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53. 제이의 도둑질 첫 도전!(4)
“……연구는, 진지해야 한다….”
낸시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잠깐! 김제이 너설마 쿠데타를?!”
“릴렉스 해. 그냥 안마야. 나보고 더 친절하게 대해달라며.”
“…허락하겠다.”
너무 큰 가슴 때문에 A급 헌터인 낸시의 육체에도 부하가 걸리는지, 말랑말랑해야 할 승모근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사근사근하게 설득했다.
“낸시. 서윤이는 너도 알다시피 내균열 사건과 연루된 애야. 게다가 신기할 정도로 이성한테 인기가 많지. 걔라는 사람 자체도 미스터리 요소가 있다구.”
“……그렇긴 하다. …아아! 살살.”
아귀의 힘을 더 빼고 1/4쯤 애무를 한다는 느낌으로 안마를 이었다.
“그리고 일반 평부원 한 명 있는 것도 좋아. 언제까지 총무인 나한테 다 시킬 거야? 나 이번에 당장 서울 가면. 부부장인 미아한테 시킬 거야? 아니면 수석연구원인 라라 교수님한테? 그건 고급인력을 너무 홀대하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다.”
거의 넘어왔다.
안마 때문에 열이 오른 탓인지 붉어진 녀석의 귓가에, 슬며시 속삭였다.
“연구자 윤리 버려.”
“인간 급유기 받아.”
“배고픈 위장 채워.”
한참을 말이 없던 낸시가 고개를 돌리며 근엄한 얼굴을 했다.
―끄덕
그렇게 우리 신연은 202X년 1학기 신입부원으로.
총 1명의 리쿠르팅에 성공하게 되었다.
**
3월 14일 토요일.
벌써 3월도 절반이 지나가버렸다.
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뭐 이리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형, 준비 다 됐어요.”
“출발하자.”
나는 이른 아침부터 선우와 함께 제주 공항으로 향했다.
청송미술관 탐방을 위해 주말 중에 서울에 갈 거라고 했더니, 녀석이 같이 가도 되겠냐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승낙한 것.
[반쪽이는 언제나 환영이야. 공상계 내에서 힘을 써줄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아군이기 때문이지.]
“아하하! 고마워, 메리야.”
“그걸 떠나서도 선우는 착하니까.”
셔틀을 타고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수속을 밟은 뒤, 면세점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잠시 후 제주발 서울행 A301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예약해둔 LCC항공편을 기다리며, 여사친들에게 기프티콘을 쐈다.
오늘이 명색이 화이트데이니까 우정 사탕이라도 보내줘야 될 것 같아서.
‘진짜로 사탕을 보내면 보내고도 욕먹을 테니까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하자. 이번 달 예상 외 지출은 희망원 선물 사는 거 빼고 딱 여기까지만. 주말 지나고 한동안은 허리띠 졸라매야겠다.’
2만 원 정도의 기프티콘을 10개 사서 간단한 메시지와 함께 뿌렸다.
명단에는 선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무 감사해요 형. 잘 먹을게요.”
“아니야. 나야말로 성의 없이 줘서 미안해. 넌 수제 초콜릿이었는데.”
“아하하. 연습 삼아 만든 거 드린 건데요. 오히려 드셔주셔서 감사하죠.”
“그래두. 내년에도 우리 둘 다 여친 없으면, 같이 초콜릿이나 만들자.”
“정말요?저야 좋죠!”
이 아름답고 귀여운 하프엘프 친구는 저번 발렌타인 데이 때 나에게 초콜릿을 준 유일한 범인류종이었다.
선우는 남자 아니냐고?
근데 어쩌라는 건가.
남자한테 받은 우정 초콜릿도 초콜릿인데, 그럼 받고 입 싹 씻을까. 그럼 내가 너무 얌체 같잖아.
‘생각해보니까 좀 그러네. 저번에 선우한테밖에 못 받았었구나.’
사실 내가 받은 게 없으니 줄 필요도 없긴 하다. 그래도 그냥, 받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보내준 것뿐. 사실 나도 기념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까톡
―까톡
다들 토요일 오전 치고 일찍 일어났는지 답장 후드득 밀려왔다.
[→김하리: ㅋㅋㅋㅋ ㄱㅅㄱㅅ]
[→아이린: 오빠, 케이크 너무 고마워요. 방학이라 초콜릿 드리지도 못 했는데. 혹시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 해요. 제가 어제 제주시에서 맛집을 찾았거든요. 주말 잘 보내시고,다음 주에 뵐게요. (꾸벅 이모티콘)]
그 외에 엘리사, 낸시, 미아, 이시카와 교수, 아나 코스타에게까지 답장이 왔다. 내용은 딱, 우정 사탕을 고마워하는 그 정도의 감사함을 담아서.
[→라라 마르티넥: 아가야, 그러고 보니 출장을 가 있느라 챙겨주지를 못 했었네. 미안해. 내년에는 꼭 잊지 않을게. 고마워, 좋아해 (하트 이모티콘)]
라라는 내년에도 나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린에게 신경 써서 답장한 것의 세 배정도의 애정을 꾹꾹 눌러 담아 톡을 보냈다.
―까톡!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케이크 수령자에게서도 답장이 왔다.
[→육서윤: 고마워요 오빠. 잘 먹을게 (웃는 이모티콘) (웃는 이모티콘)]
[→육서윤: 근데 오빠 혹시 들었어? 나 신이연구부 가입했다ㅎㅎ]
[→육서윤: 사실 요즘 꿈에 엄마가 자주 나와서 마음이 싱숭생숭했거든요…. 근데 마음에 든 동아리 가입하고 나니까 그런 거 싹 다 풀렸어 :D]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니 영업을 얼마나 했는데.
[→나: 들었어. 축하해ㅋㅋ 우리 부 들어오기 은근 빡센데, 해냈구나ㅋㅋ]
[→육서윤: 응응! 타로카드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많이 어필했더니 부부장 언니가 좋게 봐주셨나봐ㅎㅎ 이번 신입부원은 나 한 명뿐이라던데, 내가 쫌 인재인가?ㅋㅋ]
서윤이는 그 유명한 ―진짜로 고학년 사이에서 꽤 인지도가 있었다― 신연의 유일한 부원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크게 업 되어 있는 듯했다. 안 하던 농담도 다 하고.
‘귀엽네.’
늘 우울한 분위기인 서윤이가 행복해하니 나도 마음이 좋았다.
[→육서윤: 그래서 있잖아, 어제 부장 언니가 나한테 빵 같은 거 필요 없고 우리가 필요한 건 연구에 전념하는 준비된 인재라고 하시는데ㅋㅋ 눈으로는 막 내가 든 쇼핑백만 보고 계셨어ㅋㅋ]
[→육서윤: 아 예감이 너무 좋아+_+ 언니들 다 너무 귀여우셔ㅋㅋ (박수 치는 이모티콘) 라라 교수님도 빨리 만나 뵙고 싶어. 얼른 다음 주 화요일이 됐으면 좋겠다ㅜ_ㅜ (엉엉 이모티콘)]
작은 종달새처럼 쉼 없이 재잘거리는 서윤이와 톡을 하다 비행기에 올랐다.
[→육서윤: 맞다! 오빠는 오늘 연구 조사 때문에 서울 간다며? 어떤 주제야?]
[→육서윤: 파견 조사라고 하니까 왠지 멋있다ㅎㅎ 혹시 오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랑 관련된 거야? 나 사실 지금 오빠 방인데…. 나두 이제 신연이니까 그거 읽어봐도 돼요?? (망설이는 캐릭터 스티커)]
그녀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나와 선우는 오전 10시 반 경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한 미술관에 도착하게 된 것.
‘여기구나.…이거 전시 사업은 폼이고 사실은 건물 투자하려고 미술관 구입한 거 아냐? 이 비싼 동네에 뭔 놈의 미술관.’
청송미술관.
국내 재계 서열 1위의 재벌 집단이자 최고의 헌터 클랜을 보유한 유진 그룹 소유의 사립 미술관이다.
유진 그룹은 2위의 클랜인 블루울프나 2위의 재벌집단인 백제그룹과 넘사벽의 차이로 국내 탑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보유 미술관도 여러 개고, 청송미술관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즉, 청송미술관은 크기도 소재지도 평범한 미술관을 예상했던 내 생각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학생 두 분이시면 만 육천 원이요.”
“여기요.”
“형… 괜찮은데….”
“부비 처리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너랑 조사 같이할 거라고 이미 허락 받았어. 아! 사장님, 영수증 챙겨주세요.”
나와 선우는 조그마한 상가 건물 크기의 아주 세련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로비는 없고, 곧바로 계단이 나오는 상당히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었다.
“건물이 예쁘긴 한데 많이 작다. 계단도 이렇게 트면 공간 낭빈데.”
그저 머릿속에 돈 생각밖에 없는 내가 작게 투덜거리자, 선우가 생긋 웃었다.
“개인 소유 갤러리들은 보통 이래요. 백암미술관이나 간청미술관 같은 곳들이 오히려 이례적으로 큰 거죠.”
“그래도. 이렇게 작게 만들면 돈이 돼? 방문객도 얼마없는 거 같은데.”
선우가 찰랑이는 아름다운 녹발을 귀 뒤로 넘기며 계단 벽면에 붙은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수익 목적으로 유지하는 사업이 아니니까요.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내보일 기회 자체가 적거든요. 청송미술관도 아마 그런 기회들을 제공해주는 차원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일 거예요.”
“아아. 사회환원 사업의 일종으로?”
“그런 느낌이죠. 형, 저 그림 좀.”
“그래.”
선우가 진지한 눈길로 무명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영화 촬영과도 같은 녀석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맞다. 선우는 하얀 그림자들의 외아들이었지. 이런 상류문화를 향유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야. 애가 너무 소박해서 잊어버렸네.’
나는 그림 감상에 푹 빠진 재벌2세를 내버려두고 녀석과 반대 동선으로 갤러리를 돌았다.
‘10시 개장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네. 하긴, 래리 도우만 전시전은 매년 열리니까 볼 사람은 이미 다 봤겠지.’
하지만 그림이라곤 좆도 모르는 나라서, 감상 속도가 너무 빨라 선우와 금세다시만나버렸다.
“선우야. 여기서부턴 그냥 각자 행동하자. 나중에 그 그림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해. 난 먼저 위층 가볼게.”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형.”
나는 3층으로 올라가 천천히 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러다 4층, 5층을 지나 마침내 메인 타깃이 있는 <래리 도우만 특별전시전>에 입장하게 되었다.
―래리 도우만 특별전시전이 열리는 6층부터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관람객 여러분들께서는 촬영 가능 기기를모두 주머니 속에 넣어주세요.
듣던 대로 사진 촬영은 금지였다.
폰을 가방 속에 넣고, 이전 층과 마찬가지로 그림들을 감상하며 특이한 점이 없는 지 파악하려 애썼다.
‘혹시 있어? 뭐 느껴지는 거.’
[아직까진. 평범한 화랑이다.]
나는 초조해하지 않고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들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 6층 갤러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대략 20분 정도를 그림 감상하는 데에 시간을 썼을까.
―또각 또각
계단 쪽에서부터 구두 굽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의 것은 아니었다.
‘…메이드?’
6층에 입장한 이는 메이드maid였다.
하얀 프릴이 달린 검은색 바탕의 세련된 하녀복.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흰 스타킹과 둥근 구두를 신은, 아름다운 소녀.
밝은 청색의 머리를 엉덩이까지 오는 트윈테일로 길고 멋스럽게땋았고, 손은 가지런히 배에 붙인 채.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시장에 들어왔다.
‘진짜 소름 돋게 귀엽다.’
소녀의 외모는 참 아름다웠다. 백옥 같은 얼굴과 뚜렷하고도 아기자기한 이목구비. 그리고 밝은 청색의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머리색과 의상까지 전부 다, 만화를 찢고 나온듯한 그런 느낌.
하지만 소녀는 아주 작았다.
기껏해야 130cm 정도?
이목구비는 어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했지만. 작은 체구와 오밀조밀한 얼굴 덕에 소녀는 불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각 또각
내 눈길을 끌던 메이드 소녀가 나를 지나쳐갔다.
나도 어차피 딱 하나 남은 작품 감상을 위해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또각
소녀의 발과 내 발이 동시에 멈췄다.
우리는 같은그림을 바라보았다.
『101명의 창부들』
조사한 바대로 화폭은 크지 않았다.
풍경화 40호니까 대략 세로 1m x 가로 70cm 정도. 그러나 그림 크기에 비해 담긴 풍경은 단순하지 않았다.
‘직접 보니까 더 잘 그린 것 같네.’
[이 몸이 봐도 그렇다. 중세 얼간이 븅신들 종교 미술과 비교하면 근대 미술은 그야말로 선녀야.]
인상파 그림답게 톤이나 채색은 의도적으로 뭉개져있다. 무려 100명이나 되는 창녀들이그려진 탓에 캔버스 안에는 온통 흰색에 가까운 살색들이 그득했다.
그러나 100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일일이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림의 재미있는 점이었다.
래리 도우만의 대표작이 아님에도 이 그림이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나 할까.
100명의 여자들이 짓고 있는 각기 다른 표정들을 보며, 이 여자는 어떤 사연으로 매음굴에 굴러들어오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하게 되는 그런 맛이 있는 그림.
‘자, 한 번 세 보자. 오늘은 100명일까 101명일까.’
[이 몸이 우상단부터 세보겠다. 중앙의 마담을 경계로 구획을 나누자.]
손가락을 들어 좌하단부터 꼼꼼히 창부들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 서른….
“총 일백 명. 입니다.”
고요한 적막이 감도는 갤러리 안에 맑은 소리가 퍼졌다.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고 있던 메이드 소녀의 음성이었다.
나는 무릎을 낮춰서 소녀의 푸른 눈과 시선을 맞춘 채 물었다.
“그림 속 언니들이 총 100명이라는 얘기니?”
“네. 오늘은요.”
“오늘은?”
소녀가 내주먹만큼이나 작은 머리를 반듯하게 주억거렸다.
“어제도 내내 일백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제인목요일 17시 58분 경에는 일백 한 명이었습니다. 주기가 또 변했군요.”
귀엽고 맑은 음성과 대조되는 말투였다.
낸시가 딱딱한 말투 속에 열정을 담은 말투고, 라라가 무심하고 사무적인 어조 속에 상냥함을 깐 목소리라면.
이 소녀는 표면적으로는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지만 내용과 감정은 완전히 무기질적인 그런 느낌.
[쎅쓰. 이년,사람이 아니다.]
메리의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꼬마야. 너 혹시 유로파에서 왔니?”
“식견이 넓으시군요.”
그녀의 초고성능 양자센서가 작동하고 있을 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유통지인 지구 상호명 EP-F-00001. 양산 초기 테스트 제품. 개체 모델명 <소피아>가.”
메이드복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양 치마 끝을 깍듯이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래리 도우만 전시전을 찾아주신 관람객 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