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 제이의 이상한 친구들(12)
번개에 맞은 것처럼 갑작스레 의식이 흔들렸다. 황급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미스트!”
그녀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새벽이 오지 않은 방 안의 어둠 뿐. 아직 새벽은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어두운 꿈을 다스리는 힘이여. 내 앞에 너의 음란한 문을 열어다오. 데카라비아!’
하지만 공상계로 다이브할 수 없었다.
왜 이러지? 대체 왜…?
[정력과 정신력이 모두 소모 돼서 그래. 그리고 가 봐야 미스트를 만날 순 없을 거다. 인드라이브 만랩을 찍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야.]
“…봉인은 제대로 완료된 것 맞지?”
[썩쎅쓰!]
시스템 메시지가 새로 얻은 권능과 CP를 띄워주었다.
〓〓
[보유권능]
no.16: 성감 고조 lv.3
no.44: 보물찾기 lv.1
no.69: 인드라이브 lv.1
[보유CP]
20
〓〓
〓〓
[no.44: 보물찾기 lv.1]
44번째 악마 군주 샥스의 권능.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지정 대상의 위치, 상태, 연원 등을 파악할 수 있음.
〓〓
[축하해. 성감 고조 외에 실제계에서도 쓸 수 있는 권능을 얻었군. 샥스의 권능은 사용여하에 따라 활용범위가 넓은 권능이야.]
“그거 잘 됐네.”
[미스트는 한동안 잊어버려. 원래 여자가 거절했을 때는 바로 붙잡는 게 아니야. 그러면 있던 정내미도 떨쳐 내버리는 게 여자라는 족속이지.]
메리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는 격해진 감정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래. 두 번 본 사이에 불과한데.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어.’
내가 미스트에게 집착할 이유는 사실 없다. 내일도 현실의 라라 교수님과 약속이 잡힌 판에, 철벽으로 보이는 발키리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남는 말이 있었다.
―안녕, 나만의 시바르드Sivard.
시바르드.
다른 말로 시구르드Sigurðr.
때는 신대神代의 시절. 불의 고리로 둘러싸인 성에 살고 있는 발키리 브륀힐드Brynhildr는 그 불을 뛰어넘어 오는 강한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오직 시바르드만이 그 불을 뛰어넘어 그녀를 찾아갔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소녀틱 하기는.’
라라 마르티넥의 안에서 고독한 자아를 유지하고 있던 미스트에게는 나와의 만남이 그토록 드라마틱했던 걸까.
“몰라, 씨팔.”
욕지기를 내뱉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고이 잠든 선우를 내 침대에 올려준 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항상 도움만 받네.’
오늘 선우의 도움이 참 컸다. 녀석과 하와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미스트의 심심함을 달래주기도 전에 끔살 당해버렸을 테니까.
나는 내일 선우에게 맛있는 생일상을 차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가자”
[쎅쓰.]
**
라라 마르티넥이 모교인 제4국제헌터아카데미 이스트 블루에 돌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였다.
2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두 개의 박사 과정과 두 개의 전공의 과정까지 모두 마친 그녀를 세간에서는 천재라 칭했다.
하지만 뛰어난 두뇌를 가진 라라 마르티넥이 모교에 돌아간 데에는, 전혀 천재적이지 못 한 이유가 존재했다.
‘타임캡슐. 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단지 어린 시절,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 몰래 파묻어놓은 타임캡슐의 소재가 궁금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아카데미 1학년 시절을 추억하며 모교 행을 결정한 것도 있었지만, 그러한 달콤쌉싸름한 추억보다는 타임캡슐을 향한 호기심이 훨씬 컸다.
‘맙소사. 아직도 못 찾았어.’
그러나 라라는 몇 학기가 지나도록 타임캡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해가 넘어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초조해져갔다.
사실 이 초조함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그녀의 육체가 라라에게 보내는 신호였지만. 라라는 이것을 외면했다.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마치 예전처럼 신경이 예민해지는 기분이야. 이게 전부 타임캡슐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정당한 착각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강한 성충동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라라는 본능이 충동질하는 자신의 진심을 몰랐고, 야해지고 싶어 하는 자기 몸의 변화는 더더욱 몰랐다.
‘요즘 잠이 왜 이리 안 오지. 운동을 해도 개운하지가 않고. …역시 타임캡슐 때문일까?’
하지만 그녀가 가진 너무나 건강한 육체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정욕을 불러일으켰고. 이와 동시에 그녀의 몸 속에 흐르는 발키리의 신혈은 무의식 중에 이를 외면하도록 부추겼다.
바야흐로 그녀의 몸에서 본능과 이성과 무지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짜증나.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기 상으로는 작년 봄.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이린 여기 있었구나.’
라라 마르티넥은 유일한 제자 아이린의 옆에, 남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아이린이 남자와 단 둘이 있다니.
아무리 라라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어도, 이건 대사건이었다.
‘아이린, 그 친구는 누구였어?’
‘제이 오빠요?’
이때 라라 교수는 김제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린의 단짝인 그 유명한 김하리의 오빠이며, 학내 두 명 뿐인 미각성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설마, 그 몸으로 미각성자라니. 쟤 더구나 신입생 아니니?’
‘네. 안타깝게도요. 훈련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도 아직….’
라라 교수는놀랐다.그가 봤던 수많은 미각성자들 중, 김제이 정도로 신체를 단련해온 사람은 정말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 원인은 바로 <최초의 조우 Fisrt Contact>라 불리는 퍼스트 컨택트에서부터 시작됐다.
전 세계에 동시 다발적으로 균열이 열리고 던전이 발생됐다. 이세계 프레이야 및 이세계 유로파를 잇는 차원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력魔力이라는 힘이실존하고 이를 활용해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사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그리하여 세상은 근대 이전인 계급 사회를 연상케 하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맞이했다.
-마력을 다룰 수 없는 80억 미각성자.
-각성을 통해 아주 미약한 마력을 다룰 수는 있지만 한계가 뚜렷해 민간인으로 남은 단순 각성자.
-그리고 뛰어난 각성자. 즉, 헌터.
이 세 개의 뚜렷한 계급이 발생된 것.
다시 말해, 인류는 ‘강해지기 위해 신체를 갈고 닦는 일’을 오롯이 헌터의 전유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미각성자가 십 년 넘게 단련해봐야 민간인 단순 각성자의 일 년 훈련보다 못한 효과를 얻을 뿐이었고.
단순 각성자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제대로 각성한 헌터의 삼 개월 훈련보다 못한 결과를 낳았으니까.
이런 차별적인 현실에서, 각성도 하지 못한 자가육체 훈련에 쉬이 전념하고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김제이. 흥미로운 애네.’
이때 처음으로 라라 마르티넥은 김제이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전완근 트레이닝을 했구나. 좋은 몸이야. 체계적인 지식을 쌓은 헌터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는 종종 김제이를 관찰하게 됐다.
‘요즘 왜 저리힘이 없지? 같이 다니던 A급 헌터 여자도 안 보이고.’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냥 재미.
‘쟤, 아이린에게 관심이 생겼구나. 다행이다. 훈련도 제 궤도를 찾았어. 남자의 사랑은테스토스테론을 분비시켜 트레이닝 효율을 올리지. 좋은 징조야.’
이후에는 조금씩 친밀감이 생겼고.
‘제이의 몸은 이제 어엿한 E급 헌터 수준이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율훈련만으로 저 정도를 단련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의지가 대단해.
나중에는 상당한 호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감정에는 단순히 그의 노력에 대한 찬사만이 담겨있진 않았다.
‘……크, 크네….’
생도복 외에는 항상 트레이닝복을 입고 훈련에만 매진하는 김제이다. 그러다보니 샤워 후 속옷을 입지 못할 때도 많았고, 그럴 때면 종종 그의 큰 성기가 트레이닝팬츠 위에 윤곽을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또 기능성 속옷을 빼먹었네. 이런 바보…. 그런데 얼굴은 왜 저러지? 누구한테 또 맞았나보구나. 이런! 김하리 생도와 반선우 생도 때문에 또 병동이 바빠지겠어.’
물론 그 말고도 성기가 큰 사람, 몸이 좋은 사람, 잘생긴 사람, 더 노출이 심한 사람, 능력 쩌는 사람도 많았지만.
천성이 남에게 관심 없는 라라의 눈에는 원래부터 쭉 관찰해오던 김제이만이 뇌리에 들어왔던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면이 귀여운.
그러나 몸은 귀엽지 않은 김제이.
이것이, 라라 마르티넥이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에게 복합적인 의미의 호의를 가지게 된 경위였다.
‘항상 열심히 훈련하는 김제이 학생처럼 나도 타임캡슐을 열심히 찾아야지. 이제는 아이린에게도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그래야 빨리 찾겠지.’
물론 그녀가 자신의 안에 피어난 미약하고도 유일한 호감을 자각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어쩌면 김제이 학생이 아이린을 도와 내 타임캡슐 찾는 일을 거들어 줄지도 모르고. 그럼 일 진행이 빨라지겠지. 김제이 학생은 필기 성적이 우수한 수재니까 말이야. 그 경우, 나도 그의 고민인 각성과 관련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윈윈이야.’
그저 그놈의 타임캡슐 타령만 주구장창 해왔을 뿐.
―안녕하세요, 교수님. 전투분과 창술전공 2학년 김제이입니다.
―자네는 본 기억이 있는데.
―아이린과 함께 몇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아아, 그 친구. …자네 혹시 최근에 각성했나? 골격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네, 사흘 전에 각성했습니다.
―축하해. 혹시 고유능력을 알 수 있을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려나.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
미스트의 도움으로 악마 봉인을 완료한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타임캡슐 조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미안, 제이야. 학회 일정이 변경 돼서 한동안 미국에 가야할 것 같아. 개강하고 보자.
라라 교수가 출장을 가버렸으니까.
나는 훈련에 더욱 전념하면서도 개인적으로 타임캡슐 조사를 계속 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오늘 아침. 드디어 유의미한 단서를 발견했다.
“공항 옆에 이런 공원이 있었구나. 맨날 셔틀을 바로 타서 전혀 몰랐어.”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리고 이런 추모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17년이나 지난 지금은 가족들도 자주 안 올걸?]
오늘 나와 메리가 찾은 곳은 <기억의 정원>이라는 곳이다.
제주도국제공항 옆의 공원 내에 조성된 아름다운 인조 공원.
『블루돌핀 테러 희생자 추모비』
이곳은 바로, 17년 전 테러에 의해 종업식 날 목숨을 잃은 라라의 친구들과 관련된 추모 공간이다.
나와 메리는 타임캡슐의 소재를 찾기 위해 조사를 하던 중 이곳을 알게 됐다. 그래서 주말인 오늘 짬을 내 오게 된 것.
[흠, 다시 봐도 사람이 참 많이도 죽었군. 어린 생명들이 불쌍하게 됐어.]
메리의 말대로,백이 넘는 사망자들의 사진과 위패, 기록물들이 그때의 참상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라라 교수가 여길 안 와봤을만 해.’
추측컨대, 똑똑한 라라가 이 추모 공원의 존재를 몰랐을 리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이곳에 굳이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1학년 A반. 송다영 (19세)
1학년 A반. 아이쉐 다르막 (20세)
1학년 A반. 카를로스 K (25세)
……
…
친구들의 영정 사진, 생도 시절 사진,어릴 적 사진들이 스토리처럼 정리된 전시물들을 보고 있자면. 완전 무관계한 나조차도 울적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는 타임캡슐의 조사와는 무관하게, 17년 전 아카데미를 다녔던 선배들의 흔적을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희생자가 겪은 참극에 감정 이입해서 그랬다기 보단, 보다보니 예전 사전을 보는 게 썩 재미가 있어서였다.
“…어?”
내가 막 <1학년 A반 종업 파티 당시 기념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이건.”
[상상도 못한 정체!]
그들의 기념사진에서, 사건 해결의 아주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일렬로 늘어선 4-50여 명의 생도들의 머리 위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
『☆생☆ 라라야, 속았니?』
『☆축☆ 응, 안 미안해~』
〓〓
놀라웠다. 라라가 참가하지 않은 이 종업식 송별회는 사실, 라라의 깜짝 생일 축하를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였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야, 이 케이크 생긴 것 좀 봐.]
메리가 가리키는 쪽을 자세히 보니, 가운데에 선 여학생의 손 위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꽤 특이했다.
어떻게 보면 위아래가 뚱뚱해진 타임머신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거대한 은색 비타민 캡슐 알약 같기도 한.
마치 타임캡슐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듯한 케이크였던 것이다.
“맞네. 초도 긴 거 1개, 짧은 거 7개. 라라가 이날 생일이었으면 17살이 됐을 테니까 정확해.”
[쎅쓰! 아, 개운해! 드디어 찾았다!]
성취감에 잔뜩흥분한 메리가 귓가에서 떨어져나와 허공을 날아다녔다.
“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무려 17년 간 라라를 궁금하게 만들어온 타임캡슐의 정체가, 치밀하게 준비된 장난이었다니.
더구나 그 장난의 목적이,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를 숨기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니.
‘그야말로 몰카의 몰카라는 거구나.’
나는 어린 라라가 새빨개진 얼굴로 친구들에게 엉엉 울면서 화를 내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참 다행이라 안도하는. 그런 훈훈한 장면을 상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라가 개강쯤에 돌아온다고 했었지.’
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