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67. 제이와 그라비아의 추억(2) (67/145)



〈 67화 〉67. 제이와 그라비아의 추억(2)

이시카와 레이 교수의 질문을 어절 별로 찢어놓고 보면 다음과 같다.

-세 차원의 모든 지적 생명체들이.
-퍼스트 컨택트 이후.
-모두 다 가지게 된 <만물의 소리>.

나는 그녀의 질문에서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언급했다.

“만물의 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되어 의도적으로 지성체들에게 배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가정if… 말씀이십니까?”

이시카와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정답이야.”
“와~! 역시 우리 제이 오빠네! 그걸 어떻게 맞췄지? 엘리사는 그런 쪽으로는 도무지 생각이 안 미치던데.”
“역쉬 4대 아카데미 필기 수석답다! 김제이 개똑똑해~!”

―짝짝짝짝

나와 친한 반 친구 몇몇이 박수를 쳐주었다.
이번에 새로 같은 반이 된 생도들 또한, ‘쟤가 걔구나. 미각성잔데 필기 만점으로 작년에 간신히 들어온 애’ 라는 눈빛으로나를 봤다.

“주목.”

이시카와가 소란스러운 교실 공기를 끊고, 내 엉성한 답변에 살을 붙였다.

“디자인design. 창조론 등의 지적 설계론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지.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행했다’는.”

그녀가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제이의 용어 선택은 탁월했어. 맞아. <만물의 소리>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이 바로 그거니까.”

이시카와 교탁 뒤로 돌아가 보드 마커를 들었다.
여성용 치마 정장에 감싸인 지적이면서도 섹시한 뒤태를 내보이며, 필기를 시작했다.

“가정해보자. 어떤 절대자가 <만물의 소리>를 배포해 차원의 지성체들을 원활히 소통시키려했다, 고 말이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세 차원 간의 관문을 열었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이시카와 레이가 가벼운 판서를 마쳤다.

“퍼스트 컨택트의 의미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Q: Disaster or Design

예측 못한 재앙인가.
혹은 누군가의 설계인가.

“우리는 그동안,  차원 간의 관문이 열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균열 던전이 생겼으며 마력 사용이 가능해진  사건. 즉, 퍼스트 컨택트를 지금까지 결과로만 취급해왔다.”

이시카와가 교탁에 양 팔꿈치를 얹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지만 천재지변과 같은 대재앙이라고 인식되어왔던 퍼스트 컨택트가, 결과가 아닌 과정일 뿐이었다면?”

교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60여 년 전 벌어진 퍼스트 컨택트.

그 사건이 가진 무게감이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감히  어떤 절대자가 있어 퍼스트 컨택트를 고의로 일으킬 수 있었을까.

프레이야와 유로파의 주신조차 그런 일을 쉽게 벌일 수 없을 텐데.

“이를 둘러싼 논의를 이라고 불러. 최근 들어 학계에서 아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지.”

이시카와 레이가 태블릿pc를 품에 안으며 수업의 마지막을 알렸다.

“이번 마력운용사III의 기말고사 페이퍼 주제가 이 D-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중간고사 과제가 없는 대신, 열심히 준비해야  거야. 이상.”


**

오전 공통 수업이 끝난 뒤.

나와 선우. 그리고 엘리사와 아이웨이는 학식을 먹으며 D-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맞다니까. 라이라 정도는 되야 만물의소리 같은 고유 능력을 뿌리지. 유로파산 언어 통역기 못 봤어? 근대 언어 교양 시간에 교수가 보여줬잖아.”
“아니야, 아이웨이! 프레이야의 드래곤들이 더 의심스러워. 용은 태생이 SS랭크에 웜급으로만 성장해도 EX랭크인데 그들의 신은 얼마나 강하겠어.”

나는 아이웨이와 엘리사의 논쟁을 들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퍼스트 컨택트는 어떤 정체 모를 개새끼가 일으킨 좆같은 사건으로 확정된 듯했으니까.

“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선우 니 질문은, 퍼스트 컨택트나 만물의 소리가 의도된 기획이었다면 누가 범인일 것 같냐는 얘기지?”
“그런 셈이죠.”

선우의 질문에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떠오른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를 노필터로 얘기했다.

“범인은 지구인일  같아.”
“지구인이요?”
“오빠, 왜애?”

엘리사의 어두운 금발 머리가 귀엽게 흔들렸다.
나는 아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구가 교차행성이니까. 프레이야랑 유로파는 지구를 거쳐 가지 않으면 게이트가 없어서 직접 못 다니잖아. 절대자가 지구인이면, 두 차원 사이를 힘들게 뚫어놓을 필요가 없지. 지만  다니면 장땡 아니겠어?”
“모야아. 엘리사 쪼끔 실망이야.”
“존나 시시한답변 고맙다, 김제이.”

내게 핀잔을 준 엘리사와 아이웨이가 다시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었다.

[가끔은 단순한 사실이 가장 진실에 부합하는 경우가 있지. 킹능성 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메리와 선우가 썩 진지한 말투로  의견에 동조해줬지만, 난 진실 따위에는 좆도 관심 없었다.

‘사고든 설계든 지랄이든. 나는 페이퍼만 A+ 받으면 돼.’

나는 성적에 미친 노예에 불과하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넘치는 지적 호기심이나 날카로운 통찰력 따위가 아니다.

눈치다.

채점자의 마음에 쏙 드는 답을 내놓을  있는, 일종의 촉이랄까.

“라이라!”
“용신!”
“정령신님은 어떨까요?”
[니미. 차라리 예수라고 해라.]

나는 친구들의 논쟁을 한 귀로흘리며 빠르게 밥을 비웠다.

[→육서윤: 오빠 나 카페에서 기다리기 심심해서 그냥 오빠 방 왔어ㅋㅋ 오빠는 어디에요? 밥은 맛있어+_+?]


**

오늘 오후 4시에 있을 신연 정기 모임 전. 내 방에 들렀다.
서윤이와 커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서윤: 오빠  엄청 빨리 먹는다. 천천히 먹지 그랬어ㅜㅜ 이따 배고프면 모임 때 간식  먹어~ 내가 기숙사에서 빵 또 가져왔어요 :DD]

이 귀여운 놈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날듯 교정을 가로질러 3관으로들어갔다.

―딸랑

그런데 현관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과 마주쳤다.

“…아이린?”
“안녕하세요, 오빠.”
“뭐야. 동생은 보이지도 않아?”

그녀들은 하리와 아이린이었다.
내 방에 들렀다  모양.
나는 귀여운 여자 생도복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아이린을 재껴두고, 오늘도 나른한 분위기 만만인 하리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야.”
“내가 꼭 용건이 있어야 오나.”
“너 주말 내내 내 방에서 자고 갔잖아. 두고 간 물건 있었어?”

하리는 지난 주말 동안 외출증을 끊어 내 방에서 이틀  머물렀다.
공상계에서 비네에게 죽은  컨디션이 무척 안 좋았던 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일 터였다.

“흐응. 이젠 좀 살만 하신가봐?”

하리가 퉁명스런 얼굴로 위아래로 훑어봤다.
쑥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19살 동생에게 걱정을 끼친 게 미안하기도 했고.

“오빠.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다행히 나의 천사 아이린이 말을 돌려주었다.

“…응 방금. 아이린이랑 하리는?”
“저희는 오빠 방에서 빵을 먹고 나왔어요. 참, 방에 서윤 씨가 계시던데.”
“동아리  때문에 얘기할 게 있어서. 겸사겸사 만나기로 했지.”
“그러시구나. 오빠 방에 따뜻한 바게트랑 크림치즈 놓아뒀어요. 이따 동아리 가시기 전에 간식으로 드세요.”
“내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뭘요. 오빠가 지난주보다 기운을 많이차리신 것 같아서 무엇보다 다행이에요.”
“아이린….”
“후흣. 네, 오빠.”

아이린의 결 좋은 흑발 생머리와 깊고 아름다운 눈에 빠져들것만 같았다.
우리가 서로를 그윽하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바라보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하리가 초를 쳤다.

“오올~ 울 모지리 진짜 살만한가본데. 아주 잔치 나셨어.”
“뭐가 임마.”
“그렇잖아.”

녀석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청순한 얼굴에는 개구쟁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방에는 입이 떠억 벌어질 존예 섹시 끝판왕 미소녀를 데려다 놓고. 학교의 마돈나는 친히 간식 셔틀로 만들어주시고. 마력도 그새 이틀 만에 또 늘어서 이제는… 가만 보자.”

하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대기 중의 마나mana가 녀석의 눈가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60? 대단하네. 일요일 하루 동안만 1이늘었는데  본 이틀 새에 15가 늘었어. 그새… 15가… 늘었단 말이지.”
“…….”
“이거 너무 재미있는데?”

김하리가 CD보다 작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해명을 요구했다.
어중간한 답변으로는 불가사의한(?) 성장세를 쉽게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한 분위기.

“하리야, 그게.”

…어떡할까. 이쯤에서 캄비온과 메리의 비밀을 얘기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남자인 선우나 기계인 소피아와 녀석은 다르다.

하리는 여자니까.

아무리 공상계의 일이라지만 내가 발발이처럼 자지를 마구 휘두르고 다닌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쪽팔렸다.

‘…꼭  치다 여동생한테 걸리는 기분이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은 절대 말 못해. 아이린도 있잖아.’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고.

“오빠가 뭐. 말을 해.”
“제이 오빠. 사실 오전에 본관에서 오빠 지나가시는 거 보고, 걱정 돼서 찾아왔던 거예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하리와 아이린이 대답을 종용하고 있을 때였다.


“김제이. 이 시간에 별일이군.”


현관문 안쪽에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알렉세이, 어디 가냐?”
“어! 좋은 소식이 있거든.”

알렉세이 스몰로프.
시크하고 잘생긴 3관의 정상인이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껴안았다.

“아내가 임신했다. 3주째야.”
“정말?!”

나도 녀석의 등을 팡팡 두드려줬다.

‘녹육의 축복 대박이네! 해냈구나!’
[러시아 종마! 널 믿고 있었다구!]

3주 전쯤, 알렉세이를 비롯한 서귀포시의 부부들을 위해 녹육의 축복을 만렙 찍기는 했었다. 그리고 임신 강화 광역 버프를 걸어두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선택을 약간 후회하고 있었다.

속물근성 탓에 CP를 엄한 곳에 낭비한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던 것.

“그날이다. 김제이 네가 해물 라면으로 내 혀를 녹여버린 날. 네가 등 떠밀어준 그날 밤에 성공한 것 같아.”
“축하해! 진짜 대박이다, 임마!”

하지만 이 냉정한 친구가 행복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 따위야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내 분이 임신하셨구나. 축하해요. 저 아시죠? 모지리 동생인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축하 고마워. 물론 알지. 아카데미에 너희 둘을 모르는 생도가 있을까.”

나를추궁하던 하리와 아이린 또한 분위기를바꿔 알렉세이를 축하해주었다.
우리 넷은 한동안 알렉세이의 기쁜 소식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럼 난 이만 가보지. 아내가 산부인과에서 확인은 했다지만, 아직 너무 초기라 오진 가능성이 있거든. 다른 병원에도 가볼 생각이야.”
“그래, 수고하고. 아내 분께 축하드린다고 전해드려.”

사복을 입은 알렉세이가 떠난 뒤.
하리와 아이린 또한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지금 말하기 힘들면 나중에 얘기해. …무리하진 말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오빠.”
“응, 그럴게. 조심히들 들어가.”

하리와 아이린이 3관 정원을 떠난 뒤.
구사일생한 심정으로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하아… 살벌하다 살벌해.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걸 어쩌지.’
[이 몸은 전적으로 네놈의 결정에 따르겠다. 김하리와 아이린은 우수한 여자들이야. 도움을 얻으면 악마 봉인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겠지.]

나는 나중에 그녀들에게 60의 마력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제 CP로 마력을 올리지도 못하는데 그냥 지금까지처럼 유야무야 넘길까, 고민하며 내 방문에 노크했다.

―똑 

“서윤아, 나야.”
“으응!들어오세요!”

카드키를 찍고 방문을 열었다.
언제 보더라도 익숙해야 할 내 기숙사는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낯선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와, 왔어?”

확 바뀐 방 분위기에 할 말을 잃었다.

하리 말마따나, 존예 섹시 끝판왕 미소녀 한 명이 방 안에 있을 뿐인데. LED조명 수십 개가 동시에 켜져 있는   전체가 환해보였던 것이다.

‘일주일만이라 그런가. 원래도 지렸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예뻐 보이냐.’

육서윤의 커스텀한 생도복이 오늘 들어 유독 섹시하게 느껴졌다.
존재감 강한 H컵 폭유 때문에, 타이트하고 짧은 멜빵 치마 사이로 하얀 와이셔츠가 크게 융기해있는 모습이 새삼 야했고.
침대에 곱게 앉아 모은 다리는 비치는 검정 스타킹 덕에 더욱 매끈해보였다.

“오빠도… 앉지, 왜?”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어서 긴장한 걸까.
펌이 들어간 염색 금발머리를 넘기는 서윤이의 도도한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책상 의자를 가지고 서윤이 앞에 앉아 사정을 설명했다.

“오는 길에 하리랑 아이린을 만나서. 얘기 좀 하느라고 더 오래 걸렸어.”

―히양!

그때, 서윤이가 무척 귀여운 신음을 냈다.
딸꾹질 소리였다.

“…으응! 나, 나도 선배님들이랑 인사했어! 빵도 주셔서 먹―”

―히양!

“머, 먹고 있었구….”
“큭큭! 딸꾹질 소리 신기하네.”

서윤이의 차가운 ―모르는 사람이 볼 땐 반드시 그래 보일―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고,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 미안해.”
“응? 뭐가.”

서윤이가 소름 돋게 예쁜 얼굴을 푹 떨구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꿀벅지를 콕콕 눌러댔다.

“나 지금 물―”

―히양!

“…물, 못 마셔요.”
“왜?”

그녀의 야릇한 스타킹에 감싸인 무릎이 불안을 못 이기고 동동거렸다.

“나… 화장실―”

―히양!

“…못 갔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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