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 제이의 도둑질 첫 도전!(5)
“래리 도우만 전시전을 찾아주신 관람객 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자신을 유로파산 휴머노이드형 안드로이드라고 밝힌 소녀의 인사에, 나도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 소피아. 나는 이스트 블루에 재학 중인 김제이야. 헌터지.”
“그러시군요, 김제이 생도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이름을 ‘입력’한 듯 고개를 끄덕인 소피아가 다시 양손을 배꼽 위로 올렸다.
“저는 이곳 래리 도우만 전시전에 오신 관람객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거리낌 없이 말씀해주세요.”
나는 혹시 음료라도 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작은 이 소녀에게 심부름을 시키기가 껄끄러워서 말을 돌렸다.
아무리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로봇이라고 해도, 외견은 초등학생 여자아이처럼 보였으니까.
“그런 건 없고. 혹시 너 여기 상주하는 거야? 니 소유주는 어딨어?”
“상주하며 안내를 도와드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 소유주이신 에바 리샤르님께서는 현재.6층 계단을 올라오고 계십니다.”
“리샤르?”
들어본 적 있는 성인데.
―또각 또각
소피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우가 보였다.
녀석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 여자의 모습도.
회색 바지 정장을 멋스럽게 입은 170cm 정도의 미인이었다.
“형, 여기 계셨구나. 지인 분을 만나서 말씀을 나누다가 늦었어요.”
“아니야. 그 분은 누구셔?”
“래디 도우만 전시전을 주최하신 분이세요. 소개 시켜드릴게요.”
“선우, 괜찮아. 내가 직접 할게.”
갈색 머리와 아주 또렷한 서양인 이목구비를 가진 백인 여자가악수를 청해왔다.
“에바 리샤르. 도매상을 하고 있어.”
“리샤르…!”
이제야 기억났다.
리샤르 가문.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이다. 이세계인 프레이야의 유니테르 제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부를 쌓아올린 거상.
요 몇 년사이에는 이세계 유로파쪽과도 활발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나는 놀란 기색을 빠르게 지우고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안녕하세요. 이스트 블루 생도 김제이입니다. 선우랑 친구 사이에요.”
“제이 씨? 역시 선우 친구라 그런지 잘생기셨다. 혹시 패밀리 비즈니스가?”
“아, 저는 균열 고아 출신이라.”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였다.
에바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하.”
그녀가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선우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투덜거렸다.
“친구라며. 반선우 너는 가방 들어주는 사람도 친구라고 부르니?”
“!”
이번에는 선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에바 씨.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 씨발. 이 흐름은 아니다.
나는 재빨리 선우 옆으로 가서 둘러댔다.
“선우가 아시다시피 마음씨가 워낙 좋아서요. 제가 많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저를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혹시 오해가 있어 불쾌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아. <하얀 그림자들>의 반선우는 마음씨가 참 좋아서 그쪽이랑 친구로 지내는구나.”
에바가 피식 웃었다.
―짝!
그리고 느닷없이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소피아의 뺨을 날렸다.
“소피아.”
작은 얼굴을 바로 돌린 소녀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주인님.”
“나는 마음씨가 안 좋아서 나한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랑은 친구로 못 지내나봐. 그렇지?”
“주인님께서는 다양한 자선사업을 진행하시고, 지구촌 불우이웃들을 돕는 데에 앞장서고 계시며, 원만한 사회관계를 통해 다양한 경제적 계층의 친우 분들과 깊은 교우를 맺고 계십니다.”
에바가 팔짱을 끼며 소피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왜들 이럴까. 왜 솔직하게 말을 하면 다들 화를 내려고 하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대답해봐, 소피아.”
소피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른색의 긴 트윈테일 머리는 조금의 요동도 없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소녀의 입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대답이 없지? 내가 지금 네 그 잘난 알고리즘으로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건가.”
“주인님께서는.”
소피아가 마지못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주인에게 답을 주었다.
“저의 주인이신 에바 리샤르님께서는 총명하십니다. 때문에 이따금 에바님의 우수한 지적 회화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출현하곤 합니다. 이는 주인님의 과오가 아닌, 에바님 보다 저성능의 지능을 탑재한 해당 개체의 문제라고 사료됩니다.”
“이런 얼간이 같은 년!”
―짝!
이 작은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또 다시 뺨을 날린 에바가 경멸이 섞인 어조로 소피아를 나무랐다.
“너 따위가 감히 대 하얀 그림자들의 차기 후계자인 반선우를 모욕해?! 네년이 고철로 폐기가 돼서 영구기관이 재가 되어봐야 그잘난 혀를 멈출까?!”
“죄송합니다, 주인님.”
“틀렸어!”
―짜악!
이번에는 정말 셌다.
소피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린 것이다.
사람의 피부보다 더 사람 같은 소녀의 인조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소녀의 연분홍색 입술에서 피와 같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형, 이따 말씀 드릴게요….”
당장 말리려 하는 나를 선우가 제지했다. 뭔가 사정이 있는 눈빛이라, 나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내가 난리 치면 곤란해지는 건 선우야. 에바 리샤르는 거물이다.’
에바는 그 와중에도 소피아의‘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뭘 잘못했는지를 왜 고하지 않지.”
“사실 관계를 전달함에 있어 예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저의 잘못입니다.”
“비트겐슈타인식으로말하는구나. 예의범절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깡통계집이 잘도 주워들은 인류의 지식으로 거인의 어깨 위에 선 척하기는.”
―짜악!
“알아? 너희 안드로이드들의 그런 면, 정말 역겨워.”
“죄송합니다, 주인님.”
―짜아악!
털썩, 하고 소피아가 쓰러졌다.
내구력에 타격을 입은 모양인지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소녀의 몸.
하이힐을 신은 에바 리샤르가 소피아의 다리를 거칠게 밟았다.
“그놈의 역겨운 자기보호 알고리즘. 그 따위로 아픈 척을 하면 네년의 감가상각이 줄어들기라도 한다고 생각해? 걱정하지 마. 테스트 연한만 끝나면 내가 책임지고 네년을 폐기해줄 테니까.”
“영광… 입니다, 주인님.”
“일어나서 사과 드려.”
소피아의 정강이를 누르던 에바의 발이 떨어지자,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가늘게 떨고 있는 양 손을 배꼽 위에 올리고, 부들거리는 다리로는 간신히 균형을 잡아 선 채로.
“반선우… 님. 무… 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부디 저의 잘못을 사해주신다면, 그 따스한 온기는 전자 바다의 심해에 닿아 어머니 여신의 마음까지 흡족하게 할 것입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자! 정리는 이쯤이면 된 것 같고.”
전혀. 하나도 정리 되지 않은 분위기인데도 그렇게 말한 에바 리샤르가.
활짝 웃으며 날 바라봤다.
“김제이라고 했지?”
나는 좋게 말할 생각을 버렸다.
선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먼저 무례를 범하진 않더라도 굳이 예의를 지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부턴 이 여자가 봊같이 굴면, 나도 좆같이 대할 생각으로 대답했다.
“어. 그런데.”
“혹시 괜찮으면 식사 함께 어때.”
“식사?”
에바가 소피아에게 가격이 얼마인지 도무지 추산조차 안 되는 고급 핸드백을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선우에게 이미 제의를 했는데. 선우가 너와 선약이 있다길래.”
“나야 좋지. 너처럼 예쁜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영광이야.”
에바가 내 팔에 자신의 팔을 휘감았다.
“친구. 그거좋네. 가자! 소피아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점심은 내가 살게. 맛있는 집을 알거든.”
“좋아. 선우야, 괜찮지?”
“…그럼요, 형.”
나를 잠시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하프엘프가 미안함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 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에바 리샤르를 나의 검집으로 삼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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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권능]
no.16: 성감 고조 lv.5
no.26: 원령 초환 lv.1
no.32: 애욕의 화신 lv.1*
no.34: 녹육의 축복 lv.Max
no.37: 불사조의 눈물 lv.Max
no.44: 보물찾기 lv.1
no.69: 인드라이브 lv.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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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검의 주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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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청담동의 한 고급 한식집이었다.
그녀가 한국에 올 때마다 들른다는 이곳은, 일반 식당 같은 구조가 아닌 철저한 프라이빗 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인 정식 97만원. 미친 거 아냐?’
반찬에 금가루를 뿌려도 이것보다 싸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뉴판을 덮었다.
“제이. B코스 정식이 맛있어. 그걸로 할까?”
“네가 골라준 거면 뭐든 좋아.”
“후흣.”
에바가 눈을 찡긋하며 메뉴판을 점원에게 건넸다.
“B코스 셋. 술은 필요 없어.”
“B코스 셋 주문 받았습니다. …저기 손님, 혹시 죄송하지만 인원 수에 맞춰 주문해주실 수 있을까요?”
점원이 방 입구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서있는 소피아를 보며 묻자, 에바가 손을 내저었다.
“저건 기계야. 더구나 기름도 안 먹고 수소 발전도 아니라 물도 필요 없지. 혹시 엔진 오일이라도 먹일 생각이라면 가져와 봐. 처먹는지 보게.”
“시, 실례했습니다!”
점원이 사람 보다 더 사람 같은 메이드 안드로이드를 연신 힐끔거리며 방을 나왔다.
우리끼리만 남게 되자 에바는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정장 상의를 벗었다. 흰 와이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비치는 검은색 브라가 썩 관능적이었다.
“선우. 그런데 서울은 어쩐 일이야? 보자고 그렇게 말을 할 때는 시간이 없다더니. 오늘 이렇게 나 놀래켜 주려고 깜짝 방문한 거야?”
에바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얇은 상의를 벗고 품이 넓은 명품 티셔츠만 입은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공략대 지원 건으로 한동안 바빴던 건 사실입니다. 당신을 무시하고자 내린 결정이 아니에요. 토요일에 휴식을 취하는 건 저로서도 오랜만입니다.”
사실이었다. 선우는 학기 중보다 방학에 더 바쁜 애니까.
“아하. 그렇구나. 참, 제이야! 들어보니까 너 때문에 선우가 같이 왔다던데. 무슨 일인지 나도 물어봐도 돼?”
“그럼.”
에바 리샤르는 『101명의 창부들』의 실소유주다. 운 좋게 도움이라도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
“에바도 괴담은 들어봤지? 그림 속에 100명의 창부가 아니라, 101명의 여자들이 나올 때가 있다는.”
“물론. 그거 확인하러 온 거야?”
“어. 내가 이번 학기에 오컬트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거든.”
에바가 단추를 풀러 팔을 걷어붙이며 진하게 웃었다.
“알지 알아. 4대국제헌터아카데미 학칙. 커리큘럼 따라가기도 벅찬데 동아리 활동도 강제인 거. 유명하잖아?”
“너도 아카데미 출신이야?”
“반쯤은. 웨스트 화이트 다니다가 1학년 말에 자퇴했어. 전업 헌터가 될 것도 아니고, 기수 중에 인맥 쌓을만한 인재가 보이지도 않아서 시간낭비 같았거든. 지금 와서는 조금 후회해.”
대화는 거의 나와 에바 위주로 이루어졌다.
선우는 에바가 묻는 말에 대답만할 뿐, 별로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 선우가 낯을 가리니까.’
선우의 낯가림은 꽤 유명하다.
그나마 친한 사이인 엘리사와 아이웨이에게도 선을 긋는 게 눈에 보일 정도고. 하리나 아이린 같은 경우는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는 대신 사담은 거의 나누지 않는 편.
아마 선우가 진짜 막역하게생각하는 사람은 아카데미에 나 하나뿐일 거다.
“음식 나왔다. 먹으면서 얘기하자. 여기 쌀 카나페로 만든 아페리티프부터 시작해서 관자도 맛있고, 수정과랑 전채랑 전부 다 괜찮아.”
“잘 먹을게. 진짜 맛있겠다.”
“형,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거기 찍으셔서. 네, 그렇게요.”
나는 옆자리에 앉은 선우의 도움을 받아 약간 생소한 요리들을 천천히 음미했다.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된 건데, 에바는 진성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이라 한국에 와서도 보통 코스 요리만 먹는다고.
다만 10대째 부자인 에바의 행동은 그녀의 입맛보다는 소탈한 편이었다.
‘얘기해볼수록 그렇게 또라이 같은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대체 왜 그랬을까. 선우한테도 너무 까칠하고.’
냄새가 나기는커녕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정도 안 되는 홍어삼합을 먹으며 소피아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아까 전시장에서 굴욕을 당한 것 따위야 이미 잊었다는 듯, 조용히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제이야.”
“응?”
메이드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에바의 눈을 보았다.
“101명의 창부들 연구해보고 싶다고 했지?”
“어. 그게 우리 연구부 주제니까. 혹시 불쾌하니?”
“전혀. 오히려 환영이야. 나도 궁금했거든. 왜 자꾸 버그가 난 것처럼 여자들이 101명이 됐다가 다시 100명이 됐다 그러는 걸까, 하고.”
에바가 소피아를 향해 턱짓을 했다.
“나도 궁금해서 소피아를 붙여놓은 거야. 혹시 자료 필요하면 말해. 데이터로 정리해놓은 게 있어. 통계학자를 불러서 패턴을 분석해 봐도 의미가 없대서 놔뒀는데, 혹시 알아? 너한테는 유의미할지.”
“그래주면 고맙지.”
나는 에바와 조우한 이후 처음으로 진짜 미소를 지었다.
소득 없이 시간만 날리고 아카데미로 귀환한다는 건가 싶었는데, 그나마 그녀 덕에 체면치레는 하겠구나 싶어서.
“단, 조건이 있어.”
“어떤?”
에바가 갈색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나랑 한 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