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두번째 용사. 엘프여왕 엘루나
-후르르릅.
전망좋은 자리 앉아서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라떼를 마셨다.
전망이 좋다고 하나 보이는 거라곤 그저 크고 작은 건물들과 사이사이 보이는 사람들과 차량뿐이었지만 말이다.
"후르릅쩝...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느껴져."
"사냥꾼의 느낌이랄까요."
마력이나 힘을 사용해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숲에서 살았을 때 수많은 이들이 찾아오곤 했다.
몬스터, 살인마, 용병, 기사, 마법사, 조류, 짐승까지 내가 본 이들은 모두 전부다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갔다.
그때 생긴 감각이랄까.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바라보면 그들의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특히 이런 좁은 공간 안에서는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엘루나씨도 같이 앉아서 녹차라도 같이 드시죠."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익숙한 여자애가 보였다.
녹색머리가 잘 어울리는 숲의 향기를 가진 엘루나씨다.
"알고 있었네요. 보관씨는.."
"엘루나.."
"기숙사로 가는 길에 둘이 데이트하는 게 보였어.. 궁금해져서 그만 몰래 따라가고 말았네. 미안해 멀린."
저번에 멀린과 내가 방안에서 키스하는 걸들킨 적이 있었다.
그때 부터였을까 아카데미안에서 활동하면 숲의 향이 내 곁에 항상 머무르고 있었다.
엘루나씨는 등교 할 때부터 나를 조금씩은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도 우연히 아니라 우리를 따라왔을 거라고 예상됐다.
뭐 어쩔 수 없는일이었다. 그냥 모른척하고 어울려줘야 한다고 봤다.
"나는 괜찮아도 보관이가 불편해 할 거야."
"죄송해요. 보관씨."
"아닙니다. 둘이 절친 사이인데 제가 오히려 둘사이를 갈라놓은 거 같아서 미안하군요."
"보관씨는 마음씨도 착하시네요. 정령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거 같아요."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약간이나마 정령들이 피부로 느껴졌다.
머리카락에 스치거나 내가 걸을 때마다 내 앞에 작은 돌덩이를 만들어서 걸리게 만드는 이들.
가끔씩 장난을 치는 이들이 바로 정령들이었다.
처음엔 운이 없어서 돌에 걸렸구나 생각했는데 그 횟수가 늘어나는걸 보면 그것들은 모두 정령들의 움직임이었던 거다.
그만큼 정령들이 나를 따라다니니까 자연스럽게 엘루나씨도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 앉아도 되지 멀린?"
"그래."
녹차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멀린과 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굳이 이틈에 앉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사실 둘이 알콩달콩하니까 조금 심심해졌어요."
"읏..엘루나.."
"고집쟁이 멀린을 사랑스럽게 만들다니 너무하시네요. 보관씨."
멀린의 민감한 가슴과 겨드랑이 부근을껴안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거 칭찬이죠?"
"그럼요. 요즘 멀린이 소녀다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옆에서 보는 제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정령들 말고도 또 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엘루나씨는 멀린을 꽤나 아끼고 있던 거다.
같은 팀원이기도 하고 같은 동급생인 만큼 함께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그런 말 하지 마 엘루나."
"이거 봐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전에는 쌀쌀맞게 노려보곤 했는데 이게다 보관씨 덕분이에요."
늘 불만 있는 표정으로 살아가던 멀린이다.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일에만 신경 쓰고 자신의 삶은 없었다. 마치 신성국의 톱니부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옆에서 늘 바라보던 엘루나는 멀린을 보고 생각했다. 저러다가 죽을 것 같다고 말이다. 안타까움과 함께 걱정이 됐다.
하지만 태식이의 친구인 김보관를 만나고 나서 멀린은 달라졌다. 좀 더 자신을 표현하는데 힘썼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엘루나는 감동했다. 더욱 김보관에게 관심이 갔고 알아보고 싶었다.
한 사람을 바꿀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화사한 사람을 말이다. 심지어 정령들까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멀린을 위해서 신경 썼지만 이제는 자신도 김보관이라는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왠지 계속 생각이 났다.
"엘루나..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줬었구나.."
"당연하지,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나는 항상 너를 보고 슬펐었어. 하지만 이제는 보관씨를 만나고 밝아져 보이니까 너무 안심이 되는 게 있지?"
처음엔 엘루나씨가 멀린을 안아줬지만 엘루나씨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서 일까 이제는 멀린이 살짝 눈물을 보이며 엘루나씨의 가슴 품에 안겼다.
저 상황은 보는 나는 살짝 민망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숲에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동물들과 교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도 짐승들과 감정을 공유하는데 엘루나씨와 멀린이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와 태식이처럼, 멀린과 엘루나씨 사이에도 깊은 우정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봐도 훈훈해 보이는 가족 같은 둘이었다.
멀린이 신성국 밑에서 부서지지 않았던 이유도 엘루나씨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이 들었다.
막바지에 내가 멀린을 마녀로 만든 것도 있겠지만 엘루나씨가 비율이 좀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함께 하니까 보기 좋네요."
"훗, 질투하는 거예요?"
"아..아니요. 저도 태식이가 생각이 나서요. 힘들 때 태식이가 항상 찾아와서 밥한 끼를 함께 했거든요."
"역시 둘이서도 좋은 친구사이였네요."
"네, 태식이도 저를 많이 생각해주거든요. 조금 싸운 적도 있었지만 말이죠."
"저희도 그랬어요. 작년에 그렇게 의견이 안 맞아서.."
"말..하..하지마 엘루나.."
세상에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충분했다. 그만큼 자신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둘이 어디까지 간 거예요? 키스는 진작 넘어선 거 같은데요?"
"아.."
"엘루나..!"
이제 서로의 우정을 보여줬겠다. 엘루나씨는 좀 더 우리 둘 사이를 알고 싶어 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만큼 관심도 많은 엘루나씨였다. 깊은 우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단점도 존재했다.
"친구를 뺏어간 보상을 받고 싶달까요?"
"엘루나씨.. 저번에는 도망쳤잖아요. 비밀로 해주신다고 하고.."
"시간이 지나니까 욕심이 생기는 거 있죠?"
둘의 반응에 웃음이 나는 듯 눈웃음 짓는 엘루나씨다.
"손잡는 정도까지.."
"거짓말~ 멀린은 가만히 있어봐. 보관씨, 손잡고 키스하고 다음은 하나뿐인데요?"
내 눈을 바라보며 잔뜩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엘루나씨다.
멀린은 이미 엘루나씨에게 져버려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키스만 했어요.."
"정말요?"
"살짝 귓볼까지 만지는 정도.."
"흐음..수상한데요? 아니죠? 좀 더 야한모습일 거 같은데요?"
지금 이 순간 신성국 수사관보다 엘루나씨가 더욱 두려워졌다.
진한 우정사이인 태식이에게 연애하는 걸 들킨 느낌이다.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멀린 역시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도 나와 흡사한 느낌이 들어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삐릭..!
"아! 걸렸어요!"
"서..서둘러야겠어!"
부동산에서 오는 신호에 멀린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뭐가 걸렸는데요..?"
"범죄자요! 사실 멀린씨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아아.."
엘루나씨는 멀린의 일거리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멀린과 나는 커피숍을 나갔다.
"엘루나씨는 안 따라오셔도.."
"저도 함께 갈게요. 예전에 멀린을 많이 도와주곤 했거든요."
"방해된다고 엘루나."
"내 정령들이 방해된 적은 없잖아 멀린~"
"끄응.."
그렇게 3인 팀이 되었다.
***
아까 카임을 풀어 논 부동산집으로 향했다.
"하..하라는 대로 했어요..!"
다급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쪽에서 빈 허공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와 말하고 있어.. 정말로 귀신인가.."
"아니야 멀린. 정령들이 그러는데 안쪽에 누군가 있다고 해. 보이지는 않지만.. 숨소리나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하네."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서 저런 악마를 한명 알고 있었다.
단 한명.. 자신의 모습을 엘루나씨 은신처럼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다니는 실체가 없는 악마.
전생에 투명인간이라는 말로 마을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악마가 있었다.
"...이제야 누군지 알거 같아요."
"안 보이는 범죄자를 알고 있어요?"
"네."
51위 투명악마 발람.
빛을 굴절시켜 자신의 몸을 마치 거울처럼 보이게 만드는 악마였다.
그래서 투명인간처럼 녀석의 본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빛이 없는 그림자에서만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전생에서 그림자를 입힌 제노사이드 사슬로 묶어 잡았던 기억이 있었다.
"멀린.. 부동산집 자체를 막아줘요.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요."
"쉬운 일이야."
-틱틱틱..
강력한 마력을 일으키며 눈앞에 있는 작은 건물을 붙잡았다.
보호막처럼 둥근 원이 쓰이면서 말이다.
"갔다 올게."
"저도 함께 갈게요. 보관씨."
"위험해요. 엘루나씨 상대는 궁지에 몰려서 엘루나씨를 인질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정령들이 지켜주고 있거든요. 멀린도 저를 잡지 못했잖아요?"
맞는 말이다. 엘루나씨에게 멀린과 나 사이의 관계가 들킨 날 바로 수습하려고 했지만 정령들의 힘이 막강해서 그녀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위험하면 저를 버리고서라도 도망가세요. 멀린을 위해서 라도요."
"훗..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내말에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엘루나씨는 멀린을 생각하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조심해 둘 다."
그렇게 멀린의 말과 함께 부동산집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딸랑..
"으으으..!"
"그만해. 발람."
"...수집가."
"순순히 내게 잡혀 이제 도망갈 곳도 없는 거 알아."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다!"
-철컥! 타앙!
"읏!"
총성소리가 들렸다. 미친 반응속도로 몸을 틀었지만 어깨 끝에 지나가면서 제복이 뜯겨나갔다.
"보관씨!"
"총이에요! 소파 뒤로 숨으세요!"
'이런. 총기류인가! 그것도 직접 개량한!'
순수한 총탄이면 상처가 입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우수한 악마다. 악마나 천사에게 상처를 입힐만한 무기를 가질 수 있는 악마.
발람은 그중에서 총기류를 택했고 어느 장소에서도 쉽게 대응할 수 있도록 대책까지 만들어 논 상태였다. 총알역시 당연하게 내 단단한 피부를 뚫을 수 있었다.
"꺄아아아!"
"순순히 내 손에 죽어 주는 게 좋을 거다. 이 여자가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상황은 안 좋았다. 대놓고 인질까지 있는 상황이라 이제는 발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놔줘 우리 둘 사이의 문제잖아 발람."
"후후..이미 그러기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깨어났고 이제 자유롭게 살겠다. 귀찮게 하는 네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고선 이 신비로운 세상 안에서 살겠다!"
-탕탕!
"흐으으으!!"
인질 잡힌 아줌마는 실금하며 눈물범벅이 되었다.
위협사격을 하며 내가 다른 생각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고 집중력을 흩뜨리며 나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3초안에 안 나오면 이 여자부터 죽이겠다."
"죽인다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발람."
"아직 자신의 처지를 모르나 보군.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수집가."
-탕!
"꺄아아아!!"
아주머니의 다리를 쏴버리는 투명악마 발람.
피가 사방을 뿌려졌고 이제는 아주머니의 머리통을 겨놓은 듯 아주머니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그만둬! 알았어! 내가 나갈게!"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좋다.. 죽어라 악마수집가."
-탕!!
김보관의 머리중앙에 총탄이 박혔다. 사방으로 뿌려지는 공기파와 함께 그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보관씨!!!!"
엘루나는 눈앞에서 살인현장을 보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