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선물 (18/26)

17. 선물

갑자기 시작된 정사는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레이라는 분명 기진맥진 쓰러져야 정상일 것 같은데 눈앞이 맑고 정신이 또렷한 것이 신기했다.

마법의 힘이란 위대했다. 피오니안 역시 정액을 몇 리터나 배출했음에도 어디 하나 피곤한 구석 없이 오히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피부가 깐 달걀처럼 매끈매끈해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허기를 달래고 있을 무렵 나트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레이라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마법 구를 작동시켰다.

“레이라!”

“나트하.”

“하하, 생각보다 귀가가 늦어 연락 드려 봤어요. 오늘도 그, 귀가하지 않으실 건가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나트하의 태도가 퍽 어색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라며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제 행동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레이라는 빙긋 웃으며 제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피오니안은 그것이 레이라가 장난을 치려 할 때의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며칠 더 돌아다닐까 했는데, 왜요? 보고 싶어지기라도 했어요?”

“당연하죠. 저는 항상…….”

“보고 싶습니다. 레이라.”

못 참겠다는 듯이 툭 튀어나온 고백은 분명 에틸의 목소리였다.

‘아니 두 남자는 뭘 하고 있길래 함께 있는 걸까?’

“에틸?”

“네. 레이라.”

“두 사람 함께 있어? 나만 빼고 사이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같은 마음을 가졌으니까요. 참고로 저는 피오니안 님과도 사이가 좋습니다.”

철면피라도 깐 것 같은 대답에 까르르 소리 내 웃은 레이라를 보며 피오니안도 미소를 지었다.

“뭐 두 사람이 정 보고 싶다고 하면 오늘 귀가를 해 줄 수도 있지? 그렇지, 피오니안?”

“그렇다.”

앞다투어 보고 싶다며 소리 지르는 두 남자의 목소리에 레이라는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활짝 웃는 레이라의 얼굴을 가슴 속에 새겨 넣은 피오니안이 그녀를 대신해 곧 귀가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레이라는 언제 보채기라도 했냐는 듯 정중하게 굴며 통신을 끊은 두 남자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잘 살피고 있던 그도 그것을 눈치챘다.

“식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귀가를 하지.”

“응! 아 참, 다음에 또 오자. 나 어제오늘 아주 행복했으니까!”

“그래. 다음엔 다 같이 오는 것이 좋겠군.”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진 속눈썹이 그의 눈동자 절반을 집어삼켰다. 나직이 눈을 내리깔면서도 따스하게 미소 지은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레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 침을 흘리지 않았는지 제 턱을 쓸어 보기까지 했다.

“피오니안, 피오니안 얼굴은 너무 유해해.”

“음?”

피오니안은 이해하지 못한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레이라는 제 심장 근처를 부여잡고 인상을 구겼다.

✲ ✲ ✲

레이라는 저보다 더 집주인 같아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귀환을 환대해 주는 것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라와 피오니안을 정중하게 저택 안으로 들인 나트하는 자연스럽게 사용인들을 부리며 시종일관 예의 그 다정한 미소를 장착한 채였다.

‘대체 하루 사이에 공작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아하니 나트하는 아주 제 짐을 공작저로 옮겨 놓은 것 같았고 사용인들은 그를 레이라의 약혼자 혹은 부군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묘한 것은 에틸에게도 피오니안에게도 똑같은 취급을 하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간에 주름을 만든 레이라는 네 사람이 모여 앉은 응접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루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 각하께서 공녀의 부군은 세 사람이라고 공표하셨어요. 폐하의 인가도 받아 놓으셨고요. 아무 문제없는 일이니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칙명까지요.”

“네? 그게 갑자기 왜, 아니,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이었나요?”

“각하께서 미리 폐하께 언질을 주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정확히 인가가 떨어진 것은 피오니안 님의 등장이 큰 몫을 차지한 거지만요.”

“피오니안이요?”

커다래진 붉은 눈동자가 피오니안을 향했다.

오렌지 필과 견과류를 듬뿍 넣은 비스코티를 오도독오도독 깨물던 피오니안이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입을 헹궜다.

“무려 내 반려인데, 그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겠나. 그저 너를 위한 일이니 내 존재를 드러내도 된다 했을 뿐이다.”

“……귀찮으니까 절대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빙긋 웃은 피오니안의 표정은 레이라가 귀여워 죽겠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네가 귀찮을까. 나트하는 내 등장이 큰 몫을 했다 했지만, 나트하와 에틸은 제국에 맹세를 한 여섯뿐인 기사 중 두 사람이잖나. 저 두 사람이 싫다고 제국을 떠나 버린다면 그만한 손실이 또 없겠지. 이미 에틸은 한차례 협박까지 불사했다고 알고 있다.”

“……에틸?”

가만히 다리를 꼬고 앉아 흐뭇하게 웃던 에틸이 피오니안과 비슷한 표정을 했다.

“레이라, 제 아가씨는 거리낌 없이 당당한 모습이 더 아름답고 잘 어울립니다. 그깟 저주 때문에 당신이 손가락질 받을까 숨어 지내야 한다면,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듣게 된다면, 혹여 그 때문에 작은 상처라도 받는다면 저희 세 사람은 참지 못할 거라는 말을 황제께 전했을 뿐입니다.”

“…….”

“저희는, 당신이 떳떳할 수 있기를, 당당히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틸…….”

행복해 죽을 것 같이 미소를 지은 에틸과 나트하 그리고 피오니안의 시선은 온통 레이라를 향해 있었다. 레이라는 그저 그 시선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물이었다.

레이라는 세 사람에게 미안했고 당당히 연인이라 공표할 수 없는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저를 사랑함으로써 평생 숨어서 사랑해야 할 불편함과 모든 악조건마저 견디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온전히 마음을 내 보이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는데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은 이미 레이라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레이라의 가슴에 간지럽고 따가운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이렇게 받기만 하는데도……, 왜 더 받을 게 있는 거야. 난 다 주지도 못했는데.”

아직도 레이라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레사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전부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현실이 레이라에게 더한 죄책감을 심어 주었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긴 속눈썹 끝에 매달린 애처로운 물방울이 똑 떨어짐과 동시에 세 남자는 가슴이 철렁이는 것을 느꼈다. 벌떡 일어나 눈물을 닦아 주려던 세 남자는 그녀가 주먹을 쥔 채 어깨를 파르르 떠는 것을 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맙고, 미안해. 받기만 하는데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나는…….”

그들은 레이라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알기에 더 마음이 쓰이고 안타까웠다. 달래 주고 싶은 것을 꾹 참느라 말아 쥔 여섯 개의 주먹이 희게 질렸다.

아직 레사를 마음에 품은 레이라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은 그들이며, 그녀의 저주를 알고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겠다 마음먹은 것도 그들이었으니 세 남자는 레이라와는 다른 의미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중 단 한 명이라도 레이라의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 대신 그녀의 곁에 있을 이는 레사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들은 은연중에 레사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자신인 것 같았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깃든 진득한 감정이 아직도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레이라의 감정에 누구보다 예민한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세 남자가 그녀의 곁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레이라의 마음에 그들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조금씩 그녀의 마음에 끼어들고 있음을 알기에 행복했다. 레이라가 레사를 떠올리는 순간이 잦아들수록, 그들을 향한 눈빛에 애정이 가득해질수록 그들이 가진 죄책감은 희미해졌으니까.

저렇게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마저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저주로 인한 것이었다지만 결국 저희 세 사람 때문에 그녀의 가치관조차 바뀔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그들을 담아내려 노력하는 그녀의 어여쁜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로 괜찮았다.

침묵 속에 다시 눈물방울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참지 못한 피오니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다. 레이라.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니 전부를 주고 싶고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요. 레이라가 행복해야 저희가 행복하니까, 단지 그런 것일 뿐인 걸요.”

“…….”

제 손을 멀거니 바라보던 레이라가 작은 입을 달싹였다.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에틸이 손을 뻗어 레이라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레이라, 언젠가 물으셨었죠.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께서 제게 그것을 물었던 이후로 지금까지 쭉, 제게는 당신이 행복이었습니다. 피오니안 님께도 나트하에게도 당신은 그저 행복이니, 저희는 당신과 함께 행복할 미래의 바탕을 다졌을 뿐입니다.”

“그래도…….”

“지금도 물론 행복합니다만,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겁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 약속했으니까요. 그러니 저희도 노력할 겁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

“이처럼 당신이 행복해서 눈물을 펑펑 쏟아낼 때까지.”

다시 울음을 터트린 레이라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에틸의 말처럼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깃든 얼굴에 그제야 안도한 나트하와 피오니안이 자그마한 숨을 터트렸다.

“그래도, 다음에는 꼭 먼저 이야기해 줘.”

“알겠습니다. 깜짝 선물이 잘 먹힌 것 같아 좋군요.”

“천치 같은 모습 보여서 미안해. 세 사람 다 고마워. 그 말을 먼저 했었어야 했는데…….”

그래. 내가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겠어.

레이라의 눈동자에 깃든 마음을 그녀에 한해서만은 그 누구보다 예민한 세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 ✲ ✲

세 남자는 아주 쉽게 이야기했으나, 그들이 한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과 녹스 공작이 원한 것은 레이라가 가주가 되어 세 명의 부군을 들이는 일이었으니까. 세 명의 부군을 들이는 것은 황제가 따로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세간의 관심을 좀 받고 좋지 못할 이야기도 듣겠지만, 국법을 어기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이 한 가문의 가주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여성이 가주였다는 선례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

첫 번째 사례는 반역으로 내몰렸던 가문에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영애에게 주어진 명예직 비슷한 것 이었다. 두 번째는 여인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에 오른 기사에게 내려진 작위 수여였다.

지끈거리는 골을 짚으며 소드 마스터와 공작과 마법사의 징징거림을 번갈아 듣던 황제는 타이니아스의 등장에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전설의 귀환, 드래곤의 반려. 두 가지의 타이틀은 제국에 길이 남을 역사의 시작이자 모든 이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드래곤의 반려가 가주직을 물려받는다는데 그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녀에게 드래곤을 제외한 반려가 더 있다는 데 그 누가 뭐라 입을 놀릴 수 있을까?

그렇게 앓던 이를 뺄 수 있게 된 황제는 수십 명의 혼을 갈아 넣은 역작을 탄생시켜 주었다. 그 역작이란 한 권의 소설이었다. 약간의 모험담과 절절한 러브스토리로 점철된 소설은 아주 빠르게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제국을 온통 들썩이게 했다.

레이라와 피오니안이 데이트를 떠난 날, 황실 재무부에서 근무하는 테일러 백작은 일과 중 휴식 시간을 티타임으로 보내기로 했다.

평소 차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가 굳이 티타임을 보내려는 연유는 재무대신인 녹스 공작을 뵙겠다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에게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테일러 백작은 그녀에게 성심성의껏 치근댔고, 그녀는 티타임을 수락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하다가 드디어 약간의 휴식을 얻은 테일러 백작의 얼굴이 그녀를 보며 흐물흐물 풀어졌다.

“앉으시죠, 제 저택이 아니라 좀 불편하시겠지만, 황궁이니 어쩔 수 없군요.”

“어머 괜찮은걸요. 집무실 옆에는 이런 공간이 있었군요!”

나는 아주 근엄하지만, 너에게만은 다정하겠지 표정을 지은 테일러 백작이 그녀의 맑고 고운 얼굴에 흠칫 놀라며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어여쁘게 미소 지은 여인이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은 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을 아주 세밀하게 살피던 테일러 백작은 그녀는 손끝조차 우아함이 넘친다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깜짝 놀라 찻물을 뱉을 뻔했다.

“타이니아스님이 나타나신 것도 모자라, 무려 반려를 정하셨다는 것을 들으셨나요?”

“음? 대체 그것이 무슨 해괴한 말씀이시오?”

“해괴한 것이 아니라 어찌나 황홀한 이야기인지 모른답니다!”

“……무엇이, 그렇게 황홀하오?”

황홀하다는 단어를 만든 그녀의 황홀한 입술을 응시하던 그가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타이니아스, 라고 들은 것이 맞나?’

그녀는 그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그에게 측은한 표정부터 지어 보냈다. 다시 얼굴이 달아오른 테일러 백작을 보며 빙긋 미소 지은 그녀는 제국에 타이니아스님이 나타났다는 것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테일러 백작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녀의 말솜씨에 감탄하고 있었다.

“어머머! 아직 듣지 못하신 건가요? 아주 굉장한 러브스토리인데!”

“큼, 커흠! 흠!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오?”

“음……. 시작은 녹스 공녀께서 아주 몹쓸 병에 걸리신 거였대요! 요 몇 달 집에서 요양만 하신 연유가 그것 때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아주 안쓰럽게 생각하신 타이니아스님이 공녀님의 병을 치유해 주신다며 딱! 강림하셨는데!”

“커흠, 그런데?”

“두 분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신 거죠!”

오호라, 테일러 백작의 눈빛에 흥미가 가득 찼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자세를 바로잡은 테일러 백작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과 잘록한 허리 어여쁜 얼굴은 이미 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공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신 타이니아스님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셨대요, 그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셨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쉽게 자각하셨겠어요?”

“그렇지. 음, 그렇지요.”

“흠흠, 그렇게 타이니아스님은 공녀님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으셨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도 모르게 도망부터 치셨다고 해요! 그러니 혼자 남아 다시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공녀는 마음이 어찌나 아프셨겠나요!”

“어이구……, 그렇지요. 그 메르세데스 공자와 헤어진 지도…….”

테일러 백작의 말에 여인이 박수를 짝! 치며 공감했다. 순간 눈에 독기 비슷한 것이 들어찬 것 같았으나 테일러 백작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요! 그때 딱! 녹스 공녀를 위로해 주고, 보듬어 준 사람이 페르세나 백작이었대요.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공녀를 보살폈는지 공녀께서 페르세나 백작께 거의 마음을 열고 계셨다지 뭐예요?”

“역시 페르세나 백작은 공녀를 사랑하는 거였군!”

녹스 공작의 밑에서 근무하는 테일러 백작인지라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죠. 사실 그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흠, 의심하고 있었잖아요? 공녀님만 몰랐던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 대단한 무위를 가진 소드 마스터가 왜 공녀님의 호위 기사 노릇을 하겠나요? 그렇죠?”

“그렇고말고! ……지요.”

“호호, 그렇게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가까워지는데?!”

“타이니아스님이 다시 나타나셨어요. 타이니아스님은 뒤늦게 당신의 마음을 깨달으시고 공녀께 고백을 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셨죠! 다이아몬드 반지! 사파이어 목걸이! 루비 팔찌! 에메랄드 발찌까지! 그런데 찾아간 공녀께서는 이미…….”

“아차! 페르세나 백작!”

“그렇죠. 한발 늦으신 거예요. 첫사랑을 잃은 아픔은 드래곤조차 분노케 했어요. 분노한 타이니아스님은 페르세나 백작을 붙잡고!”

“붙잡고?”

프록코트 끝자락을 꽉 말아 쥔 테일러 백작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 한 그의 모습에 여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라져 버렸어요. 공녀는 어쩔 줄 몰라 했죠.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던 공녀는 차마 메르세데스 공자께는 부탁할 수 없어 러스티 부단장께 찾아갔어요. 드래곤이 잡아간 자신의 호위 기사를 되찾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혼자서는 힘들 테니.”

녹스 가문에 사지 멀쩡하고 심지어 늘 할 일 없이 떵떵거리는 기사들을 놔두고 왜, 굳이 나트하를 찾아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두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페르세나 백작을 되찾기 위해 떠나요. 러스티 경이 만든 드래곤 레어 추적 마법으로 타이니아스님의 레어를 하나하나 찾아가 보기로 한 거였죠.”

그 수많은 레어들 중 어찌 숨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대체 드래곤 레어 추적 마법이 무얼까? 하는 의구심은 잠깐 들었지만 이내 그런 의심은 접어 두고 두 사람은 연신 흥분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한 번,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레어에서 페르세나 백작을 다그치는 타이니아스님을 찾아냈어요! 타이니아스님은 페르세나 백작께 이렇게 외치고 있었죠. 감히! 내 사랑을 가로채다니!”

“아니, 그건 아니지! 큼, 크음, 그, 순서가 페르세나 경이 먼저이지 않소!”

어떻게 딱 세 번째 만에 찾아냈느냐, 혹은 그렇게 오래 걸려 찾아갔는데 왜 이제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두 사람은 손에 땀을 쥐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죠. 그래서 페르세나 백작은 말했어요. 저는 공녀를 사랑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당신은 공녀를 사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게 가로챘다 하시는 겁니까? 당당하게 따지는 말에 타이니아스님은 크게 당황했죠. 게다가 때마침, 딱! 그 둘 앞에 나타난 것은 러스티 부단장과 녹스 공녀셨어요!”

“거, 다행이로군. 혹 페르세나 백작이 잘못될 뻔했지 않소!”

“그렇죠. 화가 난 공녀께서는 타이니아스님께 말했죠. 당신은 제 마음을 빼앗고 도망치시는 것으로 제게 큰 상처를 주었으면서, 어찌 페르세나 백작마저 타박하실 수 있나요! 그는 당신이 없어 힘들었던 제 마음을 위로해 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타이니아스님은 공녀님의 말에 놀랐어요. 당신의 마음을 살피느라 그녀를 보살 펴 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아신 거죠. 타이니아스님은 페르세나 백작을 풀어 주었어요.”

“아이고.”

“공녀를 배웅하지도 못하고 몰래 눈물을 흘리던 타이니아스님을 안아 주신 것은! 아직 가지 못한 채 떨리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던 공녀님이셨어요. 공녀님은 그분을 따스하게 안아 주며 이렇게 말했죠. 타이니아스님,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공녀님의 고백에 타이니아스님은 비로소 웃을 수 있으셨죠.”

“아, 그렇게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 거로군.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면 페르세나 백작이 너무, 커흠. 안쓰럽지 않소.”

어느새 눈물을 가득 매단 테일러 백작이 애처롭게 어깨를 꺼트렸다.

“아직 끝이 아닌 걸요. 활짝 웃은 타이니아스님은 페르세나 백작과 러스티 부단장께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 하셨어요.”

“오, 그 소원이 무언가!”

어느새 애써 붙이던 어색한 존대마저 집어 치워 버린 테일러 백작이 다급히 물었다.

“페르세나 백작의 소원은 공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어요. 고민하던 타이니아스님은 공녀님의 표정에 그의 걱정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으셨고 공녀께서 반려를 한 사람 더 둘 수 있도록 해 주셨지요.”

“역시, 도량이 아주 넓으셨군. 페르세나 백작의 처지에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 않아!”

“후훗, 그렇죠.”

“어서, 계속하게나.”

“음, 타이니아스님은 러스티 부단장에게도 소원이 있느냐 물으셨어요. 러스티 부단장의 소원은…….”

“황금의 산? 마법의 보고? 대체 무엇을 비셨지?”

“러스티 부단장의 소원은 공녀의 행복이었어요.”

“무어!?”

“그는 공녀님과 여행을 하면서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린 거죠. 공녀님은 그의 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거리를 두었으나…….”

“쯧쯧, 사람 마음이 어찌 그리 쉽게 되는가.”

“그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타이니아스님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녹스 공녀님의 눈에서…….”

“설마!”

테일러 백작은 음흉하게 미소 지은 뒤 다시 뺨을 붉히며 이야기를 이어 가는 입술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타이니아스님은 당신께 끌려와서도 공녀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못했던 페르세나 백작과 위험하고 먼 곳까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노력하고, 단 하나의 소원조차 그녀를 위해 써 버린 러스티 부단장의 마음에 아주 깊이! 깊이! 감동했어요. 그리고, 공녀의 눈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 차오른 것을 보았죠.”

“그럴 수밖에 없지. 마음이 절로 쓰였겠어…….”

“더군다나 러스티 부단장의 그 미모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처량했겠나요? 하아……. 아무튼! 타이니아스님께서는 세 사람이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세 사람이니 그 사랑이 더 크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도량이 아주 하해와 같은 분이셨군…….”

“타이니아스님의 선택에 공녀께서는 걱정이 아주 많으셨지만, 러스티 부단장의 마음에 감동 받아 지금은 네 사람이 아주 행복하다고 해요.”

“그렇군. 아주! 다행이야.”

“책도 나왔는데, 읽어 보시겠어요?”

“고맙게 받도록 하지.”

몽롱하게 풀린 눈빛이 된 테일러 백작은 그녀가 건넨 책을 품에 안으며 하으으, 하는 숨을 내뱉었다.

야무지게 책을 편 테일러 백작이 도입부를 읽기 시작하자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여인은 입술을 씩 끌어올렸다. 데이지는 요녀처럼 미소 지으며 테일러 백작의 응접실을 떠났다.

드래곤과 반려, 그리고 공녀의 반려가 셋이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처럼 각색해 황제가 퍼트린 수십 명 문생의 혼을 갈아 넣어 만든 역작을 듣고 읽은 사람들은 전부 그들의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테일러 백작은 그것을 앉은자리에서 전부 읽고서야 제정신을 차렸고, 일 처리가 늦었다는 이유로 녹스 공작에게 된통 깨져야 했다.

✲ ✲ ✲

티타임과 함께 독서를 즐기던 레이라의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그것은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화가 났다 할 표정이었고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웃음을 참고 있다 할 표정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형형하게 뜬 화난 토끼 같은 그녀의 맞은편에는 찻잔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도 함께 가린 금발의 미남이 있었다. 그 금발 미남의 옆자리에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의 말간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보는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 그녀의 옆자리에는 디저트를 한입 가득 물고 달콤한 눈빛을 한 조각 같은 미남이 존재했다.

“푸흐, 아, 아하하하하!”

드디어 참지 못하고 터진 레이라의 웃음소리에 세 남자도 함께 미소 지었다.

“아! 대체 이런 생각은 누가 한 걸까?”

“무엇이 말인가요?”

빙긋 웃은 나트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웃음을 감추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한결 편안해 보이는 자세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민트색 찻잔이 달칵 이는 소리 하나 없이 같은 색 컵 받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트하, 정말로 드래곤 레어를 찾는 마법이 있나요?”

“그딴 건 없다.”

말문이 턱 막힌 나트하 대신 피오니안이 대답했다.

“그럼 피오니안이 사라졌을 때는 어디로 찾아가야 해?”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 레어 좌표들을 다 불러 줄 테니 나트하더러 데려다 달라고 해라.”

순식간에 설정해 두었던 좌표들을 나트하에게 알려 주는 피오니안의 모습이 꽤나 진지했다. 레이라의 의문처럼 드래곤 레어를 찾는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왠지 방금 만들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트하였다.

어딘가 멍해진 나트하의 얼굴을 구경하던 레이라가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 레어에도 데려가 줄 수 있어?”

“볼 것이 별로 없을 텐데. 뭐 보석은 잔뜩 있다만.”

“그러니까 더 궁금해! 다 같이 가자!”

“……알았다.”

자허토르테를 포크로 가르던 피오니안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피오니안이 알려준 좌표들을 서둘러 마나에 새기던 나트하가 시간을 살폈다.

“곧 이네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준비해야겠다!”

약속 시각이 다 되어 간다는 말에 벌떡 일어난 레이라가 뽀르르 제 방으로 사라졌다. 세 남자의 시선이 문을 나서는 레이라의 뒷모습을 좇다 빈 의자를 향했다.

“아주 빠르군. 다람쥐인 줄 알았다.”

“귀엽잖아요. 정말 두 분은 따로 만나실 생각이신가요?”

“그게 편할 겁니다. 아무래도 처음 인사 나누는 자리인데, 우르르 찾아뵈어 심기만 불편해지실지 모르잖습니까.”

“정말 괜찮을 텐데요. 오히려, 음…….”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나트하에 피오니안이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그새 버릇까지 닮나 보군. 걱정하지 말고 인사나 잘 나눠라. 나와 에틸은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은가.”

“알겠어요. 감사해요, 두 분.”

빙긋 미소 지은 피오니안과 에틸을 한 번씩 바라보던 나트하도 묘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 ✲ ✲

나트하와 똑같이 생긴 중년의 남자와 그의 미소를 닮은 중년의 여성, 긴 금발을 찰랑대는 젊은 여성 세 명이 녹스 가의 안으로 들어섰다.

일렬로 도열한 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고용인들이 박자를 맞춘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고용인들이 환영 인사를 하자 꼿꼿이 서 있던 녹스 공작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미모가 돋보이는 미중년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트하의 따뜻한 웃음을 닮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녹스 공작, 레이라, 나트하의 곁으로 다가섰을 때 레이라는 작게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엄청 닮았네.’

꼭 남매라 해도 믿을 것처럼 후작과 후작 부인은 비슷한 인상과 얼굴이었다. 찬란한 금발,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금안과 녹안으로 달랐지만 따스함이 가득 밴 것이 똑같았다. 웃음을 머금은 다정한 표정은 나트하의 것과 같았다.

그의 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곱슬곱슬하거나 결 좋게 반짝이는 금발 머리에 녹빛 눈동자를 가진 똑 닮은 남매들, 게다가 부부까지. 그들 무리는 방금 지상에 강림한 천사들처럼 보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이렇게 찾아뵙게 되니 아주 반갑군요.”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길마저 어찌나 번쩍번쩍하던지 수고로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고택이군요.”

어허허, 허허허 끊이질 않는 두 중년의 웃음에 나트하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미인의 팔꿈치가 러스티 후작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녹스 공작의 눈이 잠깐 커졌다 작아지는 것을 보니 분명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레이라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어머니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찌르던 때를 떠올리며 그리운 얼굴을 했다.

“아니, 너무 반가워 그런지 소개를 잊어버렸군요. 송구합니다, 각하. 이쪽이 제 아내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티아 러스티라 합니다.”

줄줄이 서 있던 나트하의 어머니와 누나들이 차례로 녹스 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스카니아 러스티, 에밀리 러스티, 일리나 러스티.

그의 세 누이들은 아주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나 레이라는 긴장을 늦추질 못했다. 그가 해 주었던 누이들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이제야 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레이라 녹스라 합니다.”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레이라의 모습에 길고 탐스러운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나트하의 첫째 누이, 스카니아의 미소가 더 고와졌다.

“어쩜! 공녀님은 마음마저 아름다우셨군요. 마땅히 저희가 찾아뵈어야 했는데, 이리 먼저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시는 길은 평안하셨나요?”

나트하의 곁에 서 있던 레이라가 스카니아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저 멀리 가 버렸다.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당황스러워 눈만 굴리던 그를 채 간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듣던 대로 마음씨도 고운 분이시구나.”

“하하, 그렇죠?”

“다 늙을 때까지 장가도 안 가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짐까지 싸 들고 나갈 줄 누가 알았겠니?”

“……하하.”

“메르세데스 공자와는 이야기를 잘 끝낸 거겠지?”

“그럼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게 딱 하나 있는 친우인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겠어. 집에라도 자주 찾아와, 설명을 착착 해 주었으면 이 어미가 걱정을 덜 했지 않아! 어쩜 이렇게 제 속만 아는지 원.”

“죄송해요, 어머니.”

무섭게 다그치던 그녀의 미간이 사르르 풀어졌다. 나트하는 제 어머니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예쁘지요?”

“그래. 대체 누가 공녀님 같은 며느리를 둘까 했는데, 그것이 내가 될 줄은 몰랐구나.”

“하하.”

어색하게 웃는 제 아들을 향해 곱게 마주 웃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타이니아스님과 페르세나 백작은 어디 계시니?”

“아, 두 분 다 오늘은 자리를 피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저는 외아들이라 부군이 셋이나 되는 자리를 꺼리실 거라 생각하시는 듯해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하지 그랬니?”

“전했죠. 후작 작위도 누이들의 부군이 이어받을 거라 전했는데도 그러세요.”

자리에서 멈춰 선 후작 부인이 그들이 지금 저택에 계시느냐 묻고는 대뜸 녹스 공작에게 다가섰다.

“각하,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나트하와 함께 타이니아스님과 페르세나 백작을 뵙고 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후작과 영애들은 저와 레이라가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녹스 공작이 저택을 구경시켜 주겠다 나서며 나트하의 누이들을 우르르 몰고 사라졌다. 레이라는 나트하에게 찡긋 윙크를 보내며 러스티 후작의 팔에 팔짱을 꼈다.

약간 당황스러워하던 후작이 나트하와 똑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멀어지는 인영을 멀거니 보던 나트하는 제 어머니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너는 공녀께 배울 것이 많겠구나.”

혀를 차며 고개까지 휘휘 젓던 후작 부인이 나트하의 에스코트를 따라 로비를 거닐었다.

✲ ✲ ✲

붉고 어여쁜 눈동자가 봄날처럼 웃는 표정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발긋한 뺨과 나긋나긋한 목소리, 시종일관 당당하고 고아한 자세는 소녀 같기도 여인 같기도 했다. 레이라의 매력에 폭 빠진 러스티 후작은 그녀를 향해 나트하와 똑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재잘대며 이곳저곳을 소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여쁜 외모는 익히 봐 왔기에 그렇다 치지만 그녀의 성품은 보면 볼수록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랑스러움으로 무장한 막내딸을 대하듯 인자해진 표정이 흐뭇함을 담았다.

“참 아름다운 저택이군요.”

“그렇게 봐 주셨다니 감사해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잠깐 앉을까요?”

레이라가 아끼는 장미 정원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저택 입구에서 정원까지 거리가 꽤 되었는데 후작은 군소리 하나 없이 레이라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마침 잠깐 앉고 싶었는데 그녀는 눈치도 아주 발군이었다.

얌전히 앉아 소리 없이 날아든 이름 모를 금빛 새를 구경하던 러스티 후작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혹여 걱정되시거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여긴 저와 둘 뿐이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공녀께서도 걱정이 많으셨나 보군요. 아주 어여쁘게 미소 짓고 계시길래 미처 몰랐습니다.”

“당연한 걸요. 누가 부군이 여럿인 여자에게 어여삐 키운 자식을 내주고 싶겠어요.”

러스티 후작은 주눅이 든 것처럼 시무룩한 태도로 솔직한 말을 잇는 그녀가 귀여웠다. 웃는 얼굴 그대로 주름진 얼굴이 선한 미소를 그렸다. 그에게서 한층 깊어진 미소와 어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군이 둘이든, 셋이든, 하다못해 열이라도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희 내외는 자식들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됐다 생각합니다. 제 앞가림 하나 하지 못하도록 키우지 않았으니, 저 스스로 행복을 찾았으면 된 거지요.”

“……그래도요.”

꼬물거리는 레이라의 손을 바라보다 빙긋 웃은 러스티 후작이 대뜸 말했다.

“결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했었습니다.”

“네?”

“나트하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누이들에게 어찌나 치여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가문은 누이들의 부군에게나 물려주라 했었지요.”

러스티 후작은 누이들을 향해 치를 떨며 여인들은 다 저렇게 드세고 제멋대로냐 진저리치던 제 아들을 떠올렸다.

“아…….”

레이라는 나트하의 그 생각이 지금도 유효한 걸까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행동을 읽은 러스티 후작의 눈동자가 귀여운 것을 보듯 애정으로 물들었다.

“덕분에 하나 있는 친우인 레사 메르세데스 공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함께 튀어 오른 동그란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러스티 후작은 부러 그 이름을 꺼냈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에 씁쓸한 입맛을 다신 그가 말을 이었다.

“곧 그에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생겼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금세 사라진 의문이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진지하게 의심을 했었죠.”

“네에, 그러셨군요.”

더 시무룩해진 어깨가 조금 전 당당하던 그녀의 모습과 새삼 비교되어 더 측은해 보였다. 러스티 후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레사 메르세데스 공자를 아직 사랑하십니까?”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던 레이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착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에 아직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일렁였다. 러스티 후작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것으로 공녀를 탓할 생각이 아닙니다. 그럴 만한 위치도 아니지요. 다만…….”

잔 떨림이 가시지 않은 동그란 어깨가 가여웠다. 어째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라 러스티 후작의 입이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달싹이기만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제 생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제 아들의 행복은 찾았습니다. 공녀, 당신의 행복이 아직 그곳에 있다면 그것까지 잡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행여 저희 가족이 걱정되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날아든 금빛 새가 뽀르르 울음을 내며 꽃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레이라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도 그저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 하셨더라면, 다른 답을 했겠지요. 공녀의 사정은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저들을 받아들였는지도, 이해했지요.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 제 아들이 공녀의 선택을 종용했으나, 그것이 공녀를 위함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레사가 물러났는지도요. 저는 제 아들 걱정은 하지 않으나, 공녀와 레사는 걱정이 되더군요.”

“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이라의 떨림이 멎었다. 멍한 눈빛으로 러스티 후작을 응시하는 레이라의 눈에 불쑥 눈물이 솟았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한 레이라의 손이 눈물을 닦고 또 닦아 냈다.

레이라는 저와 레사를 동시에 걱정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런 말은 처음이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어째서 그 사실에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건지 몰랐다. 이유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러스티 후작은 레이라, 레사 그리고 이름 모를 악마에 얽힌 저주를 알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그 저주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레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 레이라에게 있으며 레이라는 저를 사랑해 주는 반려를 여럿 들여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이 레사에게 보낸 악마의 최후통첩이자 낙인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레사도 자식이었다. 그는 어려서도 살갑고 귀여운 아이는 아니었지만 곧은 성정을 지닌 애늙은이 같은 아이였다. 출산 후 희귀병에 걸려 아픈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자라던 아이. 받지 못한 사랑마저 제 탓이라 여기던 측은한 아이는 그 여린 마음 그대로 자랐다.

그 아이가 사랑에 빠져 온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는 제 부모의 뜻을 꺾지 못한 채 겨우 찾아낸 제 세상마저 버렸다. 사랑을 잃고 텅 비어 버린 푸른 눈동자는 공허했다. 어찌나 안타까운 모습이던지 레사를 떠올릴 때마다 못내 가슴이 미어졌다.

“그저 늙은이의 오지랖일 테지만, 공녀께 이런 이야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겠지요. 각하께선 레사를 탐탁지 않아 하실 테고, 부군 되실 분들은 그저 공녀 걱정을 하기 바쁠 테니까요.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 그대로였다. 레이라의 말간 얼굴에 혼란이 잔뜩 섞였다. 눈물은 계속해서 차오르고 또 차올랐다. 레이라는 일단 변명부터 했다.

“저는, 저는, 제 미래에 더……, 이상 그를 그리지 않아요.”

아프게도 우는 얼굴에 느리게 눈을 깜빡인 러스티 후작은 사랑에 빠진 나트하가 하지 못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곱게 접힌 채 따스한 냄새가 나는 손수건으로 러스티 후작이 레이라의 눈물 자국을 살살 닦아 주었다.

“공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트하의 아비인 제가 공녀께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우습고 이상한 일이겠으나, 저는 진심으로 당신이, 그리고 레사가 행복을 찾기를 바랍니다. 공녀가 그리는 미래에 그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저 당신의 걱정을 하는 이의 말 한마디에 그의 걱정이 섞였다는 것만으로도 공녀의 눈에 눈물이 솟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아직 당신에게 하찮은 이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들의 노력에 점점 잊히고 있다 해도, 아직 가슴에 남아 있으니 당장 그를 잡으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여 어느 날, 그와 마주할 일이 생겼을 때. 그때도 공녀의 마음에 감정의 부스러기가 남아 마음이 아리다면, 그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꺼낸 이야깁니다.”

그랬다. 레이라는 레사와의 만남, 대화를 전부 차단했었다. 처음엔 마주 보기도 싫어서 그랬고, 도중엔 혹여 흔들릴까 두려웠고, 나중엔 그저 아프기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였다. 대화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버리면 그를 용서해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가차 없이 버려진 것이 아팠고 반복될까 봐 무서웠다.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레이라는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제 어깨를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에 그의 진심이 온전히 느껴졌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공녀의 마음을 무정히 내던진 레사에게 받은 아픔만큼, 그 또한 같은 무게의 죄책감과 아픔을 느꼈을 겁니다. 전하지 못한 사과도 그에게는 후회로 남겠지요. 누구의 아픔이 더 크니 그것을 바라봐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더 잘했고 잘못했다는 말도 아니며 그가 공녀께 한 잘못이, 잘못이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레사도 항상 공녀를 그리워했고 제 선택을 후회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레사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레이라는 갑자기 그 사실이 미안해졌다. 저가 나트하를 그에게서 떼어 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제 편이었을, 제 걱정을 하던 하나뿐인 친우를.

그녀의 곁에는 레사의 잔재에 힘들어하던 마음을 다독이고 쓰다듬고 매만져 준 에틸이 있었고, 애석하게도 그를 끊어 버리도록 마음먹게 해 주고 빈자리를 채워 준 나트하가 있었으며, 새로운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피오니안이 있었다.

그러나 레사의 곁에는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다. 러스티 후작은 마치 레이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를 측은히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레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주 정중히 꺼낸 그의 부탁이자 애원에 레이라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누구도 아닌 나트하의 아버지가 꺼낸 부탁이라는 것에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녀는 그 없이 행복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깨달았고 그렇게 되어 왔으니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레사의 빈자리는 아직도 그녀의 안에 존재했다.

레이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에서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제게 남겨진 것이 레사에 대한 미움뿐 아니라 미안한 마음마저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를 바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니.

레이라는 마음 한 구석에 약간은 저질스러운 아니, 미움이 남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저를 매정하게 버리고 잊어버린 것처럼 굴던 그가 싫고 미웠다. 그런데 그녀도 그와 똑같은 짓을 했다.

그가 늦은 것은 맞았다. 미워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맞았다. 그러나 그녀의 속 좁음이, 비틀어진 마음들이 그를 밀어내고 진심에 닿지 못하게 했다.

잊고 싶어 묻어 둔 채 기억의 모퉁이에 밀어 두었던 잔재가 한 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세 남자에 대한 죄책감에, 그에 대한 미움에 애써 외면하던 것들이었다. 레이라는 흐리게 번지는 시야를 문질러 닦았다. 포근했던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레이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러스티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다정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레이라의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감정을 갈무리하듯 질끈 감긴 눈꺼풀이 서서히 뜨였다.

레이라의 눈에 서린 감정이 무엇인지 러스티 후작은 짐작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제 곁엔 그 누구보다 제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나트하도 에틸도 피오니안도 전부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그렇게 약속했어요. 그들이 있어서 저는, 행복해요. 그럴 수 있었어요. 제게 남겨진 레사는 그리움이자, 눈물이자, 과거일 테죠. 그래도 후작님이 해 주신 충고는 새길게요. 후작님의 말씀처럼 제가, 버려진 것에 아파했듯이, 레사도 제게 말하지 못한 용서와 제게 준 상처에 마음이 아팠을 테니까요.”

“그 누구보다 공녀의 행복을 비는, 세 남자가 있으니. 사실 공녀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겠군요.”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넨 러스티 후작의 표정에 안도가 깃들었다. 레이라는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체 했다. 그는 참 신기한 사람 아니, 참 신기한 분이었다.

“다정하고 따스한 공녀께, 그들이 있어 정말로 다행이군요.”

레이라는 아직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 ✲ ✲

나트하는 어머니에게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마나로 쓰다듬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무정했던 아들에게 쌓인 그간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 버릴 강력한 팔꿈치에 아직도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제 아들의 끙끙거림에도 러스티 후작부인의 얼굴에는 작은 근심조차 없었다.

애써 식은땀을 닦던 나트하는 에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표정을 갈무리했다.

“들어오십시오.”

소파에 늘어져 디저트를 먹던 피오니안과 고아한 자세로 책을 읽던 에틸은 나트하와 후작 부인의 등장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전설을 뵙습니다. 타이닌 제국 러스티가의 에티아라 합니다.”

“나트하의 어머니로군.”

“그렇습니다.”

“아주 닮았군. 타이니아스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르세나 백작도 반가워요.”

“예.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러스티 후작 부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넨 에틸이 그녀에게 직접 우린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자연스레 상석에 끌려가 앉은 후작 부인이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나트하도 아무렇지 않게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제 어머니를 보며 웃음을 삼키느라 허벅지를 꼬집었다.

잠시 표정을 관리하며 제 아들을 쏘아본 후작 부인은 에틸이 착석할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 송구합니다.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닌가요?”

“괜찮다.”

“괜찮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대답에 후작 부인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황제에게까지 무뚝뚝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페르세나 백작과 그다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타이니아스가 아주 정중하게 저를 맞아 주고 있었으니까.

“어머, 두 분은 듣던 것보다 다정하시네요.”

“나트하의 어머니잖나.”

남이 아니니 그렇다라는 말이렷다. 피오니안의 말을 찰깨빵처럼 알아들은 후작 부인이 이들 셋은 생각보다 사이가 좋아 나트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피오니안이 대신해 준 것에 작은 안도를 했다.

“그래요. 말씀처럼 이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오늘 두 분은 왜 이곳에 계신 건가요?”

“불편할 테니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첫 만남인데 괜히 시끄러울 필요는 없지.”

“첫 만남이니 모두가 함께여야지요. 저는 가족이 될 사람들과 인사를 하러 온 것이지, 이렇게 내외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랍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빙그레 미소 짓는 얼굴은 나트하와 똑같았으나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가득했다. 피오니안과 에틸은 눈을 맞추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입을 다물자 무언의 합의를 본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후작 부인에게 닿았다.

“나트하와 같은 부인을 둘 입장이시니, 타이니아스님께 제가 혹 실례되는 발언을 하더라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러지.”

“무릇 가족이란. 혈연, 혼인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라 할 수 있지요. 두 분과 어여쁜 녹스 가의 공녀께서 제 가족이 된다는 것에 어찌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해서, 새로운 가족에 대해 부푼 마음을 가졌사온데, 그 기대가 시작부터 꺾여 버려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던지요.”

처연한 표정을 하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는 시늉을 시작한 후작 부인을 보며 멍한 표정이 된 피오니안이 헛기침을 요란하게 했다.

에틸은 후작 부인의 말을 이해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본 후작 부인은 에틸을 향해 찡긋 윙크를 날렸다.

에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혹여 두 분께서는 새로운 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아니다.”

“그런데 왜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걸까요?”

피오니안의 눈에 비친 후작 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문, 음, 건달 같았다.

“……우리가 잘 못 생각했군.”

제게 쏘아진 형형한 눈빛에 조건 반사하듯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은 피오니안이 시선을 돌렸다. 저와 비슷한 표정을 한 에틸에게 동질감을 느끼던 그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답은 정해 두었으니 너는 뱉기만 하면 된다는 협박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그런 것이지요? 서로 간에 오해가 깊었나 봅니다. 그렇지요?”

“……그래. 그런 것 같군.”

이마를 짚은 피오니안이 한숨처럼 말을 토해 냈다. 생글생글 웃으며 에틸과 피오니안을 번갈아 보던 후작 부인이 해맑은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

소름이 돋아난다는 느낌은 이런 것인가. 피오니안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그럼 오해가 풀렸으니 함께 저녁 만찬을 즐기면 되겠군요.”

“그러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후작 부인이 환하게 웃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세 사람을 바라만 보던 나트하도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 ✲ ✲

녹스 공작의 보좌관 에디 필립슨은 배부른 다람쥐처럼 웃는 제 상관을 향해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의 상관은 오랜만에 아주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정점을 찍은 듯 했다.

며칠 전 러스티들과의 만남도, 존경하는 공녀의 세 부군도 저처럼 녹스 공작의 환한 웃음을 부르지 못했다. 에디 필립슨은 왠지 뿌듯한 기분에 가슴을 꾹 눌렀다.

“그래서, 수락했다?”

“예.”

몹시 흡족한 얼굴로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는 녹스 공작을 바라보던 에디는 저도 모르게 녹스 공작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정말로! 드디어! 적어도 반년은 그놈의 보기 싫은 낯짝을 보지 않아도 되겠군. 그래, 언제 출발한다던가?”

“예정일은 이틀 뒤입니다.”

결국, 실실 새던 웃음이 터져 버렸는지 껄껄 웃어 재낀 녹스 공작은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시원한 얼굴이었다. 에디도 공작과 함께 소리 내 웃었다.

녹스 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 다리라도 걸치고 있다면 모두 레사 메르세데스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어여쁘고 똑똑하고 다정한 저희의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가슴 아프게 만든 못난 놈. 레사 메르세데스에 대한 가신들의 평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 대부분이 아닌 이들은 저 뒤에 더 격렬한 애정표현으로 욕을 덧붙이곤 했지만 비슷했다. 그러니 에디 필립슨은 레사 메르세데스가 멀리 가 버린다는 것에 활짝 웃는 제 상관의 마음이 백 번 이해가 되었다. 어디 이해가 됐다 뿐인가, 사실 저도 아주 흡족했다.

때아닌 마물 습격으로 황폐해진 제국 북부로 가게 될 레사 메르세데스라니! 어디 그 추운 곳에서 좆 빠지게 고생이나 해라!

이미 그 중요 부위는 빠져 버렸다는 것은 모르는 그가 마음속으로만 속사포로 저주의 말을 중얼거렸다. 에디 필립슨은 녹스 공작과 비슷한 얼굴로 다음 안건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