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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화살을 얹었으니 시위를 당기자! (23/26)

22. 화살을 얹었으니 시위를 당기자!

장막을 넘어온 마수는 크라켄 딱 한 마리였다.

미끄럽고 축축한 수십 개의 다리가 사방에서 튀어나와 세 남자를 괴롭게 했다.

성인 남성의 몸뚱이만 한 두께의 검보라색 다리와 가느다란 촉수들이 다리를 감아 넘어트리려 하고 몸을 휘감아 끌어당기려 했다.

크라켄은 그 거대한 다리를 내려치고 또 올려치는 속도가 에틸만큼이나 빨랐다. 튼튼한 드래곤 레어를 때려 부술 듯 난동을 피우는 마수는 거대한 동굴에 가득 들어찰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가지기도 했다. 아직도 다 넘어오지 못한 머리가 장막을 더 커다랗게 찢으며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레사와 에틸은 다리를 마크해 주세요. 저는 약점을 찾아볼게요.”

“알았다.”

금빛 마나가 꼬물대며 나트하의 손 위를 날아다녔다.

레사와 에틸은 고개를 주억이며 나트하를 엄호했다. 그 어느 때보다 검고 거칠어진 에틸의 마나가 퉁퉁한 크라켄의 다리를 베고 또 베어 냈다. 푸른 빛 마나도 마찬가지였다.

“꾸에엑!”

잘린 다리가 아프기는 한지 어마어마한 괴성을 내지른 크라켄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뻗어 아무 곳이나 내리치는 다리를 피해 도약한 세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리 사이로 보이는 크라켄의 입은 무시무시했다. 다닥다닥 징그럽게 붙어 난 이빨과 구역질이 날 만큼 역한 냄새를 풍기는 침, 가래처럼 끈적한 진액까지.

세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눈앞을 일렁대는 다리를 뎅겅뎅겅 잘라 냈다. 바닥에 툭툭 떨어진 다리와 촉수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악의를 가진 것이 으레 그러하듯 잘려서도 무언가를 쥐려 꾸물거렸고 세 남자를 향해 기어 오기도 했다.

“잘린 것도 움직입니다.”

에틸은 바닥에 쌓인 다리였던 것들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잘게 다져 버릴 기세로 휘두르는 검격에 입을 벌리며 감탄하던 레사가 나트하를 향해 덤벼드는 다리를 다시 잘라 냈다.

이제야 장막에 끼었던 머리까지 전부 빠져나왔는지 커다란 몸을 몇 번 흔든 크라켄이 해 보자는 듯 자세를 잡았다.

높은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한 크기의 몸체, 수많은 촉수와 너덜너덜해진 다리.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서도 크라켄이 풍기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세 남자는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거대한 문어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작은 인간이었지만,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나트하는 내심 만만해 보이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방진 생각을 읽은 것처럼 꾸물거리던 크라켄의 다리가 크게 곡선을 그리며 허공 위로 치솟았다.

에틸이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힌 다리가 튼튼한 레어를 때려 부쉈다.

쿵쿵! 콰앙! 쾅쾅쾅!

사방에서 울리는 파열음과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 돌벽이 조금씩 제 몸을 갉아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세 남자에게는 그것조차 공격이 따로 없었다.

“눈부터 찔러 봐야겠어요. 다리는 최대한 작은 토막으로 잘게 잘라 주세요.”

이제는 대답도 없는 두 남자가 나트하의 지시대로 다리를 잘게 여러 번 내리그었다.

에틸의 검에서 폭주하듯 내뿜어진 마나가 크라켄의 다리를 뿌리부터 가르기 시작했다. 이미 반 이상 잘린 다리가 이리저리 나뒹굴었으나 크라켄은 꼿꼿이 서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잔해들을 걷어차고 또 걷어차던 레사가 짜증스레 허공을 갈랐다. 비처럼 내리는 검은 덩어리들은 끝이 없었다. 온몸이 끈적한 점액질에 흠뻑 젖었고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았다. 불쾌한 감각을 밀어내려 검을 긋고 또 그었다.

나트하의 주변을 맴돌며 방어하는 레사와 그들을 지키듯 한발 앞서 칼을 내지르는 에틸.

그들의 수백 배는 커다란 크라켄은 짜증스레 괴성을 지르더니 정확히 나트하를 응시했다. 크라켄의 눈이 드러났다.

나트하가 드디어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안 되겠어요. 저는 알아서 공격할 테니 두 분도 양쪽으로 찢어지세요.”

나트하는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날렵하게 저를 공격하는 다리를 피한 나트하가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에 동동 떠 있으면서도 공격을 피하고 마법을 펼치는 것이 퍽 익숙해 보였다.

에틸과 레사는 이제야 제대로 된 공격을 시작한 것처럼 양방향으로 나뉘어 크라켄에게 다가갔다.

몸을 짓뭉개려는 다리를 피하고 얇은 촉수를 베어 낸다. 여러 번 같은 것을 잘라야 하는 어려움은 마나로 충족시켰다. 저 멀리서 다리만 휘둘러 대는 커다란 문어를 어떻게든 찢어 버리겠다는 강렬한 살기가 폴폴 풍겨 왔다.

나트하가 크라켄의 눈알을 향해 얼음 창을 집어 던졌다.

크와앙!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크라켄의 비명 소리에 나트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열심히 막는 것을 보니 역시 눈이 약점 같기도 했다. 아니, 약점일 테다. 저 커다란 몸에 눈알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문어라고 생각했으나 눈은 커다란 머리 정중앙에 달려 있었다. 여간 짜증스러운 마수가 아닐 수 없었다.

나트하는 얼음 창을 던지고 또 던지고 불덩어리를 날리고 또 날렸다.

나트하가 순식간에 크라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나트하를 주시하며 양쪽에서 다리를 베어 내는 두 남자의 덕분이었다. 베고 쳐 내기를 반복해도 새로 나타나는 촉수와 다리가 진절머리가 날 법도 했으나 세 남자의 시선은 흔들림 한번 없었다.

뾰족하게 뭉친 에틸의 마나가 나트하에게 향하는 크라켄의 다리를 죽처럼 갈아 버렸고, 날카로운 레사의 검이 촉수를 단번에 베고 긁어냈다.

“텔레포트!”

나트하는 제 마법을 날렵하게 피하고 가로막는 크라켄의 근거리에 서서 무기를 꺼내 힘껏 내리쳤다. 어중간한 길이의 검이 크라켄의 눈알에 콱 박혔다.

크허어어엉!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라켄의 괴성이 쩌렁쩌렁했다.

비웃음을 머금은 나트하가 표정을 싹 지워 냈다.

단단한 점액질을 가르는 불쾌감. 나트하는 손목을 비틀었다. 싸늘하게 바뀐 그의 분위기처럼 허공을 맴돌던 금빛 마나가 손끝에 맺혔다.

파직, 파직-

“라이트닝 스톰!”

어둑한 동굴을 가득 메울 강렬한 섬광이 비췄다.

짜자자자작! 가로로 내리 찍히는 벼락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온 것 치고는 위험천만한 마법이었다. 고약한 타는 냄새와 함께 연이어 내려친 벼락이 크라켄을 향해 퍼부어졌다. 눈이 위치한 머리통 한가운데를 반대쪽까지 뚫어 버린 마법이 레어의 벽을 때렸다.

콰아앙! 쿵!

단번에 절명해 버린 크라켄도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악의를 머금고 꿈틀거리던 다리와 촉수는 아직도 살아 숨 쉬듯 움직였으나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 ✲ ✲

레이라는 기가 죽은 표정으로 피오니안을 흘깃거렸다. 불편한 심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의 구겨진 미간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레이라를 흘깃대던 베르가 눈을 꾹 감았다.

“너는 대체!”

다시 누구에게 건넨 말인가 눈치를 보던 베르와 레이라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베르. 대체 왜 레이라를 납치한 거지?”

질문의 대상이 제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레이라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반대로 죽상을 한 베르가 눈을 굴렸다. 질문을 회피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원통했다.

“……너무 예쁘길래. 정신 차리고 보니 냅다 집어 와 버렸지 뭐야.”

베르는 순순히 불기로 했다.

“장난치지 마라.”

“정말이야. 죽이려 찾아갔다가 첫눈에 반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니까 조금 전에도…….”

흉흉한 살기가 풍기자 베르가 입을 꾹 닫았다.

피오니안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힐난하는 눈초리를 받은 레이라는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으나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피오니안은 혼란한 마음을 가눌 곳이 없었다. 당황스러워 화가 푹 꺼져 버린 것은 레이라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베르를 본 순간부터였다.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르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레이라. 그것은 이곳이 마계만 아니었다면 아주 아름다울 광경이었다. 사실 마계라서, 베르가 사는 마계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뒤의 상황도 충분히, 아니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네 마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

말문이 막힌 베르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레이라는 화살이 제게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끅, 귀엽게 들린 딸꾹질 소리에 입가가 풀어져 버릴 뻔한 피오니안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레이라.”

“히끅! 으, 으응.”

“미안하다. 당연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속단해 이 사달이 났군. 험한 꼴을 겪지는 않았나?”

동그란 눈을 굴려 피오니안의 눈치를 살핀 레이라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잔뜩 솟아 있던 어깨도 폭 가라앉았다. 분명 저 말은 아까의 행위에 제 의지가 포함되어 있냐는 질문일 터였다.

“응. 베르가 잘 대해 줬어. 일부러 내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야. 어, 음, 화는 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바보가 마음에 드는 것인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싫지는 않아. 부탁할 것도 있고.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어.”

피오니안은 베르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레이라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를 죽이겠다 마음먹어 본 적은 처음이었으나,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키스할 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은 아니꼬웠지만, 베르의 외로움을 달래 줄 이가 레이라라는 것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피오니안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일단, 가서 이야기하지. 다들 걱정하고 있다.”

“아, 응.”

“베르, 워프 해라. 레사 그자에게 네 그림자를 숨겨 두었겠지?”

“……어.”

레사에게 심어 둔 제 마력은 또 언제 들켰을까. 베르는 허허 웃으며 레사의 곁으로 워프를 시전했다. 장막을 찢지 않고, 마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진 악마는 세상 가련하고 측은한 표정을 한 채 분노한 세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 ✲ ✲

레사는 침착하게 차를 내왔다. 물을 끓인 뒤 찻잔을 데우고, 찻잎을 우리고, 차를 따랐다. 나트하, 에틸, 피오니안은 일련의 과정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레이라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만져 본 뒤 안도하고 자리에 앉았다. 베르는 레사를 향해 떫은 감 씹은 표정을 보내며 구석 자리에 박혀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따뜻한 찻잔이 모두의 앞에 한 잔씩 놓였다. 피오니안의 취향은 언제 알아 두었는지 폭신폭신한 쉬폰 케이크와 크림까지 준비한 레사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 모였으니 이야기를 해 보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래?”

레이라는 불안한 듯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자 바로 커다란 손 두 개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나 레이라에게 뻗어진 손을 전부 처리한 뒤 제 다리 위로 끌어당긴 남자가 있었다. 빙긋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습니다. 레이라, 미안합니다.”

“아, 그…….”

“미안해요. 레이라.”

“미안하다.”

저도 사과를 건네도 되는 건지 눈치를 살피던 레사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미안하다.”

“괜찮아. 뭐 때문에 사과하는지 모르는 건 아닌데, 일단 위험한 일은 없었고 그럴 만한 상황은 내가 만들었잖아. 다들 따라오겠다는 걸 말린 건 나고, 레사도 마찬가지잖아.”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흐린 눈을 한 에틸이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따스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사과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맞다.”

“알았어. 그럼 사과 받을게. 다음엔……, 잘 부탁해.”

“네. 그러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웃은 에틸이 레이라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코웃음 치던 베르는 피오니안의 살기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피오니안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베르를 왜 데려왔는지 궁금해하는 눈빛들이었으나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싶어 참는 것이 보였다.

피오니안은 그것이 신뢰라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내가 저것을 해하지 않고 데려온 것은, 레이라가 그러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 저것?”

“……레이라가요?”

기막혀하는 베르의 목소리를 신경 쓰는 것은 레이라 뿐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미안하다는 듯 베르를 향해 깜박였다.

나트하의 금빛 눈동자가 레이라를 향했다. 이유를 묻는 눈길에 움찔 놀란 레이라가 눈동자를 굴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전부 모인 김에 말을 해야지 마음먹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어…… 그러니까.”

“저것은 레이라에게 첫눈에 반했다는군.”

“왜 자꾸 나를 이거, 저거로 칭하는 거야? 내 이름은 카르도베르 레퀴엠…….”

베르가 빽 소리치며 성을 냈다. 피오니안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악마이자, 레이라를 납치한 범인이기도 하지.”

“……그건, 그렇지.”

다시 기가 팍 죽은 베르가 쭈그려 앉았다.

레이라는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당당하게 굴던 악마는 제게 고백한 이후 그저 죄인처럼 굴고 있었다. 그것이 저를 납치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내가 베르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다들 놀랐고 걱정했을 거라는 거 알아. 그런데, 베르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내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거든.”

“기회라니요?”

“음……. 나 많이 생각해 봤어. 아, 항상 생각했다는 게 맞겠지. 내가 세 사람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할 반려로써,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뭐 그런 것들을. 그런데 피오니안부터 콱 막힌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어. 나는 그저 그의 곁에 오래 있고 싶을 뿐인데, 그건 그저 욕심일 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피오니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찬란한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화려한 속눈썹 사이로 숨어든 광경은 퍽 아름다웠다.

팔랑팔랑, 나비 날개처럼 느긋하게 움직인 피오니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 베르를 받아들일까 해. 그리고 그의 권속으로 삼아 달라 부탁하던 참이었어.”

“…….”

주먹을 콱 쥔 채 눈을 감아 버린 피오니안은 제게 향하는 시선들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지는 않아도 됐다. 영원을 사는 제게 사랑을 떠나보내는 것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그러했다. 전부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행여 영원을 살게 해 준다는 영약을 구한다 해도 그녀에게 먹일 생각일랑 조금도 없었다.

“레이라. 왜 내 의견은 묻지 않은 거지?”

“…….”

“나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네게 영원을 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그런 방법이 없었으니,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하지 않았지만. 영원을 산다는 것은 네 생각보다 힘들고 고되며 악몽 같은 일이다.”

“알고 있어. 그런데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고, 그보단 세 사람이 낫지 않을까? 사랑하고 아끼고 서로 보듬어 줄 수 있으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만한 축복이 될 수 있을 거야. 물론 힘들고 슬픈 일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하.”

“피오니안도, 베르도 오랜 시간 힘들고 외로웠던 거잖아. 이젠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건데. 그럴 기회가 있다면 잡아야지. 나는 무조건 피오니안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게 가능하다면, 나도 행복할 것 같아서 그래.”

“……레이라.”

두 사람의 애절한 눈빛을 구경하던 나트하가 정적을 깨부쉈다. 권속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화의 흐름을 보아하니 무언지 알 것도 같았다.

나트하는 빠르게 결정했다.

“저기, 베르 님? 권속은 한 명밖에 만들지 못하시나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하게 앉아 있던 베르가 괴고 있던 턱을 삐끗했다. 딱딱한 테이블에 턱을 부딪칠 뻔한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트하를 바라보았다.

“……권속의 수에 제한은 따로 없어.”

“그럼 저도 권속으로 삼아 주실 수 있나요?”

배시시 웃은 나트하가 처세술이라는 것을 실현했다. 레사는 그러는 제 친우를 향해 입을 떡 벌렸다. 저런 것도 가능한 놈이었다니.

“저도 부탁드립니다.”

에틸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보릿자루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레사는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끼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닌지 헛갈렸다.

그는 아직 자격이 부족했다. 그리고 베르는 레사를 증오했다. 레사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우울한 기분을 약삭빠르게 감지한 검붉은 눈동자가 레사를 향했다.

베르가 오른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비릿하게 웃었을 때였다.

“베르.”

꽃이 피어나는 환상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베르는 바람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휙 틀었다. 조건 반사처럼 재빠르게 레이라를 향한 그의 시선이 흔들거렸다.

“레사를 용서해 달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어? 변명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었고, 사과를 건네 보지도 못했잖아. 물론 베르의 가족을 해친 건 맞지만 그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생각해 볼게.”

베르는 새로 떠오른 제 복수 계획을 지워 버렸다. 몹시 손해 보는 기분이었고 그를 용서 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만약 제가 권속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레사가 된다면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순한 양처럼 온순하게 굴고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악마였다.

“피오니안, 싫어?”

레이라는 제 의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피오니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틸도, 나트하도, 베르도 심지어 레사마저 받아들인 일을 망설이는 것은 오직 피오니안뿐이었다.

“……싫을 리가. 나는 그저 네 걱정이 될 뿐이다. 뒷일은 어찌할 셈이지? 말이 권속이지 악마가 되는 것이다. 괜찮은가? 견딜 수 있나? 너는 권속이 되면 늙지 않을 거다. 네 아버지에겐 무어라 할 것이며, 후사는 어떻게 할 거지? 그래. 나트하와 에틸 두 사람은 후계를 잇지 않아도 될 거로 생각할 테지. 그러나 너는 어떠한가 레사 메르세데스. 네 음경이 레이라에게 있지 않고 네게 있었다면, 너는 이 선택지를 골랐을 것 같은가?”

“그때의 저라면, 이런 선택지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조하듯 답한 레사의 입꼬리가 반듯하게 올라갔다.

피오니안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레사의 웃음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 반대인 것도 같았다.

“피오니안, 나 바보 아니야.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이긴 했지만, 꽤 깊게 알아봤어. 베르의 집엔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굴러다니더라고. 빵과 고기 대신 마기를 흡수해야 하고, 베르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난 그대로일 거야. 물론 무언가 능력이 생길 테고, 늙지도 않겠지만.”

악마와 인간의 차이란 별것 없었다. 물론 그것은 레이라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저 행간에 떠도는 가십처럼 악마가 피나 인간의 고기를 섭취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악마가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밥 대신 마기를 섭취한다. 강하며 오랜 시간을 산다. 어떤 의미로 볼 때면 인간보다 훨씬 진화된 개체이기까지 하지 않을까. 악마는 필요치 않지만, 수면도 가능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임신과 출산 또한 가능했다. 레이라는 악마가 되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레이라. 바로 그것이 문제다. 마기를 흡수하기 위해선 마계에 가야 한다. 물론 늘 그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가야 하지. 능력은 숨기면 될 테지만, 늙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할 셈인가.”

“고생해서 내게 공작위를 선물해 주려던 게 걸리지만, 어차피 아버지께서 방계에서 찾아 둔 후계가 있을 테니 괜찮을 거야. 레사는 조금 걱정이지만, 방법은 많으니까. 그리고 그런 걱정보다는 먼 미래를 걱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그런 걱정들은 어떻게든 해결 할 수 있을 거야.”

“하…….”

피오니안은 이미 답을 정한 레이라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따스한 손길이 매만져왔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의 얼굴을 쓰다듬고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손끝을 주무르고 다소곳이 손을 맞잡았다.

“나는 미래를 그린 거야. 내 미래에 모두가 있듯, 모두의 미래에도 내가 있었으면 했어. 단지 그것뿐이야.”

“제발…….”

“혼자 남겨질 피오니안의 모습을 그려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터져 버릴 것 같아.”

피오니안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차가워진 손끝을 열심히 문지르던 레이라가 말을 이었다. 다정하고 따스한 감정이 몽글몽글 차오르는 목소리였다.

“피오니안이 겪었던 과거의 일이 자꾸 생각이 나. 나는 피오니안이 다시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어. 나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렇게나 행복한데. 내가, 내가 피오니안을 힘들게 할 거라는 사실이 싫었어. 이미 예정된 미래라는 게 싫었어.”

“레이라…….”

피오니안은 이제야 레이라의 생각을 이해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피오니안은 레이라를 잃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다. 먼 미래에, 아니 그에게는 아주 짧은 미래에 그녀를 보내 줘야 한다는 것을 그녀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알게 된 그의 과거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다.

먼 미래를 막연한 상상만으로 그리며 가졌던 그녀의 미약한 죄책감이,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그가 그녀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 될 과거를 들켜 버림으로써 생긴 일이다.

“있다가 없다는 건, 더 외로울 거야. 아무도 곁에 없어서 외로웠을 때보다도 더 외로울 거야. 나는 그게 너무너무 싫어. 피오니안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게 사랑을 속삭여 줄 때마다, 다정하게 대해 줄 때마다 나는 피오니안에게 미안해. 죄책감이 들어. 그저 이 순간만이라도 더,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해 줘야지 마음먹었다가도,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보드라운 울음이 피오니안의 손등으로 똑똑 떨어졌다. 서러움이 가득한 액체는 피부가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언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고 있던 걸까.

피오니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 안아 주지 않고 뭐 하냐는 시선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피오니안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레이라의 등을 끌어안았다. 다정하게 저를 다독이는 손길에 더 눈물을 쏟기 시작한 레이라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사랑하니까. 그런가 봐.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는 그런 생각밖엔 못 하겠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함께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을 듣는 것도 좋지만, 미래를 그리고 함께 그린 미래를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늘 그런 것들을 꿈꿔.”

레이라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노래하듯 이어지는 달콤한 말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틸과 함께 우리의 가족을 만들고 싶어. 나트하의 행복이, 피오니안의 영원이 나였으면 좋겠어. 더 나아간다면, 베르의 외로움을 달래 줄 존재가 되고 싶어. 레사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싶어. 나는 그런 욕심쟁이야. 다들 이런 내가 싫어? 부담이, 될까?”

울음처럼 한숨을 내뱉은 피오니안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감히 부담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순간 피오니안은 이성을 놓고 미쳐 버린다 해도 레이라를 끌어안은 손을 놓기 싫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데, 이처럼 아름다운데.

“그럴리가 없다. 레이라. 하……. 나는 네가 긴 시간을 살던 어느 날, 갑작스레 삶에 회의를 느낄까 두렵다. 내게 싫증이 나,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원망하고 이제는 삶을 이어 가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 두렵다. 나는 그런 미래가 두려운 것이다.”

“행여 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피오니안의 탓이 아닌 걸.”

좌우로 흔들거리는 레이라의 고갯짓이 야무졌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문제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갑자기 피오니안이 내가 그만 보고 싶다고 할 수도 있잖아. 내가 싫고 다른 여자가 좋다고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것을 상상하는지 뾰로통해진 입술이 귀여웠다. 피오니안은 매 순간 사랑스러운 이 여자가 지겨워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했다. 저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사랑스러운 생각만 하고 사는 그녀가 싫어지고 지겨워질 리가 없을 터였다.

피오니안은 저도 모르게 레이라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심각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귀여운 소리가 나자 남은 남자들의 표정이 묘하게 뒤바뀌었다.

“저희의 마음을 대변해 직접 입 맞춰 주신 점 감사합니다.”

장난스레 올라간 에틸의 입꼬리가 납치 사건의 종말을 알려 왔다.

피오니안은 확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한 채였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레이라는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이다.

✲ ✲ ✲

레사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뒤, 레이라와 세 남자는 녹스 가로 되돌아왔다. 더불어 짐짝처럼 끌려온 베르도 함께였다. 녹스 공작은 제가 뽑아 놓았던 리스트에서도 가장 합당한 상대가 레이라와 함께 돌아왔다는 것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비록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으나 겉으로만 성대하게 환영 받은 베르는 떨떠름히 녹스 가에 정착할 수 있었다.

“정말 나를 받아 줄 생각이야?”

“음?”

같은 질문을 다섯 번째 받은 레이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 다음 질문은,

“내 권속이 될 거고?”

“……여러 번 대답했잖아. 난 그렇게 결정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무슨 그런 결정을 뚝딱뚝딱 정해 버리는 거야? 난 피오니안이 너를 말릴 줄 알았어.”

“그 말도 다섯 번째라는 거 알지?”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너 내 권속이 되면 내 명령을 절대 어길 수 없어. 그냥 악마가 됐다! 오래 살겠다! 힘이 세졌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응 이해했어. 그리고 베르가 그렇게 여러 번 말해 주니까 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내가 악마였다면 그냥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자진해서 내 권속이 되겠다는데 음흉한 마음을 품었으면 품었지 경고를 해 주진 않을 거 아냐.”

빙긋 웃은 레이라는 생각해 볼수록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이에 베르는 답답한 오랑우탄처럼 제 가슴을 두드렸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듣던 피오니안은 초콜릿이 묻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제대로 된 계약서를 작성해야겠군. 듣고 보니 저놈이 권속이라는 것을 이용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이니.”

피오니안의 말에 열이 받았는지 이마에 혈관이 삐죽 솟은 베르가 빽 소리쳤다.

“나를 도구로 이용할 셈이면서, 왜 취급은 이따위인 거야?”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얼이 빠져 턱도 빠져 버린 사람처럼, 아니 악마처럼 입을 떡 벌린 베르가 버럭 성을 내며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것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아는 피오니안은 피식 웃으며 레이라를 제게 당겨와 끌어안았다.

“왜 자꾸 베르를 홀대하는 거야?”

“아직 얄밉다.”

“난 안쓰러운데.”

“그렇게 마음이 여리니 자꾸 이상한 놈이 붙는 것 아닌가. 여기서 더 늘릴 생각인가?”

“그럴 리가. 난 지금도 많다고 생각하는 걸. 이제 더는 없을 거야. 장담해!”

“거, 참 믿음직한 말이군.”

긴 손가락이 타박하듯 레이라의 이마를 튕겼다. 인상을 찡그리려던 그녀는 귓가로 쏟아지는 애정 가득한 목소리에 흐물흐물 녹은 표정을 지었다.

입이 툭 튀어나온 채 도망쳐 나간 베르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피오니안의 품 안이 너무 편안했다. 그의 심장 소리는 평범한 사람보다 고요했다. 그러나 가슴께에 귀를 붙이면 느껴지는 고동은 훨씬 커다랬다. 점점 더 다급히 뛰는 심장 소리를 듣자 어쩐지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레이라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피오니안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피오니안에게 이미 들켜 버렸지만.

“아가씨.”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레이라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피오니안의 품 안을 떠났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에 미간을 구긴 피오니안이 문가를 노려보았다.

“어, 들어와.”

“카르도베르 님의 침실도 완벽히 준비가 끝났어요. 그, 피오니안 님의 옆방을 원하셔서. 그렇게 했는데 괜찮은가 싶어서요.”

피식 웃은 레이라의 시선이 자연스레 피오니안을 향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그는 의외로 거절을 내뱉지 않았다. 가까스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은 행동이었지만 레이라는 그저 베르를 받아들여 그런 것으로 착각했다.

“괜찮대. 베르는 어디 있어?”

피오니안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러나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보다 팍 사그라든 눈빛이 한숨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분명 하녀는 그것을 보았지만 못 본 척 눈을 돌렸다.

“베르 님은 침실로 향하셨어요.”

“알았어. 고마워.”

또각또각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다시 피오니안의 다리 위에 자리를 잡은 레이라가 그를 끌어안았다.

“피오니안 좋아.”

“갑자기 왜 예쁜 짓을 하지?”

“좋아서!”

꺄르르 웃는 레이라의 웃음소리가 마치 요정처럼 귀여웠다.

피오니안은 한숨을 쉬는 척하며 레이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드레스는 주인 몰래 끈을 풀어 내리는 침입자에게 얌전히 저를 내주었다.

✲ ✲ ✲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제안을 빌미 삼아 그녀를 독차지했다. 어느덧 한집에 사는 것이 익숙해진 에틸과 나트하는 물론이며 아직 그들에겐 떨떠름한 베르까지도 그것을 마땅치 못하게 여길 것은 자명했다.

사실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놓아주지 않는다기보다는 레이라가 유독 피오니안만 쫓아다닌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아는 세 남자가 그녀에게 그것을 따져 물을 수는 없으니 속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외로운 밤을 지새우고 있는 두 남자는 피오니안이 점점 얄미워졌다. 레이라가 보고 싶어 찾아 갈 때마다 피오니안에게 튕겨져 나오는 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세 남자는 당당하게 레이라를 차지한 채 놔주지 않는 한 남자를 향한 분노를 어찌 풀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교적 침착한 나트하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심지어 곧 그날입니다.”

“그날이 뭔데?”

“아, 그 저주 때문에…….”

붉어진 나트하의 얼굴을 어색하게 응시하던 베르가 혀를 쯧 차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삐죽 솟았던 에틸의 눈썹이 베르의 표정을 보며 제 자리를 찾았다.

“발정하는 날을 말하는 거구나?”

“표현을 좀, 둥글게 해 주십시오.”

막말로는 일인자일 것이 분명한 에틸이 말투로 누군가를 타박하는 것이 우스워 나트하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번졌다.

“아, 미안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아서. 너희가 좀 그때그때 말해 주라.”

“알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동시에 고개를 주억인 나트하와 에틸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이미 눈빛으로도 작당 모의를 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는 베르는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데 그날이라는 거랑,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끼고 놓아주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약간 한심한 것을 바라보듯 한 시선을 느낀 베르가 머쓱하게 웃었다. 어쩐지 이들에게는 바보 취급만 당하는 것 같은 일상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베르는 세상을 새로 배우는 기분이었다. 에틸은 제 눈빛에도 마냥 신나 보이는 악마를 향해 한숨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베르 님도 네 번째 남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줄곧 두 사람을 잊은 것처럼 멍하니 있던 나트하가 베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베르 님.”

“응?”

“레사를 어쩌실 작정이신가요?”

“뭘? 나는 노력해 보겠다고 했잖아. 그를 용서하지는 못하겠지만 두고두고 괴롭히면 좀 낫겠지. 사실 그게 더 재미있어 보이기도 하고.”

잠시 제 친우를 향해 애도를 표한 나트하가 베르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지금 당장은 어느 정도 거리까지 그를 참으실 수 있으신데요?”

“옆자리에 앉는 것까지는 괜찮았어. 참으려면 참을, 수는 있는 것 같은데. 미래가 즐거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럼 그와 함께 레이라를 안는 것에 거부감이 드시나요?”

“…….”

얼굴이 시뻘게진 베르가 고개를 휙 돌렸다. 헛소리를 내뱉는 저 입을 네가 틀어막아 달라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에틸은 한 수 위였다.

“레이라를 안는 것이 싫으십니까?”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긴 소파에 냉큼 드러누운 베르가 몸을 꿈틀거렸다.

에틸은 신기한 생물을 구경하듯 베르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는 잎새에 붙은 애벌레를 흉내 내는 베르를 모른척 하며 나트하에게 말을 건넸다.

“피오니안 님을 뺀 네 사람이 준비하자는 거군요.”

“네. 베르 님만 괜찮으시다면요.”

“…….”

커다란 손에 폭 파묻힌 악마의 얼굴은 악마도 얼굴이 빨개지는구나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가 앓는 소리를 하며 웅얼거렸다.

“그래도 처음인데, 둘, 이서 하고 싶…….”

“베르 님이 피오니안 님에게서 레이라를 꺼내 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

베르의 대답에 해사하게 웃은 나트하가 제 통신 구를 꺼내 들었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에틸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레이라가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다른 문제 같습니다.”

“아…….”

“일단, 메르세데스 공자는 친구로 시작하자는 마음일 테니…….”

“그렇네요. 그걸 생각 못 했어요.”

다시 통신 구를 주머니 안에 갈무리한 나트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피오니안을 향한 작은 복수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기막힌 계책이 사르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쉬웠다. 긴 머리칼이 차르르 흘러내리며 반짝이는 커튼처럼 그의 얼굴을 드리웠다.

어느새 턱을 괴고 소파에 기대 누운 베르가 나트하의 천사 같은 외양을 향해 혀를 찼다. 저 꼴로 악마가 되려는 인간이라니.

“그냥 레이라를 들고 마계로 튈래?”

“…….”

“그건 조금…….”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피오니안은 무력으로 이길 수도 없어. 레이라가 피오니안을 찾아가는 건데 가서 따지기도 이상한 상황이라며.”

“그렇죠.”

“레이라한테는 얘기해 본 거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본 베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삿대질을 시작했다. 악마의 힘에 쭉 밀려간 소파가 처량히 멀어져 갔다.

“얘들 웃기네. 원래 인간들이 이러는 건 알겠는데, 너희 그렇게 멋대로 굴다가 팽 당한다? 레이라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 너희는 공작이나 하려고 한 거 아냐.”

“…….”

“……거기, 까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말이야! 그냥 가서 까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네. 그래, 그게 낫겠어. 당장 가자고!”

번뜩이는 악마의 기세에 못 이긴 척 일어난 두 남자가 베르의 뒤를 졸졸 따랐다. 두 남자의 처지에서는 칼자루를 먼저 휘둘러 줄 그가 못내 고마웠다.

척척, 당당히 걸어가 피오니안의 방문 앞에 선 베르의 움직임이 우뚝 선 등대처럼 멈춰 버렸다.

질척이는 소리와 끈적거리는 신음이 섞인 야릇한 정사의 소음이 베르의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는 눈앞이 빨개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이게, 지금.”

퍽퍽, 살을 치대는 소음과 달콤한 신음이 하모니처럼 어우러졌다. 삐걱대는 나무 소리로 보아 아주 격렬한 행위를 벌이는 중인 것 같았다.

“아앙! 하읏, 아, 좋아. 으으응.”

실시간으로 붉어지던 베르의 얼굴이 귀 끝까지 온통 새빨개졌을 때, 제 입술을 핥으며 묘한 미소를 짓던 에틸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와 끈적한 정사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깜짝 놀란 채 눈을 동그랗게 뜬 두 남녀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당장 피오니안에게서 떨어져 제 몸을 가리려 노력하는 레이라와 당당한 태도로 불청객을 맞이하는 피오니안.

적장에 선 장수처럼 위세 좋게 문을 연 에틸이 비릿하게 웃었다.

“대낮부터 너무 뜨거운 것 아닙니까? 둘이서만?”

“에, 에틸.”

“내내 이러고만 계셨던 것은 아니시겠죠?”

빙긋 웃는 웃음이 악마보다 더 악마 같다고 베르는 생각했다. 그보다 레이라의 헐벗은 몸이 자꾸 눈앞을 아른거렸다. 반쯤 벗겨진 드레스 자락을 뚫고 튀어나온 가슴과 쭉 뻗은 하얀 다리가…….

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베르의 등을 밀어 방 안으로 집어넣은 뒤 꼼꼼히 문을 닫아 잠근 나트하가 에틸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시뻘게진 베르의 얼굴과 바동거리는 태도가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지만, 나트하는 일단 그 부분을 과감히 넘기기로 했다.

“음, 묘하게 화가 나요. 에틸도 그렇죠?”

“그렇습니다.”

당당하게 나선 것이 무색하게 눈 둘 곳 없어 허망한 표정을 짓던 베르는 그저 도망치고 싶어졌다.

‘뭐야, 얘들 무서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는다면? 고양이는 방긋 웃으며 생선을 낚아챈 뒤 맛있게 요리해 먹어 버릴 것이다. 피오니안에게 맡겨진 레이라도 그러했다. 부르지 않아도 며칠째 눈앞을 알랑대는 레이라는 피오니안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피오니안! 밥 먹고 뭐 할 거야?”

“……글쎄.”

일견 무심해 보이는 태도로 책을 뒤적이던 피오니안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 앉은 그의 자태가 심히 고왔다.

레이라는 손을 펴 눈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내가 너무 붙어 있어서, 이젠 지겨워졌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군.”

“이젠 옆에 와도 쳐다보지도 않잖아.”

아양을 부리는 고양이처럼 그의 다리 위에 놓인 책을 치워 버린 레이라가 냉큼 무릎 위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탈하게 웃은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편안해진 자세에 빙긋 웃은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

어제의 정사가 떠올랐는지 레이라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향긋한 복숭아 향기가 날 것 같은 뺨이었다. 복사꽃 같은 볼에 입을 맞춘 피오니안이 얌전히 웃었다.

“이렇게 요망하게 굴면서도, 부끄러운 것은 참지 못한다는 점이 귀엽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부끄럽잖아.”

“허락할 테니, 이제 내 꽁무니는 그만 쫓아도 된다.”

다정하게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약간 차가운 손등에 뺨을 비비려던 레이라의 행동이 딱 멈췄다.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날 것처럼 서서히 움직이는 빨간 눈동자가 귀여워 피오니안의 입가가 씩 말려 올라갔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생각이었겠지.”

“……맞아.”

“덕분에 에틸과 나트하의 눈초리가 얼마나 따가운지 아나?”

“…….”

“그들 생각도 해 줘야지. 물론 나야 좋긴 하지만.”

오늘 따라 찰랑이는 레이라의 긴 머리칼이 은빛을 찬란하게 내뿜는 것이 어여뻤다. 피오니안은 레이라의 머리칼을 쥐어 입을 맞췄다. 달콤해 미쳐 버릴 것처럼 다정한 눈동자에 흩날린 빛무리가 어여뻐 레이라의 눈에 하트가 가득 들어찼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 퐁퐁 샘솟는 분위기가 간지러울 법도 한데 으레 사랑에 빠진 커플이 그렇듯 두 사람은 서로의 분위기가 그저 마음에 드는 것처럼 더 애정이 진득해지기만 했다.

“정말이지?”

“그래. 대신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기로 약속해라.”

“당연하지! 피오니안은 계속 이렇게 아름다울 텐데.”

부드럽게 웃던 피오니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간에 주름을 새긴 그가 레이라를 힐난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못나지면 버릴 것처럼 구는군.”

“아하하! 피오니안이 그런 생각도 해?”

“당연하지. 이제 나는 네가 없는 세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나도, 나도 그래.”

어느덧 피오니안의 목을 감싼 레이라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의 예상대로 그를 꽉 끌어안은 레이라가 피오니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설마 우는가 싶어 퍼뜩 튀어 오른 어깨가 메마른 눈가를 비비는 레이라의 행동에 안심하듯 폭 가라앉았다.

피오니안은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제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긴 세월,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해 공허했던 마음에 차곡차곡 레이라를 쌓아 가는 것 같았다.

빈 도화지에 그려지고 칠해지는 행복이 아름답고 또 버겁기도 했다. 늘어가는 마음의 무게처럼 함께 늘어나는 행복이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 순간을 위해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이라면, 잘 버텨온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피오니안.”

“내가 더 고맙다. 레이라.”

다섯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한 미소는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덕분에 커져 버린 피오니안의 분신이 달콤한 핑크빛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다.

“뭐, 뭐야. 왜 커져?”

“왜긴. 네가 어여뻐서 그렇다.”

“…….”

다시 붉어지려는 레이라의 뺨에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볼에 닿는 입술의 촉감이 좋았다.

벌떡 일어선 레이라가 치맛단을 들어 올려 속치마를 벗어 던졌다. 무얼 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던 피오니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피오니안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레이라는 차려입은 드레스 자락을 대충 풀어 헤쳤다. 딱 제 손이 들어갈 만큼 허술해진 드레스 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녀가 피오니안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침을 꼴깍 넘긴 피오니안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레이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속옷과 페티코트만 쏙 벗은 뒤 피오니안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툭, 툭. 연한 핑크빛 페티코트와 캐미솔, 같은 색 브래지어가 바닥에 쌓였다. 관능적인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에 화답하듯 레이라는 느리게 입술을 핥았다.

기묘한 묘기라도 본 것 같아 피오니안은 손뼉을 쳐 줄까 고민을 한 뒤 머리를 흔들었다. 그에게는 레이라의 행동이 마법 같았다. 그냥 벗기기에도 힘든 것이었는데 레이라는 아무렇지 않게 드레스 안에서 그것을 벗어 던졌으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옷차림이 아주 얇아졌다는 것이었다.

“어때?”

얇고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을 훑어 내리는 피오니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톡 도드라진 유두에 시선을 빼앗긴 그가 야살스레 웃으며 레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 더 예쁘군.”

맞닿은 손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레이라는 씹어 삼켜버릴 것처럼 제 목덜미를 깨무는 피오니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윽, 아…….”

서늘했던 피오니안의 살갗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뜨끈뜨끈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등을 훑어 내리며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커다랬다. 드러난 쇄골에 이를 드러낸 그가 달래듯 혀를 문질렀다.

달콤한 살 내음에 밑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피오니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취하고 또 취해도 늘 그렇듯 부족했다. 순식간에 데워진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듯 그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색스럽게 붉어진 입술을 핥은 그가 나른하게 깔린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런 재주는 언제 배웠지?”

“여자들은, 으응, 다 할 수 있을걸? 피오니안이 벗기면 느리잖아.”

말을 건 것이 무색하게 그는 이미 레이라의 가슴에 달라붙어 유두를 쭉쭉 빨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천이 서늘한 바람을 고스란히 전해 주다가 뜨거운 체온을 전해 주길 반복했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꽉 쥔 피오니안이 가느다란 허리를 더 당겨 안았다. 조금만 집중하면 통통하게 무르익은 여체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얇은 천 자락이 그를 더 조급하게 했다.

이를 세워 유두를 깨물고 느릿하게 핥던 그가 헐겁게 벗겨진 드레스 자락을 끌어 내렸다. 환한 햇빛을 받으며 드러난 동그란 가슴은 숨이 버거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빳빳이 서 있는 유두를 입에 문 그가 황홀하다는 듯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레이라는 그것이 부끄러워 몸을 비틀었다. 질책하듯 따가운 눈초리가 곧 레이라의 얼굴을 따라왔다.

“하읏, 으응…….”

“으음.”

핥고 빨고 깨무는 것이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애무가 레이라의 숨을 거칠게 했다. 바쁘게 오가는 손도 마찬가지였다. 능숙하게 레이라의 하부를 더듬던 손이 클리토리스를 꼬집었다.

“아읏!”

드레스를 그대로 둔 채 그 안을 바쁘게 오가는 손이 레이라를 끈적하게 데우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질구와 클리토리스를 오가며 고민하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이내 고민이 끝난 듯 피오니안의 손가락이 레이라의 클리토리스를 짓누르고 비비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한데도 묘하게 만족스러운 느낌을 느낀 그녀가 허리를 흔들었다.

느릿하게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더 빨라졌다.

“아읏, 으응! 아!”

여전히 붉게 익은 유두를 핥던 혀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삼킨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혀를 휘감았다. 질척하게 맞닿은 입술이 레이라의 신음을 집어삼켰다. 통통하게 부푼 클리토리스가 절정을 앞둔 것처럼 파르르 떨려오자 피오니안은 남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으으읏!”

절정과 함께 몇 번 더 클리토리스를 문질러준 그가 빠끔거리는 질구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안달이 난 것처럼 요망하게 흔들리는 엉덩이가 피오니안의 것을 비비적댔다.

“오늘 따라, 더 야하게 구는군.”

“으응, 빨리.”

“안 된다.”

착하게 기다리라는 것처럼 작은 입술에 입을 쪽 맞춘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의아함에 동그래진 눈동자에 다시 작게 입을 맞춘 피오니안이 싱그럽게 웃으며 레이라를 내려 주었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눕듯이 앉혀진 그녀가 흘러내린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려 제 가슴을 가렸다. 도토리를 감추는 다람쥐를 보듯 귀엽고 가소로웠다. 나직하게 웃은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치맛자락 안으로 쏙 숨어들었다.

“꺄악! 뭐, 뭐야.”

“쉿.”

허벅지를 벌리며 레이라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던 피오니안이 그녀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누가 들었을까 싶어 입을 가린 그녀가 눈동자만 굴렸다. 이미 신음을 지를 대로 질렀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들리는 헙, 소리와 함께 만족스레 자리를 잡은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다리를 당겨 그녀의 하체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붙였다. 아직 솟아오른 클리토리스에 입을 맞추고 다리를 더 벌리자 꿀을 한가득 머금은 곳이 드러났다.

얇은 천을 투과한 햇빛에 은근히 드러난 그녀의 하초는 여전히 어여뻤다. 피오니안은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난데없는 갈증에 혀를 길게 내민 그가 느릿하게 질구를 핥아 올렸다.

“하윽.”

파르르 떨리는 다리를 꽉 붙잡은 그가 짐승처럼 혀를 굴렸다. 쾌감에 들썩이는 엉덩이가 더 커다란 자극을 불러와 레이라는 흔들거리는 몸을 가라앉히려 노력해야 했다.

뜨겁고 질척이는 혀끝이 질구를 빙글빙글 맴돌다 곧 파고들었다. 느릿하게 핥고 빠르게 오가는 것이 무언가 부족하다 싶을 때 긴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 질구를 꿰뚫었다.

“으응, 아아!”

클리토리스를 날름거리는 혀가 얄밉기까지 했다. 긴 손가락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레이라가 느끼는 곳을 찌르고 문질렀다.

다시 비틀거리는 허리가 교태롭게 흔들거렸다. 피오니안은 그 질척이는 유혹을 뿌리치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넣어 달라는 것처럼 하체가 묵직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 버린 페니스가 가엽게도 울었다.

피오니안은 속옷까지 단번에 벗어 던지며 제 것을 쥐었다. 흉흉하게 부푼 그것은 레이라의 치맛자락 안에 숨어 드러나지 않았다. 거칠어진 그의 숨이 그녀의 비부를 더 뜨겁게 데웠다.

“아앙! 아, 아앗.”

“후.”

더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일어선 그가 레이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기다란 의자 끝에 앉은 그가 다리를 모았다.

이미 드러난 페니스에 화등잔만 하게 커진 레이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제 것을 쥔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그대로 주저앉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게로 꽉 눌린 페니스가 거칠게 박혀 들었다.

“하윽!”

“윽.”

입술을 깨문 그가 쾌감을 참으며 레이라의 몸을 더 꽉 내리눌렀다. 파드득 튀어 오르며 유연하게 젖혀진 그녀의 몸을 간신히 끌어안은 피오니안이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아읏, 하앗.”

“하.”

오돌토돌한 페니스를 휘감은 질 벽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뜨겁고, 미끄럽고, 조였다.

미간을 모으며 더운 숨을 뱉는 피오니안의 모습에 레이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올라가며 단단한 눈빛이 닿았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곱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뜨거운 안광이 맺혔다.

세게 허리를 튕긴 피오니안이 레이라의 허리를 꽉 틀어쥐며 제 허리 짓에 맞춰 그녀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하읏! 으응!”

“으윽.”

삐걱대는 비명을 내지르는 의자의 소음이 오케스트라처럼 두 사람의 신음을 감싸 안았다. 어느새 피오니안의 움직임에 박자를 맞추며 허리를 흔드는 레이라의 몸짓이 교태로웠다.

그는 허리에서 손을 떼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 깊어진 신음이 듣기 좋았다. 동그랗고 보드라운 가슴을 문지르던 피오니안이 허리를 길게 튕겼다.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 ✲ ✲

하얀 이불에 돌돌 말린 레이라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에틸의 얼굴을 한 번, 분명 웃고 있는데 이마에 힘줄이 솟은 것 같은 나트하를 한 번, 그러든지 말든지 평온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 피오니안을 한 번, 불에 데인 송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베르까지.

하하, 어색하게 웃은 레이라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 너무 서운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툭 튀어나온 나트하의 말에 냉큼 동의한 에틸의 시선이 레이라를 향했다. 움찔 놀란 그녀가 자세를 곧게 하고 앉았다.

돌돌 말린 이불이 끙끙대며 자리를 잡는 것을 귀엽게 보던 베르는 제 눈을 가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하얗고 매끈한 다리에 다시 이불을 감은 레이라가 저도 모르게 툴툴거렸다.

“그러게, 같이 가자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레이라?”

“아, 아니야.”

빛처럼 빠르게 꼬리를 내린 레이라가 이불을 더 꽁꽁 동여맸다. 옷이라도 입고 싶은데 분위기상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억울하기는 했다. 그녀는 세 남자에게 피오니안을 찾아갈 건데 같이 가자라는 얘기를 열번도 더 했었다. 분명 그들은 괜찮다고 다녀오라고만 했다.

벌써, 3일 전 일이긴 했지만.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인가?”

침묵을 깬 것은 피오니안이었다. 유유자적, 딴 세계에 있는 것처럼 그는 포크를 우아하게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먹고 있었는지, 체리가 가득 올라간 초콜릿 케이크는 이미 그의 입안으로 절반이나 사라진 뒤였다.

“사과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이제 나를 뒤쫓는 귀여운 짓은 오늘로 끝일 거다.”

“그게 무슨, 혹시 허락하신 겁니까?”

“그래.”

케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접시를 얌전히 내려놓은 피오니안이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에틸과 나트하보다 더 놀란 것 같은 베르의 표정이 퍽 볼 만 했다.

입을 떡 벌린 악마가 빽 소리쳤다.

“허락했단 말이야?”

“그래.”

“흐어어…….”

괴상한 소리를 낸 베르가 녹은 치즈처럼 늘어졌다. 머리까지 감싸 쥐며 늘어지는 것이 퍽 요상한 모양새였으나 그간 단련된 네 사람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레이라만 이불 속에서 꺼낸 팔을 뻗어 베르를 슥슥 쓰다듬었다.

“베르, 괜찮아?”

“정말로 허락한 거야?”

“그래. 대신 첫 번째가 레이라가 되어선 안 된다는 조건이다.”

“내 의사는?”

“중요한가?”

다시 축 늘어진 베르가 곧 번개처럼 일어나 앉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 같았다.

“그럼, 첫 번째는 내가 정해도 되는 거지?”

“……그래.”

실험체가 될 누군가를 향해 짧은 애도를 표한 세 남자는 같은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같은 인물을 떠올린 레이라는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누굴 생각하는지 빤하군.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날 확실히 묻질 못했다. 레이라, 그자를 받아줄 생각인가?”

“이미 다들 받아들인 것 아니야? 나보다 더.”

“네 마음을 묻는 거다.”

레이라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그녀는 레사를 용서하고 서서히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친구가 되든 연인이 되든 그것은 훗날의 일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레사가 베르의 권속이 되고자 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가 베르의 권속이 되고자 한 것은, 레이라의 반려가 되고 싶다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레이라는 그때 말리지 않고, 거절하지 않은 제가 이미 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레사가 베르의 권속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말야. 나는 왜 말리지 않았을까?”

“조금은,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요?”

“……역시 그런가.”

위아래로 조그맣게 움직이는 작은 얼굴에 네 남자는 그린 것처럼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피오니안, 작은 손을 톡톡 두드리는 베르, 동그란 어깨를 매만지는 에틸, 뺨을 쓸어내린 나트하까지. 어느새 그들은 레이라를 감싼 채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다들 괜찮아?”

레이라의 물음은 모두를 향했지만, 시선은 베르를 향해 있었다. 그 이유를 알면서도, 세 남자는 은근히 웃으며 답했다.

“그래.”

“네.”

“그럼요.”

“……응.”

베르까지 모두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레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주억였다. 그간 벌어진 레사와의 거리를 어떻게 가깝게 이어붙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똑 떨어진 로이는 어째야 하나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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