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1. 제이의 이상한 친구들(5)
PM 5:15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자율훈련 루틴을 마쳤다. 아침에 일어난 소동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 탓이다.
[흐으으음…….]
평소 공상계와 관련한 일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메리였지만, 이번에는 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얘는 아침 식사가 끝난 이후부터 내내 이랬다.
“아직도 그거 생각해?”
[쎅쓰.]
―쏴아아아아
샤워기 레버를 열고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 그리고 손에 쥔 스몰 모드의 메리를 귀에 매달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지난 사흘 간 메리를 어떻게 들고 다닐지 연구했다.
내 주무기는 창이니 장검모드로 들고 다니긴 애매했고, 그렇다고 검집도 없는 이 녀석을 주머니에 계속 넣고 다니자니 자꾸 바지에 구멍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귀걸이.
“니가 너무 작으니깐 검이라기 보단 십자가 같네. 어때, 너도 주머니 속에 있는 것보단 이게 편하지? 시야도 확보 되니까 덜 답답할 거 아냐.”
[쎅쓰.]
“순 건성이야.”
메리는 여전히 고민이 깊은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유령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놈의 정체를 도무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으니까.
‘대체 뭘 찾고 있는 걸까.’
유령.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 군주의 영향을 받은 숙주가 펼치는 마법에 의해발생한 영혼. 이놈이 찾는 게 무엇인지가 메리와 나의 최대 관심사다.
‘귀중품이나 돈, 평범한 아티팩트 같은 건 절대 아니야. 이미 검증됐어.’
우리 제3기숙사와 아이웨이가 거주 중인 제1기숙사가 털린 뒤. 아카데미 측에서는 비공개 사안을 공지했다.
학내 은행, 박물관 및 무구 보관 창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카데미는 요 며칠 사이 벌어진 이 사건을 연맹에 보고했으며, 조만간 괴이현상보고 화化 되어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 공지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외부적 힘의 간섭으로부터 안전하기 짝이 없는 아카데미. 그 중에서도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박물관 등의 장소조차 뚫렸다는 것.
그리고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는 것.
‘내 메리처럼, 남들은 잘 모르지만 대단한 가치를 지닌 보물 찾고 있는 걸까.’
―솨아아아아아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가 검은 샤워장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
저녁 식사를 위해 기숙사로 복귀했다.
[오늘 훈련을 적당히 끊은 건 좋은 생각이다. 집중력이 무뎌지면 부상 위험이 높아지니 차라리 휴식을 취하는 편이 바람직해.]
“그래.”
각성 이후 내가 보낸 약 70시간 중, 나는 이미 60시간 가까이를 훈련으로 소비했다.
목표한 실력을 초조한 마음이 따라잡기엔, 내 육체는 한계가 명확했다.
“혀엉! 훈련 끝나셨어요오?”
기숙사 근처의 숲길에서 선우와 마주쳤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어댔다.
“응. 저녁은 기숙사에서 먹으려고. 식사했니?”
“아니요. 배가 고파서 돌아왔어요. 메리는 귀걸이가 됐네? 안녕.”
[쎅쓰.]
선우가 볼에 흙이 묻은 채로 빙그레웃었다.
입고 있는 청록색 점프 수트와 들고 있는 바구니에도 흙이 잔뜩 뭍은 걸 보니, 또 숲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형, 혹시 나물도 좋아하세요?”
“나물 좋지. 그거 캐러 갔던 거야?”
“네! 한 번 보실래요?”
선우가 자랑하듯 바구니를 열었다.
검은색 바구니의 안에는 향긋한 산내음 가득한 나물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별꽃, 이건 벼룩나물, 이건 지칭개. 그리고 요건 말냉이라고 해요.”
“냉이? 냉이가 2월 중순에도 나?”
아무리 제주도라고는 해도, 아카데미가 위치한 한라국립공원은 산이다.
즉, 예년 기온보다 언제나 늘 더 춥다는 뜻이다.
“따뜻한 곳에서는 드문드문 나긴 하는데, 저도 아카데미 주변 숲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선우의 말은 이랬다.
어리목쪽 숲에 몇 주 전부터 지열이 올라오는 지대가 생성됐다고.
그래서 원래는 몇 주 더 기다려야 필 나물이나 봄꽃들이 그곳 주위에서만 빨리 피어 있었다고.
“신기하죠? 영맥靈脈의 영향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구요. 그냥 순수한 대지의 온기였어요.”
“뭐야 그게. 화산 폭발 전조 같은 건 아니겠지.”
“아하하, 설마요.”
선우의 환한 미소를 보니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선우는 최상급 대지의 정령과 계약하고 있으니까.
“아참, 아까 전에 거기서 라라 교수님을 뵀어요.”
“라라 교수? 치유술 전공?”
라라 마르티넥Lara Martinek.
34세의 C급 힐러다. 하지만 본업이 의학 박사에 마력치유술 박사인학자 출신 헌터라서, 학술 역량만큼은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교수다.
연구에 바빠 수업만 몇 개 할 뿐 담임이나 지도교수를 하지 않았었는데, 아이린을 개인적으로 지도해주기 시작한 일을 계기로 상당히 유명해졌다.
‘둘이 붙어 있는 그림이 워낙 보기 좋으니까.’
그렇다. 라라 교수도 아주 예쁘다.
“네, 그 라라 교수님이요. 무언가를 계속 찾고 계시는 중이시더라구요.”
“숲 속에서 뭘 찾으신……아.”
오늘 아침 일의 충격으로 까먹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오빠, 혹시 타임캡슐 같은 거. 본 적 없으세요?”
―오빠, 아셨죠? 타임캡슐이랑 관련된 소문을 들으시면, 저한테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내가 감히 누구의 부탁이라고 그걸 까먹고 있었던 걸까.
“선우야.”
“네?”
“거기가 어디라고?”
그래. 이게 바로 아이린에게 잃었던 점수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다!
**
선우가 채집해온 나물로 비빔밥을 해먹은 뒤, 우리는 아카데미를 나와 숲으로 향했다.
녀석이 말한 ‘지열이 올라오는 장소’는 아카데미를 감싸고 있는 한라국립공원의 서쪽에 위치했다.
선우와 함께 인적이 전혀 없는 숲길을 한참동안 걷던 중이었다. 무언가 주변 기온이 올라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 왔어요. 저기에요, 형.”
선우가 가리킨 곳은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겨우내 쌓인 눈이 소복하게 쌓여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을 포근히 덮은 숲 속 한가운데에.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푸르른 대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네.”
“그렇죠?”
달빛이 이른 봄이 온 대지를 비추었다. 신비로움이 감도는 그 평원에서, 늦겨울 중에 피어있는 꽃과 풀들의 냄새에 아름다움을 느꼈다.
나와 선우는 천천히 숲을 지나 대지의 은총을 받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어? 교수님이다. 저기 계시네요.”
선우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정말로 라라 마르티넥 교수가 있었다.
―깡 깡 깡
마스코트와 같은 새하얀 가운이 아닌, 검정 민소매 티와 레깅스를 입은 교수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호미질로 땅을 파고 있었다.
―깡 깡 깡
꼴이야 웃겼지만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 덕분에 연예인 컨셉 화보촬영이나 예능 프로 촬영현장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움직임과 눈빛에서 초조함을 읽어냈다.
‘호미질에 신경질이 섞여 있어.’
선우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선우 학생이구나.”
라라 교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렸고,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들이 그녀의 가슴골로 미끄러져 내렸다.
“왜 돌아왔니?”
“아, 그게….”
“안녕하세요, 교수님. 전투분과 창술전공 2학년 김제이입니다.”
“자네는 본 기억이 있는데.”
라라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70cm는 확실히 넘을 정도로 늘씬한 그녀다. 서양인 특유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이기적인 기럭지에 살짝 감탄하며, 재차 인사했다.
“아이린과 함께 몇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아아, 그 친구. …자네 혹시 최근에 각성했나? 골격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네, 사흘 전에 각성했습니다.”
“축하해. 혹시 고유능력을 알 수 있을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려나.”
걸렸다.
“사실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 늦은 시간에 교외에서 교수님을 찾아뵌 이유가 제 고유능력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니.”
라라 마르티넥.
아이린에게 듣기로, 그녀의 지적호기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치유술전공자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이 바로 ‘물음표살인마’.
나는 바로 이 점을 활용해 그녀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힘쓰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참, 많이 더우신 것 같은데 티타임 어떠세요?”
미리 준비한 차갑게 식힌 밀크티. 그리고 브레첼을 흔들었다.
뭔가 쫓기는 듯했던 라라 교수의 깊은 눈이 조금 온화해졌다.
“응, 그렇게 하자.”
**
나는 신나게 이빨을 털었다.
각성을 하긴 했는데, 아무리 시험을 해봐도 고유능력이 뭔지 모르겠다고.
끙끙 앓기만 하다가 라라 교수가 상담 적임자인 것 같아서 찾아 왔다고.
“측정기는 활용해봤니?”
“헌터 라이센스 등록을 위해서 예약은 잡아놨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측정기로 신체능력 파악은 쉽지만 고유능력 계측은 어렵잖아요.”
“그야 그렇지. 고유능력은 본인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 자신. 즉, 본인의 느낌과 감각이 마력을 통해 구현되는 일종의 존재증명이니까.”
“각성은 했지만 본인의 고유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저도 그 경우가 아닐까 싶어서.”
“헌터가 아닌 단순 각성자들 중에는 흔한 케이스지. 전문용어로 ‘불완전각성’ 이라고 해.”
후릅, 하고 라라 교수가 밀크티를 마셨다. 아까부터 꼴깍꼴깍 잘 마시는 게, 물 한 모금 안 먹고 호미질을 한 모양.
나는 그녀가 먹기 좋게 브레첼을 뜯어주며 떡밥을 던졌다.
“그래서 교수님께 상담을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제 능력이… 성적인 부분과 관련이 된 게 아닌가 의심이 되어서요.”
“잠깐.”
라라 교수가 말을 끊었다.
그녀가 우리 얘기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경청 중인 선우에게지시했다.
“선우 학생은 먼저 돌아가.”
“…왜 그러세요, 교수님?”
“자네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지. 즉, 대한민국 민법상으로는 성인이지만 우리 독일연방법에서는 미성년이라는 뜻이야. 그런 자네 앞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해. 가줬으면 좋겠어.”
“그런…. 저도 알 거 다 아는데…….”
선우의 귀여운 얼굴이 울상이 됐다.
이에 라라 교수가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
선우의 긴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 직후 황급히 짐을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혀, 형! 저 먼저 가볼게요. 아, 근데 돌아오실 때는 어떻게…….”
“내가 책임지고 바래다주도록 하지.”
“네! 교수님, 형을 잘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형, 이따 봬요!”
그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뭐라고 하셨길래 저래요?”
“소녀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이 많은 법이야.”
교수님도 여자니까 캐묻지 말라는 건가. 하여간 여자들 말 돌리는 솜씨는.
“계속해보자. 성적인 고유능력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성적인 고유능력이기 때문에 자네가 자각을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아, 그게.”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이 <아이린에게 잃은 점수 만회하기> 계획에서 중요한 건, 자연스럽게 라라 교수에게서 타임캡슐의 정보를 얻어내는 것.
첫 단추는 잘 꿰어졌으니 다음은 조심스럽게 엮을 뿐.
“교수님.”
“편하게 말해. 난 의사야.”
나는 두 번째 단추를 꿰기 시작했다.
“제… 쥬지가 이상해요.”
잠시버퍼링이 오갔다.
“…자네의 남성기가?”
라라 교수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나도존나 쪽팔렸지만 그냥 눈 딱 감고 말을 이었다.
“사실, 각성을 한 뒤부터 성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성기 크기의 성장은 각성 여부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정설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남성기male genital organ는 각성을 통해 근민체의 세 영역이 성장한다고 해도 발기 조직erectile tissue이나 반사 발기reflex erection 등의 해면체 운동력이 증가할 뿐이니까. 흠… 그런데 남성기가 커졌다라.”
라라 교수가 여전히 약간 붉어진 얼굴로 밀크티를 마셨다.
“…얼마나… 커진 건데?”
“길이는 2cm 정도고, 굵기도 1cm 이상 두꺼워진 것 같습니다.”
이건 진짜다. 각성 이후, 그리고 어제 정력 스탯을 올린 뒤로 지난 사흘 간 내 성기는 대충 그 정도가 커졌다.
자로 재서 전후 비교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매일 보는 내 고추라서 미묘한 차이도 민감하게 알 수 있다.
정력 수치를 더 올리면 더 커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서, 나는 반쯤은 진심으로 지금 이 상담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발기 후의 크기 차이가 그렇게 됐다는 말이니?”
“전후 모두 그렇습니다. 정확히 측정해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합니다.”
라라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군. 학회 보고감이야.”
좋다. 딱 좋다.
여기까지가 내가 딱 의도한대로다.
이제 여기서 말을 돌려 잡담을 조금 나누다가, 교수님에게 타임캡슐에 대한 이야기를 캐내면 된다.
‘내 비밀을 알게 됐으니 교수도 거래 심리 때문에 자기 개인사인 타임캡슐 얘기를 쉽게 해주려 할 거야.’
그럼 내가 그 정보를 바탕으로타임캡슐을 찾고, 그걸 아이린에게 알려주면!
‘만사가오케이지.’
기쁜 마음에 밀크티를 마시며 속으로 실실거렸다.
“호, 혹시.”
그때. 나의 앙큼한 계획에 이용당할 예정이었던 라라 교수가.
“혹시, 보여줄 수 있나.”
“…뭐를요?”
“……돌연변이로 추정되는… 부위를.”
탈선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