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 제이의 이상한 친구들(7)
타임캡슐.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을 넣고 보존했다가 특정 시기에 열어서 추억을 확인하는 캡슐을말한다.
라라 교수가 드디어 그것을 입에 담은 것이다.
“타임캡슐이요?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건지.”
“음….”
그간 다소 멍하게, 하지만 약간 들떠보였던 그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는 한데. …들어볼래?”
“저야 좋죠.”
무조건 좋다. 아이린에게 점수 따기 위해서도, 교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도. 그리고 만에 하나 연관 있을지 모를 악마 봉인과 관련해서도.
“차에 앉아서 얘기하자.”
얘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흰색 독일차 조수석에 앉았고, 그녀는 정면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내가 우리 아카데미 출신인 건 알고 있니.”
“아이린에게 들었던 것 같아요.”
“맞아. 졸업한지 벌써 15년이나 됐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라라 교수는 16살 3월에 아카데미에 입학해 19살 2월에 졸업했다고 한다.
무척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를. 그것도 고향인 독일연방과 아주 먼 외국에 다니게 된 그녀는 지금과 성격이 많이 달랐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성격이 아주 예민했어. 그래서 친구가 한 명도 없었지. 사실은 지금도 없지만 말이야.”
“성격 좋으신데요. 정말로요.”
라라의 이미지가 멍 때리는 천재 같은 느낌? 그런 것 때문에 거리감이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 이렇게 대화해보니 성격에하자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고마워.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20대까지의 나는성격에 문제가 많았어. 그래서 자주 따돌림을 당하곤 했지.”
“아, 저런….”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으니 염려 마.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남과 거리를 두기를 나 스스로가 바라기도 했었고.”
그녀가 진짜로아무렇지 않아보여서 나는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어.”
“그게타임캡슐과 연관된 건가요?”
“응.”
라라 교수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1학년 때였어. 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지. 나는 운이 좋았어. 반 친구 모두가 예민하고 버릇없는 나를 이해해줬거든.”
―라라는 항상 질문이 많구나. 너무 귀여워. 라라야, 언니랑 밀크티 마실래?
―라라 성격이 저래도 사춘기니까 봐주자. 우리는 저때 안 저랬냐.
―라라 질문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니까 좋다. 어차피 시험을 망칠텐데, 핑계거리가 생겼잖아.
―라라는 아주 똑똑한 애야. 우리 같은 멍청이들이 이해해줘야 돼. 천재는 원래 저런 거잖아.
하지만 라라 교수는 친구들의 호의를 아주 매몰차게 외면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결같이 싸가지 없게 굴었던 라라 마르티넥을, 친구들은 사랑으로 품어주었다고.
“나는 겉으로는 싫은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친구들을 참 좋아했어. 까칠하고 예민한 척 굴었어도, 사실은 친구들에게 관심 받고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느끼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후회보다는 그리움을 머금은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런데 1학년 종업식이 가까워질 무렵이었어. 반 친구들이 타임캡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지.”
―야! 타임캡슐 뭐넣을 거야? 나는 이거. 소풍 갔을 때 사진 넣을 거야.
―롤링페이퍼도 쓰자. 나중에 보면 되게 재미있겠다, 그치!
라라 교수는 초조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줄곧 틱틱거려도 자신을 귀엽게만 봐주었던 친구들이.
―…….
타임캡슐에 대한 이야기만은.
―…….
오직 타임캡슐에 대한 것만은 쏙 빼놓고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지.”
항상 멍하고 깊은 눈이 인상적인 라라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겉으로는 나에게 여전히 친절했으면서, 타임캡슐 얘기는 완전히 배제했어. 그리고 그렇게 종업식이 됐고, 친구들은 모두 집에 가는 척을 해놓고 타임캡슐을 묻었지. 나만 쏙 빼놓고 말이야.”
“되게 서운하셨겠다.”
“물론. 그래서 나는 홧김에 그 날 저녁에 열린 송별회에도 가지 않았어. 정말 너무 화가 났었거든.”
나라도 그랬을 거다. 뒤통수 제대로 맞은 거였으니까. 그 비참함은 차마 말로 표현 못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요? 친구 분들에게 따지시거나 타임캡슐을 파보시지는 않으셨어요?”
“너무 분해서, 원래는 다음 날 아침에 당장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왜요?”
내 질문에 라라교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비죽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친구들이 모두 죽어버렸거든.”
**
라라 교수와 헤어진 뒤, 기숙사로돌아와 뉴스를 검색했다.
―『
200X년 2월 10일 오후 8시, 제4국제헌터아카데미 이스트 블루 학내에 소재한 주점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
헌터연맹과 갈등을 빚고 있던 이적 단체에 의해 벌어진 이 사건은 이스트 블루 1학년 생도 76명, 2학년 생도 21명, 3학년 생도 5명 외 민간인을포함한 총 151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중략)』
‘진짜 큰 사건이었구나. 전혀 몰랐네.’
라라 교수의 친구들은 종업식 날 테러에 휩쓸려 전원 사망했다고 한다.
어린 라라 교수는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과 죽은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기가 막힌 우연으로 생존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고.
그래서 몇 년전까지만 해도 몹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었다고 한다.
―나는 공부와 일에만 집중했어. 처음에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는데, 하다 보니 공부와 일이 좋아서 그 일에 대한 건은 까맣게 잊고 지냈었지.
그렇게 라라 교수는 타임캡슐에 대한 일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계속 타임캡슐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궁금해. 너무 궁금해.
―나를 빼놓고 친구들이 타임캡슐 안에 무엇을 넣어놓았을 지가 너무 궁금한 거야.
―혹시 내 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혹시 내 욕을 해놓은 건 아닐까.
―그게 너무 궁금해졌어.
여기까지가 라라 교수의 사연 이야기였고, 그녀의 용건은 간단했다.
―그래서. 혹시 제이 네가 괜찮으면 타임캡슐찾는 걸 도와줄 수 있겠니?
뭐, 마지막 부탁은 예상한 거긴 했다.
문제는 메리가 말했던 것처럼, 뭔가 뒤가 캥기는 느낌이 든다는 점.
“뒷골이 묘하게 당기기는 하는데.”
[그렇지? 캐내고 나니까 이 몸의 말이 와닿지?]
“유령에 대한 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지만, 일단은 조금 그래. 내가 라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 집착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아.”
라라 교수는 상식인이다. 그리고 상식인은 보통, 타임캡슐을 찾기 위해 야밤의 국립공원 숲속에서 호미질을 하진 않는다.
‘좋아.’
결단은 빨랐다.
“인드라이브를 해보자. 지금쯤이면 교수님도 잠자리에 드셨겠지.”
[쎅쓰한 판단이야, 파트너.]
나와 메리는 지금이 바로 아영 누나와의 사건을 통해 얻은 새로운 권능을 사용해볼 시점이라 여겼다.
‘시스템 확인, 인드라이브.’
〓〓
[no.69: 인드라이브 lv.1]
69번째 악마 군주 데카바리아의 권능. 타인을 자신의 공상계에 강제로 초대할 수 있음. (※공상 type: )
〓〓
침대에 누운 뒤, 조심스레 주문을 읊었다.
‘음란한힘을 지닌 좆찌여.’
‘그대의 진정한 힘을 내게 빌려다오.’
‘너와의 계약에 따라 명한다.’
‘봉인, 해제!’
―우우우우우우웅
왼쪽 귀에 매달려 있던 메리의 몸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검신이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왔고, 이내 녀석은 예의 그 흰색 딜도 모양으로 변했다.
‘다음이 이거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딜도를 잡았다. 그리고 미리 꺼내놓은 악마 군주 데카라비아의 정수를 집어, 딜도에 꽂아 넣었다.
나는 주문을 읊조렸다.
‘어두운 꿈을 다스리는 힘이여.’
‘내 앞에 너의 음란한 문을 열어다오.’
‘데카라비아Decarabia!’
[▶ 확인. 공상계 다이브 허가 완료]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나의 꿈속으로 의식을 점프시켰다. 어쩐지 영혼이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과 함께, 어두컴컴한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내 꿈 속 세상이야?’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백색의 방 안이었다.
모든 것이, 하얬다.
우리가 있는 제3기숙사 건물도.
저 멀리 보이는 아카데미 본관도.
녹음에 가려진 한라산도.
―둥실 둥실
하늘을 날아 허공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자, 제주도 전체가 온통 하얀색 일색으로 내려다보였다.
그때, 나의 자지와 일체화 되어 있던 메리가 정정을 해주었다.
[여긴 공상계空想界다. 뭐, 네놈의 의식세계에서 굴절되고 왜곡된 이미지이긴 한데, 어쨌든 그래.]
‘그게 꿈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데?’
[네놈 꿈의 스케일은 이렇게 크고 구체적일 수가 없다는 뜻이지. 저길 봐.]
귀두가 향하는 곳을 보자, 하얗게 탈색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지점이 보였다.
서귀포시 내의 한 핑크색 건물이었다.
‘저거 뭐야. 저기만 컬러네.’
[라라 마르티넥의 집.]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네놈의 정액이 저 여자에게 묻어 있는 한, 저 여자는 이 몸의 감지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어서 가봐.]
―[▶▶▶▶▶▶▶▶▶]
핑크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라라의 집이었다. 그녀의 집은 해안이 보이는 고급 레지던스오피스텔이었는데, 나는 둥실둥실 허공을 날아 눈 깜박할 새에 그녀의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공상계니까 이런 것도 되겠지?’
―쑤우우욱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닫혀있는 문을 그대로 통과해, 화살표를 따라가 핑크색 문 앞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부터가 바로 네 영역이야. 정신을 집중해. 이제부터 네 꿈속으로 그 여자를 초대해야 하니까.]
‘알았어.’
―딸깍
문을 열었다.
방 안은, 거대한 침대 하나와 하얀색 벽지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심심한 곳이었다.
하얀 킹사이즈의 침대 위에는 은색 네글리제와 순백의 티팬티만 입은 라라 마르티넥이 색색 잠들어 있었는데, 이불이 없어서 살짝 추워 보였다.
‘인테리어가 뭐 이리 가난해.’
[이 멍청아! 그러니까 집중하라고 했잖아! 구체적인 이미지도 안 잡아놓고 냅다 들어가니까 그 모양이지. 네 인드라이브는 레벨이 고작 1이라서 기능이 아주 한정적이란 말이야.]
‘앞으로 주의할게.’
메리에게 사과한 뒤 라라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투명한 유체 상태였던 내 몸이 점차 제 색을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한다?’
[쎅쓰.]
나는 나체인 상태로 침대 위에 올라갔다. 긴장된 마음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분 좋은 성적 긴장감이었다.
‘아.’
그녀의 가녀린 등과 그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하면서도 탄력적인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곧장 발기를 해버렸다.
나는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진 음경을 살짝 가리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교수님, 교수님. 일어나세요.”
라라 마르티넥의 길고 얇은 잿빛 눈썹이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아직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하얗고 작지만 놀라울 정도로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더럽게 이쁘다. 이여자가 내 혀를 빨면서 자지를 만져줬다니.’
부담스럽게 선명한 인상을가진 서양 미녀 상이 아닌, 동양인이 선호하는 오밀조밀한 미인상인 라라다. 그녀의 잠든 얼굴은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웠다.
“교수님? 안 일어나시면… 키스할 거에요.”
어차피 꿈이니 막 나가기로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키스를 한 사이이기도 하고. 그리고 아마 내일도 할 것 같다.
“…….”
“진짜 합니다?”
잠든 라라의 탐스러운 입술에 내 입술을 붙였다. 옆으로 누운 몸을 돌려 정면으로 놓고, 내 몸을 그녀의 위로 올렸다. 하체만 살짝 그녀의 허벅다리 위에 올린 채, 그녀의 볼과 탐스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뽀뽀했다.
그때.
―사아아아아아아
라라가 눈을 떴다.
“……넌.”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위험해!]
내 말과 메리의 말이 겹쳤다. 그리고 라라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경한 내가 황급히 뒤로 뛰었다.
―서걱
그녀의 손끝에 복근이 얇게 베였다.
‘이건……!’
C급 힐러 라라 마르티넥의 손끝에 맺힌 힘. 그것은 강기鋼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