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 제이의 두근두근 데이트(7)
나와 육서윤이 함께 한지 일주일째. 우리를 감싼 공기는 이전보다 조금 더 편안해진 상태였다.
출구를 찾기 위해 걷다 쉬다를 반복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동굴 생활. 심심함을 때우려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안 친해지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
“오빠. 그것만 먹고 괜찮아?”
“어. 배 아직 안 꺼졌어.”
“이따 저녁에는 그거 먹어보자. 전투식량 샘플. 있어 보이더라구.”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고, 서로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친해진 뒤에 든 생각은, 육서윤이 처음 느꼈던 것과 달리 그리 까칠하고 싸가지 없는 애가 아니라는 점이다.
감정기복이 극심하긴 했지만, 천성 자체는 상당히 애교 있고 발랄한 편에 속했다.
‘워낙 왔다 갔다 해서 대하기 빡세긴 한데,첫인상보단 오백 배 나아.’
나는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 뒤인 지금은 괜찮겠다는 생각에, 리조트나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기로 했다.
“서윤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그때 흡연장에서. 그 여자들이랑 왜 그렇게 싸웠던 건지 물어봐도 돼? 그 왜 있잖아, 우리 처음 만났었던.”
서윤이의 시크하고 도도한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녀가 풍성한 금발 머리를 이마 위로 넘기며 입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내 잘못이지 뭐.”
“니가 어때서.”
“…그냥. 남자 문제도 있고, 내가 솔직히 신경질적인 것도 사실이고.”
“알긴 아네.”
“뭐라구?”
“농담이야. 근데 남자 문제는 왜? 너 남자친구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며.”
서윤이가 인상을 팍 썼다.
근데 그 모습도 예뻤다.
“내가 언제. 사귀긴 했어. 전부 다 너무 빨리 헤어져서 연애다운 연애를 못 해봤다고 한 거였지.”
“나랑 똑같구나.”
“오빠도 그랬어?”
“응. 중고딩 때. 근데 전부 고백 받아서 사귄 거라, 오래 가지 못 했어. 내가 마음이 없었으니까.”
나는 하리의 영향 때문인지 여자들과 편하게 지내는 편이다. 그래서 학창시절 내내 여사친이 많은 편이었고, 고백도 이따금 받아봤다. 그 덕에 섣부른 연애를 몇 번 해보긴 했는데,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최장 연애 기간이 두 달이고, 첫 사랑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아영 누나이며, 총각딱지는 최근에 뗐으니 말 다했지.
“나돈데.”
“서윤이 너도 다 고백 받아서 사귀었던 거야?”
“응.”
육서윤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인 뒤, 장초를 길게 빨았다.
“몇 번 해봤어. 근데 다 보름도 못 갔어.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저번에 흡연장에서 나한테 창녀 어쩌고 한 그 여자 남친이었어.”
“뭐야, 양다리야?”
“난 둘이 사귀는지 몰랐어.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랑 원래는 친했거든. 그래서 더 원수가 된 거야.”
“아주 개새끼구만. 넌 운이 나빴네.”
친한 사이에 뒤통수 맞으면 더 아픈 법. 그때 상황이 이제야 약간 이해가 간다.
“근데 걔들도 진짜 너무하지. 이상한 소문이나 퍼트리고.”
“소문이라니?”
후우, 하고 서윤이가 담배를 태웠다.
“내 소문 몰라? 내가 우리 아빠랑 오빠들이랑 근친한다는 소문. 그거 걔들이 퍼트린 거야. 인터넷에도 찌라시 있을걸. 고소하고 지워도 계속 올라와.”
“그런 소문을 왜 퍼트려. 걔네 제정신이야?”
“걔네들 논리는 이래. 우리 엄마가 원래 울 아빠 애인이었거든? 근데 중학교 때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아빠 집에 들어가게 된 거야. 그래서 아빠나 오빠들이랑 아직도 서먹서먹해. 그거 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루머를 만든 거지.”
서윤이가 아주 분한 얼굴로 담배를 튕겼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나한테 파티 같이 가자고 하고, 내가 까니까 던전에 최재헌 그 약쟁이 새끼랑 마주치게 하고.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천하의 나쁜 년들이네.”
나는 그녀의 말에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쳤다. 근데 최재헌이라는 이름을 들으니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그때 던전에서 아이웨이가 패버린 게 최재헌이야? 블루울프 망나니 막내아들?”
“그래애! 그 나쁜 새끼가 나 그날도……. 후우……. 씨이…….”
육서윤의 큰 눈에 분을 못 이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참 눈물이 많았는데, 안타까운 건 기쁨의 눈물보단 짜증과 슬픔의 눈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었다.
“아후, 분해 진짜…. 그 새끼 아빠 백 믿고 맨날 나 괴롭히려고 하고……. 그 따위로 굴면서 사귀자고 하면, 내가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데…?”
그녀의 하얀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웨이가 헛물 켰구나. 최재헌 그 망나니가 아무리 또라이여도 거기서 강간까지 할 가능성은 적었어. 하긴,5천 명이 드나드는 관광지에서 무슨.’
나는 분함을 못 이기고 씩씩거리는 서윤이가 안쓰러워,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 일이 자꾸 생기니까 힘들겠다. 내가 너라면 반쯤 미쳤을 거 같아.”
“…이미 그렇게 됐어.”
서윤이가 차갑게 말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가 내게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그러나 그녀에게는 어스름한 새벽 정도로 보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나 제정신 아니야. 오락가락해. 우울증도 심하고, 자살 생각도 해. 근데 그냥 사는 거야. …아직 죽긴 무서워서.”
나는 서윤이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차라리 내가 형태가 없는 유령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아무랑도 얽힐 필요 없을 테니까.”
이런 말을 하는 그녀에게 해줄 말 따위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
―탁탁탁!
―브륫
“후우….”
빠르고 급하게 자위를 마치고 바지를 끌어올렸다. 혹시라도 서윤이가 눈치를 챌까, 꼼꼼히 뒤처리를 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육서윤과 합류한지 오늘로 열흘.
그간 나는 던전의 출구는커녕, 식수와 몬스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서윤이의 이동식 아공간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거의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윤이를 향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치밀어 오르는 성욕은 쉽게 해소되질 않았다. 하루에 딸딸이를 아침점심저녁으로 세 번씩 치고 있는데도 그랬다.
혹시라도 서윤이의 모습을 덜 보면 나아질까 최대한그녀에게서 눈을 돌려도, 그녀의 가냘픈 음성을 단지 듣기만 하면 마음이 계속해서 동했던 것이다.
정말 사는 게 고역이었다.
“이러다 나도 그 민간인 놈들처럼 정줄 놓고 서윤이 덮치는 거 아냐? 씨팔, 그렇게 되기 전에 딸딸이 존나 치다자기색정사로 뒤져버려야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그딴 농담을 내뱉었다. 귓가에 붙어 있던 메리가 우웅, 하고 짧게 떨었다.
[그럴 일은 없다.]
“뭐야. 웬일로 말을 다 하시네?”
메리는 육서윤과 합류한 이후로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는 녀석이 무려 일주일만에 입을 연 것이 기꺼워, 장난을 쳤다.
“너 요즘 좀 낯설다. 그 싫어하는 육서윤 욕도 안 하고. 아무리 너랑 안 맞는 성격이라도, 나한테는 은인이니까 좋게 보기로 한 거냐.”
[쎅쓰. 이 몸께서 육시랄을 싫어하는 것. 바로 그 점이 문제다. 그와 관련한 위화감이 드는 지점들을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고, 지금 막 결론이 나왔다.]
“그게 뭔 소리야.”
메리가 목소리를 깔았다. 평소처럼 맑고 투명한 중성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진중한 감정이 담긴 음성이었다.
[파트너. 아무래도 이 던전. 악마 군주의 짓인 것 같다. 그것도 칠죄종 중 하나의.]
…세상에.
“악마 군주? 게다가 그 칠죄종?”
[쎅쓰. 그렇게 강대한 악마가 숙주로 삼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 몸이 육서윤을 필요 이상으로 기피했던 것 같다.]
“확실히… 니가 육서윤에게 유독 까칠하긴 했어. 그런데 칠죄종이라니.”
칠죄종七罪宗.
교만/탐욕/질투/분노/색욕/식탐/나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악덕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루시퍼나 레비아탄 등의 대악마가 이 칠죄종의 죄악에 상응한다.
‘그럴 리가.’
메리의 말을 듣고 나는 당장 떠오른 의문을 질문했다.
“72악마랑 칠죄종은 완전히 겹치는 게 아니잖아.”
[칠죄종에 대응하는 악마의 개념은 이 몸이 봉인된 한참 뒤인 16세기에 페터 빈스벨트라는 미치광이 양판소 작가가 소설로 써낸 거야. 애초에 칠죄종은 특정 종교를 초월한 개념이자 원리야. 모든 종교의 모든 악마에게 대응 가능한, 일종의 악마원리惡魔原理라고 할 수 있지. 예드디야가 직접 명명한 72악마와는 전혀 케이스가 달라.]
그렇게 본다면 말이 된다.
72악마는 현명한 왕 예드디야. 즉 솔로몬이 아들을 위해 직접 저술한 지고의 마도서 『레메게톤』에서 언급된 내용이기 때문에 이견이 필요 없으니까.
“그래서, 짧게 말하자면 72악마 중 칠죄종의 악마원리에 해당하는 7마리의 악마 군주가 있다는 거야?”
[쎅쓰. 결론만 말하자면.]
칠죄종과 72군주의 관계성에 대해 말한 메리가, 한줄 요약을 했다.
[지금 우리는 아마도 32위, 색욕의 군주 아스모데우스Asmodeus의 계략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나는 당연히 질문을 했다.
“그럼 여기가 공상계라는 거냐? 여긴 던전이 내균열 현상을 일으킨 실제계잖아. 여기가 공상계면 왜 니가 처음부터 눈치채질 못한 건데.”
[그러니까 아스모데우스를 의심하는 거다. 계층을 초월해 실제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악마 군주. 그런 놈은 72악마 중에서도 많지 않으니까.]
메리가 말을 이었다.
[확인이 필요해. 네 역할이 크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육서윤과 자 봐.]
“미친놈아.”
강간당할 뻔 한 위기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지금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는 애랑 섹스를 하라고?
내가 꼴려 죽겠는 와중에도 걔 배려해주느라 이렇게 꾹 참고있는데?
[걱정 마. 육서윤을 숙주로 삼은 악마가 진짜 아스모데우스라면 어차피 넌 그녀의 다리를 쉽게 벌릴 수 없다. 그래서 시도를 해보라는 거다. 그 과정에서 추이 등을 지켜볼 수 있도록.]
“…아무리 그래도. 라라 때랑은 케이스가 많이 달라서 성감 고조 스킬을 쓰기가 좀 그런데.”
라라 마르티넥 교수는 원래 나와 안면이 있었고, 나는 평소에도 그녀를 아주 괜찮은 여자라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34살 나이와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그녀가 성경험이 풍부할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감 고조를 별 고민 없이 썼던 것이다. 뭐, 고추 검사라는 상황적 특수성도 있었고.
그리고 상황이 정리된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라라는 그녀 안에 있는 발키리의 신혈 때문에 성감 고조 권능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았었다.
즉, 결과적으로 그녀와 나의 정사는 서로에게 끌린 강한 호감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는 뜻이다.
‘근데 서윤이는 케이스가 다르지.’
얘는 내가 보호해줘야 할 생도 신입생이며, 내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은인이다. 또한 성에 강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으며 인간불신 성향과 우울증도 가지고 있는, 이른 바 마음의 환자다.
나는 아무리 꼴린다고 해도 그런 애를 상대로 성감 고조 스킬을 가볍게 쓰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거다, 이 멍청아.]
고민에 빠진 나에게 메리가 말했다.
[누가 억지로 하래? 라라 때처럼 꼬시라는 말이다. 육시랄 속에 숨어든 놈이 정말 색욕의 군주면 제파르의 성감 고조 권능도 통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하나하나 테스트 해봐. 권능이 먹히는지, 꼬시는 동안 환경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그 여자와 진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꼬셔서 하라고? 말은 쉽네.
걘 육서윤이다. ‘그’ 대단한 육서윤.
[그래서 안 할 거냐. 혹여 네놈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간이나 살인만은 하지 마라. 그럼 역으로 네놈이 죽어.]
“…그럼 정면 돌파해야지.”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서윤이의배경 핑계,그녀의 트라우마 등을 이유로 그동안 몸을 사렸었다. 하지만 메리가 등을 떠밀어주니 내 욕망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걔 마음에 든 병에 내가 위로가 되어줄 지 누가 알아. 내가 싫으면 서윤이가 알아서 밀어내겠지. …아이린은 뭐, 여기가 공상계라면 서윤이랑 뭔짓을 해도 바깥에선 없던 일이니까.’
각오를 다진 나에게 메리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좋은 생각이다. 지금 니가 조난을 당한 게 아니라 꿈속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이린이라는 인간 여자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네놈은 어차피 그 계집을 우상 시 하느라 언감생심 어떻게 할 생각도 못 하고 있잖아.]
“그건 그래. 흠… 데이트라.”
어두운 던전의 두근두근 데이트라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어쩐지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최대한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한 육서윤의 예쁘고 도도한 얼굴과 폭력적일 정도로 섹시한 몸매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녀의 섬세한 성격. 이제는 귀엽게만 보이는 히스테릭한 모습. 가녀리고 높은 톤의 여성미 넘치는 미성까지.
이름도 젠장, 육서윤이다! 肉!
천박하게 말하자면, 육서윤은 존재 자체가 꼴리는 암컷이었던 것이다.
[이성 지워! 본능 잡아! 뷰지 뚫어!]
비록 늦겨울밤의 짧은 꿈일지라도, 나는 이 던전에서만큼은 서윤이에게 진심이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서윤아! 이제부터 널 좋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