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5. 제이와 수상한 산부인과(6) (45/145)



〈 45화 〉45. 제이와 수상한 산부인과(6)

햇살 좋은 토요일 정오.
중정로 믿음산부인과로 가는 길 내내, 나와 라라 사이에는 묘한 실랑이가 있었다.

“제이는 안 와도 괜찮다니까.”

라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나를 자꾸 아카데미로 보내려 했고.

“어떻게 그래요! …따라와요. 그리고 캐리어는 제가 끈다고 했잖아요.  자꾸 내 말 들어요?”
“아가야. 지금 나한테 화낸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속상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조금 큰소리까지 내며 그녀를 이끌려 했다.

“오늘은 햇살이 따갑네.”

라라가 일견 멍해 보이지만 깊은 눈으로 하늘을 보며 손부채질을 할 때면.

“잠깐만기다리세요.”
“과일 주스. 많이 많이.”
“가만히 여기  있어요!”

나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음료수를 박스째로 사왔고.

“아야!”
“조심하세요! 손 놓치지 말구.”
“지금 나한테 소리친 거니?”
“…걱정 돼서 그런 건데.”

그녀가 돌부리에 발이라도 걸릴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껴안았다.

나로서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만약에 라라가 임신을  거고 그게 지금 3주 차면 지금이 제일 위험할 때야. …낳아줄지 아닐지는 라라가 정하는 거지만,  전까진 내가 그 애 아빠다. …오늘 아침에 확인했나? 그래서 관계를 꺼린 건가. 그럼… 그린 라이튼가? 하아 씨발, 모르겠다.’

반면, 나보다  걱정이 많아야 정상일 라라 교수는 진짜 속도 없는 여자인 것 같았다.

“윙 윙 윙. 작은 벌이  맴도네.”

초조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노래까지 부르며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흐응.”

라라가 배부른 암사자 같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왜그렇게 웃으세요?”
“내 아가가 너무 귀여워서.”
“하나도 안 그렇거든요? 조심해서 오세요. 보도블록 공사 중이라 지면 불안정하니까.”
“응.”

처음에는 얼른 학교로 돌아가라 보채던 라라 교수는, 내가 신경써주는 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지 나중에는 편하게 나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띵동

그리하여 우리는 비즈니스호텔에서부터 병원까지 도보 40분 만에 도착하게 됐다.

“제이는 이제 의자에서 기다리렴.”
“저도 같이 가요.”

내가 혼자 접수계에 가려하는 라라의 팔을 붙잡자, 그녀가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야. 네 여자는 의사야.”
“…….”

그랬다. 라라는 의학 박사다. 그것도 상이한 학위를 두 개나 가진.

“…네. 다녀오세요.”
“착해.”

라라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를 대기석에 홀로 둔 채 접수계로 향했다.
간호사와 뭔가를 빠르게 이야기한 그녀가 정말 금세 내게 되돌아왔다.

“5층. 짐은 여기 두고 오렴.”

우리는 캐리어를 간호사에게 맡긴 뒤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나는 부끄럽게도 층수가 올라감에 따라 긴장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는데, 라라는 내 손에 깍지를 껴주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라라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연상이라? …하아, 정신 차려 김제이! 라라도 속으로는 많이 불안할 거라고!’

하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 나의 하늘은 여전히 노란색이었다.

―띵동
―5층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라라는 내 손을 잡아 어딘가로 이끌었다.

‘여긴….’

<제1 산후조리실>


그곳은 진료실이 아니었다.

**


라라가 하얀 병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품이 큰 산부용 병원복을 입은 여자,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  그녀의 가족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라라가 고개를 숙이며 한국식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반색을 하며 그녀를 반겼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구나!”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제 덕분에 큰 고비 넘겼습니다.”
“여보, 선생님 오셨어! 어제 우리 도와주신 그 선생님!”

병원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던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선생님…. 덕분에 무사히 출산했어요.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축하드립니다.”

라라가 그녀의 옆으로  축하를 건넸고,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라라와 그녀에 얽힌 사정은 이랬다.

어제 라라가 타고  비행기에서 임신 8개월 된  임산부가 조산기가 있어 위기가 닥쳤었다고.
그런데 라라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준 덕분에, 임산부는 무사히 이곳 믿음산부인과로 와 출산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제 착륙 후에 딜레이가 길었던 거였구나. 라라 진짜 대단하네.’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라라 마르티넥을 바라보았다.
내가 건넨 과일 주스 상자를 받았던 남자가 포도 주스를 까주며 그녀를 칭찬했다.

“굉장하셨어요. 양수가 터지고 기내가 엉망진창이 됐는데, 선생님께서 사람들 진정시키시고 아내도 보살펴주시고.”
“그랬구나. 정말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아니셨으면 인큐베이터도 못 들어가 보고 유산될 뻔했죠. 자칫하면 제 아내도 위험했고….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우리는 서로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점심 면회시간이 끝났을 때쯤 병실을 나왔다.
산부의 남편은 우리를 4층에 있는 아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었다.

“저기,  구석이요. 아들이에요.”

인큐베이터가 놓인 신생아 중환자실 방 모서리에는, 소중하고 작은 발을 꼬물거리는 작은 아기가 있었다.
오늘로 8개월 1주 차 된, 쪼금 성격이 급한 아가가.

“아드님이 되게 작네요. 귀엽다.”
“체중은 2kg정도 같은데. 호흡기나 다른 곳에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예! 선생님 덕분에 조산아 치고는 아주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라라가.

“참 다행입니다.”

그제야 선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라라가 산부의 가족들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대기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한숨 돌렸다는 마음과 지금까지 내가 너무 무신경했다는 반성을 품고서.

‘현실에서 질싸는 진짜 자제해야겠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 똥멍청아? 첫 경험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어제 네놈은 고삐 풀린 종마 같았다. 라라가 어제 위험일이었으면 100퍼 임신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임신 걱정은 현실진행 중.
속 타는 마음에 냉수만 들이켰다.

‘하아…. 살아있는 애기들을 눈으로 보고나니까, 이제야 출산이 장난이 아니라는  실감이 돼.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싸질렀던 거지.’
[폭풍질싸는 수컷이라면 누구나 환장할 수밖엔 없지만 네놈은 그 정도가 보통보다 심하다. 쾌락여부를 떠나, 고아라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기제가 있는 것이겠지.]

고아라서 질싸에 유독 집착한다라.
어느 정돈 일리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빨리 결혼해서 빨리 내 가족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아기도 좋아하는 편이다.
희망원에서 자라면서 어린 애들이랑 부대끼며근 20년을 살았었으니.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상황에 아기가 생긴다는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얘기일 수밖엔 없다.

키우는 것도, 지우는 것도 양쪽 다.

‘…경과를 지켜보자. 일단 집에 가는 길에 콘돔부터사고. 앞으론 항상 들고 다녀야지.’

내가 스마트폰으로 임신 초기와 관련한 정보들을 검색하고 있을 때였다.

“아, 정말 이 병원 때문에 미치겠다.”
“내 말이. 조순주 환자도 결국 유산이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가 꼈어, 마가. 굿이라도 해야 되나. 우리 엄마는 이직하라고 난리야.”

대기실 구석진 곳에서 세 명의 간호사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D급이라도 헌터인 나라서, 오감이 예민한 덕에 그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엿들을 수 있었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어떻게 5개월 미만 임부들한테만 이럴 수가 있느냐구.”
“말도 마. 벌써 제주 맘카페에 우리 병원 소문나서, 서귀포 쪽에 있는 예비맘들 전부 제주시 병원으로 옮겼대.”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좋은 일들에 대한 얘기인 모양이었다.

대충 정리하면,  병원을 다니는 4~5개월 차의 산모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연속해서 자연 유산하고 있다는.

‘원래 임신 초기가 제일 위험하긴 한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저럴 수가 있나?’
[수상하다. 더 자세히 들어봐.]
‘응. 나도 뭔가 이상해.’

귀 쪽의 마력회로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간의 트레이닝으로 이제는 눈이나 근육만이 아니라 청력도 약간이나마 강화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었다.

“이번 주에 그 조순주 환자는 20주 차인데도 유산 됐잖아. 쌤 앞에서 엉엉 우시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원장 쌤도 너무 불쌍해. 그렇게 성실하고 실력도 좋으신데, 어떻게 우리 원장쌤 병원에 이런 일이 생길까.”
“야. 이거 올 초에 아랫집 이사 오고 나서부터 계속 이러는 거 같지 않아?”
“네일 집? …어, 듣고 보니 그렇네. 이런 일 작년에는 하나도 없었잖아. 오히려 우리 병원 용하다고 소문도 났었는데.”

―띵동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라라가 돌아왔다.
나는 마력을 회수하고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얘기잘 끝나셨어요?”
“응.”
“가요, 배고프겠다.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

나와 라라는 병원을 나와 근처의 유명한 수육집에 들어갔다.
독일인인 ―핏줄이야 스칸디나비안 쪽에 가깝지만 ― 라라지만 한국에 총 10년 정도를 살았더니 한국 음식도 곧잘 먹는다고.

“교수님 냉면도 드세요?”
“별로. 식감이 싫어.”
“외국인이시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일단은 수육 대자 하나랑 감자전이랑 시킬게요. 괜찮으시죠.”
“그래.”

주문을 마친 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그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교수님.”
“응.”
“어제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자제력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진짜 많이 반성했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무책임한 모습 안 보여드릴게요.”
“어떻게?”
“…일단,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든 최대한 교수님 마음 편하신 대로 될 수 있도록 제가 뭐든 맞춰드릴게요. …그게 어떤 일이든, 제가  수 있는 일이라면요.”

어제의 일로 임신을 했다면.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흐응.”

라라는 말없이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팔을 쭉 뻗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너무 귀여워서안 되겠네.”
“…네?”
“더 놀리려고 했는데 못 참겠다.”

그녀가 엄지로  손등을 쓰다듬었다.

“사실 오늘 새벽에 생리 시작했어. 걱정하지 마.”
“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 그렇게  손길을 뿌리쳤던 거구나.
날개형 생리대가 아니라 팬티라이너라도 착용하고 계셨어서 내가 몰랐던 모양이다.

“오히려 아가가 걱정해야 될  어제가 아니라 그때였어.”
“그때요?”
“3주 전.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그날이 배란일이었지.”

3주 전이라면 나와 라라가 처음 그걸 했을 때다. 그러고 보니 만약 그때부터 지금까지 생리가 미뤄진 거였으면.

‘…라라 입장에서는 거의 열흘가까이 생리가 늦었던 거구나. 진짜 걱정 많이 했겠다.’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갔다.
이 슈육 정식 식당은 꽤 고급이라 파티션이 쳐져 있어서, 나와 그녀가 나란히 앉아도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교수님.”

그녀를 품에 안았다. 향기 나는 은발머리가 턱에 닿았고, 그녀가 내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비볐다.

“피임은 서로 하는 거야. 아가 잘못이 아니야. 의사인 내 책임이 더 커.”
“그래도 죄송해요.”
“좋아해.”

라라가 지극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얼굴에 맞댔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를 안은  진한 고마움과 솟아오르는 애정을가슴에 새겼다.


**

라라 교수와 토요일 하루 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밤에는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잠을 잤다.
섹스를 하지 않고 보낸 첫 밤이었다.

[→나: 교수님, 피곤하신 듯해서 먼저 가요. 남은 음식 반찬통이랑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까 식사 거르지 말고 꼭 하세요. 좋은 일요일 보내시구요. (웃는 이모티콘)]

다음  아침인 일요일.
라라는 그간의 피로가 생리와 한 번에 겹쳐 터진 듯 늦잠을 잤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나와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까톡

[→라라 마르티넥: 아가야가 해준 저녁이랑 아침 너무 맛있었어. 남은 음식들도 아껴 먹을게. (사진 첨부 파일)]

[→라라 마르티넥: 조심해서 들어가. 다음 주에 봐. (큰 하트 이모티콘)]

이번 주말을 거의 함께 하면서 느낀 변화가 있다.

라라의 말수와 표정이 늘었다는 점.

특히 금요일 타임캡슐 건과 어제의 산부인과 방문 이후, 그녀가 나를 아주 많이 가깝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곰 같긴 하지만 좋은 여자다. 네놈이 여우처럼 애교를 부릴  아니, 잘 어울리는  쌍이라 수 있겠지.]
‘그래도 본격적인 연애는 모르겠어.’

나는 라라가 너무 좋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육서윤이나 아이린 같은 다른 여자 때문이 아니다.

72 악마의 봉인 건.

앞으로도 60명이 훌쩍넘는 여자와 교감을 나누고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데, 지금 라라에게 정착하는 건  성격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어쩌면 라라와도 선우처럼 내 비밀을 공유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다. 이해해줄지 누가 알겠어.’
[쎅쓰. 이 몸은  판단을 존중한다. 오히려 아서는 주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시스템 캄비온의 비밀을 말하고 다녔어. 그 덕에 결과적으로 원탁 전쟁광년들이 쉬이 결성될 수 있었지.]
‘몰라. 일단 나중에.’

나는 라라에게 답장을 보낸 뒤, 걸음을 서둘러 3관으로 들어갔다.


―딸랑


로비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낸시, 미아, 브랜드, 알렉세이. 그리고 언령술사인 하킴까지.

“여기 모여서들 뭐해?”

서귀포시에서 사온 호두과자를 던져주며 묻자, 낸시가 냉큼받으며 턱짓을 했다.

“미아. 무려 이틀을 무단 외박한 총무가 귀환했다.”
“제, 제이야! 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놀다 왔어. 근데 니들 여기 모여서 뭐해? 하킴 형님도 계시네.”

내가 눈인사를 하자, 198cm의 거대한 흑인 남성이 고개를 까딱했다.

―끄덕

내가 3관에 온지도 벌써  한 달.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츠르를 흐그 이쓰따.”
“뭐라고?”

음식물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해, 낸시에게 되물었다.
그녀가 호두과자를 빠르게 삼키며 말을 이었다.

“추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추리? 어떤 추리.”

그녀가 옆자리에, 낮부터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알렉세이를 가리켰다.

“알렉세이의 와이프가 유산을 한 이유. 그 원인을 추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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