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여섯번째 악마. 오만의 루시퍼
웃음을 참지 못한 루시퍼.
루시퍼는 아무 말 없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약하게 손을 움켜쥔다.
-우직...푸..
멍한 표정을 가진 사오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밀가루가 허공에 날리듯 터지며 잿더미가 되었다.
회색가루가 바닥에 떨어졌고, 이후 사오정이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렸다.
왼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잡고 일어나는 루시퍼.
그녀의 목엔 족쇄가 걸려있지 않았다.
희미하게족쇄의 줄은 연결되어있지만 내게 묶이지 않은 상태였다.
"루시퍼님..."
루시퍼의 모습이 바뀌자 레비아탄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레비아탄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루시퍼였다.
그녀를 위해 희생했고, 살아갔기에 누구보다 의지하고 있었으며 늘 신경 쓰고 있었다.
평소 루시퍼와 다르게 어두움이 머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선 마음이 약해진 레비아탄의 손을 잡아주었다.
“수집가..”
"괜찮아 레비아탄. 내게 맡겨."
불안에 떠는 레비아탄이 보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진정시켰다.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떨림이 약해졌다.
루시퍼뿐만 아니라 레비아탄 때문이라도 꼭 족쇄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각오하며 시선이 레비아탄으로부터 루시퍼에게로 향했다.
"루시퍼, 순순히 내게 붙잡히겠어?"
차분하게 루시퍼에게 말했다.
"그대의 행동에 고마워하고 있어. 힘을 가져간 덕분에 이 녀석을 누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까."
루시퍼는 자신의 손을 들어 자신의 신체 이곳저곳을 만지며 주름, 모양을 새로 기억하는 모습처럼 비춰졌다.
"이기고 나왔다는 건 대검을 가진 루시퍼에게 족쇄를 걸었기에 그런 건가?"
"녀석을 이긴 그대는 잘 아는구나."
-씨잉..
루시퍼의 왼손에 생기는 또 하나의 검이 보인다.
그 검은 본래 루시퍼가 가지고 있던 대검이 아니었다.
그건 롱소드의 길이와 비슷한 양날을 가진 장검이었다.
대검에 비해 길이나 굵기가 현저하게 작았지만, 그만큼 더 예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무기이며 또 다른 루시퍼라가 사용하는 무기였다.
"루시퍼의 영혼이 둘이었다니 후후.. 이건 몰랐는걸?"
"나도 처음 알았어.."
벨페고르와 레비아탄역시 처음 알게 된 사실.
역시 같은 악마라고 해도 각자 비밀은 알려주지 않았다.
세상을 즐기는데 집중하는 악마들이라면 더욱 루시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악마수집가였던 내가 루시퍼의 흘리는말을 기억하고 있는 게 다겠지.
"오랜만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을 얻었는데, 좀 더 자유를 느끼고 싶구나."
"족쇄는 거절이라는 거네."
"그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후후.. 내 자유를 맡길 순 없지."
"억지로라도 붙잡을 거다. 넌 너무 위험하니까."
"단지.. 위험하다 뿐인가? 수천 년전에 나를 잡았던 것처럼 말인가?"
"그래."
"나를 이해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루시퍼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롱소드 손잡이 부분에서 끝에 있는 칼날까지 쓸어내리며 아쉬움을 말한다.
지켜보며 난 루시퍼에게로 걸어갔다.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악마와 함께 하는 그대는 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뭐?"
"지금 그대가 짐에게 한 행동은 천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다."
루시퍼의 말에 흠칫 놀라며 걸음걸이를 멈췄다.
"신성국사건 이후, 그대는 나를 붙잡아 두고 감시만을 했다. 천상에서 쫓겨난 나를 감시하는 천사나 신성국과 넌 뭐가 다르다는 건가? 그대도 나를 새장 안에 가둬놓으려 하는 것뿐. 자신만의 기준으로만 위험하다고 판단하다니. 오만하구나. 수집가."
루시퍼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그저 내 기준에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녀를 붙잡아 두고 감시했다.
과거 악마수집가처럼 반복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내게 그럴 자격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난 쓰레기였을 수도 있었다.
대검을 가진 루시퍼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지만, 그녀 내면에 있던 장검을 가진 루시퍼는 다른 성향을 가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난 그저 루시퍼가 악마들의 제왕이라 생각했기에 사방에서 감시했고, 어딜 갈 때쯤이면 추가로 한명이 붙여 신경쓰고 있었다.
지나온 내 행동들을 보면 천사들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흔들리지 마렴 꼬마야."
"벨페고르."
"꼬마는 틀리지 않았단다.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서 루시퍼를 가둬 놓은 거잖니?"
벨페고르는 내 등 쪽으로 나타나 가볍게 안아주며 내 판단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래, 지금은 과거 때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믿어주고, 의지하는 악마들이 있기에 지키고 싶었던 거다.
루시퍼라는 천사 때문에 현재생활이망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내선택을 굳건히 다짐했다.
의지에 힘을 불어넣어주곤 다시 돌아가는 벨페고르에게 고마웠다.
"꼬마가 있는 한 얼렁뚱땅 도망치려는 생각은 버려 루시퍼."
"벨페고르,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상황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구나?"
"후후, 이래 뵈도 귀여운 꼬마의 연상누나 역할이란다."
루시퍼가 날카롭게 벨페고르를 노려보지만 벨페고르는 부드러운 미소로 흘려버리며 뒤는 내게 맡긴다는 듯 벗어났다.
"...루시퍼. 다시 말하겠지만 이만 포기하고 순순히 잡혀줘."
"싫다."
권유를 거부하는 루시퍼.
그렇다고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럴 때는 하나 밖에 없지 않겠어? 더 강한 쪽의 말대로 가는 거야. 악마의 방식으로 말이야."
"그거 좋구나. 수집가."
루시퍼가 찬성한 방식은 나도 알고 있는 방식이다.
악마들의 승부.
악마들은 승부를 즐겼다.
이기는 자가 모든 걸 얻는다.
"이기면 목에 족쇄를 걸 거다. 루시퍼."
"내가 이기면 그대의 자리는 짐의 것이 될 거다. 본래 내 자리였으니."
과거 악마의 제왕이라는 불리던 루시퍼.
악마들을 잡아두는 내 자리와 힘을 탐내고 있었다.
승부에서 이긴다면 과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겠지.
"뭔가 조건이.. 주인이 불공평하잖아."
"뭐니? 레비아탄. 불만 있으면 힘 있게 말해."
"아..아니야! 아니야!"
악마의 승부에서 불공평하고, 체급차이가 난다?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이기는 자가 모든 전리품을 취한다. 그뿐이니까. 악마의 계약을 하는 거다.
"대결은?"
"티비라는 걸 봤다. 헌터들이 1대1 결투하는 것이 마음에 들더구나."
"좋아."
-씨잉.
-스르릉.
루시퍼는 의자에서 일어나 장검을 휘두르고 테이블과의자를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나도 카임의 단검을 만들어냈다.
"훗.. 그대는 내 존재를 알아도 내 힘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 않나?"
"사오정이라는 요괴를 다룰 정도의 인형술사와 흡사한 능력.. 아닌가?"
"후후, 맞는다고 생각하나?"
과연 맞을까.
손을 들어 턱에 올리는모습으로 나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비슷했는데 아쉽겠구나."
"아니라고..?"
"미안하게 됐구나. 그대가 모르기에.. 좀 더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구나."
루시퍼의 모습이 점점 일그러진다.
짧은 순간.
잔상이 생기면서 사오정의 모습처럼 흩어지려는 모습이다. 이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방금 뭐였지.'
내가 아는 루시퍼의 힘은 천사시절에 사용하던 대검과 적을 심판하는 번개를 다루는 것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전격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도 전격때문에 손 전체가 마비증상이 왔고, 사방으로 튀는 전격이 피부를 찢어발겼다.
하지만 대검이 아닌 장검을 가진 루시퍼는 어떨까..
내심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로 궁금함이 샘솟았다.
사탄의 힘을 받아들여서 그런 건가..
전투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전투에 재미와 기대를 하다니. 정신 차리자.
고개를 들어 올려 루시퍼를 직시했다.
왼손으로 들고 있는 장검을 보며 루시퍼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승부는 이미 시작했다. 그대여."
루시퍼가 순식간에 내 옆에서 검은 번개를 일으키는 장검을 세로방향으로 내려친다.
-칭!
반응속도로 몸을 꺾으며 카임의 단검으로 장검의 궤도를 흘린다.
-찌지직!!
단검과 장검이 마찰되며 사방으로 검은 번개가 튕겨져 나온다.
-휘릭! 칭! 칭! 칭! 칭! 칭!
그녀는 쾌검술로 계속 연계하며 밀어붙인다.
또 다른 루시퍼의 공격을 모조리 흘리며 회피한다.
"짐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려하다니 어리석구나."
루시퍼의 모든 검술을 흘리며 방어하자.
틈을 주지 않고 힘을 사용한다.
내 뒤에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루시퍼가 정면에 있는데 내 뒤쪽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깃털장갑.'
-팅! 지지직!!
"내 실수구나."
루시퍼는 멀리 벗어나 나를 본다.
정면에서 시선을 끌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공격했다.
벨페고르의 깃털이 없었다면 큰 부상을 당했겠지.
등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그을림.
연기가 나는 정도로 막는데 성공하고 멀리 빠져나왔다.
"루시퍼, 그건 뭐였지?"
"말했지 않았느냐? 그대가 모르기에 난 좀 더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순간적으로 등에서 느껴지는 다른 존재의 감각.
익숙하면서도 방어하기 힘들었다.
역시 기만과 오만을 상징하는 루시퍼다.
오만하다는 말은 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전장을 누렸던 천사이자 악마였으니까.
신은 루시퍼라는 천사를 창조했다.
자신의 대리인이며 천사들을 대신 통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루시퍼는 점점 다르게 나아갔다.
천사들을 이끄는데 욕심을 생겼고, 더 나아가 신의 힘을 모방하려했다.
그 오만함에 신은 루시퍼를 타락천사라 죄명하고 지옥으로 쫓아냈다.
"이 승부 막기만 해서 나를 이기지 못할 거다."
-후웅! 핑! 지지직!
또 다시 흐릿하게 보이며 전광석화로 내 몸을 내려 긋는다.
어떻게든 단검을 돌려막아 막아 세웠다.
-찌지직!
"크윽!"
후속타로 날아오는 전격에 몸이 잠시 마비가 됐다.
"수집가!"
"끝이다."
루시퍼는 잠깐의 경직을 놓치지 않았다.
내 심장을 보고 장검을 송곳처럼 찔러 넣는다.
순간적으로 또 한 번 루시퍼가 잔상이 보인다.
-푸슉..
"쿨럭..이거였나.."
"이제 알았겠지만.. 늦었다. 이미 승부가 났구나."
내 가슴에 박힌 루시퍼의 장검.
벨페고르의 장갑을 뚫는데 성공한 루시퍼다.
벨페고로의 깃털을 전격으로 밀어내고 그곳을 장검이 파고들어왔다.
그것도 두세 개 검이 말이다.
"모방.. 그게 힘이었구나. 루시퍼. 흑.."
"그렇지. 신을 따라한 죄. 이 힘 때문이기도 하다. 신의 창조와 흡사한 모방의 힘때문에 타락천사라는 오명이 씌워졌지."
모두가 의아했다.
루시퍼가 오만하다는 말에서 말이다.
과거에 본 그녀는 전혀 오만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졌다.
진정으로 오만의자리를 가진 귀족악마라 생각이 들었다.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다.내 제왕의 자리를 잠시 맡아줘서 말이다."
"흐..흐흐.흣..큭.."
"웃어도 좋다. 내가 허락하니."
루시퍼는 승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있는 수집가의 심장에 모방된 세 개의 칼을 꽂았으니까.
그가 서서히 움직임이 굳어 가는 게 보였다.
마지막 웃음을 허락하며 여유를 보여주는 루시퍼다.
"방심했어. 대검을 가진 루시퍼와 같네..."
"방심.. 그렇겠구나. 내 마음속에 잠들어있는 그 녀석과 비슷하게 방심했구나그대여."
"나 말고 루시퍼. 너 말이야."
"응?"
-지직..
세 개의 장검을 찔러 넣은 루시퍼는 순간적으로 눈앞에 있는 피를 토하는 김보관이 흐릿해지는 걸 봤다.
마치 자신의 사용했던 모방의 힘과 흡사하게..!
-후웅!
"아니..!"
"알아차리기엔 늦었어. 루시퍼. 움직이지 마."
루시퍼의 등 쪽에서 투명한 물체가 다가왔다.
동시에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뭔가가 나타났다.
"어..어떻게 한 것이냐! 분명 심장을 찔렀거늘!"
"당신의 모방의 힘을 잠깐 사용했어."
"모..모방? 불가능하다! 고작 수십 합을 맞댄 것으로 어떻게 내 힘을 안 것이냐!"
"귀족악마들에게 붙어진 7대죄의 명칭은 귀족악마들의 약점이기도 하지 오만했어. 루시퍼."
"이..이럴 수가.."
루시퍼가 오만했기에 이겼다.
루시퍼는 자신의 전투에만 신경 썼고 내 전투방식은 읽지 못했다.
내가 루시퍼의 힘을 수집할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겠지.
내게 마몬의 힘까지 있어 남들의 힘을 수집하는데 더욱 쉬워졌는데 말이다.
루시퍼는 너무 나를 얕잡아본 것이다.
투명의 힘을 사용하는 악마.
51위 악마 발람의 힘이 서서히 사라지자.
루시퍼의 목에 단검을 겨놓는 실체가 나타났다.
"또 내가 실수를 했구나."
"아까 벨페고르의 깃털장막을 억지로라도 뚫었어야 했었어. 날 놔준 게 기회가 됐지. 좋은 승부였어. 루시퍼."
마지막 말과 함께.
그녀의 목을 카임의 단검으로 그었다.
-촤악!
목에서 터져 나온 붉은 핏물이사방으로 뿜어졌다.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모방하는 건 불가능.
확실하게 그녀를 베었고, 베어진 목에 족쇄가 박혀 들어가 꽁꽁 묶여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목숨은 내 것이 되고, 그녀의 몸과 마음은 나의 수집품으로써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루시퍼는 내 것으로 물들어가며, 오만한 꽃잎을 하나씩 잡아 핥는다.
그녀가 갈망하는 자유마저도 이제는 나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