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시, 봄
레사는 창가를 하염없이 서성였다. 과하게 긴장한 탓인지 그는 몸을 가만두질 못하고 있었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은 레사는 제 얼굴도 문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행동을 숨겨보려 소파에 앉았다가도 금세 발딱 일어서게 됐다.
“하아.”
여지없이 튀어나온 한숨과 함께 그의 시선이 다시 창가에 머물렀다. 그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몸뚱이가 다시 창가에 머물렀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이동을 한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얗게 뒤덮인 세상 속에서 홀로 색을 입은 여인이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옆을 차지한 금발의 미남은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레이라.”
꼭 그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레사를 향했다. 환하게 웃음 지은 그녀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추위에 발갛게 물든 얼굴로 저를 보며 웃는 그녀의 미소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이것은 꿈일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레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웃음과 행동을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또 그린 것이 엊그제였다. 그렇게 갖고 싶어도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믿기지 않는 만큼 그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고 또 아름다웠다.
어느새 차가워진 그의 손바닥이 붉어진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레사는 제 마음을 다시 억누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환히 웃어 준 그가 손을 마주 흔들었다.
레이라는 더 활짝 웃어 주었다.
황실 기사단장으로 복귀한 레사를 찾아온 레이라는 아직 그대로인 그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언 손을 녹였다. 언제부터 틀어 놓았는지 공기가 따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너무 더워. 창문 좀 열자.”
“몸이 다 식으면.”
“칫. 단호한 건 여전하구나.”
툴툴거린 레이라가 나트하의 빈자리를 훑으며 멋쩍어 했다.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 준 나트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간 참이었다. 레사의 복귀와 함께 나트하의 복귀를 바라는 황제가 그의 입궁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불러들여 벌어진 일이었다. 나트하의 입장에서는 빠져 줄 구실이 생겨 반갑기도 했다. 조금은.
“나트하는 언제 올까?”
“글쎄. 왜 벌써 보고 싶은가?”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두 사람은 친구인데, 말투가 왜 그렇게 다를까?”
“…….”
당황한 레사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여전히 죄인인 그는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레이라가 그것을 눈치채고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뭐야. 언제부터 내 눈치를 봤다고 자꾸 그래? 소심한 레사 메르세데스는 매력이 없는데.”
“……그런가.”
“응. 싫다는 게 아니라 달라서 신기하다는 거였어. 나트하는 음, 아기 같은데. 레사는 피오니안이랑 똑같은 느낌이랄까.”
“…….”
욕인가 칭찬인가 헛갈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오니안만큼 오래 살아 온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이니 노인 같다는 말일까? 나트하는 아기인데?
“내가 그분처럼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뜻인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야? 피오니안은 할아버지 같지 않거든?”
“그런 뜻이 아니잖나.”
“아무튼!”
앙앙거린 레이라가 레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삿대질을 했다. 그녀의 거침없는 태도는 여전했다. 레사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빌었다.
“지금 또 진지한 생각 했지?”
“…….”
“무슨 생각 했어?”
“몰라도 된다.”
“무슨 생각 했는데? 응? 말해 주면 안 돼?”
“…….”
“응? 응? 응?”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많았다. 레사가 늘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소망하거나, 그녀가 예쁘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나면 꼭 레이라는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레사를 타박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는 그에게 갖은 애교를 떨고 토라진 척을 하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여지없이 속마음을 털린 그가 한숨을 느리게 뱉으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부끄러웠다.
“…….”
레이라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웠다. 여전히 그의 표정이 읽혀서 신기했고 또 그리웠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그녀의 상처가 되었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제는 헤어짐이 두렵지도 않았고 아마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 테지만, 가슴이 일렁이기는 했다.
슬픈 것 같기도 그 순간들을 헤쳐 나온 것에 기쁜 것 같기도 했다. 레이라는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어디 아파?”
레이라의 입술 끝에 웃음이 맺혔다. 다급하거나 긴장하지 않을 때만 편안해지는 말투도 여전했다. 아. 조금은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조금 이상해서.”
“무엇이?”
“그리던 모습이랑 똑같은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렇네.”
“……나도 그래. 레이라.”
확연히 전과 같아진 그의 말투와 눈빛이 레이라를 그리움에서 꺼내 주었다. 떠올리면 울음만 나오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저 구석에 파묻어 버렸던 마음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그 말투가 좋아.”
“……그래.”
눈물이 그득한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 머뭇거리던 레사가 작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 손아귀에 딱 맞게 올라온 작은 손은 여전히 귀엽고 보드라웠다.
입술을 꼭 깨문 레이라가 제 손을 움켜쥔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어색하면 어쩌지, 만났는데 싫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던 것이 무색했다.
여전히 레사는 레이라에게 익숙한 떨림을 주는 사람이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에틸이 맞았어.”
“에틸은 늘 너만 바라보니까.”
“맞아.”
에틸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이던 레이라가 슬픈 눈을 했다. 저 먼 곳을 바라보는 여린 눈동자가 레사를 향했다.
“레사, 나중에 후회되지 않을까? 나는, 전처럼 너만 바라보지 못하잖아.”
“여전히, 네 마음이 여전히 나를 그려 준다면 괜찮다. 전처럼 나를 보며 웃고, 나를 보며 행복하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
“…….”
“그리웠다. 네가 생각한 것보다 아주 많이. 어쩌면, 이러다 죽겠지 싶을 만큼.”
제 손을 잡은 커다란 손에 힘이 잔뜩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레이라는 아프지 않았다. 그만큼 꽉 쥐고 있는데도 행여 부서질까 조심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그랬어.”
“언젠가는 네게 그가 있다는 것이 싫기도 했고, 나트하를 질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은 금세 잊혔지.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됐다는 것만 떠올리게 됐다.”
“…….”
“고맙다. 돌고 돌아 내 곁으로 돌아와 주어서, 내가 준 상처, 아픔들을 견뎌 주어서.”
“응. 나 대견하지?”
“그래.”
낮게 웃은 레사는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레이라는 그의 표정에 깃든 수심이 사라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가 끝까지 저주를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했다.
“레사, 화장실은 어떻게 가?”
“…….”
폭탄을 던진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레사는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레이라는 귀여운 그의 행동에 깔깔 웃어 버렸다.
장난스레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사실 레이라는 레사에게 걸린 저주의 심각성을 모른체 하며 자업자득이라고 치부하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는 후사를 어떻게 볼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걱정과 달리 레사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걱정 안 돼?”
“이제 익숙해졌다. 네가 괴롭히는 것도 익숙해졌지.”
“…….”
이번엔 레이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야 저가 저지른 이런저런 짓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레이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네가 아주 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으음. 그렇게 대담할 줄은…….”
“그만해!”
“아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레사가 자연스레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가 잔뜩 난 귀여운 볼에 닿은 손이 어색하게 떨어졌다. 레이라는 그것이 못마땅해 제게서 멀어지는 손을 끌어와 꽉 붙잡았다.
“왜 떨어져? 어색해?”
“아니, 이래도 되나 싶었다.”
“바보네.”
큰손을 조종해 제 머리를 쓰다듬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행복해하는 표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레사가 제 의지로 그녀를 쓰다듬었다.
“이제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이 같군.”
“귀여워 죽겠다는 말을 왜 만날 돌려서 해?”
“…….”
정곡을 찔린 레사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펑펑 내리던 눈송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맑게 갠 날씨가 제 마음 같았다.
“눈이 그쳤네. 산책할까?”
“안 돼. 감기 든다.”
“나 그렇게 약골 아닌데.”
“아니긴.”
레이라의 불만을 툭 털어 버린 레사가 단호하게 거절을 내뱉었다. 칫 소리를 낸 레이라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말을 잘 듣는 것도 여전했다.
“그런데 나한테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았다.”
“에이 거짓말.”
“처음엔 네 입. 그다음엔 매끄러운, 음…….”
“아…….”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린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털 한 올 없이 매끈한 제 음부를 떠올린 그녀가 주머니 속에 든 로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순간 불에 덴 망아지처럼 화들짝 놀란 레사가 그녀의 곁에서 훅 떨어져 앉았다.
“뭐, 뭐.”
“헤헤. 가져왔거든.”
“그, 그걸 왜 가지고 다니나!”
“으음, 주인한테 가니까 당연히 가지고 나왔지.”
눈을 또르르 굴린 레이라가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당해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벌게진 레사가 그녀의 손이 위치한 드레스 자락을 삿대질했다.
“만지지 마라!”
“어머머 내 걸 내가 만지는데 왜 화를 내세요?”
“……그게 왜 네것, 하…….”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지 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린 레사가 한숨을 뱉었다. 난감했고 당황스러웠다.
“알았으니까, 만지지 마라.”
“……치.”
레사는 힘이 잔뜩 들어가 팽팽해진 제 하부를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민망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 감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제 눈앞에 제 것을 괴롭히는 장본인이 있어서일까? 차분하지만 혼란이 그득한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부끄러워하는 얼굴 오랜만이야.”
“제발, 재미있어 하지 마라.”
그 뒤로 한참이나 그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허공을 맴돌았다. 몇 번이나 신을 찾던 레사는 지옥을 맛봤다.
✲ ✲ ✲
다 함께 녹스 가에 살림을 차린 네 남자와 달리 레사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가진 후계자라는 위치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레이라와 레사는 바쁘게 오가며 만나야 했다. 녹스 가의 저택, 황궁에 있는 레사의 개인 집무실이 주된 만남의 장소였다.
레이라가 레사의 집무실을 찾은 지 벌써 세 번째. 수시로 녹스 가의 문턱을 넘는 레사에 비하면 초라한 횟수였다.
“오는 데 춥진 않았나?”
“응. 괜찮았어.”
“레사, 나는?”
결국, 부기사단장직을 거절한 나트하가 레사를 향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레사가 그것을 느꼈는지 그를 흘겨보았다.
“넌 아주 좋아 보인다만.”
“하하하, 그렇지.”
나트하를 향해 대놓고 한숨을 내쉰 레사가 레이라를 보며 제 마음을 다독였다.
‘얄미운 놈.’
“나트하, 오늘도 보모한테 나를 맡기고 가 버리는 것처럼, 또 가 버릴 거야?”
“레, 레이라, 표현이 조금…….”
“그럼 내가 보모로군.”
약을 올린 상대는 따로 있건만 카운터펀치는 다른 이에게 얻어맞은 나트하가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나트하는 매번 레이라를 레사에게 데려다준 후 제 할 일을 하거나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오늘도 역시 그럴 예정이었다.
“레이라…….”
레이라는 저와 레사를 위해 나트하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한 행동인 지도. 그러나 그것은 오늘까지여야만 했다. 은근히 네 사람과 겉도는 레사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레이라는 그것이 제 결혼 준비 때문이라는 것과 레사가 전혀 겉돌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나트하를 등 떠밀어 배웅을 요청한 것이 바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누군가의 대신이라는 것, 레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딱 오늘까지 만이야. 다음엔 같이 있어 줘야 해.”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나트하의 작은 목소리에 대한 레이라의 답이었다.
“당연하죠.”
“그럼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이따가 봐!”
레사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레이라가 나트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트하는 그저 멍하니 웃어 버렸다.
“그래요, 레이라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응! 다녀오세요.”
“잘 가라.”
제법 가까워진 레사와 레이라의 거리를 느끼며 나트하는 마차에 올랐다. 어쩐지 출근을 배웅하는 제 배우자와 그 옆에 낀 정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하느라 바쁘지 않으냐며 제 친우를 약 올리던 것과 상반된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트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즐거운 현실을 받아들였다.
벌써 겨울이 꺾이고 있는지 날이 많이 풀려 있었다. 레사에게는 그것이 다행이었다. 승마, 승마 노래를 부르던 그녀를 위해 말을 꺼내 오는 길이라 더 그러했다.
봄을 좋아하는 레이라는 이맘때쯤 말을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겨울을 대비하며 헐벗었던 자연이 차곡차곡 제 옷을 갖춰 입는 것이 좋다고 했던가? 레사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마구간 귀퉁이를 돌자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레이라가 보였다.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사랑스러웠지만, 승마복을 갖춰 입은 그녀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긴 머리를 높게 묶고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사냥에 나선 여신 같았다.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칼과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가 예뻤다. 딱 달라붙은 바지와 털 부츠가 귀여웠다. 도톰한 가죽 상의에 모피 숄을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예쁘군.”
“뭐야. 갑자기.”
“표현을 더 자주 하라고 하시더군.”
“……피오니안이구나?”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레사가 하얀 백마의 고삐를 레이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레이라는 피오니안에게 같은 말을 한 것이 에틸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아주 짧았다.
‘굳이 전할 필요는 없겠지.’
레이라는 하얀 말의 주변을 서성이며 눈을 반짝였다.
“이 말이야? 너무너무 예쁘다.”
하얀 털에 황금빛 갈기를 가진 말이 레이라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몹시도 아름다운 말은 제 주인을 빼닮았는지 다정한 눈빛으로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트하를 닮아 순진한 것처럼 보여도 아주 사납다.”
“스티, 네가 스티구나.”
스티의 주인은 나트하였다. 레이라는 마법으로만 이동하는 그에게 말이 왜 필요할까 궁금해 했다. 레사는 가끔 있는 행사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이동할 때는 꼭 필요하다 답해 주었다. 덕분에 주인을 잘 못 만난 스티는 마구간에 갇혀 주인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일 때가 많다는 말도.
레사는 애마를 두고 저 혼자 나다니는 친우 대신 불쌍한 스티를 도맡아 관리해 주었다. 그것이 스티가 레사의 손에 끌려 나오게 된 이유였다.
스티는 기분 좋게 레이라의 손에 콧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이 예뻐라. 너 정말 애교가 많구나!”
“하.”
레사는 약간 질린 낯을 했다. 분명 놈은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티내며 투레질을 거칠게 하곤 했다. 메르세데스 마구간에서 기사단 마구간으로 옮겨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일 터였다.
레사는 늘 처박혀 있기만 하던 스티의 사정을 이해했기에 잘 구슬려 다독여 둔 상태였다.
“히히힝!”
“어머머, 우와! 나도 네가 좋은 것 같아!”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레이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눈으로 순진무구함을 연기하더니, 그녀의 뺨에 제 콧등을 비비고 있었다.
“정말 제 주인을 쏙 빼닮았지.”
“응?”
“아니다.”
허탈하게 웃은 레사는 그저 레이라가 좋으면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얄미운 제 친우 놈을 쏙 빼닮은 말이 레이라를 따라 녹스 가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은, 그땐 전혀 하지 못했다.
맑게 갠 하늘이 따사로운 빛을 흩뿌렸다. 말을 타고 외성벽을 지나 숲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날씨였다.
“엄청나게 내리네.”
“큰일이군.”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은 언제 먹색으로 물들었는지, 벌건 대낮임에도 금세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갑자기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을 피해 작은 동굴로 들어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동굴이라고 해 봤자 슬쩍 파이다 만 형태였기에 칼바람에 몸을 숨겨 주는 용도 외엔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금은 감지덕지했다.
“분명히 오늘은 날씨가 좋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마탑 놈들.”
으득 이를 간 레사가 하늘을 원망스레 쏘아보았다. 당장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나트하와 피오니안이 나란히 손을 잡고 레어 탐방을 하러 갔기 때문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렸다.
레사가 모닥불 안으로 나란하게 쪼개진 장작을 더 털어 넣었다.
“무슨 나무가 벽돌 같네. 봐도 봐도 신기해.”
“…….”
마나를 입힌 칼로 두부 썰 듯 나무를 잘라놓은 레사가 멋쩍어하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가운 바닥에 나란하게 썰린 커다란 나무판을 베고 앉은 스티와 레사의 애마 애쉬. 두 사람은 스티의 배에 기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레사는 오랜만에 둘이서 나온 데이트인데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속이 상했다. 코끝이 빨개진 레이라를 보자 마음이 더 아팠다. 괜히 끌고 나와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자연스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 정말 괜찮은데. 왜 자꾸 그런 표정을 지어.”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데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군.”
“또 말투 불편해졌다. 난 지금 이런 상황도 즐거운데. 언제 겨울에 이렇게 있어 보겠어.”
“그런가.”
“응.”
배시시 웃은 레이라가 레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손을 잡아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레사는 기회를 냉큼 붙잡았다. 장갑을 벗고 꽁꽁 언 작은 손을 녹여주자 레이라의 뺨이 발긋해졌다. 그는 정성스레 그녀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눈은 이제 내년에나 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치?”
“그렇지, 이제 막 새싹이 돋아나니까.”
“그러네. 새싹들이 다 얼어 버리는 거 아냐?”
자못 심각해진 그녀의 표정이 풀죽은 것처럼 보였다. 레사가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봄에 돋아난 새싹들은 강하니까,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응.”
그의 쓰다듬을 받은 레이라가 생기를 받은 풀잎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순간 레사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싹, 이었지.”
“응?”
레사에겐 그녀가 꼭 그 새싹을 닮았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일어선 작은 새싹.
그러나 그가 눈을 뗀 잠깐 새에, 푸르르고 여리기만 해 귀여웠던 잎은 쑥쑥 몸을 키워 제 색을 찾아 입었고 꽃망울을 터트렸다. 다채로운 색을 입은 꽃은 저에게 독일 것이 뻔해도 이리 해맑게 웃어 주었다.
사랑스러웠다. 형형색색의 꽃물이 도화지 위를 빼곡히 채웠다. 옅은 연둣빛이 덩그러니 새겨져 있던 그곳에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래, 레사는 그녀를 사랑했다. 못 견디게 향기로워진 지금의 그녀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레이라.”
“응?”
“네가 여리고 여린 작은 새싹을 닮았을 때, 나를 만났었지. 너는 아주 아름다웠지만, 나는 네가 곧 바스러질까 두려웠다.”
“……어?”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너를 더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
입을 앙다문 레이라가 레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같은 눈동자에 환한 햇살이 비춘 것 같았다.
“내 생각은 틀렸다. 감싸주고, 늘 지켜 주고, 더 큰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언젠가 네가 말했지. 봄을 기다리는 새싹이 아름답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지.”
술렁이는 가슴께에 손을 얹은 레이라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가 되돌렸다. 어쩐지 지금 그의 시선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붙잡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겁에 질린 것처럼 떨고 있었다.
레이라는 레사의 손을 꽉 쥐었다.
“내가 상처 주었으나 나만 모르는 시간 동안, 너는 자라났고 꽃을 피웠다. 더 나약해진 나를 보듬어 주고 안아 줄 정도로, 너는, 성장했지. 그것을 내 눈으로 지켜보았더라면, 네 시간에 함께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못난 남자였던 터라 그러지 못했지.”
“아, 아냐.”
“이리도 찬란하게 꽃망울을 터트릴 줄 알았더라면, 네가……, 내 생각처럼 마냥 가녀리며 지켜 주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았을까 떠올려보지만, 잘 모르겠다. 레이라. 나는 아직도 이리 나약하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네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네겐 여전히 모자란 사람이라서.”
“……레사.”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너를 당당히 품에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당장이라도 그런 사람이 되어 오겠다며 떠날 것처럼 구는 레사였다. 레이라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그 붉은 눈동자에 아픔이 들어차려는 것 같기도 했다.
‘또, 또 이렇게.’ 다시, 당신은 내 곁을.
“네가 도와준다면, 더 빠를 테지.”
“……어?”
“언젠가 꼭 그렇게 될 테니, 내게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어.”
“아…….”
다시 그때처럼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라는 흐려진 눈으로도 또렷한 그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언제고 지친 너를 안아 줄 수 있게, 힘든 네가 내게 기대어 쉴 수 있게 더 좋은 남자가 될 테니, 네 웃는 날에 함께할 수 있게,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아플 때도 너와 함께 할 수 있게……. 네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게 허락해 줘.”
스르륵 커진 그의 눈높이가 다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레사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하늘이 드러났다.
짙게 어둠이 드리웠던 하늘을 뚫고 빛 조각이 비산하고 있었다. 짧고 거칠었던 눈 폭풍이 그친 하늘은 어느새 환한 햇살을 몰아오고 있었다.
레사는 무릎을 꿇고 여전히 제 손을 꽉 잡은 그녀의 손에 기껍게 입을 맞추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라.”
광휘를 휘두른 레사의 웃음이 레이라의 망막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모자라지만, 저를 받아 달라는 남자의 프로포즈에 레이라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레사의 청혼을 받은 레이라는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를 반기며 소파에 앉혀 둔 네 남자는 그녀의 앞에 줄줄이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레이라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네 남자가 제 앞에 늘어놓은 것들을 훑어보았다.
레이라는 늘 행복을 꿈꿨다. 온 세상이 따사로운 햇살처럼 늘 밝았으면 했고 가끔 부는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일들이 가득했으면 했으며 막 돋아난 새싹처럼 보드라운 사람들이 많았으면 했다. 그렇게 그녀는 봄이 가득한 세상을 꿈꿔 왔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 어둠이 찾아온 순간, 꿈은 허망하게 부서졌다. 파스텔로 칠한 그녀의 세상에 단 한 사람이 빠진 것 뿐인데 그녀는 온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흑색으로 물든 세상은 못나게 비틀리고 어그러졌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따로 고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세상은 전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고 꽃향기를 즐길 여유도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제게 찾아온 어둠을 받아들였다.
그림자에 숨어 가만히 제 몸을 숨긴 그녀의 세상에 누군가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색을 잃은 세상에 푸른빛이 새겨졌다. 쩍쩍 갈라 메마른 들판에 금빛이 돋아났다. 그렇게 작은 싹이 돋아난 마음에 살랑이는 예쁜 바람이 불어왔고 새파랗고 처연한 물이 흘렀으며 붉은 태양이 장난스레 떠올랐다.
차곡차곡 새겨진 마음은 어느새 또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레이라는 다시 행복을 꿈꿀 수 있었다.
“예식은 어디서 하고 싶나? 내 레어를 치워 두긴 했다만,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군.”
“드레스는 내가 골랐어! 50벌 정도 만들고 있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골라!”
“빨리 드레스부터 골라주시겠습니까? 보석은 그다음이라고 하더군요.”
“안 돼요! 식장부터 골라야 해요. 청첩장에 마나 수식을 채우려면 오래 걸린단 말이에요.”
제 마음에 존재할 이는, 단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레이라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서히 다가와 제게 스며든 이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제게 주었다.
“왜, 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레이라의 눈꼬리에 네 개의 입술이 각각 닿았다 떨어졌다. 빙긋 웃은 에틸은 맑게 갠 하늘 같았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따로 결혼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거나…….”
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버들잎처럼 보드라운 나트하의 손이 레이라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럼 저희가 준비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레이라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늬바람처럼 맑게 웃은 피오니안이 그녀의 눈물방울을 훔쳐 갔다.
“우릴 걱정할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군. 다음은 언제나 있을 테고, 우린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레이라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장난스레 그 입을 닫아준 베르가 그녀의 볼에 강아지처럼 제 얼굴을 문질렀다.
“좋지? 그냥 고맙다고 하면 돼. 우린 그거면 되니까.”
“……고마워. 고마워요, 다들.”
다시 퐁퐁 솟아난 눈물을 보며 네 남자가 같은 미소를 그렸다. 눈물을 닦아주고 사랑을 속삭이고 등을 쓰다듬고 젖은 뺨에 닿아 오는 입술에 애정이 그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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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공작은 새하얀 대리석에 이름 모를 꽃이 새겨진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꽃이었는데, 꽃잎마다 각각 다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녹스 공작이 바라보는 것은 그 화려한 꽃잎의 자태가 아니었다. 꽃잎 사이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요정. 그 요정이 어쩐지 제 딸을 닮았다는 것이 신기해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녹스 공작을 알아본 메르세데스 공작이 그에게 뽀르르 다가왔다. 그는 제 사돈이 저가 다가온 줄도 모른 채 무엇을 그리 빤히 보나 싶었다.
“음?”
메르세데스 공작의 표정도 녹스 공작의 표정과 비슷해졌다.
“정말, 대단하군.”
“이 비슷한 것이 적어도 20개는 있네. 기둥마다 이런 것을 만들어 놓았더군.”
“식장을 꾸민 것이 누구라고 했지?”
“타이니아스님이네.”
“…….”
할 말을 잃은 두 공작이 으리으리한 예식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조금 전과 사뭇 다른 느낌의 시선이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을 이리저리 살폈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을 곳까지 세심하게 꾸민 공간이었다.
황궁에도 없을 법한 커다란 샹들리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빛의 각도와 세기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었다. 샹들리에를 투과한 빛은 무지개색을 입고 화려하게 핀 꽃을 형상했다. 온 식장에 가득 피어난 꽃은 축제를 알리듯 위풍당당하기까지 했다.
커다란 백색 대리석 기둥은 금빛 월계관에 감싸여 있고, 기둥 주위는 하얀 튤립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테이블은 백색 대리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버진로드에는 크리스털 장식이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아치형의 식장 입구는 레이라가 좋아하는 봄을 닮은 싱그러운 풀과 꽃으로 가득 했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시선이 작은 들꽃을 엮어 청아함을 한껏 뽐내는 꽃 장식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그 꽃 장식을 화병에 꽂아 테이블 위에 얹어 두며 하나같이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커트러리를 정리했다.
“무슨 박물관에 온 것 같군.”
“저 접시는 대체 무엇으로 만든 거지?”
“내가 알겠나. 그분이 아시겠지.”
“…….”
제 자식들의 결혼식임에도 준비에 손끝 하나 참여하지 못한 두 남자가 멀거니 서서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내 손이 필요치 않았을 것 같기는 하군.”
“나도 마찬가지네.”
“이리 화려한데도, 과하지 않고 고상하게만 보이니 참 이상한 기분일세.”
서로를 보며 그저 허허 웃은 두 사람이 하나둘 등장한 하객을 보며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화려한 공간에 기가 팍 죽은 하객들은 숨소리마저 고요했다. 이리저리 오가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열심히 결혼식에 든 비용을 계산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표정으로 자리했다. 뭐 하나라도 상처 낼까 싶어 꼿꼿한 자세였다.
모두가 착석하자 화려한 연회장에 어울리는 웅장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토끼 비슷하게 생긴 하얀 동물이 사방에서 나타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신비한 광경에 시선이 분산될 때 피오니안과 베르, 나트하, 에틸이 순서대로 등장했다.
검은색 턱시도를 갖춰 입은 네 남자는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소맷단이나 단추 같은 포인트 장식의 색상이 달랐다. 네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제 자리를 찾아갔다.
다이아가 박힌 백금색 단추로만 장식한 턱시도를 깔끔히 차려입은 피오니안이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단상 위로 자리했다. 그가 반만 묶어 작은 다이아몬드 핀으로 고정한 머리를 한 번 매만졌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베르는 어깨에 붉은색 숄 장식을 덧댄 검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났다. 강아지처럼 흐트러트린 머리칼과 제복처럼 각이 잡힌 턱시도의 조화가 예술이었다. 손에 육각형 보석함을 꼭 쥔 그가 피오니안의 오른편에 섰다.
단상의 왼쪽 끝, 기둥 옆으로 자리를 잡은 에틸은 식장을 지키는 기사처럼 꼿꼿한 자세였다. 포마드로 깔끔히 넘긴 머리와 은빛 덩굴이 수놓아진 턱시도를 입은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비슷한 모양의 금빛 수가 놓인 턱시도를 입은 나트하는 에틸의 옆자리에 섰다.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그는 반짝이는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분산되었던 시선이 네 남자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명백한 착각이었다. 소리 없는 소란을 개의치 않은 피오니안이 입을 열어 시작을 알렸다.
“신랑, 입장.”
붉은색 태양이 수놓인 검은 턱시도를 입은 레사가 곧 구름을 걷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피오니안이 가까이 다가온 레사의 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레사 메르세데스, 그대는 오늘 반려를 맞이하려 하나?”
“네, 그렇습니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신랑이로군.”
하객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함께 웃은 피오니안이 아련한 눈으로 긴 버진로드의 끝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개를 숙인 그가 다시 방긋 웃었다.
“신부, 입장.”
버진로드에 나란히 서 대기하던 털복숭이 토끼들이 힘차게 노래를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동그란 천장을 타고내리며 덩굴처럼 흘렀다.
녹스 공작의 손을 맞잡은 레이라가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드레스는 작은 핑크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어깨를 드러내고 허리 아래부터는 퍼진 형태의 드레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강조했다. 다섯장의 꽃잎을 그리는 다이아몬드가 치맛단 아래로 떨어지며 작은 꽃잎을 피우고 또 피워 냈다. 등허리를 타고 내려 바닥을 끄는 긴 치맛단에 피워진 꽃잎은 봄 그 자체였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칼은 풍성한 꽃망울 같았고 드러난 목은 청초한 사슴 같았다.
신부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기저기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감에 가득 찬 레사의 표정과 똑같아진 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떨떠름한 표정을 한 녹스 공작만이 버진로드를 더 천천히 걷고자 딸아이의 손을 잡아당겨 시간을 끌곤 했다.
찾아오지 말아 달라 비는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오는지, 어느새 레사의 코앞까지 다가선 녹스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기 싫은 것을 억지로 넘기듯 눈까지 질끈 감은 그가 레사의 손에 레이라의 손을 얹었다.
“잘 부탁하네.”
“꼭 행복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보아온, 평범한 결혼식과 비슷했다.
하객들은 그저 신랑들이 멋지다, 신부가 아름답다, 녹스 공작이 주책이다, 식장이 아주 어마 무시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생각이 곧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피오니안 님 너무 멋있지 않나요?”
“저는 페르세나 백작이…….”
“러스티 경도 만만치 않아요.”
“저기, 저분은 누구시라고 했죠? 저는 저분이 취향인데.”
“조용히 좀 해 봐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요!”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에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신랑 신부가 사랑의 서약을 앞두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를 향해 사랑의 서약을 맹세하라.”
여전히 황홀한 표정의 레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절한데 긴장이 그득한 표정이 살짝 애처로웠다.
레이라가 슬쩍 웃으며 그의 손에 제 오른손을 얹었다. 산뜻한 바람처럼 얹힌 손을 꽉 쥔 레사가 보드라운 장갑을 벗겼다.
“레이라.”
긴장감에 꼴깍이는 목울대가 선연했다. 레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손까지 떨고 있었다. 레이라는 비슷한 긴장감을 느끼며 숨을 집어삼켰다.
검은 장막처럼 펼쳐진 속눈썹이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햇살이 가득한 하늘처럼 푸른 눈빛이 레이라를 응시했다.
“당신의 곁에 다정히 손을 잡은 채 가시밭길을 함께 헤치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당신을 따스히 마주 안고 퍼붓는 비를 함께 맞아 줄 가족이 되겠습니다. 서로의 뒤를 지탱해 머무른 어둠을 비출 빛이 될 것이며.”
레사는 빙긋 웃었다.
“언제든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앞에 물러섬 없이 나아가 가시밭길을 대신 걷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당신을 단단히 끌어안고 퍼붓는 비를 대신 맞는 우산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뒤를 지탱해 머무른 어둠을 비출 거울이 될 것이며,
언제든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검이 되겠습니다.
정해진 서약의 말 비슷한 무언가가 튀어나오자 좌중이 더욱더 고요해졌다. 그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을 숨기며 레이라의 말간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무어라 할까.
“신부는, 신랑을 향해 화답을 서약하라.”
환하게 웃는 레사의 얼굴에 레이라는 흔들거리는 눈빛을 결연히 떴다.
“……레사, 함께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도록, 당신 곁에서 재잘재잘 노래하는 새가 될게요. 비가 내리는 풍경에 어울리는 달콤한 노래가 되고, 어둠이 비춰도 외롭지 않게 따뜻한 그림자가 될게요. 다시 한번, 당신의 봄이 될게요.”
당신의 노고를 위로할 향기로움을 피우고
지친 마음을 녹여 줄 보드라운 꽃잎이 되겠습니다.
어둠마저 도려내 줄 매혹적인 붉은 꽃망울을 피운 채
때로는 당신을 도울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만 피는 장미꽃이 되겠습니다.
화답하듯 새어 나온 말 역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도록 고요한 하객석에 하나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모두 두 사람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석처럼 맺힌 눈물이 레사의 손등 위로 똑 떨어졌다.
넋이 나가 버린 그는 언젠가 제 입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때 그녀가 짓던 표정과 그날의 향기, 날씨 따위가 연달아 떠올랐다.
아직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전, 산뜻한 봄날이었다.
바람을 타고 풍겨 오는 꽃향기와 풀 내음이 향긋했다. 들꽃을 따는 그녀를 구경하며 나른히 턱을 괴고 있을 때였다. 예쁜 들꽃을 땄다며 웃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늘 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도도도, 귀여운 다람쥐 같은 발걸음이 사랑스러웠고. 발간 뺨 가득한 설렘이 또 사랑스러웠다. 툭 터져 버린 마음이 기다렸다는 듯 흘러내렸다.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커다란 눈망울이 동그랗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처럼 부지불식간에 새빨개진 얼굴이 제 시선을 휙 피했다.
“……언제부터?”
새침한 말투가 달달 떨려 왔다. 레사는 그것이 즐거웠다.
“글쎄, 함께 길을 걷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인가. 웃는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재잘대는 네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지. 항상 그것을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
“전엔 날씨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햇살이 반짝이는 날에는 네 웃는 얼굴이 떠올랐고, 비가 내릴 때마다 우울해할 네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디서 비를 맞고 다니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
“그게 뭐야.”
“비가 오는 날엔 네게 달콤한 케이크를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봄에 꽃이 피면 함께 산책하고, 더운 여름날엔 복숭아 티를 나눠 마시고. 가을엔 낙엽이 지는 붉은 숲속을 함께 거닐고, 눈이 내리면 코코아를 나눠 마시고 싶다.”
“……레, 레사.”
들꽃, 말랑한 복숭아, 여름날 얼음이 가득 든 복숭아 티, 겨울날의 코코아, 마시멜로를 넣은 쿠키, 아몬드를 얹은 아이스크림, 하얀 튤립, 바닐라 향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좋아졌다. 단 것을 싫어하는 데도 코코아가 달콤한 것이 좋았고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복숭아 티가 상쾌하기만 했다. 그때는 그것이 왜 그런 줄 몰랐으나, 지금은 알고 있었다.
“내 봄이 되어 줘. 레이라.”
레사가 레이라에게 했던 첫 번째 고백이었다. 물론 두 번, 세 번째도 있었다. 레이라가 레사를 받아 준 것은 무려 여섯 번의 고백 끝에 이뤄 낸 쾌거였으니까.
그는 그녀가 과거의 일들을 다 기억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라는 눈물이 그득한 눈을 하고서도 환히 웃었다. 레사가 레이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힘찬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두 사람을 향해 손이 빨갛게 되도록 손뼉을 쳐 준 이들은 아직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내곤 했다.
어느덧 단상에 전부 모여 두 사람을 지켜보던 네 남자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질투는 멀리 미뤄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나 보다.
“행복해 보여요.”
“그래.”
“가끔은 제가 레사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해요.”
“그 정돈 아니지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레이라를 처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보았지.”
“그게 그거죠, 뭐.”
쓰디쓴 약을 입에 한 움큼 털어 넣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나트하와 피오니안이 서로 마주 보며 픽 웃었다.
입에 족쇄를 채운 것처럼 한마디도 없던 에틸이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 분은 그나마 나은 겁니다. 저는 그때도 그녀와 함께였습니다.”
세 남자의 시선이 에틸에게 모여들었다. 공허한 미소를 지은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랬다. 세 남자의 희망과 달리 에틸은 레이라가 레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 때에도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를 그때도 사랑하고 있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때도 제 마음은 지금과 같았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에틸의 마음은 여전했다.
“왜 레이라에게 네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지?”
“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멍청하긴.”
침묵을 깬 것은 베르였다.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끌끌거린 베르가 에틸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레이라의 옆에 설 자격이 없다면, 지금은 어때?”
“솔직한 말로는, 지금도.”
“정말 멍청하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내가 알기론 녹스 공작은 너를 사위로 들일 생각이 가득했던데, 맞지?”
“그랬던 것 같더군.”
어째서인지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에틸 대신 피오니안이 긍정했다. 얄밉게 고개를 주억거린 베르가 에틸을 향해 말했다.
“그 자격이란 건 누가 주는 건데? 인간으로 치면 대단한 신분을 가진 저놈조차 싫다고 거절한 공작이 너를 사윗감으로 점찍었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런데 네가 왜 자격을 운운해?”
“…….”
“네가 레이라에게 구원을 받았든 어쨌든, 레이라는 레이라야. 레이라는 너를 그저 에틸 페르세나로 본다고. 지금도 그러니까 과거에도 그랬겠지. 너는 그냥 욕심을 부릴 용기가 없었던 거야.”
“……맞습니다.”
“이제 나도 레이라의 반려 중 한 명이니까 하는 말인데. 어차피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 와 후회한들 소용없겠지만, 나는 네가 저놈보단 그녀의 곁에 어울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너는 너무 바보 같았어.”
다시 고개가 빠지도록 끄덕인 베르가 제 말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며 피오니안이 웃었고 나트하도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각도 그렇다.”
“저도요.”
에틸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겁니까.”
이제는 정말 웃는 얼굴이 익숙해진 에틸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에틸은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제게 자격이 있다고 말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에 말을 꺼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베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베르, 철들었나?”
“뭐래?”
피오니안의 말에 정색을 한 베르가 괜히 에틸을 쏘아보았다. 나트하가 진정하라는 듯 베르의 등을 도닥였다.
“이제 파티를 즐겨야 할 시간이에요.”
사랑의 서약을 끝마친 두 사람이 반지를 나누어 낄 차례였다. 나트하의 손짓에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환한 빛이 레사와 레이라의 주위만 비추자 곧 네 남자가 단상 아래로 내려섰다.
마법처럼 레사의 뒤로 선 네 남자와 함께 레사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는 베르가 쥐고 있던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 ✲ ✲
같은 반지를 나누어 낀 여섯 남녀가 동그란 언덕 위를 걸어 올랐다.
해 질 무렵이라 노을이 짙게 깔린 하늘이 따스한 주홍빛을 뿌렸다. 작고 귀엽게 돋아난 풀잎과 꽃송이가 숨죽이며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때였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짙은 봄 냄새를 몰아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여자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서 길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단을 잡아 주던 남자가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양손을 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힘듭니까?”
“아니, 풍경이 너무너무 예뻐서.”
구두를 신은 그녀가 불편할까, 제 신발을 벗어 주며 맨발로 뒤따라 걷던 남자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신발이 불편해?”
“아니아니, 베르는 괜찮아?”
“응. 이 정도쯤이야.”
저 멀리 그들을 앞장서 걷던 두 남자는 벌써 언덕 위에 도착해 푹신한 소파를 만들어 냈다. 커다란 소파는 여섯 사람이 앉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커다랬다. 그 소파에 척 걸터앉은 두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종종걸음을 했다. 다람쥐처럼 날듯이 뛰는 그녀의 손을 아직 놓지 못한 두 남자와 그녀의 뒤에 선 남자가 덩달아 걸음을 재촉했다.
금세 올라온 언덕 위로 낮은 노랫소리가 흘렀다. 붉은 노을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봄 들판이 아름다웠다. 따사로운 햇살을 듬뿍 매단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정말, 행복해!”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온 여자의 진심이 그녀만 바라보고 있던 남자들에게 행복을 피워 냈다. 나직한 음악 소리가 좋았고 적당히 부는 바람마저 완벽한 날이었다.
여자, 레이라는 다섯 남자의 얼굴을 죽 훑어보다 제 얼굴을 감쌌다. 붉어진 얼굴이 석양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란히 앉은 동그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가 빈자리를 메우라는 듯 손짓을 했다. 웃으며 그녀가 하라는 대로 자리를 옮긴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제 치맛단을 예쁘게 정리한 뒤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진정하라는 듯 제 가슴을 도닥거린 그녀가 그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놀란 다섯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손을 뻗으려 했다. 다섯 개의 손을 부드럽게 거절한 그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가 한 손을 뻗었다. 역광을 받아 어둡기만 해야 할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푸르고 너른 들판에 핀 작은 꽃송이 같은 그녀가 말했다.
“저와 영원을 함께해 주시겠어요?”
간절하게 핀 금빛 꽃망울에 넋을 뺀 다섯 남자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환한 빛이 내리쬐는 오후에 그들의 표정을 전부 눈에 새긴 레이라가 꽃망울을 터트리듯 환하게 웃었다.
“네?”
장난이 섞인 귀여운 채근에 더듬더듬 입을 뻐끔대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들이 한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다섯 가지 색상을 껴안은 붉은 노을이 어느덧 그들을 비슷한 빛으로 물들었나 보다. 하나 된 대답처럼, 그들은 표정마저 비슷했다.
행복을 담뿍 끼얹은 그녀의 하루에 새로운 행복이 하나 더해졌다. 레이라는 다시 손을 마주 잡은 채 행복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