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네번째 용사. 수인 엘리스
밤인데도 불구하고 게이트가 점차 사라지자, 진지 안에서 대기하던 휴스대장과 부대원들이 환호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성공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제 도시로 다시 사람들이 돌아올 겁니다!"
한사람 한사람마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이곳을 지켜냈는지 느껴졌다.
비록 늦어버려 황폐해진 도시가 되었지만 다시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부대원들이다.
고작 게이트 하나 때문에 버려지다니 제국에 대해서 안 좋은 시선만 생겼다.
그럼에도 제국을 심판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있다면 신성국측에서 제국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신성국 자체도 부패된 권력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난 세상은 전혀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조금만 손을 내밀면 위험이 사라졌지만 그냥 방치하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을 하려했다.
과거 마족과 악마가 날뛰던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무법지대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은 어지러웠다.
세계평화 따위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건 이미 불가능했다.
천사도 신성국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권력과 힘이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계가 되어갔다.
그렇다면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똑같이 벌을 줄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기 있는 멀정한 도시를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스가 그 작은 씨앗이 되어줄것이고 제국이 생각하는 꿈을 악몽으로 바꿔줄 것이다.
"보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괜찮습니다. 뭘 바라고 온게 아닙니다."
"그래도 받아주십시오!"
휴스대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반지를 억지로 건네줬다.
"제가 이 도시출신 토박이입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촌장을 했었었죠."
끝까지 도시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이 도시출신 토박이 군인들이었다.
자발적으로 전투중인 도시에 지원하고 이곳에 남아서 자리를 지킨 거였다.
"이 반지는 조상님들이 남겨준 유품입니다."
"이건 너무 과분합니다."
"아닙니다. 김보관님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이 반지는 잔해 속에 묻혀서 영영 빛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목숨을 빚과 도시을 구원해줬다는 사실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게 건넸다.
반지의 가운데는 검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자세히 보니 은은하게 조각된 그림이 보였다.
누가 봐도 사연이 많은 반지처럼 보였다.
"그 보석은 전설적인 동물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졌다고 하죠."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사막여우 아닙니까?"
"평범한 사막여우가아니죠. 발리아 제국을 상징하는 구미호입니다. 이건 구미호가 존재했다는 증거이자 이 전설을 증명하는 보물이죠."
"구미호..그럼 여기 그려진 그림이 구미로 군요."
안에 그려진 구미호 그림을 보니까 뭔가 가슴속이 아려왔다.
소중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그리운 감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휴스대장은 멋없는 미소로 답해줬다.
하지만 그 미소에 만족감이 엿보였다.
"가시는 겁니까?"
"네, 이곳에 할 일이 또 있습니다."
"혹시 엘프의 숲으로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아하하, 갑자기 조상님이 쓰신 일기를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한 사냥꾼이 엘프의 숲으로 자주 드나들었다고 말이죠."
"발리아 술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억속에 발리아 술탄은 이곳 국경지대 마을에 살던 촌장의 이름이었다.
발리아의 핏줄이 눈앞에 있는 휴스대장이었고 저 꼬부랑 콧수염을 보니 그자의 후손인게 확실했다.
그렇고 보니까 이 제국의 이름이 발리아 제국이었다.
수천 년전엔 제국이 아닌 왕국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뭔가 기억 속에 빈공간이 느껴졌다.
기억 날 듯 말 듯한 기분이다.
꼬추 요도입구가 짜증날 정도로 간지럽다.
그렇게 꾸물거리는 감각에 신경 쓰다 귓가에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관씨!"
엘루나씨가 거대한 가슴을 흔들며 내게로 뛰어왔다.
뒤에서 멀린은 공중을 부유해서 따라오고 말이다.
"일어나셨군요."
"너무했어요. 못 일어날 정도로 해주다니요!"
목소리는 화가 났지만 얼굴은 행복한 표정이다.
졸업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싶다.
"여기 있던 게이트는 사라졌습니다."
"보관씨가 처리했어요? 어디 다친데 없어요?"
"예, 멀쩡합니다."
이곳저곳 확인하는 엘루나씨다.
헌신적인 엘프의 피를 물려받은 만큼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으니.
그녀의 반응이 이럴만했다.
"도시의 인원들을 뺄 정도면 큰 게이트였을 텐데 다행이다."
반면에 멀린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관계를 가질때면 누구보다 복종하는 그녀지만 밖에서만큼은 본래의 냉혹한 모습이다.
"동료분들이 있으셨군요."
"누구지?"
"이 도시를 지키고 있는 4부대 지휘관 휴스대장입니다."
"헌터가 아니군."
"그게제국 사정상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알았다."
멀린이 휴스대장에게 많은걸 물어보려는 태도였지만 이내 멈췄다.
제국을 따르는 소시민이 제국의 깊은 곳까지 알 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싶다.
휴스가 아닌 엘리스를 만났다면 이단 심판관으로써 의무를 수행했었을 거다.
그랬다.
사실 멀린은 마탑으로부터 지원요청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빅토르의 부탁과 마탑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연기였다.
발리아 제국을 속이기 위한 연기.
마녀가세상을 위해 희생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추종하고 있는 존재에게 모든걸 희생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지금 가지고 있는 권력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신성국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멀린은 모두 내게 도움이 되려하는 것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다.
신성국측에서 발리아 제국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니 은밀한 감시를 부탁했다.
최근 일어난 신성국의 사건으로 인해 크게 움직이지 못하니 멀린을 보낸 거고 말이다.
"목적이 같으실 테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도시 사정을 아는데 더 손을 벌릴수가 없습니다. 이미 보상을 받은것도 있고요."
"이거.. 여러모로 죄송스럽군요. 은인이자 손님을 이렇게 보낸다는 것에 아쉽습니다."
휴스 대장은 자신들의 처지에 한숨이 나오고 있었다.
세상이 어지럽지만 그는 그래도 정을 가지고 사는 보기드문 사람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간단한 절차만 진행하고 국경지대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휴스대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뿐인걸 알고 있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일들을 빠르게 해결해주려 하는 모습이다.
***
엘프숲으로 지나갈 수 있는 통행증을 즉시 발급받았다.
길게 뻗어진 철창 너머로 사막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아 맞다. 보관씨도 전생엔 이 근처에서 살았다고 했죠?"
"네, 금지된 숲 안에서 살았었죠."
"그 숲은 사라졌다는게 아쉬워요. 보관씨가 살던 곳에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금지된 숲 역시도 천사들이 봉인했을 거다.
위험한 지역들을 대부분 천사들이 관여했으니까.
"저기 숲이보이네."
멀린은 사막끝에 보이는 숲을 봤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을법한 오아시스가 아니었다.
거대산림지대로 나무들이 크고 많아서 내부에 들어가면 빛이 차단될 정도의 규모였다.
한창 마몬인 저 숲을 던전으로 만들었을 과거가 흐릿하게 지나갔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흐..흑흑.."
"엘루나씨..?"
엘루나씨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눈 끝에서 떨어졌다.
방금전까지밝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고 슬퍼하고 있었다.
"엘루나씨 괜찮아요."
"보관씨를 못본다는 생각에 갑자기너무 슬퍼서 흑흑.."
정령의 여왕으로 각성했지만 막상 현실이 오자 마음이 찡해진 그녀였다.
그녀에게 다가가 살포시 안아줬다.
"흐아아앙!"
나를 꽉 잡고선 다시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녀의 세계에서 만큼은 나를 크게 느끼고 있었던거다.
악마들의 기준에선 난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겠지만 그녀는 악마들과 달리 엘프였다.
약간의 악마적 성향이 있었으나 본래의 모습은 작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몇 개월 정도만 떨어져 있다가 다시 내게 온다고 말했지만 그마저도 슬픈가보다.
"너무 슬퍼하지마요. 엘루나씨."
"하지만..하지만...보관씨를 볼 수 없는걸요..흐..흑..흐아앙.."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줬다.
그 따스한 스킨쉽이 더 그녀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지 울음소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엘프숲에서 나오는 날을 알려주세요. 제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요."
"흑흑..아니에요. 보관씨를 힘들게 하고싶지 않는데..이런 제가 너무 싫어요."
인간보다도 정이라는 힘에 약한 엘프였다.
그녀의 목에 걸린 족쇄보다도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엘루나씨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했다.
저리도 사랑하는데 그녀의 마음에 부응해주지 못하는 처지였으니까.
해야 할 일이 없었다면 엘프의 숲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갔을거다.
하지만 어떻게든 엘루나씨를 달래며 엘프숲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입구부터 시작된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고 다시 엘루나씨를 바라봤다.
울음이 그친 그녀의 눈두덩이가 퉁퉁 붉게 물들어있었다.
"부모님을 만나고.. 꼭 보관씨를 만나러 갈게요!"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떨어져도 엘루나씨는 제 마음 속에 있다는걸요. 제가 잊을 거라고 부정하지도 마시고 건강하게 다시 봐요."
"...네."
엘루나씨는 또 뭉클한다 뭉글한 대답으로 코를 먹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잠시 이별의 키스를 해줬다.
열정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떨리던 그녀의 몸이 사그라드는걸느꼈다.
침이 실처럼 되며 서로가 멀어졌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멀린과 내게 손을 흔들어줬다.
"멀린! 너무 보관씨랑 섹스만 하지말고! 그리고 다치지 말아줘!"
"응, 걱정 마."
엘루나씨는 그렇게 뒷모습만 보이며 숲안으로 들어갔다.
"떠났네요."
"그럼 우리도 가지.."
-딱.
멀린은 손가락을 튕기며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공간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무인 항공기가 보였다.
"우리들을 감시하던 여인이 하나 있던데 어쩔까?"
"괜찮아요. 신경쓰지 않아도.."
"벌써 손을 써뒀나보군."
"운이 좋았죠."
멀린과 나는 무인 항공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던 중에 멀린과 질펀한 섹스를 하는건 당연했다.
엘루나씨가 없는 만큼 그녀가 몇배는 심하게 당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나와 함께했다.
엘루나씨가 떠났다는 건 바로 잊혀진듯 말이다.
***
밤이 되서야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오피스텔에서 난 쇼파에 누워 손에 들린 반지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찝찝한 감각이 떠나지 않았다.
뭔가 알고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기분은 금방 잊혀질텐데 이 반지만 보고 있으면 다시 생각이 났다.
"주인님~ 공휴일인데 뭐하고 있어요~"
"그냥 누워있어."
아스가 웃으면서 내 앞에 왔다.
"그게 뭐에요?"
"이거? 국경도시에 있는 게이트를 처리하고 보상으로 받았어. 이건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서."
"으흥. 그래요? 한번 봐도 될까요?"
아스는 반지받고 나서 자세히 들여다 봤다.
"허름하네요."
"오래된 물건이라고 하더라."
"이런건.. 마몬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레전더리펠리스의 주인.
황금지갑이라 불리는 마몬이라면 이 반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다.
과거에 세계의 모든 보물들을 훔치기도 했었고, 지금도 희귀한 것들이 그녀를 통해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마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