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5. 제이의 도둑질 첫 도전!(16)
“소피아. 지금 빈 캔버스 가지고 뭘 하고 있는 거지?설명해.”
온통 하얀색 물감만 칠해진 그림이 『처녀작』이었으니, 에바의 말은 일견 옳았다.
그러나 소피아와 나에게 저 하얀 ‘그림’은 이야기를 머금은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었다.
“…빈 캔버스가 아닙니다.”
“또 지랄을 시작하셨군. 당장 몸뚱아리 치우고 전후사정을 고하지 못해?!”
“…….”
메이드는 주인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다만 켜져 있는 통각 설정과 유기체 피격 반응 세팅 탓에 반사적으로 떨리고 있는 몸을 더욱 작게 말았을 뿐.
“설명하라고 했을 텐데! 매뉴얼 내용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니?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알려줄까?!”
“하악!”
에바가 하이힐을 신은 발로 소피아의 부러질 듯 가는 발목을 밟았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처녀작』의 모퉁이를 쥐었다.
“당장 내놔. …이리 안 내놔?!”
“에바!”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제이야.”
어찌나 흥분을 했던 건지.
C등급 헌터인 에바가 그제야 내가 지근거리에 있음을 알아챘다.
나는 소피아를 밟은 그녀의 발을 치우고, 두 여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쯤 하지 그래.”
“…뭐야, 그 눈빛. 설마 제이 너… 지금 소피아 편 드는거니?”
에바 리샤르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안 그래도 지난주 일요일 간, 소피아에게 진상을 들은 이후로 그녀를 티가 날 정도로 피해왔었는데.
그에 관한 맺힌 감정이 지금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젠장.’
이 자리에서 에바와 척을 질 순 없다.
리샤르 가문은 <하얀 그림자들>의 파트너 클랜이고, 그녀는 소피아의 소유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호의를 보이는 여자에게 못되게 굴긴 싫었다.
에바는 아직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바. 난 네가 늘 웃길 바래.”
그녀의 어깨를 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소피아의 테스트를 위해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에바는 너무 책임감이 강해서 탈이야. 좀 더 자신을 아꼈으면 해.”
“……치잇.”
에바가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VIP룸의 소파에 앉혔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참동안 그녀를 얼렀다.
그동안에도 내 정신이 온통 메이드 소녀에게 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소피아….’
먼지 묻은 『처녀작』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그제야 자신의 신색을 정돈한 메이드가 에바의 옆으로 돌아왔다.
소녀의 얼굴에는, 아까 보여주었던 희미한 미소를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김제이 생도님. 이제부터 에바 리샤르님의 시중은 제가 들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사온 쿠키를 내와.”
“네, 주인님.”
소녀와 에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원래의 주종관계로 돌아갔다.
‘…….’
문득, 나는 그들의 불편한 동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피아와 에바의 계약이 조만간 끝난다고 했었지. 둘 다 서로 재계약을 원하지 않으니, 소피아는 무조건 유로파로 돌아가겠구나.’
나는 깨달았다.
내가 소피아와 앞으로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대로 소피아가 지구에서 안 좋은 기억만 얻은 채 유로파에 돌아가게 되는 건 싫은데. 그건 진짜… 아닌데.’
내가 저 작고 영특한 메이드 소녀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질러봐라. 갓갓갓 깡통 계집이 아무리 가격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비쌀 것같다지만. 미인과 보물은 언제나 그렇듯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니.]
…좋아.
“에바.”
“응, 제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
소피아를 갤러리에 남겨두고, 나와 에바는 1층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하아앙! 하으으응!!”
“하아! 싸, 싼다!”
“입에! 입, 하으으으……!”
제안을 하기 전 기름칠을 위해, 화장실에서 급하게 그녀를 만족시켜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너무 진해…. 배불러 죽겠어.”
야외인 터라 안에 쌀 수가 없어 정액을 입으로 받아낸 에바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나 오늘 오후에 미팅도 있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그럼 니가 예쁘질 말았어야지.”
“말이나 못하면.”
하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지, 에바의 얼굴은 30분 전과 비교해 활짝 피어있었다.
“할 얘기라는 게 뭐야.”
“무슨 얘기. 너 안고 싶어서 불러낸 건데.”
“후흣.”
에바 리샤르가 내 코를 꾹 눌렀다.
“김제이 넌 그런 거 안 어울려. 속이 빤히 보인다구.”
“진짜라니까. 참, 래리 도우만 전시전은 올해까지만 할 거라며.”
나는 한동안 말을 돌렸다.
용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에바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배려하면서.
그러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척, 소피아의 처우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동안 소피아를 원하는 다른 사람은 없었어?”
“원하는 사람이라니.”
“차세대 안드로이드인 EP-F의 프로토 모델을 써보고 싶다고 말한 사람들. 소피아 정도면 탐내는 사람 많을 것 같던데. 워낙 사람 같고 영리하잖아.”
메이드 로봇 얘기가 나오자 에바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꽤 있었지. 그런데 다들 포기했어.”
“왜.”
“일단 소피아가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나 외의 주인을 섬기고 싶지 않아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돈 문제.”
“돈? 테스트 사용 계약 체결에도 돈이 필요해?”
“그럼.”
에바가 손가락을 네 개 펴 올렸다.
“사백억 원. 게다가 파트너쉽 덕분에 내가 4년을 써본 것과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2년 계약에 400억이야.”
“와아… 비싸네.”
무려 1년에 200억이다.
에바는 계약 내용 때문에 소피아가 ‘아주 우수한 인간을뛰어넘는’ 성능은 내지 못하도록 제한된 상태라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정 금액 이상의 수익을 창출하는 영리 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등 여러 제약을 갖고 있다고.
“고작해야 유능한 비서, 우수한 메이드, 약해 빠진 경호원이야. 헛돈 쓰기 좋아하는 헌터 입장에선 소피아를 데리고 놀 시간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계약 때문에 기술 연구는 물론 홍보에조차 쓰질 못 하니 기업가들도 손절했지. 뭐, 소피아가 나를 워낙 따랐던 게 가장 크긴 했지만.”
“흐음.”
나는 에바의 말을 반만 믿기로 했다.
소피아가 말해준 에바의 성품을 고려해봤을 때,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 생각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으니까.
‘에바는 아마도 소피아가 다른 단체 손에 넘어가지 못하도록중간에서 손을 쓴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소피아 정도의 초고성능 안드로이드가 임대 이적 계약 없이 그대로 유로파에 돌아가게 됐을 리 없어.’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바가 핵심을 물어왔다.
“왜. 우리 소피아한테 관심 있니?”
“그냥. 좀 친해졌거든.”
“내가 빌려줄까. 400억.”
귀를 의심했다.
“…400억을 니가 빌려준다고?”
“너 하는 거 봐서? 제이 너야 소피아를 데려간다고 해도 우리 회사 일에 방해 줄 일을 할 것 같진 않거든.”
에바 리샤르가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음… 스폰 계약이라고 하면 너무 거래적인 느낌이니까. 남ㅊ―”
에바가 ‘스폰 계약’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나를 꼬시려 할 때였다.
“그 계약. 제가 이어 받죠.”
에바의 뒤에서 나타난.
선우가 말을 잘랐다.
“…반선우. 니가?”
녹발 녹안의 아름다운 하프엘프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에바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유로파의 전뇌 지성체들에게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으신 정령사님께서. 지금 우리 소피아를 데려 가시겠다?”
“마침 메이드가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저희 3관에는 사용인이 없거든요.”
“우리 선우 많이 달라졌네. 농담도 할 줄 알고.”
“400억이라고 하셨죠. 바로 드리죠.”
“하!”
에바 리샤르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4천만 불은 유로파와의 임대 계약금일 뿐이야. 거래 중계를 해준 리샤르의 수수료는 제외한 금액이지. 제이야 법인이 아니니 사정을 봐줄 수 있지만, 하얀 그림자들의 특임대 대장인 반선우라면 얘기가 달라.”
“그래서 얼마입니까.”
그녀가 입 꼬리를 올렸다.
“일억. 유로로.”
“!”
이런 미친.
일억 유로면 대략 1400억 원이다.
고작 중계 수수료 따위로 그 돈을?
에바 얘 진짜 돈독 올랐네.
“그러죠.”
하지만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수료 일억 유로에 임대금 4천만 달러. 총 1억 3천만 유로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이 스마트폰을 빠르게 터치했다.
―송금 완료되었습니다.
은행 어플 송금 소리가 뜨자마자.
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통보했다.
“일시불 전액 현금으로 송금했습니다. 확인해보시죠, 에바 리샤르씨.”
“너…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나를 무시하고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
“거기까지.”
선우의 극히 아름다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조차 처음 보는, 살기殺氣가 피어올랐다.
“형님은 남창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너, 너어!”
“예의를 먼저 어긴 건 당신입니다.”
친구인 나를 걱정해 분노해준 하프엘프가 에바 리샤를 향해 살기를 쏘아 보냈다.
현재 추정 S급. 잠재력은 그것을 한참 뛰어넘는 선우의 진심을, C랭크 헌터인 에바가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딸그락 딸그락
에바의 다리가 떨림과 동시에 테이블 위의 찻잔들까지 흔들렸다.
‘이건 아닌데….’
나는 내 생각과너무 다르게 흘러가버린 상황에 당황해서.
친구의어깨를 짚었다.
“선우야. 이건 너무 큰돈이잖아!”
“형.”
“…응?”
선우의 아름다운 입매가.
아주 서늘하게 휘어졌다.
“저 돈 많다니까요.”
**
소피아의 임대 이적 계약이 체결됐다.
“영광된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반선우님.”
사정을 들은 메이드 소녀가, 2년 간 선우의 사용인이 되기로 동의했으니까.
‘에바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는데.’
에바 리샤르는 아까 선우에게 ‘진심으로’ 위협을 받은 것에 큰충격을 받았다. 내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청송미술관을떠날 정도였으니.
첫사랑이었던 선우. 그리고 썸남이라 할 수 있는 내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
“잔여 계약기간은 이번 달 말인 3월 31일까지라고 했죠? 사람 보낼게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필요한 물건이나 원하시는 사안이 있으시면 미리 말씀하시구요. 아시다시피 소피아씨가 앞으로 기거하게 되실 곳은 아카데미 기숙사입니다. 리샤르의 대저택과 비교해서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필히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우와 소피아가 딱딱한 말투로 향후 일정을 정리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선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선우야…. 나 때문에.”
“소피아 씨는 형의 은인이시잖아요. 최소 S등급 이상의 스킬과 다를 바 없는 대단한 권능도 소피아 씨 덕에 얻으셨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싸죠.”
“그래도.”
선우가 평소와 마찬가지의 수줍은 미소는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형… 저 돈 엄청 많은데….”
“야 임마!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1800억이 누구 집 개이름이냐.”
“아하하. 이것 좀 보실래요?”
선우가 폰을 내밀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백천만억. 십억 백억 천억… 조兆? 뭐야 이거?!’
돈이 씨팔, 지나치게 많았다.
무려 3조 4천억 원에 달하는 돈이 선우의 계좌에 ‘현금으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야! 이거 니네 회사 돈 아니야?!”
“제 돈이에요. 형, 저번 겨울방학 때 제가 운 좋은 일이 있었다고 했던 거. 혹시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난다.
선우는 종강과 동시에 프레이야로 가서 <하얀 그림자들>의 공략대와 함께 SS급 던전을 탐사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고대 유산을 발견하게 됐다고.
올 초 언론에서 ‘최소 십조 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라며 대서특필됐던 뉴스라 잘 알고 있다.
“그럼 그 돈은 고대 유산을 네 몫으로 정산 받은 거야? 아니 대체… 아무리 니가 클랜장 아들에 특임대장이라고 해도 얼마나 분배를 많이 받아야 3조를 넘게 벌어?”
“음, 사실은요. 형이 걱정하실까봐 말씀을 못 드렸는데….”
남자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선우의 얼굴에 미안함이 떠올랐다. 녀석의 하얗고 긴 귀에 살짝 열이 올라왔다.
“…그 던전. 저 혼자 공략한 거예요.”
“뭐어?!”
이런씨발! 이건 더 놀랠 노자네.
SS랭크 판정 받은 유니테르 제국의 미궁을 혼자서 돌파하고 고대 유산까지 찾아냈다고?
하얀 그림자들 클랜이 함께 한 게 아니라?
“…선우야.”
“네, 형.”
“너 벌써 그럼 S랭크도 넘은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우가 착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저는 헌터 랭크 따위야 아무래도 좋아요’라는 분위기를 풍겨서, 나는 말을 삼켜버렸다.
‘…그래. 선우는 그 반지원님의 양아들에다, 암속성 정령과 광속성 정령을 다루는 규격 외의 정령사야. 나 같은 새끼랑 차원이 달라. 그냥 그러려니 하자. 더 신경써봐야 내 골통만 깨져.’
어찌됐건 선우한테 1800억이 감당 못할 정도의 큰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까보단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언젠간 갚아야지. S급 헌터가 되면 연간 100억은 땡길 수 있어. 무조건 S랭크에 오른뒤에… 갚자.’
선우의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받은 게 너무 커서,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으니까.
긴 귀를 쫑긋거리며 내 마음을 받아주던 선우가 불현 듯 소피아를 불렀다.
“…소, 소피아 씨!”
“말씀하시죠, 반선우님.”
“저와 형의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미리 인사라도 해두시는 게 어떨까요?!”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소피아가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주인님.”
주인…님?
―또각 또각
귀여운 둥근 구두와 지면이 맞닿는 경쾌한 소리가 갤러리에 울려 퍼졌다.
소피아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와 얼굴로, 예쁜 메이드복 치마 양 끝을 우아하게 잡은 채.
“열 번의 밤이 지나간 뒤. 이 부족한 메이드가 아카데미로 주인님을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만나 뫼시게 될 그날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재회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