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6/26)

에필로그

차가워진 날씨 덕분에 헐벗은 레이라를 껴안은 레사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도 모르게 홀려 바깥에서 그녀를 안은 것이 실수였다.

쌕쌕거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는 레이라를 향한 그의 눈빛에 짙은 죄책감이 묻어났다.

“레이라, 레이라.”

“으응…….”

“하.”

따끈따끈 열이 나는 몸이 가엽기 그지없었다. 그녀에게 꽁꽁 싸인 담요를 더 단단히 감싼 그가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복도 모퉁이를 도는 다급한 발걸음이 나른히 벽에 기대 그림처럼 책을 읽던 남자와 마주쳤다.

“아, 베르 님.”

“응?”

“레이라가, 열이 납니다.”

베르가 휙 집어던진 책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애벌레처럼 담요를 꽁꽁 두른 레이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뜨끈뜨끈, 열이 나는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실 만져 보지 않아도 열이 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왜 이래?”

“……밖에서, 그.”

“하…….”

이제 조금은 레사를 편하게 생각하는 베르의 눈빛이 한심함을 머금은 채 다가왔다. 레사의 발끝부터 차례로 훑은 떨떠름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피오니안을 불러올게, 너는 레이라를 방으로 데리고 가.”

“예.”

고개를 주억인 레사가 날듯이 발을 놀렸다. 추위를 타는 그녀를 걱정했는지 장작을 한가득 넣어 활활 타는 벽난로가 마음에 들었다.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방에 레이라를 눕힌 레사의 눈에 걱정이 그득했다.

흘러내린 땀을 닦고 또 닦으며 한숨을 서른 번쯤 내쉬었을 때 허공이 쩍 갈라지며 나트하와 피오니안, 베르, 에틸을 뱉어 냈다.

“갑자기 열이 난다고?”

“……예.”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레사가 레이라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자리를 비켜 주려는 의도였는데 그것이 싫다는 듯 그녀의 손이 그를 따라왔다.

정신이 들었나 싶어 눈이 동그래진 레사가 레이라를 내려다보았다.

“으으응…….”

무어라 웅얼거린 그녀가 따끈한 숨을 훅 뱉었다. 야릇한 느낌이 도는 숨소리에 고개를 갸웃한 레사가 피오니안을 향해 간절한 눈을 했다. 피오니안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픈 게 아닌 것 같은데?”

“꼭, 저주에 걸렸던 그때 같아요.”

피오니안과 나트하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에틸은 레이라가 눕혀진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그녀의 몸에 둘둘 둘린 담요를 벗겨 냈다.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배배 꼬며 신음을 내뱉은 레이라가 제 손으로 가슴을 더듬거렸다.

“흐응, 아아…….”

“……뭐야?”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레사와 베르가 화들짝 물러서며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레이라는 에틸의 손을 끌어당겨 제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반대쪽 레사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저 멀리 날아간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지만, 레이라는 제 몸속에 들끓는 욕망을 어떻게든 표출해야 했다.

그녀는 뇌까지 자글자글 끓어 익어 버리기 전에 이 거대한 열기를 식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는지 바르작대는 다리가 가엾게 비틀거렸다. 딱 달라붙은 허벅지 사이로 애액이 퐁퐁 샘솟았다.

“으으응, 빨리, 빨리…….”

에틸의 손을 끌어당겨 그의 어깨춤에 고개를 비빈 그녀가 애처롭게 말을 뱉어 냈다. 띄엄띄엄 내뱉어진 말에 가득 들어찬 습기가 그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 같았다.

에틸은 멍한 표정으로 피오니안을 바라보았다.

“어떡합니까? 왜 이런.”

“어쩌긴, 일단 풀어 주어야겠지.”

타이핀을 풀고 제 넥타이를 느슨히 풀어 헤친 베르가 침대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 긴 로브를 벗어 던진 나트하도 합세했다. 피오니안이 고개를 흔들며 제 셔츠 단추를 풀었다.

망부석처럼 침대 곁에 쭈그려 앉은 레사만 멍하니 레이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레사, 뭐 해?”

“다섯이나 필요할까요?”

“그냥 닥치고 올라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기회라니요?”

베르의 대답에 의문을 가진 것은 레사가 아닌 나트하였다.

“저주를 풀 기회.”

오뚝 솟은 레이라의 정점을 입에 문 베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트하가 환한 얼굴로 레사를 휙 돌아보았다.

레사는 제 가랑이에 붙어 있을 로이를 떠올렸다. 레이라의 근처에 머물 때만 제 사타구니에 달라붙어 있는, 제 것이지만 제 것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저주가, 풀릴 수 있는 거였습니까?”

“모르지. 그런 역사는 기록된 적이 없거든. 그런데 이상하잖아. 갑자기 이렇게 발정할 리는 없는데. 더군다나 네 번째 차례도 아니고, 다섯 번째 차례도 아닌데 말야.”

“이게 끝이 아니면 어떡합니까? 저주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면요?”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간 유두에 입을 딱 붙였던 베르가 미간을 구겼다. 그가 아쉬움에 혀끝을 빙글빙글 굴린 뒤 입을 뗐다.

“저주가 다시 시작된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 심각한 표정 그만 짓고, 빨리 올라와.”

아직도 미간을 구긴 베르가 대답도 듣지 않고 레사를 번쩍 들었다.

허공에 둥둥 뜬 상태로도 레이라를 향해 가엽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 그가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미 옷까지 마법으로 벗겨 버렸는지 베르는 제게 관심을 지운 상태였다. 레사는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마신 뒤 난잡하게 달라붙은 이들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레이라는 혼몽한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활활 끓어오르는 화산처럼 뜨거워진 몸이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가려웠다.

가슴을 핥고 빠는 입술, 퐁퐁 솟은 눈물을 핥고 뺨에 키스를 남기는 입술, 가랑이를 벌린 뒤 꿀물이 샘솟는 그곳을 핥고 더듬는 손길, 등허리를 매만지며 가느다란 간지러움을 주는 손길, 가슴을 가득 움켜쥔 뒤 유두를 튕기는 손길.

전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희미했다. 그들 때문에 조금 걷힌 열기 속에서 다른 열기가 피어올랐다.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시원한 애무가 다시 뜨거운 불길처럼 타올랐다.

에틸은 레이라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얹어 둔 채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몸이 가여워 귓가를 매만지는 손길이 산뜻하기도 했다.

레이라는 그것이 배려가 아니라는 것처럼 고개를 비틀었다.

잠시 멈칫거린 에틸이 그녀의 목 뒤에 다시 베개를 받쳐준 뒤 눈가에 키스를 뿌렸다. 귓가를 핥고 뺨을 훑고 입술을 삼켰다.

“으으응.”

만족스레 터진 신음이 누구 때문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가슴 한쪽에 자리를 잡은 나트하는 유두를 열렬히 핥고 빨았다. 반대쪽에 자리한 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아파 보일 정도로 붉게 도드라진 유두는 잠깐 드러났다가도 곧 새빨간 입술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커다란 손이 레이라의 다리를 벌렸다. 이미 흠뻑 젖은 그곳에 손가락을 문지른 피오니안이 입술 끝을 바짝 세웠다.

“흐으응, 으응.”

그가 클리토리스를 가볍게 문지르자 레이라의 엉덩이가 발발 떨렸다. 콩알보다 작은 그것이 제 몸을 바짝 세운 채 쾌감을 토로했다.

피오니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춥, 추웁. 그가 오아시스를 찾은 나그네처럼 게걸스레 음부를 빨아 당겼다. 달짝지근한 애액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샘솟았다. 피오니안은 미끈한 그것을 핥아 목구멍 뒤로 넘기고 혀끝을 내밀어 클리토리스를 핥았다.

긴 손가락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질구를 파고들자 레이라의 허리가 발발 떨렸다.

레사는 그제야 나타나 레이라의 다리에 입술을 붙였다. 피오니안이 자리를 슬쩍 옆으로 비켜 주며 혀를 떼어 냈다. 한계까지 솟은 클리토리스는 여전히 그의 손에 빙글빙글 굴려지고 있었다.

레사가 손을 뻗어 레이라의 질구를 간질였다. 이미 제 욕정을 그녀의 안에 뿌렸음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깨끗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금세 잊어버렸다.

열 개의 손과 다섯 개의 혀가 주는 쾌감은 아련히 흩어진 시야 사이로도 팡팡 터지는 폭죽을 목격할 만큼 황홀했다.

절정이 오고 또 찾아왔다.

레이라는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을 느끼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저를 그만 괴롭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렵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아래를 무언가로 채워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모든 생각을 잡아먹었다.

레이라는 제 입술을 삼킨 에틸을 향해 절절한 눈빛을 했다. 할 말이 있냐는 것처럼 고개를 떼어 준 그가 제 귀를 그녀의 입술에 붙였다.

“빨리, 흐응, 이제 그만.”

“……밑이 간지럽습니까?”

“응, 으으응, 빨리…….”

픽 웃은 그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이미 다 들었는지 네 남자의 시선이 열렬하게 부딪쳐 왔다. 에틸이 어깨를 으쓱이며 제 하체를 레이라에게 디밀었다.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웃은 그녀가 힘겹게 돌아누우며 에틸의 선단 끝을 입에 물었다.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제 것을 삼키는 그녀를 향해 곱게 웃어 주었다.

“착하네요, 레이라.”

훌러덩훌러덩 남은 옷을 벗어 재낀 네 남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짜증이 나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피오니안이 베르와 자리를 바꾸었다. 흉흉하기로는 첫 번째 일 그의 것은 언제나 차례가 밀리기 일쑤였다.

이미 한차례 레이라와 관계를 나눈 레사도 마찬가지로 나트하와 자리를 바꾸었다. 두 사람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레이라의 손을 쥐어와 제 것을 쥐여 주었다.

나트하가 엎드려 누운 그녀의 하체를 일으키며 제 몸을 구겨 넣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제 하체를 뭉근히 그녀에게 문지르며 자리를 잡은 그가 손목을 세웠다.

레이라의 탱탱한 엉덩이를 뭉개듯 주물럭거리던 베르가 그녀의 엉덩이를 꾹 눌렀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질구를 파고든 나트하의 것이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베르는 큰 것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란다는 듯 빠끔거리는 구멍을 검지로 문질렀다.

이미 레사인지 피오니안인지 모를 누군가가 풀어두었는지, 말랑거리는 입구가 베르의 검지를 쏙 깨물었다.

“욕심이 너무하잖아. 저 큰 걸 받아먹고도 더 먹고 싶어?”

“으응, 으읏.”

기가 막힌다며 허허 웃은 베르가 제 검지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의 말에 피오니안이 픽 웃었다.

“늘 욕심을 부리면서도, 먼저 지쳐 버리는 것이 매력이지.”

“귀엽잖아요.”

피오니안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인 나트하가 허리를 잘게 털었다. 꽉 조이며 제 것을 문 질 벽이 오물오물 씹어 삼키듯 움직임을 조장하고 있었다.

베르는 제 중지와 약지까지 알뜰하게 삼킨 애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문질렀다. 조금씩 가열해진 나트하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삽입을 조금 미루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새빨간 혀를 내민 악마가 그녀의 치부에 제 얼굴을 디밀었다.

악마의 작은 속삭임처럼 느긋하고 귀여운 움직임은 곧 제가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는 듯 거칠어졌다. 혀끝을 세워 구멍을 후벼 파고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 끔찍이도 좋았다.

레이라가 교성을 내질렀다.

“하아앙! 으읏.”

레이라는 툭 뱉어진 눈앞의 물건에 볼을 축축이 비비면서 몸을 떨었다.

다시 입을 벌려 에틸의 것을 삼키며 레이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차 터진 오르가슴은 그간 버티던 것보다 강렬했다.

바르르 떨리는 허리가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은 베르가 몸을 일으켰다. 잘 익은 자두처럼 붉게 익은 귀두가 작은 구멍을 뚫어 버릴 듯 부딪쳐 왔다.

혹여 상처라도 생길까, 험악한 허리 짓에 비해 삽입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트하의 움직임에 저를 맞춘 베르는 그녀가 적응할 겨를도 없이 춤을 추듯 허리를 문지르고 튕겼다.

들썩임을 멈추질 못하는 몸이 파르르 떨렸다.

레이라는 황홀에 저를 내던져 버린 것처럼 커다란 쾌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무게에 떠밀려 에틸의 것이 목구멍에 콱 박히는 것까지 쾌감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숨이 막혀 뿌옇게 흐린 머릿속으로 번쩍번쩍한 쾌감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가녀린 몸이 떨리고 온갖 구멍마다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자신의 분신을 박아 넣은 남자들의 허리가 빠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작은 손에 커다란 흉기를 쥐여 준 두 남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터트려 버릴 것처럼 꽉 쥐였다가 미안하다는 듯 부드럽게 흔드는 것이 여우 같았다.

참지 못하고 저를 터트려 버린 에틸과 나트하가 이를 악물며 허리를 털었다.

“으윽.”

“하.”

“으으음, 으읏.”

신음을 뱉으면서도 에틸의 정액을 꼴깍꼴깍 받아 마신 레이라가 입꼬리를 야살스레 끌어올렸다. 벌게진 에틸의 얼굴이 무언가를 꾹 참듯 일그러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받아 마신 레이라가 귀두를 쪽 빨며 그를 뱉어 냈다.

“하앗, 응, 맛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배시시 웃는 얼굴을 당장이라도 더럽히고 싶었다. 에틸은 제 충동을 내리누르며 비스듬히 웃었다. 그가 허리를 물리자 그의 빈자리를 차지한 피오니안이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빨갛게 익은 볼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그렇게 맛있었을까.”

“응, 으읏, 피오니안도 줘.”

다시 아 하고 벌려진 입에 나지막이 웃은 피오니안이 제 것을 물려 주었다.

그들의 정사가 수없이 이어졌다. 나트하의 빈자리를 차지한 레사, 베르의 빈자리를 차지하며 레사와 자리를 바꾼 에틸, 다시 빈자리를 차지하는 누군가.

레이라는 절정에 몸을 수없이 떨면서도 계속해서 그들을 욕심내고 탐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를 탐하는 다섯 남자는 그녀와 달리 욕심을 내리눌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끊임없이 일어선 욕정을 숨긴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뽀얀 나신을 하얗게 물들인 끈적한 액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액은 그들의 진득한 욕망을 대변하듯 계속해서 그녀의 몸 위로, 안으로 뿌려졌다.

욕망에 몸을 맡긴 그들은 어느새 처음과 같은 포지션을 하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를 동그랗게 문질러 다독이던 레사는 로이가 제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힘겹고 어딘가 부끄러웠던 저주가 풀린 것도 깨달았다.

그것은 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움에 에틸의 것을 깨물어 버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겹겹이 걸어 준 회복 마법 덕분인지 그녀는 여전히 쌩쌩했다.

씻은 것처럼 사라진 몽롱한 열기는 그녀가 사랑하는 다섯 남자들의 것이 남아 여전했지만, 그녀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트하의 옆구리를 짚은 채 고개를 레사에게 돌린 그녀가 힘겹게 입을 뗐다.

“레사, 읏, 사라졌어.”

“……그래. 돌아왔네.”

멀뚱멀뚱 두 사람을 바라보며 행위를 이어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던 네 사람이 퍼뜩 눈을 모았다.

“저주가 풀렸나?”

“풀린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힘이 쭉 빠진 레이라는 나트하에게 폭 기대 안겼다. 그녀의 등을 다정히 보듬어 준 나트하가 짓궂게 웃었다.

“타이밍이 조금, 그렇네요. 좋은 건 확실한데,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

아직 팽팽한 제 것을 끝까지 삽입한 베르가 나트하의 말을 이었다. 다들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배시시 웃던 레이라는 제 손아귀에 힘을 주어 잡은 것을 문지르고 허리를 튕겼다. 바르작대는 귀여운 몸짓은 곧 커다란 유혹처럼 비쳤다. 입을 크게 벌린 그녀가 에틸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해, 다시 안 깨물게, 아.”

“하, 참.”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은 에틸이 제 것으로 그녀의 입안을 채워 주었다. 다시 시작된 정사는 언제 멈추었냐는 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 ✲ ✲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솜털 같은 커다란 눈송이가 하늘하늘 허공을 노니는 모습은, 추운 날씨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신기한 기분이 들게 했다. 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낙엽을 쓸던 정원사의 노력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꽉 들어찬 눈송이가 대신 알아주었다.

소복소복 보드라운 눈이 쌓인 길. 하얀 옷을 입은 동그란 아치와 담장. 하얀 모자를 선물 받은 나팔 부는 천사상. 새하얗게 칠해진 정원을 눈으로만 즐기던 피오니안이 코코아를 휘휘 저으며 입김을 불었다. 진득하게 녹은 마시멜로가 끈적하게 녹아들었다. 그는 레이라에게 주기 위해 차를 식히는 중이었다.

어째선지 봄이 오듯 따뜻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루아침에 겨울이 되어 버린 제국은 온통 눈 천지가 되어 버렸다. 휙휙 바뀌는 가면처럼 순식간에 뒤바뀌는 제국 날씨는 이처럼 겨울을 성큼 불러오기도 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겨울 냄새가 난다고 좋아하던 레이라의 얼굴이 떠올라 피오니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겨울 냄새가 나면, 이상하게 코코아가 먹고 싶어. 마시멜로가 동동 떠 있는 거!”

“뭐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을 했다.”

“흥.”

부끄러운지 삐친 시늉을 하며 고개를 팩 돌린 레이라의 귓가가 발갛게 익었다. 피오니안은 적당하게 식은 코코아가 들어 있는 잔을 작은 손에 쥐여 주며 귀여운 귓가에 쪽쪽 입술을 붙였다.

“귀여운 짓은 적당히 해라.”

“치, 언제는 예뻐 죽겠다더니.”

“지금도 그렇다.”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킨 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어느새 레이라의 손에 들린 머그잔보다 세배는 커 보이는 잔이 피오니안의 앞에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커다란 머그잔을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창을 열어둔 덕분인지 뿌연 입김이 흐린 안개처럼 흩어졌다. 차가운 공기, 마음까지 꽁꽁 얼어 버릴 것처럼 시린 바람. 날씨와 대조되는 따뜻한 코코아.

“하아, 겨울이 맞나 봐.”

“겨울이 좋은가?”

“아니, 난 봄이 좋아.”

단호하게 봄을 이야기한 레이라가 주먹까지 꽉 말아 쥐며 말했다. 킥킥 웃은 나트하가 옆에서 동의하자 에틸과 레사도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흐음, 두 사람도 봄을 좋아하나 보군.”

“네.”

“예.”

“그렇습니다.”

세 남자의 동의를 얻은 레이라는 장난스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피오니안은?”

“나는.”

피오니안은 여름에서 가을이 되어 가던 즈음 만난 여자를 떠올렸다. 그가 빙긋 웃었다.

“초가을이 좋은 것 같군.”

“하긴, 그때의 계절도 아름답죠.”

단 것, 즐거운 것 뿐이던 피오니안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 이유는 레이라 덕분이었다. 달콤한 사탕보다 쫀득거리는 아이스크림이 좋아진 것도, 작은 유희보다 그녀와 함께하는 산책이 좋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새삼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는 피오니안의 표정을 구경하던 에틸과 레사도 같은 이유를 떠올렸다. 레이라를 처음 만난 것이 초가을이었기에 초가을이 좋아진 피오니안과 달리, 두 남자는 레이라가 좋아하는 봄을 좋아했다. 봄에 피어난 꽃이 아름다운 것도 새로 돋아난 새싹이 귀여운 것도 모두 그녀가 알려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꽃을 보면 레이라가 떠오르기 때문에 봄을 좋아하는 나트하도 비슷했다. 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밤, 봄의 여신처럼 아름답던 레이라를 떠올렸다. 함께한 첫 데이트도 떠올렸다. 봄을 닮은 꽃밭. 나트하에게 레이라는 봄 그 자체였다.

“베르는? 베르는 좋아하는 계절이 있어?”

저만 소외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베르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에게도 있었다. 좋아하는 계절이.

“나는 겨울이 좋아. 너무너무 춥고 괜히 외로워지는데, 너를 안고 있으면 포근해지거든.”

“그도 그렇군.”

“그렇네요.”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한 에틸과 레사도 있었다. 레이라는 볼까지 빨갛게 전염됐을 홍조를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아, 복숭아 먹고 싶다.”

괜스레 딴소리하며 복숭아를 떠올린 그녀는 정말로 복숭아가 먹고 싶어졌다.

“복숭아?”

“지금 복숭아를 먹으려면 남부 쪽으로 가야겠군.”

“여행 준비를 해야겠군요.”

짐을 싸겠다며 자리를 떠난 에틸과 나트하, 레사를 말리지 않은 피오니안과 베르가 시선을 마주했다. 어느새 그들의 눈빛이 레이라의 배를 향했다.

“부를까?”

전담의를, 입 모양으로만 뱉은 베르가 피오니안을 향해 물었다.

“다녀와서 하지. 다 함께 들으면 더 좋아할 테니.”

“응? 뭐가?”

“아무것도 아니다.”

빙긋 웃은 피오니안이 레이라를 끌어당겨 꽉 안아 주었다. 어느새 다가온 베르가 반대편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 폭 파묻힌 레이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갑자기 왜 그래?”

“좋아서 그렇다.”

“좋아서.”

가라앉기 무섭게 다시 빨개진 얼굴을 피오니안의 품에 숨기며 레이라는 따뜻한 품 안을 파고들었다.

여전히, 행복했다.

✲ ✲ ✲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나트하가 발을 동동 굴렀다. 초췌한 안색의 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달 떨리는 레사의 다리를 꾹 누른 에틸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대체, 왜 깨어나질 않는 걸까요?”

“기다려보자 하셨으니 기다릴 수밖에요.”

에틸의 나직한 말에 피오니안이 고개를 주억였다.

베르는 네 남자보다 더 안색이 좋지 못했는데 이제는 머리까지 쥐어 뜯고 있었다. 나풀나풀 날리는 붉은 머리칼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이들은 모두 레이라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속의 계약.

베르의 피를 삼키고 악기를 흡수한 이들은 전부 일주일 내로는 깨어나곤 했다. 가장 빠른 것이 한 시간 만에 깨어난 에틸이었고 가장 늦게 깨어난 것이 일주일을 채운 나트하였다.

그러나 레이라는 열흘째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 어디 잘못된 거면 어쩌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베르의 말이 덜덜 떨려 나왔다. 그의 등을 쓸어내린 피오니안이 한숨을 탁 내쉬며 말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지 않나. 레이라는 괜찮을 거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피오니안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피오니안의 눈앞에 앉아 하나같이 파리한 얼굴들을 한 남자들. 그들은 전부 자신의 몸으로 직접 권속이 되는 것을 실험하곤 했다. 정상적인 악마가 아닌 베르와 피오니안 역시 권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로 그의 권속이 된 것은 에틸이었다. 베르는 레사를 꼽았으나 혹시 모르니 제가 하겠다 자원한 에틸에 의한 순번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악기와 피를 받아 마셨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깨어났다.

처음엔 베르에게 서약한 기사처럼 그의 명에 거절하지 못하던 에틸은 피오니안과 나트하가 고심을 해 만든 마법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다.

그렇게 가장 걱정했던 것을 해결하자 다음은 쉬웠다.

두 번째는 나트하였다. 그는 일주일을 누워 지내다 깨어났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몰라 그들은 깨어나지 못하는 나트하를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뒤늦게 깨어난 나트하에게 문제는 없었다. 이후 레사는 사흘이 걸렸다.

“마나 색이 흴수록 받아들이는 시간이 느린 건가?”

“아. 그럴 수도 있겠어요.”

레이라의 마나 색은 아주 옅은 분홍빛이었다.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가끔 기분이 좋을 때만 그녀의 주위를 맴돌곤 했으나 분명했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레이라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 ✲ ✲

베르의 피를 마시고 레이라가 잠든 지 벌써 2주가 다 되어 갔다.

자정이 되어 가기 전, 커다란 침대에 조르르 몰려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다섯 남자의 안색은 하나같이 파리했다.

“제발, 레이라. 눈을 떠 주세요.”

울음이 맺힌 나트하의 말이 빈 허공을 구슬프게 울렸다. 작고 하얀 손을 쥔 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냈다.

톡.

뜨거운 눈물이 서늘한 손가락에 닿았다. 그들은 움찔 떨리는 반대쪽 손을 눈치채지 못했다.

“레이라, 일어나.”

푹 잠겨 버린 베르의 음성에 많은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레이라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걸. 끝까지 거부할걸.

“왜, 왜 내가.”

마침내 베르 역시 눈물을 쏟아 냈다.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곧 깨어나겠지, 곧 눈을 뜨겠지, 아무 일 없겠지. 자위하며 도닥이던 마음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빌어야 할까,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리면 계약이 끝나며 깨어나지 않을까?’

베르의 절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를 구원할 천사가 깨어났다.

“……베르?”

레이라는 작은 빛무리를 쫓다 마주한 베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왜 슬퍼 보이는 건지, 대체 왜 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레이라!”

다섯 남자의 외침이 환희를 감싸며 동시에 튀어나왔다.

레이라는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서서히 제가 어쩌다 잠이 들었고 왜 빛무리를 쫓았는지를 떠올렸다.

“아. 난 얼마나 걸렸는데 이래? 세상에. 얼굴 좀 봐. 베르, 괜찮은 거 맞아? 왜 울어, 응?”

다정히 웃은 레이라는 베르, 나트하를 도닥도닥 다독여 주며 아기새처럼 저를 향해 손을 뻗어오는 다섯 남자를 끌어안으려 노력했다.

괜찮은 척 굴던 이들마저 눈물을 쏟아 내자 레이라는 혼이 빠진 것처럼 맹한 얼굴을 했다.

서럽게 들썩이는 어깨, 초췌한 눈가, 폭 패인 뺨, 다 쉬어 버린 목소리.

그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레이라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가 꽤 오래 누워 있었음을 예감했다. 조금 미안해진 그녀는 더 다정히 굴며 그들을 어르고 달랬다.

‘우는 에틸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장난스런 레이라의 표정이 배시시 웃음을 그렸다. 그녀는 다섯 남자의 뺨에 입술을 한 번씩 붙였다 떼며 짭짤해진 입술을 핥았다.

“귀여워, 내 남편들.”

한껏 억울해진 얼굴들이 다시 흐려졌다.

뒤늦게 울지 않았다는 듯 눈물을 슥슥 닦아 낸 에틸과 피오니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러섰다. 두 사람을 두리번거리던 레사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레이라의 품을 파고드는 것은 나트하와 베르였다. 그녀는 아기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두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었다.

“다녀왔어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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