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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피오니안 (17/26)

16. 피오니안

레이라와 피오니안은 지금보다 더 친해져서 돌아오라는 두 남자의 성화에 못 이겨 저택 바깥으로 쫓겨났다.

레이라는 꽉 닫힌 저택 정문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에 비해 피오니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

레이라는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피오니안의 소맷자락을 쥐어 당겼다. 그것이 저를 봐달라는 것 같아 피오니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제법 차이가 나는 눈높이에 레이라의 고개가 바짝 들어 올려졌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피오니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슬쩍 구기며 반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가고 싶은 곳이 있나?”

고개를 잔뜩 숙여 주며 눈을 맞춰 오는 그의 태도에 레이라의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음……. 우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부터 하자. 나 궁금한 게 많아!”

피오니안의 말 한마디에 기대가 가득 들어찬 레이라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웃은 피오니안의 시선이 손끝을 향했다. 아직도 제 소맷자락을 꽉 붙잡은 하얀 손이 귀여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힘주어 잡은 손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손을 떼어 손등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다 나직이 웃으며 깍지를 껴왔다.

대놓고 드러낸 피오니안의 유혹에 낯이 간지러웠다.

레이라는 제 뺨을 긁적이며 덩달아 웃음 짓고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는 아직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질 손길에 묘하게 기대가 되는 마음을 내리눌러야 했다.

“워프를 해야 하니, 눈을…….”

“응?”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순한 동물처럼 말간 눈빛이 눈꺼풀 속으로 사라질 것이 아쉬웠다. 피오니안은 입맛을 다시며 레이라의 눈을 감겨 주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은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얼마나 걸려?”

“으음, 거리가 조금 머니 20초 정도 걸릴 예정이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이상한 부유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레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달달 떠는 작은 동물처럼 몸을 움츠린 레이라에 피오니안은 그녀를 꽉 감싸 안아 주었다.

레이라는 단단한 품에 쏙 안겨 한참이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라는 저를 놓아주며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살며시 오른쪽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푸르렀다. 새파랗고 높은 하늘과 그보다 더 푸르른 바다가 레이라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 눈이 절로 크게 뜨이는 풍경이었다.

레이라는 코끝을 스치는 짠 바다 내음을 흠뻑 들이마셨다. 삼삼오오 모여 허공을 휘젓는 이름 모를 새들. 몽실몽실한 구름이 드문드문 놓인 높은 하늘. 햇빛에 반짝이는 드넓은 백사장. 저 멀리 보이는 산과 야트막한 언덕들.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그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사방이 탁 트인 건물은 하얗고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 같았다. 레이라는 대리석 건물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레이라는 입을 귀엽게 벌린 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는 함빡 웃으며 피오니안을 돌아보았다.

“너무 좋아! 이게 바다구나? 어쩜 이렇게…….”

재잘재잘 제 소감을 떠들어 대는 귀여운 목소리를 배경 삼아 피오니안은 테이블과 폭신한 의자를 소환했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지만 모나고 부서진 곳 없이 말끔한 것이 마법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짙은 남색 소파와 하얀 테이블, 달콤한 디저트와 따뜻한 블랙커피가 줄줄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것을 본 레이라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폭신한 소파에 자연스레 걸터앉은 레이라가 손을 모아 잡았다.

“피오니안, 여기 너무너무 예뻐!”

“좋아할 것 같았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니까.”

“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린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바닷속에서 걸어 나왔다더군. 기억이 나질 않으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그의 말에 레이라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곱고 고운 물빛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저 드넓은 곳 어디에서 태어난 걸까?’

레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와 생각을 멈추었다.

“으음, 아까 녹스 공작이 신상 정보라는 것을 보더군. 그것을 참고삼아 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그건 또 무슨.”

“나는 피오니안 R. 타이니아스. 바다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 나이는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

“자기소개구나.”

고개를 작게 주억인 그녀가 계속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였다.

“흠흠, 직위는 따로 없다. 원한다면 어디 가서 한자리 얻어 오겠다만……”

“그런 건 됐어.”

“알겠다. 음, 가족은 없었고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소중하거나 아끼는 사람도 마찬가지. 곁에 두고 오래 지켜봐 온 사람도 없다. 오래 알고 지낸 악마가 하나 있기는 한데…….”

“그런데?”

“그자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응.”

레이라는 살구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바른 스콘을 피오니안의 입에 쏙 넣어 주며 빙긋 웃었다.

피오니안은 무슨 말을 더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가 그것을 날름 받아먹었다.

모아진 미간과 끙끙대는 작은 소음을 들은 레이라가 몰래 웃었다. 그녀는 웃지 않은 척 하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피오니안의 시선이 레이라의 손끝을 타고 매끄럽게 위를 향했다.

“그냥 내가 궁금한 걸 물어봐도 될까?”

“그래. 그것이 더 편하겠군.”

“음, 지난번에 화가 나니까 머리카락이 더 빨개지던데. 그건 뭐야?”

“아. 내 머리카락과 비늘 색은 원래 하얗다.”

대답과 함께 피오니안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의 곁에서만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신비한 광경이었다.

한차례 휘날린 머리카락이 밝게 물들기 시작했을 때 레이라는 입을 떡 벌려야 했다. 은빛도 흰색도 아닌 오색찬란한 빛무리를 머금은 하얀 머리칼은 자체 발광하는 그의 미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밝은 별빛처럼 아름다운 머리칼은 만지면 녹아 없어져 버릴 것처럼 가늘고 고왔다.

“……왜 머리카락 색을 바꿔서 다니는지 알겠네. 비늘도 같은 색이면 엄청 예쁘겠다.”

“그건 조금 있다가 보여 주지. 아무튼, 원래 색이 아니어서, 내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조금 더 밝아지고 반대의 경우엔 어두워지지.”

“그렇구나.”

어느새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레이라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훑어보고 있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몸을 흠칫거린 피오니안이 제 머리 색을 다시 붉게 물들였다.

“왜 바꿔? 나랑 둘이 있을 때는 상관없잖아!”

붉어지려는 볼을 가리려 보호색을 택한 것이라는 말은 삼킨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다. 다른 궁금한 것은?”

“칫, 으음……. 피오니안은 가끔 세상에 나타나잖아? 그럼 평소에는 뭘 하고 지내는 거야?”

“잔다.”

“응?”

“보통은 용암 근처에서 잠을 자거나, 바닷속에서 잠을 자거나……”

“아니, 잠만 자는 거야? 밥은? 심심하지는 않아?”

“자는데 심심할 겨를이 어디 있나. 잠에서 깨면, 음,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일을 찾아가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드문드문 보였구나.”

“그렇다.”

조금 한심한 무언가를 보듯 불손해진 눈빛에 피오니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이라는 냉큼 화제를 바꾸었다.

“소중하거나 아끼는 사람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뭐야?”

“…….”

숨을 잠시 멈춘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영생을 산다. 사실 언제가 되어야, 어떻게 해야 죽는 것인지를 모른다는 표현이 맞겠군. 나는 숨을 쉬지 않아도 살고 밥을 먹지 않아도 산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팔다리가 사라져도 다시 돋아나고 심장을 찔러도 살아 있었다. 처음에, 인간들은 그런 나를 싫어했다.”

“…….”

“그래서 나도 인간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 뒤로 나는 내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이기에 다른 것인지 궁금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깊은 감정이 섞여 들었다. 레이라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그들의 틈에 섞여 지내며 세상을 배웠다. 내게 글을 가르쳐 준 스승도 있었고 마음을, 감정을 가르쳐 준 스승도 있었고 싸움을 가르쳐 준 스승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이를 먹고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들이 두려웠다.”

“…….”

“내게 조금이라도 소중해진 누군가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더군.”

레이라는 미약한 한숨과 함께 아련한 미소를 지은 피오니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을 덮은 작은 손은 무척 따뜻했다.

“인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궁금증 하나로 그들에게 섞여 들어서인지,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좋지 못한 일을 저지른 경우에는 벌을 줬고, 온 마음을 다한 노력에는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지.”

“그랬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꼬마들이 그러했지. 나와 같이 부모가 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그 작은 아이들은,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내 곁에, 내 품에 있던 꼬마들은 아프고 힘든 세상을 아주 잠깐만 살다 어린 나이에 떠났다. 그 작은 아이들이 죽었을 때…….”

피오니안은 세상을 떠돌던 도중 죽을병에 걸렸거나 몸이 성치 못해 가족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그는 그 아이들을 데려다 마음을 나누어 주고 성의껏 돌봐 주었다. 그러나 몸뿐만 아니라 온갖 곳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가 컸던 아이들은 잠깐 행복해했지만, 곧 세상을 떠나 버렸다.

피오니안이 처음 겪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 수명을 나누어 주고서라도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존재가 영영 사라져 버리는 기분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었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를 꽉 안아 주었다.

작은 품에 기대 느릿한 숨을 쉬던 그가 눈을 사르르 감았다. 따스하고 말랑한 품에 안기자 답답한 마음이 녹아 버리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다시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지 않기로 했다.”

“…….”

“사실 내 탓이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웃게 해 주고 싶었던 것에 온 마음을 쏟아 버렸으니.”

레이라의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은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어깨와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에틸이 그러더군. 행복한 짧은 순간이, 고독한 영생의 긴 시간보다 훨씬 값질 거라고.”

“아…….”

“그래. 나도 그랬다. 그 작은 녀석들이 내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행복했었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기억들이 선명한 것을 보면. 나는 잊고 싶다 하면서도 잊고 싶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레이라는 그의 말에 커다란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그런.

그가 아직도 선명하게 그릴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할 때, 잊고 싶다 하면서도 잊고 싶지 않았을 기억에 상처 받은 마음을 행복으로 채워 줘야겠다는 결심을.

“네게 부담을 주는 말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아니야. 그렇지 않아. 피오니안의 귓가에 파고든 작은 속삭임은 그의 입술에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다.

“내게는 이미 네가 소중해졌다. 보고 있으면 좋고, 행복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나는 그저 네 곁에 남아 너를 사랑하며 행복해지고 싶었다.”

“용기를 내 준거구나. 고마워. 피오니안.”

저를 더 껴안아 보려 노력하는 작은 몸짓이 어찌나 어여쁜지 모른다. 피오니안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아프게도 웃었다.

에틸의 말이 맞았다. 그저 이렇게 작은 포옹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피오니안은 앞으로 얼마나 더 행복한 일들이 생길지 기대가 되었다.

✲ ✲ ✲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레이라와 피오니안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피오니안은 중간중간 에틸의 과거에 관해 묻기도 했고 레이라의 과거를 물어보기도 했다.

아주 상냥하고 단호하셨다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던 레이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고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의 추운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레이라의 눈에 눈물방울을 매달게 했다.

피오니안은 여러 번 레이라의 눈치를 보며 그녀를 안아 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머니를 잃고 많이 힘들었나?”

“응. 그때 의지가 되었던 게 레사였어. 많이 아파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도 그렇고 집안사람들이 너무 내 걱정을 하니까 티를 내기도 힘들었거든. 레사를 만나면서 차츰차츰 나아졌었어.”

“그랬군.”

느리게 고개를 주억이던 피오니안의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았다. 피오니안은 레사 대신 저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추잡한 질투심이 드는 저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피오니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레이라는 말을 돌렸다.

“피오니안이 오래 알고 지냈다는 그 악마는 어떤 사람……. 음, 어떤 악마야?”

“그자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뱀파이어다.”

“아…….”

“악마 중 유일하게 종속을 만들지 않고, 제 피를 뿌려 만든 마수를 자식처럼 아끼는 별난 악마이자, 꽃을 좋아하는 이상한 악마지.”

전보다 더 가라앉은 분위기에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가…… 딸처럼 아끼던 마수가 하나 있었다. 인간형 마수였는데 아주 천진한 아이 같은 마수였지. 그 악마 놈을 위해 꽃을 꺾어다 주고…….”

진실을 터놓기 시작한 피오니안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레이라는 이유 모를 그 표정에 대한 답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깨닫게 되었다.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마수.

그 신기한 마수는 악마에게 먹지 않아도 될 식사를 챙겨 주었다.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나누고 지루한 시간도 함께 나누었다. 악마와 마수는 말 그대로 가족이었다.

그리고 마수는 인간의 손에 죽었다.

“아.”

그 인간의 이름이 레사 메르세데스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놀랍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라는 놀란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그럼, 혹시…….”

“그래. 그가 레사에게, 네게 저주를 건 원인이다.”

“…….”

할 말을 잃은 레이라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켜켜이 쌓인 것처럼 오묘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피오니안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그는 레이라의 눈치를 살피다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그 악마가 원인이어도, 그걸 알고 있어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거구나.”

“그렇다.”

“그럼 됐어. 원인을 몰라서 궁금했었는데…….”

오히려 알게 되어서 다행이야. 작게 속삭인 레이라의 목소리에 피오니안은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당연히, 그 자식이 밉겠지만…….”

“아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에 오히려 이유가 없었더라면 그게 더 허탈했을 것 같아. 그 악마도 분명……,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선택했을 일일 거야. 그렇지?”

“……그렇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눈치를 한껏 살피며 살금살금 말을 꺼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를 다독여 주려는 듯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피오니안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내가 막 피오니안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나는 그 악마를 엄청나게 미워했을지도 몰라. 왜 그 죄를 내가 지어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겠지.”

“…….”

“그런데,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내 곁에 에틸도, 나트하도, 피오니안도 함께 있어 주니까. 힘들어도 우리로서 함께 행복해지기로 했고 그럴 예정이니까. 괜히 누군가를 더 미워하는 데에 마음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레이라의 말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해 주는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이야기하는 내내 제 가슴을 살살 쓸어내리고 있었다. 부서지려는 마음을 달래려는 듯이.

피오니안은 레이라를 품 안 가득 껴안았다. 어르고 달래듯이 등을 쓸어내리고 귓가에 작은 키스를 남기기도 했다.

레이라를 달래던 에틸처럼 굴던 그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베르가 눈앞에 있다면 찢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했고 바스러질 듯 가녀린 레이라가 너무나 안쓰러워 마음이 미어질 것 같기도 했다.

“미워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자를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가 불행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아냐. 밉지 않아. 미워하지 않을 거야. 나라도 누가 내 소중한 사람을 해쳤다면 복수하고 싶었을 테니까. 난 어쩔 수 없이, 어쩌다가…….”

“…….”

레이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툭 터져 버렸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도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말간 눈물이 똑똑 떨어지는 눈망울이 처연하고 사랑스럽다.

안쓰럽고 또 안쓰러운 모습에 마음 한편이 싸늘해지면서도 어째서 이다지도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피오니안은 레이라를 다독이고 또 다독여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거칠게 터져 나오던 레이라의 숨소리가 느리게 바뀔 때쯤이었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이 저를 더 깊게, 꽉 안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가진 그에 대한 욕심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레이라가 피오니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는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그녀를 더 꽉 껴안아 주었다.

“피오니안.”

“그래.”

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보라는 것처럼 따스한 눈동자는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눈동자가 아니었다. 아름답고 고귀하고 특별하지만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던 눈빛은 어느새 온갖 따스한 감정이 맺힌 아름다운 수정 구슬 같았다.

단단한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나온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눈가를 천천히 쓸어 보았다. 곧 그녀는 눈물길이 그려진 얼굴로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나 지금 행복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가.”

일견 무뚝뚝해 보이는 대답이었지만 짧은 한마디를 건네는 피오니안의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곱게 휘어진 눈매와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깊게 녹아든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레이라는 새초롬한 아가씨처럼 안기며 볼을 비볐다.

“고마워.”

✲ ✲ ✲

어차피 쫓겨난 거, 내일 돌아가자는 레이라의 성화에 피오니안은 거절하는 척 몇 번 튕기고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 인적이 드문 해변을 걸었고 야트막한 언덕을 두어 개 넘었다.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금세 드러난 도시는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머리 위에 천을 돌돌 감은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다. 레이라는 그것을 통해 이곳이 제국에서 아주 먼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갈이 깔린 단단한 길과 야트막한 돌담이 둘린 하얀 집. 매콤한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시장과 형형색색의 얇은 천을 파는 가게들. 작고 둥그런 나무들에 핀 탐스러운 꽃송이의 보드라움을 즐기던 레이라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대답 대신 빙긋 미소 지은 피오니안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입은 건지 가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 여자들. 그들은 저마다 레이라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응시하곤 했다.

물론 레이라도 그런 여자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자꾸만 시선을 주곤 했다.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챈 피오니안은 의상실로 향했다.

그러나 레이라는 거창한 옷은 됐다며 사양하고는 거리에 지나다니던 여자들처럼 평범한 의상을 골라 입었다. 하늘하늘하고 보드라운 천은 아주 낯선 느낌이었지만 피부에 닿는 따스한 바람과 나른한 햇빛 덕에 퍽 기분이 좋았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가?”

“응. 평범한 게 좋을 것 같아.”

전혀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피오니안은 그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도, 예쁘지?”

“그래.”

개구쟁이같이 배시시 미소 짓는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피오니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붉어진 볼이 발긋하게 익어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았다. 멍하니 입만 벙긋대던 레이라는 제 손을 잡아 이끄는 피오니안의 기세에 엉거주춤 따라나서며 뜨거워진 뺨을 문질렀다.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는 과일, 커다란 사탕, 매콤한 꼬치구이를 사 먹으며 나란히 걷는 두 남녀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피오니안! 저건 뭐야?”

“저것은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로쿰이라는 디저트다. 아주 달고 장미 향이 나는 젤리, 음, 젤리보단 조금 쫀득한 느낌이지만…….”

“궁금해!”

그렇게 로쿰이라 불리는 젤리 열 상자를 사고.

“피오니안! 저건 뭐야?”

“그건 케밥이라는……, 사 먹지.”

케밥을 나란히 손에 쥐고.

“피오니안!”

“그건 돈두르마. 이곳 전통 아이스크림이다.”

익숙하게 설명하며 계산을 하는 몸짓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쫀득한 아이스크림을 크게 푸던 주인이 껄껄 웃다가 레이라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아주 예쁜 아가씨군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먼 곳에서 왔다. 여행 중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주인은 기다란 막대에 퍼 담은 아이스크림을 레이라의 손 위에 놓아줄 듯 말 듯 굴며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어? 어?”

아이스크림을 담아 먹는 과자를 손에 쥔 채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제게 먹을 것을 줬다 빼앗았다 장난을 치는 사람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그 누가 공녀에게 이런 장난을 쳐 보았을까?

그녀는 생전 처음 겪는 기이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피오니안과 주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시선을 아이스크림을 향해 돌렸다. 피오니안이 막지 않는 것을 보니 이곳은 원래 이런 곳인가 보다 생각한 레이라의 눈이 번뜩였다.

매의 눈으로 주인의 손을 살피며 아이스크림을 빼앗으려는 레이라와 주지 않으려는 주인의 손장난에 피오니안의 입가에 슬그머니 웃음이 피어났다.

“아! 얄미워! 잡을 수 있었는데!”

스치듯 닿고 멀어진 아이스크림을 향해 아쉬운 눈을 한 레이라가 발을 크게 굴렸다.

「아하하, 아가씨 조금 더 노력해 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열 받아! 대체 뭐라고 한 거야?”

피오니안은 몹시 즐거워 보이는 돈두르마 주인을 슬쩍 흘겨보았다.

“더 노력하라고 했다.”

“이익!”

레이라의 피나는 노력에도 돈두르마 주인은 최선을 다해 얄밉게 굴었다.

결국 바동거리는 이국적인 미녀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구경하러 몰려들기 시작했다. 얄미운 주인은 그제서야 레이라의 손에 하얗고 쫀득거리는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얹어 주었다.

아주 예쁘니 주는 서비스라며 딸기 맛을 더 얹어 주었지만, 레이라는 그저 씩씩거리며 주인장을 노려보기 바빠 보였다.

피오니안은 조용히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포기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손뼉을 짝짝 치며 레이라의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을 축하해 주었다. 발을 쿵쿵 구르던 그녀는 뒤늦게 활짝 웃으며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그녀는 행복했다.

그리고 피오니안은 그녀의 웃는 얼굴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에틸의 말이 맞았다. 피오니안은 가슴 깊이 인정했다.

✲ ✲ ✲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택은 레이라에게 생경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아주 호화로워 보이는 침실보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부는 테라스에 머물러 있었다.

이름 모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의자는 딱딱하고 불편해 보였지만 막상 앉아보니 세상 편안했다. 레이라는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커다란 의자에 폭 파묻히듯 앉아 멍하니 노을을 구경했다.

넓게 펼쳐진 바다에 깔린 노을은 보석을 쫙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그래. 아주 아름답군.”

물론 그 옆에서 노을 대신 노을빛에 물든 어여쁜 얼굴에 빠진 피오니안도 함께였다. 포근한 블랭킷을 꼼지락거리는 자그마한 손가락을 보며 오늘 아침을 떠올리던 피오니안이 피식 웃었다.

그 이후로 저 하얀 손을 볼 때마다 자꾸만 입 안이 허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맛을 다시던 피오니안이 로쿰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맛있어?”

“여전히, 달군.”

“뭐야, 맛있냐니까.”

약간 핀트가 어긋난 대답에도 레이라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과하게 행복에 취한 상태였다. 피오니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라는 제 손을 살그머니 집어 입을 맞추는 피오니안의 행동에 동그란 눈을 했다.

“그래. 맛있군.”

“…….”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이 노을빛에 물들어 그런 것인지, 그저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아름다웠다. 피오니안은 환하게 웃음을 지은 채 그녀의 손에 볼을 비볐다.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과하지 않지만,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행동이었다.

“피, 피오니안?”

“그래.”

피오니안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라의 손등에 뺨을 가져다 대고서 눈을 지그시 맞춰 왔다.

그 눈빛에, 레이라는 가슴에 화살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느꼈다.

‘저 예쁜 얼굴은 저렇게 쓰는 거구나.’

이대로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았기에 레이라는 반대쪽 손을 꽉 말아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용으로 변한 모습도 궁금해.”

“지금 여기서 말인가?”

“너무 좁은가? 작게는 안 되는 거야?”

“안 될 것은 없지만……. 해본 적이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크기를 가늠하듯 테라스를 이리저리 살폈다. 비교적 넓은 크기였지만 테라스였다. 게다가 테이블에 커다란 의자까지 두 개 놓여 있으니 변신을 하려면 작은 늑대나 강아지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피오니안은 늠름하고 위용 넘치는 제 본체가 레이라의 품에 쏙 안길 크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보여 주는 본체인데 이렇게 작게 보여 주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레이라의 얼굴을 보니 잡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내 본체는 저기 저 산보다 크다. 그러니 너무 작다고 실망하지 말았으면 한다.”

“응응, 알겠어.”

대충 저 멀리 보이는 산을 흘깃거린 레이라가 고개를 열심히도 주억였다.

한숨을 작게 내쉰 피오니안의 몸 주위로 작은 빛무리가 일렁였다.

“우와.”

마치 보석을 잘게 부순 뒤 살살 흩뿌린 것처럼, 고운 입자의 빛무리를 머금고 나타난 것은 레이라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드래곤 한 마리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드래곤을 받아 안은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꽉 끌어안고 얼굴부터 비볐다. 조금 전 피오니안이 제 손에 얼굴을 비빈 것에 비하면 아주 격렬한 애정 표현이었다.

“으아아아, 너무 귀엽잖아!”

레이라를 빤히 보는 똥그란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보석 같았고 생김새 때문인지 굉장히 유순해 보였다. 아기 특유의 동글동글한 생김새에 빵빵하게 부른 배까지.

레이라는 내심 파충류처럼 생겼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귀여운 생김새에 심장이 아픈 것 같았다.

게다가 이만큼이나 하얗고 깨끗한 비늘이라니! 아주 대단한 장인이 섬세한 손길로 한 땀 한 땀 조각한 것 같은 비늘은 어느 한 군데 모난 곳 없이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보석으로 만든 아기 드래곤이 이렇게 생겼을까?

내심 징그러우면 어쩌나, 무서우면 어쩌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몸에 비례해 앙증맞아진 날개를 파닥이는 것까지 어찌나 귀여운지! 다이아몬드보다 더 아름다운 눈망울은 얼마나 반짝이고 유순해 보이는지!

“어떡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몸을 부르르 떨며 피오니안을 꽉 끌어안은 레이라는 온몸으로 격렬하게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저를 끌어안고 고운 피부를 비비적대는 것에 피오니안은 당황스러움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 그만 놓아라.”

“싫어! 조금만 더!”

레이라의 무릎 위에 놓인 블랭킷에 꽁꽁 감싸진 피오니안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발을 바동거렸다. 행여 다칠까, 힘을 주지도 못하고 앙증맞게 꼬물거리는 것이 더 귀여워 보인다는 것은 모르고 하는 행동이었다.

반항하는 척하면서도 안아 주니 기분이 좋은지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와 아기 특유의 귀여움이 담긴 외모가 한층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을 끊임없이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한참을 그러다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피오니안을 제 무릎 위에 세워 두고 앞발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발을 양손에 하나씩 쥔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너무너무 귀여워 피오니안!”

“칭찬인 줄 모르겠다. 수치스럽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겠군.”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피해 눈동자를 굴린 피오니안의 꼬리가 퉁명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더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너무 예쁘다. 저 산보다 더 커다란 모습이면 아주 멋질 것 같아.”

“흠, 당연한 말을 하는군.”

“온몸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

“그럼, 비늘은 내 자랑거리 중 하나……. 흠흠.”

뒷발로 작게 콩콩 뛴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품에 제 얼굴을 폭 파묻었다.

부끄러운 것 같았다.

얌전히 흔들리던 꼬리는 레이라의 오른손에 폭 감겨오기까지 했다. 음흉하게 미소 지은 레이라가 피오니안을 그대로 껴안아 제 가슴으로 끌어당긴 것은 그때였다.

“무, 무슨 짓인가!”

“왜에? 안아 달라고 한 것 같아서.”

얇디얇은 천 사이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에 피오니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굴렸다. 어쩐지 입 안이 더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기도 했다.

“놓아라!”

“놓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레이라가 놓아 준 앞발로 야무지게 그녀의 옷을 쥐던 피오니안이 냉큼 손을 떼어 내며 언성을 높였다.

“넘어질까 봐 잡은 것이다!”

“어쩜, 핑계가 너무 빈약하다. 우리 아가 용이 찌찌가 먹고 싶었을까요?”

“하! 요망한 소리 하지 마라!”

우쭈쭈 소리를 내며 피오니안을 아기 취급하던 레이라가 그의 턱밑을 긁어 주며 제 가슴을 꺼내는 시늉을 했다.

얇은 천 사이로 들어간 손이 커다란 젖가슴을 그러쥐는 것 같았다. 제 턱을 간지럽히는 자그마한 손을 피해 고개를 휘휘 젓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작은 드래곤이 펄쩍 뛰었다.

“왜, 왜 이러는 거냐!”

레이라는 잠깐 놀리려 한 것이었으나 피오니안의 격렬한 반응이 즐거워 장난을 멈추질 못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아기를 안 듯 작은 드래곤을 들어 제 무릎 위로 눕혀 두었다.

약간의 반항이 있었지만, 피오니안은 행여 레이라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생길까 무서워 힘도 쓰지 못하고 발톱도 숨겨야 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손에 손쉽게 몸을 발라당 까뒤집어야 했다.

“으아악!”

“아이고 예뻐라, 우리 아가 배고파쪄요?”

이곳의 옷은 아주 얇은 천으로 몸의 최소한만을 가린 형태였다. 그러니 레이라는 단추나 지퍼를 열 필요도 없이 그저 천 쪼가리를 슬쩍 치우는 것만으로도 제 가슴을 드러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눈앞에 드러난 커다란 가슴은 피오니안에게 퍽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새하얀 살결 위에 톡 도드라진 붉은 유두는 눈 쌓인 겨울에 열린 딸기처럼 귀엽고 앙증맞고 먹음직스러웠다.

상상 속으로만 레이라의 나신을 그려보았던 피오니안은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그녀의 여체에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우리 용이 찌찌 먹을까요?”

“…….”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넋까지 놓아 버린 피오니안은 그 탐스러운 가슴을 멍하니 응시했다. 핥거나 빨아보라는 것처럼 그의 눈앞까지 다가온 붉은 유두가 슬로우 마법을 건 것처럼 서서히 움직였다. 유혹하듯 알랑거리는 붉은 과실이라니.

피오니안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이, 아니 제 모든 감각이 레이라의 유두를 향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피오니안은 기어코 제 코앞까지 들이밀어 진 유두를 홀린 것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입맛을 다시던 그가 긴 혀를 내밀어 붉은 유실을 핥았다.

“하읏.”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레이라의 얼굴과 가슴을 오갔다. 고양이의 혓바닥처럼 까슬한 혀가 붉은 유두를 한 번 더 훑어 내렸다. 둥그스름한 입이 쩍 벌어지며 가슴을 콱 깨물었고 보드라운 푸딩을 할짝대듯이 조심스러운 혀 놀림이 이어졌다.

장난이 심했나 싶어 멋쩍어하던 레이라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어졌다.

발톱을 숨긴 자그마한 발이 레이라의 옷자락을 향해 발톱을 세웠다. 투둑, 툭. 힘없이 찢긴 천 조각이 바닷바람에 살랑살랑 흩어지자 하얀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생크림처럼 다디단 살결을 음미하던 피오니안은 머릿속이 붉어질 정도로 야릇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의 목에서 그르릉,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피, 피오니안.”

“달군.”

착각이 아니었다. 만족스러운 듯 새어 나온 목울음이 흉흉했다.

작은 드래곤이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레이라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이미 얼굴이 터질 것처럼 익어 버린 레이라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희고 통통한 가슴을 만지려 손을 뻗던 피오니안은 제가 지금 인간화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멈칫거리던 그가 재차 하얀빛을 휘감았다.

피오니안은 작은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눈이 튀어나오게 놀란 레이라가 저도 모르게 피오니안을 슬쩍 밀쳐 내려 손을 뻗었을 때 앙증맞은 남자아이는 천사처럼 미소를 지었다.

“레이라. 찌찌, 준다고 했어.”

“…….”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그렇다 치고 말투까지 어린아이처럼 변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양 빛에 그대로 내놓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과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같은 색 속눈썹을 깜빡이며 레이라를 향해 눈을 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앙증맞게 통통한 볼은 핑크빛이 돌았고 동그란 눈동자는 몹시 사랑스러웠으며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작고 귀여운 팔로 제 허리를 휘감아 안고 볼을 비비는 것이 외설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스러웠다.

레이라는 순식간에 이 작은 아이에게 마음을 홀라당 빼앗겨 버렸다. 레이라는 아이를 밀쳐 내려던 것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아이를 거부하려던 손을 거두는 대신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맘껏 쓰다듬었다.

“찌찌 주세요.”

“으, 으응?”

열렬히 얼굴을 비비적댔는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레이라의 손에서 부드럽게 흩어졌다. 레이라의 옆구리에 얼굴을 폭 파묻은 피오니안이 짙게 미소를 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유두를 스쳐 가슴을 감쌌다. 작은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손에 차고 넘치는 가슴을 즐기기에는 퍽 좋았다.

‘하, 이래서 남자들이 여인의 가슴을 좋아하는 거로군.’

조금 전 다디달고 부드러웠던 감촉을 되새기듯 피오니안의 작은 입술이 새초롬히 도드라진 유두를 물었다. 피오니안은 라즈베리 같은 유두를 입 안에 넣고 굴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읏, 피, 피오니안?”

“……우웅?”

유두를 꼬집고 문지르는 손짓은 아이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유두를 핥고 빨아들이고 작게 깨물 거리는 입도 마찬가지였다.

‘애무하고 있으면서! 이토록 천진난만한 표정이라니! 그것보단 어린아이잖아!’

몹시 혼란스러워진 레이라의 눈망울이 흐릿해졌다. 이대로 느껴도 되는 건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윽…….”

흔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가슴을 실컷 맛보던 피오니안이 쪽 소리 나게 유두를 빨아내며 입을 열었다.

“레이라, 아무리 먹어도 찌찌가 나오지 않는데……”

“……그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나온다고 했는데.”

귀엽고 통통한 손가락이 레이라의 양 가슴을 오가며 기이한 문양을 그려 냈다. 금세 그려진 문양이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 듯 사라짐과 동시에 레이라는 그것이 마법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오니안! 대체 무슨!”

“찌찌,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저 장난을 좀 치려 했을 뿐인데 민망해 죽을 것 같아진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대놓고 피우는 애교에 흐뭇하게 웃은 피오니안이 눈짓으로 테라스 문을 열어젖혔다. 사근사근 발을 놀려 그녀를 얌전히 침대 위에 눕힌 그가 미려한 손가락으로 레이라의 유두 근처를 지분거렸다.

폭신한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 멍하니 피오니안이 하는 양을 쳐다보던 레이라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든 것은 그때였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나신을 음미하듯 훑어보며 간질이 듯 손가락으로 몸을 쓸어 내렸다. 동시에 그가 가슴 밑동을 그러쥐듯 잡고 위를 향하게 쓸어 올렸다.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유두 끝에서 하얀 액체가 몽글몽글 맺히기 시작했다.

“뭐, 뭐…….”

충격적인 광경에 상황 판단이 흐려진 레이라는 흐린 눈을 했다.

한편 제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하얀 물방울에 피오니안은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며 입을 벌렸다.

그보다 더 벌어진 입 모양을 한 레이라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피오니안이 붉은 혀끝으로 가슴을 쓸어 올렸다.

간지럽게 흘러내린 물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듯 혀를 놀리자 금세 그의 혀가 유두를 향해 닿아 왔다.

피오니안은 달콤한 향기가 나는 살을 한 움큼 쥐어 빨았다. 혀끝이 녹아드는 기분을 느끼며 다디단 젖을 흠뻑 들이마셨다.

“하악, 아아!”

레이라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도통 무슨 느낌인지 모를 기이한 감각이 유두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름 모를 감각에 저항하면서도 아쉬움에 몸을 비틀었다. 커다란 손에 금세 제압되어 바르르 떨리는 몸이 가녀리게 흔들거렸다. 아련한 상실감과 함께 드는 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묘한 쾌감이었다.

레이라는 조각 같다고 생각하던 그의 입술이 유두를 삼켜 거칠게 빨아들일 때마다 영혼이 빨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은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피오니안은 그녀의 혼란과 반대로 아주 태연히 레이라의 젖가슴을 빨았다.

화끈거리는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유백색 액체에서는 명백히 우유 냄새가 났다. 레이라는 그 사실에 당장 숨고 싶을 만큼 수치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도통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유두를 쭉쭉 빨아 당기는 붉은 입술에 하얀 물방울이 묻어났다. 혀를 내밀어 그것까지 핥아먹은 그가 잘생긴 눈썹을 구기며 색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황홀해 미칠 것 같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혀끝을 내밀어 희롱하듯 유두를 지분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레이라의 눈에 비쳤다. 당장 꺼지려는 불씨처럼 흔들거리는 레이라의 눈동자가 퍽 혼란스러워 보였다.

“달고, 향기로워.”

“으읏, 대체…….”

보란 듯이 그녀의 양쪽 가슴을 모아 쥐어 입술을 내리누른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질문에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몰라서 묻냐는 듯 약을 올리는 눈빛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럽게 가슴을 모아 거칠게 빠는 그가 야했다. 색욕의 ㅅ자도 모르는 듯 반듯하게만 굴던 피오니안이라 더 그런 것도 같았다.

먼지구름이 일렁이는 사막처럼 뜨거워진 피오니안의 눈빛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레이라가 제 목을 쓸어내렸다. 그는 그녀의 몸짓이 유혹처럼 느껴졌다. 덧없이 씌워진 콩깍지는 그녀에게 더 짙은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양 가슴을 그러모아 연신 주무르기를 반복하는 손끝이, 유두를 깨물고 빨아 당기는 입술이 어찌나 집요한지 레이라는 몸을 바르르 떨며 살짝 가 버렸다.

‘젖이, 젖이 나오다니!’

혼란스러워 술렁이는 머릿속은 뒤쫓아 온 쾌감에 흐려졌다. 제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는 사실이 이상했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 죽겠다는 듯 빨아 마시는 그의 태도에 감화된 듯 레이라는 점점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다.

꼭 제가 그의 아이를 낳은 뒤의 상황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가 제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 그가 조금 전처럼 아이의 모습이었다면 레이라는 이 행위를 거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며 제 가슴을 탐하는 조각 같은 남자의 모습이…….

“아앙!”

자지러지듯 신음을 토해 낸 레이라의 눈이 색스럽게 빛났다.

살갗을 쪽쪽 빨아 대느라 나는 야릇한 소음과 레이라가 몸을 비틀면서 내는 시트 자락의 소리가 피오니안의 귓가에 흐느적거렸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좋아 죽겠다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신음 소리는 이미 가슴에 박혀 버린 뒤였다.

마셔도 마셔도 부족한 것처럼 목 안이 말라왔다. 후끈거리다 못해 활화산처럼 부글거리는 내부에서 그녀의 체액을 더 흠뻑 마시지 못해 안달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하체의 느낌은 기묘했다.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인 피오니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제 고간을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달콤한 젖은 끈적하게 입 안으로 녹아들어 황홀하게 삼켜졌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슴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모양이 흐트러지는 것이 퍽 가여웠으나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넘치듯 차오른 도취감에 끙끙대며 그는 그녀에게 더 달라붙었다.

“흐응, 그만, 그만해…….”

“먼저 준다고, 춥, 하지 않았나.”

젖은 살갗을 빠는 소리가 어찌나 야릇한지 레이라는 제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쪽, 쪼옵, 츄릅.

일부러 소리를 내며 가슴을 빠는 건가 싶어 그를 흘겨보려 해도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녀의 정신을 흩어 버렸다. 정말 이상하고, 좋았다. 전보다 그가 더 사랑스러워 보였고 마음껏 안아 주고 싶기도 했다.

유두 끝이 간질간질해지면 붉은 입술이 물어뜯듯이 달라붙어 깨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젖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힘주어 빨아 당기는 느낌이 미치도록 황홀했다. 아쉬울 때마다 핥아 대는 뜨거운 혀도, 가끔 자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닿아 오는 송곳니까지 전부 좋았다.

이미 하체는 축축하게 젖어 버렸는지 시트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차가웠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얼굴을 껴안아 제 몸 위로 끌어당겼다. 자석처럼 당겨진 그가 제법 익숙하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무릎을 세운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고간을 더듬으며 딱딱해진 음경을 쓸어내렸다.

“윽, 레이라.”

“아아……, 정말 아기가, 되어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흐읏.”

“하, 그럴 리가.”

줄줄 흘러내리는 젖을 혀로 핥으며 씨익 웃는 피오니안의 모습에 레이라는 재차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처음, 처음이라면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보고 들은 것이……. 후, 얼마인데.”

피오니안은 이런 기분일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그녀를 사랑한다는 제 마음을 인정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보다 레이라를 사랑한다는 남자들보다 더 빨리 그녀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 모든 것이 처음이듯 그녀의 모든 순간들을 함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피오니안은 제어가 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들이 생소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욕심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와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것이 사랑이고 어쩔 수 없는 질투이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씁쓸해졌다. 피오니안은 진득하게 가슴에 달라붙은 감정의 편린을 대신해 적극적으로 혀를 놀렸다.

높아진 신음을 따라 레이라의 체온도 한껏 달아올랐다. 간지러운 하부를 만지고 싶어도 부끄러움에 잠식된 머리는 그것을 거부했다. 저절로 배배 꼬이는 다리는 한들한들 피오니안을 유혹했다.

유두를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던 그가 그녀의 다리 짓을 발견한 것은 한참 후였다. 퉁퉁 불어 버릴 정도로 빨린 유두는 붉디붉게 물들어 버렸다.

뜨거운 입술이 떨어진 자리로 미세한 바람만 불었을 뿐인데도 레이라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한껏 달궈 놓은 여체는 작은 바람마저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짙어진 피오니안의 눈빛이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제 입술이 떨어졌는데도 몽글몽글 맺히는 젖을 다시 입 안으로 삼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야하게 그의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이곳도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긴 손가락이 스친 것은 매끈한 음부였다. 하으으, 작고 기다란 숨을 내뱉은 레이라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애절하게 피오니안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피오니안의 손가락이 톡 도드라진 클리토리스를 내리눌렀다. 꾹 누르고 빙글빙글 돌리는 손장난에 왈칵 터진 애액이 부끄러워 레이라는 고개를 돌렸다.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군.”

“…….”

“그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케이크가 더 먹기 좋은 법이지.”

피오니안은 순식간에 레이라의 음부에 코를 박았다. 짙은 향기가 나는 투명하고 미끈한 체액을 날름 할짝거린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 정말…….”

맛있다는 뒷말이 삼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라의 음부를 싹싹 핥는 피오니안의 혀끝은 환희에 차 보였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머리를 감싸 쥔 채 허덕이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몰아치는 쾌감을 느꼈다.

“하으윽! 피오, 니안, 아앗!”

유두를 핥을 때처럼 옅은 마나를 실은 혀끝이 클리토리스를 스치고 외음부를 핥아 내렸다. 간질간질한 쾌감은 쌓이고 쌓여 커다란 폭풍을 그려 내고 있었다.

레이라는 허리를 휘고 어깨를 비틀며 색스럽게 울었다. 피오니안은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겨 넣었다.

달콤한 꿀처럼 느껴지는 애액이 퐁퐁 솟아나는 질구에 잘 뻗은 손가락이 닿았다. 조심스레 애액을 바른 뒤 미끄러운 틈을 파고든 손가락이 레이라의 질 벽을 찔러 댔다.

“하으응! 아윽! 아앙!”

조여 오는 압박감에 제 손가락이 잡아먹히는 것은 아닌지 잠깐 고민하던 피오니안이 입술을 떼고 제 옷을 전부 벗어 던졌다. 마법처럼 사라진 옷가지에 드러난 나신은 그야말로 조각 같았다.

흥분에 달달 떨던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 정도였다.

곧은 쇄골에서 미끈하게 뻗은 어깨로 이어지는 선과 꽉 짜인 근육을 장착한 늘씬한 몸은 그야말로 조각이었다.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만들어 전시하던 무명 조각가의 전시회에서 영애들의 뺨을 붉히게 했던 그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조각이 얼마에 팔렸더라……?’

괜한 생각을 하며 침을 꼴깍 삼킨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하체로 시선을 슬금슬금 옮겼다. 몸을 웅크린 상태라 조각상의 하체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것이 있었다. 피오니안의 완벽한 몸매에 감탄하던 그녀의 심장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레이라의 시선이 꽂힌 곳은 피오니안의 음경이었다.

“그, 그게.”

“음?”

흔들거리는 레이라의 눈동자를 따라 시선을 내린 피오니안이 멋쩍게 웃었다. 그의 음경은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외모에 비한다면 아주 이질적인 것이라는 걸 그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징그러운가?”

“그, 징그럽다기 보다는…….”

사실 조금 징그러웠다.

흉흉하게 솟은 핏줄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레사도 에틸도 나트하의 것도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성기의 기둥에 올록볼록 튀어나온 돌기들은 너무나 흉악했다. 심지어 여태껏 레이라가 보아온 세 사람의 음경 중 피오니안의 것이 가장 커다랬다.

‘그 크기에! 저런 모양이라니!’

레이라의 표정에 속마음이 드러났는지 피오니안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그, 많이 징그러운가?”

“아, 아니야 너무, 너무 커서…….”

어쩐지 기분 나쁜 반응은 아닌지라 피오니안의 미간이 반듯하게 펴졌다.

레이라는 그 변화가 우스워 작게 웃어 버렸다. 피오니안은 그저 레이라가 웃으니 피식 웃고는 제 것을 슥슥 문질렀다.

“사실 이렇게 만져 보는 것도 어색하다.”

“……그래?”

“나는 이것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귀족 영애들의 손보다 더 고운 손이 흉악스러워 보이는 물건을 흔드는 모습이 퍽 어색하게 보였다. 그래도 긴 손가락에 감겨 있는 음경이 피오니안의 것이라면 어쩐지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여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는 것이 불쌍하기도 했다.

레이라는 제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 나도 만져 봐도 돼?”

“안 될 것 없지. 이제 이것은 네 것이니.”

레이라가 몸을 일으키자 유두 끝에서 젖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제 가슴을 내려다보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피오니안을 쏘아보았다.

“이게, 이건 대체…….”

“사실 먹어 보고 싶었다. 나는 한 번도 어미의 젖을 먹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시 피오니안이 안쓰러워진 레이라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아! 저 얼굴이 문제였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려다가도 저 예쁜 얼굴이 속상해하거나 시무룩해하면 부정적인 감정이 쏙 사라져 버리곤 했다.

어찌 되었든 위기를 잘 넘긴 변태 꿈나무 드래곤이 눈동자를 굴리며 레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피오니안의 핑계는 반만 진실이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으니 어미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의 기분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레이라의 가슴에 마법을 걸었던 이유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곳에서 나올 맛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살 내음처럼 다디단 젖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던 마법 한 가지를 떠오르게 했다. 사실 줄줄이 몇 가지가 더 떠올랐으나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참아야 할 것 같았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에게는 말하지 못할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에 제 것을 쥐여 주었다.

손에 닿은 뜨거운 음경에 시선을 빼앗긴 레이라는 그새 따지던 것도 잊어버린 채 얌전히 손을 움직였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기는 딱딱해 보였던 것과는 달리 말랑말랑 부드러웠다. 어쩐지 작아졌을 때의 모양도 궁금해 레이라는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흐윽.”

‘여기가 약하구나.’

고개를 주억인 레이라는 선액으로 번들거리는 피오니안의 자지를 흔들고 문지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피오니안은 귀두와 귀두 아래 그리고 돌기들이 특히 약한 것 같았다.

눈을 반만 뜬 채 제게 급소를 내맡기며 더운 숨을 토해 내는 미남자의 모습은 꼬물꼬물 숨겨왔던 레이라의 음란함을 불러일으켰다. 단단하게 뭉친 복근을 밀어 피오니안을 눕힌 레이라가 그의 음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악.”

숨넘어갈 듯 놀란 피오니안은 제 것을 입에 문 채 요염하게 눈웃음치는 레이라를 보며 경주마처럼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작은 눈 여우 같은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다. 언젠가 만난 적 있던 서큐버스도 그녀보다는 덜 선정적이었다.

그는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귀두를 날름날름 핥아 대는 혀끝이 요망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쾌감은 피오니안의 단단한 정신마저 흐트러트렸다.

부드러운 점막에 닿을 때면 간질간질한 느낌에 미간이 찌푸려졌고, 까슬까슬한 혀끝이 제 귀두를 훑고 지날 때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힘을 준 혀끝이 요도구를 파낼 듯 휘저으면 허리가 비틀렸고, 작은 이에 기둥이 긁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정액을 토해 버릴 뻔했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젖을 먹고 있을 때처럼 정신이 혼몽했다.

“하웁, 으응…….”

“으윽, 하아…….”

한껏 억눌린 신음이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피오니안은 숨을 어떻게 쉬었던 건지 잠시 헛갈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래위로 흔들거리는 레이라의 얼굴을 붙잡아 키스를 퍼붓고 싶다가도 그녀의 얼굴을 제 샅에 더 꽉 문지르고 싶은 거친 생각이 일기도 했다.

붉은 입술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제 것을 물어 삼키는 것이 기꺼웠다. 반도 삼키지 못하는 데도 죽을 만큼 좋았다. 버석버석 말라가는 입 안이 어서 그녀를 잡아먹어 버리자며 충동질을 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릴 때까지 피오니안의 것을 물고 빨던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시트를 꽉 그러 쥔 채 처음 겪는 쾌감에 잔뜩 흐트러져 있던 피오니안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과 야릇한 눈빛을 오갔다.

거칠게 레이라를 잡아 눕힌 채 자세를 거꾸로 뒤집은 피오니안이 그녀의 질구에 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후,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흐읏! 읏, 그냥, 넣어도 될 것 같, 아앙!”

다시 유두를 베어 문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가슴에서 젖을 쪽쪽 빨아 마시며 하부를 들쑤셨다. 제법 거친 손놀림이었으나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질질 흐를 정도로 새어 나온 그녀의 애액과 동물적인 감각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그의 본능 덕분이었다.

“그래도, 너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단호한 말씨에 붙은 진득한 성욕이 기꺼워 레이라는 교성을 지르면서도 입술을 끌어올렸다.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다 질구를 찌르는 손놀림이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분명 한 손은 몸을 지탱하고 제 가슴을 빨며 남은 한 손으로 애무를 하고 있을 텐데!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꿰뚫은 쾌감이 레이라의 전신을 짓뭉갰다.

“아아아앙!”

분수처럼 터진 애액이 피오니안의 고운 손을 흠뻑 적셨다. 그녀의 아래를 천천히 들쑤시며 후희를 즐기듯 클리토리스까지 문지른 피오니안이 느릿하게 눈을 치떴다. 어느새 밤이 불러온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속눈썹이 그림처럼 느껴졌다.

“하아…….”

홀린 듯 피오니안을 바라보던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눈동자가 세로로 쫙 갈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레 드러난 최상위 포식자의 존재감이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려던 때, 절정에 떨리던 몸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빠르게 뛰는 맥박을 다독이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순간 미안하다는 듯 풀어진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레이라는 잔 떨림이 느리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긴 시간 동안 반려는커녕 제 정염을 풀 상대조차 두지 않았던 그였기에 과연 제 몸을 원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시간만 아까울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레이라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고 움찔거리며 그를 원하는 제 몸을 신경 쓰기로 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빨리, 들어와 줘.”

“기꺼이.”

안도한 것처럼 눈빛을 누그러트린 그가 댄스 신청을 받은 귀족처럼 고아하게 말했다. 레이라는 갑자기 튀어나온 피오니안의 재치에 웃어 주면서도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피식 웃은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손 대신에 자그마한 발을 쥐고 발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는데도 그녀는 발등에 불길이 닿은 것처럼 뜨겁다고 느꼈다.

“하아, 뜨거워.”

새우처럼 곱아든 레이라의 발등이 반대로 몸을 꺾으며 활짝 펴졌다. 순식간에 레이라를 꿰뚫은 피오니안의 성기가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흐아앙!”

“으윽.”

레이라는 커다란 몽둥이에 찔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의 경험이 처음인 것에 비하자면 배려를 차고 넘치게 받았다. 충분히 풀어 주고, 애액이 넘쳐흘렀는데도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놓고 싶지가 않아 다리를 피오니안의 허리에 휘감은 레이라가 숨을 할딱였다.

“으으응, 너무, 너무 커.”

“후우……. 많이 힘든가?”

시트를 찢어 버릴 듯 쥔 피오니안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좁았다. 그는 그녀의 낭창한 다리를 쓸어 올리며 허벅지를 문질렀다. 힘이 풀렸다가도 다시 꽉 조여드는 감각이 황홀했다. 끊어 버릴 것처럼 조이면서도 오물오물 무는 내벽이 주름 하나하나 돌기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물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의 성기가 그녀의 발길질에 아픔을 느낄 정도로 급소이긴 했으나, 그래도 드래곤의 신체 인지라 절대 끊어 먹거나 자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끊어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한껏 조여드는 그녀의 내부는 그에게 생경한 자극과 기분을 들게 했다.

“원래, 윽, 이런 것인가.”

“하아……. 뭐가?”

꽉 들어찬 뱃속이 버거워 숨을 몰아쉬던 레이라가 측은한 눈을 했다.

피오니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곧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레이라의 볼이 더 붉어졌다.

“내 것을, 아주 맛있어 죽겠다는 듯이 잡아먹고 있는데. 후, 끊어 버리고 싶은가?”

“…….”

언젠가 보았던 새빨간 토마토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한층 힘이 풀린 질 벽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긴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가슴을 쥐었다. 마주친 눈빛에 들어찬 흥분이 전염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나른하게 녹아내린 두 사람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거칠게 움직이고 싶은 것을 최대한 참느라 구겨진 미간마저 섹시한 남자가 그녀의 가슴을 아기처럼 핥고 빨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레이라는 모르고 있겠지만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서서히 움직이는데도 음경에 돋아난 돌기가 그녀의 질 벽을 박박 긁어 댔다. 아찔하게 긁힌 내벽이 움찔움찔 몸을 떨며 자지를 물어 삼켰다.

“아으응, 흐으…….”

조금씩 빨라지는 허리 짓에 간지러운 곳을 긁는 것처럼 시원한 쾌감이 척추를 따라 전신을 휘감았다.

레이라는 그가 처음이듯 저도 처음 겪는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새로웠다.

속살을 긁고 자궁구를 내려치는 귀두가 무자비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절정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프지 않은지 불편하지는 않는지 살피는 눈동자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피오니안은 허리를 쾅쾅 들이받을 때마다 레이라의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젖을 피하지도 않고 핥아 마셨다. 둥그렇게 말고 있는 허리가 불편했으나 도무지 가슴에서 입을 떼 낼 수가 없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도 미치도록 보기 좋았다.

몇 천 년 만에 겪는 쾌감이 정신을 죄 갉아먹는다 해도 그녀를 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고통처럼 찾아온 사정감을 미루고 미루면서,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안을 잔뜩 헤집었다.

레이라는 자꾸만 흐르는 젖과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마시는 피오니안의 행동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기도 했고 좋아 죽을 것 같기도 했다. 쭉쭉 빨려 나가는 젖의 느낌에 허리가 달달 떨려 왔다. 기가 빨려 나가는 것처럼 허해지다가도 불이 붙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뜨거운 입술이 잔뜩 빨려 욱신거리는 유두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젖을 짜냈다. 레이라는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내질렀다.

“아으으응! 안 돼, 흐응!”

피오니안은 굵고 긴 성기가 질 안을 오갈 때마다, 유두를 쪽쪽 빨 때마다 달라지는 레이라의 음성에 귀가 녹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제 품 안에서 흐트러진 몸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제법 거세진 추삽질이 끝을 알려 오듯 빨라졌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엉덩이를 쾅쾅 들이박았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를 쥔 손이 두 사람의 교합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하얀 체모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거칠게 문질렀다. 질질 흘러나온 젖이 달큼한 내음을 풍기며 시트 위로 떨어졌다. 레이라의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춘 피오니안이 신음을 삼키며 제 마나를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으으음! 으응!”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 와 전신으로 흩어지는 마나가 절정을 더 바짝 당겨 왔다.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처럼 하느작대던 몸에 힘이 샘솟았다. 강렬한 절정과 함께 반짝이는 빛무리가 허공을 빙빙 떠돌았다.

“아으으윽! 하아앗!”

“흐윽, 후으…….”

폭발하듯 터진 정액이 그녀의 자궁을 가득 채웠다.

얻어맞은 것처럼 강렬한 자극이 레이라에게 한 차례 더 퍼부어졌다. 일반적인 사정이 아니었다. 마나를 가득 품은 정액은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어 올곧이 흡수되었다. 사정 전 입 안으로 넘겨준 마나와 충돌을 일으킨 마나가 레이라의 몸 곳곳에서 작은 불꽃을 튀겼다.

레이라는 절정에 절정이 이어진 것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달달 떨리는 몸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이러다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은 마약처럼 다시 그를 원하게 했다.

물을 가득 채워 넣은 풍선처럼 부푼 음부에서 질질 새어 나온 정액이 피오니안의 음경을 타고 몽글몽글 흘러넘쳤다.

허리가 빠질 것 같은 강렬한 쾌감을 느끼던 피오니안이 다시 그녀를 다독이듯 몸을 쓸어내렸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진정되는 것 같자,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제 몸 위로 레이라를 앉혀 놓은 채 아직 빼지 않은 제 것을 부드럽게 문지르던 피오니안이 짓궂게 웃었다.

“조금 더 할 수 있겠지?”

“…….”

분명 기진맥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정사였는데도 그녀의 몸은 활력이 넘쳐 났다. 이제야 그가 제게 마법을 썼음을 깨달은 레이라의 눈이 뾰족해졌다.

“오해하지 마라. 그저 네가 힘들까 걱정되어 그랬으니.”

“거짓말.”

레이라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를 치대는 피오니안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아직도 제 가슴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젖까지 거슬리지 않는 것을 보니 단단히 빠진 것 같았다.

고아한 미인이 눈을 색스럽게 빛내는 것이, 야릇하게 허리를 돌리며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는 것이, 허리를 숙이게 하며 젖가슴을 다시 베어 무는 것이 전부 좋았다. 무릎을 세운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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