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75. 제이와 그라비아의 추억(10)
시간이 멈춘 공상계 속, 내 방에서.
나와 차수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한참을 얘기했다.
―{아하하하! 그래, 그때! 너 딸치다가 딱 끊고 서윤이한테 변명했을 때. 아줌마 얼마나 웃었다구. 우리 딸이야 워낙 순진해서, 그게 그 냄샌지도 몰랐지만 아줌만 다르지! 프로 유부녀니깐!}
“그 얘긴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왜애? 난 자위행위 좋다고 봐. 남한테 피해도 안 주고! 크로셀도 인정한대. 아앙~ 천사 두 명 인정!}
“후우….”
처음에는 서윤이에 대해. 그리고 아스모데우스와 크로셀에 관해서.
나중에는 그녀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위주로 대화가 진행됐다.
―{그래서 말이야? 광고 촬영이 딱 끝나고 저기서 서윤 아빠가 들어와서 그러는 거야. "수진 씨. 차 한 잔 하시죠."}
"그래서요?"
―{꺼지라고 했지. 내 타입 아니라고. 근데 그날부터 엄청 대쉬하더라.}
육서윤의 친모이자 수호천사.
그리고 천사 자격이 박탈되어 악마 군주로 전락한 크로셀이, ‘자신을 천국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 부탁하며 권능을 완전히 의탁한 그녀의 숙주인 차수진.
―{맞아. 금강산 화보 찍느라 엄청 고생했었어. 덕분에 판매부수는 좀 됐지만. …오오? 고등학교 때 거기로 수학여행 갔어? 디게 재밌었겠다. 아줌마 땐 무조건 경주였는데. 제이 니가 확실히 어리긴 하네.}
그녀는 오랜 세월의 한을 모두 다 풀어낼 듯,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나는 얘기를 듣다듣다 질려버릴 지경이 됐지만, 죽은 귀신 소원 들어준다는 심정으로 성심성의껏 대화를 이었다.
‘정말 고독했나보다.’
[아무렴. 7년을 말할 사람 없이 성유물 속에서 혼자 지냈을 텐데. 어차피 시간은 많다. 명색이 썸녀 엄마에, 네놈을 성에 눈뜨게 해준 여자잖아. 이 만남을 즐겨.]
‘그건 그런데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쎅쓰. 사흘은 심했지.]
메리 공언 사흘.
나와 그녀는 실제계의 시간 기준으로 무려 3일간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제 더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불사조의 눈물을 사용했다.
[▶불사조의 눈물 lv.max> 시동]
[▶재사용 대기 시간: 23:59:59]
―화르르륵!
불꽃이 나를 감쌌다.
정보 과부하와 피로에 쩔어 있던 머리가 완전히 맑아졌다.
―{와아~ 오빠 짱! 완전 간지~! 그게 불사조의 눈물이구나? 우리 사위 멋있네! 무슨 킹왕짱 용사님인 줄?}
애기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차수진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머님. 누가 요즘에 ‘킹왕짱’ 이런 말을 써요. 서윤이 인터넷 할 때 눈팅 많이 하셨다면서요?”
―{어쭈. 좀 편해졌다고 눈치 주는데? 얘기 들어줄 만큼 들어줬으니까 이제 아줌마랑 볼짱 다 보겠다 이거야? 아이구~ 그래애, 벗으라면 벗겠어요 사또!}
“큭큭큭!”
차수진이 또 ‘악마 봉인 절차’와 관련한 운을 띄웠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그녀는 정신없이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가 그녀를 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으니까.
‘너무 어색함이 크니까 농담으로 넘겨버리려는 거지. 차수진은 순결서약을 해서, 인생에 남자라곤 남편 하나밖에 몰랐다고 했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저 도저히 못 하겠어요. 솔직히 어머님도 그러시잖아요.”
―{…그야 그렇지. 명색이 딸 남친에 나는 엄연한 가정이 있는 여잔데. 나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런 여자 아니야?}
“그런 여자가 어떤 여잔데요.”
―{졸라 부러운 기지배들 있어. 인생 아주 해피하게 즐기고 사는 애들. 한 번 좋아한 사람한테 절절절절 목매는 나나 서윤이랑 다르게, 도전 정신 강한 여행자 같은 년들. 그 허벌라이프 애들이 앞으로 내 천사생활 롤 모델이야?}
“큭큭큭큭!”
사흘 간 얘기하면서 알게 된 건데, 차수진은 누가 서윤맘 아니랄까봐 은근히 쫄보에다 순정녀 기질이 강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못 만나보고 너무 빨리 남편에게 정착한 걸 후회했다고.
특히, 육서윤의 아버지가 맹세를 깼을 때 그 감정이 너무 커졌다고 한다.
―{그 이가 바람만 안 피웠어도 크로셀의 부탁 같은 거 절대 안 들어줬을 거야. 설사 크로셀과 내가 천국에 못 가게 된다고 해도, 절대.}
차수진은 육서윤의 친부인 육동훈의 두 번째 부인이 되기로 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하나는, 여자관계를 여기서 끝낼 것.
그러나 육동훈은 맹세를 깼다.
초등학생 육서윤이 아스모데우스의 숙주가 된 직후인 결혼 10년 차 때.
결국 외도를 해버렸다고.
―{그때 난 깨달았어. 성욕이라는 거, 사랑이랑 별개일 수 있구나. 내 알량한 가치관이… 결국 경험부족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구나, 하고.}
차수진이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은 얼굴로 묵묵히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나도 이제는 알아. 그 이가 서윤이한테 씌인 악마 때문에 자꾸 성욕을 충동질 당했었다는 거.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서윤이의 애욕의 화신은 제이 너랑 다르게 만렙도 아니라며? 그럼 참았어야지. 그게 바로 약속約束이라는 거니까.}
아스모데우스가 서윤이에게 새긴 <애욕의 화신> 때문에, 육동훈은 둘째 부인인 차수진의 집에 오면 올수록 성욕이 강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거리를 뒀다고.
그는 진짜로 ‘애인들’을 둠으로써 성욕을 해소했다고 한다. 대상은 연예인 지망생과 여대생들. 형태는 스폰으로.
―{말이 좋아서 감당 못할 성욕이지. 그럼 나나 언니랑 밖에서 만나든가. 결국 핑계야. 새 여자 만나고 싶은 핑계. 세 번째 부인이면 사랑이라고 이해라도 해. 근데 스폰은 아니잖아? 쪽팔려 정말….}
차수진이 하얀 천사의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마음이 안 좋을 때나 긴장될 때 서윤이가 그렇게 하듯 무릎을 안은 자세.
작게 말린 그 몸을 날개가 감싼 채, 날 바라봤다.
―{제이야.}
“네,”
―{아줌마 죽은 날이 사실, 나랑 그 이 혼인신고하려고 한 날이었어.}
“아아.”
―{한남동 언니가 하라고, 하라고 부추겨도 미뤘었는데. 이제 장난질을 끝낼 때가 됐다 생각한 거지.}
“정말 많이 실망하셨었구나….”
―{그러엄. 우리 서윤이만 아니었음 그게 혼인신고서가 아니라 이혼신고서였을 거야. 반드시… 그랬을 거야.}
차수진이 결혼 전, 남편 육동훈에게 건 두 번째 조건은.
혼인 신고를 나중에 한다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에 시집을 가게 된 대신, 연애 기분을 오래 느끼고 싶었다나.
드라마에서는 재벌가에서 첩을 홀대하는 것이 클리셰처럼 굳어져 있었지만, 차수진 모녀의 경우 반대였다고.
―{한남동 언니한테 늘 농담 삼아 그랬었지. 내가 애인할 테니까 언니가 부인하라고. 그럼 그 이도 평생 괜찮지 않겠냐고…. 근데 웬걸? 까고 보니 오잉? 요 새끼도 돈 많은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네? 잘생겨서 그런지 얼굴값까지 하네? 잘났다, 잘났어!}
나는 차수진의 농담에 웃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허무해보이기도 했고, 내 입장도 있었으니까.
당장 서윤이를 좋아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엄마와 그걸 해야 하는 내 처지.
“……저도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줌마가 농담처럼 사위라고 불렀지만, 그건 정말 농담이고. 서윤이랑 넌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잖니. 중혼이나 양다리가범죄도 아닌데, 남 연애까지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
툭툭.
차수진이 부드러운 날개 끝으로 내 배를 두드렸다.
―{아줌마가 말했지? 천국 가면, 오픈 마인드로 살 거라고. 서윤이 인생은 서윤이 꺼야. 난 나만 잘하면 돼. 인정?}
“…감사합니다.”
―{인정! 인정이라고 대답해!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어.}
“응 누나, 인정. 쌉인정.”
―{아하하! 이 짜식, 디게 귀엽네!}
맑은 웃음을 지은 차수진이 커다란 날개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근데 제이야. 크로셀이 그러던데. 불사조의 눈물을 쓰면, 회복되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거’ 라고 하던데. 정말 그러니? 너 진짜 30분 전이랑 비교하면 엄청 쌩쌩해 보여.}
“그런 기분이에요. 재생이라기 보단… 최고 컨디션 상태로 갓 태어나는 그런 느낌? 그래서 부활이라고 하나 봐요.”
―{오호…. …오홍…?!}
그때였다.
강아지상 미인인 차수진의 얼굴이.
맛있는 간식을 발견한 귀여운 댕댕이의 그것처럼 변했다.
―{…제이야! 아줌마, 죽고 나서야 수호천사가 된 거잖아.}
“그렇죠.”
―{그럼, 나도 이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거 맞지?}
다른 사람…?
잠시 고민했다.
문제에 답을 맞추듯 원하는 말을 들려줘야 할까. 아니면 솔직한 생각을 말해야 할까, 하고.
―{흐응, 역시 그렇게는 안 되는구나. 기억도 모습도 너무 예전이랑 똑같애.}
눈치로 내 생각을 읽은 차수진이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답을 내렸다.
―{좋아. …제이야.}
“네.”
―{내가 좀… 완고한 데가 있거든. 그래서 성당도 평생 동안 그렇게 열심히 나가고, 서약도 모두 지키면서 살아왔어. 이 이쁜 몸뚱이 가지고도 남편 놈이랑 의리 끝까지 지켰으니까, 결국 하느님이랑 한 약속도 지킨 셈이지.}
“정말 장하세요. …정말로요.”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신의 이름으로 한 맹세라곤 해도, 감히 세상 누가 있어 스스로와의 약속을 모두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차수진 정도 되니까 죽고 나서도 천사로 발탁 되서 천국에 가게 된 거다.
―{…그치? …나 할 만큼 한 거… 맞지?}
그녀의 큰 눈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사흘이나 대화했으니 모를 리 없다.
나는 언제나 긍정적인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그녀가, 대체 뭘 믿지 못하는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차수진은 여자나 사람이기 이전에, 서윤이의 엄마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다.
“그럼요. 서윤이도 끝까지 지켜주셨잖아요.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분이셨어요. 이제 다 내려놓으셔도 돼요.”
―{…….}
내 말에 뭔가를 느낀 걸까.
서윤맘 차수진의 얼굴에.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보지 못했던.
여자… 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크게 변했음을 알았다.
―{그럼 이젠.}
―{다시 태어나도… 되겠다.}
촤아악.
초보 천사 차수진의 아름다운 백색 날개가 활짝 펴졌다.
―{우리 제이도 도와줄 거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았어! 대신내가 저얼대 제이 섭섭하게 안 해줄게! …그 인간 때문에 억울해서 못 살겠으니까 제이 니가 피해 좀 보겠지만. 그래도 ‘누나’ 믿지?}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 그럼 말이야―}
크로셀을 통해 <환상>의 권능을 보유한 그녀다.
차수진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위해 몇 가지 내가 도와야 할 점들을 들으면서. 그녀가 뭘 하려는지 알았다.
‘자기랑 나한테 동시에 환상을 걸려는 거구나. 그것도, 기억을 지워서.’
[확실하다. 지금이 아니면, 수호천사로 다시 태어난 저 여자가 이미 완성된 자아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천사의 인격은 영구불변인 법이니까.]
‘차수진 부탁은 말한 대로 네가 보조해주는 거지?’
[쎅쓰. 염려 놓아라.]
당부가 모두 끝난 뒤, 차수진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윙크를 했다.
―{그럼 내 예비 신랑! 부탁할게?}
끝을 예감하고 손을 흔들었다.
“누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오올! 이제 어머님이라고 안 부르는데? 이런 센스쟁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햇살처럼 환하게 웃은 차수진이 내 이마에 축복의 키스를 남겼다.
―{부디, 우리 제이가 행복하기를.}
마지막까지도 인간 차수진은 그랬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딸의 안부를 부탁하기보다, 내 기분을 먼저 생각해주는 그녀는.
인간일 적에조차 천사였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어머님.’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육서윤의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아마도 곧 다시 만나게 될 그 순간부터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다시 태어난> 차수진, 개인이 되어 있을 테니까.
―{누나도 금방 따라갈게.}
나는 천사의 날개에 포근히 감싸 안긴 채, 잠이 들었다.
**
E급 실습 던전의 보스룸에 입장한 직후, 육서윤의 눈앞에는그리움이 담긴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그곳은 그녀와 엄마의 집이었다.
태어난 뒤 쭉 14년 간 살았던, 서초동의 한 고급 빌라 팬트하우스.
한참 전에 짐을 빼고 임대를 내놓은, 육서윤이 상속 받은 그 건물이 아니라.
예전에 엄마와 함께 살던 그때 그곳.
“…….”
먹다 남겨 포장된 빵.
거실 테이블 위에 365일 올려져있던 귤 바구니.
두 여자가 쓰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플라스틱 볼 마사기 기구까지.
‘엄마….’
엄마와 서윤이 함께 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두 사람의 집에는 생활의 온기가 한가득 남아있었다.
―띠디디딕
문밖에서부터 전자음이 울렸다.
육서윤이, 설마 하는 마음에 현관으로 갔다.
그녀가 고급 LED등이 자동으로 켜지는 복도를 지나, 차가운 대리석 현관 디딤돌 앞에 섰을 때 그곳에는.
“머야, 뭐야. 우리 딸이 먼저 왔네?”
엄마가 있었다.
어제 환상으로 봤었고.
오늘 새벽꿈에서도 봤었지만.
아무리 봐도 또 보고싶은, 엄마가.
불사조의 눈물 lv.ma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