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 제이의 도둑질 첫 도전!(3)
결국 나는 김하리에게 용돈이라는 구실로 20만 원.
플러스, 아이린의 사례금 명목으로 ―서좋윤아와의 접선을 중계해준― 10만 원을 더 뜯겼다.
약 40국밥에 해당하는 대지출.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원래 나는 사비를 들여서라도 서좋윤아에게 사진을 구입할 의사가 있을 정도로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아이린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접선이 된 것.
“오빠,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용돈 잘 쓸게! 사랑해, 오빠!”
“…그래. 차 조심들 해라.”
하리와 아이린을 마중한 뒤.
나는 지금 당장 시간이 된다는 서좋윤아와 만나기 위해 본관 앞으로 향했다.
‘누구냐, 서좋윤아. 얼굴이나 보자.’
내가 이를 갈며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품이 좀 큰 생도복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아이 한 명이 내 어깨를 콕콕 찔러왔다.
“김제이 선배님. 안녕하세요.”
서루이. 1학년 신입생도다.
지난OT때 나랑 같은 조였던 애.
“어, 루이야 안녕. 기숙사 가니?”
“아니요.”
“으응, 그래. 잘 가. 주말 잘 보내고.”
나는 루이를 적당히 보내려했다.
서좋윤아에게 신경이 팔려서 그런 것도 있고, 이 루이라는 애가 진짜 묘하게 대하기 어려운 애였기 때문이다.
‘생긴 건 귀여운데 뭔가… 파장이 안 맞아. 얜 나랑 친해질 수 없는 애다.’
하지만 루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빤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왜 그래? 할 말 있니.”
“여기요.”
루이가 호주머니를 속에서 USB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작년. 그러니까 2X년 4월 28일에 촬영한 『101명의 창부들』 사진이에요. 김제이 선배가 바라던 원본. 이거 찾으셨던 거 아닌가요?”
…루이 니가 그 싸가지 더럽게 없는 서좋윤아였냐?! 어떻게 아는 사이에, 그것도 선배 오빠한테 ‘ㅗ’ 쪽지 하나만 보낼 수가 있어?!
[진정해. 상대는 찐이다. 흥분해봐야 너만 손해야. 그냥 적당히 보내.]
메리의 말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17살짜리 애한테 진심으로 화를 내봐야 나만 손해였으니까.
“…고맙다. 잘 쓸게.”
“5만 원이요.”
이런 망할 꼬마.
“계좌 불러.”
나는 루이에게 5만 원을 입금한 뒤 USB를 받고 등을 돌렸다. 한 시라도 이 불편한 꼬마년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 선배.”
그런데 루이가 날 불러 세웠다.
“왜? 돈 부족하냐.”
“서윤 언니한테 신경 좀 써주세요.”
“…육서윤?”
“그럼 신입생도 3078명 중에 서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도가 서윤 언니 말고 더 있어요?”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어이가 털리는 마음에 루이의 앞으로 돌아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어봤다.
“그러니까. 서좋윤아라는 닉네임을 쓰는 서루이. 니가 지금 나한테. 너랑 같은 반인 1학년 C반 육서윤을. 좀 더 챙겨줬으면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키진 않지만 그래요.”
그녀가 아주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윤 언니께서는 이제 막 세상을 새로 받아들이시고 계시는 단계 같거든요. 그런데 남자라곤 주변에 발정난 개새끼들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사람새끼 같은 선배한테라도 잘 부탁한다고 하는거죠. 오해하지 마세요. 저도 좋아서 드리는 부탁 아니니까.”
“너 원래 말 이렇게 싸가지 없게 해?”
“하!”
내가 정색을 하고 묻자, 서루이가 아주 불쾌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화를 내?”
“너 되게 웃긴 애구나.”
“내가!!”
그녀의 눈에 나 같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광기가 떠올랐다.
“서윤 언니를! 대체 언제부터 지켜봐왔는지 당신이 알아?! 고작 OT에서 처음 만나서 운 좋게 언니 테두리에 들어간 당신이 뭘 아냐구?! 심지어 명단에서이름 봤을 때는 육서윤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주제에!”
서루이가 아주 복받친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으르렁거렸다.
“그나마 당신이니까 이렇게 넘어가는 줄 알아. 김하리님이랑 아이린 언니한테 감사하게 생각해. 일반 사회에서 만났으면 서윤 언니 발끝도 못 쳐다봤을 주제에, 어디서 누구한테 간을 보고 지랄이야.”
“서루이. 너 말 다 했어?”
“아니?다 못 했어. 그러니까 똑바로 처신하라고! 서윤 언니 불편함 못 느끼시게! …비켜.”
―퍽!
서루이가 내 가슴을 어깨빵 하고 지나갔다.
나는 화가 나는 것도 나는 거지만, 그보다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안 돼서 입만 벌리고 놈을 쳐다봤다.
‘저 새끼 뭐야.’
뭐 저딴 식으로 급발진을 해.
지금 서루이는 성격 지랄 맞은 생도한테 걸렸으면 개처럼 쳐맞고 있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무례를 저지른 거다.
[쯧쯧. 알겠군. 어린 것들 중에 종종 저런 타입이 있지.]
메리가 혀를 차며 서루이의 행동을해석했다.
[저 꼬마 계집은 레즈비언인 것 같다.]
그 정도는 나도 알 것 같다.
[타입으로 따지면 실제 연애를 추구하기보단, 애정하는 대상을 우상시하고 빛나게 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타입. 일방적으로 퍼주는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서좋윤아. 풀이해봐라. ‘서윤 좋아’ 잖아. 즉 저 꼬마 계집은 네가 육서윤과 친해진 것이 불만이기도 한 동시에, 육서윤이 네게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은 나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지.]
‘플라토닉 러브 오지시네.’
코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지가 육서윤에게 신경을 쓴다고 한들, 그래봐야 관찰자에 불과한 주제에.
그렇게 애정하고 좋아했으면 진즉 어떻게 해보지?
그랬으면 서윤이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시도까지 벌인 일도 없었을 거다.
[그게 니 말대로 쉽게 됐으면 세상에 왕따도 없고 외로움도 없겠지. 저 계집도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쟤 성격 좆같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아무튼 서루이 한 번만 더 선 넘어봐.’
[넘으면. 어쩔 건데.]
…뭘 어째 씨팔. 17살짜리 여자애를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럼 우리 라라 교수님한테 일러바쳐야지. 교수님 어떤 애가 저 괴롭혀요, 저 좀 안아주세요. 하고.’
메리가 우웅, 울며 좋아했다.
[역시 네놈이 아서보단 낫다. 그놈은 지가 꼴려서 친누이를 강간해놓고, 그 누이가 낳은 자식을 근친상간의 산물이라며 내치려했던 천하의 개새끼였거든. 이 몸이 새 파트너 하나는 잘 골랐어.]
‘그 정도면 내가 정상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너무 쓰레기인 거잖아?!’
개같은 일을 되도록 쉽게 잊는 것이 내가 가진 최고의 장점.
나는 서루이의 일을 털어버리고 리쿠르팅 행사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신입부원 좀 받았겠지.’
**
중앙 광장 시계탑 아래.
이곳은 생도회가 주관하는 동아리 리쿠르팅 합동 행사가 한창이었다.
“검술연구 심화반에 놀러오세요~!”
“영화반입니다! 저희 동아리 선배님들 중에 영화배우 제이슨님도 계세요!”
“스쿠버 다이빙! 올 여름은 리얼충들의 세계로 다이빙 해봐요~! 저희 동아리 훈남 많습니다!”
파란색 천막들과 개미 떼 같은 생도들 틈바구니를 지나, 우리 신연의 부스로 향했다.
‘잠깐. 저거 육서윤 아냐?’
[쎅쓰.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맞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니, 육서윤이 신연의 부스에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예쁘게 커스텀한 생도복을 입고 탐스러운 가슴 위에는 신연의 카탈로그를 고이 얹은 채,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낸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쟤가 오컬트에도 관심이 있었나.’
사실 얼마 전에 서윤이가 톡으로 어떤 동아리가 좋냐고 물어본 적이 있긴 했다.
그때 내가 신연 소속이라는 말을 해준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부스에 찾아온 걸 보니 아주 기뻤다.
‘…그래도 쟤 성격 상 일부러 말 안 하고 온 것 같은데. 지금 안 마주치는 편이 나으려나.’
문득, 아까 서루이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서윤 언니한테 신경 좀 써주세요.
―서윤 언니께서는 이제 막 세상을 새로 받아들이시고 계시는 단계 같거든요.
―그런데 남자라곤 주변에 발정난 개새끼들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사람새끼 같은 선배한테라도 잘 부탁한다고 하는 거죠.
확실히 그 녀석 말이 일리는 있다.
지금만 해도 주변 남자들이 서윤이의 뒷모습, 엉덩이, 다리, 가슴, 얼굴 등을 하염없이 훔쳐보고 있었으니까.
[훔쳐보기만 하면 네놈이나 그 꼬마계집과 같지. 저기 봐라. 정신 나갔군.]
사람이 많은 틈을 타 은근슬쩍 서윤이의 몸을 부딪치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폰 카메라로 몰래 은밀한 사진을 찍으려 시도하기도 했고.
“와, 씨발 쟤가 H컵 재벌녀구나. 빨통이랑 힙 개좆되네. 쟤 남친 없지?”
“금발머리 딱! 뒤로 당기면서 뒤치기로 질싸 거하게 하면 소원이 없겠네. 개년, 얼굴도 졸라 이쁜 거 보소. 금발 챙녀 닉값 제대로 하네.”
“야, 야! 팬티 못 찍는다고. 신연 부장 A급이야 병신아. 너 퇴학당해, 큭큭!”
심성이 그나마 양반인 남자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만 흘리는 식으로.
좆같은 새끼들은 좀 더 적극적이고 지저분한 방식으로.
육서윤은 그녀를 탐내는 인人의 장벽으로 은밀하게 둘러 쌓여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는데.
‘지독하다. 아이린도 인기가 많지만 이 정도로 악의적이지는 않아.’
[그나마 애욕의 화신을 회수해서 이 정도로 그친 거다. 더 오래 방치했으면, 아스모데우스를 봉인했어도 육서윤은 제 명에 살 수 없었어. 남자들이 그렇게 살게 놔두질 않았을 테니까.]
육서윤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간 그녀에게 비치는 관심의 양상을, 아이린이나 하리의 경우와 비슷한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던것.
‘내가 그간 확실히 무신경했구나.’
걸음을 옮겼다.
취업박람회를 방불케 하는 인파를 헤치고 부스로 갔다.
“아 누가 밀어?!”
“어…? 머, 뭐야.”
“잠시만요. 제가 신연이라.”
냄새를 맡는건지 뭘 하는 건지 육서윤 뒤에서 얼쩡거리던 남자들 몇을 밀어냈다.
“어? …오빠.”
“안녕.”
낸시, 미아와 대화를 나누던 서윤이가 아는 채를 해왔다.
“얘기 계속해. 난 저번에도 말했지만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거든.”
“으응.”
“맞다. 총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리쿠르팅 행사도 배제했다.”
“그, 그래도… 우, 우리 부, 부원… 이야.”
세 여자가다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는 잠시 지인을 만나러 갔다던 아나 코스타가 서윤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그녀의 옆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들이 행사장을 떠난 뒤에야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받아.”
“총무는 우리에게 더욱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방금 그 여자에게 배려를 해주었던 것처럼.”
“후… 후훗.”
낸시와 미아가 내가 아까 했던 행동이 뭘 의미했는지 알아채곤 상냥한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USB를 던지듯 건넸다.
“101명의 창부들. 100명이 아니라 101명이 찍힌사진 있잖아? 생도 커뮤니티 올라왔던 거. 그거 원본이야.”
“아하.”
“별로 안 좋아하네?”
내가 낸시의 볼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떼어주며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가지고 있다. 닉네임이 아마… 서좋윤아? 그 사람. 그 인간이 얼마 전에 신연 메일을 통해 보내줬다.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
[ㅋㅋㅋㅋㅋㅋ]
이런 씨발 내 5만원!
서루이 얘 진짜 너무하네.
설마 하리가 말한 헛수고라는 게 이 뜻이었나?
“왜… 왜 그래 제, 제이야?”
“아무것도 아냐. 아 참, 신입부원은. 오늘도 0명?”
“그렇다.”
낸시가 뿔테 안경을 올려 쓰며 무표정한 얼굴로 상담자 명단을 살폈다.
“적성자가 한 명도 없다. 미아의 점괘에 걸맞은 생도도, 우리 신연의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떡하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이메일 지원만 기다릴 거야?”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번 상반기 리쿠르팅은 높은 확률로 신입부원이 없을 듯하다.”
“우, 우린… 괘, 괜찮아.”
두 여자가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들이야 그렇겠지. 두 명이서 무려 6년을 해왔던 신연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와 함께 잡일을 해줄 쫄다구를 원한다.
“방금 걘 어때.”
“육서윤?”
“어.”
낸시의 검은 눈이 깊어졌다.
“머리는 좋다. 다만 호기심이 적은 타입이라는 것이 문제다. 신이 사건에 대한 관심도 보통 여자들 수준이다. 즉, 특별히 뽑을 이점이 없다는 뜻이다.”
“걔 착해. 협동심도 의외로 있어.”
“착하고 협동심 있는 부원이 필요했으면 우리가 사흘 간 단 한 명의 신입부원도 찾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녀의 의견은 완고해보였다.
나는 원군을 요청했다.
“미아는 어때?”
“나, 나는… 괘, 괜찮아…. 귀, 귀, 귀엽고… 저, 점성, 술도… 과, 관심, 있다고… 하고.”
“미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점성술이 아니라 타로카드다.”
“하, 하하….”
미아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공략대상이 누구인 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공략법도.
“낸시.”
돌직구를 날렸다.
“걔 삼원 회장 막내딸이야.”
“안다. 저번에 일어났던 내균열 사고를 탐구하던 중 확인했다.”
“걔가 우리 부원 되면, 빵 맨날 갖다 줄걸.”
지금 내가 한 말은 공수표가 아니다.
서윤이는 지금도 기숙사 자기 방에 삼원 빵 십여 박스를 쌓아놨다고 했다.
걔가 요청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걔네 회사에서 주변 사람 먹으라고 그렇게 꾸준히 신경을 써준다고.
“…신연은 신성한 곳이다.”
“신제품도 줄걸? 미출시 된 거. 서윤이가 개발에도 종종 참여하고 그래서 신제품 나오면 개발팀에서 바로 보내준대. 국제고 다닐 땐 반 애들이 빵을 쉬는 시간마다 물고 돌아다녔다던데.”
“……연구는, 진지해야 한다….”
낸시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