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41. 제이와 수상한 산부인과(2) (41/145)



〈 41화 〉41. 제이와 수상한 산부인과(2)

“주목.”

이시카와 레이 교수였다.
20대 후반이라기엔 젊고, 초반이라기엔 너무 성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미인 여교수의 등장에 시끌벅적했던 교실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마력운용기술연구학 전공 이시카와 레이다. 오늘부로 이 반의 담임 교수를 맡게 됐지. 1년 동안 잘 해보자.”

―짝짝짝짝!

나는 1년 전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그녀의 자기소개에 헛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혹시 저거 메크로 아냐?’

교수의 지나치게 쿨한 자기소개 뒤로 생도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입학식과 개강일이 겹친 오늘은 수업이 없었다.

“그럼 다음은 공지사항이다.”

학사 일정을 검토하고, 오후부터 실시될 개별 전공 오리엔테이션에 알아서  참가하라는 당부를 들었을 뿐.
참고로 이스트 블루는 3학년이 되기 전까진 이원화된 커리큘럼을 따라야한다. 오전에는 반 중심의 헌터 공통 교과목 수강. 오후에는 전공과목 개별 수강.

“마지막으로.”

짧고 간결한 개강일 OT를 마친 이시카와 레이 교수가 평소처럼 이지적이고 침착한 어조로 당부를 남겼다.

“오늘 저녁 6시부터 있을 자매반과의 대면식 자리는 되도록 참석하기 바란다. 작년 너희 선배 학년 생도들이 너희들을 도와주었듯, 너희도 베풀 때가 됐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오늘의 불참을 아쉽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어. 이상.”

이시카와 교수가 교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날 소환했다.

“김제이는 잠깐 나 좀 보자.”

나는 교실 앞문으로 향했다.

“흐음.”

복도에서 태블릿pc를 품에 안은 채  기다리고 있던 이시카와 교수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력이 안정화됐구나. 축하해.”
“교수님 덕이죠. 감사합니다.”
“제이 네가 성실해서지. 잠깐 메모 좀 해볼래?”

이시카와가 한동안 마력 운용에 대한 조언이나, 마력 회로 강화와 관련한 유용한 정보들을 공유해주었다.
나는 폰으로 그 정보들을 받아 적으며 경청했고, 말이 다 끝난 교수가 한 마디를 덧붙여왔다.

“정규 기숙사로 이사는 언제  생각이니. 1관 2관 어디든 공실이 있어.”
“…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호의는 너무 감사한데, 아무래도 3관에 남는 편이 좋을  같아요.”
“생활을 꾸리느라 수련 시간을 많이 빼앗기게 될 텐데.그걸 알면서도 3관에 남고 싶은 이유가 생겼나보구나.”

이유야 많다.
당장 육서윤의 화장실 문제도 있고, 하리나 아이린이나 엘리사가 내가 3관에 머무는 걸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다. 새로 들어간 신연의 멤버인 낸시나 미아와의 거리 문제도 그렇고.

하지만 무엇보다 선우 때문이 컸다.

‘나랑같이 3관 쓰려고 성적도 일부러 떨구고 3관 리모델링까지 했는데. 이대로 가면 너무 서운해  거야.’

나는 가볍게 웃었다.

“네. 제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죠.”

**

창술 전공 OT 수업 일정까지 모두 끝난 오후.
나는 학내의 아이스크림 체인점에서 사흘 만에 하리와 만났다.
얼굴보고  얘기가 있다나.

“오빠.”
“어.”
“솔직히 말해봐.”
“뭘.”

김하리가 하얀색 브라가 슬쩍 보이는 앞섬을 잠그지도 않은 채 몸을 테이블 위로 길게 내밀었다.
녀석의 청록색 체크무늬 생도복 끝에 초코 맛 아이스크림이 살짝 묻었다.

“오빠 여자 친구 생겼지.”

휴지로 아이스크림을 닦고 놈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며 대답했다.

“아니.”
“뻥치지 말고!”
“개소리야.”

하지만 멍멍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김하리는 다시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 스푼을 들며 눈을 가늘게떴다.

“그럼 그 여자는 누군데.”
“누구.”
“어제 오후에 오빠 방에서 나오던 여자. 카드 키도 가지고 있던데.”

아아. 어제 하리가 내 방에 놀러왔다가,   화장실을 쓰고 나오던 육서윤과 마주쳤던 모양이다.

“…육서윤?”
“오빠 여자 친구 이름이 육서윤이야? 신입생? 어디서 만났는데? 어쩌다 사귀게 됐어?”

나는 장난기가 돌았다.

“여자 친구 맞아. 이제 사흘 됐어. 인터넷에서 채팅으로 만난 사이.”

김하리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아 뭐야. 여친 아니구나.”
“맞다니까?”
“됐어! 모지리 주제에 무슨 그런 여자랑 연애를 하겠어. 아이린 못지않게 예쁘던데. 옷도 엄청 비싼 거고.”

하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만 말을 더 잇지 않고 아이스크림만 먹는 모습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하긴 한데 물어보기엔 자존심 상하다’, 뭐 그런 느낌을 풍겼다.
나는 어차피 종종 보게 될 사이이니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OT에서 만난 앤데, 걔가 강박증이 있어. 공중 화장실을 못 사용해. 근데 기숙사는 4인 1실이잖아? 그래서 토요일에 밥 사주고 어쩌다보니까  방 화장실 쓰라고 하게 됐지. 만나면 앞으로 인사는 해.”
“아하.”
“괜히 시비 털지 말고. 걔 재벌집 막내딸이야. 사이  좋아져서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오키~도오키~♪”

하리가 듣는 둥 마는 둥 수저만 움직였다. 나는 니가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놈이 손도 대지 않은 바닐라쪽을 퍼먹었다.

그러다 문득, 발키리 생각이 미쳤다.

“야, 2주 전에 유령 소동 기억 나냐. 니가 범인 재밌는 사람일 거 같다고. 찾으면 말해달라며.”

분명히 하리가 그런 말을 했었다.
범인 찾으면, 신고하지 말고 자기한테 먼저 알려달라고.

“3관이랑 학교 여기저기 난리 났던 거? 응, 고대 노르드 마법. 기억나.”
“그거 범인,  누군지 알았어.”
“진짜? 누군데. 어떤 사람이야.”
“그거 사람 아냐.”
“그럼.”

나는 돌직구를 날렸다.

“발키리.”
“…….”

하리의 수저가 멈췄다.
그녀가 생각을시작했다.
논리적으로 사건의 전후 관계와 내가 던진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 모습이었다.

“킥!”

맑은 웃음 뒤에 하리의  수저가 다시 움직였다. 청순하고 고운 얼굴로는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하하하! 그렇네!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그럴 수도 있겠다. 오빤 그거 어떻게 알았어? 우리 모지리 디게 대단하네. 방금 좀 섹시했어, 오빠.”
“개소리 말고 사료나 퍼먹어.”
“멍멍!”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하리가 귀여웠다. 하지만 라라의 얘길 이 이상 꺼내는  실례라는 생각에, 녀석의 질문을 구렁이 담 넘듯 넘겨버렸다.

“하리야! 여기 있었구나.”

그때, 은쟁반에 다이아 굴러가는 미성이 귓가에 꽂혔다.
나는 빛의 속도로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린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오빠. 덕분에요. 오빠도 얼굴이 좋아보이세요.”

얼굴이 좋아 보여?
혹시 날 사랑한다는 건가.

“여, 여기 앉아! 아이린도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혹시 뭐 먹고 싶은 맛 있어? 맞다. 아이린은 딸기맛 좋아했었나. 딸기맛도 여기 안에 있어.  다 먹어.”
“후흣. 감사해요 오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기 가득한 생도복을 입은 아이린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하리가 완전히 활짝 핀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더니, 아이린에게 턱짓을 했다.

“아이린. 오빠 여친 생겼대.”

이 새끼야!

“응? 진짜? 오빠, 정말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김하리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폭력적으로 해!”

김하리가 꺼칠한 갈색 염색머리를 머리 위로 쓸어올리며 나를 놀렸다.

“와~ 나는 세상에, 살면서 너처럼 예쁜 애가 또 있을까 싶었거든? 근데 진짜 장난 아니더라. 그런 여자가이 모지리 방에서 툭! 튀어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어버렸다니까?”
“얘는, 내가 뭐. 라라 교수님이 더 멋있으시지. 키도 크시고, 지적이시고.”
“아니야, 진짜야. 라라 교수님처럼 엄청 예쁜데도 안 꾸미는 스타일이 아니라, 되게 세련 됐어. 얼굴은 차가워 보이는데 가만 보면 묘한 분위기도 있구. 우리 모지리 아주  터졌네?”

나는 실실거리는 김하리를 노려보며 참참못을 시전했다.

“야. 적당히 해라?”
“그래, 하리야. 오빠가 당황하셨잖아. 사정이 있어서 그러셨겠지. 그렇죠?”

아이린이 크고 투명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역시 얘는 천사인가.

“응! 그냥 선후배 사이야. 도움 주고받는 그런. 아이린도 나중에 소개시켜줄게. 애가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은데, 겪어보니 착하더라고.”
“아아. 그래서 좋아하게 되셨다?”
“야, 너 진짜 죽을래? 걔랑은 아무 사이 아니야! 니가 걔한테 물어봐!”

그때, 김하리가  뒤쪽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했다.

“그렇다는데. 맞아요?”
“…….”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죠.”

그곳에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생도복 차림의 육서윤이 있었다.

“…서윤 씨.안녕하세요.”
“네.”
“아이스크림 먹으러 왔나 봐요?”
“물론. 제이 오빠처럼요.”

아무런 고저 없는 말투로 나를 ‘제이 오빠’라고 부른 그녀가, 이내 목소리 톤을 바꿔 김하리와 아이린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1학년 C반 신입생도 육서윤입니다. 한동안 제가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느라 부득의하게 여기, 제이 오빠께 신세를  예정이에요. 앞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리와 아이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육서윤을 반겼다.

“그러세요. 어차피 우리 모지리 방, 이미 공공재에요. 부담 갖지 마요.”
“잘 부탁해요, 서윤 씨. 앞으로 우리 아는 척 해요?”
“네. 그동안 선배님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뛰어난 헌터 선배님들과 직접 만나 뵐 수 있게 돼서 참 기뻐요.”
“정말? 이거 영광이네. 누가 그렇게 내 칭찬을 해줬을까.”
“하리야, 넌 원래 유명하잖아. 서윤 씨도 그래서 알고 계신 거겠지. 아 참! 나 서윤 씨 누군지 아는데. 우리 인스타도 서로 친구에요. 몰랐죠?”

나는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세 여자들을 바라보다, 뭔가 내가 끼어들기 애매한 듯한 분위기에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서윤인 무슨 아이스크림 좋아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


“야, 쟤가 육서윤이지? 진짜 더럽게 이쁘네. 뭐 저런  다 있어. 학교 커뮤니티랑 인터넷도 완전 난리더라.”
“남자들이 환장할 만도 하네. 아까 아이린이랑 김하리랑 셋이  있을  난 무슨 영화 촬영하는 줄.”
“남자 기피증 있다더니 김제이랑은 잘 다니나봐. 하여간 쟤는 김하리도 그렇고 아이린도 그렇고 붙임성 하나는 알아줘야 돼. 쟤가 뭐가 있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와꾸는 원래도 봐줄만 했잖아. 특히 요즘 들어 되게 잘생겨진 거 같던데.”
“그러고 보니 뒤태 쎄끈한데? 얼마 전에 각성했다더니…. 함 들어대 봐?”
“크크큭! 미친년. 이거나 쳐머겅.”

김제이와 육서윤이 C반 선후배 대면식에 참가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수군거리는 생도들의 음성을 뒤로한 채.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보던 김하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재밌네.”
“뭐가?”
“쟤.”

김하리.
구룡칠봉 중 마봉의 자리에 오른, 공식 A++ 랭크 비공식 S급의 헌터가 수저로 육서윤을 가리켰다.

“어제 3관에서 마주쳤을 때도 느꼈는데 되게 특이해. 색기色氣? 염기艶氣? 같은 게 마력처럼 흐르는 그런 기분.”

―우우우우웅!

그녀의 마력이 움직였다. 김하리의 깊고 아름다운 눈이 시리게 빛났다.

“지난 주말부터 오빠한테 생긴 묘한 분위기랑 비슷해. 그거 분명히 쟤 만나고 나서부터 생긴 거야. 쟤, 뭐하는 앨까. 사람은 맞나? 산 사람이 어떻게 마치 카마Kama처럼 저런 색기를 뿌릴 수가 있을까. 아주 재미있어.”

지난주 드디어 97에 달하게 된 어마어마한 마력이 그녀의눈가에 조용히 집중됐다.
그 모습을 본 아이린이 친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하리야, 그만해. 여기 가게 안이야.”
“아, 참.”

김하리의 블랙홀처럼 빛을 빨아들이던 눈이 금세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자신의 백옥 같은 볼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휴지로 닦으며 친구에게 물었다.

“넌 쟤 느낌어때.”
“음… 나는 좋은데?”
“좋다고?”

아이린이 흑단 같은 머리를 찰랑이며 생긋 웃었다.

“응! 오빠한테 절대 해를 끼치지는 않으실 것 같은 느낌.”
“그래?”
“그렇다니까.”
“반선우처럼?”
“으응.”

햇살처럼 밝은 미소로 웃던 아이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선우 걔는 강하잖아.”

반선우는 강하다. 이 명제는 참이다.
인류 최초의 SSS급 랭커 김혜린 사후 역대 최고의 마력 재능으로 불리는 김하리조차 그 하프엘프의 저력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육서윤은약하고 반선우는 강하다, 불과 이 차이라는 건가. 육서윤의 인성이 보이는 것보다 괜찮나보구나. 아까 대화할 때는 가시가 있어 보이던데.’

김하리가  커봐야 3류 헌터로 끝날 재능으로 보이는 육서윤의 자질을 평가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린이 친구의 손을 꼭 잡으며 다독였다.

“서윤 씨는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아군이 되어줄 그런 사람 같아.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만.”
“응.”

단지 느낌이라곤 하지만,그 말을 한 사람이 아이린이라면 무게가 다르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의 확언에, 김하리의 날카로웠던 눈이 사르르 풀렸다.
그녀가 아까 김제이가 잠가준 생도복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어차피 오빠 옆에는 반선우가 있어. 육서윤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쪽은 심하게 걱정되지만.’

김하리는 앞으로 오빠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노크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저를 들었다.

**

C반 대면식으로 가는  내내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육서윤의 질문 때문에.

“서윤 씨, 같은 반 친구들은 어때요? 우리 자매반이라 서윤 씨 친구들이랑 저도 앞으로 같이 실습하게 될 텐데.”
“제이 오빠.”
“네?”
“저한테 말은 언제 놓으실 건가요.”
“…….”

두 번째는 그녀의 심기 때문에.

“서윤… 아. 기분 많이 안 좋아? 혹시  방 화장실도 많이 불편하니.”
“글쎄요.”
“크흠! 혹시 무슨 아이스크림 좋아해? 나는 바닐라가 제일 맛있던데.”
“글쎄요.”
“…아까 아이린이랑 하는 얘기 들어보니까 네일 아트 관심많다며. 너 혹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니?”
“글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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