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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Toast to the ones here today (24/26)

23. Toast to the ones here today

피오니안이 보낸 서신을 받은 레사는 득달같이 달려 녹스 가에 도착했다.

그를 전혀, 절대 반기지 않는 녹스 공작은 친히 직접 나서 그를 조져, 아니 맞아 주었다. 이후 얼굴을 서너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잔뜩 지친 채 공작과의 독대를 마친 레사가 네 사람과 마주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피오니안은 레사의 지친 얼굴을 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표정이 아주 볼 만하군.”

“……그렇습니까?”

“북부로는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다음 주부터 다시 황실로 복귀하게 됐습니다.”

“다행이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 것처럼 나트하의 표정이 확 피었다. 비 온 뒤 화창한 하늘처럼 청명한 미소까지 머금은 채였다. 마침 오늘 날씨도 그러했다. 이미 밤이 되어 버렸지만.

제 친우의 표정을 목격한 레사가 나트하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서신으로 전한 것처럼, 나도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말인데.”

피오니안은 뺨을 문지르며 뜸을 들였다.

“예.”

“네게는 후계가 필요하지 않은가?”

“……필요합니다.”

뜻밖의 질문에 레사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나트하와 에틸, 베르의 표정에도 의문이 서려 있었다.

‘합의되지 않은 이야기인가?’

레사는 긴장한 어깨를 풀며 시선을 바로 했다.

“갑자기 후계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남자들만 모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서프라이즈군요.”

픽 웃음을 터트린 에틸이 대답과 함께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피오니안의 말처럼 당장 급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늦게 시작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인간이 악마가 된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선 안 되었다. 자연스럽게 다섯 남자와 엮일 수 있으면서 메르세데스 가와 녹스 가의 대를 잇는 방법.

“혼인입니까?”

결혼뿐이었다. 이렇게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녹스 가에 머물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객식구 노릇도 하루 이틀 일이지 이런 관계가 오래간다고 해서 레이라에게 좋을 것은 하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의 평화는 피오니안의 명성과 이름에 기대어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녀가 혼인한 뒤엔, 정부를 서넛 거느린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을 테니 일단은 혼인이 첫 번째 과제가 맞았다. 그것이 아주 행복한 과제라서 문제일 뿐이지.

“다들 생각은 해 보았을 것 아닌가.”

“그렇죠.”

“그래. 그러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다. 누가, 그녀와 혼인을 할 것인가.”

네 남자의 시선이 전부 레사를 향했다. 모두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라가 황제가 아닌 이상 공식적으로 혼인을 할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러니 그것이 자신이길 바라지 않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피오니안의 말은 가장 합리적이며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레이라와 혼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것이겠지. 레이라가 사랑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

평소와 달리, 입가에 따스한 웃음을 매단 에틸이 고개를 주억였다.

“넷이나 될 정부를 대신해 데릴사위가 아닌, 사위가 되어 줄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사람.”

햇살이 맺힌 것처럼 환하게 웃은 나트하가 끄덕였다.

“인두겁을 벗은 악마가 될지라도, 제 이름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진 사람.”

바람이 빠진 것처럼 픽 웃은 베르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피오니안은 이 자리에 모인 다섯 남자 중 레사가 그 주인공이라 말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분명,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은 에틸도.

“저는 가주도 무엇도 아니에요.”

그래서 행복해 보이는 나트하도.

“난 악마야.”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인 베르도.

“어떠한가, 레사 메르세데스?”

덤덤히 물음을 던지는 피오니안도 모두 레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

말문이 턱 막힌 레사가 고개를 푹 꺼트렸다.

그는 그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레이라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으니 괜찮다며 저를 다독이던 것이 엊그제 였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일도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저에게 너무 과분한 일입니다.”

레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도 레이라와 혼인하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이니.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버렸고 상처 줬고 이 해괴한 상황을 만든 원인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느꼈으니까.

레사는 새어 나오려는 침음을 삼킨 채 눈을 꽉 감았다.

“우리 다섯 중 하나이며, 그녀를 사랑하고, 작위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는 레사 메르세데스. 너 하나뿐이다. 아, 심지어 네겐 저주까지 걸려 있다.”

아마도 텅 비어 있을 레사의 고간을 흘긋거린 피오니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까지 했다.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 했던 사실이 떠올라 미간을 슬쩍 구긴 레사가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제겐 과분합니다. 차라리 페르세나 백작이…….”

“레사. 이제 당신을 이리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습니까?”

칼날처럼 단호하게 제 말을 잘라 버린 에틸의 말에 그저 멀거니 고개를 주억인 레사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너무 행복한 꿈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자격이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 용기를 내지 못할 거라면,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

날카로운 언사에 제 심장을 찔린 것처럼 움찔거린 레사가 입을 딱 다물었다.

“레이라는 몇 번이나 용기를 냈습니다. 맨 처음 저주를 받아들였을 때, 저와 나트하, 피오니안 님을 받아들였을 때, 당신을 마주하겠다 마음먹었을 때, 베르 님께 납치되었던 그 순간에도 그랬었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과거의 실수를 가슴에 담고 살고자 할 용기가 없다면,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다면, 당신에겐 정말로 자격이 없을 겁니다.”

“그럴 용기는 충분히 있습니다. 제 말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빙긋 웃은 에틸이 제 손을 들어 올려 레사의 말을 막았다. 그의 눈에 비친 감정은 그간 레사가 에틸에게 받았던 수많은 시선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아니 비교해선 안 될 것만큼이나 따뜻했다.

‘그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레사는 이 순간, 에틸의 철옹성 같은 울타리 안으로 넘어온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 먼 훗날을 본다면, 당장 할 혼인은 별것 아닐 겁니다. 기회는 언제고 오는 법이며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저 그 시간을 위한 발판을 만드는 겁니다.”

“……레이라의 의견도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청혼은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

레이라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정해져 버린 순간이었다. 긴 시간을 돌아 많은 실수를 넘어 제 자리로 돌아온 남자의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레사는 그들과 함께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이 제 생각처럼 끈끈히 뭉쳐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격 없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과 의외로, 아니 생각대로 이들의 우두머리가 에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또 베르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저를 죽일 듯이 굴던 그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아주 해맑은 악마의 모습은 레사에게 생경한 것이었다.

악마는 인간에게 해롭다. 마수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

그간 레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충고들은 언젠가부터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악마는 인간에게 해롭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레사는 베르가 왜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를 제법 편하게 대하는 에틸이 그에게 해 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에틸은 그가 이유를 알게 된다면 베르에게 사과하리라 생각했기에 직접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싫어도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야 한다. 에틸은 조금이라도, 그들이 서로에게 남은 앙금을 씻을 수 있길 바랐다.

레사는 아직도 억울했다. 제가 저주에 걸린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레이라가 저주에 걸렸다는 것이 아직도 억울했다. 사실 그때 그 상황이라면 다시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토록 베르를 분노케 했을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절절하고 처절했던 분노가 이해도 됐다. 덕분에 그는 이 특이하고 신기한 악마에게 있어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잃게 한 일에 적어도 사과를 건네야 한다는 것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저와 레이라에게 저지른 일이, 저는 아직도 당연하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다시 그때가 되더라도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소중한 이를 빼앗은 것, 사죄드립니다. 용서를 바라지는 못하더라도 사과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정말로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레사는 아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사죄를 하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한 채 슬그머니 웃은 나트하와 에틸은 어안이 벙벙한 베르를 보며 슬쩍 제 입가를 가렸다.

“무, 뭐, 됐어. 나도 네 소중한 것을 빼앗았으니까 똑같겠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피오니안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 레사는 모르고 저지른 일이나, 너는 다 알고도 저지른 일일 테니.”

일의 경중은 미뤄 두더라도 고의냐 아니냐에서 만은 베르의 잘못이 훨씬 컸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베르가 그저 알았다며 넘겨 버리고 끝낼 문제는 아니었다.

피오니안의 의도를 읽은 베르는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쭉 내민 채 툴툴거렸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직은 내 잘못을 네게 사과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아직, 하, 내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거든.”

“괜찮습니다.”

마땅치 않은지 눈썹이 삐죽 솟은 피오니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에 비해 레사는 충분한 사과를 들은 것 같았다. 토라진 표정으로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베르의 얼굴이 무척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사는 제 마음에 작은 죄책감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제게 건 저주가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레사는 베르의 저주 없이 레이라와 화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을 가졌었다는 사실은 숨겨 두기로 했다.

✲ ✲ ✲

겨울이 성큼 찾아온 덕분에 벽난로를 켜 둔 실내가 따스했다. 레이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파묻혀 데이지가 타 준 차를 홀대하고 있었다.

“아가씨? 피임차는 다 드셔야죠.”

“아, 미안해. 잊어버렸네.”

“메르세데스 소 공작이 그렇게 신경 쓰이세요?”

“제발……. 그 이야기 좀 그만하면 안 돼?”

“네. 안 돼요.”

입을 쭉 내민 데이지의 표정에 자연스레 베르를 떠올린 레이라가 화들짝 놀랐다. 함께한 시간은 데이지가 훨씬 길 텐데도 같은 표정에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 후안무치한 자를 왜 용서하신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아가씨!”

“알았어, 알았어.”

늘어지게 한숨을 뱉은 레이라가 만년필 뚜껑을 꾹 닫아 내려놓았다. 저가 졌으니 대화를 나누자는 뜻이었다.

데이지는 의자를 덥석 끌어와 레이라의 코앞에 두고 앉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눈을 돌린 레이라가 애꿎은 찻잔을 괴롭혔다.

“자, 얘기해 보세요.”

“처음엔 그냥 안쓰러웠어.”

“…….”

뾰족한 데이지의 시선에 지레 놀란 레이라가 허둥거렸다.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아. 그게 안쓰러웠다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같은 이유로 힘들었을 때 레사가 위로를 많이 해 줬으니까.”

“네. 그러셨죠.”

“그때 나는 그것만으로도 벅찼는데, 레사는…….”

“저주에 걸려 있었고, 그제야 이별을 겪고 있었죠.”

“응. 그게 안쓰러웠어. 그래서 러스티 후작님 부탁도 있고, 공작 부인의 부탁도 들어줄 겸 만나 보자 마음먹었었지…….”

“네.”

레이라의 말에 따박따박 대답하고 있는 데이지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무표정으로는 에틸을 따라 올 자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데이지의 표정은 눈보라보다 매서웠다.

레이라의 등에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아, 그래서 뭐……, 레사를 만나러 갔는데.”

“아직도, 좋아하시니까 흔들렸겠죠.”

“…….”

“피골이 상접 해 있는 모습이 불쌍해 죽겠고, 안쓰러웠을 테고요. 그렇죠?”

“……응.”

언제 화를 냈었냐는 것처럼 온화해진 데이지의 표정이 레이라를 훑었다. 그녀는 레이라를 나무라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아직도 그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죄는 아니에요.”

“어?”

“저는 그냥, 아가씨께서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대답을 하시기를 바랐어요.”

나긋나긋해진 말투에 레이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언제든 저를 안아 주고 다독여 주고 구박하기도 하던 데이지, 그녀는 늘 레이라에게 가족이었다. 그랬기에 레이라는 그녀가 레사를 싫어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이별도, 저주도, 다른 만남도요. 처음에 아가씨는 에틸을 은근히 밀어내는 것 같았어요. 그 저주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하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니까 다음은 쉬워 보였죠.”

“그래, 그랬었지.”

“아가씨, 아가씨가 레사 그자를 사랑하던 중에 에틸, 러스티 경, 피오니안 님, 베르 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골몰했다. 귀여운 표정에 방긋 웃은 데이지가 말을 이었다.

“사랑이에요. 아가씨는 모두를 사랑하시잖아요. 레사 그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주를 기회로 삼았고, 에틸에게 반해 버렸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들였고, 러스티 경을, 피오니안 님을, 베르 님을, 그리고 레사 그자의 마음도 받아들인 거예요.”

“데이지…….”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부를 사랑하고 계신 거잖아요.”

“…….”

언제 깨물었는지 모를 입술을 살살 달래어 빼준 데이지는 아직도 웃는 얼굴이었다.

“아가씨, 사랑은 죄가 아니에요. 저는 전부터 아가씨가 레사 그자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각하께 죄를 짓는 것처럼 구는 것이 싫었어요. 아가씨가 그자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나요? 마음이 죄가 될 수는 없어요.”

다정한 목소리로 제 머리를 쓰다듬는 데이지의 모습은 꼭 어머니 같아서, 레이라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께 잘못이 있다면 그거 하나예요. 그 어여쁜 마음을, 죄로 만드셨다는 것.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니까요. 저주는 시작되어 버렸고, 올곧은 마음이 다섯 개가 되어 버렸지만, 아가씨는 마음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다섯 배로 늘린 거잖아요?”

“데이지.”

“물론 저는 그 사실이 너무너무 행복해요! 아가씨께 부군이 다섯이나 생긴다는 게요!”

“……데이지?”

“아가씨의 사랑이 그들의 얼굴에서 비롯했다지만, 그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죠! 제가 봐도 너무너무 빼어난 분들이니까요! 물론 레사 그자는 아직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가씨가 좋으시다면 저는 그것으로 됐어요.”

천의 얼굴을 가진 데이지의 다채로운 말투에 레이라는 그저 고개를 흔들었다. 힘이 쭉 빠진 고갯짓은 추락하는 새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 뒤로도 레이라는 데이지의 ‘레이라 녹스의 다섯 부군’에 대한 환희 어린 외침을 들어야 했다.

레이라는 당황스럽고 시끄러운 말들 속에서 그녀의 따스함을 느꼈다. 내심 다섯을 사랑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닐까 싶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린 것이었다. 데이지의 바람대로 레이라는 슬며시 품고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귀가 좀 아프긴 했지만.

✲ ✲ ✲

내 집에, 내 공간에 꼴도 보기 싫은 이가 있다면 어떨까?

녹스 공작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제 공간에 들여놓으니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사근사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불안한 마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혹시 하는 마음이 역시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일단 진정하시고…….”

쩔쩔매며 발을 구르던 나트하가 녹스 공작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놓으며 다시 발을 굴렀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노성을 터트린 녹스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보아도 머리끝까지 화가 가득 찬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에 베르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에틸! 자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

“어찌 저자를 받아들인다 할 수 있느냔 말일세!”

“각하.”

“뭐! 말을 해 보게!”

나직한 말에 움찔거린 녹스 공작이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지금 겁먹은 거 아닌가? 베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베르의 중얼거림을 들은 피오니안은 웃지 않기 위해 입안을 깨물었다.

‘저 망할 악마 놈이.’

“제가 왜 이 말씀을 올리러 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제 독단이겠습니까?”

에틸이 애써서 레사를 레이라 곁에 붙여 둘 이는 아니었다.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녹스 공작은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각하께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시겠다기에, 저희가 몰래 찾아온 것입니다.”

“…….”

“이미 한 번은 이기셨잖습니까. 이번엔 각하께서 져 주십시오.”

“에틸 페르세나!”

쩌렁쩌렁한 고함에 놀란 시종이 딸꾹질을 누르며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 꼴을 보던 집사가 고개를 흔들며 열려 있던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각하, 저는 아가씨께서 우는 것, 힘들어하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녹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랬다. 어여쁘고 또 어여쁜 딸인데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레사 메르세데스를 용서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저자가 없다 해도 자네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제가 레사 메르세데스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일 뻔한 녹스 공작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넘어갈 뻔하였군, 조심해야겠어. 대체 저 치는 어째서 말도 저렇게 잘하는 것이지?’

언쟁하는 와중에도 에틸에 대한 사랑을 무럭무럭 키우는 녹스 공작이었다. 그는 이해는 가지만 마땅치 않다는 것을 표현하려 어렵게, 어렵게 인상을 썼다.

“나는 저자가 싫다!”

녹스 공작이 당당하게 외쳤다.

피오니안의 입가가 씰룩였고 베르는 고개를 비틀었다. 나트하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레사를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던졌다.

레사는 그저 담담하게 자리해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 말이 고까우실 테지만, 각하, 레사 메르세데스와 사랑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닙니다.”

“…….”

배신 당한 눈빛의 녹스 공작이 에틸을 절절하게 바라보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은 에틸이 안 되겠는지 옆자리에 앉은 레사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레사의 말은 녹스 공작의 어안을 벙벙하게 했다.

“각하, 사랑합니다.”

“뭐라?”

입을 떡 벌린 다섯 남자의 시선이 레사에게 닿았다.

“레이라의 아버지시니, 제겐 그녀와 같아 드리는 고백입니다. 아직, 그녀에게는 전하지 못한 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각하. 과거의 제가 한 잘못은 명명백백히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듣기도 했고, 깨닫기도 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멍청이로 자라지는 않았으니,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회?”

“각하께선 제게 단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고 괴로웠습니다. 이후엔 내가 이 모양이니 기회조차 주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제가 각하께 기회를 청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과거에 그렇게 물러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가? 그래, 내게 얻고자 하는 기회가 무엇인가? 레이라를 마음 편히 사랑할 기회? 그딴 소릴 할 거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게!”

“아닙니다, 제 독단으로 그녀를 힘들게 한 것, 그간 저와 제 가문이 지은 죗값을 치를 기회를 주십시오.”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녹스 공작이 에틸을 흘겨보았다. 이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엉덩이를 차버려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죗값을 치르게 기회를 달라는 마음만은 마음에 들어 버렸다. 녹스 공작은 잇새를 깨물었다.

“하, 죗값을 치러야 하니 곁에 있겠다, 그건가?”

“…….”

무언의 긍정이었다. 껄껄 웃음을 터트린 녹스 공작이 부리부리한 눈을 떴다. 미약한 호의를 담은 눈빛에 에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래. 그 기회를 줘 보지. 물론, 내 딸의 허락이 먼저일 것이다.”

녹스 공작에게서 떨어진 허락에 네 남자의 입에서 같은 소리의 숨이 터졌다. 레사는 제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법 봉을 휘두르는 환청을 듣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것이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터트린 레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라만 모르는 레이라의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청혼을 뺀 나머지 준비를 시작한 다섯 남자는 녹스 공작과 메스세데스 공작의 화해를 다음 과제로 뽑았다.

어려운 일이겠거니 싶었던 일은, 공작 부인의 장례식에 찾아왔던 레이라를 향해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된 메르세데스 공작으로 인해 아주 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을 처음 겪어본 메르세데스 공작이 그간의 일에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주?”

제 아들과 함께 찾아온 네 명의 손님은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레사가 저주에 걸린 것. 얼결에 레이라까지 저주에 걸려 버린 것. 레사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없지만, 레이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자세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녹스 공작이 아는 만큼은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토벌에 갔다 온 이후로 빌빌거렸던 거로군.”

단번에 상황을 이해한 메르세데스 공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무슨 저주인지도 알 것 같으니 그만 설명해도 되네. 레사, 너는 녹스 공녀가 아니면 후사를 볼 수도 없는 몸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 말릴 이유가 없지. 비록 내 탓이 있기는 하다만, 네 복을 네가 걷어차 버린 것이 아니냐. 그녀에게 준 상처는 네가 평생 갚도록 해라. 내 죄는 내가 물을 테니.”

간결한 해답과 함께 자리를 뜬 메르세데스 공작은 곧장 녹스 공작을 찾아갔다.

얼떨떨한 얼굴로 찾아온 이를 맞이한 녹스 공작은 제 눈앞에 쌓인 보화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다 무엇이오?”

“내 사과를 받아 달라는 뇌물일세.”

“…….”

“소중한 이를 잃어 보니,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겠더군. 아들놈을 통해 그간의 사정도 들을 수 있었고……, 자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아니꼽게 군 것을 용서해 주게.”

“뭐, 나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니…….”

떨떠름한 표정을 한 녹스 공작이 턱밑을 쓸며 말했다. 괜히 멋쩍었기 때문이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가 그저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당하고만 있었더라면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이 누구였든지 간에 그간 두 공작은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었다.

“이리 먼저 사과를 해 주니, 내가 민망하군.”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내가 고맙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죄가 큰 것 같아 먼저 나선 것이니 너무 멋쩍어하지는 말아 주게. 내가 더 민망하지 않은가.”

“……알겠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사과한 두 공작은 서로를 바라보질 못한 채 악수를 나누었다. 평화의 시작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황제는 몇 년 전의 체증까지 싹 내려간 듯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 ✲ ✲

“식장은 따로 더 알아봐야 할까요?”

나트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그는 요즘 결혼 준비라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손댈 곳도 신경 쓸 곳도 많았지만 레이라의 웃는 얼굴을 상상하면 아무리 바빠도 즐거울 뿐이었다.

“혹시 모르니 몇 군데 더 추려 보지. 일단 내 레어도 두어 군데 손 봐두고 있으니.”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레어 두 곳을 싹 갈아엎고 있는 피오니안의 발언이었다. 하얀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블루 다이아몬드를 왕창 끼얹은 고풍스러운 레어와 검은 대리석을 깔고 금으로 마감해 우아함을 뽐내는 레어 두 곳이었다. 전자는 피오니안의 취향이었고 후자는 베르의 집을 아주 예뻤다고 말했던 레이라의 발언을 참고한 것이었다.

“네네. 알겠어요. 그곳이 될 확률이 높아 보이니까, 워프 포탈 연구를 더 해 봐야겠네요. 청첩장에 마법진을 새겨 볼까요?”

고개를 크게 주억인 나트하가 안경을 치켜 쓰며 우쭐거렸다.

픽 웃은 피오니안이 제 마법식을 새긴 돌멩이 하나를 나트하에게 건네주었다. 싱글벙글 웃은 나트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드레스는 그녀의 선택이라지만, 여러 벌을 만들어 두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여성용 잡지를 읽던 에틸이 말했다. 에틸도 아주 즐거워 보였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의복은 베르에게 맡기는 게 어떤가?”

“나?”

멀뚱하니 앉아 에틸이 뒤적인 잡지를 훑어보던 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좋아하는 분야이지 않나.”

“그렇긴 하지……. 그럼, 정말로 내가 만든다?”

배시시 웃은 베르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 할 일을 빼앗긴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짓던 에틸은 곧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이 정리된 다른 잡지를 뒤적였다.

“메이크업과 헤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꽃도 중요하지.”

우아하게 앉아 디저트를 전투적으로 먹고 있던 피오니안이 말했다. 잡지에 집중하던 에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꽃이 중요합니까?”

“그럼. 식장을 장식할 꽃은 신부의 취향을 타니까. 해 보진 않았어도 본 것은 많으니 내 말을 믿게.”

“그녀가 좋아하는 꽃을 말씀드리면 되는 겁니까?”

“한 가지로는 턱도 없지. 더군다나 보석도 준비해야 하고. 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결연히 대답한 에틸의 눈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요즘 다섯 남자는 전부 들떠 있었다. 남자들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멋모르는 레이라도 그러했다.

결혼식의 주도는 거의 피오니안이 맡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에틸이 보기에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거라고 예감할 정도였다.

“레사 그자의 준비는 잘 되어 간다던가?”

“서서히 다가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우선은 레이라가 마음을 더 열어 주어야 가능하겠죠.”

“그도 그렇군.”

“아, 내일이 그날입니다.”

“……벌써 그런가.”

“베르 님과 데이트도 내일입니다.”

에틸은 은연중에 베르가 상대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셋이 함께한 정사도 벌써 40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만약 저주가 네 명으로 유지가 되는 거라면, 그들은 내일 다섯 명이 밤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모여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에틸과 나트하, 피오니안은 대기조였다.

“내일 할 일까지 오늘 최대한 끝내야겠군.”

“네.”

“그럼 보석부터 보러 가지.”

워프 게이트를 연 피오니안이 에틸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일렁거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킨 에틸이 빙긋 웃었다.

✲ ✲ ✲

베르와 약속한 데이트 당일이었다. 레이라는 깃털이 빵빵하게 들어간 퀼팅 드레스를 입은 채 거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너무 뚱뚱해 보이지 않아?”

“예쁩니다.”

드레스의 매무새를 정리해 주던 에틸이 빙긋 웃었다. 보드라운 천을 상체에 딱 맞게 재단한 뒤, 치맛단 안에 빵빵하게 깃털을 넣어 바느질을 열심히 한 드레스였다. 붉은빛이 나는 금실로 자수가 놓인 것이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에틸은 다 예쁘다고 하잖아.”

“예쁜 걸 예쁘다고 한 것이 죄입니까?”

“……아니, 뭐.”

민망해져 괜스레 볼을 긁적인 레이라는 하얗고 통통한 토끼처럼 보였다. 에틸은 말을 아끼며 토끼털로 만든 외투를 숄처럼 덮어 주었다.

“즐거운 기억을 만들고 오십시오.”

“너무너무 정중한 말투, 이상해.”

“좋은 시간 보내. 레이라.”

“……응.”

발긋해진 볼에 키스를 남긴 에틸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배시시 웃은 레이라가 마주 그의 뺨에 키스를 남겼다. 허리를 숙여 주던 에틸이 그녀의 웃음을 따라 했다.

레이라를 에스코트하러 그녀의 방문 앞을 서성이던 베르는 레이라보다 먼저 나온 에틸의 배웅을 받았다. 베르는 아직도 에틸이 조금 어색했다.

“베르 님,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어, 고마워.”

에틸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준 베르가 문을 두드렸다. 에틸은 뻣뻣하게 굳어 긴장한 티가 역력한 그를 재미있게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에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고 절대 내보이기 싫었던 순간들이 무색하게도, 에틸은 행복했다. 그녀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인생을 함께할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웠다. 일평생 가족이라고는 없던 그에게 생긴 둥지는 아주 보드라운 느낌이었다.

피오니안과 나트하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속마음을 서로에게 내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피차 같은 입장이며 평생을 보기로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만간 마련될 자리에 두 남자를 더 초대하는 것으로 더 끈끈한 유대감이 될 예정이었다.

✲ ✲ ✲

베르와 레이라는 제국 수도에서 데이트할 생각이었다.

오페라를 보고 거리를 걷는 평범한 데이트를 원했던 베르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제의 공녀가 또 다른 남자와 함께 나타난 것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에 쫓겨야 했다.

“대체 피오니안은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

“괜찮아? 놀라지는 않았어?”

“응, 나는 뭐…….”

“거리를 돌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있겠네. 어디 조용한 곳에서 놀자.”

“그래. 그게 좋겠어.”

레이라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집 밖으로 자주 나온 적이 없는 레이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란히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은 베르가 인간인 척 행세하려 구매한 저택으로 향했다.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쳐진 저택은 겉과 속이 너무나 달랐다. 그저 평범한 고급 저택인 척하던 그의 집은 온갖 마수들이 가득한 별세계였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작은 마수들이 두 사람의 뒤를 졸졸 쫓았다.

“무서우면 이야기해. 나쁜 아이들은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을 거 아냐.”

“……생각보다 귀여운데, 전부 까맣긴 하지만 동물처럼 생겼잖아.”

작은 강아지, 토끼, 고양이, 사슴 온갖 동물처럼 생긴 까만 덩어리들이 이리저리 눈앞을 오갔다.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을 받으려 재롱을 떠는 모양새였기에, 레이라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인간들은 애완동물이라는 걸 키운다기에 만든 아이들이야. 집안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어.”

“이 작은 아이들한테 일을 시켜?”

어쩜 그럴 수 있냐는 눈동자에 찔끔한 베르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은 작지만 원래 모습은 커다래. 오해하지 말아 줄래?”

“아……. 그렇구나.”

“만져도 돼. 널 아주 좋아하네, 경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정말?”

레이라의 발아래를 서성거리던 고양이가 그녀의 손에 덥석 안겨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렵한 몸짓이었다. 고양이 형상으로 모인 뭉클거리는 연기 사이로 동그랗고 빨간 눈이 깜빡였다.

“귀, 귀여워…….”

“그 애 이름은 나비야. 나이가 제일 많지.”

“하하하, 정말 고양이 같은 이름이네. 나비야 안녕?”

활짝 웃은 레이라가 나비의 턱을 긁어 주며 말했다. 기분이 좋은 듯 고롱거리며 그녀의 쓰다듬을 받던 나비가 하얀 손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나비의 행동에 베르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 애교도 부리네?”

“원래 애교가 없어?”

“상남자가 따로 없는 앤데……, 신기하네.”

어느새 레이라의 발치에 모여든 온갖 마수들이 관심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레이라는 쭈그려 앉아 털이 풍성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사슴의 등을 긁어 주었다. 흉포한 이빨을 숨긴 채 애교를 떠는 마수들을 허탈하게 바라본 베르가 허허 웃었다.

“몸을 녹이게 저쪽으로 가자. 벽난로를 켜놨을 거야.”

“응응.”

신난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레이라의 표정에 베르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베르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레이라의 곁에서 아양을 떠는 마수들 대신 벽난로 앞에 커다랗고 푹신한 러그를 깔고 따뜻한 음료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지런을 떨며 그녀를 기다려도 레이라가 나타나질 않았다.

“……뭐야.”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베르가 레이라를 찾았다. 레이라는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맹수의 턱을 긁고 배를 만지고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응! 우리 아버지가 동물을 키우는 건 싫어하셨거든.”

“그래도 저쪽으로 가자. 그 뭐더라, 아! 감기 들어.”

“알겠습니다아.”

또 대답만 달랑해 놓고 보드라운 배를 쓰다듬던 레이라는 베르에게 짐짝처럼 들려야 했다. 깜짝 놀랐지만, 몹시 편안한 승차감이었다.

레이라는 제가 납치당하던 것이 떠올라 키득거렸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던 베르도 번진 것처럼 레이라의 웃음을 따라했다.

“납치당하는 것 같아.”

“나도 그 생각을 했어.”

폭신한 여우 털 러그 위에 레이라를 얹어 놓은 베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레이라는 제 어깨 위로 가벼운 블랭킷까지 올리려는 베르를 말리며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엊그제 일 같은데. 그치?”

“그래?”

베르는 아주 오래전의 일 같았다.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난 마음이 간지러웠다. 속절없이 빠져드는 것이 무섭다가도 얼굴만 보면 행복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중독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아주 사랑스럽게 그녀를 보다가도 뜬금없이 드는 죄책감에 미안해지기도 했다.

저의 저주가 아니었더라면, 레이라는 어땠을까.

악마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너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아?”

레이라는 그의 질문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베르는 가끔, 아니 자주 그녀를 보며 미안한 눈빛을 했다. 지금처럼.

“응? 아마 누군가랑 정략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정략결혼?”

“보통 그러니까. 아니면 에틸이랑 했으려나.”

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가 장난스레 웃었다.

베르는 제 미간을 왈칵 구기고 있었다. 레이라가 습관처럼 베르의 미간을 문질렀다. 여우처럼 배시시 웃는 얼굴을 감추지도 않은 채였다.

“아쉬워?”

“아니, 전혀.”

“…….”

“난 지금이 행복해. 너무너무 좋아.”

안아 달라는 듯 손을 뻗어오는 그녀를 가볍게 감싸 안은 베르가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마주 보며 하는 대화가 즐겁고 마주친 눈동자에 마주 웃어 주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칼리만큼 소중한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어느새 그보다 더 소중해진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었다. 아니, 이럴 줄은 몰랐다.

“너는 진짜, 요물이야.”

“뭐야 그게.”

“누굴 닮은 거지? 네 아버지는 예쁘지 않던데.”

“나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래진 눈이 귀여웠다. 베르가 레사의 말에 놀라던 녹스 공작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래. 그런 것도 같네.”

“이제 안아주는 거 익숙해졌어?”

“…….”

맞닿은 체온이 따스했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와 속삭이는 모양이 못 견디게 어여뻤다. 누군가와 꼭 껴안고 체온을 나눈다는 것, 이 또한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배웠다.

베르는 하나하나 소중한 감정과 기분을 그녀에게 배우고 있었다.

“아니, 익숙해지지는 않았어. 영원히 그럴 것 같기도 해.”

“응?”

“계속 너를 안고 싶을 것 같다고.”

“…….”

“계속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을 것 같아.”

“그, 그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베르는 알고 있었다. 제 품 안에서 파르르 떠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뜨끈해진 체온마저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베르가 그녀의 정수리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고마워, 레이라. 좋아해.”

베르는 악마이기 전에 레이라를 사랑하는 수컷일 뿐이었다. 그가 그것을 자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본능을 못 이긴다는 것은 아니었다.

음, 조금 전까지는.

“하압.”

레이라는 날렵하게 제 입술을 찾아 깨문 베르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벌려주었다.

악마와의 키스는 우습게도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다정한 입술과 조금 차갑지만 보드라운 혀가 좋았다.

베르는 귀엽다는 것처럼 쪼듯이 입을 맞추기도 했다. 쪽쪽, 앙큼하게 맞닿은 입술은 감정이 흘러 넘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끈적이게 변하곤 했다.

뭉개듯 입술을 문지르고 애달프게 혀를 빨아당긴다. 목구멍까지 핥을 기세로 다정히 혀를 움직이면서 야릇한 여지를 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아.”

길고 길었던 키스에 터진 그녀의 숨이 야릇했다. 베르는 제 뒷머리가 쭈뼛 서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밤까지는 참아 봐야지 했던 것이 무색하게 손이 바빠졌다.

드레스 자락 위를 더듬던 야한 손이 레이라의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아윽, 아파아.”

“아파?”

놀란 아이처럼 화들짝 놀란 베르가 가슴을 살살 문질렀다. 미안함이 담뿍 묻은 손놀림이 점점 끈적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더라?’

베르가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자신은 짐승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는 입술이 귀여웠지.

저 혼자 납득한 채 고개를 주억이던 베르가 다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실내가 덥다며 얇은 드레스로 갈아입었을 때 갑자기 마음이 술렁거렸다. 마수들 사이에 앉아 배시시 웃는 눈꼬리 옆에 키스하고 싶었다.

사실 그런 생각들은 평소에도 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저 예쁘구나, 했으면 됐을 거였다. 그러나 단둘이, 그것도 제 집에 있다는 사실이 음흉한 생각을 행동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밤까지 기다리지 못해도 괜찮아?”

“……바보야 베르는?”

“뭐?”

“난 계속 유혹하는 중인데.”

이리저리 깨물리고 핥아진 탓에 붉어진 입술이 요요했다.

아. 베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숨을 집어삼키고 닥치는 대로 매끄러운 살갗을 핥았다. 매끈한 입천장을 간질이는 혀끝이 지독히도 달았다.

“하읍.”

통통한 입술은 빨아도 깨물어도 좋았다. 그래 악마는 이래야지.

정욕에 물든 악마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끈적거리는 숨이 귓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레이라는 베르의 목덜미를 꽉 끌어당기며 입술을 더 벌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자극이 더해졌다.

아득해지는 머릿속에 붉은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베르는 손을 크게 벌려 가슴을 쓸어 올렸다. 탐스러운 열매를 으깨버릴 것처럼 다급한 손놀림은 점차 진득하게 변해갔다. 아픔에 찡그리던 레이라의 미간이 사르르 풀리며 교성을 내뱉었다.

“흐응, 응”

콧소리를 달게 받아 마시던 베르가 그녀의 드레스를 풀어 헤쳤다. 언젠가 그녀의 나체를 보며 붉히던 얼굴은 어디다 팔아 버렸는지 몹시 담담한 얼굴이었다.

붉어진 눈이 그녀의 나신을 한 차례 훑었다. 사실 베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붉은 안개가 낀 그의 시야에 그녀만 선명했다.

“예쁘다.”

“……베르.”

“정말, 정말 예뻐.”

“…….”

양 손목을 전부 붙잡힌 채 폭신한 러그 위에 눕혀진 레이라는 제 볼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좋았다. 몸을 다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 황홀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와 후끈해진 실내가 무덥게 느껴졌다.

“하아.”

나직이 숨을 뱉은 레이라가 애원하듯 베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네가 악마고, 내가 홀린 것 같아.”

“…….”

“아직도 더 가져갈 것이 남아 있는 걸까?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린 게 무서웠는데, 더 주고 싶어진다는 게 신기해.”

“베르.”

“너는 나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레이라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을 알아. 이상해. 그게 부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나는 요즘 그 눈빛만 그리고 있어.”

“…….”

“너를 갖고 싶어. 만지고 싶어. 이대로 너를 전부 집어삼키고 싶어. 그래서 내 것이 될까? 레이라 너는, 내 것이 될까?”

“베르.”

붉은 눈동자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의 쇄골에 똑똑 떨어졌다. 뜨거웠다.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베르.”

“응.”

“좋아해. 아직, 아직은 네 말처럼 깊은 마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데…….”

“…….”

“그래도 나는 베르를 좋아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안겨 있지 않았을 거야.”

“알고 있어. 그냥, 내 욕심이겠지. 그래. 이건 내 욕심이야.”

“아니야.”

“네가 소중해질수록 무서워져. 네가 내 권속이 된다면 나를 싫어 할 수도 없을 텐데. 고작 내게 속박되었다는 이유로 나를 받아들인다면, 그런 거라면 어떡하나.”

베르의 말을 이해한 레이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처음엔 그런 의도가 없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평생을 보낼 텐데 어떤 사람인지, 아니 악마인지나 알아보자는 생각에 바뀌었지만. 그는 알면 알수록 신비한 악마였다. 그게 신기해서 더 다가갔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게 실수였을까?

“……내가 베르를.”

“그저 나를 동정해서 받아들인 거잖아. 그렇지? 알고 있지만, 그게……, 하. 그냥 레이라. 계속 나를 동정해도 되니까, 나를.”

“아냐!”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레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채 물러난 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멀리 밀어 놓은 블랭킷으로 벗은 몸을 가린 레이라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무, 뭐?”

“동정해서 그런 거 아니야! 조금만 다독이면 되겠지 싶어 이용을 목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야! 처음엔 그랬을지도 몰라. 만약 내 제안을 받아 준다면 오래오래 보고 지내야 할 테니까, 베르가 어떤 악마인지 알아보기도 했어. 일부러 말을 걸고 과거를 캐묻고.”

“…….”

“그런데, 알면 알수록 가슴이 아팠어. 생각해 봐, 베르가 내게 한 짓이 있는데 왜 가슴이 아팠을까? 그래, 그래서 이 악마가 비틀렸구나. 그래서 내게 저주를 걸었고, 그래서 레사를 미워하는구나. 생각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이해만 했었어야 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어. 피오니안을 떠올려서 그런 줄 알았는데, 입맞춤이 싫지 않았어.”

쏟아지는 레이라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베르는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 내가 베르라는 악마를 좋아하는구나 싶었어. 악마가 내 몸에 닿는 것도 싫어야 마땅한데! 웃는 게 가엾고, 혼자인 게 쓸쓸해 보이고, 가끔 짓는 그리운 표정이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어! 그게 싫어서 친구가 되고 싶었어. 연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냥 동정으로 선택한 게 아니야!”

“레이라.”

“악마 하나 이용하자고 몸을 팔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아! 만약 내가 그랬다면, 피오니안도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베르를 좋아해. 사랑에 빠진 눈동자가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아직 베르랑 나눈 마음이 깊지 않아서 그런 거야.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그때는 베르가 말한 눈빛보다 더 예쁘게 바라볼 거야.”

언제부터인지 베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귓가에 쏙쏙 들어오는 앙칼진 목소리가 귀여웠다.

베르도 알고 있었다. 레이라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투정이었다. 더 좋아해 달라고 더 바라봐 달라고. 부족하다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불안한 마음에서 기인한 말이기는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묻어나는 것은 느꼈지만, 그것도 부족했다. 제 마음의 반만큼만 그녀가 저를 바라봐 주었으면 했다. 그 작은 투정에 그녀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하며 다그칠 줄은 몰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랑스럽고,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벌게진 얼굴을 숨긴 채 한껏 치솟은 광대를 꾹꾹 누르던 그가 제 어깨에 닿는 작은 손을 느꼈다.

“……베르, 울어?”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귀여운 아가씨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아, 사랑스러워라.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 버린 남자가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과연, 악마 같은 웃음이었다.

얼굴색을 휙 뒤바꾼 베르는 언제 투정 부렸냐는 듯 레이라를 천천히 밀어 눕혔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는 것처럼 흔들거리는 눈가에 입을 맞춘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레이라는 다급히 베르를 말리려 했으나 다리를 바동거리는 것에서 그쳐야 했다. 묘하게 색기를 띤 눈빛과 표정에 넋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장난기가 쏙 빠진 베르의 야릇한 얼굴은 악마 그 자체였다.

“베, 베르.”

“그래, 레이라.”

베르는 빙긋 웃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연한 꽃향기가 났다.

베르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것을 즐겼다.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는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해졌다. 자극적인 여인의 향기에 파묻혔다. 열기로 가득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가 그녀를 달래 다리를 더 크게 벌렸다.

“으으응.”

베르는 부끄러운지 흔들거리는 엉덩이를 꽉 쥐였다. 제 손에 풍성하게 감겨오는 통통한 엉덩이가 귀여웠다. 그가 나른히 입을 맞추며 씩 웃었다.

레이라는 부끄러워 소극적일 거라 생각한 베르의 행동이 거침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제 반 나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던 귀여운 악마는 그것이 내숭이었다는 듯 막힘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다리 사이를 느른히 구경하던 베르가 입맛을 다셨다. 레이라는 딱 거기까지만 그를 훔쳐본 뒤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음. 매끈하네.”

“…….”

“귀여워.”

어디가 귀여운 거냐는 물음은 제 음부를 지그시 누른 베르의 손가락에 쏙 사라져 버렸다.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작은 손짓에도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촉촉하고 매끄러워진 손이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야하네. 내가 좋은가 봐.”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인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제 손가락을 핥았다. 달큰한 체향이 고스란히 묻어난 애액은 미끈거리고 끈적였다. 그가 촉촉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보물을 탐사하듯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럽게 애를 태우는 손가락이 얄미운지 레이라의 엉덩이가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가슴을 쥐고 있던 다른 손이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양쪽 다리를 야무지게 쥔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하으응.”

“하.”

베르는 다디단 꽃물을 꼴깍 삼키고 다시 핥았다. 보드라운 틈 사이에 꼿꼿하게 뭉친 살덩어리를 콱 깨물고 느른하게 핥았다. 울컥 터진 액이 그의 턱을 적셨다. 치솟은 입꼬리가 질구에 딱 달라붙었다.

“하으읏, 으응!”

긴 혀가 질구를 파고들고 높은 코끝이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바동거리는 다리를 제 어깨에 척 걸쳐놓은 그가 통통한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축, 추웁, 하아.

질척이는 야릇한 소리가 레이라의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색색거리며 신음을 참을 새도 없이 재차 신음이 튀어나왔다. 쭉 뻗은 손이 가슴을 쥐고 뭉그러트렸다. 한참 괴롭힘을 당한 유두가 붉어졌다.

레이라는 허리를 비틀고 몸을 흔들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절정이 다급한 몸짓을 자아냈다. 곧 붕 뜬 그녀의 머릿속에 화려한 불꽃이 펑펑 터졌다. 발발 떨리는 엉덩이는 아직도 베르에게 붙잡혀 자유를 구속당한 채였다.

그녀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면서도 베르는 흡족한 표정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핥고 깨물고 또 핥았다.

“흐으으, 그, 그만. 그마안.”

“싫어.”

어쩐지 뭉개진 그의 목소리가 야릇했다. 클리토리스에 흡착하듯 입술을 붙인 베르가 제 손가락을 질구에 문질렀다. 레이라의 허리가 더 크게 비틀렸다.

“으으응, 안 돼.”

대꾸조차 하지 않은 그가 끈적하게 젖은 손가락을 작은 틈새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에 꽉 달라붙은 작은 돌기가 어서 오라는 듯 꿈틀거렸다. 신기했다. 여전히 혀를 열심히 문지르던 그가 손가락을 더 밀어 넣고 입구를 넓히듯 가위질을 했다. 손가락 두 개가 세 개로 늘어날 때까지 그녀는 두 번의 절정을 더 느껴야 했다.

“아아앙! 으응, 흐으.”

“진짜, 야해. 너.”

원래 이렇게까지 느끼는 건가? 베르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레이라는 과하게 잘 느꼈다. 물론 베르는 그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당장 꺼내 달라는 것처럼 부푼 성기를 저도 모르게 쓰다듬던 그가 바지를 휙 벗어 던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그림자가 날렵하게 바지를 채갔지만 두 사람 다 그것을 몰랐다. 흉흉하게 곧추선 물건을 두어 번 쓰다듬은 그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해도 돼?”

“……으응, 빨리, 빨리.”

언제부턴가 저항 대신 부추김을 하는 그녀의 엉덩이가 딱딱하게 솟은 자지에 제 음부를 문질렀다. 벌써 흠뻑 젖어 버린 제 분신을 희롱하는 야한 몸짓을 흡족히 내려다보던 베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욕망이 한계까지 차올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반질반질한 액에 함빡 몸을 적신 귀두가 질구를 간지럽혔다. 레이라는 슬쩍 인상을 쓰며 엉덩이를 더 흔들었다. 불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다섯 남자는 성급히 그녀를 안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모두 그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애무했고 안달이 나 미쳐 버릴 때쯤 그것을 해갈해 주었다.

레이라는 오늘 따라 그것이 더 불만이었다. 베르까지 그들과 똑같다는 것이 불만의 시작인 것 같았다. 레이라는 몰랐다. 그것이 전부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그들이 들인 노력이라는 것을.

그 시작이, 가르침이 에틸이라는 것도.

“아아아, 빨리.”

“보채지 마. 조그만 게, 야해 빠져 가지고.”

짐짓 투덜거리는 것 같지만 베르의 움직임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허리를 쳐올리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차분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 그가 제 것을 꾹 눌렀다.

“으응!”

“윽.”

이를 악문 베르가 허리를 서서히 짓눌렀다. 그는 귀두 끝이 삼켜지고 기둥이 천천히 빨려 들어가듯 잡아먹히는 것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짙은 악의가 새어 나오듯 뭉클거리는 욕망이 차올랐다. 거세게 허리를 박아 넣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액을 칠하고 싶었다.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베르의 눈동자가 레이라를 뚫어 버릴 것처럼 응시했다.

레이라는 서서히 제 안을 채우는 베르의 자지를 느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모양 하나하나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선연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생소했다.

질 벽을 느리게 밀어 올려 모양을 박제하듯 각인시키는 삽입이었다. 베르의 선단에서 오싹오싹한 마력이 새어 나와 질 안을 핥는 것 같기도 했다. 자궁구를 느리게 문지른 귀두는 거짓말처럼 거칠게 내벽을 긁고 빠져나와 순식간에 다시 처박혔다.

“하으윽!”

또 느리게, 다시 빠르게, 더 느리게, 더 빠르게.

레이라는 정신이 빠져 버린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떨었다.

오물오물 제 것을 씹어 삼키는 내부에 역시 혼이 빠져 버린 베르 역시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하앙, 아으으으!”

“후우, 으윽.”

성미가 급한 베르답게 허리 짓이 빠르게 이어지다가도 느리게 안을 문지르기도 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삽입이 해일 같은 쾌감을 몰고 왔다. 그렇게 풀어 놓았는데도 버거운 크기는 자극을 콱콱 짓이기며 차곡차곡 저를 쌓았다.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좋았다. 혼몽해진 머릿속을 그녀로 꽉 채운 베르가 만족스레 웃었다.

미쳐 버릴 만큼 좋았다. 온몸이 황홀감에 폭 절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를 가졌다는 만족감과 육체적인 만족감이 계속해서 그의 허리 짓을 부추겼다.

“레이, 라. 사랑해.”

“으으응! 아!”

대답조차 하지 못하게 들이치고 있으면서 베르는 사랑을 속살거렸다.

사실 그것은 준비하지 않았는데 툭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진심을 내뱉은 입술을 저지하지도 못한 채 베르는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예뻐. 좋아해. 사랑해.

레이라의 얼굴은 그것을 다 듣고 있음을 암시하듯 점점 더 시뻘게졌다. 호흡이 가빠 색색 숨을 내뱉으면서도 레이라는 눈을 힘겹게 떴다.

눈을 마주치자 야릇하던 베르의 표정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레이라의 눈에 눈물방울이 퐁퐁 샘솟았다. 흐릿해진 시야에 미칠 것 같은 쾌감 속에서도 붉고 야릇한 남자는 선명했다.

그것은 베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야와 그녀의 시야가 같은 것을 그린다는 것을 베르가 알았더라면, 아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꼈으리라.

네 번의 정사에 기절하듯 잠에 빠진 그녀를 안아 들고 녹스 저택으로 돌아온 베르는 세 남자의 눈총을 받으며 식은땀을 닦았다.

“적당히를 모르나?”

“…….”

베르는 피오니안의 눈총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고 에틸과 눈을 마주쳤다.

“과하셨습니다.”

“…….”

헛웃음을 뱉은 베르가 나트하를 건너뛴 채 허공을 응시했다. 나트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너무했어요!”

“하아.”

결국, 한숨을 뱉은 베르는 그저 허허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과하게 고조된 기분은 저치들의 찡얼댐에도 낮아질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다시 데리고 왔잖아. 그것도 힘들었다고.”

“……잘하셨습니다. 그녀를 아프게 하시지는 않으신 거겠죠?”

“응. 당연하지.”

크게 고개를 주억인 베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헛웃음이 옮겨갔는지 세 남자가 허허 웃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별 이상이 없군.”

화제를 돌리려는 듯 피오니안이 시계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주는 세 명이 끝인가 봐요.”

“다행입니다.”

“……그러네.”

베르까지 긍정하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괜히 데려왔나 싶은 베르의 표정을 읽은 피오니안이 미간을 구겼다.

“베르, 욕심은 금물이다.”

“어?”

“욕심부리지 말라는 소리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 너 혼자만 그녀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아니, 너는 아직 모른다.”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 피오니안이 눈을 감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를 보며 빙긋 웃은 에틸의 시선이 베르를 향했다.

“베르 님. 저는 레이라를, 당신을, 피오니안 님을, 나트하를, 레사를 가족이라 생각합니다.”

“……뭐?”

“제겐 가족이 없습니다. 그러니 새로 생긴 가족이 무척 소중해요.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불행한 일은 애초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당신께도 가족이 생겼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영원히, 함께할 소중한 가족이.”

베르는 에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데?”

“글쎄요. 시작은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 이 관계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그저 나트하와 피오니안 님이 정말 좋아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거잖아?”

“예. 시작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당신들을 전부 받아들이고 보니 그녀를 독차지하겠다는 마음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다정한 동생 같은 나트하가 좋고, 듬직한 피오니안 님을 형님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기도 하더군요.”

“……나는 뭔데?”

동생처럼 느낀다고 말하려던 에틸의 고개가 슥 돌아갔다. 나트하도 마찬가지였다. 피오니안이 깔깔 웃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뭐겠나. 동생이지.”

“…….”

툭 튀어나온 베르의 입술이 불만을 드러냈다. 웃음이 터질 뻔한 세 남자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반응에 더 심통이 난 베르가 소리를 질렀다.

“왜 내가 동생이야!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야! 네가 말해 봐!”

불시에 습격당한 나트하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저, 저는 형님이라고 생각해요!”

“너 역시 거짓말 못 하는구나.”

털썩 주저앉은 베르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악마의 위엄이 겨우 이 정도였다니. 악마이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간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약간 억울해진 나트하가 불퉁히 말했다.

“베르 님, 저도 에틸보다는 한 살 많아요.”

“……그러냐.”

이제야 깨달은 사실에 놀라워한 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피오니안은 에틸과 나트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고 에틸은 멍하니 나트하를 바라보았다.

“아.”

“아, 가 아니잖아요. 에틸!”

빽 소리친 나트하의 얼굴이 붉었다. 멋쩍게 웃은 에틸이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사와 동갑이셨죠.”

“나도 전혀 몰랐다.”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 나트하.”

“…….”

울상을 짓는 나트하에 비해 베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나도! 나도 말 놔도 돼?”

“이미 놓고 계시잖습니까.”

“아니 너는 조금 불편했거든. 분위기가 조금.”

“나도 가끔 에틸이 형 같았다. 음, 네 덕분에 형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

솔직한 말을 나직이 뱉은 피오니안이 에틸을 향해 미소를 그렸다. 에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습니까.”

“이런 게 가족이야? 친구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겠군요.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저희끼리 경쟁할 필요 없으니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거면 뭔지 알 것 같아. 고민 상담도 하고 레이라에게 못할 말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 거지?”

베르는 이제야 에틸의 말을 이해했다.

그의 말처럼 그들이 소중해진다면 욕심은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이 맞았다. 그는 제가 피오니안에게는 질투가 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에게 피오니안은 단 하나뿐인 친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레이라 둘 모두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낳은 결과였으니까.

베르는 두 남자와 증오하는 한 남자를 동시에 떠올렸다. 단호하게 저를 꾸짖는 태도, 항상 저를 보면 웃어 주는 얼굴, 얄밉게 굴다가도 함께 하하 웃는 사이에 서서히 가까워지는 마음의 거리도. 그리고 깨달았다. 언젠가는 저들이 제게 아주 소중해질 거라는 것을.

“네.”

아주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 지은 에틸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직 나트하만 불퉁하게 입술을 죽 빼고 있었다. 그것은 베르와 닮은 표정이었다. 베르의 고개가 나트하를 향했다.

“너는 확실히 동생 같다.”

울상이 되어 버린 나트하의 얼굴에 세 남자의 웃음이 터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오니안과 에틸은 그의 단단한 마음이나 늘 다정한 태도가 그저 어리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단호한 면이나 듬직한 말도 그랬다.

다만, 전부 알고 있으나 일부러 내색하지 않은 거였다. 묘하게 귀여운 나트하는 골리는 맛이 있었다. 조금만 놀려도 반응이 바로 오는 것이 레이라 만큼이나 순수하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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