼 싸울 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네. 실제로 에틸은 마나를 날려서 보내고, 길게 늘이고, 던져서 폭파하기도 해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있으면, 정말 대단하죠.”

“나트하가 소드 마스터가 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그거였군요.”

“네 제가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해도…….”

씁쓸하게 웃는 나트하의 표정에 아차 싶은 레이라는 얼른 말을 돌렸다.

“나트하가 방패를 드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검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런 말 자주 들어요.”

“음……. 성직자를 했어도 아주아주 잘했을 것 같은데.”

“그런 말도 자주 들었어요.”

약간 삐진 것 같은 나트하의 표정을 보며 레이라는 까르르 웃었다.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 ✲ ✲

레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아주 불손한 눈빛을 솔직하게 얻어맞은 녹스 공작은 그러려니 하며 허허 웃었다.

“뭐라고요?”

“크흠, 선 자리를 알아 보았…….”

“저를요?”

아주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레이라가 크리스털 잔을 톡톡 두드렸다.

“한 명은 더 있어야 하지 않느냐? 너는 워낙 사교활동을 하지 않으니, 그저 내가 먼저 알아본 것인데, 그게 그리도 기분이 언짢은 것이냐?”

“그것보다는……. 흐음.”

“이 애비가 최대한으로 네가 이야기했던 조건들은 맞췄거늘!”

일단 큰소리를 내 본 녹스 공작이 은근히 레이라의 눈치를 보며 치켜뜬 눈을 슬쩍 돌렸다. 제 딸이지만 레이라의 차가운 얼굴은 녹스 공작도 무서웠다.

“무슨 조건이요? 장남은 아니어야 하고, 장남이 아니라도 제 가문을 이어야 하는 후계자도 빼고, 잘생겨야 하고, 몸도 좋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돈도 좀 있으면 좋은데 저보다 나이가 어리면 괜찮은 거요?”

“그렇다.”

“그럼 왜 저보다는, 에틸이랑 나트하 마음에 먼저 들어야 한다는 조건은 빼 버리신 건데요?”

“그래도 네 마음에 먼저 들어야지 어찌 그것이 먼저가 될 수 있어!”

머리를 짚은 레이라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레이라가 녹스 공작에게 줄줄이 읊은 조건들은 그저 위장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에틸과 나트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녹스 공작이 저를 위한답시고 남자들을 들이밀까 싶어 말해 둔 위장이었는데 과한 기우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가 꽤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어이없이 웃은 레이라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에 식겁한 녹스 공작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아버지.”

“……그래.”

“에틸이랑 나트하는 저 아니어도 괜찮은 여자를 만나서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니, 그 두 사람이 혼인하지 않는다 한들 그 누가 뭐라 하겠어요?”

“그것이 왜?”

“그런 남자가, 그것도 두 사람이나 제 곁에 있어요. 더 욕심내서 좋을 게 있을까요?”

“이미 욕심은 다 내놓고, 이제 와 무슨 체면을 차리겠다고…….”

작게 구시렁거린 녹스 공작의 말에 레이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버지!”

“그 말이 맞지 않느냐! 네가 말한 조건의 남자가 제국에 몇이나 남아 있는 줄 아느냐? 고작 여덟이다! 여덟!”

‘아니, 여덟이나 있어?’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놀라 동그래진 레이라의 눈망울이 귀엽게 빛났다.

“그걸 다 조사하신 거예요?”

“…….”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버린 녹스 공작이 무어라 또 중얼중얼 혼잣말을 읊어 댔다.

웃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인 레이라는 귀여운 제 아버지의 투정을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었다.

내 딸이지만 너무 욕심이 많다니까. 거, 대충대충 허우대 멀쩡하고 튼튼한 놈이면 되었지 뭔 얼굴까지 따지고 있어. 돈도 많아야 한다니! 저한테 있는 돈도 다 못 쓰고 죽을 텐데! 이미 제 조건에 딱 맞는 놈을 둘씩이나 끼고 있으면서 말이야. 지 애비는 여태 혼자인데! 제 애비 생각이나 좀 해 줄 것이지. 큰소리나 내고! 누구는 제 걱정에 서류를 몇 백 장씩 훑어보고 눈이 빠질 것 같구만.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은 녹스 공작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웃음이 나오느냐!”

“큼, 그야 아버지 말씀이…….”

“왜! 뭐! 왜!”

애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그린 레이라는 녹스 공작의 뺨에 입술을 쪽 맞추며 일어섰다. 딸아이의 애교에 흐물흐물 녹은 녹스 공작이 언제 화를 내었냐는 듯 그새 눈에 하트를 매달고 흐느적대고 있었다.

“일단 에틸이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해요, 아버지!”

깜찍한 애교를 흩뿌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레이라의 뒷모습에 허탈하게 웃은 녹스 공작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여우를 키웠음이야.”

✲ ✲ ✲

제국 북부를 싹 뒤져 숨어 있던 마수들까지 죄 쓸어 버린 에틸은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소름이 쭈뼛 돋은 채 한껏 긴장하고 찾아간 자리에서 에틸은 피오니안과 마주쳤다.

“피오니안 님?”

“…….”

털이 빵빵하게 찐 하얀 토끼를 귀여워 죽겠다며 나볏하게 쓰다듬고 있던 피오니안의 몸이 쩍 굳었다.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천천히 돌아간 피오니안의 얼굴이 에틸을 마주하고 나자 희게 질려 갔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

“토끼를……. 잡으러 오셨습니까?”

보르르한 토끼털이 휘날리고 긴 침묵이 이어지자 파르르 떨리는 피오니안의 눈동자가 퍽 애처로워 보였다. 당당하게 만지던 보드라운 털이 왜 이리도 뻣뻣하게 느껴지는지……. 피오니안은 이미 당황해 버린 제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

“…….”

휭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귀를 쫑긋거리던 눈 토끼가 피오니안의 품에서 벗어났다. 폴짝폴짝 뛰는 폼이 어찌나 재빠른지 이미 가물가물 보이도록 멀리 달아나 버렸다.

매정한 뒷모습이라도 아련히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건넨 피오니안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장신의 남성이 애써 민망함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눈을 굴리는 모습이 꽤 꼴사나웠으나, 미모만은 여전히 빛났다.

“마수들이 나타난 원인을 처리하러 왔다.”

“아. 그래서 계속 쏟아져 나오던 것들이 잠잠해진 거로군요.”

“……그렇다.”

“그런데, 피오니안 님은 토끼를 꽤 좋아하시나 봅니다.”

컥컥, 사레가 들렸는지 피오니안은 한참이나 기침을 콜록거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무에 그리 부끄러운지 에틸의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어이없이 웃은 에틸은 괜히 제 뺨을 긁적거렸다.

“토끼와 잘 어울리셔서 여쭤본 것이니 너무……. 언짢아하시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저 놀라서 그런 것뿐이다. 객쩍은 소리는 되었고, 언제 돌아갈 예정인가.”

“아 이제 다 끝나갑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함께 가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는 이동수단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기에 에틸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혹시 주변에 남은 마물이 있는지 살펴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남은 것은 없다.”

“그럼 퇴근이 빨라지겠군요.”

만족스럽게 웃은 에틸이 피오니안을 재촉했다.

아직 민망함이 다 가시지 않았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피오니안은 삐걱삐걱 걸어 에틸의 뒤를 쫓았다.

함박웃음을 머금은 에틸은 그저 레이라를 빨리 볼 생각에 들떠 행복한 것 같았다.

✲ ✲ ✲

예고했던 시간보다 더 이르게 도착한 에틸은 피오니안과 함께 도착해 레이라에게 거창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황제에게 보고할 것을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전부 미뤄 버렸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행복한 얼굴로 볼을 발그레 물들인 레이라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소녀처럼 방방 뛰어 댔다.

짧고 강렬한 생존 신고를 마친 에틸은 녹스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러 떠났다. 덩그러니 남은 피오니안은 레이라에게 인수인계되었다. 레이라는 집 나갔던 드래곤이 고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반가운 듯했다.

“피오니안.”

그는 저를 부르는 새초롬한 목소리에 대답 없이 고개만 돌렸다. 레이라와 마주한 피오니안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도통 집에 붙어 있지를 않잖아?”

“바빴다.”

뭘 했다는 설명도 없이 푹신한 의자에 앉은 피오니안이 디저트를 내 오라 시켰다. 마치 제집처럼 구는 당당한 태도에 마주 앉은 레이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오니안, 대체 왜 그래?”

“무엇이?”

“나만 보면 화내고, 툴툴거리잖아. 왜 그러는 건데?”

“…….”

그는 차마 화가 났거나 삐진 것은 아니라 그저 부끄럽고 혼란스러워 그렇다는 말은 못 하겠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핑계거리를 찾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피오니안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것 아니다. 그저 요즘 생각이 많아 그렇다.”

“흐음, 무슨 걱정 있어?”

“…….”

다시 입을 달싹이다 닫아 버린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강렬한 시선을 회피했다.

“왜 그러는 건데? 이제 지켜보기도 지겨워졌어? 아니면 내가 보기 싫어? 말을 해 줘야 알 거 아냐.”

“…….”

“지난번부터 나만 보면 화내고…….”

“그건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레이라의 눈이 커졌다. 곧 환하게 반짝거리는 웃음이 묻은 그녀의 얼굴이 피오니안을 향했다. 서운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괜찮아. 다 잊어버렸어! 그런데, 정말 무슨 걱정이 생긴 거야? 많이 심각해?”

“……그래.”

“나한테 말해 주기는 힘든 문제인가 보네. 그래도 누구한테 털어놓으면 덜 힘들 텐데.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지? 말도 없이 나갔다가 돌아오지도 않고, 다음부턴 외출할 때 이야기 좀 해 줘. 응?”

저 혼자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종알종알 말하는 입술이 귀여웠다. 피오니안은 자각하지 못한 채 레이라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러지.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허탈한 듯 입을 딱 벌린 레이라는 피오니안이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그의 사고방식이 자신과는 다를 수 있음을 인지했다.

아니, 분명 다를 것이었다. 알고 있었고 언젠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인간과 다름없이 행동하던 것 때문인지 잠시 잊고 지냈었다.

“음, 피오니안은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기도 하고 나를 지켜보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그게…….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도톰한 입술에 검지를 얹은 채 눈을 도르르 굴리는 표정도 귀여웠다. 피오니안은 아직도 레이라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닿으면, 어떤 느낌이 날지 궁금했다.

“으음, 처음에는 약간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피오니안이 내 친구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앞으로 더 친해질 거고, 지금도 아주 친해졌다고 생각했거든.”

“…….”

“그러니까, 나는 피오니안이 무슨 고민거리가 있거나 혼자 힘들어하고 있는 것도 걱정이 돼.”

뜬금없는 이야기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한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이제 친해졌으니까. 당연히 왜 그럴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하게 된다는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까지 했으니 내가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아마 그대로 영영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걱정했을 거고,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떠났다고 생각해서 자책했을 테고, 내 힘으로는 찾을 수 없었겠지만 찾고 싶어 했을 거야.”

“…….”

“피오니안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빙그레 웃는 레이라의 얼굴에 멍하게 풀린 피오니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몹시 만족스럽기도 한 이야기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 얼굴을 감싼 피오니안이 레이라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는 말해 줄 수 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더 묻지는 않을게.”

“…….”

“음, 앞으로는 외출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도 해 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래.”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를 용케 잘 알아들은 레이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피오니안이 아직도 고민을 떨쳐 내지 못해 저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먹고 나랑 산책이나 할까? 오늘은 날이 맑으니까 노을도 분명 엄청 예쁠 거야! 응? 나랑 같이 나가자!”

우울한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하는 듯한 레이라의 행동이 마냥 귀엽고 어이없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어린 걱정과 밝지만, 미약한 어둠이 드리운 얼굴이 저 때문이라는 것이 기꺼워 피오니안은 작게 웃어 버렸다.

“그래. 그러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피어난 꽃처럼 어여쁜 그녀의 미소에 피오니안은 마음이 간질간질해 졌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보일수록 그녀에게 걸린 저주가 안쓰러웠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베르와 레사를 어떻게 해 버리고 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처음인지라, 그는 혼란스럽기도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정말 이것이 사랑인가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던 마음은 레이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박에 수긍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기 무섭게 들은 말이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니. 어이가 없고 허탈했지만 그런 그녀까지 귀여워 보이고 사랑스럽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여쁜 미소와 다정한 마음씨에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먹먹했다. 그는 문득, 에틸의 말처럼 이 조그맣고 바보 같지만 사랑스러운 여자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 ✲

허술하게 전한 레이라의 걱정을 알아들었는지 피오니안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다시 다정해졌다. 아니, 전보다 더 다정해졌다. 곱게 노을이 진 정원을 산책하던 두 사람은 잘 관리된 풀잎을 밟으며 상쾌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산뜻한 표정으로 레이라의 보폭에 발을 맞춘 피오니안과 달리 레이라는 무언가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제 손을 얌전히 잡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아니, 어…….”

제 손을 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레이라의 모습에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레 굴던 피오니안이 픽 웃었다.

“다리가 아픈가? 왜 자꾸 아래쪽을 살피지?”

“…….”

레이라는 제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대는 피오니안의 행동에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왜 이러지?’

물론 그가 이러는 것이 싫지는 않았으나 당황스러운 것은 맞았다. 피오니안과 레이라는 서로의 몸이 가깝게 닿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지만 애정 표현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굴리는 레이라의 태도에 피오니안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는 문득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만져 보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레이라의 볼을 살그머니 쓸어내렸다.

“아…….”

“싫은가?”

붉어진 레이라의 볼은 복숭아 같았다. 깨물면 상큼한 맛이 날 것 같은. 작게 입맛을 다신 피오니안이 곱게 웃으며 제 속내를 숨겼다.

귓바퀴까지 순식간에 새빨개진 레이라는 현재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너의 세 번째 반려를 빨리 구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이야?”

한숨을 작게 내쉰 피오니안이 진득한 눈으로 레이라와 마주했다. 노을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다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홀한 빛을 띤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흩어지던 레이라의 시선이 화들짝 놀란 채 먼 산을 응시했다. 레이라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싶은 묘한 표정이었다.

“구애를, 해 볼까 한다.”

“…….”

“너에게.”

딱 벌어진 입이, 동공까지 크게 확장된 눈이 피오니안을 향했다.

✲ ✲ ✲

잠에 취한 레이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세 남자가 있었다.

밝은 금발을 찰랑찰랑하게 기른 미려한 남자.

은색 곱슬머리를 귓가에 흩트려 놓은 차가운 인상의 미남.

붉은 머리칼을 자연스레 늘어트린 조각 같은 남자.

레이라는 거의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다. 꾸벅꾸벅 춤을 추던 그녀의 고개가 소파 등받이에 느슨히 걸쳐 졌다. 레이라의 고갯짓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던 세 남자의 시선이 고정된 것도 그때였다.

“아니……. 대체 왜 저렇게 귀여운 걸까요?”

“레이라는 태어났을 때부터 귀여웠다고 했습니다.”

“…….”

약간 어이없어진 피오니안의 시선이 에틸에게 닿았다. 뭐? 왜요? 당당하게 피오니안의 시선을 받은 에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그런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은 건가.”

“녹스 공작부인께서 살아 계실 적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기 때는 아주 토끼 같았다고…….”

“와아아, 정말 귀여웠겠네요.”

“큼…….”

감탄을 늘어놓으며 손을 공손히 모은 나트하가 눈을 반짝였다.

헛기침을 큼큼대던 피오니안은 묘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어린 시절의 레이라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에틸은 피오니안이 토끼를 아주,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웃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눕혀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 저러고 있으면 고개가 아플 것 같은데…….”

“잠시만 두죠.”

“저도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헛웃음을 지은 피오니안이 그래 네놈들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으으응…….”

비스듬히 소파 등받이에 기대있던 레이라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꿨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라 인상을 구긴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추태를 부리는 까닭은 전부 테이블 위에 놓인 술 덕분이었다.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술병은 와인이 다섯 병, 위스키가 세 병, 샴페인이 네 병이었다.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레이라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나트하도 이미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몸을 흐느적대고 있었다. 에틸과 피오니안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것처럼 말짱했는데 피오니안의 손에는 아직도 호박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피오니안 님께서 마음을 굳히셨다면 미룰 것 없이 네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적응은 빠를수록 좋을 테니까요.”

“…….”

“그렇겠네요오. 어차피 해야 하니까요. 세 사람이 끝이잖아요?”

맞아, 맞아. 고개를 주억이며 꼬인 발음으로 말을 늘어트린 나트하가 손뼉을 짝짝 치기까지 했다. 두 남자는 나트하도 함께 재워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뭐라고 고백하셨습니까?”

“나 말인가?”

“네.”

크리스털 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린 에틸이 위스키를 홀짝이며 피오니안에게 물었다. 온갖 향기가 배어 있는 술은 코끝에 잔향을 가득 묻혀 놓았다. 에틸은 입술을 핥으며 목이 긴 포크로 청포도를 콕 찍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만히 앉아 에틸이 하는 짓을 구경하던 피오니안이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구애를 해 볼 예정이라 했다.”

“…….”

“…….”

“왜 그러지?”

“……그것이 답니까?”

청포도를 오물거리던 에틸의 입 모양이 황당하다는 듯이 멈칫거렸다. 또 뭐가 문제냐는 듯 인상을 구긴 피오니안이 볼을 긁적였다.

“레이라는 뭐라 했습니까?”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도망쳤다.”

“…….”

“……잡으, 잡으신 거겠죠?”

잠에 빠지려던 나트하의 눈이 또랑또랑하게 뜨였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채근하는 눈빛에 피오니안이 고개를 주억였다.

“잡았지. 싫으냐 물었더니……. 음…….”

레이라의 반응을 떠올리는지 피식 웃은 피오니안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아, 뭔데 그다음은 뭔데! 두 남자가 눈빛으로 재촉을 시작했다. 충분히 두 남자의 궁금증을 자극한 피오니안이 만족스레 웃었다.

도망치다 잡힌 레이라는 붉어진 얼굴로 피오니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피오니안이 알고, 보고, 듣기로 에틸과 나트하의 고백 때에는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약간 불안해졌다.

“싫은가?”

“…….”

“확실히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에 피오니안은 더욱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거절당한다면 무어라 해야 할까…….’

거북해지려는 가슴이 계속해서 술렁이고 있었다.

“……그 말, 진심이야?”

“그렇다.”

“왜?”

“네가 사랑스럽다.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고, 안고 싶어진다. 네가 다른 남자와 애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일고, 그러는 네가 미워진다.”

“…….”

“그러면서도 눈 한 번 깜빡이면 네가 다시 사랑스러워졌다. 나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했지만, 에틸은 사랑이라 하더군. 내게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척 놀랐는지 레이라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피오니안은 흔들거리는 그녀의 눈에 저를 맞추며 부끄럽다는 듯이 작게 미소 지었다.

레이라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태껏 보아 왔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레이라는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게도 너를 사랑할 자격을 주지 않겠나.”

그녀는 그간 피오니안이 제게 부렸던 이유 모를 짜증들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는 난생처음 질투를 했기 때문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낸 거였다. 레이라는 최악의 경우 피오니안이 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더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피오니안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미모에 반해 장난삼아 만나 달라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누가, 그 어떤 인간이! 드래곤에게, 정령에게 구애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이었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우상이었다. 이 땅에 신전의 힘이 미약한 것은 전부 타이니아스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만나지 못하고 느껴지지 않는 신보다 더 신격화된 존재.

레이라는 지금 그런 존재에게 구애를 받고 있다는 것에 두통이 일 것 같았다. 만난 것도 신기한 판국에 구애가 웬 말인가. 지금 누가 이 장소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더라면 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점점 경악스러운 표정이 되는 레이라의 얼굴에 피오니안이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싫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지?”

“피오니안, 나는……. 나는 저주를 받았는데, 내 곁에서는…….”

“알고 있다. 전부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

“내 존재가 부담스러워 그러는 거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저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오래 살 뿐이지. 나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피오니안은 주먹을 꽉 쥔 레이라의 손을 감싸듯 붙잡았다. 손등을 살살 문질러 힘이 들어간 주먹을 펴 준 그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얼굴만 보아도 평범한 인간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생명체가 분명했다. 레이라에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처럼 보였다.

고개를 훌훌 저은 레이라는 잡생각을 다 털어 버렸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피오니안의 가슴께에 붙인 레이라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를 평범한 인간이라 생각하라니. 아마도 그녀는 영원히 그럴 수는 없을 터였으나, 그의 진심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많은 질문이 함축된 물음이었다. 피오니안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마음에 두었던 존재조차 없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사랑을 해 보겠나, 나는 네가 좋다. 너라서 좋다. 사랑스럽고,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다.”

장난스럽게 제 마음을 전한 피오니안이었지만 눈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물을 떨어트린 레이라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어째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고 들뜬 마음에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아마 내겐 익숙지 않은 감정들이 많아서 때때로 너를 힘들게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네 곁에 있고 싶다.”

멋쩍게 웃으며 건넨 피오니안의 말에 레이라는 웃어 버렸다.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멋지고, 귀여운 남자들이 어째서 바보처럼 내게 와 버린 걸까. 아마도 나는 전생에 나라를 열 개 정도 구한 영웅이었나 보다. 세 남자가 들었더라면 실컷 웃었을 생각을 하며 레이라는 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나는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럼 부탁할게, 행복하게 해 줄게. 피오니안이라면 나도, 좋아.”

레이라는 세 번째 반려를 찾았다.

다섯 시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웃던 피오니안은 저를 향해 입을 떡 벌린 두 남자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왜 그런 표정이지?”

“생각보다…….”

잘하셨습니다. 잘 말씀하셨군요. 에틸이 고개를 주억였다. 걱정이 많았는데 괜한 걱정을 했다 싶었다. 에틸은 어느새 소파에 누워 편안한 얼굴로 얌전히 자는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데려다 눕히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나트하, 당신도 가서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에…… 그래야겠어요.”

✲ ✲ ✲

녹스 공작은 에틸과 나트하 그리고 피오니안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머리를 짚은 녹스 공작이 피오니안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피오니안 님도…….”

“그렇다.”

“맙소사.”

당연한 말이지만 녹스 공작은 그 어떤 여인을 데려다 놓아도 제 딸이 단연 어여쁘고 똑똑하며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괜찮으신 겁니까? 그, 오히려 반려를 수만 명 두어도 누가 무어라 하지 않을 터인데…….”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 필요 없는 짓이기도 하지.”

아주 우아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오렌지를 듬뿍 얹은 타르트를 먹던 피오니안이 느긋하게 이야기했다.

“그렇다 해도…….”

“공작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크게 한숨을 내쉰 녹스 공작이 순식간에 표정을 싹 지워 냈다.

“아주 감사한 일이며 환영할 일이나, 한 가지. 확실하게 약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얼?”

“저 두 사람은 아주 강합니다. 그러나 피오니안 님보다는 아니지요. 솔직하게 말해서 그 누가 피오니안 님을 상처 입힐 수 있겠습니까?”

피오니안은 제 중요 부위를 발로 냅다 차 버리던 토끼를 닮은 여자를 떠올렸다. 레이라를 생각하자 그의 입술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사실 저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피오니안 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그저 두 남녀가 할 때도 싸우고 헤어지고 심지어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인데…….”

“혹여 내가 싸우기라도 하다가 에틸이나 나트하, 레이라를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

아주 적나라한 말에 녹스 공작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곧 흉흉한 피오니안의 기세에 못 이겨 픽 쪼그라들었다. 도와 달라는 듯이 에틸과 나트하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낸 녹스 공작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싸우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

에틸의 말에 옹골차게 고개를 끄덕인 녹스 공작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진즉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랬나. 오해했군.”

“괜한 걱정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일입니다.”

“그런가?”

“저희끼리 음, 간단한 계약서라도 작성할까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녹스 공작은 저를 빼고 이야기를 척척 진행 중인 세 남자를 향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이가 저렇게 좋았어? 대체 언제부터?’

“계약서라고 하니 거리감이 느껴지는군. 약조라 하지.”

“그래요.”

“이 문제는 저희 셋이 따로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틸이 녹스 공작을 향해 빙긋 웃었다.

“각하, 부르신 연유가 그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녹스 공작은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흠, 그 레이라에게 걸린 저주는 반려……, 가 딱 세 명만 있으면 되는 건가?”

“…….”

“…….”

“…….”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에틸, 나트하, 피오니안 사이로는 무언의 시선이 몇 번이나 오고 갔다.

“그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저주에 걸린 것이라면서 집에만 박혀 있는 것이 답답해 내 몇몇을 추려 보았는데, 이것이 필요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군. 피오니안 님까지는 내 미처 생각지 못해서 말이네.”

“으음.”

“아…….”

“그렇군.”

그것은 세 남자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에게 걸린 저주를 이야기하던 베르를 떠올렸다. 그는 꼭 세 사람 이상이 필요할 것처럼 굴기는 했다. 그런데 네 번째 사람에게는 ‘저주에 걸린 대상을 사랑하는’이라는 조건을 빼도 된다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니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확실하지가 않아 확답을 주기 어렵군.”

“그럼 몇 명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지……. 일단, 조금 더 알아보지.”

“혹시 모를 일이니까, 한 명 정도는……,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다급하게 구한다고 구해질 일도 아니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나트하의 말에 동의하며 디저트 접시를 내려놓은 피오니안이 에틸을 흘긋거렸다.

녹스 공작은 의외의 상황을 목도 한 기분이었다. 의외로 저 세 남자 중 발언권이 가장 센 것이…….

“각하, 일단 목록을 제가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여기 있네.”

에틸은 녹스 공작이 건네준 서류 뭉치를 자연스레 받아 들었다. 그가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꼼꼼하게 읽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얌전히 에틸을 기다리는 나트하와 피오니안을 번갈아 보던 녹스 공작은 제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레이븐 피아니타. 이 자는 숨겨 둔 연인이 있습니다. 그걸 연인이라 칭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에쉬 엘그린은 여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걸 어찌 아는가?”

“혹시 모르니 저도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에틸의 말에 녹스 공작은 제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에틸은 제 마음에 쏙 들었다.

“으음, 이 자는 아이리스 피에타 영애를 폭행한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작은 소란이라 금세 묻히기는 했지만요.”

녹스 공작은 순식간에 여덟 명이 다섯 명이 되어 버린 후보지에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보 길드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에틸의 능력이 새삼 신기했다.

“이 자는 조금 독특하군요. 처음 보는데…….”

카르도베르 R. 파이어.

에틸이 내민 종이를 슬쩍 바라본 피오니안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아, 외국에 오래 있었다는군. 돌아온 지 이제 몇 달 되지 않았으니 눈에 익지 않아 그럴 것이네.”

차마 이 자리에서 베르의 정체를 까발릴 수는 없어 일단 입을 다문 피오니안이 에틸을 향해 고개를 슬쩍 저었다.

피오니안의 의사를 눈치 좋게 알아들은 에틸이 베르의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를 맨 뒤로 넘겼다.

✲ ✲ ✲

숙취에 반쯤 죽은 얼굴로 잠에서 깬 레이라는 몽롱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운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고 사막을 횡단한 것처럼 속이 타들어 갔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에서 찻물을 따라 마신 레이라가 살겠다는 듯이 숨을 내뱉었다.

“어후, 너무 마셨네.”

차가운 찻물을 마시고 고개를 흔들자 정신이 드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맑아 보였다.

각 방에 비치된 찻물은 에틸의 지시였다. 피임 효과가 있는 찻물은 세 남자와 레이라가 수시로 마시는 물 대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레이라의 차에는 특별히 피로 회복과 숙취 해소 마법이 첨가되어 있기도 했다.

숙취가 가셨는지 레이라는 제법 또렷한 눈빛을 했다. 그녀는 지난밤 세 남자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트하와 에틸은 피오니안의 존재를 레이라보다 더 환영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신기했다.

보통 한 사람을 나누어 가진다고 가정했을 때 화를 내고 싫어하고 질투를 할 법도 한데. 불안하고 미안해하는 레이라의 모습에 오히려 다독여 주고 다행이라 환하게 웃던 두 사람의 얼굴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신기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레이라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것처럼 저를 보는 에틸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정하고 맑게 웃어 주며 볼을 붉히는 나트하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리고 진중한 눈빛으로 조심스레 애정을 전하는 피오니안의 얼굴까지 떠올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던 레이라는 기분 좋은 꿈을 마주하듯 옅게 미소 지었다.

✲ ✲ ✲

기분이 좋아진 녹스 공작이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흐뭇한 녹스 공작의 표정이 배부른 곰 같았기에 나트하는 작게 키득거렸다.

“참, 러스, 아니지. 나트하.”

“네?”

나트하의 웃는 얼굴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녹스 공작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 얼굴 그대로 잔뜩 상기된 채 말을 늘어놓았다.

“내 러스티 후작과 이틀 뒤에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네. 사실 내가 상황을 전부 말해 버렸어. 처를 서넛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하하.”

나트하는 몹시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저와 비슷한 미소를 지은 에틸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그것이 뭔 문제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의 피오니안을 보며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아무튼, 내 그것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후작은 자네만 좋다면 정부 자리라도 상관없다고 말하지 뭔가. 덕분에 내가 마음을 조금 놓았어.”

“그러실 줄 알았더라면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저희 집안이 조금 독특해서…….”

“허허. 독특은 무슨 호탕하니 내 마음에 쏙 들더구먼.”

껄껄 웃던 녹스 공작이 아차 싶은 얼굴로 에틸을 향해 말했다.

“에틸, 혹 마음 상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같은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이군요.”

섹시한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톡톡 두드리던 에틸이 빙긋 웃었다.

녹스 공작은 미간을 짚으며 눈을 그렁그렁 떴다.

“자네는 참……. 자네 부모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내 업고 다녔을 것을.”

피오니안은 무던한 표정으로 녹스 공작과 두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디저트를 깨작거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두 남자의 과거를 궁금해하며 언젠가 꼭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레이라와는 다른 의미지만 그가 과거까지 궁금해할 정도로 관심을 가진 인간은 에틸과 나트하가 거의 처음이었다. 물론 그것도 레이라와 관련된 인물이기에 생긴 궁금증이긴 했다.

피오니안은 제게 존대를 하기는 하지만 격 없이 이것저것 툭툭 잘도 물어보는 두 사람이 퍽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눈빛을 처음 보았을 때 피오니안은 속으로 어라? 이것 봐라 싶었다. 에틸의 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나트하는 겉으로는 호구 같아 보여도 속에 짐승을 숨겨 둔 자의 눈빛이었다.

그저 그런 인간들과 레이라를 나누어야 했더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멀리 떠나 버렸을 지도 몰랐다. 혹은 그가 그녀를 독차지하려 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트하와 에틸은 합격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포크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있던 피오니안은 제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대는 나트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왜 그러지?”

“두 달 뒤에 황태자 탄신 연회가 있어요. 피오니안 님께서 레이라를 에스코트하시겠어요?”

“연회는…….”

“파티를 싫어하세요?”

눈치 빠르게 묻는 나트하의 질문에 피오니안이 고개를 주억였다.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우아하게 내려놓은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파티가 싫다기보다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싫다. 그런 자리에 가면 들러붙는 것들이 꼭 생겼으니.”

“으음, 그럼 예정대로 에틸이 가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사의 친우인지라 레이라를 에스코트해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들릴 온갖 상스러운 말들을 대비해 미리 발을 뺀 나트하였다.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을 매만지던 녹스 공작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크흠, 실은 내 폐하께 직접 청하던 것이 있는데 말이네.”

녹스 공작의 설명을 듣던 에틸은 저도 비슷한 짓을 황제에게 저질렀음을 알려 왔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나트하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며 저를 자책했고 피오니안은 눈썹을 비틀었다.

“됐고, 그저 나를 팔면 될 일 아닌가.”

“네?”

“내 반려인데, 그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단 말인가. 행여 황제라 해도 그럴 수 없지. 흥, 제까짓 게 무슨. 공작은 가서 전하게. 내, 친히, 황궁을 방문하기 전에 일을 말끔히 처리해 두라고.”

“그럼 제국에 전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공표하시리라는 말씀입니까?”

“상관없다.”

“조금 전에는 귀찮으시다고.”

“쓸데없는 것과 해야 할 일을 구분할 줄은 안다.”

“그럼 일 처리가 아주 쉽겠군요.”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린 에틸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을 하며 찻잔을 느긋하게 집어 들었다. 비슷한 표정을 한 녹스 공작도 배부른 곰처럼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 공주님이 깨어나셨는지 살펴보러 가야겠네요.”

“이미 일어났다. 배가 고프다며 찡찡거리고 있군.”

피오니안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나트하가 볼을 긁적였다.

“피오니안 님……. 그건, 나쁜 짓이에요.”

단호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와 살짝 접힌 미간이 꼭 아이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는지 피오니안은 눈을 크게 떴고 그 모습이 어이없고 우스워 에틸과 녹스 공작은 작게 웃었다.

“사생활은 지켜 줘야 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뭐, 그러지. 그런데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쩔 건가?”

“보호 마법을 여러 겹 두르기로 해요. 위치 추적 마법도 괜찮겠네요.”

“아티팩트를 몇 개 만들어 볼까?”

“그것도 좋겠어요.”

에틸과 녹스 공작은 이어지는 두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법사들은 원래 저런가?

잘 모르겠습니다.

녹스 공작과 함께 허탈하게 웃은 에틸이 잠에서 깬 레이라를 데려오겠다며 일어섰다.

나트하와 피오니안은 에틸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열과 성을 다해 토론하고 있었다. 한 여인의 안전에 대해 논한다고 하기엔 과할 정도의 내용이 오가는 것이 심상치 않을 정도였다.

과한 보호를 자처하는 두 남자에 녹스 공작은 세계의 안전을 토론하는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절로 두통이 이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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