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비와 당신의 이야기
먹구름이 몰려온 하늘이 우중충했다. 어둑어둑한 오후, 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실내에 옅은 마법 등이 켜졌다. 양탄자를 밟는 발소리가 들리고 창문이 열리는 소리,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났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 레이라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와 가까워진 발소리가 바스락대며 침대 곁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곧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침대 속에 뭉그러지던 레이라의 입꼬리가 바짝 솟았다.
“일어나세요. 레이라, 벌써 3시예요.”
“으응……. 더 쓰다듬어 주면요.”
나직하게 웃는 소리와 함께 반대쪽 침대가 푹 꺼진다.
“어리광만 더 느는군. 뭐 귀여우니 됐지만.”
“어리광을 피우지 않아도 귀엽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그렇군.”
‘에틸은 언제 왔지?’
슬쩍 눈을 뜬 레이라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살폈다. 속 커튼을 당겨 보드라운 레이스 자락을 구김 없이 정리한 에틸이 성큼 뒤를 돌아섰다. 마주친 눈빛에 애정이 가득 담겨 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아니. 다들 잘 잤어? 난, 허리가 아파.”
“어제는 조금 무리를 시켰죠? 미안해요.”
이불 속으로 들어온 손이 그녀의 허리를 꾹꾹 눌렀다. 차르르 펼쳐진 금빛 머리카락은 비구름이 가득 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어여뻤다.
나트하가 마나를 담은 손끝으로 시원하게 마사지를 하는 동안, 레이라의 볼에 키스를 퍼붓던 피오니안이 슬쩍 마법을 시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졌다. 눈치를 챈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고 몸을 일으켰다.
“시원해! 고마워, 고마워요.”
코끝을 찡그리며 웃는 모습이 귀여워 피오니안이 다시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남겼다.
작고 앙증맞은 발이 침대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슬리퍼가 신겨졌고 도톰한 숄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익숙하게 시중을 받은 그녀가 먼지가 가라앉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켰다.
“오랜만에 비네.”
“이제 가을비가 시작되었으니, 곧 추워지겠어요.”
매년 찾아오는 가을비는 끝과 함께 바람을 불러온다. 일주일 정도 짧은 우기가 지나면 드디어 완연한 가을이 찾아오는 것이다. 여름과 겨울에 비해 긴 봄과 가을은 레이라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비가 그치면 피크닉을 갈까요? 음, 일이 정리되는 대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어요!”
“그럴까요?”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것처럼 환히 웃은 나트하가 그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빛을 마주한 두 남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음, 점점 더 영악해지는 것 같지 않나?”
“휴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봐주죠.”
어쩌겠냐며 어깨를 으쓱한 에틸이 레이라가 입을 옷을 고르러 떠나자 피오니안은 얌전히 침구를 정리했다. 어느새 익숙하게 시중을 들게 된 그였다.
✲ ✲ ✲
녹스 가의 도서관은 15층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별관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높은 탑처럼 보일 정도로 가느다랗고 높은 건물은 본관과 같이 백색 대리석과 금박을 입힌 석조를 사용해 아름다운 외양을 뽐냈다.
아치형 통로로 본관과 이어진 입구에는 두 명의 기사가 항상 대기 중이었고, 열쇠를 가진 이만 출입이 가능했다.
잎과 열매가 풍성한 사과나무가 양각된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이 둥근 원형 내부가 드러난다. 건물 가운데를 기둥처럼 받친 승강기와 벽 천제를 가득 메운 백색 책장은 하나하나가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층층이 나뉜 책장 사이를 오가는 승강기는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로 움직이는 고가품이었다. 승강기와 층 발코니를 잇는 백색 다리는 가볍고 튼튼한 북부산 백염목을 아낌없이 사용해 만들었으며 책장 곳곳에 놓인 백색 사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테리어에 쓰인 금화에 뒤지지 않을 만큼, 1층부터 천장 끝까지 빼곡하게 꽂힌 책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으로 통속 소설부터 사전, 전공서, 마법서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이처럼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녹스 가문의 도서관 꼭대기에는 폭신한 소파와 침대, 응접실이 갖춰진 휴식 공간까지 존재했다.
피오니안은 긴 세월 동안 보아 온 그 어떤 도서관보다 더 거대하며 편안한 녹스 가문의 도서관에 감탄했다. 이제야 찾아온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대단하군.”
“그렇지? 내가 어릴 때부터 책 읽으면서 노는 걸 가장 좋아했거든.”
피오니안은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레이라의 얼굴이 귀여워 그녀의 볼을 통통 두드렸다.
“이걸 지은 것은 녹스 공작이겠군.”
“응응, 아, 저 아티팩트는 나트하가 만들었다던데, 맞죠?”
“아, 기억나요. 위아래로 움직여야 하고, 지정한 높이에 멈춰야 하고, 고서도 원본 그대로 유지 시켜 주는 복원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를 주문하셨죠.”
“헤헤, 맞아요.”
좌우로 열리는 승강기에 탑승한 레이라가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곁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피오니안을 향해 레이라가 물었다.
“피오니안이 원하는 책이 어떤 거야?”
“아, 안내는 필요 없다. 나는 원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까.”
“우와, 그거 정말 부러운 능력이네.”
그것이 거짓은 아닌 듯 피오니안의 손 위로 책이 한 권씩 나타났다. 여덟 권의 책을 가볍게 든 그가 꼭대기 층에 도착해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붉은 휘장이 걸린 짧은 복도, 가죽으로 덧대고 금박 자수를 입힌 문들 사이로 커다란 방 하나가 나타났다. 폭신한 소파, 침대가 곳곳에 놓인 아늑한 공간은 채광이 풍성하도록 벽면 전체에 커다란 유리를 끼워 놓았다. 궂은날이라 커다란 창에 비치는 것은 먹색 구름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웅장해 보일 정도로 아주 멋진 공간이었다.
“……왜 이런 곳을 두고 매일 네 방이나 응접실에서 차를 마셨지?”
“음, 여긴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 싫어지거든. 저기 저 침대 안에 들어가면 빛이 차단되는데, 낮에도 잠자기에 딱 좋아.”
레이라가 가리킨 침대는 정중앙에 놓인 커다란 침대로 유일하게 캐노피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캐노피 중앙에는 밤처럼 어두워지게 하는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가 달려 있었다. 피오니안은 고개를 주억였다.
“쉬기엔 아주 그만이겠군.”
“응. 내가 과하게 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들어 주신 공간이야.”
“그렇군.”
창가에 놓인 커다란 소파로 향한 피오니안이 다리를 쫙 펴고 앉아 등을 기대며 책을 펼쳤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더니 본격적인 자세였다.
그의 곁을 서성이던 나트하는 소파 아래 깔린 폭신한 러그에 털썩 주저앉았고 레이라는 나트하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어쩐지 절로 콧노래가 나와 한참을 흥얼거리던 레이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책 보는데 시끄러운 게 싫으면 다른 데로 갈까?”
“아니, 상관없다.”
“그럼 떠들어도 돼?”
“된다.”
귀여운 짓을 한다는 듯 피식 웃은 피오니안이 다시 책에 집중했다. 제 다리 위로 떠 있는 레이라의 고개를 얌전히 밀어 눕혀 둔 나트하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트하, 떠들어도 된대요.”
좋은 정보를 알려 주겠다며 저를 꼬드기는 사기꾼 같은 말투에 소리 내 웃은 나트하의 눈에 애정이 반짝거렸다.
“그럼 저희는 수다를 떨어 볼까요?”
“네, 좋아요!”
두 사람을 흘긋거린 피오니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나트하, 기사 단장이 공석이잖아요? 그럼 나트하가 기사 단장이 되는 거예요?”
“……음, 저는 마탑으로 거취를 옮길까 해요. 그럼 자유 시간이 많아지니까요.”
“아! 그럼 저야 좋을 것 같은데, 폐하께서 윤허하셔야 하잖아요?”
“그건 괜찮아요. 저는 레사가 기사단에 있는 걸 조건부로 들어간 거거든요.”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왜 이리 듣기가 좋은지. 피오니안은 책을 읽으면서도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트하와 레이라는 차기 기사 단장 후보로 오른 것이 에틸이라는 것과 그의 승낙 여부를 두고 한참을 떠들어 댔다.
“하긴. 뭐 반년 정도 뒤엔 레사가 돌아올 테니, 그리 성급하게 결정지을 문제도 아니겠네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 제국에는 피오니안 님이 계시니까. 기사 단장의 부재가 그리 클 것 같진 않더라고요.”
황실 기사 단장이 황제의 검이라 불리긴 하지만 지척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아니니 당연한 문제였다. 그저 레사의 부재 동안 기사단의 실무를 처리해 줄 인물만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일이었다. 제위 도중 제국에 눌러앉은 전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으니 레사를 보내기로 마음먹었을 테지만, 나트하의 사직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레이라는 그것으로 조금 고민을 하다 이내 지워 버렸다.
“레이라, 여행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어디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나요?”
“으음, 일단 피오니안의 레어에는 꼭 가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제 이야기가 나온 것에, 문득 책에 파묻었던 눈을 든 피오니안은 나트하와 딱 눈이 마주쳤다. 눈꼬리가 여우처럼 휘어지고 입꼬리가 방긋 미소를 그리는 얼굴에 흠칫거린 피오니안이 냉큼 시선을 책으로 돌려놓았다.
나트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피오니안 님, 여기서 가장 가까운 레어가 어디인가요?”
조금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피오니안이 순순히 실토했다.
“제국 북부에 있는 것이 가장 가깝다. 설산에 있지.”
“어?”
‘레사가 있는 거기 아니야?’
놀란 미어캣처럼 벌떡 일어나 앉은 레이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은 많이 추울 것이다. 봄이 오면 가지.”
“얼마나 추운데?”
“수도에 가을이 오면, 그곳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온다. 음, 끓는 물을 부으면, 그대로 얼어 버린다 할 수 있겠군.”
기다랗게 얼어 버린 물줄기를 상상하던 레이라가 신기하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그만큼 추우면 아무것도 없어?”
“있긴 하다. 말과 버금갈 정도로 튼튼한 사슴과, 근육질의……, 토끼가 있지.”
사슴을 이야기한 말투보다 한층 흐려진 목소리가 피오니안의 심경을 나타내 주었다. 피오니안은 그 근육질 토끼라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말 같은 사슴에, 근육질 토끼? 그게 뭐야. 나트하는 봤어요?”
“사슴은 엘크라 불리는 커다란 사슴이에요. 영물이라 불릴 정도로 영특하고 튼튼하죠. 토끼는……, 정말 토끼지만요.”
“그것은 토끼라 불릴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그 토끼가 엘크를 이기는 것도 보았다.”
“네?”
금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이는 것을 보며 고개를 흔든 피오니안이 시선을 회피했다. 레이라는 그저 흥미롭다는 것처럼 공손히 모은 두 손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뭐야. 토끼 이야기 더 해 줘!”
“……하, 무리에서도 유독 커다란 개체가 한 마리씩 있다. 보통 그런 놈들이 우두머리지. 가끔 토끼의 영역에 발을 들인 어린 엘크들 덕분에 싸움이 일어나곤 하는데, 성체가 아니긴 했지만 거의 말만 한 엘크를 두드려 팬 토끼가 있었다.”
“……우와.”
“우와가 아니다. 그것들은 아주 흉포해. 물불 가리지 않고 주먹부터 들이댄다.”
학을 떼며 이야기하는 피오니안의 표정이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까? 레이라는 솟아오르려는 광대를 꾹 눌렀다. 그의 찻잔에 새겨진 토끼 무늬와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그 토끼 보고 싶은데. 추운 건 피오니안이 마법을 걸어 주면 되잖아.”
“……생각해 보지.”
레이라가 봤을 때 피오니안은 추워서 데려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토끼가 꺼림직해 가기 싫은 것 같았다.
‘몇 번 더 이야기하면 데려가 주겠지?’
레이라는 의외의 수확을 얻은 기분에 방실방실 웃으며 다시 나트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 ✲ ✲
피오니안은 일주일 내내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처음 그가 그저 독서를 한다 생각했던 이들은 그가 찾는 것이 있어 조사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엇을 찾는지는 아무리 물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피오니안이 매우 오래된 고서들을 마구잡이로 읽는다는 것, 찾는 것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고서들은 특별 취급이라도 하듯 두 번씩 읽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레이라는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물어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으니, 그저 이제 관심을 끈 것처럼 굴며 그가 읽는 책의 제목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령왕의 탄생, 신보다 완벽한 신, 드래곤의 업적, 타이니아스의 약점, 생물들의 왕, 살아 숨 쉬는 신, 짐승인가 신화인가 등 온갖 제목을 가진 고서들을 살피는 그는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레이라는 독서를 즐기다 단잠에 빠진 피오니안의 곁에 앉아 그를 살폈다. 고른 숨소리와 반듯한 미간에 집중하던 그녀가 탄탄한 배 위에 놓인 두꺼운 고서를 살그머니 끌어당겼다.
‘전설은 죽지 않는다.’
거창한 제목을 가진 책은 피오니안이 한 시간째 노려보고 있던 페이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잠에 빠져 고른 숨소리를 내는 조각 같은 얼굴을 슬쩍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펼쳐진 책으로 옮겨 갔다.
그는 심장이 뚫렸음에도 살아 있었다.
그의 심장을 뚫은 것은 인간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었다.
전설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두껍고 튼튼한 발톱이 제 심장을 꿰뚫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저 그의 모습에서 죽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중략……
강처럼 흐르는 그의 피는 붉디붉었다. 그가 푸른 피를 타고난 신이 아닌가 생각했던 나는 그 순간의 허탈함과 깨달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허탈함은 그가 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가 가득한 눈동자는 과연 듣던 대로 아름다웠으나, 듣던 것보다 더 두려웠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그 아름다움 속에 철로 만든 가시처럼 숨은 그의 외로움과 고독함, 지독한 분노는 나로 하여금 왜 그가 그토록 잔인한 죽음을 꿈꾸었나 하는 궁금증을 한 번에 앗아 가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는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더.
제 발톱으로 심장을 찢어발기면서까지, 아주 간절하게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안쓰러우면서도 내 까짓 게 그를 안쓰러워한다고 해서 무엇 하나 싶은 허탈함이 들기도 했다. 그래, 내 허탈함의 말로는 그것이었다.
그의 온몸에 쏟아진 피가 시간을 역행하듯 자리를 찾아가 상처를 전부 아물게 할 때까지. 아물어 버린 상처에 꽂혀 있다가 재차 뽑힌 손톱이 다시 상처를 헤집을 때도. 다시 생긴 상처가 또 아물 때까지도 그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태산보다 거대하며, 세상 누구보다 박식하고, 자연보다 강한 전설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고통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나,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는 그의 생이 축복이 아니리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강제로 살아야 했다.
레이라는 번뜩 충격을 느꼈다.
“하…….”
왈칵 터진 눈물을 힘주어 닦은 그녀가 엉거주춤 주저앉아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그에게서 얼핏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심장을 찔러도 살아나더라는 이야기를. 그녀는 그저 누군가에게 얻은 상처로 심장을 다쳤었나 보다 생각했었다. 인간이라면 이미 죽어도 진즉 죽었을 상처에 살아난다는 것이 그다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죽고 싶어 제 심장을 찌른 거였다.
대체 왜 죽고 싶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왔다. 소중한 것은 강박적이라 생각할 만큼 일부러라도 만들지 않았다 했다. 아쉬움도 즐거움도 깨달음도 느껴지지 않는 지겨운 세상에 그가 왜 살아 있고 싶었겠는가. 죽고 싶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 어떻게.”
피오니안이 깨어날까 봐 소리를 꾹 참고 울던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 뿌옇게 흐린 시야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 복도에 주저앉은 그녀가 무릎을 말아 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과 다른 그의 아름다움이, 강함이, 지혜로움을 두려워 했기에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 그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없었을까? 두려운 존재이니 힘을 합쳐 죽여 버리자 했던 사람들이 과연 없었을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죽이고자 했을 것이다.
덩그러니 바다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남자는, 그가 싫어했다던 인간들에게 세상을 배우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그의 생이 이토록 길게 이어질 동안 그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살던 나날들에 사랑한다는 감정이 처음 돋아났다는 그에게, 이제야 행복이 무언지 알겠다는 그에게 저가 없어진 뒤의 생은 과연 어떨까.
레이라는 처음으로 그가 두려웠다. 반면에 안쓰러워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손아귀에 쥔 행복을 놓아 버린 뒤엔 과거보다 더 외롭고 쓸쓸한 어둠이 찾아올 터였다. 레이라는 그에게 더 큰 어둠을 줄 사람이 저라는 것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를 받아들이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는 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싶은 간절한 의문이 남았을 뿐이었다.
레이라는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깊이를 절절히 깨달았다.
퉁퉁 불어 버린 눈을 간신히 뜬 레이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엉엉 울던 저를 발견한 나트하의 경악스러운 얼굴, 누가 울렸을까 궁금해하며 이를 악물던 에틸과 피오니안의 얼굴이 순서대로 레이라의 머릿속을 스쳤다.
레사를 사랑하던 제 모습과 저주, 에틸, 나트하, 피오니안까지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레이라는 처음으로 악마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피오니안은 울다 지쳤는지 쓰러져 잠든 레이라의 곁에 섰다. 쌕쌕, 잘도 자는지 고르게 나는 숨소리가 귀여웠다.
한 발짝 다가선 그가 침대 곁에 주저앉았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 울었을까. 우는 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이 멈춰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발갛게 부은 눈을 쓸어내린 긴 손가락이 보드라운 뺨에 머물렀다.
그는 한숨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하다간 그녀를 깨울 것 같았다. 그는 미련을 털어 버리고 제 방으로 향했다.
제법 익숙해진 방은 그녀의 울음소리와 소란에 놀라 벌떡 일어서 나간 그대로였다. 정리되지 않은 이부자리와 그새 걷어차 버렸던 물건들이 여기저기 소란스레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는 그저 하인과 하녀들도 퍽 놀랐나 보다 생각하며 덤덤히 읽던 책을 주워 들었다. 대충 소파에 늘어지게 앉은 그가 책을 읽기 시작하려던 때였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물이 말라 오그라진 종이에 글씨마저 아련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
왜 그녀가 울었는지, 그 대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이 경종을 울렸다. 들키기 싫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책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 얼굴을 손아귀에 가둔 채 무거운 한숨을 씹어뱉은 피오니안은 에틸과 나트하를 찾아 나섰다.
“그러니까……, 죽기 위해 스스로 심장을 찌르셨던 적이 있다고요?”
“그렇다.”
“그것이 책으로 남겨졌고, 레이라는 그 기록을 읽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하아…….”
피오니안은 두 남자에게서 동시에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자 눈을 꽉 감았다. 곧 제 어깨를 감싼 손이 저를 작게 다독였다. 다정한 토닥거림이 의아한 그가 눈을 떠 에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러지?”
“힘든 결정을 하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
바다 한가운데처럼 어두워진 푸른 눈빛은 퍽 익숙한 빛깔이었다. 걱정하는 마음이 녹아든 눈빛에 어색한 표정을 지은 피오니안이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훗날 그녀를 보낸 뒤에 다시 시도해 보려 하신 겁니까?”
“그저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를 따라가려던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나, 내 오랜 바람이기도 하다.”
“……피오니안 님.”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금빛 눈동자에 피오니안은 괜히 말했나 싶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뱉은 에틸이 무너지듯 소파에 기대앉으며 제 얼굴을 문질렀다. 피오니안은 그의 낯빛에서 후회를 읽었다.
“그것이 네 탓은 아니니 그런 표정 하지 마라. 그저, 나는…….”
그의 무겁고 떨리는 말에 답한 것은 나트하였다.
“저희는 인간이니, 피오니안 님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피오니안 님과 레이라의 마음이 어떨지는 조금 알 것도 같아요.”
“…….”
다시 입을 꾹 닫아 버린 피오니안이 빈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 그는 두려웠다. 이 행복이 사라져 버린 뒤에 찾아올 그가 겪을 상실감과 고통들이.
이들에게는 아직 이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행복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니 당장은 알아내지 못하겠지만 차근차근 연구해 볼 작정이었다. 이렇게나 빠르게 들켜 버릴 줄은 몰랐지만.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탓이 크군요.”
“아니다. 내가 늘 가지던 바람이니 그런 소리 할 것 없다. 나는 네 말처럼 지금 행복하니까.”
“…….”
이제 반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에틸이 다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오니안은 무안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아직도 저를 측은히 보고 있는 나트하의 이마에 괜히 손가락을 튕긴 피오니안이 손뼉을 쳤다.
“자, 이제 계획을 세우지.”
“……무얼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이것을 알아 버린 레이라에게 뭐라 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 아니겠나.”
비슷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린 두 남자를 한심하게 흘겨본 피오니안이 혀까지 쯧쯧 찼다. 어째서 저가 여기까지 이들을 쫓아와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제야 이해를 한 것 같았다.
피오니안의 이야기를 들은 두 남자는 레이라 만큼이나 그의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피오니안의 한심한 눈빛이 몹시 억울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두 남자는 피오니안이 걱정되었다. 특히 에틸은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에틸은 피오니안이 오래 살아와 저처럼 감정에 무뎌진 것이라 생각했다. 딱 그렇게만 생각하며 그를 대했던 에틸은 그게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괜히 그를 자극해 레이라에게 마음을 열게 하고, 그의 감정을 크게 부풀렸나 싶은 후회가 물밀 듯이 차올랐다.
감정을 크게 키우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시 죽을 방법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틸은 와중에도 레이라의 걱정뿐인 피오니안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 남자는 레이라가 깨어나면 화를 내거나 잔뜩 우울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다 잠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풀 죽었을 그녀를 잘 달랜 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며 합의를 봤다. 혹 그럼에도 레이라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다 함께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오자고.
한데 깨어난 레이라의 행동은 그들이 떠올려 본 것 중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피오니안, 영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해?”
계획에 없던 말이 튀어나오자 세 남자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그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영약 같은 게 있나? 아니면 피오니안 피라도 마셔 볼까?”
얻어맞은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에 마법을 걸어 주던 나트하의 어깨가 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피오니안을 바라본 나트하는 그도 저와 비슷한 생각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에틸을 바라보았다. 물론 에틸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피오니안이랑 같이 영원을 살면 우린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까?”
다시 침묵을 택한 세 남자가 부산스레 눈빛을 교환했다.
갑자기 중간을 너무 건너뛴 것 아닙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혹시 대화를 미리 하셨던 것 아닌가요?
안 했다. 그보단, 지금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나저나 영생을 사는 방법이 있습니까?
있어도 정상적인 방법이겠나?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세 남자를 차례로 바라본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누구랑 대화해야 해? 내가 왜 울었는지 알 거 아냐. 나는 피오니안한테 미안한 마음 갖기 싫어. 그럴 거면 더 사랑해 달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고맙다고만 생각할 거야.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고 나를 사랑해 주겠다는 남자인데 너무너무 사랑스럽지 뭐야?”
종래엔 입을 떡 벌린 세 남자가 멀거니 레이라를 응시했다.
“피오니안도 나도 영생을 살면, 피오니안도 좋고 나도 좋은 거 아냐? 이왕이면 에틸도 나트하도 같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일단, 방법이 있어 없어?”
대답부터 하라는 듯 피오니안을 채근한 레이라가 테이블을 땅땅 두드리기까지 했다. 고운 레이스를 덧댄 보드라운 식탁보가 하늘을 향해 통통 튕겼다.
“……하아, 정말이지 예상 불가능한 여인이군.”
“동의합니다.”
“그러게요. 그래도, 사랑스럽지 않나요?”
“그도 그렇다.”
“동의합니다.”
김빠진 듯 허탈하게 웃은 세 남자가 레이라를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답이나 하라며 떵떵 소리를 쳤다.
✲ ✲ ✲
불안했지만 사랑스러운 아침은, 녹스 가에 도착한 한 통의 서신으로 뒤집혔다. 그 서신은 이번에도 메르세데스 가에서 보내진 것이었다.
✲ ✲ ✲
검고 우중충한 하늘이 내뱉은 물방울들이 대지를 습하게 물들였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 뿜어낸 냄새와 싱그러운 풀잎 냄새가 뒤섞인 곳에는 자욱한 물안개가 가득 피어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하얗고 둥그런 유리 돔을 톡톡 두드렸다. 빗방울의 귀여운 노크 소리마저 구슬프게만 들리는 오후였다. 평소라면 찬란할 노을마저 비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벌써 밤이 찾아온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난 뒤인지 땅에는 발자국이 가득 찍혀 있다. 잔디를 뚫고 올라온 진흙 덩어리가 군데군데 드러나 흐트러진 것까지 비 내리는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소담히 놓인 돌계단과 돌담 뒤로 꼿꼿하게 선 나무들은 제 주인처럼 심지가 곧았다. 적막이 가득 내려앉은 정원에는 채 가시지 않은 눈물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여인은 안개에 둘러싸인 유리 돔을 향해 걸었다. 그녀는 우산을 접어 시종에게 넘겨준 뒤 차가운 빗물을 눈물처럼 흘리는 유리를 쓸어내렸다. 날씨마저 흐려서인지 마치 온 세상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하의 슬픔을 달래려 황제가 보낸 위로품 옆으로 여인이 작은 상자를 내려 두었다. 황가의 인장이 커다랗게 박힌 위로품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옆에 놓인 작은 상자가 더 돋보였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와 발바닥에 달라붙은 진흙을 정중하게 털고 닦아 준 시종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얼굴에도 가득 들어찬 슬픔이 그녀에게도 전염이 되는 것 같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녀는 저와 한 약속을 어겼다. 이미 그 약속을 어기리라 마음먹었음에도 힘들기만 한 발걸음이었다. 사실 그녀는 유리 돔 입구에 서서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아름다운 온실에는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들은 적 있는 안개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자욱한 물안개가 낀 바깥의 모습과 이 아름다운 광경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슬픔의 냄새 덕분일 것이다.
우울한 생각을 미룬 그녀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직 머뭇거리는 눈빛이 주위를 훑다 말다 반복했다.
안개꽃은 가득하나, 마음은 텅 비어 버릴 것 같은 곳에서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눈물 자국을 채 지우지 못한 공작이 그녀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이미 녹스 공작이 다녀간 뒤라 그녀의 등장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찾아올 필요도 없을 뿐더러, 당연히 오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이의 등장인 탓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라면 미안하다 해야 할지. 흐린 눈을 한 그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차분하게 손님을 받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덤덤한 제 아들이 어디선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 순식간에 여인을 낚아채 갔다. 눈물이 쏙 들어간 공작의 얼굴에 황당함과 놀람이 스쳤다.
빗물이 투두둑 부딪치는 유리 처마 아래 두 사람이 나란했다. 레이라는 아직도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가만가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매정하게 털어 버리기에는 애처롭게 달달 떨리는 손이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이 흐려졌다. 맑은 하늘처럼 빛나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슬픔이 빗살처럼 흘러내렸다.
“괜찮……지는 않구나.”
“하.”
부지불식간에 흘러 버린 눈물에 제가 더 당황한 레사가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주룩주룩 흐른 눈물이 뺨을 흠뻑 적셨다. 흔들거리는 눈빛이 저를 보지 말아 달라는 것 같기도, 가지 말아 달라는 것 같기도, 꿈인가 싶어 의아한 것 같기도 했다.
한숨을 크게 내쉰 레이라가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완전히 제 얼굴을 가려 버린 그의 손을 치우고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무리 두드려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보는 것 같았다. 레이라는 다시 한숨을 뱉었다.
레사는 서럽게도 울면서 눈동자로는 그녀만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군.”
“응. 누구를 좀 만나러 왔어. 그 사람 어머니께서 내게 부탁하셨거든.”
“……어머니?”
“혼자서는 울지도 못하는 아들을 두신 분인데, 아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더라.”
“…….”
“어디 앉을 데 없어?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인 레사가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아 끌어당겼다.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얼핏 스쳤으나 레이라는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매서운 추위에 떨리는 것처럼 흔들림이 전해지는 손짓이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빼앗은 손수건으로 야무지게 제 눈가를 닦은 레사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정하기 싫은데, 벌써 안쓰러워 죽겠다. 까칠해진 피부와 착 가라앉아 죽어 버릴 것 같은 눈빛이 안쓰럽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저가 도망갈까 눈치를 보는 것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숨을 내쉬면 놀랐는지 들썩이는 어깨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이거, 마음대로 한숨도 못 쉬겠는데.’
레이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레사의 뒤를 쫓았다.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그만한 응접실도 존재했다. 크리스탈을 조각해 장식한 두꺼운 유리 벽은 반대편에서는 그저 사람의 형체만 얼핏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방 안에는 희고 푸른빛 가구가 즐비했다. 은빛으로 포인트를 준 가구들은 과하게 반짝이는 벽과 어우러져 우아함을 뽐냈다. 아마 레이라였다면 어두운색 가구로 균형을 맞췄겠지만, 환자가 기분 전환을 하기에는 이만한 인테리어가 없을 터였다.
주위를 두리번대는 레이라와 달리 레사는 굳어 버린 것처럼 의자에 딱 달라붙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몸 대신 레사의 푸른 눈빛이 레이라를 쫓았다.
“예쁜 곳이네, 기분 전환하기에 좋아 보여.”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지은 곳이니까.”
“그렇구나.”
한동안은 말없이 찻잔을 들고, 내리고 찻물을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영 어색하게 시선을 굴리던 레이라가 한숨을 내쉬자 레사의 어깨가 팍 튀어 올랐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사실, 지금도…….”
“꿈 아니야. 하아, 일단 내가 찾아온 건 두 사람이나 내게 너를 부탁했기 때문이야. 러스티 후작님과 네 어머니.”
“역시, 그랬군.”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 레사의 눈빛이 다시 흐려졌다. 그녀가 제 의지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꾹 막아 두었던 그리움이 그녀의 말과 함께 울컥울컥 차올랐다.
애써 시선을 그녀에게서 멀리 돌린 채 제 눈가를 가린 그의 어깨가 떨려 왔다. 미처 참지 못한 한숨이 터진 레이라가 벌떡 일어나 레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울음을 뚝 멈췄다.
“실컷 울어. 괜찮아. 많이 힘들었지.”
다시 봇물 터지듯 터져 버린 울음을 끅끅 삼키는 애처로운 신음이 들려왔다. 레이라는 눈을 나붓이 감고 그를 더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드레스 자락이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조금 전 레이라가 레사에게 한 말은,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울고 싶어도 울음을 꾹 참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저를 안아 주며 했던 말.
어머니를 잃고도 울지 못하던 제게 그가 했던 말.
참았다 터진 울음이 종일 이어지던 그날, 그는 그저 저를 안아 주고 또 안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위안이 되고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더불어 그가 제 마음을 가득 차지한 것도 그날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미안함이 울컥 차올라 입을 꾹 닫은 레이라가 레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사는 제 가족을 사랑했다. 아픈 어머니만을 위해 노력하는 제 아버지가 조금은 미웠을 테고 열병에 걸려 앓아누운 어린 날 홀로 지새운 밤만큼이나 어머니가 그리웠을 것이다. 또 홀로 맞은 생일날 아침 텅 비어 쓸쓸한 식탁이 서글펐을 텐데도 그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했다.
레이라를 잃어버린 뒤 그가 찾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보낼 줄 알았더라면 레사는 북부로 떠나지 않았을 거였다. 어머니 곁에서 며칠이라도 더 머무르며 생에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녀를 위로해 줬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것도 듣지 못했다. 늘 위독하다가도 좋아지기를 반복했던 탓에 그의 아버지가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마저도 하나뿐인 아들을 걱정하느라 그랬을 터라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못했다.
레이라는 서러움을 뚝뚝 흘리는 그의 얼굴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지난날의 제 얼굴이 이랬을 것도 같았다. 그때 그의 마음도 이랬을까? 찾아올까 말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를 찾아온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가만히 안아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가장 필요한 일이리라. 기댈 곳조차 빼앗아 버린 것 같은 답답함에 제 입술을 깨문 레이라는 숨을 죽였다.
얼핏 그림자가 일렁이던 하늘이 완전히 까만 어둠에 뒤덮인 밤이 되어서야 레사의 울음이 멈추었다. 민망한지 눈가처럼 볼을 벌겋게 물들인 그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미안하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레이라는 그저 모른 체하며 한참 동안 서 있느라 아픈 다리를 쉬어 주려 주저앉듯 털썩 소리를 내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레이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뭐가?”
“…….”
레사는 그저 다리가 아팠을 텐데 배려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가볍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제게 무엇이 미안한지 물은 것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미안할 짓을 한두 가지 한 것이 아니니 그러했다. 갑자기 멍해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비어 버렸다.
“그것이…….”
“아, 따지려는 게 아니었어. 그냥, 갑자기 사과하길래 물은 거야.”
“네게는 미안한 것이 많다.”
“알아.”
다시 말문이 막힌 레사가 멍하니 레이라를 응시했다. 피식 웃은 그녀의 얼굴이 해사하게 빛나는 것 같아 눈을 비벼볼까 생각하던 그가 한숨을 뱉었다. 장난스레 웃는 저 얼굴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표정인데도. 다시금 해일처럼 밀려드는 자책감이 그의 심장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지. 미안해.”
“하아…….”
“네게서 나트하까지 빼앗아 버린 것 같아서 더 미안했어.”
“…….”
“사과를……, 네 사과를 들어주지도 않고 피해 버린 것도 미안해.”
“아니다. 아니야. 네가, 내게 미안할 일은 없다.”
중얼중얼 힘없이 흘러나온 말이 레이라의 귓가를 두드렸고 가슴을 두드렸다.
“괜찮을 줄 알았어. 등신처럼, 너와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지. 그 안일한 생각으로 너를 힘들게 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네가 멀리 가 버렸다는 것도……. 너를 보낸 뒤에야 깨닫게 됐다. 나 때문에 네가 저주에 걸린 것도 미안하다. 이 말도 늦었을 테지만,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다시 스며든 무거운 울음과 함께 천천히 내뱉어진 레사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레이라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긴 후회를 전부 들어주었다.
“그만.”
레이라는 흐느낌이 가실 때까지 사과를 이어 가던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인제 와서 후회하는 그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너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어. 너는 나를 버렸으니까. 아주 잔인하게도 잘라 버렸지. 나를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내게 말하지도, 내 의사를 묻지도 않았어. 네 말대로 너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네 속단으로. 그로 인해서 나는 더 큰 상처를 받아야 했어.”
“…….”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하려 했어. 누가 보아도 후회하는 너를, 내게 사과하려는 네 의사를 무시했어. 네가 나를 무시했으니까 나도 그래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 받은 대로 되돌려 주는 거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나만큼 너도 아프고 힘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 나라도 그랬을 것 같군.”
씁쓸하게 웃은 레사의 고개가 푹 꺼졌다.
“네가 그만큼이나 미웠던 건, 남자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너를 사랑했고 믿었기 때문이야. 나는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었나 봐. 아니, 그럴 거라고 믿었었나 봐.”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어진 레사의 마음을 대신하듯 그의 고개가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레이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내쉬었다.
“그래도, 미안해. 용기 내서 사과하려던 네 진심을 들어주지도 않고 피해 버려서. 너도 나만큼 힘들었을 테고 또 다른 힘든 일이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는 데도 모른 척했던 것도. 전부.”
“…….”
살그머니 들린 레사의 시선이 레이라의 발끝을 타고 올랐다. 단단해진 그녀의 마음처럼 더 아름다워진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그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어.”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잖은가.”
“나도 미안할 일을 한 건 맞잖아.”
담담하게 내뱉은 레이라의 말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민과 그만큼 많은 감정과 그것에 들인 시간만큼 단단해진 진심이 담겨 있었다.
레사는 그녀가 제 품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으며 아름다워졌다는 것도.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 저이되, 저가 아니라는 것도.
그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분하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꽉 틀어쥔 주먹이 전과는 다른 이유로 떨려 왔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 눈앞이 흐려졌다.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그녀가 정말로 제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시원하다는 얼굴로.
단념했다고 생각했건만 전혀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받아들였을 그녀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레사는 수많은 생각이 이어지는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눈을 꽉 감고 손을 꽉 쥐어도 잡히지 않은 무언가가 자꾸 제 가슴을 긁어 댔다.
레이라는 숨도 쉬지 않고 굳어 버린 레사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싫지 않다면,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연인이 될지, 친구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해 보면 알 수 있겠지.”
“…….”
커다랗게 뜨인 푸른 눈동자가 기적을 목도한 신자처럼 이채를 띠었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머릿속에 불어온 청량한 바람 한 자락은 그의 잡념과 고민, 후회를 싹 걷어 가 버렸다. 레사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내게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따스한 햇볕이 가득 내리쬐던 봄날. 가련한 들꽃이 가득 피어 있던 들녘에서 마주친 그 소녀처럼, 그의 첫사랑이 미소 지은 순간이었다.
레사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흑색 구름에 숨은 달빛이 미약한 빛을 뿜었다. 노기를 가득 품은 진득한 시선을 숨기려 눈을 감은 남자는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아득 깨문 잇새로 살벌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분노를 가눌 길이 없는 것처럼 꽉 쥔 주먹을 내질렀다.
쾅-!
쩍 갈라진 바위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불어온 바람에 날아간 흙먼지 사이로 붉은 안광이 가득 비쳤다.
남자는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이리저리 맞고 부서진 바위와 나무들이 사방으로 흐트러지며 비산했다.
광포한 기운을 휘감은 남자의 몸이 짐승처럼 날뛰다 뚝 멈춘 순간 자욱한 흙먼지가 착 가라앉았다. 거칠어지지도 않은 숨을 기가 찬다는 듯 내뱉은 남자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베르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는 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