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 제이의 기진맥진 주말(3)
새삼 육서윤의 모습이 낯설었다.
펌 된 밝은 금발 염색머리 위에는 검은색의 귀여운 빵모자가 씌워져있다.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녹색 스웨터와 검은 스키니 바지. 그리고 굽이 높은 겨울용 털 구두까지.
20여 일 간 봐왔던 옷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나는 살짝 어색함을 느꼈다.
“왔구나. 이사는 잘 했어요?”
“네. 어제….”
육서윤도 뭔가 어색한지 자꾸 머리끝을 매만지며 우물쭈물했다.
나는 그녀의 차가워 보이나 그래서 더 아름다운 하얀 얼굴을 보며, 이곳은 현실이라고. 서로 아주 가까워졌던 꿈속과 지금은 다르다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아카데미 식당가 쪽으로 가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식사 대접해드리려고 하는데. 그 사람 일로 폐도 많이 끼쳤고.”
“괜찮아요. 오히려 사례금을 받은 게 잘 된 일이라. 제가 명색이 선밴데 처음부터 얻어먹을 수는 없죠.”
“…감사합니다.”
“이쪽 길로 가자. 학교 안내해줄게요. 아직 학교 지리 잘 모르죠?”
“네.”
나와 그녀는 천천히 교정을 걸으며 아카데미 식당가로 향했다.
이곳 한라산 국립공원 속에 위치한 이스트 블루는 도심과의 거리 때문에 학교 안에 상당히 많은 상점들이 거리를 이루며 상주하고 있다.
나는 아카데미 건물이나 거리 등을 육서윤에게 설명해주며, 일전에 라라와 갔었던 레스토랑으로 그녀와 들어갔다.
“1인 정식 둘 괜찮아요? 저랑 다른 거 먹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스테이크 다 잘 먹어요.”
“참, 서윤 씨 반은 정해졌죠? 어때요. 커뮤니티 같은 데 들어가 보면 분위기 같은 거 알 수 있잖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대화를 이어가도 육서윤은 여전히 내게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자꾸 몸을 가만 놔두지 못했고, 대화에 계속 집중하지 못했다. 흐름이 뚝뚝 끊겼다.
‘OT 때보다 더 어색해하네. 그때 흡연장에서 얘기할 땐 적어도 이것보단 훨씬 나았는데. …OT 끝나고 나니까 현타 왔나.’
육서윤이 나를 어색해하니 이쪽도 죽을 맛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아니에요. 아, 커피랑 빵 좋아한다고 했죠. 저 카페가 맛있어요. 같이 가요.”
식사를 마친 뒤, 카페에 가서 아카데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 했던 참이었다.
“저, 저기…….”
“네.”
“저 화장실… 좀.”
“제가 주문해놓을게요.”
그녀가 용변을 보러 간 사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고민했다.
‘아무래도 아영 누나 때랑은 다른가. 육서윤 마음속에 나에 대한 어떤 인상이 남긴 한 것 같긴 한데, 그게 크진 않았나.’
[이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간 나와 육서윤이 하던 양을 잠자코 보기만 하던 메리가 말을 붙여왔다.
[육서윤은 네게 호감이 있어. OT때의 대화부터 문자 내용, 그리고 지금 네게 보내고 있는 바디 랭귀지 등을 보면 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문제 때문에 네게 온전히 신경 쓰지 못하는 걸로 보여.]
‘다른 문제 때문이라니? 집에 우환이라도 있나.’
[그걸 이 몸이 알리 있겠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 하는데. 저런 모습은 심지어 내균열 안에서도 안 보였던 거잖아.]
뭐 마려운 강아지라.
지금 육서윤의 모습이 딱 그랬다.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자꾸 다리를 가만 놔두지 못했고, 대화하다가도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가만. 설마?’
그때, 불현 듯 아이웨이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육서윤 걔는 진짜 농담 아니고, 화장실도 안 간다더라, 화장실도! 똥오줌도 안 싸는 레알 찐 여신이라는 거지!
내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 치부하며 넘겼던 화장실 소문.
만약 이 소문이 진짜라면, 육서윤은 집이 아니면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증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드물지만 있는 얘기다. 인기 연예인 중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고, 어린 시절 하리 또한 낯설고 불편한 장소에 체류할 경우 자주 그랬으니까.
‘설마 서윤이 얘, 어제 기숙사 이사했을 때부터 화장실 못 갔던 건 아니겠지.’
[큰 것이야 그렇다 치고 작은 것도 못 보고 있을 정도면 심각한 강박증인데.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 좆같겠군.]
―딸랑
내가 설마 하며 그런저런 생각을하고 있던 도중, 카페 화장실 문이 열리며 육서윤이 돌아왔다.
“…저기.”
그녀는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혹시 여기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어떻게 될까요?”
“서울이요? 포탈이 빠르긴 한데 어차피 제주시는 가셔야 하니까 일단 택시를 부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택시….”
육서윤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가방을 챙기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먼저 가볼게요. …오늘 감사하고 고마웠어요.”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를 뜨려는 육서윤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붙잡았다.
“서윤 씨.”
“네?”
나는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최대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제가 서윤 씨 관련해서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어제부터 화장실 못 갔어요?”
“…….”
육서윤의 도도한 눈과 오똑한 코가 카페 바닥을 향했다. 그녀의 귀가 빨개졌고, 구두 코가 가운데로 모였다.
“……네.”
“하리도 어릴 때 자주 그랬어요. 괜찮으니까, 말해볼래요? 혹시 집 아니면 아예 안 되고 그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럼 입학할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
약 30초간을 말없이 바닥만 보던 그녀가쥐어짜내듯이 자신의 강박을 얘기했다.
“공용 화장실을… 못 쓰겠어요. 불안해서……. 아카데미 입학하면서, 공동 생활도 적응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물도 평소처럼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식사를 하고 나니까…….”
목소리에 물기가 베였다.
괴롭겠지. 소변 보고 싶은데 못 보면 사람 미친다. 한 두 시간만 참아도 방광이 터질 것 같은데, 무려 하루를?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른 사람 안 쓰는 데가 있어요. 같이 가요.”
“네?”
나는 육서윤의 가녀린 팔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빨리. 급하잖아.”
“…….”
육서윤은 차마 얼굴 들지 못하고 고개만 작게 끄덕인 다음 나를 따랐다.
**
나는 육서윤을 3관으로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빼면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5층으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열쇠가 없어서, 빈방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내 방 뿐.
“서윤 씨.”
“…네.”
“제 방 화장실, 저 빼고는 아무도 안 쓰거든요. 3관은 정규 기숙사가 아니라서, 세 명의 룸메이트가 아예 한 명도 없어요. 그냥 독방이죠.”
“괘, 괜찮아요!”
육서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내 방에 그녀를 안내해준 뒤, 카드키를 건네줬다.
“이게 제 방 키에요. 총 두 갠데 하나는 저기 서랍에 있고, 하나는 이거. 이제 이 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서윤 씨뿐이에요.”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아준 뒤, 1층 로비에 앉아 대기했다.
그리고 5분쯤 기다렸을까.
[썩쎅쓰.]
5층에서 육서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리가 돌아왔다. 녀석이 허공을 둥실둥실 날아 다시 내 귓불에 붙었다.
‘물소리 들려?’
[쎅쓰. 보지는 못 했지만 확실하다. 이 몸이 워낙 귀가 밝잖아.]
나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내균열 안에서는 잘 봤었는데 밖에서는 이러네.'
[그때야 자신의 내면 속이었으니 제 집과 다름 없었겠지.]
육서윤은 총 5분이 더 지나고 나서 돌아왔다.
“가, 감사합니다…….”
울먹거린 흔적을 지우려 세수를 했는지, 빨갰던 눈과 코는 다시 제 색을 찾은 상태였다.
“아니에요. 이거 마셔요.”
나는 미리 준비해둔 허브티를 건넸다.
아까 식당에서도 물 한 모금 안 마시던 서윤이는 꼴깍꼴깍 티를 맛나게도 들이켰다.
나는 그녀에게 물을 리필해주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투로 얘기했다.
“지금 서윤 씨가 들고 있는 키. 그거 서윤 씨가 계속 갖고 있어요.”
“…제가요?”
“나중에 또 화장실 못 가겠으면 제 방 쓰라구요. 저야 어차피 잠만 자니까.”
“그래도….”
“아까 식당에서 얘기했죠? 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5시 반쯤 나가면, 방에는 보통 늦게나 들어와요. 공부는도서관에서 하고. 방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거죠.”
내 말을 잠자코 들은 육서윤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네?”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대사가 무슨….
너 지금 드라마 찍냐.
“왜 오바를 하고 그래.”
“…네?”
“잘해주긴 뭘 잘 해줘요. 화장실만 쓰라는 건데.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없어져 봐. 인터넷에 서윤 씨 도벽 있다고 글 쓸 거니까. 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당하려나?”
“고, 고소 안 하거든요!”
“그럼 훔쳐가긴 할 건가보네.”
내 농담에 육서윤의 예쁜 얼굴이 벌개졌다.
“안 훔쳐가요! 제가 제이 오빠 물건을 왜 훔쳐요? 저 그런 애 아니에요!”
“…….”
오빠, 라.
뭔가 조금 그리운 느낌에, 나는 말을 돌렸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고. 아, 가끔 저 없을 때 제 여동생이랑 마주치면 그냥 인사 하고 지내요. 제일 좋은 건, 서윤 씨가 어디서든 볼 일 잘 보게 되는 거지만.”
“여동생이요? 아까 분명….”
그녀가 잘 못 들었다는 듯 되물어왔다. 아까 내가 고아라는 말을 했던 탓이다.
“김하리라고 같은 시설에서 자란 애 있어요. 스페어 키가 하나 밖에 없는 이유가 걔 때문이에요. 걔가 세 개 중에 하나를 먼저 가져가버렸거든요.”
“…먼저.”
“네, 걔가 서윤 씨보다 먼저. 걔 그냥 말도 없이 제 방에 와서 자고 가고 그럴 때 있으니까, 저도 걔가 언제 올지 몰라서 미리 얘기 해두는 거에요.”
“…자고, 간다고.”
“그렇다구요. 낮잠만 잘 때도 있고, 외출증 끊고 종종 놀러 오기도 해요.”
“그러시구나.”
납득을 했는지, 육서윤이 추가 질문 없이 이온음료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그녀가 테이블에 음료수 캔을 박력 있게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얗고 작은 손으로는 내 방 카드키를 내민 채.
“됐어요. 그쪽 방에 신세질 일, 더는 없을 테니까. 오늘 밥 잘 먹었어요.”
“진짜 괜찮겠어요?”
“당연하죠.”
“잘 가요.”
“…네!”
육서윤이 내게 카드를 던지듯 건넨 뒤 3관 기숙사를 나섰다.
[성질 머리하곤. 역시 실제계의 여자는 추악하기 짝이 없다.]
“너 방금 대사 졸라 오타쿠 같았어.”
[쿰척쿰척.]
그녀가 떠난 다음. 나와 메리는 오늘의 미션인 부실 청소를 위한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그리고 수건과 버려도 될 옷 등을 챙겨 1층으로 내려왔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3관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
그는 얼굴을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인 육서윤이었다.
아까 허브 티 큰 컵으로 두 잔. 추가로 이온음료 한 캔까지 급하게 마셨던 그녀가.
“……저, 저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자주 보겠군.]
나는 육서윤에게 카드 키를 넘기고 신이연구회 건물로 향했다.
**
우리 동아리의 새 건물.
즉, 거대하고 찬란한 생도회관과 멀찌감치 떨어진 그 단독건물은 듣던 대로 아주 끔찍한 몰골이었다.
“와, 이거 실화냐.”
[납량특집에 귀신 나오는 폐가 건물로 소개 돼도 손색이 없겠군.]
구생도회관. 즉, 신연의 부실이 될 이 건물은 아주 대단한 외관을 자랑했다.
외벽인 빨간 벽돌들은 거뭇한 먼지가 잔뜩 끼어 고풍스러운 외향이 되려 음산함으로 보였고.
주변에 마른 풀들이 하나도 깎이지가 않아, 미국 공포영화에 나오는 그런 꼬라지였다.
굴뚝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왔다가 끼어서 돌아가신 건지 정체모를 쓰레기들이 가득 차 있었고, 창문은 온통 다 깨져서 더럽기 짝이 없는 커튼들이 바람결에 덜덜덜 혀를 내밀고 있었다.
―끼이이익
먼지 쌓인 문고리를 돌려 건물 안으로 들었다.
“…실내는 더 심하네.”
깨진 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닥쳤는지 가구들은 좆병신 상태라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었고, 수십 년째 쌓인 먼지는 이게 씨발 집이냐는 욕이 절로 나왔다.
잔뜩 녹이 슨 수도꼭지에서는 녹물이 콸콸콸. 삐거덕거리는 계단은 언제 발밑이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병신 호로 상태. 비교적 최신 물건으로 보이는 유선전화기는 먹통인 걸로 보아 통신도 끊긴 듯했다.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게 유일한 위안인 상황이랄까.
“하아…. 이걸 언제 쓸고 닦고 정비하냐. 업자 불러야 되는 거 아냐?”
나는 벽지라고 더는 부를 수조차 없는 상태의 찢어진 벽면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돈이 있어야 부르지. 부부장년 말 못 들었냐? 다음 주중 서귀포시에 나가서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들 훔쳐오자고 한 거. 소젖 부장년만이 아니라 그 말더듬이년도 제정신 아니야.]
“이거 봐. 생도들 여기 몰래 들어와서 술도 마셨었나봐. 쓰레기도 많네.”
[저기 벽을 봐라. 낙서들도 고상하다.]
식당으로 보이는 쪽을 보니 SEX, 누구누구 따먹고 싶다 이런 그래피티들이 눈에 들어온다. 싸구려 라카 냄새에 눈앞이 다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계획을 세우자. 어차피 이거 다음 주까지 내내 해야 돼.”
[쎅쓰. 오늘 하루로 절대 안 된다.]
나는 우선, 해야 할 일은 삼 단계로 구분했다.
1. 쓰레기 처리와 벽지 뜯어내기.
2. 도배, 배선, 계단 수리 및 하수도 정상화와 인터넷 설치 등.
3. 외벽과 건물 내 청소.
……이걸 씨팔 대체 언제 다 해!
[우리 존재 파이팅~!]
―우우웅!
메리가 절망에 빠진 나를 내버려두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 어디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정찰이 필요해. 청소는 이따 도와주지.]
“…음산한 기운? 뭔 소리야.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말하고 있어.”
[쎅쓰. 바로 그 말이다. 집중해봐.]
“집중? 대체 ㅁ―”
메리가빠르게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린 직후였다.
―{여보, 당신은 왜 화장실만 갔다 오면 꼭 손을 씻어♪}
어딘가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절대 사람이 부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아, 고추를 만졌으니까 매워서. 그런데 당신도 화장실만 갔다오기만 하면♪}
―{나도 조개 만졌으니까 비린내 나죠~♪}
개좆같은 노랫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