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여섯번째 악마. 오만의 루시퍼
"손을 잡아주겠니?"
"물론이지. 벨페고르."
"후훗."
의료기기만이 불빛이 들어오는 병실 안에서 알몸상태로 누워있는 벨페고르의 손을 잡아 올렸다.
부드럽게 딸려 오는 그녀의 손과 몸매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니, 야한 속살을 보이던 그녀의 몸에 검은색 양털이 붙기 시작했다.
양털은 아름다운 알몸을 가리며 자신이 입고 왔던 옷으로 되돌아간다.
성욕을 일으키던 그녀의 몸매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녀와 관계를 즐긴지 1~2시간이 되었기에 참기로 했다.
또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까.
"에스코트 해주렴."
"응."
-물컹.
그녀가 내 팔에 자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소소한 자극을 즐기며 병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뚜..뚜..뚜..
***
포근한 감촉을 가진 벨페고르와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로 물들었다.
서둘러 아스모데우스의 오피스텔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늦어. 앗..! 늦은이유가 있었구나!"
"후후, 레비아탄 안녕~"
"저번에도 선수 치더니만! 누가 악마 아니랄까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다.
벨페고르와 내가 밀착해있는걸 보던 질투의 악마 레비아탄은 푸른눈동자를 보이며 우리 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쿵쿵거리며 다가와서 나와 벨페고르의 팔짱을 갈라놓는다.
레비아탄에게서 당장이라도 내 옆에 있는 벨페고르를 찢어버리고 싶은 시선을 보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걸 화내지마~"
"화 안 났거든?"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틱하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는 레비아탄이다.
아기자기한 장난감 악어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티에 연결된 모자를 쓰고, 짧은 청반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면 역시 귀여웠다.
"어라, 내가 꼬마 주인을 뺏어가서 화난 거 아닌가?"
"아..아니거든! 누가 주인놈을 보고 싶어서 나온 줄 알아? 그저! 루시퍼님이 찾고 있어서 같이 따라 나온 거뿐이야!"
"그래? 후후."
레비아탄의 마음은 이미 주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고 지고싶지 않았다.
억지로 아니라고 하는 레비아탄을 보고 웃는 벨페고르다.
벨페고르도 레비아탄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그렇죠!? 루시퍼님!"
"그렇지. 정의 눈을 피해 어둠속으로 들어간다면 짐이 찾아가겠다고 미리 말해 뒀지."
가로등 빛이 밑.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작아진 한 쌍의 하얀 날개를 보이며 걸어 나오는 천사 루시퍼가 보였다.
신성국 사건 중에 루시퍼는 내게 패했다. 루시퍼는 자신이 졌기 때문에 나를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감시하기로 한다.
그래서 날 오피스텔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밤이 되면 태양빛이 사라지기에 오피스텔에서 나를볼 수 없었다.
지금처럼 밤늦게까지 돌아다닌다면 루시퍼가 나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나를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악마들을 잡아두고 있다는 걸로 꼬투리 잡으면서 말이다.
"감시라니 좋지 못한 추태인걸."
"벨페고르, 니가 먼저 주인놈에게 초소형 카메라 달았잖아!"
"아, 그랬었지."
벨페고르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른한 눈웃음을 짓는다.
"어둠속에서 악한 짓은 안했겠지.인간."
"전혀.. 그런데 관심 없다고 루시퍼."
"악당들은 늘 경계해야 하는 법이지. 마음속을 알 수 없으니."
한동안 결백한 행동을 해왔지만 나를 믿지 못하고 있는 루시퍼다.
가끔 보면 사탄보다도 더 고지식해보이고 꽉 막혀 보일정도다.
물론 천사들이라면 대부분 저런 정의로운 성향이 강했지만..
"돌아가지. 어둠은 싫거든."
"하암.. 악마의 제왕이 그런 말을 하니까 안 어울리네."
"벨페고르! 루시퍼님은 뭐든 어울리거든!"
조용한 밤이지만 악마들에게는 가장 시끄러운 시간대라고 생각이 들었다.
"잠깐.. 모두 멈춰봐."
오피스텔로 향하던 악마들은 내 말에 멈춰 섰다.
-지지직..
"...게이트?"
한 지점에서 전류가 일어나며 게이트가 활성화된다.
근데 게이트가 이상했다. 조용하면서도 일그러지는 크기가 매우 작았다.
마치 누군가 단일로 게이트를 열어버린 느낌이다.
"오호.. 이 몸을 초대한다라?"
"초대요? 누가요? 루시퍼님..?"
천사 루시퍼는 작게 열려진 게이트 문을 보고 미소를 보인다.
레비아탄은 궁금해서 루시퍼에게 물어보지만 루시퍼는 레비아탄을 큰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꼬마야, 초대한 녀석은 아마도 낮에 만났던 괴물을 만들어내는 녀석이겠지?"
"김세원을 그렇게 만든장본인. 맞는 거 같아."
평범한 인간은 괴물로 만들어내고, 지금은 게이트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능력까지 있는 수상한 녀석이다.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각을 해봤지만 이건 절대로악마의 짓이 아니라고 판단이 섰다.
"게이트, 악마가 아니라면 천사인가?"
"꼬마야, 한 종족이 또 있단다."
"...혹시 최근에 말했던 마신병을 말하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커. 그런데 이 게이트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걸."
"야! 벨페고르 저번에도 혼자 기계한테 잡혀가서 혼이 났으면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걱정해주는 거니 레비아탄? 후훗."
"아..아니거든! 우리가 귀찮아질 뿐이니까 혼자 다닐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알았어~"
"이..이게..!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벨페고르는 레비아탄을 놀리며 재미있어한다.
루시퍼는 힘을 잃었는데도 어디서 자신감이 솟았는지 가소롭다는 표정이고 말이다.
나 참 게이트를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마도 나뿐인 것 같았다.
"알았어. 레비아탄. 이번엔 가만히 있을게. 그런데 저쪽 천사님은 아닌 거 같은데?"
"어..아? 루시퍼님!?"
"지상을 지키는 천사라면 당당히 응해줘야지."
"루시퍼! 잠깐!"
한 번의 전과가 있는 벨페고르에 신경쓰고 있던 나와 레비아탄이었다.
문제는 의외로 악마가 아니라 천사 쪽에서 발생했다.
-지지직..! 쑤욱.
"안 돼!"
"레비아탄! 잠깐!"
루시퍼가 게이트를 들어가자 레비아탄이 바로 반응했다.
다시 루시퍼를 잃고 싶지 않은 레비아탄은 과감하게 게이트 안으로몸을 던졌다.
"하아.. 또 이렇게 되다니.."
"후훗. 재미있지 않니 꼬마주인?"
벨페고르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는다.
"심각한 상태라고 벨페고르.."
"난 오히려 좋아. 좀 더 꼬마랑 단둘이 될 수 있으니까."
악마의 미소를 짓는 벨페고르다.
가장 얌전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가장 사악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애들한테 연락하고, 우리도 들어가자."
"꼬마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가야지."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가만히 있던 거지?"
"아니,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수상한데."
행운을 다루는 것이 천사들인 만큼 악마들 또한 악운을 다룬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로 만들거나 악몽을 꾸는 악마.
가끔 보면 일부로 유도한 느낌까지 든다.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악마들은 모두 내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왠지 답답했지만 그녀가 아니라는 말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찰칵!
"애들한테 사진 찍어서 보냈으니까. 우리도 가볼까 꼬마야?"
"그러자. 게이트를닫기 전에 들어가야지."
일을 마친 벨페고르는 다시 내 팔을 잡고 팔짱을 꼈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
-드드득.. 드르륵..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니 물컹거리는 감각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회색 젤리라고 생각되는 고기벽이 보였다.
김세원의 온몸을 뒤덮는 회색 괴물의 피부가 생각이 났다.
그 회색피부가 게이트가 된 모습이다.
회색 벽 뒤편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괴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해지고 싶어...!"
"최고가 되고 싶어..!"
"난..얼굴을 가지고 싶어!"
“현실을 빠져나가고 싶어!”
회색벽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소원이나 꿈이기보다는 간절한 애원 같았다.
물컹거리는 회색 벽에 수많은 사람얼굴과 손바닥이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마치 심장이 펌핑하는 것 같았다.
한 좀비영화에서 나오는 좀비수용소를 찍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여유롭지 못한 애들뿐이네."
공포심을 자극하는 배경이었지만 벨페고르는 달랐다.
오히려 자신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그녀는 늘 이런 모습이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언제나 침착했다. 침착한 섹스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꼬마주인은 긴장했니?"
"조금 기분 나쁘네."
"인간들은 의리가 있을 테니. 조금 불쾌하겠네. 후후."
벨페고르는 찡그린 내 표정을 관심 있어 했다. 주변에 징그러운 회색벽보다도 내 얼굴변화를 더 눈여겨보고 있었다.
"꼬마가 원하면 다 터트려 버릴 수 있어."
"아니야.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으니까."
"스스로 약점을 만드는 거니?"
"그래도 동족이니까."
"이 애들을 잡은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모두 인질. 놔두면 분명 후회하게될 거란다."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게이트 내부나 야생에서 약해진 감정은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이 공간을 만든녀석은 분명 사람들의 애원을 듣고 육체를 지배하는 모습이 보여줬다.
우리들을 이곳 게이트 안으로 초대한 이유. 바로 약점을 찾기 위해서가 가장 컷다.
과거에 있던 던전같은 느낌이다.
"그것만은 약속할게 만약에.. 만약에라도."
"응?"
"벨페고르와 레비아탄이 위험해 진다면 저들을 포기할게."
"후훗.. 그건 예상 못한 말인데? 우리 주인꼬마가 갑자기 왜 그럴까?"
"저들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
"어라, 당연하게 사람들을 구할 줄 알았는데? 무언가 변화가 온 거니?"
"천사도 그렇고.. 신성국도 그렇고... 나도 보고 세상이 변한걸 보고 많이 생각해. 과거에도 부랑자와 범죄자들도 많이 처단했지.. 절대적인 선은 없다고.."
"그래서 사람도 마찬가지다?"
"..."
"동족에 너무 신뢰가 없어졌네. 꼬마야 후후.. 그래 좋아, 어느 쪽으로 나가던 난 꼬마가 선택한 곳에 있을 테니. 걱정 마렴."
"고마워."
"나야말로 고맙지. 내 충성스러운 꼬마주인 쿡쿡."
벨페고르는 나의 심적인 변화에 재미있어한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타락이라고 불렀다.
신을 져버리고 나아가다니 이단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악마들 세계에선 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공기처럼 자유롭고 유동적이며, 언제나 변화가 왔다.
천사의 힘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 이들.
악마가 순수한 악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도 그랬었다.
"끄아아! 하아..! 하아!"
벨페고르가 변화한 내 마음을 느끼고, 내 팔을 만지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꿈틀거리는 피부처럼 움직이는 회색 벽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면서 강렬한 무언가를 원하는 숨소리였다.
-우드득..! 찌지직! 쿵!!
천장에 거대한 4개 엄지발가락 같은 손가락이 튀어나왔다.
벽을 찢으며 끈적거리는 액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히히...히힉...!"
거대한 회색괴물이다. 방금 태어난 새로운 종인 것 처럼 몸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괴물은 오른손만이 거대했고, 사람들의 얼굴을 10명..아니 20명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얼굴들은 다들 내부에서 빠져나오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20명분의 사람들이 팔과 다리가 달려있는 엽기적인 괴물이었다.
"이건 예뻐할 수 없는 꼬마네. 아니 꼬마들이려나?"
"크..크..큿.. 힘...힘..원..해...이 곳 을 빠져나갈 히이임!"
가래 끓는 목소리와 함께 우리들을 직시한다.
처음 김세원한테 들려왔던 힘에 관한 말을하며 우리를 본다.
"꼬마야 어떡해. 바로 나를 위협하는 사람 괴물이 나왔어."
"여기 있어. 금방 처리할게."
"후후.. 다치지 말고 금방 갔다 와. 지켜보고 있을 테니~"
벨페고르는 장난스러운 농담을 하면서 귀찮다는 듯 내게 전투를 맡기기로 한다.
그녀가 나를 안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게 신호가 되어 움직였다.
카임.
-스르릉..칭.
생성된 카임의 단검이 오른손에 잡혔다.
게이트 내부인 만큼 천사들에게 악마의 힘이 들키지 않았으니.
투기장 때처럼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끓어오르는 5개의 악마힘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힘, 체력, 민첩성, 지구력 등등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모든 능력치가 수십 단계 올라선다.
수많은 악마들의 힘 중에서 옆에 있는 나태의 자리를 가진 벨페고르의 뿔이 내 머리위에 자라난다.
풀어지고 나른한 기분으로 회색괴물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