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 제이의 이상한 친구들(8)
―우웅! 우우웅!
양손에 은빛 수강을 두른 라라 마르티넥이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내 발은 몹시 바빠졌다.
“…….”
“교수님! 왜 이러시는 거에요!”
왼손으로 복부 출혈 부위를 막으며 큰 소리를 그녀를 불렀다. 동시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벽한 사면초가였다.
“교수님! 저예요! 제이에요! 왜 저를 공격하세요? 제발 그만 두세요.”
“…….”
라라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는 날 비추지 않았다.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우웅! 우우웅!
더 이상한 점은 C급 힐러인 그녀가 대체 어떻게수강手鋼을 뽑아냈냐는 것이다. 강기는 전투계, 그 중에서도 S급 이상의 재능 있는 자들만 사용 가능한 특급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메리, 어떻게 할까. 나 교수님 못 이겨!’
[시간을 끌어. 조사할 시간이 필요해.]
이런 씨팔!
―콰앙!
라라 교수의 손에 침대가 반쪽이 됐다. 찢겨진 베개 사이로 오리털이 허공에 날아다녔다. 티끌의 얼룩도 없는 흰색 방 안에서, 라라 교수가 추궁했다.
“네놈은 누구냐.”
“교, 교수님 왜 그러세요. 저 제이잖아요, 아까 만났었던 제이요! 내일 연구실에 찾아가기로 했던 김제이!”
“아니. 네놈은 달콤한 혀와 신비한 불막대를 가진 귀여운 제이가 아니야.”
―우우우우우우웅
라라 마르티넥의 오른손 맺힌 수강이 이제는 2m가 넘게 길어졌다. 그녀가 길어진 수강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얀 강기가 마치 별도로 존재하는 창처럼 분리되었다.
‘저게 뭔 재주야 대체?!’
라라 교수가 공허한 눈빛을 하며 강기로 만들어진 백색의 창을 쥐었다.
“고약한 악마의 냄새가 난다.”
“!”
“네놈. 누구에게 씌어있는 것이냐.”
…가만. 설마 내가 가진 악마 군주의 정수 때문에 이러는 건가?!
[파트너! 빨리 도망쳐! 지금 당장!]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메리의 조언대로 황급히 주문을 외웠다.
‘어두운 꿈을 다스리는 힘이여! 내 앞에너의 음란한 문을 열어다오! 데카라비아!’
주문 영창이 끝나고 나의 의식 빠르게 점멸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발할라에 들 자격도 없는 놈이로군.”
라라 교수가 강기의 창을 쥔 오른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렀다.
―파삭
고개를 내렸다.
왼쪽 심장에 박힌 하얀 강기가 나의 영혼을 불사르고 있었다.
‘……아.’
나는, 죽었다.
**
“헉!”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내 방 천장.
창밖으로 파르스름한 새벽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온 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이마에 잔뜩 맺힌 굵은 땀방울을 닦아냈다.
[환통이 심할 거야. 공상계에 있는 네놈의 근원이 직접 타격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잔뜩 쉰 목으로 물었다.
창밖을 보고 있던 메리가 허공을 날아 내 앞에 둥둥 떴다.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어. 라라 마르티넥은 악마 군주의 숙주가 맞아.]
“계속해봐.”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나는 베개에 머리를 누인 상태로 메리의 추리를 들었다.
[발키리야. 라라 마르티넥의 몸에는 상당히 진한 신혈神血이 흐르고 있어. 그 원류는 바로, 신대 노르드의 전투처녀였던 발키리지.]
발키리valkyrja. 고대 노르드 신화에 등장하는 반신반인의 여전사들이다.
[라라 마르티넥은 힐러로 각성했지만, 자신의 몸 안에 잠재된 신혈을 깨우지 못 한 상태였어. 그 탓에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천천히 늙고, 머리와 눈의 색이 천연 은발이었다는 점 등이 달랐을 뿐이지. 아마 그 나이 먹고 키스도 못 해본 숫처녀인 데에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발키리의 영향도 컸을 거야.]
“은발…. 그렇네. 회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은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
지구 인간 중, 노화가 아닌 본래의 천연 은발을 가진 이들은 극히 희귀하다.
노르드인의 후손인 스칸디나비안 등의 유럽인 중에서도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 은색의 모발을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고대 노르드인들에게 은발銀髮은 신의 피를 이었다는 의미를 지녔으니까. 아마도 신혈은 마력 적성이 맞는 자들에게만 발현되는 격세유전으로 전해져 왔을테지.]
“그런데 악마 군주의 숙주가 되면서부터 신혈의 힘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까 꿈속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고?”
[쎅쓰. 앞으로 공상계에서 라라를 만나면 그냥 발키리구나 생각해.]
메리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내게 갖다 주었다. 검이 혼자 날아다니며 물병을 옮기는 모습이 재미있긴 했지만, 나는 몸이 너무 쑤시고 아파서 그 광경을 즐길 수가 없었다.
“하아. 살 것 같네. 고마워.”
[이제 기존에 찾아놓았던 단서들을 토대로 정리해보지.]
1. 김하리의 추측
-범인은 잊혀진 고대 노르드 마법을 사용하는 자이다.
-그 마법은 산 자의 영혼을 임의적으로 조종하는 아주 독특한 힘이다.
-그는 아카데미의 마법사가 아니다.
[이 조건에 라라는 모두 부합하지. 그녀는 아카데미 직원이지만 힐러이기 때문에 마법사 외 인물이고, 발키리의 피를 이었으니 특별한 권능을 보유하고 있을 거야.]
2. 낸시의 추측
-범인은 물질적 가치가 적은 특별한 물건을 찾고 있는 자일 것이다.
[타임캡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아…. 어쩌면 좋지.”
라라 교수가 악마 군주의 숙주인 걸 알아낸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악마를 떼어놓을 방법이 문제다.
“방법 없냐?”
[쎅쓰. 첫 번째, 쉬우면서도 동시에 어려운 방법이 있어.]
“뭔데.”
[적합한 숙주를 준비한 다음, 현 숙주를 죽이는 거야. 물론 준비한 숙주로 악마가 갈아타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 골치 아파질 수 있지만.]
“다음.”
메리가 2안을 말했다.
[실제계인 현실에서 신혈을 완전히 각성시키는 거야. 그럼 수면 중, 악마 군주에게 발키리의 힘을 이용당하고있는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지.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괜찮은 방법이야.]
“장단점이 뭔데.”
[무의식인 발키리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나면, 자신의 안에 있는 악마 군주를 내버려둘 리 없으니 우리는 님이나 보고 뽕이나 따면 돼. 하지만 라라 마르티넥의 인격은 완전히 바뀔 수 있어.]
“…….”
고민 됐다.
인격이 바뀐다곤 해도, 무의식도 자기 자신의 일부다. 그러니 발키리의 의식을 깨우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발키리의 신혈을 깨우면, 라라 교수는 단숨에강자로 등극할 가능성도 크다.
‘2m가 넘는 강기를 아주 손쉽게 뽑아냈고, 그것도 모자라서 신체 외부로 발출해 유형화를 했어. 더구나 영혼을 다루는 특별한 권능까지 감안하면….’
꿈속에서 만난 발키리의 전투력이 실제계인 현실에서 발현될 수 있다면.
신혈을 각성한 라라 교수의 잠정 전투력은 최소SS~최대SSS급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일단 보류. 더 없어?”
[마지막 방법이 있지.]
“그게 뭔데.”
[아주 간단해. 저번이랑 똑같지.]
메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발키리도 자지에 박히면 꼼짝 못해.]
**
아픈 몸과 정신을 이끌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제기랄. 창도 제대로 못 쥐겠네.’
공상계에서 받은 타격 때문에 후유증이 남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심리적 요인도컸다.
“하아, 대체 발키리랑 어떻게 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몸도 이런 경우는 검생 처음이라 당황스럽군.]
“성감 고조도 안 먹히겠지?”
[쎅쓰. 발키리는 주신의 은총을 받는 성스러운 처녀야. lv.max라고 해도 쉽지 않아.]
젠장, 말이야 쉽지.
최소 SS급 전투력을 가진 호전적인 여자. 더구나 파마破魔의 힘을 가지고 있어 성감 고조의 권능이 먹히지 않을 반신半神이랑 섹스를?
그것도 그냥 섹스가 아니라 숫처녀에게 오르가즘까지 느끼게 해야 한다고?
“하아….”
[쓰읍….]
우리는 훈련장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도저히 트레이닝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라라 교수와 선약도 있어서, 어차피 오늘은 날 샜다.
“혀엉~! 제이 혀엉~!”
민트색 페인트가 예쁘게 발린 3관이 가까워지자, 정원을 가꾸고 있던 선우가 나를 반겼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선약이있어서.”
“형, 얼굴빛이 안 좋아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악몽을 꿨거든. 몸이 좀 무겁네.”
“헉! 그럼 안 되죠.”
―Yyyyyyyyyyy
선우와 나 사이에 하얗고 작은 별 같은 무언가가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하와와, 형을 도와드렸으면 해. 할 수 있겠니?”
선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와와라는 이름의 못 보던 정령이 내 주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Yyyyyy! Yyyyyy!
하와와Hawawa가 별빛을 뿌리는 것처럼 내 몸에 뭔가를 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물을 잔뜩 먹은 듯 무거웠던 몸에 활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헤헤….”
멍한 눈으로 묻자 선우가 볼을 살짝 붉히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광光속성 정령이에요. 2차 각성 때 쿠루루 말고 이 아이와도 친구가 됐거든요. 하와와는 정령계나 환계에서 입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그거다!]
그때, 내 귓가에서 줄곧 앓는 소리를 내고 있던 메리가 검첨으로 선우를 가리켰다.
[광속성 정령과 암속성 정령! 이 돌아버린 정령친화력을 가진 반쪽이의 도움을 받는 거야!]
“메리, 안녕. 근데 형에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선우가 송아지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메리가 크게 흥분을 했다.
[반쪽이 너, 암속성 정령을 활용해서 에테르 상태가 될 수 있지?]
“진정신체眞精神體? 응, 그럼.”
[타자의 꿈속에 진입해 본 경험은?]
메리의 질문에 선우의 귀가 붉어졌다.
녀석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더니 애매한 대답을 했다.
“하, 할 수는 있을것 같아. 대신 쿠루루는 나를 정령체로만들어주느라 큰 힘을 쓰지는 못 하겠지만…. 관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같아.”
[충분해! 오케이, 그레이트 쎅쓰!]
―우우우웅
메리가 내 귀에서 떨어져 나와 선우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럼 다음! 너, 광속성 정령으로 암속성 정령을 버스 태워준 적은?]
“버스? 아아, 반존재半存在 상태? 연습해 본 적 있어. 쿠루루와 하와와의 사이가 좋아서, 자주 놀고 싶어하거든.”
[쎄엑쓰!!]
메리가 우효 소리를 내며 나와 선우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그런 메리를 하와와가 쫓았고, 어디선가 나타난 쿠루루가 녀석들과 술래잡기를 했다.
정령술은 문외한에 가까운 내가 한줄 요약을 부탁했다.
“그러니까. 선우가 도와주면 발키리를 따먹을 수 있다 이 얘기냐.”
[썩쎅쓰!]
좋은 뉴스다.
“선우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저번에 말한 악마 봉인과 관―.”
―덥썩!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선우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물론이죠, 형! 제가 잘할게요! 잘 할 수 있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 그래. 고맙다….”
이렇게 나-메리-선우의 삼각동맹이 체결되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계획을 짠 끝에, 오늘 밤 거사를 단행하기로 입을 모았다.
“너무 걱정 마세요, 형. 쿠루루랑 하와와가 잘 도와드릴 거예요. 그치?”
―Ooooooo! Oo!
―Yyyyyy! Yyyyyy!
바야흐로 발키리 자박꼼 계획이 준비된 것이다.
**
점심이 지나, 라라 마르티넥과 만나기로 한 2시가 되었다.
나는 약속한대로 중앙 광장 시계탑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늦는 모양인지,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하진 않았다. 오늘 자정 있을 거사에대한 고민 때문에.
‘근데 선우에게 도움을 받는 게 잘한 일인가? 생각해보니까 쫌 그런데.’
만약 계획이 성공해서, 내 꿈속에 발키리를 초대해 자빠트린다면 그 광경을 선우가 지켜보게 된다.
쉽게 말해, 내가 호감 있는 여자―발키리 모드지만―와의 섹스 장면을 다른 남자인 선우에게 보여주게 된다는 뜻.
나는 이 점이 많이 불편했다.
내 나신이나 발기한 자지를 보여주는 거야,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라라 교수다.
‘선우가 아무리 날 따른다지만 걔도 남자야. 라라의 몸을 보여주는 건 진짜 싫은데. 하아… 어쩌냐 이걸.’
내가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돌연, 눈앞에 그림자가 어린 것을 깨달았다.
“어? 오셨어요, 교수님.”
“미안. 내가 많이 늦었지.”
라라마르티넥. 그녀가 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말을 잃어버렸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아주 작정을 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