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6. 제이와 그라비아의 추억(11)
엄마가 있었다.
어제 환상으로 봤었고.
오늘 새벽꿈에서도 봤었지만.
아무리 봐도 또 보고 싶은, 엄마가.
“미이~안. 꾸팡에서 샤브샤브 재료 시켰는데 얘들이 파업한다고 안 보내준 거 있지? 그래서 마트 갔다 왔어.”
“그랬… 어?”
육서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끄러미 엄마를 봤다.
차수진이 외투를 벗어 복도 빌트인 장에 넣어놓으며, 엉덩이로 딸의 힙을 툭 치고 지나갔다.
“뭐해? 왜 질질 짜. 언니가 뭐라고 그랬어. 울면 오던 복도 도망간다고 했어, 안 했어. 당장 대답해,해,햇!”
금방이라도 울듯했던 육서윤의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이 매달렸다.
“언니는 무슨.”
“뭐, 엄마가 틀린 말했어? 지난주에 새로 오신 신부님도 우리보고 자매 같다고 했잖아.”
“그건 립 서비스지.”
“하긴. 마흔 하나에 스무 살 딸이랑 자매는 오바지. 응 인정, 쌉인정~!”
“아하하!”
쌉인정이란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온 건지.
육서윤이 아기 오리처럼 종종종종 엄마 뒤를 쫓아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차수진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엄마… 다….’
오늘의 엄마는, 새삼 낯설었다.
전성기인 10대 말도.
가장 행복했던 20대도.
죽었을 당시인 30대의 모습도 아닌.
‘나이가 많아지신… 엄마.’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딱 그 정도 됐을 만큼. 눈가에 옅은 나잇살이 생긴,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던 것.
‘…지금까지의 꿈이나 환상이랑은… 뭔가 달라.’
딸이 환상 속 엄마에게서 느낀 묘한 위화감을 지우기 위해 애교스럽게 정을 갈구했다.
“마마. 오늘은 샤브샤브야?”
“갑자기 땡기네.”
“서윤인 칼국수 많이.”
“살쪄 이년아.”
“찌면 어때.”
살 좀 찌면 어떤가. 이렇게 엄마랑 둘이서 평생 동안 같이 살 건데.
어릴 때 조곤조곤 얘기했던 것처럼, 평생 죽을 때까지 사이좋게.
“뭐야, 너 오늘 왜 이리 징그러워.”
“이쁜 딸이 왜 징그러? 왜애.”
“빨리 나와! 청경채랑 브로콜리 다듬어야 돼.”
“유니가 도와주께.”
완전 아기 모드가 되어버린 스무 살 딸의 모습에, 팔자 주름이 살짝 잡힌 엄마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오늘은 같이 해보자. 슬슬 너한테 요리도 가르쳐주려고 했었거든.”
“엄마 똥손이자나. 뭔 요리를 가르쳐? 맨날 아줌마가 다 해줬지.”
“…해줬지?”
차수진이 도끼눈을 뜨며 턱으로 육서윤의 예쁜 이마를 찍어버렸다.
잘못을 깨달은 딸이 엄마의 허리를 더 세게 껴안았다.
“아줌마께.서. 다 해.주.셨.다.고요.”
“자알했어~ 라이코스.”
엄마가 자기만큼이나 키가 커져버린 딸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었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이나 되풀이 되어 온 훈육과 칭찬의 레퍼토리.
‘…울면 안 돼. 울면 엄마가 놀려.’
덕분에 그 새 또 울 것 같은 기분이 된 딸이 빠르게 말을 돌려버렸다.
“크흠. 엄마, 라이코스? 그게 모야?”
“응~ 질투 나는 어린 것들은 궁금해서 디져버리면 돼.”
“아 진짜아!”
“야아! 간지럼 피우지 마! 나 칼 들었어? 칼에는 눈이 없다, 너? 이제는 딸이라고 양보 못 해!”
“뭘 양보하려고 한 건데 대체?!”
“그런 게 있어 멍충아!”
“멍충이 낳은 사람이 누군데 멍충아!”
엄마와 딸이 평소 늘 그랬던 것처럼 장난을 치며 저녁을 준비했다.
메뉴는 어쩐 일로 딸이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라, 엄마의 최애인 샤브샤브로.
“다 됐다. 딸이 도와주니 금방 하네.”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가 죽은 뒤로, 무려 7년 만에 함께 하는 만찬이었다.
두 모녀가 따스한 음식을 먹으며 그보다 더 온기가 느껴지는 소중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딸. 아카데미는 다닐 만 해?”
“별로. 자퇴하고 싶어.”
“왜?”
“그냥.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차수진이 피식 웃으며 딸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요요 그짓말쟁이. 오늘 새벽만 해도 김제인지 뭔지 그 자식이 너무 좋다고 난리더니. 하여튼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어.”
“내, 내가 언제에!”
“왜 모른 척해. 엄마가 너한테 코칭도 해줬잖아. 오늘 허가증 받아준 거 고맙다는 핑계로 데이트 약속 잡으라고. 딸, 그새 까먹었어?”
“…….”
육서윤의 눈이 멍해졌다.
‘오늘은 정말… 평소랑 달라.’
꿈속 엄마는 이런 적이 없었다.
저번에 꿈에서 엄마 봤었다고 말을 해도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마치 언제든 꿈에 다시 안 나타날 것처럼 굴었었다.
어제 <트라우마 고스트>에서 환상으로 만났을 때도 비슷했다.
‘근데 오늘은… 왜 이러시지.’
딸은 불안해졌다.
마치 오늘이 ‘정말로’ 마지막일 것만 같아서.
“서윤아, 밥 먹어.”
딸의 심경을 눈치챈 엄마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저를 떴다.
“산 사람은 먹어야 살아. 이제 절대 죽겠다는 생각 안 하기로 제이랑 약속했잖아. 그거 안 잊어버렸지? 엄청 …야, 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 걔랑 너 진심이었다? 엄만 그거 보고 울었어. 엄마가 해주고 싶은 말, 그 애가 대신 해줘서 너무 너무 고마웠거든.”
“…….”
내균열 속에서 했던 김제이와의 약속.
육서윤은 이것을 알고 있다.
꿈속에서 엄마가, 말해줬으니까.
“너 엄마가 약속 안 지키는사람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네.”
“그럼 밥 먹어야지. 먹어야 살잖아.”
육서윤이 다시 수저를 들었다.
식탁 위의 경직된 분위기처럼 살짝 식은 앞 접시 안의 샤브샤브 국물 속에.
“흑… 흐윽…….”
딸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너무, 불안했던 것이다.
“얘 좀 봐, 밥상머리 앞에서.”
하지만 오늘의 엄마는 정말로 달랐다.
어릴 때 늘 그랬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다 큰 딸을 위로해주지 않았던 것.
“아스모데우슨지 뭐시깽인지 고 새끼 진짜…. 애를 얼마나 망가뜨려 놓은 거야? 분무기도 아니고,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이 자동이네. 버릇도 많이 없어졌고…. 그년만 아니었으면 너랑 더 빨리 얘기도 하고 그랬을 텐데. 참 아쉽다.”
“그, 그게… 무, 무슨 소리야?”
“이따 보여 줄테니까 니가 알아서 보고 판단해. 너도 이제 성인이잖아? 엄만 니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어.”
“엄마아!”
육서윤이 결국, 차수진의 차가운 말투를 못 이기고 크게 소리쳤다.
“왜 그래 정말! 어디 가는 사람처럼! …흑! 지, 진짜 나한테 이럴 거야?!”
“이래야지. 어떡할 건데.”
“…머?”
“어떡할 거냐고.”
아주 낯선 얼굴을 한 ‘엄마’ 차수진이.
딸의 마지막 훈육을 시작했다.
“그럼. 이대로 환상 속에서 살아?”
육서윤의 눈에서 투명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끝이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구나.
꿈속에서… 조차.
그런 예감에, 딸은 차마 입술도 떼지 못하고 엄마의 얼굴만 바라봤다.
“서윤아. 이미 죽은 사람 추억만 붙잡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어, 엄마……?”
“딸.”
차수진의 얼굴에 체념의 미소가 떠올랐다.
“엄만… 이미 죽었잖아.”
―화아아아앗
하얀 빛과 함께 그녀의 등 뒤에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육서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까지… 잘 해왔잖니. 니 아빠랑, 한남동 엄마랑. 그리고 제이랑 같이. 잘… 해왔잖아.”
“…….”
“오늘은… 정말 이별할 때가 됐어.”
엄마는 돌아가셨다.
그것도 이미 7년 전에.
아빠 회사 공장에서 찍어낸 호빵 비닐껍질을 밟으시고, 만화…처럼.
“서윤아. 멍청하게 너무 빨리 가버린 엄마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어. 엄마가…….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다시 만화처럼, 이렇게 자신의 앞에 나타나셨다.
꿈에서처럼 희미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니가… 니가, 힘든 걸 아는데……. 보고 있으면서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마치 나만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이.
“엄마! … 엄마아, 흑…… 흐윽!”
딸이 오열했다.
죽고 나서도 자신을 걱정해 천국에 가지 못한 엄마가 가엾고도 고마워서.
너무, 죄송해서.
“아아… 아으……! 흑…!”
모녀가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움과 회한과 아쉬움과, 그간 딸이 겪은 고생에 대한 미안함과 분노가 모두 섞인 서러운 울음이었다.
오랜 세월 쌓인 감정이 지나간 뒤.
먼저 정신을 추스른 이는 엄마였다.
“크흠! …야, 밥 먹자. 엄마 배고파.”
차수진이 샤브샤브에서 청경채를 들어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이승에서 맛보는, 마지막 음식 맛을.
‘…울면 안 돼. 울 시간도 없어.’
딸은 깨달았다.
지금 엄마와 공유하고 있는 이 일상의 순간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그녀가 눈물을 닦고 꽉 매인 목 안에 따스한 육수를 흘려 넣었다.
“아우, 속이 탁 풀리네. 내가 이걸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야, 너 그리고 담배 끊어. 제이 담배 피는 거 싫어해.”
“…정말?”
“말이라고. 걔 첫 여자친구랑 왜 헤어졌는 줄 알아? 담배 냄새때문에 키스를 못 해줘서 차였대. 피우는 넌 모르지? 엄마는 그 기분 알아. 그 인간이랑 뽀뽀할 때마다 얼마나 짜증났는데.”
“…….”
엄마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딸. 제이가 좋으면 사귀든 말든 니 맘대로 하고, 그 자식 포함해서 남자들 다꼴도 보기 싫으면 머리 깎고 중이나 돼. 니 복 니가 걷어차는 거지 뭐.”
“중?”
“그래 이년아.”
“왜 하필, 크흥! …스님이야? 수녀님도 아니고.”
“넌 두상이 이쁘니까 아기 때처럼 대머리가 돼도 귀여울 것 같아서.”
크크. 그럴까.
서윤이의 입에 이제야 미소가 걸렸다.
“봐, 우리 딸 웃으니까 너무 예쁘네. 너 누구 닮았냐.”
“아빠.”
“아하하! 고걸 몰랐네.”
“뻥이야. …나는 엄마 판박이야.”
“그래?”
“……응. 유나 자매님 껌딱지.”
세례명 유나. 즉 유니아스Junias.
차수진도 그제야 웃었다.
“맞아. 우리 유니는 유나 껌딱지.”
두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귤과 빵과 두유를 먹으며 TV를 보다.
커다란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한 뒤.
엄마 방 침대에 같이 누웠다.
“엄마.”
잠이 들기 전, 딸이 말했다.
“사랑해요. 너무 너무…….”
엄마가 날개를 들어 딸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었다.
“나도 우리 딸 많이 사랑해.”
“…얼만큼?”
“하늘만큼 딸만큼.”
“땅이 아니라?”
엄마가 딸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엄마한테 넌, 이 세상 전부니까.”
이 세상 전부.
하느님이 계시는 천국을 뺀, 나머지.
‘아.’
딸은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왜 천국에 가게 됐는지.
‘울 엄만 나 말고 이 땅에 남긴 미련이 하나도 없었구나.’
결국 아빠를 완전히 털어내셨네.
울 엄만 진짜 쿨한 여자야.
육서윤은 ‘천국에서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천사님이랑 예쁜 새 출발하세요’ 라고 엄마의 새 출발을 빌어준 뒤.
땅 끝까지 모두 품은 차수진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하얀 털옷을 입은 예쁜 아기곰}
―{언제나 너를 바라보면서 작은 소망 얘기하아지}
―{너어의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해}
―{어떤 비밀이라도 말할 수 있어}
―{까아만 작은 코에 입을 맞추면}
―{수줍어 얼굴을 붉히는 예쁜 아기곰}
예전에 늘 맞이했던 것처럼.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꿈나라를 향한.
깊은 밤의 이별이었다.
**
E급 실습 던전 보스방.
여섯 명의 헌터들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두 명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교수님. 괜찮겠죠?”
“바이탈은 양호해. 오히려 제이나 서윤 군이나 상태가 한결 나아졌어. 아주 편안한 환상을 보고 있는 모양이야.”
라라 마르티넥이 가방 안으로 응급키트를 집어넣으며 흥미롭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즉, 이미 깨어난 여섯 명 또한 육서윤과 마찬가지로 아주 기분 좋은 환상을 꾸었다는 뜻이다.
단 한 명만 빼고.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테스트 해보는 건데. 아쉽네.”
김제이에게 혹시나 변이 생길까 걱정한 김하리는.
오늘 겪은 환상이 작년과 재작년에 경험한 환상, 그리고 마력파장과 뭔가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SSS급 헌터들과 비견되는 97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크로셀의 환상 권능을 강제로 깨부숴버린 것.
‘괜히 좋은 경험만 날려버렸네. 마력파장이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었는데.’
김하리가 아쉬운 마음에 괜히 머리만 쓸어 넘겼다. 그러다 호기심이 생겨 절친에게 물어봤다.
“아이린은 무슨 환상 꿨어?”
“나는 부모님 꿈.”
“저두요.”
“엘리사도? 좋았겠다.”
말이야 ‘좋았겠다’지만, 전혀 그런 부분이 부러운 건 아니었다.
김하리는 김제이와 마찬가지로 부모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균열 고아였으니, 낯선 부모가 뜬금없이 꿈에 나왔으면 오히려 악몽이었을지도 몰랐다.
“아이웨이는?”
“나, 나? 나도 뭐, 부모님 꿈! …교수님은 어떤 꿈꾸셨어요?”
크게 당황하며 손을 젓는 아이웨이.
그가 라라 교수로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난 친구들이랑 아가 꿈.”
“친구 분들이랑… 자제 분들 꿈이요?”
라라가 잠든 김제이의 머리를 정말 몹시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모두 다 같이 모여서, 오랜만에 찾은 타임캡슐을 열고… 파티를 하는꿈.”
그 모습은 심히 애틋해보였다.
제이와 라라의 관계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세 명이 크게 놀랄 정도로.
‘이 모지리… 대체 언제…. 설마 최근 들어 더 강해진 색기色氣 때문에?’
‘김제이 개새꺄! 너 백마보다 동양인이 취향이라며! 이 빵쯔자식아!’
‘대박, 대박! 엘리사 깝놀이야! 우리 제이 오빠… 아이린 언니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면, 교수님이 오빠를 일방적으로 좋아하시는 건가?’