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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웃집 토끼를 훔치고 싶을 때는, 그 주인의 얼굴을 떠올려라 (22/26)

21. 이웃집 토끼를 훔치고 싶을 때는, 그 주인의 얼굴을 떠올려라

사위가 깜깜해진 밤, 바래다준다는 레사의 제안을 거절한 레이라는 미리 잡아 둔 숙소로 향했다.

비가 갠 뒤 불어온 밤바람은 서늘했다. 마차 창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멍했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늦게 제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중이었다.

“괜히 다시 시작하자고 했나?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할 걸.”

하긴, 그것도 웃기긴 할 터였다. 저주를 받아 레사의 음경은 제게 있으며 마찬가지의 이유로 세 명의 남자와 함께인데, 그 와중에 전 남자 친구 꼬리표를 단 친구라니.

그들은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가정보다 그와 친구로 지낸다는 것을 더 못마땅해 했다. 특히 에틸은 그럴 거면 그저 모르는 척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했다. 그의 마음을 빤히 아는데 친구는 무슨 친구냐며. 옆에서 그건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이던 나트하의 얼굴까지 떠올리자 레이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요즘 들어 귀여운 투정을 부리기도 하는 세 남자가 벌써 보고 싶었다. 어느새 이 정도로 정이 들었을까 고민해 보기가 무섭게 통신 마법 구가 울려 댔다. 정말 위치 추적 마도구라도 숨겨 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오고 계신 겁니까?

“응, 지금 막 나왔어.”

마법 구를 소중히 든 채 잔잔히 미소 짓는 레이라의 얼굴을 바라본 에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피오니안 님께서 모시러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얼마나 걸린다구.”

-…….

아웅다웅하는 소음이 작게 들려오더니 나트하에게 왜 먼저 왔느냐, 혼자 왔느냐 투덜대는 피오니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출발하신 줄 알았어요. 얌전히 기다리자며 피오니안을 다독이는 나트하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렸다. 레이라의 웃음이 깊어졌다.

레이라보다 먼저 메르세데스 가에 도착했던 나트하였으나 잠은 밖에서 잘 요량인 것 같았다.

“나트하도 와 있나 보네.”

-네. 이미 도착하신 줄 알고 혼자 왔다는데, 덕분에 피오니안 님께 30분째 구박만 당하고 있습니다.

“아하하.”

어서 와서 살려 달라는 나트하의 울음 섞인 말소리가 들리자 결국 레이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여쁜 웃음을 보며 말을 삼킨 세 남자도 함께 웃는 얼굴을 그렸다.

순간 평화롭고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칙칙한 어둠이 드리웠다. 그림자처럼 마차에 스며든 어둠이 얇은 실처럼, 그러나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휙.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날아가 산산이 부서진 마법 구의 유리 조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놀란 눈을 뜬 레이라는 그제야 마차의 지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소리도 없이 휑하니 비어 버린 마차 천장은 무른 것을 단번에 베어 낸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철판을 두드려 만든 튼튼한 마차였다. 황당함에 레이라는 입을 떡 벌렸다.

힘없이 손을 떨어트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차 귀퉁이에서 일렁이는 붉은빛이었다.

레이라는 마차에 불이 붙었나 생각했다. 그러나 불꽃처럼 일렁이는 것은, 붉은 머리칼이었다. 짙은 밤에도 붉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와 그녀를 경악케 했다.

“힉!”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과 핏빛처럼 붉은 안광이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은 달도 구름에 숨어 버린 컴컴한 밤에 마주하기엔 퍽 으스스한 것이었다. 레이라는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손을 등 뒤로한 채 남자를 응시했다.

레이라는 무어라 말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마차 한 귀퉁이에 유연한 치타처럼 걸터앉은 남자가 손짓으로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귀엽게 고개를 비튼 남자가 레이라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여우처럼 휘어진 눈매는 사랑스러웠지만, 남자의 형형한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몹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레이라는 이것이 위험 상황인지 아닌지 헛갈렸다.

“반가워. 인사를 길게 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아. 미리 양해를 좀 구할게.”

빠르게 중얼거린 남자가 순식간에 레이라의 허리를 낚아챘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남자의 옆구리에 한 손으로 달랑달랑 들리게 된 그녀는 소리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남자는 마치 깃털이라도 든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반대 손으로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납치? 지금 나를 납치하려는 거야?’

처음 겪는 상황에 입만 빠끔거릴 정도로 놀랐지만, 레이라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생각을 했다.

‘이 남자, 이대로 날 납치한다면……, 곧 죽을 텐데.’

악의 구렁텅이처럼 보이는 검은 포탈에 집어 삼켜지기 직전, 레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아니, 달이라고 하기엔 시야가 밝아서 해 같기도 했다.

채도가 조금 다른 검은 구름은 뭉게뭉게 떠다니고 주위의 분위기만큼이나 무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음산한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깔린 대지마저 핏빛처럼 붉은 이 곳은 마계라 불렸다.

그곳에서 레이라는 멍하니 남자의 옆구리에 끼어 이동 중이었다. 바람처럼 날랜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는 이동 수단으로 퍽 괜찮은 상대였다. 처음엔 자세가 몹시 불편했다.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그가 무언가 마법을 걸어 주자 침대 위에 엎드린 것처럼 편안해졌지만.

덕분에 넋을 놓고 주변을 구경하던 그녀는 회색빛 바다를 건너, 붉은 땅 위에 도착하는 순간 몸을 굳혔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악랄한 시선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붉은 흙 곳곳에 솟아오른 검은 무언가는 살아 있는 생명처럼 뭉클거리는 악의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레이라와 그녀를 옆구리에 낀 남자를 쫓아 시선을 옮기기까지 했다. 끈질기게 두 사람을 쫓는 시선은 수백, 수천 개나 되었다.

납치당하는 주제에 당신 이러면 죽을 텐데 괜찮은 거냐며 남자를 당황스럽게 굴었던 레이라였다. 천연덕스러움의 결정체인 것만 같던 그녀의 입이 다물려 있자 남자의 시선이 의아하다는 듯 레이라에게 닿았다.

“왜 그래? 아.”

힘겹게 시선과 싸우느라 떨리는 가녀린 몸을 보며 혀를 쯧 찬 남자가 발을 쾅 굴렀다.

땅에 닿은 발자국으로부터 시작한 파동이 땅을 파도처럼 울렸다. 시꺼먼 무언가가 기겁하며 땅 깊숙이 사라져 버리자 레이라의 몸이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다.

“괜찮아? 미안. 인간을 데려온 것이 오랜만이라.”

“……괜찮아요. 고마워요.”

“응. 아, 내가 내 소개를 안 했던가?”

“네. 그런데 누구신지는 알 것 같아요.”

“피오니안에게 들었어?”

걸음을 멈춘 남자가 까만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옆구리에 끼어 있던 레이라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모양이었다. 마법 덕분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레이라는 빠르게 체념했다. 오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자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으나 남자는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듯보였다.

체념해 버린 것과 다르게 너무나 가까운 거리는 조금 부담이 되었다. 레이라는 괜스레 민망한 기분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네. 악마, 맞죠?”

“응. 제대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카르도베르 레퀴엠. 마지막 뱀파이어지. 베르라고 불러.”

“…….”

레이라는 자신도 소개해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잠깐 찾아온 정적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베르는 레이라가 저를 소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저는 레이라 녹스예요. 당신이 건 저주의 대상이죠.”

“그거까지 알고 있네. 역시. 그런데 왜 화를 안 냈어?”

“피오니안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레사에게 저주를 건 이유요.”

살벌했던 베르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약간 온기를 품은 것도 같았다. 그 변화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레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아야 했다. 전보다 더 잔인한 빛을 띤 눈동자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네게 저주를 건 이유가 되지는 못하잖아. 넌 그가 아닌데. 역시, 아직도 그자를 사랑해? 그래서 용서하는 거야?”

눈빛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다. 약한 장난기를 머금은 다정한 말투는 레이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무서운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아니에요. 레사를 사랑하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레사 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요. 당신이 밉긴 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어요.”

“인간이 악마를 이해한다고? 너는 참 볼수록 신기한 여자네. 너는 내 행동이 이해될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이해되지 않는 걸. 아주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그런가요.”

“응. 그래서 피오니안이 사랑에 빠진 건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린 베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레이라는 당황스러워하며 그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저를 납치하신 건가요?”

“응? 응. 아마 며칠 뒤면 장막을 찢어 버리고 나를 찾아오겠지만. 글쎄, 나는 지금 내 행동을 후회하진 않아. 죽이면 죽지 뭐. 사실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 복수하려고 저주를 걸었는데 복수는커녕 그놈은 조금 힘들어하더니 쌩쌩 날아다니질 않나. 흠, 이게 다 너 때문인가?”

약간이었지만 제게 향한 살기에 놀란 레이라가 입을 딱 다물었다. 생긋 웃음 지은 얼굴은 아주 예뻤지만 살 떨리게 두렵기도 했다.

베르는 제 손아귀에 떨어진 여자가 제 계획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굴었다. 다시 제 자리에 서서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던 그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네. 너 때문이네. 보통 다른 여자였으면 그냥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을 텐데. 너는 주변에 무슨 남자가 그리 많고, 그 남자들은 하나같이 너를 그렇게 위해 주는 거야? 게다가 너도 그래. 그놈 때문에 저주가 걸린 건데 미워해야지. 왜 다시 시작하자고 난리야? 너 변태야?”

“네?”

“셋을 거느려 보니 하나가 더 늘었으면 좋겠다던가.”

“아니거든요!”

베르는 갑자기 빽 소리친 레이라에게 눈을 흘겼다.

“아니면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저도 레사한테 잘한 건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다고 그놈이 잘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 그렇긴 하죠.”

“너 엄청나게 바보구나? 내가 몇 대 때려도 나를 용서해 줄 것 같아.”

“그건 아니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단호하게 소리친 레이라에 베르가 씩 웃었다. 천사처럼 웃는 악마는 아주 예뻤지만 이상했다. 그의 눈빛이 저를 탐색하듯 훑어보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내가 너를 왜 데려가는 것 같아? 피오니안이 곧 찾아올 텐데.”

“……글쎄요.”

“죽이려고 데려왔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똑똑하다더니 영 맹탕이네.”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한 레이라의 안색이 하얘졌다. 생전 처음 당한 납치에 당황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당연히 저를 구해 주리라 믿고 있는 남자가 있어서일까? 레이라는 멍청하게도 얌전히 끌려온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이 악마가 저를 왜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 왜 찾아왔는지부터 생각했어야 했는데!’

레이라는 붉은 땅을 지나, 다시 회색빛 호수를 지날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베르는 그저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기도 했고 피식 웃기도 했다.

베르는 레이라를 어찌하려고 마계까지 끌고 온 것일까.

사실 그것은 베르도 잘 모른다. 너무 열이 받았기에 죽여 버리자 했던 것은 맞았다. 그렇다면 마차에서 죽여 버렸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 그녀를 굳이 마계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베르는 약 열 시간 전쯤의 일을 떠올렸다.

제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베르는 레이라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제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녀가 죽어 버리고 나면 레사가 더 슬퍼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냥 죽여 버리고 마계로 돌아가자. 그리고 피오니안에게 죽는 거야.’

어차피 혼자 남은 세상에는 미련도 없다.

베르는 저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쫓았다. 하얀 가죽을 덧씌운 철 지붕을 날려 버리고 작고 하얀 손에 들린 통신 마법 구를 부셨다. 마나를 모은 손으로 야금야금 마차 벽을 타고 오른 베르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를 마주했다.

숨어 버린 달, 처연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여자를.

그 개자식의 손에 죽어 버린 제 딸, 칼리처럼 붉은 꽃잎과 똑 닮아 어여쁜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베르는 당황스러웠다.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눈앞에 두고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생전 처음 겪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죽여 버리려 치켜든 손에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 달싹이던 입술을 딱 다물었다. 귀여웠다.

겁을 잔뜩 먹은 얼굴도, 솜사탕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칼도, 특히 울 것 같은 눈동자가.

베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기가 푹 꺼져 버린 것은 물론이고 퍼뜩 드는 제 생각이 너무나 당황스럽기도 했다. 죽이기가 싫었다. 죽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이 여자를 죽여 버리면 피오니안이 슬퍼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겠지.

‘일단 마계로 데려가서……. 데려가서 뭘 하려고?’

당황스러움에 눈을 굴린 베르가 일단 미소를 지었다. 해치지 않아요.

해치지 않기는 뭘 해치지 않는가. 죽이려고 달려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베르는 빠르게 무어라 중얼거린 뒤 그녀를 낚아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여자를 데리고 가 봐야겠다.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레이라의 눈동자에 꽂혀 버렸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제 절친처럼.

떠올려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뒤통수를 긁적인 베르가 제 성에 도착한 것을 알리려 팔을 흔들었다. 흔드니 흔드는 대로 흔들거린 레이라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죽일 거예요?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애처로운 눈망울이 사방을 훑었다. 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귀여웠다.

“도착했어. 여기가 큼, 내 집이야.”

“그렇군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자. 나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아, 네.”

레이라는 무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베르는 레이라를 땅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주워 옆구리에 끼었다. 잠깐 떼어 놓은 새에 허전해진 옆구리가 시린 것이 불쾌했다.

밤이 온 건지 붉은 달이 뜬 하늘이 더 검어진 것 같았다. 검은색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싶은 생각에 레이라는 신기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베르의 저택은 넓고 웅장했고 멋졌다.

고급스러운 검은 돌로 지어진 고성은 광택이 반질반질했다. 차가운 돌벽에 금색 가죽을 덧대 모양낸 벽에는 자그만 다이아몬드가 콕콕 박혀 있었다. 검붉은 색 나무로 만든 가구들과 온통 어두운 내부를 밝히는 환한 조명은 베르의 고상한 취향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듯했다.

반짝이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인 샹들리에를 바라보던 레이라의 눈동자가 베르를 향했다.

블랙 턱시도를 갖춰 입은 베르는 검붉은 머리를 멋지게 고정해 아주 나른하고 섹시해 보였다. 그는 그레이 실크 셔츠와 체크무늬가 얼핏얼핏 드러나는 블랙 재킷이 저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베르는 무의식중에 레이라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보석이 그득한 저택에 질린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그러게.”

“네?”

뾰족하게 굴기로 작정한 레이라의 눈초리가 픽 죽었다. 기운이 쭉 빠져 버린 것 같은 악마의 모습이 퍽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저를 닦달한 뒤 죽이겠지 싶었던 상상을 지워 버렸다.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를 죽이기에는 마계보다 제국이 편했을 텐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나?’

갸우뚱거리는 레이라의 고갯짓이 귀여운지 베르의 어깨가 슬쩍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고 여전히 풀 죽은 체하는 중이었다.

‘아니 대체 왜 저렇게 힘이 없어 보이는 거야? 데려다 놓았으면 말을 하던가!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꼭 잡아먹을 것처럼…….’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 마주한 지 두 시간. 드디어 베르의 입이 열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레이라는 이것이 악마들의 고문 방법인가 싶은 엉뚱한 생각까지 했던 참이었다.

“넌 대체 뭘까?”

“……네?”

레이라는 베르에게만 통하지 않는 머리 굴림이 짜증 났다. 이 남자는 예측이 되지 않았으며 하는 질문마다 저를 당황스럽게 했다.

두 시간 동안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다가 측은하게 축 처졌다가 다시 눈을 빛내며 바라보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나온 것이 저런 질문이라니.

“사실 내 계획은 그놈에게서 너를 떼어 놓은 다음 홀랑 잡아먹는 거였거든?”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지 베르는 저 혼자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고개를 흔들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내 예상보다 네가 다른 놈과 잔 시기가 엄청 빨랐어. 난 조금 더 그놈의 것을 가지고 놀 줄 알았단 말이야. 괴롭히고 상처를 주든, 성적으로 괴롭히든 말이야. 그래. 그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남자가 필요하다는 부분이 그렇게 쉽게 채워질 줄은 더 몰랐어. 에틸 페르세나, 나트하 러스티라고 하던가? 거기다 피오니안이라니. 드래곤의 반려를 내가 무슨 수로 낚아채겠느냐고. 안 그래?”

“……네, 뭐.”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거린 레이라는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생각했다. 베르가 제게 따지는 거라고 치기에는 너무 측은한 표정과 말투였다. 그는 누군가에게 푸념하듯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레이라 저인데.

레이라는 들려오는 한숨 섞인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래. 뭐 그것도 그럴 수 있지 생각했어. 사실 나는 네게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나는 그저 그놈이 나처럼, 죽을 만큼 힘들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는 왜 그놈을 용서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내가 봤을 때 그놈은 아주 한심한 놈이었어. 난 꽤 오랫동안 그놈을 지켜봤지. 그놈은 너를 아주 사랑했고, 너도 마찬가지였어. 뭐 직접 내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그래 보였어.”

베르는 아, 하고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굴더니 레이라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종이 뭉치는 레이라와 레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레이라는 눈을 비볐다.

‘아니, 이게 뭐야?’

“그건 내가 만든 마도구로 내 마수들이 찍어 온 거야. 음, 그런 식으로 그놈을 계속 추적해 왔거든. 사실 네겐 미안한 게 많아. 너희 둘이 헤어진 것이 그놈의 아비 때문이라면, 음, 내가 그 아비에게 조금 속살거리고 그랬었거든.”

“그 말씀은 메르세데스 공작님이 악한 마음을 품게 만드셨다는 건가요?”

“응. 그래도 심하게 그러진 않았어. 그저 그자의 성품을 약간 예민하게 해 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날뛸 줄은 정말 몰랐어.”

“…….”

레이라는 처음으로 베르에게 화가 났다. 뾰족해진 붉은 눈빛이 베르를 쏘아보자 움찔거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앙칼진 고양이처럼 변한 그녀의 기세는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라의 화난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슴이 무언가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두근거렸다. 베르는 이런 기분이 오랜만이라 즐겁기도 아련하게 아프기도 했다. 그가 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그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무언가요? 어차피 죽일 거니까 전부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아, 아니야. 일단 전부 들어 줄래? 네가 화내는 건 이해하지만, 어, 미안해.”

“알겠어요.”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팔짱까지 꼈다. 베르는 건방져진 레이라의 자세가 귀여워 픽 웃었다. 그 작은 웃음소리에도 저를 죽일 듯이 째려보는 그녀의 눈이 아플 것 같아 미안한 얼굴을 한 것은 덤이었다.

“나는 그자를 힘들게 할 목표로 그자의 부모를 골랐어. 내 딸 같은 아이를 죽인 것이 그였으니, 나는 그자의 부모를 통해 그자에게 복수하려 했거든. 그런데…….”

“…….”

“너는 그를 아주 사랑했고, 그도 그런 것 같았지. 하지만 그자는 병신처럼, 보기 좋게 제 사랑을 저버리고 제 부모를 택하더군. 그래서 나는 너를 노리려 했어. 그자는 제게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병신 같았으니까. 깨달았을 때 더 절망하고 또 절망할 테니까.”

말을 줄줄이 늘어놓은 뒤 숨을 고른 베르가 레이라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새빨간 혀가 매끄러운 입술을 핥는 것까지 멍하게 바라보던 레이라가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베르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레이라는 와중에도 베르가 예쁘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는, 제 사랑을 빼앗아 간……. 아, 제 사랑을 빼앗아 간 것은 그가 아니다.

떠오르는 생각에 잠식되듯, 그녀는 상처 받은 다람쥐처럼 몸을 웅크렸다. 건방지기 짝이 없던 자세가 다시 소심해지는 것을 보며 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사와 레이라, 두 사람의 사랑이 깨진 것은 외부의 요인이 아니다.

베르의 방해는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악한 마음을 조금 품게 한 것이라 했다. 그가 그러지 않았더라도 메르세데스 공작과 녹스 공작의 사이는 원래 좋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간계를 통해 조금 과격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마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그 방해에도 두 사람의 마음이 더 단단했더라면, 레사가 레이라를 더 믿었더라면, 레이라가 레사에게 더 솔직하게 다가갔더라면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빛나던 시절을 저주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헤어진 뒤 저주를 받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올곧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저만을 바라봐 준 에틸. 늘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질 제 친우의 걱정보다 저를 더 사랑해 준 나트하. 길고 길 평생에 새겨질, 죽음보다 더할 그리움을 감내해야 할 피오니안.

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레사를 증오하는 마음을 끊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베르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이라는 멍청하게 베르를 탓하려 했던 저를 나무랐다. 그가 제게 한 짓은 잘못이나, 결과는 그의 계획처럼 되지 않았고, 그렇게 만들어 준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섣부르게 베르를 자극해 죽어 돌아갈 수는 없다. 레이라는 죽기 싫었고, 죽어서는 안 됐다.

“베르, 꼭 복수해야 하나요?”

“……뭐?”

“베르의 소중한 이들을 레사가 죽인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레사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은 또 생길 거예요. 사람들은 마수를 죽이고, 마수는 사람들을 죽일 테니까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반대로 생각해 보죠. 마수에게 죽은 사람들은, 당신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아요. 뭐 못한다는 것이 맞겠지만, 그들도 당신과 같은 아픔을 겪었을 거예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 인간들의 아픔도 있으니, 내 고통쯤은 별것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흉악해진 눈빛이 살기를 띠었다.

레이라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아니에요. 고통의 크기를 그 누가 가늠할 수 있겠어요? 저는 복수가 아니더라도, 고통을 이겨 내는 방법이 있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냉랭했던 베르의 눈빛이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레이라는 나른히 숨을 터트렸다.

“괴로워하는 레사를 볼 때마다 행복하던가요?”

“뭐 기분은 좋았지.”

“그럼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던가요?”

“…….”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베르가 시선을 돌렸다. 그건 아니었다. 고소했고 통쾌했고 어느 때는 하늘 끝까지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지만, 딸이라 여겼던 그 작은 아이가 그립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더 보고 싶고 생각이 나, 그 개 같은 자식이 미웠다.

“그것 봐요. 당신은 복수에 성공했더라도 힘겨웠을 거예요. 당장은 통쾌했을지 몰라도 감정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거든요. 그가 싫고 미운 것과는 별개로 그리움은 항상 따라왔을 거예요. 오히려 더 괴로워질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레사가 죽어 버렸으니 미워할 상대조차 남지 않았을 테니까.”

“나더러 평생 그 자식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밉고 싫을 때마다 쥐어박기라도 하라는 건가?”

“아니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줄 친구나 가족이에요. 아픈 것을 나누고, 힘겨운 것을 다독여 줄 사람이요.”

“…….”

“살아 있는 악마는 베르뿐이라고 했죠? 저는 어떤가요? 제가 베르의 친구가 되어 줄게요.”

베르는 레이라가 저를 부르는 호칭이 ‘당신’에서 ‘베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싫다.”

레이라의 질문에 대한 답이 칼같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베르도 몰랐다. 그러나 베르는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 친구라니! 친구보다는 조금 더……, 아니, 뭐?’

“그렇게 제가 싫은가요?”

“……잠시만.”

단호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려 레이라의 말을 막은 베르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제가 가진 감정의 정체를 알아냈다. 인세를 떠나 홀로 지낸 드래곤보다 인간과 가깝게 지냈던 베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 내가 저 여자에게 반해 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래,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했던 거군. 저 눈동자가 너무 예뻐 보이던 이유가 그런 거였어.’

멀거니 흐트러진 베르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인간에게 첫눈에 반하다니.’

✲ ✲ ✲

갑작스레 통신이 끊긴 수정구를 빤히 보던 세 남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한쪽 눈썹을 슥 끌어올린 에틸이 스타트를 끊었다.

“피오니안 님.”

이미 마법을 시전 중인 피오니안은 나트하에게 눈짓을 했다.

“405, 301, 109예요.”

나트하가 불러 준 좌표대로 레이라의 흰색 마차 옆으로 워프한 세 남자의 표정이 한껏 굳어졌다. 저 멀리 날아간 마차 지붕은 칼로 종잇장을 베어 낸 것처럼 호쾌하게 잘려 있었다. 호위로 따라간 다섯 명의 기사는 위기도 느끼지 못한 채 단번에 숨이 끊겼는지 칼을 뽑은 흔적조차 없이 숨이 끊긴 채였다.

황당하게 숨이 끊긴 다섯의 기사도 기사였지만, 세 남자가 놀란 부분은 마차 때문이었다. 레이라의 마차는 나트하와 피오니안의 마법을 왕창 때려 부어 제작한 것이었다. 그 특수한 마차의 최종 점검 때, 에틸은 마나를 실은 검으로 마차를 여러 번 내려쳐야 했다. 그제야 마차의 벽은 억지로 찢은 것처럼 망가졌었다. 그때처럼 억지로 잡아 뜯듯이 뭉개지고 찢겨 있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피오니안은 황급히 마차 안을 살폈다. 날듯이 뛰어온 에틸과 나트하도 함께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베일 듯 날카로워진 시선이 깨져 나뒹구는 마법 구와 그녀가 앉아 있었을 폭신한 의자에 머물렀다.

없다.

“……늦었군.”

“하…….”

목 한가운데가 꿰뚫려 절명한 마부의 뜬 눈을 감겨 주던 나트하가 한숨을 거나하게 내쉬었다. 에틸은 사방을 살피며 흔적을 되짚었으나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흙바닥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로 솟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바닥 한 번 밟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대체.”

마차 지붕을 가만히 바라보던 피오니안은 단번에 범인을 직감했다.

“베르군.”

“그 악마 말씀이신가요?”

“이 흔적은 몇 번이나 응축한 얇은 마나 실로만 가능하다. 에틸도 못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놈밖에는 없지.”

“그렇다면 마계입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산했다. 두 남자는 에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단 하나 뿐이었다.

끝도 없는 분노.

깊은 심해처럼 어두워진 푸른 눈빛에 광기가 서렸다.

감정을 극한으로 통제하고 있는 피오니안과 웃음이 싹 걷힌 나트하의 표정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숨길 수 없는 분노와 그녀를 지키지 못한 채 허망하게 빼앗겨 버렸다는 허탈함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급히 위치 추적 마법을 발동해 본 나트하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오니안은 마계로 향할 가장 쉬운 방법을 떠올리는 중이었으나 마땅치 않았다.

“일단 장막을 찢어, 마계로 향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눈으로만 먼 곳을 배회하며 서로를 향한 자책과 비난을 씹어 삼키던 두 남자의 시선이 피오니안을 향했다.

“그럼.”

“잠시만요, 에틸. 피오니안 님 장막이 찢기면 그 사이로 몬스터가 출몰하게 되나요?”

“그렇다.”

“이곳은 메르세데스 공작령이에요. 이곳에서 장막을 찢었다가는 난리가 날 거예요. 자리를 이동하든지, 아무튼 방책을 세워야 해요.”

“하…….”

이지를 잃어버린 짐승처럼 변해 버린 에틸은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못마땅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당장 장막인지 뭔지를 찢어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하니 답답한 것이리라. 나트하는 에틸의 어깨를 몇 번 도닥였다. 나트하는 그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피오니안도 마찬가지였다.

“피오니안 님, 그 베르라는 악마의 성격은 어떠한가요? 무엇 때문에 그녀를 납치해 간 것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아마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뒤 차선을……. 하, 내가 멍청했군. 그놈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피오니안 님.”

“레이라가 레사와 만난 뒤 죽는다면, 그자가 괴로워할 테니 당장이라도 죽이려 했겠지. 그러나 죽일 거라 마음먹었다면 이 자리에서…….”

피오니안은 말이라도 레이라를 죽이네 살리네 하고 싶지가 않았다. 베르의 눈이 휙 뒤집혔다면 당장 그녀를 해쳤을지 몰랐다. 그러나 정말로 그 말을 입 밖으로, 아니 생각만으로도 싫었다.

“그러니까, 레이라를 당장 살해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이라는 건가요? 그런데 납치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시고요?”

“그의 성격이 그렇다기보단, 그가 품은 분노 때문에 그렇게 판단했다.”

피가 날 듯 쥐어진 에틸의 주먹이 애꿎은 마차 벽을 때려 부쉈다. 이미 한 차례 부서지긴 했으나 잔존하던 마법들마저 한순간에 부셔져 버렸다. 그의 주먹 모양이 그대로 남은 철판 덩어리를 응시하던 나트하가 답답한 숨을 터트렸다.

“에틸, 지금 저희 세 사람의 마음은 같아요. 일단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어요.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려면, 감정을 최대한 자제해야 해요. 피오니안 님, 그렇다면 그가 왜 레이라를 납치해 간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다. 그녀를 해치겠다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면, 이리 갑자기 찾아올 이유가 없다.”

“해치려 찾아왔으나 모종의 이유로 생각을 바꿔 그녀를 데려간 것이군요. 그는 피오니안 님과 오래 알고 지냈으니, 마계로 찾아갈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겠고요.”

“…….”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 타입인가요?”

“모르겠군.”

“네?”

피오니안의 표정은 이상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받았을 때의 어린아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

“모르겠다니요?”

“그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레사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군. 베르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아이 같은 자다. 악마 치고는 아주 특이한 성격을 가졌지.”

“……음, 그럼 더 이상하네요. 왜 피오니안 님은 그가 레이라를 당장 해칠 거라 생각하셨나요?”

“말했다시피 그만큼 그가 가진 분노가 크기 때문이다. 아이 같고 순수한 악마라지만, 그는 악마다. 인간이 아니야. 인간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 그가 레사 그자를 죽이지 않고 괴롭힌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을 겪게 해 주려 했기 때문이다. 레이라가 그자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베르의 계획은 틀어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은 거군요.”

“그래.”

통통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나트하가 눈동자를 굴렸다.

복수를 원하는 악마와 그 대상인 레사. 그리고 도구로써 선택된 레이라.

나트하는 계속해서 드는 후회를 밀어 둔 채 베르의 의도를 읽어 보려 애썼으나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왜 레이라를 납치했을까?’

심지어 그는 레이라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트하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미리 말했더라면 피오니안과 에틸의 걱정이 조금 덜어졌을 거라는 것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위치 추적 마법은 마계로 향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지만, 레이라의 신변은 괜찮은 상태에요. 몸은 아주 건강하지만 조금 당황스러워하고 있어요.”

“뭐?”

살며시 웃은 나트하가 제 손을 펼쳤다. 금빛 마나가 허공에 글자를 띄웠다. 그녀를 보호하는 수십 가지의 마법은 단 하나도 망가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납치를 당한 그녀의 온몸에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피오니안을 경악하게 한 것은 그녀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마법이었다. 평소에는 파란색이지만 색이 붉어질수록 불안하거나 위험하다는 신호를 나타내는 마법이었다. 현재는 아주 옅은 보랏빛이었다. 피오니안은 그런 마법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에틸은 그제야 약간 안도한 듯 한숨을 터트렸다.

“일단 멀쩡히, 그것도 잘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레이라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것 같아요. 속단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그녀를 찾으러 가야겠지만요.”

“대단하군.”

“대단하기는요. 지키지는 못했는데.”

순간 세 남자의 입에서 같은 의미의 한숨이 터졌다.

그들은 인정했다. 너무 안일했다는 것을. 그리고 뒤늦게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당장 제국 내에 타이니아스의 반려를 해할 간 큰 인물이 없다는 것에 마음을 푹 놓았다는 것이 이런 사태를 만들어 냈다. 베르를 생각하지 못했고, 상시 붙어 다니는 것에 약한 불만을 품은 그녀를 풀어 준 것도 문제였다.

“후회는 나중에 하지.”

제게 하듯 나직하게 읊은 피오니안의 말에 두 남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당장 필요한 것은 후회나 자책이 아니었다. 세 남자는 상의 끝에 메르세데스 공작저에 쳐들어가기로 합의를 봤다.

당장이라도 마계로 쳐들어가고 싶은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이었으나, 그것은 좋지 못한 생각이었다. 장막을 고의로 찢었을 경우 생길 뒤처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메스세데스 공작령이었다. 이곳 한복판에 장막을 찢어 버린다면 곧 공작령 전체가 마수 떼에 뒤덮일 것이 분명했다.

“장막이 찢기는 순간, 마수들이 넘어온다는 것은 그들의 의사입니까?”

“아니다. 장막은 찢기는 순간 도착지의 위치가 무작위로 생성된다. 그리고 그 근처의 마수들이 강제로 워프 되는 식이다. 처음에는 반경 500m 근처의 모든 마수가 소환될 것이다. 어느 정도의 무력을 갖춘 마수가 몇 마리나 넘어올지는 열어 봐야 알 수 있다. 장막이 열린 뒤, 유지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수들이 소환되는 반경이 넓어지는 식이다.”

“……복잡하군요.”

그런 이유 때문에 더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었다. 마계에 존재하는 악마는 베르 혼자였지만, 마수는 아니었다. 흙을 밟고 사는 마수들의 성정은 포악하지 않은 편이었다.

‘혹시, 마계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장막이 찢긴다면…….’

피오니안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그래도 주의는 줘야 했다.

“소환된 마수들이 내 레어를 가득 채울 만큼 수가 많다면, 아마 약한 개체들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몰려 사니까. 그런데 몇 마리 되지 않거나, 아무리 봐도 땅 위에 사는 것들이 아닌 것 같다면 조금 힘들 것이다. 그들은 약하지 않다.”

약 한 시간가량 토론한 끝에 네 사람은 서로의 포지션을 정할 수 있었다. 솔직히 토론까지 필요한 사항도 아니었다. 그저 피오니안이 세 남자의 질문에 답해 주거나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식이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피오니안이 장막을 찢고 마계로 넘어간다. 장막을 넘어온 마수는 나트하, 에틸, 레사가 처리한다. 피오니안은 마계에 도착한 뒤 바로 장막을 닫고 레이라를 구하러 간다.

이 계획이 무모한 점은 장막을 찢은 뒤 어떤 마수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약한 마수가 나올 수 있는 반면 악마에 버금가는 대단한 마수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피오니안은 베르가 무슨 수를 써도 쓸 것이라는 점에 제 목을 걸 수도 있었지만 일단 입을 닫았다. 장막을 찢어 마계로 넘어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게 레이라에게 도착할 방법이었으니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세 남자는 레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와 함께 피오니안의 레어로 워프 한 참이었다.

피오니안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들어올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동굴. 그곳은 이미 버려졌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컴컴한 공간이었다. 작은 먼지 하나 없는 커다란 동굴 속, 칼을 빼든 두 남자와 마법을 시전 하는 두 남자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열겠다.”

“네.”

대답과 함께 나트하가 주변을 밝게 비추는 등불을 여러 개 소환했다. 작고 환한 빛을 뿜는 구체가 그들의 주위를 환히 비추자 피오니안은 칼처럼 날카롭게 벼린 마나로 허공을 쩍 갈랐다.

작게 베어진 공간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피오니안의 키만큼 벌어졌다. 빠르게 눈인사를 건넨 피오니안이 공간을 비집어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피오니안을 삼킨 뒤로도 벌려진 틈바구니 너머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세 남자는 진득하고 더러운 기분이 뭉글뭉글 솟아나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악의가 새어 나와 주변을 좀먹는 것처럼 더럽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레사는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는 에틸을 슬쩍 힐끔거렸다. 갑자기 제 방에 쳐들어와 이 순간이 되도록 에틸은 말 한마디 없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둘둘 휘감은 것처럼 냉정해진 그의 눈동자는 장막 너머 그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검은 연기가 모여 물이 찰랑이듯 일렁이는 수면을 그려 냈다. 불안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어느새 옅은 회색빛 물방울이 새어 나와 찢긴 장막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다나, 호수인 것 같아요.”

같은 광경을 공유한 세 남자의 마음에 미약한 불안이 심어진 순간이었다. 물에 사는 것들은 더 포악하고 강하다. 그것은 피오니안이 그들에게 남긴 단 하나의 경고였다.

“옵니다.”

낮고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레사와 나트하는 에틸의 말에 반응해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세로로 찢긴 장막을 타고 넘어온 것은 거대한 문어 다리였다.

✲ ✲ ✲

레이라는 베르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는 중이었다. 그것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린 뒤 내린 결론이었다.

악마와 친구가 되어 좋은 점, 그것은 떠올릴수록 많았다. 마수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기는 것이니 제국에 위험이 줄어들 것이 첫 번째. 그의 마음을 달래 줄 친구가 되어 레사를 향한 원망의 감정을 조금 다독여 볼 수 있겠다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이유로 베르는 레이라를 거부하고 있었다.

“나를 권속으로 삼아 주면, 안 돼? 정말 안 돼?”

“…….”

“응? 으응?”

“친구, 그래 친구. 그것까지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권속은 아니야.”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내려친 베르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레이라는 여간 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납치해 온 지 겨우 3일이 됐다.

좀 자두라며 밀어 넣은 방에서 레이라는 대체 무슨 책을 읽은 것인지 저를 권속으로 삼아 달라 졸라 대고 친구로 삼아 달라 졸라 댔다.

베르가 레이라에게 내어 준 방은 그의 방이었다. 딱 한 명의 악마와 마수가 살던 베르의 성에 침대가 있는 방은 그곳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낯선 곳이라 잠이 오지 않던 레이라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악마의 지침서처럼 보이는 책은 레이라에게 새로운 지식을 선물해 주었으며 그녀가 갖던 한 가지 욕심을 채워 줄 수 있어 보였다.

책에는 악마로서의 마음가짐. 악마의 특성. 악마로서 행해야 할 것. 권속을 만드는 법. 권속을 부리는 법 등이 적혀 있었다. 홀려 버린 것처럼 빠른 시간 안에 다 읽어 버린 레이라는 저 안쓰러운 악마의 권속이 되고 싶어졌다.

뭐 이렇게만 본다면 미친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악마의 권속이란 레이라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그랬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악마는 피와 마나를 매개로 여러 개체를 만들어 내고 조종할 수 있었다. 의지를 갖고 피를 흘려내면 마수가 탄생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가히 신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 대단한 일은 생물에게 행할 때 더 대단해졌다. 악마가 자신의 의지로 생물에게 피를 먹일 경우, 대상은 악마의 권속이 된다. 권속은 악마와 함께 긴 생을 살게 되고 악마의 마력을 넘겨받아 악마들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막무가내로 권속으로 삼아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그는 너무나 곤란했다. 베르는 살면서 이렇게 곤란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럼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영원히 네 곁에 남아 친구가 될 텐데?”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친구가 되기 싫다는 제게 이유를 묻기에 베르는 좀 친해지면 죽을 텐데 무슨 친구냐 대답했었다. 그는 과거의 제 입을 찢고 싶었다.

“왜? 권속을 만들어도 베르에게 해가 가는 것은 없잖아!”

“나는 여태 혼자였어. 권속은 절대 만들지 않기로 했고, 그런데 이제 와 무슨 권속이야!”

“왜 권속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레이라는 입을 다물고 멀리 가 버린 베르의 뒤를 졸졸 쫓았다. 어떻게든 이유를 듣거나 제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리라는 것처럼 반짝이는 레이라의 눈빛은, 베르의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도 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꼭 그의 권속이 되고 싶었다.

물론 권속이 된다고 하여도 순혈 악마처럼 권속이나 마수를 만들어 낼 수도, 저를 빚어낸 악마에게 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긴 수명을 가진 오롯한 생명이 될 수 있었다. 악마의 고유 능력에 따라 권속의 능력치가 달라지긴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레이라가 원하는 것은 강한 무력 따위가 아니었다.

영생을 사는 피오니안과 함께 긴 생을 살 수 있다는 강점! 그것은 레이라가 베르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세 번째 이유였다.

“베르!”

사이좋게 지내자며 말까지 놓아 버린 레이라의 행동은 베르에게 있어 퍽 어색했다. 겁먹은 토끼처럼 저를 보며 발발 떨더니, 이제는 몇 백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허탈하게 웃은 베르가 골칫덩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레이라를 응시했다. 저를 향해 배시시 웃는 얼굴이 어여뻤다. 왜 저딴 여자한테 반해 버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 억울한 생각이 들려다 쏙 사라졌다.

“왜 예쁘기는 해서…….”

“뭐라고?”

“아니야.”

레이라라고 섣부르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베르를 분석했다. 그 긴 세월을 사는 동안 그는 단 한 명의 권속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가 원했다면, 바랐다면 그는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인간, 동물 할 것 없이 권속이 되면 긴 생을 살며 그의 뜻을 반할 수 없고 그의 손발이 되고 가족이 되어 함께했을 것이다. 그가 원했더라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고 인간들을 잡아 와 죽이고 유린했을 것이었다.

악마의 지침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악마는 인간을,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싫어해야 한다 했다. 악마에게는 생명을 가진 것들을 잡아 찢어 죽이고 강간하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이 당연하였다. 수많은 이야기와 사담이 적혀 있는 책에는 수천 명을 강간한 악마, 수만 명을 학살한 악마들의 이름이 당당하게 적혀 있곤 했다. 얼마나 잔인하게 생명을 가지고 놀았는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적혀 있는 것을 보며 레이라는 왜 악마가 피오니안의 손에 다 죽어 버렸는지 이해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레이라는 베르가 정말 신기한 악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권속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악마를 혐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족을 갖고 싶어 했고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확실했다. 잠깐 보다 빼앗겨 버렸지만, 몰래 읽어 본 베르의 일기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베르는 홀로 아주 긴 세월 동안 외로워했다. 간절하고 간절하게 빌어 감정만을 가진 마수를 만들어 낼 정도로 그러했다. 흉포함, 힘을 가지지 않은 다정하기만 한 마수. 돌연변이가 만들어 낸 돌연변이는 지금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외로움을 나누어 가졌던 오롯한 존재를 잃은 그의 슬픔이, 레이라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가 그토록 레사를 증오했던 이유를.

레이라는 베르가 조금 마음에 들었고, 아주 안쓰러웠다. 될 수 있다면 정말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베르, 그럼 조르지 않을 테니까 나와 친구가 되어 줘. 응?”

“이미 친구 비슷한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잖아?”

“음, 그렇긴 한데. 베르가 자꾸 나를 거부하고 있잖아.”

“하아.”

미간을 짚은 제 손을 잡아끄는 작은 손이 귀여웠다.

베르는 왜 피오니안이 사랑에 빠졌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이해되었다.

작고 앙증맞은 것을 좋아하는 그가 이 귀여운 여자를 보고 반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착하기까지 하다. 저를 버리고 떠나 버린 멍청한 놈을 용서하고, 저를 위해 희생한다는 이유로 세 남자를 받아들였다.

할 것이 대화밖에 없는 이 곳에서 베르는 레이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베르는 레이라에게 더 빠져들고 있음을 직감했다.

다정하고 착하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는, 제게도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친구라는 점이 짜증 났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 권속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뭔데.”

“솔직하게 말하면 권속으로 삼아 줄 거야?”

“들어 보고.”

턱을 까딱인 베르가 검고 붉은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검은빛으로 물든 잔디 위에 함께 주저앉은 레이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사실 피오니안 때문에 고민하던 게 있었거든.”

“…….”

“나는 인간이니까 피오니안보다는 오래 살지 못하잖아. 내가 떠나 버리면 그는 긴 시간을 힘들어할 테고.”

“그래서였군.”

단번에 그녀의 말을 이해한 베르가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덜렁 누워 버렸다. 잔잔히 부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검붉은 나뭇잎이 왠지 처량한 것도 같았다.

베르는 레이라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짜증이 났다. 그것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아쉬워 미쳐 버릴 정도였다.

또 피오니안이 부러웠다. 레사를 찾아 가 괴롭히기 전에 그녀를 먼저 찾아 가 볼 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베르?”

무언가 시무룩해 진 그의 분위기에 레이라의 고개가 기울었다. 보기보다 보드라운 잔디 위에 엎드려 누운 그녀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늘거리는 붉은 속눈썹이 백합 수술처럼 고왔다. 진득한 핏빛 같았던 눈동자는 지금은 세련된 보석처럼 보였다. 불꽃 같았던 머리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동그란 눈은 강아지처럼 귀여웠고 깎아 만든 것처럼 날카로운 콧날과 날씬한 입술은 아주 유혹적이었다. 저 얼굴로 웃으면 악마의 유혹이 따로 없지.

늘 날카로운 그의 분위기에 겁먹었던 때도 있었지만, 베르의 분위기는 원래 그러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그다워 보이기도 했다.

가시를 삼킨 어린 아이 같은 악마.

순수하고 착한 악마는 몹시나 아름다웠다.

“너는 너무 얼굴을 밝히는 것 같아. 그런 말 자주 듣지?”

“응. 어쩔 수 없어.”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

“응. 정말정말 예뻐.”

살짝 붉어진 뺨이 복숭아 같았다. 베르는 그것을 먹어 본 적은 없지만, 피오니안이 자주 먹는 것을 보았다. 상큼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었다.

“그럼, 나는 어때?”

“뭐가?”

“네 번째 남자로. 친구 말고 연인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

조금 벌어진 레이라의 입술이 서서히 더 크게 벌어졌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잔뜩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베르는 픽 웃었다.

“나는 악마가 싫어. 평생토록 나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이 정말 싫었어. 집에서는 늘 피 냄새가 났고, 비명이 들렸지. 아버지가 죽인 생명의 시체를 옮기는 권속들, 새로운 생명을 퍼다 나르는 권속들. 자랑하듯 제 살육을 떠벌리는 멍청한 악마들.”

“…….”

“인간을 속여 전쟁을 일으키고, 비참한 연애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어. 신뢰를 꺾고, 선한 마음을 타락시키고, 사랑을 증오로 바꾸는 것이 악마들이 했던 짓이야. 인간들은 인성이 더럽고 악한 것을 악마라 칭한다지? 나는 그것들의 배를 빌어 태어났고, 그것들로 자랐지만 오롯한 악마가 되지 못한 반푼이였어.”

저를 탐색하듯 훑던 시선이 다시 허공을 향했다.

레이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시작은 꽃이었어. 내겐 그 꽃이 아주 아름다웠거든. 온통 검게 물든 세상에 피처럼 붉은 생명이 있다는 게 신기했어. 파릇파릇한 새싹의 색감. 푸르른 하늘의 청명함. 나는 그런 것들을 동경하는 이상한 악마였어. 덕분에 나는 버려졌어. 성인이 되자마자 이 성에 버려졌지.”

“……베르.”

“사실 내가 나를 버린 거야.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기에 나는 부적절했고, 악마들의 곁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들은 선을 넘었고 피오니안에게 처형당했어. 나는 그때 조금 웃었던 것 같아. 바라던 것이 이루어져 기쁜 느낌이었어. 그리고 피오니안이 나를 죽이러 찾아왔을 때 나는 그가 궁금해졌지. 그래서 맹세했어. 절대 권속을 만들지 않겠다고.”

“…….”

“외로웠어. 괜히 그랬나 싶을 정도로. 그가 궁금해 더 살고 싶었던 것이 맞지만, 흥미는 금세 떨어졌거든. 그래서 그 아이를 만들었을 때 아주 행복했어.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퍽 행복했어.”

눈물이 맺힌 검붉은 눈동자는 그가 말한 꽃처럼 아름다웠다.

흑색 일색의 세상에 오롯하게 색을 가진 외로운 악마.

레이라는 그가 말한 아름다움과 외로움을 이해했다.

레이라는 발딱 일어나 앉아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베르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제 눈을 가렸다. 눈물이 맺히다 쏙 들어가 버렸다.

“울어도 돼. 원래 슬플 땐 울어야 해. 그런데 고백 하자마자 대답도 듣지 않고 서럽게 울어 버리면 내가 조금 당황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런가.”

“당연하지.”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다. 레이라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도, 마침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도 좋았다.

베르는 처음 겪는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덕분에 저를 찾아온 사신을 알아채지 못했다.

“혼자라서 외로워. 그 아이가 그리워. 다시 만들 수 있겠지만, 같은 아이를 만나지는 못하겠지. 상실이라는 것이 힘겨워.”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닦아 주던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서히 뜨인 검붉은 눈동자가 저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검붉은 눈빛이 반짝거렸다.

흔들리는 레이라의 눈동자가 시선을 더듬더듬 옮겼다. 색스럽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홀로 아프고 싶지 않아.”

애처로움에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은 간절한 목소리.

레이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슬픔을 가득 머금은 처량한 눈동자.

뭉그러진 정신에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다급한 표정과 붉은 입술을 느리게 핥는, 새빨간 혀. 그리고 다시.

“그가 부러워. 내게도 같은 마음을 나누어 줘. 응?”

베르는 레이라의 턱을 쥐어 저를 향하게 했다. 발그레 물든 뺨이 귀여웠다. 조그만 머리통을 끌어당기자 미약하게 버티던 힘이 슬쩍 풀렸다.

가볍게 맞닿은 두 사람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갔다. 레이라의 입술을 핥은 악마의 혀는 뜨거웠다.

베르는 느긋하게 혀를 문질렀다. 서서히 열리는 레이라의 입술을 젖혀 치열을 훑었다. 잇몸에 닿은 혀가 간지러운지 가녀리게 떨리는 어깨는 커다란 손이 쓰다듬었다.

레이라는 진정하라는 듯 매만져 오는 다정한 손길에 눈을 감았다. 애처로운 유혹에 넘어간 순한 토끼는 제 입술을 고스란히 내어 주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훤칠한 미남자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지?”

뜨악한 레이라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듯 들썩였다. 쩍 굳어 버린 뒷모습이 처량하게도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피오니안은 시선을 돌려 베르를 응시했다.

베르는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슬금슬금 차오르는 긴장감에 온몸을 뻣뻣하게 굳힌 베르가 몰래 눈동자를 굴렸다. 갑작스레 닥친 위기에 상황 파악이 느렸다.

‘반질반질한 구두코가 이렇게 무서워 보일 수 있다니!’

베르가 냉큼 일어나 바로 앉았다.

공손해진 자세에 레이라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 대단한 악마의 기세가 푹 꺾인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사고를 친 후 주인 앞의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레이라는 제 잘못도 잊어버린 채 그를 구경하기 바빴다. 두 남자를 힐긋거리던 레이라가 어쩐지 반질반질, 촉촉해진 제 입술을 매만졌다.

“헉.”

이제야 다시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하……. 정말 너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피오니안의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헛갈린 두 남녀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너 아니야?

너한테 하는 말 같은데?

“둘 다. 아주 기가 막히는군.”

혀까지 쯧쯧 찬 피오니안이 삐딱한 자세로 나무에 기대앉았다. 쩔쩔매며 그의 눈치를 보는 두 마리의 작은 짐승은 붉은 눈동자만 또르르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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